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1(일)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지난 칼럼 기사

  • 시민사회의 시대정신은 궁극적인 관심
    창세기의 맨 먼저 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기로 결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상응하는 피조물, 그분이 말씀하실 수 있는 피조물, 말씀에 귀 기울이는 피조물을 창조하셨으며, 이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관계를 맺어 창조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의 관계’를 말함에 유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정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창조자의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 했다. 어디에서 어디로 던져졌을까? 인간은 그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 한계로 인해 우리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가 바로 나와 관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할 수 있는 지점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 관심이어야 무엇이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신학자 틸리히(Tillich)에 의하면 신학의 일차적인 기준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을 깆도록 하는 데 있다. 신학은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을 취급하고 이러한 대상을 취급하는 명제만이 신학적이라 한다. 그 궁극적인 관심이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위대한 계명은 인간 정신의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정신생활의 궁극적이고 정신생활 모든 기능이 이 안에 있는 ‘깊이’(depth)의 차원으로 삶의 가치이라 한다. 여기서 말한 ‘깊이’란 인간 정신생활의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것을 나타내는 공간적 은유이다. 이 궁극적 관심으로 한 사람의 행위는 신앙의 궁극적이고 무제약적인 관심이며 전 인격적이고 인간 정신의 가장 구심적인 삶의 행위라고 한다면 또한 민족이나 국가나 물질이나, 명예 같은 궁극적이지 않는 데에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이며, 유한한 신앙적 표현들을 절대시하는 것은 “종교의 악마화”(demonization of religion)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일상생활의 상대적이고 무상한 경험의 흐름을 초월해서 그 궁극자 하나님을 열어 보이신다. 이렇게 궁극자를 열어 보이시는 신앙, 즉 궁극적 관심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요 삶의 가치이다. 궁극적인 관심, 즉 깊이의 차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가장 신앙적인 모습이며 인간 정신생활의 기반이며 삶의 근원인 가치가 된다. 그럼으로 삶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한 인간존재의 근원을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인간은 삶의 진가인 신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의 삶을 보면 인간은 실존적으로는 존재의 깊이에서 단절되고 분리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인간이 죄인이요 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병원이 잇다는 것은 환자가 있음을 전제 하듯이 신앙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존재의 근원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신앙은 소외된 인간실존에 존재의 깊이를 열어 주고 일상의 소음을 넘어 초월자를 계시해 준다. 동시에 그렇게 게시된 것이 바로 신앙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궁극적 대상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존재자체(being-itself)를 하나님을 존재의 창조적 기초이며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성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 주었고 그 제자들은 죽음을 불사한 예수의 인격적 삶 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힘을 느끼게 한다. 당신은 ‘궁극적인 관심’으로 삶을 보여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5-04
  • 성육신한 예수교회-47
    요즈음 종교들의 가르침을 보면, 경전의 가르침들을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듯, 서로의 장점들을 채용해서인지 비슷한 점들이 많아졌다. 각 종단에서 심리학을 적용해서 신도들을 치료하는 것들을 보노라면, 개신교라고해서 별다른 것이 없다. 신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걷는 구원의 길이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개신교 신학을 수강했듯이, 유대 랍비가 신약성경과 주석, 신학 서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의 가르침은 백성들을 인도하는 점에 있어서 버전이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마다 공통점이 있게 되고, 사회성이나 공중 도덕성에 있어서 저마다 품격이 높아지고 스마트해진다면 사회는 전반적으로 좋은 세상을 지향하게 될 것이리라.이미 오래 전 일이다. 세계적인 도시의 한 쌍둥이빌딩이 공격을 받은 때이다. 이 기관의 책임자인 회장이나 수석 부회장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이날 한 사람은 출근을 하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침에 마신 주스로 속이 불편해 져서 화장실에 드나들다가 조금 늦게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의 공격을 목도하게 되었다. 한 분은 유대 율법을 실천하는 자이고, 한 분은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다. 이 두 분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책임감이 높고, 지구촌에서도 귀감이 될 만한, 도덕적 지수도 높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화를 입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매진하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구약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었고, 한분은 신약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중이었다. 