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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58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우선시 하였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이 하나님나라를 세상에 정착시키고, 새로운 질서로써 시민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동력인 기도문이다. 새로운 세상을 가져 오려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운동력을 살펴보면 ‘우리 승리 하리’라는 짧은 노랫말과, 단순한 리듬과 곡조로 운동력을 극대화 시킨다. 다니엘은 세이레를 기도하면서, 기도의 능력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데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어짐을 잘 이해한 것 같다. 다니엘은 자신의 기도 행위에 딴죽을 건 정적들에게, 보란 듯이 구체적으로 창문을 열고 기도함으로써 일인 시위를 시작하였다.다니엘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다. 그의 기도 이야기 문장에 나타난 대로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온 세상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리고 있을 때에, 창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온성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예전과 같이, 흐트러짐이 없이, 천천히, 큰소리로, 또박또박,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오늘의 어느 종교단체에서 확성기로 드리는 기도와 같은 큰 소리로, 모든 시민이 인지되도록 ‘하나님나라가 임하시오며’를 기도하였다. 정적들은 다니엘의 성격이나 의중을 잘 파악하였기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체포하였다. 다니엘의 기도운동은 힘이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칭할 때에는 ‘힘이 있으신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기 시민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세우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리라.오늘 어느 교회들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알아차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린 계시의 말씀 인 듯, ‘세이레 다니엘 기도운동’을 일으키는데, 참가 교회들이 일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어느 교회에서는 ‘통일 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그 때마다 거두어들인 통일 기금이 상당하게 비축되고 있음을 물론이고, 함께 호흡을 맞추는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무슨 운동력이 기지개를 편 듯하다. 이 뿐만은 아닌 것 같아서 이야기를 숨길 수 없는 것이, 한 지상에서는, 목회자들이 40일 금식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한 그룹은 이미 그 기도 기간을 마쳤는데,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주중에 하루 이상의 금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도 운동은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가중되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밀려오는 기쁨을 이겨낼 수 없다. 한주에 3일을 금식하고, 4일은 약간의 식사를 하면서, 14주간을 기도 한다니, 무려 100일간 지속되는 기도이기에 동력이 크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리란 믿음이 든다.이참에,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면, 최소한 몇 개의 기둥으로 세워야 하나를 논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사람이 적어도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적어도 세 사람이 같은 마음과 생각을 일관성 있게 개진할 때에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이다. 우리 교계가 무너지고 더럽혀진 제단을 다시 쌓고,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텐트를 치려면, 최소한 몇 개의 기둥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와 그의’로 새로운 질서를 온 세상에 세워갈 때에, 최초로 사도들은 세 개의 간략한 기둥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먼저 그들의 입으로, 그들이 본 바요 들은 바요 아는 바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전하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될 것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전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처음 보게 된 이들은, 그들의 입으로 선포되는 복음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들이 있었는데, 복음을 선포하는 이마다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확연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었는데,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소위 하나님나라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사도들이 세 번째로 갖춘 기둥은 ‘성령의 선물들’이었다.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 바울도 그렇지만 베드로도 그랬다. 그들은 기라성 같은 인물이 되어 있었으나, 온갖 악취에도 아랑곳 하질 아니하고, 변방의 무두장이 집에서 거처하면서 전하는가 하면, 항시 그들의 복음 선포에는 ‘성령의 나타남’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사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기본으로 갖춰진 기둥들이, 내게도 갖춰져 있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이고, 만일 놓친 것들이 있다면 돌이켜 재무장해야 할 것이요, 이 세 기둥이 생소한 것들이라면, 아버지 집으로 돌이킨 탕자처럼 새로운 사귐을 시작해야 하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9-29
  • 정승준 장로
    장로교육원·장로회와 남선교회 증경회장 등 여러 단체참석 친교 나눠 정승준 장로(예장통합 신양교회 원로, 80세)는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고, 각종단체의 회의 참석과 친교의 만남으로 분주하다며 “나는 은퇴하였어도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라고 한다. 건강의 비결은 걷기와 맨손체조를 하는 것이 전부이며, 근심걱정으로 고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건강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서울시내 여러 모임을 위해 나들이를 하고 있다.정 장로는 1984년 신양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고, 그동안 많은 일을 해온 경력과 역사가 말해 주듯이 여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밖으로의 외출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교단에서는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을 비롯하여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 평북노회 노회장 등 주요 단체장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전국장로회 총무 시절 전권을 위임받아 한국장로교육원 설립을 주도하여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고, 현재에도 행정부장을 맡고 있다.