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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심으로 그 하나님이 사람의 궁극적인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삶을 거두는 생명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시며 존재의 근거가 된다. 사람이 삶을 사는 과정에서 언제나 그의 궁극적인 실재 앞에서 존재의 근거로서 하나님은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그 이유를 알게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이를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그 믿음은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해답하는 길이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이며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이 세계의 창조를 사실로서 실증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뗄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와 그 안에 담겨 있는 믿음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성서는 과학의 교과서가 아니며, 믿음은 과학적 사실의 보증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창조설화에서 과학적 진리가 아닌 신앙적 진리를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자기 이해를 밝히어 내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밝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진술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원을 말하려는 과학적인 보고에 그 목적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란 창조자의 관계와 관계의 사이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관계에 사랑의 약속을 말하려는데 있으며 이에 준엄한 사실은 인간이 유한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예컨대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사실'은 인간은 유한함으로 비존재의 유산을 지니고 있음을 믿게 하려함에 있다. 인간만이 유한성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존재로서 그 삶에는 공포와는 다른 그늘진 불안을 알게 한다. 여기서 아는 것은 공포는 일정한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이것은 현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성에 자의식을 가지고 늘 불안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끊임없이 비존재의 위협으로 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점을 알게 한다. 여기에 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실제(ultimate reality)” 는 ‘있음’과 ‘아니 있음’, 인간의 ‘삶과 죽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 하여’는 온 몸으로 긍정 할 수 있는 것, 정말 목숨을 걸고 자기 자신을 내 놓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궁극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닌 아직도 실현해야 할 미래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이를 알게 한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본문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사도 바울의 이 신앙고백 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으셨음을 알게하며 창조자가 그 의도를 따라 삶을 영위(營爲)하며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앙이란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상태이다. 신앙이란 이처럼 하나님에게 삶의 뿌리를 밖고 생명의 젖줄이 이어질 때 우리는 죽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살아 있는 것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 이 신앙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겠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또한 바로 여기에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은 창조의 인간학적 중요성과 그 의미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창조는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와 본질사이에 틈이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서 “자기실현”이라는 창조의 역학적 근거가 되기에 존재와 본질의 분리는 없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실인 것의 의미도 깨우치게 한다. 이는 사람의 자기창조의 원리가 되며 이것이 사람의 창조성의 배경이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8-24
  • 성육신한 예수교회-55
    성경에 ‘거룩’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안식일’과 관련해서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가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백성들에게 거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곳이 지상에 위치를 두게 되었는데,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텐트를 치신 성막이었다. 이 세 가지가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구별하신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유대 교부들의 윤리인 Pirkei Avote를 보면 세상을 떠 바치는 세 개의 기둥을 다룬다. 이 중에 한 개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이고, 남은 하나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선한 행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떠 바치는 세 가지의 기둥 중에 한 개라도 부재하면, 저들 이스라엘은 존속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중의 한 개가 제 2성전이 건축된 이후 다시 무너진 것이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붕괴된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워지질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려면 거룩하여져야 하는데, 이들을 거룩하게 하는 역할인 성전에서의 예배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성전의 역할이란, 하나님께 백성들이 나아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내고, 다시금 야훼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계약을 갱신하며, 그의 부르심과 의무에 충성을 다짐하며, 야훼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새롭게 짐을 지고,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과 기능인 제사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 야브네에서의 랍비 공동체는 바빌론 포수기와 같은 대처를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랍비들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용어를 ‘말씀’앞에 나아간다는 용어로, 성전 제사를 모두 ‘기도’로 대치하였다.