한분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한’ 경제면에서의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았고, 한 분은 그 논문을 읽고 그를 채용한 분이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이렇게 탁월한 분들이 한 곳에서 공통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조화를 이뤄 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리라.바울은 다양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시에 ‘로마서’ 서신을 여 집사로 알려진 뵈뵈를 통해서 전달하였다. 이 시민들 중에는 신앙문제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자, 로마당국으로부터 그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던 이들이다. AD 80년 즈음, 지중해 연안인 야브네 랍비들 그룹에서 사람을 한 지역에 파송할 때에는, 파송된 자는 랍비의 권위를 갖고서, 랍비의 지침과 명령을 전달하였다. 파송 목적이 달성 되었을 때에는 그 특별한 권한이 종료되거나, 지속적으로 그 지역의 영적 권위자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갈등이 심하게 표출되었던 로마 분쟁 지역에, 사도 바울은 남자도 아닌 여인에게 자신이 평생 사역하며 가르치며 전파해온 ‘그의 복음 로마서’를 넘겨주고서는, 미련 없이 훌쩍 사지(死地)로 나간 것이었다.로마서 서신이 끝나가는 결미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라성 같은 분들이 이미 로마에 들어가 있었다. 네로 황제의 등극과 함께 로마 수도로 기독교 유대인들이 귀환하였을 때에는 저들은 이미 소수가 되어있었다. 잠시 떠나있는 동안에, 로마인들로 구성된 크리스천들이 상당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귀국한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율법만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한 도시에 살게 되었으니 분쟁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들은 이미 국외로 추방되었던 경험을 한 터이라서, 고린도나 빌립보나 에베소에서 같이 지나치게 소란을 떠는 일들은 없었다. 그러나 조용한 듯이 일어나는 분쟁일지라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유대인들이 모일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되는 바람에 가정집에서 모여야 했고, 이 같이 조심스러운 환경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유익한 결과를 가져 왔다. 서로가 절제된 펀치를 날리게 되었을 것이고, 질서 있고 신사적인 토론으로 인해서 충분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어서 공동체는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요즈음 랍비들이 그들 신도들중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을 보면, 613가지 율법 중에서 ‘하지마라’는 365조항에 저촉된 생활을 하는 부류를 가리키고, ‘이렇게 하라’는 248가지의 조항을 적극 따르는 신도들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 안에서 장사지내고, 다시 사신 예수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가치관’을 지향하는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다룬다. 이렇게 상이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 바울의 ‘복음’과 그가 전해 주려하는 ‘성령의 은사들’을 여 집사 뵈뵈가 어떻게 전하였기에, 바울이 도착한 항구에 저렇게 밝은 얼굴들로 나와서 사도를 맞이하게 될 수 있었을까? 이는 필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본을 보인 뵈뵈에게서 그 비결을 찾아야 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5-04
  • 서병하 장로
    성서공회 문서선교 봉사, 사랑의 쌀 본부기도회 참석 등 노익장 과시 서병하 장로(85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충무교회 원로)는 지금도 대한성서공회 문서선교 자원봉사자로 매일 출근하면서 성경보급 후원자 모집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노년이지만 매주일 교단교회를 방문하여 성경보급을 위한 후원을 요청하는 일이다.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서 장로는 교단 목회자들의 협조로 성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하나님 은혜로 감당하지요. 교회를 교섭하는데 애로가 많지만 그런대로 잘해 나가고 있지요.” 그리고 매주 토요일 조찬으로 모이는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본부’ 예배에도 안 빠지고 참석하여 함께 기도하고 사역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서 장로는 기성 교단의 평신도 몫의 단체장을 두루 거친 교단의 지도자이다. 항상 겸손하게 목회자들과 동료들을 대하는 성격 때문에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날 교단과 교계에서 평신도 사역을 하면서도 비판적이거나 강한 자기주장을 내 세우지 않고 순리적인 방향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온 서 장로는 어느 누구를 만나도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서 장로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건강하지 못하면 할 수 없지요”라며 골프를 치거나 별 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서 장로는 고위 장교(해병 소령)로 오랜 군(軍)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여 충무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하였고, 지금은 원로로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무엇보다 조국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라고 말하는 서 장로는 국가를 지켰던 군인으로서의 철저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서 장로는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너무 감사합니다. 함께 군 생활을 했던 동료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어요. 국립묘지에서 동기들이 가는 길을 바라볼 때마다 많이 울었지요.”라고 말하면서, 신앙인로서 술과 담배와 오락에 젖어 들지 않고 예수 믿고 찬송하고 기도하니 하나님은 건강을 지켜주신 것이라고 했다.서 장로는 기성교단에서 부총회장, 전국장로회 회장, 남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등 평신도 대표 단체의 회장을 두로 거쳤고, 최근까지 교단산하 ‘사회사업유지재단’ 이사장을 맡아 교단 교회의 복지사업을 활성화 시켰다. 교단 소속 교회가 자체적으로 사회사업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복지관을 설립하며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을 추진했다. 교계 연합사역에도 사랑의쌀나누기운동본부 총무를 역임했고,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했다.