그리고 안구기증협회 부회장과 이사장을 10여년씩 맡았었고, 농아선교위원회 이사장을 수십 년간 맡아 이 단체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정 장로의 이러한 경력은 지금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월 또는 수시로 모임과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통합측의 이북 4개 노회 노회장단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도 전국남선교회 증경회장단, 전국장로회연합회 증경회장단 총무를 맡고 있다.정 장로는 시무장로 시절 교단총회 총대로 29년간 참석했으며, 총회 평신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형태 목사가 총회장이었던 제69회 총회 때에는 ‘이북노회 폐지안건’이 헌의 된 일이 있다. 이 때에 정 장로는 경상도 출신이지만 논리적인 반론을 제기하여 그 안을 폐기시킴으로 유명세를 얻게 되기도 했다. 또한 정 장로는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한영제 장로가 총회장으로 취임하는 일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한영제 장로를 앞세워 교단의 여러 단체의 경력을 거쳐 장로총회장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의 기간 동안 인격적인 인물발굴의 노력 결과는 정 장로의 공헌이 컸다고 한다.정 장로는 행정력과 기획력이 뛰어나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 사무총장과 통합측 교단의 전국장로회연합회 총무를 여러 차례 역임했고, 지금도 원로로서 단체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고 조언도 한다.정 장로는 그동안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사역해오면서 많은 인간관계를 가져왔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지도자를 한영제 장로, 계준혁 장로, 김건철 장로, 정연택 장로를 존경한다면서 “이 분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일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이 된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가 정 장로를 앞세워 함께 일하기를 원했던 인물들이다. 정 장로의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노력과 신앙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은 결과로 보인다.한편 정 장로는 삼마준바이오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도 가정과 교회에 성실한 신앙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길을 강건하게 인도해 주셨다고 말한다.정 장로는 한국교회 연합사역의 올바른 길에 대해 “오직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가 하나 되어야 하고, 교회와 교단이 하나가 돼야 나라도 통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라며, 지금은 연합단체들이 같은 깃발아래 ‘한 목소리’를 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말한다. 기도하고 시작했던 이 나라가 어렵게 된 것도 한국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한다.정 장로는 공명복 권사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장남은 정 장로의 사업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고, 차남은 독일에서 음악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출가한 자녀들도 사회활동에 잘 적응하면서 신앙인으로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한다고 했다. 정 장로가 마음에 새겨두고 암송하는 성구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늘 즐겨 부르는 찬송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이며, 매일 아침마다 묵상하고 기도하는 생활에서 항상 위로와 평안을 가진다고 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9-2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4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24). 여기서의 부자는 물욕에 가득찬 부자를 말합니다. 곧 맘몬의 노예가 된 자들을 말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축복이지만, 맘몬의 노예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방해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이 주신 물질을 잘 다스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8-10).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는 창작입니다. 새벽마다 내리는 이슬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십니다. 그 영감으로 아침을 열고 묵상을 합니다. 그러면 좋은 글감이 무화과 나무 열매처럼 나의 뇌리에 맺힙니다. 나의 어머니 얘기를 하겠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이십 대에 꿈속에서 웬 노인이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 본 것을 계기로 믿음을 가진 후, 무려 27년을 새벽 기도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은 전주 한옥 마을의 ‘경기전’ 뒤쪽의 마당이 넓은 집이었습니다. 88평의 대지에 40평의 예쁜 한옥이 있던 우리집 마당에는 수많은 과실수와 화초들이 심겨져 있었고, 겨울에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이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연상케 할 만큼 雪國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툇마루에서 마당까지 발자국을 내 놓고 새벽 기도를 다녀오는 어머니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기다리면서 나는 천지 가득한 눈발처럼 사랑과 온정이 가득한 고향 풍경을 상상하곤 하였습니다. 나에게 어머니는 세상을 헤쳐 갈 수 있는 원기였고, 주춧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한때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에는 매일 한 시간씩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간병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효심 덕분인지 어머니는 내가 성년이 되어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퍼 부어 주었습니다. 내가 출근할 때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아들의 안녕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내가 연로하신 부모님의 응급 상황에 대비하여 승용차를 구입하였을 때에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몸소 세차를 해 주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서 열성을 다하여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새벽 기도와 사랑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온정과 화평이 가득한 그 나라를 상상하며 나는 주님 앞에서 예쁜 모습을 취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찬양대에서 노래할 때면 주앞에서 예쁜 짓을 통해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쁜 표정도 지었고, 노래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일상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라면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 하는 기도와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주님은 어떻게 운용하시겠습니까. 