‘성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장소에 국한되던 성소 개념을 ‘시간의 지성소’인 ‘안식일’로 대치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말씀’과 ‘기도’와 ‘선한 행실’로 전환하였다. 이는 거룩한 처소 역할이 장소에서 시간으로 넘어가게 되고, 예배가 의로운 선한 행실로 넘어감으로써, 장소에 관한 경비와 관리 유지부담이 절약되었고, 신앙생활이 더욱 내실을 다지게 된 것이었다. 더욱이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다짐한 랍비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비량으로 말씀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다.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도시에서는 회당들이 건축되어서 이를 더욱 뒷받침을 하였다. 이렇게 전환된 신앙인들의 경건생활은, 안식일이 성전에 다가가는 거룩한 시간이 되었고, 말씀 앞에서 야훼하나님을 직면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거룩한 예배가 된 것이다.예루살렘이 붕괴되던 1세기 유럽에서도, ‘정의’개념보다는 ‘선’의 가치를 보다 위에 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는 사회적 가치관에서 ‘정의’가 ‘선’보다는 한계점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가 ‘공법을 하수 같이’ 흘려보내다 보면, 피비린내가 땅을 덮게 되고, 더럽혀진 땅은 항시 희생된 자의 고통소리로 하늘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질문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에 대해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기 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내가 곧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다’라고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야훼하나님은 ‘항상 인자를 원하시고 긍휼을 들어내시는 분’이셨다. 저들은 야훼하나님을 곧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하였다.하루는 모세가 극도의 혼란과 낙심 중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기를 요청한다. 결국 모세는 야훼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그 때에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긍휼하심이 끝이 없으심’을 인지하게 된다. 요한복음에 와서도 그와 그의 공동체가 목도한 하나님아들의 모습은 ‘은혜’ 그 실체였다. 십자가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란, 바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찾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시고 긍휼하신 본질’의 나타냄이시다. 신랑이 한 여인과 정혼을 하게 되면, 그 여인은 오직 그 신랑에게만 헌신된 거룩한 신부이다. 유대인들은 이 ‘거룩하다’는 말을 오직 정혼된 여인을 칭하는 용어로만 사용하였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라 함은 이와 같은 선에 있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거룩하심’은 저를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하심’에 있다. 우리가 보아온대로, 궁전 같은 성전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통치자가 죄수가 되고, 장군들이 이등병이 되는 것이 세속의 역사라면, 우리가 다시 써 내려 가야할 거룩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져야 하는 것일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8-24
  • 김찬규 장로
    하모니카 연주자로 영어성경암송과 찬양으로 분주 김찬규 장로(90세, 예장통합 영등포노회 영은교회 은퇴)는 평안북도에서 6.25전쟁 당시 1.4후퇴 때 월남하여 영은교회 개척 창립멤버로 교회를 일평생 섬겨왔다.김 장로는 90세의 노년임에도 하루의 일과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와 성경탐독을 하고 음악을 좋아하여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노인이지만 남다른 재능이 많은 김 장로는 오전에 컴퓨터 메일 검색으로 교계의 각종행사와 교단과 교회의 상황을 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노력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영어성경과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특히 영어성경을 읽으면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등을 늘 암송하고, 일본어에도 수준급의 실력을 닦아가고 있다. 김 장로는 틈틈이 봇 글씨 습작을 하면서 심신을 다스리고 있고, 매주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모이는 ‘창광 금요기도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저는 매일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게 보내고 있어요. 정말 아플 시간도 없어요.”라면서 건강하고 꼿꼿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음악을 좋아하는 김 장로의 하모니카 연주는 유행가 정도의 간단한 실력이 아니라 주로 찬송가와 명곡들을 연주함으로 연주 실력을 인정받을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고 있어 90세의 노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김 장로의 하모니카연주 실력을 알고 있는 여러 교회를 비롯하여 음악제 등에 초청을 받는다. 예장통합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행사에서도 연주를 했고, 미국 애틀란타에도 초청을 받아 해외연주로 많은 은혜를 끼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한국기독교원로장로회에서 연주자 특상을 받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김 장로는 교회에서 개척멤버로서 늘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밀어주면서 장로장립은 늦은 감이 있으나 1980년 4월에 시무장로로 임직하여 18년간 교회를 섬겼다. 본 교회에서는 선교위원장을 비롯하여 교육, 행정 등등 여러 위원회에서 최선의 헌신을 다했다. 현역에 시무하면서 영등포노회 남선교회연합회 회장과 남선교회전국연합회 임원도 역임했다.김 장로는 교단 밖 초교파 단체인 세계신도연맹과 재미목회자고국방문사업에 임원으로 사역했다. 또 한때 크리스챤선교뉴스 신문사 사장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항상 말이 적고 앞서 나서기를 못하는 성격으로서 “저는 자신을 나타내는 일을 하지 않고, 조용히 묵묵히 살다보니 벌써 90세가 됐지만 생각하면 참 보람됩니다.”라고 회고한다.김 장로는 젊은 시절 대한모직공업주식회사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퇴사하여 신일기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직물과 섬유 제조업을 창업하여 경영일선에서 일했다. 당시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남은 노후를 잘 보내면서 교계활동도 구김이 없이 잘 해 냈다고 한다. “동료들은 대부분 별세 했지요. 그래도 바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내게 하나님이 건강을 주신 은혜지요.”라고 하면서 늘 감사하면서 산다고 한다.한국교회를 염려하는 김 장로는 “너무 안타깝지요. 사실은 종로 5가에 나가면 만나는 사람들 중에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걱정이 되는 지도자들이 많고 너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라고 하면서 교회의 갱신이 시급하다고 말한다.김 장로가 즐겨 암송하고 있는 성구는 잠언 3장 1절부터 5절 까지“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찬송가는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예수님은 아름다워라..”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김 장로는 이팔순 권사(83세)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장남은 예장통합 총회 소속 대전인동교회 김성천 목사로 목회를 알차게 사역하고 있다. “나는 부족하고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노년을 부부가 해로(偕老)하면서 자녀들이 잘 살고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8-2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1