서 장로는 교계 평신도 단체의 연합운동에 대하여서 “과거에는 CBMC(기독실업인회)나 다른 여러 단체를 운영하는데 모두가 자기 돈을 내고 활동했기 때문에 순수한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명예를 앞세우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면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옛날 같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며 아쉬워 했다.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저는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개혁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1남 녀를 둔 서 장로의 가정은 아들은 직장의 간부직에 있고, 딸 출가하였으며, 조윤자 권사(84세)와 단란하고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노년이 되기까지 이렇게 부부가 해로(偕老)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고 말하며 늘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395장)’ 찬송가를 즐겨 부르고, 성구는 미가서 6장 8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를 좋아한다고 했다. <김형원 주필>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5-0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3
    예수님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품속에서 옥합을 꺼냈습니다. 거기에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향수는 여인의 전 재산이나 다름 없는 혼수 비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인간으로서 그를 직접 뵌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대야에 물을 붓고 옥합에 들어 있던 향수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는 보통 여자로서는 할 수 없는 대단한 용기이며 경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와 같은 경배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의 행위는 주님의 동행에 대한 경배였습니다.주님은 다윗에게도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에 주님이 기름부어 세운 사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 왕의 자리에 올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확보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한 번 가늠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나님의 편에서 한다면 결코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사람 사이의 정도 주님이 맺어 주신 것이고, 내 앞에 펼쳐진 사업도 주님이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주님 편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요 축복이겠지요. 나에게 행복은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한발짝 먼저 가시면서 나의 앞에 닥칠 일에 대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나는 한때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도 내 적성에 안 맞으면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진정으로 가고 싶은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작가의 길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동네 산책로를 거닐며 사색하고 아침이면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하는 일은 나의 로망이었습니다. 남들이 전동차를 타고 가며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 작가로서의 사색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꿈과 같은 일이 내 앞에 벌어졌습니다. 퇴직을 6년 앞두고 직장에서 건강 검진을 받다가 나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대학 병원을 찾아갔고 3개월마다 건강 체크를 하여도 의사는 내 몸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와의 상의 끝에 명퇴를 하였고, 내가 그토록 꿈꾸던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치유해 주심으로 다시 건강이 회복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힘은 직장 생활에서의 스트레스가 해소되어서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힘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셨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지런히 글을 문예지에 발표하고 문단 활동을 열심히 하였지만, 나의 지인들은 나의 글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집필을 하여 그동안 발표한 글을 책으로 출간하여도 그리 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에는 내가 뜬구름 잡는 일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글 쓰는 일은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하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외롭고 힘들 때 나를 위로해 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애썼다. 내가 너의 외로움을 잘 안다. 내가 네 곁에 있어 주마.’ 이때 나는 이스라엘 민중으로 왕따를 당하였던 세리 삭개오를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일도 하였던지라 갈등과 고민이 많은 고독한 직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계신 주님은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나무 위에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고 있던 제자들과 동행하며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우리와 동행하고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주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낙원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동행하시면 사탄이 끼어들 수 없고,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평화가 내 앞에서 기다립니다. 나는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화합의 열매를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매일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이 주시는 영감을 따 먹습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있는 한 나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며, 내 앞길이 평탄하리라 확신합니다. 주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시는 나의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5-04