주님이라면 이 시간에 수필을 쓰실까요, 평론을 쓰실까요. 그리하여 수필을 쓰라 하면 수필을 쓰고, 평론을 쓰라 하면 평론을 썼습니다. ‘수필을 쓴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까요?’ 등으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신 기도처럼, 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느끼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죄문제로 인한 고뇌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성령이 함께 동행하심을 느끼는 아이들이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주님 앞에서 신실해지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님 앞에서 행동하는 나는 시인들 앞에서 몸시 공연도 멋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김동규 노래의「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멋진 표정으로 부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 시늉도 해 봅니다. 젊은 시절 배운 무용 실력을 발휘합니다. 무용이 끝난 후에는 남저음의 목소리로 자작시를 읊어 봅니다. “도둑이야 소리치면 바보가 되는 도시/ 걸망 지고 오솔길로 차마 들지도 못해/ 어설픈 미망의 순수 말뚝에다 묶고 있다.// 산과 산이 이어진 우뚝한 등성이/ 햇빛은 그런 곳에 내려앉아 노닥거리고/ 단단한 고백의 숲에 머리 풀고 살고 싶다.// 혈색 좋은 아이의 부라리는 저 눈망울/ 모든 것이 가능한 만물상을 띄워 놓고/ 후미진 그늘을 오르며 산의 흉내 내고 있다.”( 졸시, 「자연」전문)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9-29
  • 목회는 쉬운 것이다·41
    한국 교육의 시작은 기독교 교육이었습니다. 목적의식은 단 하나 사람의 인격이나 인성이 우선이 아니라 영성이 우선이었습니다.우리가 믿는 예수님처럼이란 먼저 영성이 될 때 지성이 하나님의 창조주의적 상황에서의 교육이었습니다.지금은 뒤바뀌어서 지성 위에 하나의 메뉴로 영성을 덧붙였습니다. 거꾸로 된 교육 방법이 거짓으로 위장된 위선이 교육의 방법이었습니다.오늘 일반적 학문의 명칭 위에 기독교를 붙인 것이 기독교 학문이 되었습니다. 예로 기독교 교육, 기독교 상담, 기독교 행정, 기독교 철학, 기독교 미술, 기독교 복지 이외에도 기독교만 붙였을 뿐 학문은 모두 일반학자들이 만들어놓은 교육의 틀입니다.기독교적 목회가 목회 상담학, 목회 성장학, 목회 설교학, 목회 예배학, 목회 리더십, 목회 방법론 모두가 일반학문의 틀을 배우고 나온 사람들이 절대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논리나 조직이나 모든 체계가 세상적 학문에 맞게 짜여야 합니다. 어떻게 무소 부재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한 모든 삶의 방법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이론이 순간적으로 불규칙적으로 성령의 계시 하심을 즉 말씀하심의 영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그래서 요한계시록이 나타난 일곱 교회의 첫 번째 조건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성령의 말씀을 듣는다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진 리를 알면 진리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로움이 곧 거짓이 아닌 나의 한계를 아는 매우 자연스러움입니다. 절대로 잘하겠다는 결심이 아니기에 하지 못함에 대한 솔직함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외치나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유로움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가 재미없다고 생각합니다.우리는 신명기 6장 5절부터 나온 말씀을 세마라고 하여 그 본문대로 가르침을 받았기에 달달 외우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2장에 나타난 6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즉, 여호수아의 세대가 다 죽은 후 후대들이 어떠했는가?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테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 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지금도 세마를 중심으로 해 훈련된 사람들은 유대교로 남아 예수님의 초림도 믿지 않는 집단적 사람들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고정관념에 묶인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을 해소하셨는데, 저곳도 이곳도 어떤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심이 곧 이때라는 사실을 말했는데도 사람들은 깊은 잠에 취해 거짓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현장으로 너무 쉽고 단순한 만남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세마에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여호수아는 무엇을 했는가? 단 자기 주변도 알지 못하는 한 길만 달려갔는가? 후 세대에게 무슨 영향력을 주었는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순된 삶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말입니다.지금도 우리는 칭찬을 얻기 원합니다. 성과위주로 자기주의적 형식에 매여 있다는 증거로는 과장된 소위 현대말로 ‘뻥’을 칩니다.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아무 감각 없으신 사실을 사람들이 부풀려 오르게 하는 습관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결국,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강단에서나 사람들에게나 그보다 불신자들에게 토해내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단적 표현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알면 ‘뻥’ 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짐을 지고 분에 맞지 않는 내가 만들어놓은 그럴듯한 집에서 살면서 나는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도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성경을 주판알 튕기듯 그리고 요절을 거미줄 뽑아내듯 사람들이 천재라고 할 정도로 짝을 잘 맞춘다고 해도 하나님은 거짓 행위로 보신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9-29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8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18. 탁월한 지성적 개혁자 존 위클리프로마 가톨릭교의 배도와 타락, 그리고 교권에 의한 탄압으로 종교적 암흑이 지배하던 시대에 일반인들이 성경을 자유롭게 보기는 거의 불가능 하였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신변의 온갖 위협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감추어지고 가려진 진리의 보화를 찾고자 갈망하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보냄을 받은 사자(使者)와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발견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오류와 미신의 사슬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참된 자유를 얻으라고 호소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14세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영국의 존 위클리프이다. 