    오늘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다섯 번 돌았습니다. 개나리가 꽃봉오리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벚꽃도 제법 꽃잎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안은 정오가 가까운 때인지라 한가롭게 거니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적막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미세 먼지로 인하여 하늘은 거무튀튀하였지만, 그나마 햇빛도 나무 그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섭니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일정한 보폭으로 걸을 수 있고, 눈으로는 나무들 사이를 건너가는 까치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을 움켜쥐기도 하고, 팔을 힘차게 저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 출근 안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으며, 형사 죄를 지어 법정에 갈 일도 없습니다. 세금은 제 때 냈으며,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내 나이 예순을 넘겼지만, 서재에서 언제든 필요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으며, 한가한 때를 만들어 한천 가를 산책하며 벚꽃을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에는 차를 몰고 우이동에 있는 W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아들의 취업과 딸의 임신을 위해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믿음과 건강과 행복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직장을 은퇴하였으니 각종 문학 단체에서 얼마든지 열심히 일할 수가 있습니다. J낭송문학회에서는 춤과 노래와 시낭송이 어우러진 ‘몸시’ 공연을 하였고, H시인협회 임원회에서는 한 해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을 제시하였으며, 기독문인단체에서는 협회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도 내놓았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K동호회에서는 시창작 강의를 하였고, P동호회원들과는 전주 문학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전주 문학 기행에서는 한옥마을에 들러 경기전을 둘러보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았으며, 돌담길 안과 밖을 걸으며 여행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경기전 뒤편의 고향집도 둘러보았습니다. 현재는 삼층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옛 한옥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옛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큰누나가 매형과 데이트하던 동문 사거리의 제과점 ‘조화당’을 떠올려 보았고,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가 떡가래를 뽑아달라 했던 방앗간을 그리며 옛 동무들을 그려보기도 하였습니다. 고향의 옛 자취가 사라진 것을 보면서, 딸아이가 결혼해서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와 아들이 매일 직장에 출근하는지라 가끔 거실 안이 공허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집에 있으려니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몇 번이나 수첩을 뒤적여 봅니다. 다음 주에는 탈장 수술을 받은 매형 병문안을 가야 하고, 11일에는 P시인 시비 제막식에 참석해야 하는군요. 22일에는 종로3가에 있는 C홀에서 ‘몸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고, 27일에는 H시인협회 세미나에 가서 주제 발표를 해야 합니다. 이를 보면 작가 생활이라는 것이 바쁘기도 하고, 공허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당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아깝지 않아?” 하면서 은근히 직장 생활을 더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고, 얼마 전 잠깐 귀국했던 딸아이는 “아빠를 보면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이 생각나.” 하면서 실용성이 부족하였던 양반에 나를 빗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34년을 직장 생활하여 가족을 먹여 살렸던 나를 백수로 취급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서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렇지 않은 것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예레미야 애가> 3:24). 주님은 내가 고달플 때 “애썼다”며 위로해 주시고, 내가 외로울 때 동행해 주시며, 내가 힘들 때 강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은 내가 눈 앞의 안위를 도모할 때 영원을 보게 하시고, 죄로 인해 괴로워할 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내가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도모하는 것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주께서 주신 달란트로 기독 시학을 정립하라 하시고, 날마다 영감을 주시면서 멋과 낭만이 있는 푸른 초장으로 나를 이끄십니다. 주님은 주일날 예배 시간에 내가 애교를 부리며 부르는 찬양을 열납하시고, 나를 ‘일 對 일’로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기업이 내가 하는 일이 되고, 행복한 작가가 되어 행복하게 일하게 하십니다. 나는 그 여호와의 기업이 이 땅에서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활용합니다. 주님이 동행함으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배꼽춤을 출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사무엘하 6:14). 다윗은 “하나님의 궤”와 함께 함에 너무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나 역시 주님이 동행하심을 찬양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8-24
  • 목회는 쉬운 것이다·38