  • 목회는 쉬운 것이다·29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그때부터입니다.그가 우리에게 남기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보다 성경 관주에 의한 짝 맞추기와 누가 말한 것에 올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성경을 연구하고 인용하면 가장 건실한 신앙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어리석은 이유•하나님께 혼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알아내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했습니다.•나의 삶을 개선하고 내 문제를 고치기 위한 일종의 지침서로 성경을 꺼내 들곤 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을 찾아 주장하고 재정적 독립이나 직업적 성취나 우울증의 치료를 위해 성경을 보아야 했습니다.•성공적인 삶의 원칙을 알아내고자 성경을 뒤져 보았습니다.•내게 성경은 일종의 점검목록으로 읽었습니다.•매일 운동하고 비타민을 복용하듯 목록의 항목들에 합격 표시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성경을 읽지 않으면 불신앙인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성경을 형식상이라도 읽어야 했습니다.아무 느낌도 없이 예수님보다도 성경에 더 의지했다는 놀라움은 예수님의 성경이 예수님을 소개해 준 책이라면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미 내 속에 와 계실 때 지금도 소개해 준 성경을 재해석하고 또 분석하는데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세상의 모든 종교마다 자기들이 신성한 문서라고 하는 토라, 꾸란, 모르몬경이 있지만, 이들에게는 신의 존재가 개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붙들고 있습니다.기독교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하나 된 경험 즉 영적 생명인 것입니다. 이제 최소한 한 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놀랄 그러한 삶 자체입니다.한 예로 결혼상담소에서 신부를 소개한 모든 자료나 설명을 결혼 후에도 계속 분석하고 조사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최소한 한 몸의 삶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 귀중한 사실을 안다면 엿세 동안 주님과 동행한 삶에 대한 환상적인 감사의 찬양과 기쁨의 축제가 되는 날이 주일이 될 것입니다.주일은 안식일 개념에서 죄를 짊어지고 와 실컷 두들겨 맞고 코가 빠져 스트레스 상태에서 파김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살았던 행복의 이야기꽃이 피는 날일 것입니다.지금도 우리는 주일에 점검받고 지시받고 눈도장 찍고 출석카드 찍는데 열중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을 통하여 양과 소를 잡아 번제물로 드리는 마음으로….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가정도 매우 평범한 한 몸 관계로서의 삶인데 남편에게는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론이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부부 된 의미를 알면 매우 행복하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관계에 대한 것을 지식적으로 가르치려고 할 때 순수한 부부관계는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교회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가분수로 만들어 결국 교회가 기형체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이유는 주님과의 영적 관계라는 사실입니다.학문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놓쳤다는 증거는 개혁주의생명신학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자신이 의지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방법과 경쟁의식에 능숙해 있어도 그에게는 진정한 주 안에서의 행복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계의 최고의 슈퍼스타에게 훈련을 받는 것이 목회 성공이 아니라 내 곁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목회적 사명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5-0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6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6.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솔로몬서언역사는 반복된다. 이 말을 성서적 관점에서 풀이해 보면, 죄악적 성향을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그 말씀의 법칙과 원칙을 따라서 살다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 육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경향을 따라서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특별한 깨우침이나 부흥과 개혁의 경험을 하게 되면 또 다시 하나님의 법도 안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패턴이 반복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전형적으로 이러한 패턴의 역사가 반복된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인물들 중에서 가장 지혜가 많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복을 누렸던 솔로몬의 인생도 역시 이 패턴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 그가 왕위에 즉위한 초기에는 아버지 다윗 왕의 신앙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충성된 종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로 받은 바 지혜와 부(富)와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때에 그 모든 결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업적과 영광으로 자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에 타락과 부패의 일변도(一邊倒)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반면교사로서의 솔로몬의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종교나 신앙의 타락과 부패의 원인과 개혁의 정도(正道)를 찾아내는 일에 상당히 큰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솔로몬 왕의 초기 정신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유언을 통해서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삼하 23:3, 