개혁자로서 위클리프의 능력과 정의감위클리프는 이미 대학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열성 있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다양한 방면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철학, 교회법, 국가법 등에 정통하였고, 사변철학에 능하여 후일에 조직적으로 논리적으로 오류에 대항하여 논박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인물로 성장하였다. 또한 위클리프는 대학에 있는 동안 그의 전공 과목과는 별개로 성경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교리들이 성경과 위배될 뿐만 아니라 너무나 크게 빗나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의 스콜라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던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값없는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였다.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가톨릭교의 그릇된 많은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실망하였고, 계속적인 성경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진리들을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개혁의 포문을 열다위클리프는 처음에 이러한 개혁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가톨릭교를 떠날 마음도 없었고 고의적으로 교회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동기도 없었다. 단지 현재 교회의 가르침들 중에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오류들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서 신도들이 성경의 진리에 입각한 바른 신앙을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들은 좀처럼 기존의 그릇된 오류들을 시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개혁자들을 무시하고 핍박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투쟁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행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죄인들이 사는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고정된 법칙인지도 모른다. 위클리프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유전을 받아들이며 성경의 진리를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면서 백성들에게 성경을 돌려주고 교회 안에서 성경의 권위를 다시 확립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신속히 증대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의 성실하고 깨끗한 생활, 어떤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는 그의 담대한 용기가 그의 사역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 동안 로마 가톨릭교의 비리와 모순을 보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일어났다. 그는 당시에 영국의 왕이 교황에게 바치는 조공에 대하여 부당함을 지적하고 철폐할 것을 주장하여 교황의 최상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 그 당시 악폐와 악습으로 유행하던, 탁발승들이 구걸하면서 무위도식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국민들의 재정에 손실을 초래하고, 젊은 청년들이 노동을 경시하게 만들고 부도덕하고 게으른 삶을 조장하는 그 부조리한 제도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교황이 승려들에게 부여한, 죄를 용서하는 권세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이 제도 때문에 승려들은 우매한 신도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대가로 선물과 금품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 그들은 치부(致富)하면서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부조리한 제도에 대하여 위클리프는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악의 뿌리를 공격하였다.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한 업적-성경 번역위클리프의 이러한 개혁의 행보는 마침내 교황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는 교황이 제거하고자 하는 표적이 되었다. 교황은 이단의 주동자인 위클리프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내리도록 영국에 교서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조치 때문에 사실상 위클리프는 화형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었다. 그를 죽이려 했던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갑자기 죽었다. 그 후 교권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위클리프의 개혁 사업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개혁을 넘어서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한 격한 활동의 결과로 위클리프는 신속히 노쇠하였고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사제들은 매우 기뻐하며 큰 용기를 가지고 위클리프를 찾아가서 죽기 전에 그 동안의 모든 죄과를 뉘우치고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촉구하였다. 위클리프는 즉시 침상에서 일어나 정색을 하면서 그들을 향하여 또렷하고 큰 음성으로 경고하였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탁발승들의 악행을 공개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질책을 받은 사제들은 망신을 당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위클리프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이야말로 ‘국민에 국민의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일에 링컨이 이 말을 인용하였다. 여러 가지 시련과 난관이 있었지만 마침내 영어 성경을 완성하여 국민들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제 교황과 가톨릭교는 위클리프 보다 더 두렵고 더 큰 힘을 발휘할,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개혁자를 만나게 되었다. 위클리프야말로 교황권과의 전투에서 위대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위클리프의 만년(晩年)과 그의 승리그 후 위클리프는 그를 제거하려는 교권에 의해서 몇 차례 법정에 소환되었으나, 그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생명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를 담대하게 주장하였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오류를 강력하게 반박하며 공격하였다. 