    먼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에 부합되게 산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그리고 계획에 부합되는 삶인가? 하나님의 계획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아무도 멸망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믿었다는 사람들이 공갈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너그러우심을 신앙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멸망이나 죽음이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이때마다 발생하는 것이 조급함이면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능숙해지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과 아무 관계 없는 이방 종교의 수단과 방법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의 목표가 세상구원입니다. 예수님처럼이란 이 사실을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의 목표가 얼마를 구원시킨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일 뿐 우리는 구원받은 삶입니다.고린도후서 5장 20절에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 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하 나님은 사람과 원수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만드실 때 복을 주셨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하나님과 원수 됨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수문장이 되어 구별하고 구분하여 조건을 말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성이지 단회성이 아닙니다. 더딘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의 조급성입니다. 이 조급성은 하나님의 뜻을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조급함에서 사람들이 무수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어 자기가 만든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소원이 무엇인가? 사람의 소원에 우리는 깊이 빠져 있습니다. 목회자가 될 때 사람의 소원을 벗어버렸어야 하는데 사람이란 사회적 체면과 거기에 물들어 있음에 대한 인식조차도 없이 사랑의 때 묻은 본성에서 목회라는 교육적인 방법대로였습니다.일반적인 용어가 ‘성공적 목회’입니다. 그 성공적이라는 것이 인간 중심인 사단이 물려준 유산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마음의 소원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주신 생기로 인한 생명의 반응입니다. 마치 엄마의 태에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의 소원은 오직 엄마일 뿐입니다. 그 마음의 소원입니다.에베소서 2장 10절에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려 하심이니라.”시편 139편 13절 이하에서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신묘막측(神妙莫測) 신통하고 묘하며 측량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목회자 마음의 소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성장학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목회성공이란 말은 더구나 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직히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버릇처럼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나 상담할 때마다 사용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하나님 뜻대로’ 인도하십시오.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입니다. 나의 본심의 소원은 곧 메시지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자기와 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하는 그럴듯한 말입니다.한편,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범죄 행위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의 뜻이란 객관적인 입장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내 마음의 소원이라고 할 때는 나는 말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8-2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5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5. 천지를 개벽시킨 예수와 제자들 이 지구상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중에 가장 쇼킹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최대의 파격적인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의 탄생, 장차 세상을 진동시킬 그 엄청난 사건이 유대 땅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조용하게 일어났다. 그 후 그분의 행동 역시 세상을 소란하게 할 만큼 요란스럽지도 않았고 선동적이지도 않았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목소리를 높여서 외치는 웅변이 아니었고 침착하고 조용하지만 권세 있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말과 행동은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다른, 당시의 상식과 풍습을 뒤엎어놓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분의 오심으로 세상의 역사적 시간을 카운트하는 시간이 BC(Before Christ, 주전)와 AD(라틴어 Anno-해, 년, Dommini-주님, 주후)로 갈라졌고, 지상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졌다. 오늘날 세상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으며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20억 명이 넘는다. 예수는 그야말로 천지를 개벽시킨 분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파한 제자들은 온 세상을 “소요케 하는”(행 24:5) 혁명가들이었다. 천지개벽의 주인공-예수예수의 출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고, 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면서 이미 예고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람이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시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이 바로 그분이었다. 발꿈치에 상처(십자가 희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를 입으면서, 악의 세력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멸망시킬 주인공이 세상 역사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을 충동하여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하였고 그 이후에도 그는 예수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는 그의 사명을 다할 때까지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마 4:23)쳐 주셨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주셨다. (1)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임하신 예수 예수는 어두운 세상에 임하신 빛이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요 1:5)였다고 개탄하였다. 