4)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솔로몬은 그의 통치 초기에, 그의 왕위를 보좌하도록 선택함을 받은 대신들을 대동하고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과 온 이스라엘의 각 방백과 족장들”(대하 1:2)과 함께, 광야에서 건축된 성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기브온에 가서 겸비한 심령으로 자신을 성별하는 제사를 드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신하들과 방백들에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로 백성들을 잘 치리할 것과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는 정치를 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주셨고, 솔로몬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공의롭고 자비로운 통치를 하면서 백성들은 그를 크게 높이고 존경하였으며, 나라는 매우 부강하게 되어 주변 이방 나라들의 찬사를 받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시면서 당부한 말씀은 그의 평생에 걸쳐서 간직해야 할 중요한 지침이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4). 그런데 불행하게도 솔로몬은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이 번영하고 부강해짐에 따라서 이 귀한 교훈의 말씀을 잠시 잊어버렸다. 솔로몬의 타락과 배도이미 수백 년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 위에 오를 자들을 위하여 내려주신 교훈이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이스라엘의 왕들이 장구한 세월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지 말고 그 원칙을 따라서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도 따라야 할 명백한 교훈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화 되고 타락한 원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멀리 떠난 결과이다. 솔로몬은 번영 중에 하나님의 주신 이 통치의 원칙을 무시하고 잊어버렸다. 그는 자기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주변의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음으로 이스라엘을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 나라들의 힘을 이용하여 더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방 나라들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서 들어온 왕비들로 인하여 그들이 섬기는 우상 숭배에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솔로몬은 이방 나라들과 이러한 교제를 시작하면서, 그들을 끌어들여 하나님을 믿게 하고 개종 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확고한 믿음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죄된 본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죄악적인 풍습이나 그러한 습성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면 오히려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다반사이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왕상 11:4,5). 이리하여 이스라엘을 개혁한 솔로몬이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반면교사 솔로몬에게서 얻는 교훈우리는 솔로몬의 삶과 경험을 통해서 매우 귀중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현재 아무리 믿음이 좋고 위치가 확고해도 누구나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있으니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던 빛나는 지도자들이 이성 문제나 돈 문제에 연루되어 맥없이 무너지는 현상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요셉이나 다윗이나 다니엘처럼 초지일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하게 서서 변절치 않는 영성과 신앙으로 주변을 변화시키고 개혁하는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② 인간의 죄악적 본성 때문에 악(惡)은 언제나 선(善)보다 전염성이 강할 수밖에 없으므로, 악을 선으로 끌어들여 선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이방종교나 세상의 정치와 타협을 시작하면 반드시 타락하고 배도하는 역사가 있었다. 로마 천주교회가 로마 제국의 정치와 결탁하였을 때 배도한 교회로 변질되었고, 미국의 개신교회가 현재 국가의 정치적 세력과 결탁하면서 교회는 영적 힘을 잃어버리고 배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국가의 정치적 권력이나 개인의 영향력에 의존하여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은 변질과 배도의 문을 여는 것이다. ③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만과 교만심은 나병(癩病)처럼 피해야 할 해독이다. 솔로몬이 이방나라들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현재의 국가적 번영과 영화에 대한 자만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러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모든 결과들을 자신의 업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교회가 정화되고 개혁되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으려면 교회 지도자들이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과 욕망을 포기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개혁한 예수님의 모습니다. 다행히 인생 만년에 회개하고 새로운 개혁을 시도한 솔로몬이 내린 인생의 마지막 결론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4-21
  • 78. 제57회 총회장 박성겸(朴聖謙) 목사