그는 참으로 해박한 지식과 명석한 사고력을 가지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진리를 옹호하고 주장한 위대한 개혁자였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그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는 원수의 손에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루터워드 교구의 자기 교회에서 성찬식을 집례하려던 중 중풍으로 쓰러져 얼마 후 사망하였다. 결국 가톨릭교의 거대한 권세가 한 사람의 개혁자 위클리프를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위클리프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의 증오심은 4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났다. 콘스탄스 공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헤쳐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그 재를 근처의 시냇물에 던져버렸다. 그 재는 시냇물을 따라 강으로 흘러들어 영국 해협을 지나 대양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위클리프의 영향력은 영국을 넘어 보헤미야의 얀 후스(John Huss)를 감동시켰고, 보헤미야에서 또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위클리프가 번역해 놓은 영어 성경은 성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게 하였고, 그러한 분위기는 장차 나타나게 될 위대한 종교개혁의 전주곡이 되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9-22
  • 평화 통일은 화해
    우리는 1950년 6.25전쟁으로 한 민족이 둘로 갈라진 남북관계를 정상화 하여 한반도 통일시대를 개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 동질성 회복과 실질적 협력으로 여기에 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정부는 인도적 지원이나 협력에 민간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남과 북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민생협력을 추진하고 사업의 범위와 그 폭을 넓히고 사회문화 교류 및 인도적인 사업을 확대하고, 민간 교류의 참여도를 넓혀 남북관계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이산가족의 만남을 숙원해야 한다. 남과 북은 한 조상 때부터 살던 한 나라의 조국이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모여 살아 온 한 자손의 배달민족이기에 실로 하나의 민족으로 그 문화와 삶의 역사가 같기에 철부지한 북한의 힘의 논리에 대응할 수 있는 태도에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동질성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해방 이후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열강의 손으로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은 한 민족의 갈등의 사실을 남기게 됨에 이제는 더 이상 이를 연장해서는 아니된다. 그동안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회복하기 위해서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 민족의 공동의 통일의지를 확인했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지금의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기회를 놓치지 말고 통일의 의지와 평화를 정말로 기대하고 노력함을 나타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하나인 민족의 회복’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72년간의 비정상적인 강점기, 분단장벽, 계급장벽, 빈부격차, 상대적 박탈감, 정치적 갈등 등 부당한 구조적 장벽 에 시달려 왔음을 경험하고 있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생명, 평화, 공의의 가치를 조직적으로 훼손하는 벽들을 허무는 복음적 선교에 나서서 갈등의 구조를 허무는 일에 앞장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한국교회와 그 성육신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갖추어져야 함을 깨닫게 한다. 성육신 신앙은 사랑의 내림을 알게 한다. 만물의 모든 생명은 숨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 아래로 내린 생명은 숨겨져 있다. 보이는 것을 허물고 아래로 내려가 그 생명을 찾아 아래로 내려 흘러 생명을 일어나게 한다. 그러나 이 생명은 보이지 않게 쉬지 않아도 한 생명을 키우는데 흐르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생명은 하늘이 드러내고 보여 준다. 위로부터 호흡하게 하고 위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은혜가 되게 하신다. 내리는 은혜는 생명을 키우고 깨끗하게 하고 만물을 새롭고 신선하게 한다. 넘치면 흐른다. 그리하여 위로부터 내려 주심은 은혜가 된다. 마냥 낮은 곳을 찾아 넘치게 하고 그리고 넘쳐흘러 흘러 아래로 아래로 스스로 흐른다. ‘내림’은 사랑으로 부모의 사랑을 알게 하고 하늘의 은혜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랑이나 감사는 은혜의 내림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래로 부터 더욱 충만하여 흐르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한국교회의’의 믿음이 되기를 두 손 모은다.이제 한국교회는 이 땅위에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그동안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인권, 사회정의, 민주화를 위해 기도해 왔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열시키고 노예로 만든 악의 근본이 조국과 민족의 분단에 있음을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며 이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회개하지 않고는 통일은 오지 않는다. 민족의 평화 통일은 국민 모두의 회개와 화해하는 도리밖에 없다. 화해는 남과 북이 그대로를 인정하고 이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희망도 하나였습니다”(엡4:3-4) 이 믿음의 가능만이 평화 통일의 지름길이다.“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 뜨리고 창을 꺽고 방패를 불사르신다”(시46:9).“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 하셨다. 네 칼을 칼 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26:52).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9-21
  • 90. 제81회 총회장 김준규(金俊圭) 목사