온갖 죄악과 불법이 가득한 어두움의 세상에 처하여 죽어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는 빛과 생명으로 임하셨던 것이다.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희망의 빛을 보았으며 사망의 골짜기에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함을 받았다. 예수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빛이요 그 빛이 생명임을 천명하셨다. (2) 죽은 자를 살게 하신 예수사람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지만 단 한명의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없다. 전쟁에서 수백만 수천만 명이 죽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죽은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파격 중의 파격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그 주변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살 수 있다는 증거를 보았다. 예수께서는 이미 죽은 어린 소녀를 “달리다굼”(일어나라)이라는 말씀으로 살려 내셨고(막 5:41), 매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메고 나가는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도 “청년아 … 일어나라”(눅 7:13)고 하였을 때 살아났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서 썩어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하시니 그가 살아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장면들을 목격하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요 1:25)다는 그분의 말씀은 진실이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부활과 영생이 실증을 보여주셨다. (3)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신 예수 예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삶을 통하여 친히 보여주심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완벽한 모델이 되셨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셨다. 마침내 그분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요구하셨다. 그분은 문자그대로 “사랑의 화신(化身)”이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는 말씀으로 권면하였다. 세상을 진동시킨 예수의 제자들예수님은 3년 반에 걸쳐서 ‘가르치심으로’ ‘보여주심으로’ 그의 제자들을 교육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배우는 일에 매우 둔하고 더디긴 하였으나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순간, 그분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도한 후에는 이전의 그 말씀과 가르침들이 생명과 능력이 되어 화산의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특별히,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서 임하신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 되었고 온 세상을 진동시키는 ‘복음의 사신’이 되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이적이 일어났고 그들이 전하는 생명과 능력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면서 회심하고 회개하여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는 자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허다하게 증가되었다. 학문에 익숙지 못하고 가난한 어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제자들이 변화되어 하늘의 능력이 임하였을 때 나타난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당대의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의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에 대하여 전하는 권세 있는 메시지에 아연실색(啞然失色) 하였고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소신이 없고 비겁했던 베드로의 힘 있고 담대한 설교에 넋을 잃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용감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의 영향력과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위대한 능력이 되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행 24:5)라고 부르짖었으나 그들을 제재하거나 그들의 활동을 중단시킬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사건이었다. 개혁을 넘어선 개벽이었고 인간의 지식과 상식을 초월하는 파격이었다. 오직 나의 신으로“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분과 관련된 모든 것은 영적인 일이며, 그 영적인 일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난다. 예수님의 탄생 자체도 ‘성령’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분의 사역을 폭발시키는 일도 ‘성령’ 충만한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이후에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모든 역사도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었다. 예수 승천 이후 시작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이 발아(發芽)하여 급속히 세상에 퍼져나간 것이 성령의 역사였다면, 예수 재림 직전에 천국에 들어갈 알곡들을 추수할 때에도 역시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를 끝내고 다음 호부터는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연재할 것임.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8-11
  • 87. 제67회 총회장 김현중(金顯中) 목사
    경북 상주 출신김현중(金顯中, 1922~2007. 1. 27) 목사는 경상북도 상주(옥산)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당시 조선의 청소년들에게는 암흑의 세계였다. 경제는 피폐했고 정치는 이미 일제의 손아귀에 휘여잡힌 뒤였으니 교육과 문화의 혜택이란 생각할 여지조차 없는 시기였다. 도시나 농촌 구별없이 막막한 처지였다. 상주라고 예외 일 수 없었다. 상주는 경상도 중서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오지로 알려진 곳이라 농업이나 교육발전이 뒤졌다. 상주는 안동이나 예천, 영주에 비해 기독교 복음 역시 비교적 늦게 전해진 것같다. 김현중이 태어난 옥산(玉山)엔 유림(儒林) 세력이 자리잡고 있어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었다. 그러나 김현중은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어 서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친구따라 다니며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우며 공부의 중요성을 스스로 터득하고 교회에 나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성경이야기와 동화를 듣는게 그렇게 좋았다. 상주에 교회가 설립되기는 1910년 3월 1일에야 이루어졌다. 상주교회를 모 교회로 하여 인근지역에 세워진 교회가 부원, 북부, 지사, 능암, 병성, 외당, 엄암, 내곡, 서문교회 등 9개 교회가 세워졌고, 김현중이 살았던 옥산면 청리에는 1920년에 이르러서야 외지에 살던 김문석에 의해 교회가 서게 되었다.