    황해도 안악군 출생박성겸(朴聖謙 1910.2.26~1984.4.2)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평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안악지방은 평양과 신의주, 원산에 이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영향으로 기독교 복음이 일찍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세 역시 평양과 의주에 비길 정도로 기독교가 활발하게 뿌리내려진 곳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개화한 지방이었다. 성겸 소년은 일찍이 부모들이 복음을 받아 신종하여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일찍부터 교회에 출입하였고, 초기 선교사들과 조선인 조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이 자나라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 역시, 1905년 소위 한일합방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내 세웠으나 실상은 을사늑약이란 말이 말해주듯 조선의 국권을 강탈 당한 암울한 시대였다. 이러한 때에 성겸 소년이 태어났으니 그의 앞날이 어떠했겠느냐에 대하여선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족적인 저항이 의병들의 무장투쟁이었고 민족의 계몽 및 실력 향상을 위한 신민회(新民會) 활동과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 시위였고 3.1독립운동이었다. 그 중심세력은 전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종교단체들이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힘을 모으고 만세 시위에서부터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운동의 실체가 되었다. 이와같은 종파의 이념과 교리를 능가한 연합활동으로 3.1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독립이란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독립을 명분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자유와 정의, 독립과 저항의식을 비폭력 무저항으로 힘을 합쳐 민족 구원과 국권회복이란 대의를 위해 양보와 희생 그리고 애국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총회 주일학교 및 장년부 공과 집필교단지 ‘기독신보(기독신문)’ 발행에 기초 놓아‘은성문화사’ 설립 목회자료 공급한학에 능통한 문필가요 교정가“총신대 아세아지역 출신 유학생 등록금 면제”성겸도 복음을 접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배우며 교회가 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가 조국의 해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과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신은 교회와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가장 효과적이며 실질적인가를 생각하며 성장해 갔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미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에 안악군 내에는 교동교회(橋洞敎會)를 비롯 덕산교회(德山敎會), 서하면 대동교회(大同敎會), 안악에는 읍내교회(邑內敎會)와 무석교회(武石敎會) 및 삼상교회(三上敎會) 등이 설립되었다(史記 上 1928, p.24). 정치 경제적으로는 심히 어려웠으나 종교적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복음이 전래되어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개화되어 있었고 일제가 만만하게 대중을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찍이 교회가 운영하는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졸업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1938년 6월에 졸업한 후, 같은해 11월 28일 황해노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장립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1938년부터 1947년까지 송화군 상리면 도은교회(1907. 6. 10 설립) 위임목사로 10년 간 시무하였으며, 1940년부터 1947년까지는 은율성경학교 강사로 성경을 가르쳤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는 수교교회 위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황해노회의 서기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북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북한에서 공산당의 교회에 대한 간섭으로 박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1951년 1월 14일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가족들과 교인들을 이끌고 월남하였다. 그는 안악에서 멀지않은 황해도 장연군에 속한 백령도로 피난 와서 백령도에 있는 화동교회, 진촌교회와 사곶교회를 맡아 목사로 시무했다. 1952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진촌교회 안에 부설 진촌유치원을 설립 교회교육의 확대에 힘썼으며,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에 힘쓰기도 하였다. 박 목사는 1969년 4월 28일 서울금성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32년 간의 목회사역을 마감하며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도 함께 거행하였다. 1967년에서 1973년까지 총신대학교 실행이사를 역임하였고, 1969년 1972년 어간에는 총회 주일학교 공과 발행인 겸 장년부 공과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1971년 4월 16일 황해노회 100회 기념식 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4월 4일부터 5월 5일까지 대만기독교장로회 총회에 본교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1972년 9월 27일 교단신문인 기독신보 발행을 위한 동록업무를 추진해, 오늘의 기독신문 발전의 기초석을 놓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1984, p.103 참조). 박 목사가 백령도에서 서울로 온 것은 1953년 휴전이 된 직후 10월 25일이었다. 빈손으로 상경하여 금성교회(金城敎會)를 설립 황해노회에 가입하였다. 1950년 이후 1970년도까지 박 목사는 황해노회 노회장을 6번이나 역임하였고, 황해노회 교직자회 회장을 2번이나 역임하면서 교정(敎政)의 경험을 쌓아갔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총회교육부장으로 재임하며 교단교육에도 큰 공을 세웠다. 박 목사는 문필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친히 1956년 8월 31일 은성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설립,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목회관련 저서와 설교집을 발행해 공급하였다. 은성문화사를 통해 출판된 대표적인 저서들을 보면 빛과소금(1955. 1. 30), 성신의 검(1956. 3. 5), 예수와 나(1956. 12. 30), 목양의 길(1957. 11. 18), 생명의 꼴(1958. 6. 20), 중생의 씨(1959. 9. 20), 사상의 포로(1960. 11. 15), 한알의 밀(1961. 4. 18), 피의 제단(1962. 10. 24), 성구금언 예화(1962. 5. 25), 신약설교 전집 전6권, 불의 역사(1964. 9. 30), 새예식서(1969. 5. 5) 황해노회 100회사(1971. 3. 30), 한국목사대사전 등이 있다. 박성겸 목사는 한학에도 능통하여 그의 저서는 구수한 음식처럼 많은 목회자들에게 참고서 역할을 한 교단 안에 몇분 안되는 문필가요 목회자였다. 그는 1972년 9월 21일에서 27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그동안 한생을 복음을 위해 헌신한 것과 노회를 비롯 총회와 신학교 등을 위해 수고하였다는 뜻으로 전국교회가 그에게 안겨준 영예이기도 했다. 