    충북 청주 출신김준규(金俊圭, 1936. 5. 5~) 목사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청주는 충북의 서부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도청 소재지이며,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옛부터 영남과 호남 선비들이 한양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한반도의 중원(中原) 역할을 감당해 온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가 태어난 1930년대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로 세계적으로도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인지라 교육이나 생업이 열악한 처지여서 앞날을 예견할 수 없고,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겐 정말 희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인지라 준규 소년 역시 부모님 밑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고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불운한 시대의 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준규 소년이 태어나 성장한 청원군 지역에도 일찌기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당도하였다. 주후 1904(甲辰年) 합동공의회 시절(회장 王吉志 선교사)에 이곳 청주지역에 벌써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보면, “淸州邑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監理派 宣敎師 徐元甫가 當地에 來하야 傳道함으로 千行均과 女人 金나오미가 밋엇고 至是하야 長老派 宣敎師 閔老雅와 長老 金興京이 當地에 來하야 主의 福音을 協力傳道한 結果로 有望한 靑年中 金源培 方興根 李英均 金在晧 李範後 等이 歸主信敎後로 本邑 南門內에 禮拜堂을 設置하니 敎會가 成立되야 漱次興旺하니라”고 했고, 이 교회가 얼마 안되어 “淸州邑敎會가 漸漱發展되야 南女信徒가 五十餘人에 達하고 金源培 臨終時 遺言과 寄附金百圓이 禮拜堂 建築의 動機가 되야 合心出損함으로 同地 舊韓國淸州營將의 官舍基地를 得하야 廣大한 禮拜堂을 奉獻케 되니 該基地란 昔日 大院君 李昰應이 羅馬敎徒를 虐殺時 無事의 寶血을 流케하던 處所니라, 敎育機關으로 男女學校도 設立하니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청주지역의 선교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 上 1928, 기독교창문사 p.110, 140). 총회신학교 졸업 후 문학석사 받아청주중앙교회 부임 후 은퇴하기까지 시무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임직CTS TV 이사장 역임“목사의 불신결혼 주례 금지” 결의이어서 1907년에 이르러는 당시 청주군 오창면 건지리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淸州郡梧食面 乾地山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勸書 金聖晧와 吳天甫 妻의 傳道로 敎會가 成立하다”(위의 같은 책 p.150~151 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청주에서 유소년 시절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은 기독교에 입신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알게 된 것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청소년기를 지나며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에서 문학사와 문학석사(M.A) 학위를 받고서 총신대학교 본과(현 총신대신학대학원 전신)로 진학,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밑에서 정통보수신학을 전수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 그를 잘 아는 문필가는 그를 가르켜 시인이요 목회자요 설교가로 전형적인 조선선비형이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강단에서도 메모는 가지고 올라갔지만 깔끔하게 복고설교를 잘 했다고 한다.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엔 고향 청주에 내려와 청주시 주변에 있는 농촌교회를 맡아 사역하던 중 지금의 청주중앙교회의 부름을 받고 목회하기 시작한 날이 1967년 6월 11일 신록이 짙어가는 초여름 본격적인 목회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청주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퇴임하기까지 30년이 넘는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부임할 당시 청주 중앙교회는 중형교회로 발돋움하기 직전이었다. 70년대에 들어 새마을운동과 산업화 바람으로 인구가 청주시내로 계속 유입되자 교회도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었다. 부임 이듬해 1968년 4월 23일 위임을 받은 후 그 해 11월 7일 처음으로 신관우 황경우 두 장로 장립과 편봉달 이범철 한정임 민병구 집사 안수식을 필두로 교회의 기초가 다져지기 시작하였고, 1977년 7월 2일 김준규 목사 근속 10주년 기념 및 박창근 장로 근속 20주년, 박용석 장로 근속 13주년 및 최성룡 최영우 조의순 집사 안수식이 있었으며, 교회가 대외적인 사역과 해외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가 성장함으로 공간이 비좁아 예배당 신축부지로 청주시 사창동 302번지에 919평을 매입, 이듬해 8월 16일 새예배당 신축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980년 4월 30일 신축예배를 드렸다. 1983년 7월 9일 새성전 입당과 성전봉헌기념임직식을 거행했는데, 조의순 집사 장로장립과 동시에 이봉규 박성길 이영규 김창운 최병락 김형관 손대현 집사 장립식과, 김정순 민광기 권사 취임과, 오학림 국영순 명예권사 추대식을 거행함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점차로 갖추어 가게 되었다. 1987년 7월 13일 비하동 515-16번지의 대지 3731평을 다시 매입, 오늘의 대성전의 꿈을 이루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10월 10일 온교회가 은혜 가운데 성전기공 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청주지역 복음화 중앙센터의 꿈을 꾸게 되었고, 노회적으로 지도적인 교회로 우뚝서게 되었다. 그간 담임목사인 김준규 목사는 2005년 7월 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대외적으로 총회인준 신학교인 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봉사하며 교단 인재양성에 정성을 기울였다. 김 목사는 꾸준히 자신을 쇄신하며 실력향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열매로 인도 바라트대학교에서 문학박사(L.D) 학위를 취득해 자기 개발에 힘을 쓰기도 했다. 그를 잘 아는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성품을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하고 말없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지도자형이라 했다. 총회장 시절엔 기독교 언론기관인 CTS-TV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그의 개인적인 취미생활 중 수석(壽石)과 분재(盆栽)에도 아마추어를 넘어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식견과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수중에 지니고 있는 작품 중에는 매우 뛰어난 분재와 수석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이다(2016. 6. 3. 한국교회신문 발행인 여용덕 박사 증언). 김 목사는 남에게 신소리하지 아니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전형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지도자이다. 그래서인지 주께서도 그를 어여삐 보셨는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하셨다. 1996년 9월 17일부터 22일까지 본인이 시무하고 있는 청주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예장 제8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이다.그가 재임했던 제81회 총회 주요결의안을 요약해 보면, ① TV 주일예배 방송을 금지키로 하다. ② 미주대회 및 노회와 법적 행정적 관계를 독립키로 하다. ③ 류광수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관련된 자를 각 노회별로 시벌키로 하다. ④ 개혁합신측과 교직자 연합집회를 허용하기로 하고 신학교 교수 교류도 허용하기로 가결하다. ⑤ 총회주일은 1월 셋째 주일로 지키기로 하다. ⑥ 목사가 불신자 결혼 주례를 할 수 없다(예배모범 12장 2항). ⑦ 지방신학교 이사장과 교장을 겸직할 수 없다.김준규 목사와 사모님의 슬하엔 2남1녀가 있으며, 은퇴 후 청주에서 교단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9-21