그는 고향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당시 경서노회가 운영하던 김천에 있는 경서성경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전도자의 길을 준비했다.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에 진학, 학업을 마치고 처음 교역자로 사역에 임한 곳이 항구도시 부산이었다. 그가 전도사로 첫번째 부임한 교회는 부산진구 당감동 253번지에서 출발한 피난 시절에 설립된(1951년 9월) ‘남도교회’였다. 그가 이 교회에 부임한 날짜가 1952년 3월이었으니 교회가 출발한지 채 1년도 안되었던때로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 교회는 당시 피난민 수용소에 살고 있던 박운수씨 댁에서 이중열, 김경도씨 외 몇 명이 참석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 문자 그대로 난중의 교회였다. 1951년 11월 정문교 전도사가 부임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교 부지를 기증한 백남조 장로(당시는 집사)로부터 군인들이 쓰던 군용천막 한 채를 기증받아 겨우 예배처소를 마련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교를 막 마치고 목사안수도 받기 전 이같은 어려운 개척교회를 물려받아 그는 예장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에 있는 당감교회(현 남도교회)를 거쳐 거제도의 장승포읍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있던 중, 1955년 12월 서울 청량리 전농동에 있는 전농교회의 청빙을 받아 상경하게 된다. 김현중 목사가 전농교회에 정식 부임한 해가 1963년 2월 17일이었다. 그는 상주에 있을 때 유림사회 분위기에서 자라서인지 끊고 매듭짓는 일, 즉 법적인 문제나 상식이 분명하여서인지 교단 안에서는 늘 법과 원칙을 잘 아는 법통으로 통하였다. 그래서인지 전농교회를 맡아 사역하면서 늘 엄격하고 복잡한 노회와 총회 문제 해결에 번득이는 그의 혜안과 지혜가 작용해 무난히 해결하는 수완을 발휘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는 부임한 그 해 1963년 6월 21일 위임식과 함께 박주양 장로 취임과 조형모 김명진 집사를 장로로 장립해 당회를 보강하였다.1967년 7월 10일 예배당을 적벽돌 2층 으로 대지 188평 위에 연건평 172평의 새교회 건물을 건축했다. 1972년 4월 8일엔 윤재동 장로 장립과 김영복 권사 취임식이 있었으며, 1973년 2월 18일 김현중 목사 부임 성역 10주년 근속 축하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18일 박춘수 김대옥 장로 장립과 교회설립 2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또 1974년 5월 4일 교회성장에 따라 교육시설의 필요성을 느껴 4층 콘크리트조로 연건평 150평의 교육관을 건축하고, 1975년 2월 27일 성전봉헌 및 교육관 준공예배를 드렸다. 또 1980년 1월 17일 김성문 이문원 김태준 장로 장립과 김득상 김철규 김종훈 박무송 서주식 집사 안수식과 이차순 전덕순 박영운 권사 취임식이 있었다. 김현중 목사는 수도노회 노회장과 한국찬송가공회 공동회장을 역임, 교단을 대표하기도 했다. 1981년 9월엔 총회 부총회장에 당선되었고, 1982년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군산개복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7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에 선출됐다(교회설립 55주년 기념화보집, 김광영 편, 예장전농교회 2008, 서울 p.6-7, 124-125). 그리고 1990년 12월 20일에는 전농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그가 남긴 설교 한편을 통해 그의 인생관과 목회철학을 짐작해 본다. 성경 출애굽기 19장 20절~25절을 본문으로 하여 ‘시내산’이란 제하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니 16절~19절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하늘의 높은 보좌에 계시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20장에 오면 십계명을 주십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구원 받은 백성이 순종해야 할 언약입니다. 오늘날 시내산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백성들과 함께하는 곳이요,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구원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시내산은 어떤 곳입니까? 첫째 시내산은 하나님을 높은 곳에 모신 곳입니다. 자식이 하나님보다 높다하면 불효자식이고 패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를 믿던, 믿지않던 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하나님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시내산은 신칙(信則)받고 삼가 조심해야 할 곳입니다. 신칙이란 알아 듣도록 거듭 훈계하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에게 알아듣도록 주의하고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대 하나님 앞에 방자하거나 무시하면 하나님 앞에 죽을거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경거망동하거나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경고의 말인 것입니다. 셋째 시내산은 성결하게 해야 할 곳입니다. 22절에 보니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성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시내산은 곧 교회입니다. 시내산이 거룩한 하나님의 강림하신 곳이듯이 교회도 그렇습니다. 시내산에 구원의 하나님의 말씀이 있듯이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이 한 편의 설교를 보면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요 핵심인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신학의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초판 p.101-105 참조). 그가 재임했던 제67회 예장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복구노회 및 지역노회 조직(한남노회, 한서노회, 충동노회, 서서울노회, 평동노회, 용천노회)을 허락하다. ② 한국찬송가공회 조직(공동회장으로 이영수 목사)됨을 보고하다. ③ 본 총회산하 모든 지교회의 부동산을 총회유지재단에 편입하기로 가결하다. ④ 총회 창립 70주년 기념행사를 하기로 하다. ⑤ 신개척지 교회 상호간의 거리를 500m로 재확인하다. ⑥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측) 유지재단설립 허가 받다 ⑦ 총신 이사는 21당회 이상의 노회에서만 파송하기로 하다. ⑧ 총회 유지재단 이사 9인을 15인으로 증원하다. 김현중 목사는 전농교회에 부임 후 만 27년을 한 교회에서만 충성한 후 2007년 1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충성을 다하고 자녀들과 가족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그의 장례는 총회장(葬)으로 치루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8-11
  • 예수 승천과 파루시아