  • 성육신한 예수교회-57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문을 보면, 발신자가 바울과 그의 동역 자인 실루아노와 디모데이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그 이 후에도 문제들이 발생하면 즉시 달려가서 ‘하나님의 복음’으로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이 세분의 열정과 마음의 소중한 것들이 이 서신들에 잘 배어있다. 우리 교역자들이 다시금 시간을 내어서 이 서신들과 함께, 바울의 서신들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왠지 오늘날 우리 교회의 해결점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데살로니가에서 이 세분이 복음을 전하면서 공공연하게 나타내는 사역의 요소들 중에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이 세분 중에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이 교회는 손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잘 훈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세분이 복음을 전할 때에, 기본에 있어서 의심을 야기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청중들이 저들의 복음을 들을 때마다 아주 커다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담아 이뤄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의 복음’이 되었기 때문이다.셋째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십자가에서 우리 죄악을 대신하여 충분한 값을 치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나타난 것이었다. 저들은 단순하게 립싱크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복음의 선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내재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위되는 시간과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저들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 성령께서 저들의 입에서도 나타나고 손에서도 나타났으며, 특히 저들의 본보임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넷째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자기주장들을 알뜰히 내려놓았다.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하루하루 먹고 입고 잠자는 적은 비용들 까지도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부담하였다. 이 복음 전도자들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나라와 그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오직 영혼 구원’에만 두었다. 한 두 사람만 본을 보인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모두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항시 바울에게서 거론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본을 보임 같이 그들도 역시 꼭 같은 본을 보였던 것이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모두 그리스도께 담보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나는 문제들은 소소한 것 까지도 발견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오늘과 같이 색을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색에 빠져있던 이들도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은, 복음 전도자가 권세가 있었고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르는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 안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바울 이후에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복음전도자들의 그림자나 옷자락만 덥혀도 병인들이 회복되는, 권세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다는 보고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사사로이 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는 온 힘과 서비스가 동원된 것이었다. 그가 로마로 보내는 편지도 역시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도 달려가서 거룩한 성과를 얻으려했던 것이다. 바울은 적어도 디모데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불일 듯 일어나게 하였듯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망토가 입혀지고,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안수가 있었듯이, 로마교회에도 역시 성령의 은사를(Impartation of the Holy Spirit) 나누어 주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었다.‘하나님의 복음’에는 그가 지식인이든 무식자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을 하지 않고, 출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단지 예수를 믿으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담지 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라는 허물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 짓자’고 하는 무리나, ‘율법을 폐기하는 자’라는 오해와 반대를 해소하고, ‘하나님나라와 그 의’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하는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이 폐기처분 되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9-21
  • 박종술 장로
    아침운동으로 하루 시작, 평신도지도자협회 사무실 출근 동료와 친구들 만나 박종술 장로(80세, 예장통합 은광교회 원로)는 매일 아침 일찍 근처 공원을 걸으며 산책으로 시작하여 건강을 다지고, 고양시 탄현에서 제법 먼 거리지만 서울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907호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사무실에 출근한다. 이 사무실에서 교계의 여러 인사들과 동료 친구들을 만나 친교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를 사랑하고 동료를 만나는 것은 지난날 박 장로가 동 협회 총무(사무총장)를 16년간 맡아 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관심이 많고 현재 임원진을 도와 조언과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박 장로는 1982년 광주제일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고, 한 때 광주에서 ‘복음서원’이란 기독교서점을 운영해 왔다. 이후 서울에 와서는 불광동 소재 ‘은광교회’에서 30여 년간 봉직해 오면서 본격적인 연합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 은광교회에서는 남선교회 회장을 비롯하여 제직회 여러 부서를 맡아 일했다.박 장로의 행정력과 뛰어난 필체솜씨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도 16년간 이런 저런 사무행정을 도와 일했다. 특히 '한기총신문'을 창간하여 13호까지 발행하는데 힘을 기우렸다.