    5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날로서 부활한 지 40일이 되는 날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갖게 한다. 신약 성서에서 보면 사도행전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뒤 40일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그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려갔다고 기록 되어 졌고 요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도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승천의 의미는 예수의 죽음과 그가 부활한 뒤 승천했고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그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승천 축제는 4세기 이래로 동서양이 모두 부활절 후 40일이 되는 날에 베풀어진다. 승천의 신학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모든 이들에게 내려지는 최종적인 구속의 행위, 즉 그리스도가 “하늘로 오름으로 그가 우리를 하느님과 고난과 기쁨을 함께하는 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승천’은 초대 교회에서 세례때 사용하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언급되어 있다. 승천 축제는 그리스도교도 사이에서 크리스마스. 부활절. 오순절과 같은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 왔으나 4세기 이래로 동서양이 모두 부활절 후 40일 되는 날에 베풀어 행사 되어 왔다. 그러다가 중세기에 와서는 승천 축제는 보다 적극적이고 시각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행사 진행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와 함께 감람산에 올라갔던 것을 흉내 낸 행렬, 십자가를 세우는 것, 교회 지붕을 통해 부활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올리는 것 등이 포함되어 진행되었다. 서양에서는 승천을 다룬 최초의 작품은 예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구름으로 부터 나타난 하느님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리스도를 옆면에서 그림 그리는 것으로 11세기 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예수의 승천”은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 미술의 주요한 주제였고 두 시대 미술 모두 그리스도가 그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는 성상화를 담고 있음을 보고 오늘의 교회의 행사에 “예수 승천”의 의미부연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음에 본래 신앙의 특색을 드러내지 못함에 무색할 뿐이다. 여기에 오늘의 교회가 예배갱신으로 세 가지 의미가 따른다. 교회의 예배는 교회의 전통 예배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예배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전통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바탕에서 그 의미를 갖게 하기 때문이며 예배의 질은 세계교회의 공동의 예배 유산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폐쇄적인 교파주의 예배전통을 지양하고 전통의 유산을 확인해 가야하며 이 세계 지구촌에서 개교회가 직면한 상황문화를 창조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할 교회의 교회력에 따라서 진행해야 할 당위적인 교회의 현실에서 찾아 진행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과 승천을 달리해 왔다. 이는 승천절을 부활절과 성령강림절 중간에 위치하게 하면서 현존 하시는 그리스도를 지시하기도 하고 성령 강림이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건임을 시사해 오기도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아는 것은 영원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신학적 인식을 알게한다. 사실 승천이 현대 신학에서 무시 받았던 것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신앙의 실천에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성찬 및 예전의 의미를 현존 하시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조명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행위를 일상의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 행위를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신앙”만이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임을 알게 한다. 여기에 주지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는 짜여진 공간에서 길들여져 있고 예배의 본말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천하심은 주님 예수님의 영광스런 강림과 연계에 있음을 믿음으로 감당하기 때문에 승천예배도 지켜져야 한다. 승천 없는 ‘강림’은 없다. 가셔서 오시는 분은 선과 후의 약속이다. ‘강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루시아’는 “가까이 하다, 옆에 있다, 도착했다, 참석하다, 준비되다”의 뜻을 가진 의미는 ‘가까운, 곁으로 부터, 근처에, 근사하게, 존재하다. 발생하다, 현존하다’의합성어에서 유래된 ‘파루시아’그리스도의 강림은 이미 이루어져 함께 있는 ‘현존의 의미’ 승천의 기약을 알게 한다. 즉 하느님의 구원의 열심으로 인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갈2:20)에게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의 강림이 이루어진 ‘파루시아’를 알게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8-11
  • 김삼관 장로
    기드온협회, 지구촌선교회 정기모임 등 바쁜 일정 보내 김삼관 장로(예장고신 총회 전 부총회장, 서울서문교회 원로, 74세)는 그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복음 선교에 헌신하여 온 삶이다. 매일 아침 새벽기도회를 다녀와 아침운동을 하고 난 후에 각종 모임을 위한 일상을 시작한다. 은퇴하여 원로장로지만 매주 모이는 국제기드온협회(서서울캠프) 정기 기도회와 김 장로의 주선으로 설립된 사단법인 지구촌 선교회의 정기기도회 등 여러 모임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국제기드온협회는 매주 토요일 아침 7시에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지고 사업점검을 하고 있다. 김 장로는 서서울캠프 창립멤버로서 3년간 회장을 맡았었고, 지금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저는 기드온 사역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34년간 연중 무휴로 계속해 오고 있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김 장론 2014년 장로 직을 은퇴하고 선교에 대한 사명을 위해서 평신도 자비량 선교를 위하여 해외로 떠나려고 했으나 담임 목사님의 강력한 권유로 국내에 머물면서 선교에 대한 헌신을 하기로 다짐했다. 그동안 장로로 시무하면서 교단의 중요한 부서에서 헌신을 했고, 전국남전도회연합회 회장과 교단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하면서 묵묵히 봉사를 해 왔다.김 장로가 특별히 2016년 1월19일 지구촌선교회를 창립하고 법인을 만들기 까지 자신이 헌금하여 재정적인 뒷받침과 노력으로 결실을 보게 되어 법인 이사회와 후원을 위한 조직을 마치고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 한국에 들어와 경신학교와 세브란스 학원(연세대학교)을 설립하여 수많은 정치지도자와 목사 장로 등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여 국가발전과 교회부흥에 놀라운 일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라며 “우리 가 선교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등 제3세계에 학교와 신학교를 세우고 현지 지도자를 양성하여 그 나라에 목회자를 세워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라며 우리나라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열매를 맺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현지지도자를 세워 10년을 내다보면 그 열매는 매우 크고 4~5년 안에 큰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 했다.