항상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의 박 장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친화력이 있어 친교를 나누는 지도자들이 많은 것도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박 장로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80여명의 남선교회 찬양대원이 매주 연습을 하고 대원들은 이 모임에 매료되어 주일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사역에 헌신하고 있다고 한다. 예장통합교단 내에서도 '익투스찬양단'을 창단멤버로서 매주 화요일 연습을 하고 있으며, 박 장로는 20년간 연습에 개근을 하여 근속표창도 받을 만큼 열정이 대단하다. “사실은 열정도 중요하지만 매주 빠짐없이 연습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라며 바리톤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한기총 사무총장을 맡았던 정연택 장로를 비롯하여 자주 만나는 김사철 장로, 유경선 장로를 꼽고 있다. “저는 정연택 장로님은 한기총을 위해서도, 평신도들의 위상을 위해서도 열정을 다하신 분이었고, 아쉬운 것은 그분이 살아 있었다면 작금의 한기총 사태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박 장로가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전국남선교회연합회 임원으로 50여 년간 일했고 장로회연합회 30여 년간 꾸준하게 근속한 것이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 거의 생애의 모두를 바쳐 일한 것이다.박 장로는 연합사역에 헌신하면서 “매우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반면에 욕심이 지나쳐서 명예와 교권에 심각하게 치우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라며 한국교회는 먼저 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평신도 운동도 "단체는 많지만 제대로 국가사회와 교회에 남길 만한 목표가 없이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있다“며 개탄스럽다고 했다.박 장로는 광주에서 경영하던 서점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1남 3녀를 뒷바라지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힘이 드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이 하나님 은혜로 잘 성장하여 부모를 잘 섬기는 효를 다하고 있다. 특히 장남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탄현에서 ‘호소아과’를 개업하여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러한 자녀들의 섬김을 통해 미국에 거주하는 딸에게 2년마다 한 번씩 다녀오는 것을 비롯하여 아들 딸이 여러 번에 걸쳐 해외여행을 주선하여 주기도 했다고 한다.박 장로가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인 신영순 권사(76세)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자녀를 공부시키고 가정을 은혜롭게 지켜 나간 것이라며 “노년에 부부가 해로(偕老)하며 살게 됨은 은혜요 감사”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성구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많이 읽고 있다면서 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참된 복이라고 말한다.가장 많이 부르고 좋아하는 찬송가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이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9-2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3
    인간에게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 등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퍼소나(Persona, 가면적 인격) 밑에 감추인 그림자 현상(The Shadow)-마음의 어두운 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본능적 충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한 곳에 자리잡은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기독교에서 ‘사탄의 장난’이라고 규정되는 죄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이에 대해 성경에선느 성령의 도우심을 받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으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이 생겼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8:4). 곧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이 나를 주관하시도록 기도하고 믿으면 주님이 나를 어두움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5-37).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여 죄악 가운데 빠지지 않게 인도하실 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성령이 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로마서> 8:39).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나는 온전히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크시기에 나는 주님의 사랑을 흉내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영원 위에 존재하므로, 나는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옆에 있기에 나는 시를 쓰고 멋을 부릴 수가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헤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 9:16). 나는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나아갔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요셉은 종의 신분에서 총리의 신분으로 상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이 나를 진정성 있는 작가로 세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이 동행하시는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W. D. Cornell 작사). 나는 매일 아침 산택을 하면서 주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느낍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위로를 할 수가 있으며, 주님이 나의 언행에 대하여 “애썼다”&#8228;“잘 하였다”고 칭찬을 해 주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적당한 때에 영감을 주시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세계가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리라 믿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이데올로기나 권력에 의하여 생긴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K-Pop이 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땅끝까지 나아가고, K-Poem이 유럽과 미국을 넘어 땅끝까지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K-Art 안에 담긴 영혼과 감동이 국가간&#8228;빈부간에 갈등을 넘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하심에 의하여 남북간의 분단의 경계를 넘어 소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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