김 장로는 은퇴하기 전 까지 연합 사역에도 열정을 가지고 헌신했다. 고신교단의 전국남전도회연합회 회장을 맡아 교회를 개척(삼여시민교회, 김경환 목사시무)하였고, 필리핀 선교에도 교회를 건축하고 우물 파주기를 후원하는 등 많은 일을 감당했다. 교계연합운동에서도 한국장로회총연합회와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에서도 임원으로 활동을 했다.김 장로는 남서울노회 은퇴장로회 회장을 맡아 기반을 잘 닦아 활성화 시켰고, 교단 원로장로회연합회와 초교파 원로장로회연합회에서 임원을 맡고 있다.김 장로는 지난날 온유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성실하게 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했으나 그 결실로 얻어진 재정적인 뒷받침이 또한 선교에 헌신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었다고도 한다.김 장로의 가문은 목사 장로 가문으로서 김 장로를 비롯하여 동생이 교단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했고, 형님은 목회에서 은퇴한 목사이며 가족들이 모두 안수집사와 권사들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김 장로가 좋아하는 성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과‘,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 “오직 남은 삶을 선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남은 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에 바치고 가겠다”고 말한다. 가족을 위해서도 부부의 건강과 자녀의 건강 그리고 지구촌선교회를 위한 기도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 김 장로의 자녀들은 장남은 캐나다 캘거리대학교 교수로, 차남은 은행 지점장으로서 성공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8-1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0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24). 여기서의 부자는 물욕에 가득찬 부자를 말합니다. 곧 맘몬의 노예가 된 자들을 말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축복이지만, 맘몬의 노예에게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방해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이 주신 물질을 잘 다스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8-10).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는 창작입니다. 새벽마다 내리는 이슬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십니다. 그 영감으로 아침을 열고 묵상을 합니다. 그러면 좋은 글감이 무화과 나무 열매처럼 나의 뇌리에 맺힙니다. 나의 어머니 얘기를 하겠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이십 대에 꿈속에서 웬 노인이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 본 것을 계기로 믿음을 가진 후, 무려 27년을 새벽 기도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은 전주 한옥 마을의 ‘경기전’ 뒤쪽의 마당이 넓은 집이었습니다. 88평의 대지에 40평의 예쁜 한옥이 있던 우리집 마당에는 수많은 과실수와 화초들이 심겨져 있었고, 겨울에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이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연상케 할 만큼 雪國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툇마루에서 마당까지 발자국을 내 놓고 새벽 기도를 다녀오는 어머니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기다리면서 나는 천지 가득한 눈발처럼 사랑과 온정이 가득한 고향 풍경을 상상하곤 하였습니다. 나에게 어머니는 세상을 헤쳐 갈 수 있는 원기였고, 주춧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한때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에는 매일 한 시간씩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간병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효심 덕분인지 어머니는 내가 성년이 되어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퍼 부어 주었습니다. 내가 출근할 때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아들의 안녕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내가 연로하신 부모님의 응급 상황에 대비하여 승용차를 구입하였을 때에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몸소 세차를 해 주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서 열성을 다하여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새벽 기도와 사랑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온정과 화평이 가득한 그 나라를 상상하며 나는 주님 앞에서 예쁜 모습을 취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찬양대에서 노래할 때면 주앞에서 예쁜 짓을 통해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쁜 표정도 지었고, 노래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일상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라면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까 하는 기도와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주님은 어떻게 운용하시겠습니까. 주님이라면 이 시간에 수필을 쓰실까요, 평론을 쓰실까요. 그리하여 수필을 쓰라 하면 수필을 쓰고, 평론을 쓰라 하면 평론을 썼습니다. ‘수필을 쓴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까요?’ 등으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신 기도처럼, 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느끼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죄문제로 인한 고뇌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성령이 함께 동행하심을 느끼는 아이들이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주님 앞에서 신실해지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님 앞에서 행동하는 나는 시인들 앞에서 몸시 공연도 멋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김동규 노래의「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멋진 표정으로 부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 시늉도 해 봅니다. 무용이 끝난 후에는 남저음의 목소리로 자작시를 읊어 봅니다. “도둑이야 소리치면 바보가 되는 도시/ 걸망 지고 오솔길로 차마 들지도 못해/ 어설픈 미망의 순수 말뚝에다 묶고 있다.// 산과 산이 이어진 우뚝한 등성이/ 햇빛은 그런 곳에 내려앉아 노닥거리고/ 단단한 고백의 숲에 머리 풀고 살고 싶다.// 혈색 좋은 아이의 부라리는 저 눈망울/ 모든 것이 가능한 만물상을 띄워 놓고/ 후미진 그늘을 오르며 산의 흉내 내고 있다.”( 졸시, 「자연」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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