그의 이와같은 노고를 인정하며 1969년 2월 26일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훼이트성서대학과 페이스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가 주어졌다.그가 재임했던 제57회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 안건을 열거하면, ① RES에서 본교단은 탈퇴하기를 하다. ② 그동안 시행해 오던 지역별 대회제도를 폐지하기로 하다. ③ 총신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아세아지역 출신 유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 주기로 하다. ④ 정봉조 목사를 총회 총무로 인준하다. ⑤ 총회신학대학 학장에 김희보 목사를 인준하다. ⑥ 전북 전주에 있는 바울신학교를 총회 인준학교로 하다(제100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이숭회, 김창수 편, 예장총회 사무행정국 2016, p.24).박성겸 목사가 남긴 설교 가운데서도 그가 추구했던 삶의 지표와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본문으로 ‘청심자수복(淸心者受福)’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기초로 하여 청심자의 생활에 대해 이같이 설교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생활에 반영됩니다. 마음이 부정하면 그의 행동도 불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생활도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모인 군중 그를 따르는 이들은 세속생활을 떠난 진선미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청결한 마음 즉 청심(淸心)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요 15:3)이라 하셨고, 둘째는 죄의 고백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박 목사는 평생을 자신의 삶을 이 말씀처럼 살았고 성역을 끝까지 매진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p.67-69참조). 박 목사는 슬하에 네 자녀(혜선, 호선, 승선, 은성)를 두었고, 그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다하고 1984년 4월 2일 74세의 일기로 사모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영면하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4-20
  • 죽어야 사는 신앙
    새 봄이 되면 땅 속에 묻혀 있던 식물들에 싹이 나오고 죽은 나무 같았던 고목에서 새 싹이 움트며 메말랐던 잔디에서 푸른 새움이 솟아나는 신비함을 볼 수 있게 된다. 작은 벌레인 유충에서 나비, 매미들이 나오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달걀 속에서 병아리의 부화는 많은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는 약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생명의 약동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사는 이러한 생명의 약동에서 생명은 죽음의 바탕에서 열매를 맺는 씨로 태어남을 알게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본문의 말씀으로 생명을 가진 인류 앞에 선언하시며 “죽어야 사는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알게 한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시체를 떠난 영이 3일간 무덤 주변을 떠돌아다니다가 4일이 되면 시체가 썩기 시작하고 영은 무덤을 떠난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본문에 나타난 죽음의 늪을 헤매는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죽음 권세를 제압하고 부활하실 것을 암시하는 예고이다. 고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을 위대한 희망의 상황으로 즉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은 ‘구원의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즉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뜻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 이후에도 오는 영생을 믿게 한다. 그리스 로마의 종교사상에서도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이 있었으나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없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대는 구약성서에서 발견된다. 부활 후 의로운 자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에 참여하고 불의한 자는 그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에스겔서, 다니엘서).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째 되든 날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으며 이렇게 그가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 죽음, 악마를 물리친 그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신앙에 믿음을 두고 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부활을 확인한 다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로 순교했고 의심 많은 도마는 새로운 용기를 갖고 인도(India)에 복음을 전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후서 15: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 된다고” 그 믿음의 신앙을 확인하였다.예수님의 부활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변화를 가지고 삶에 대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던 권력이나 명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삶에서 구현(具現)하는 모습을 삶에서 실천하게 되었고,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더 중요함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박해를 당해도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부활의 사실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을 보는 세상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부활신앙’은 복음의 핵심이요 삶의 대전환점이 되었다.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부활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살아있지 못한 신앙이며 삶에 자기를 내 놓고 회개하며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죽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믿음의 신앙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신앙의 경지”를 깨달을 것이다.본문의 마태복음의 말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찾을 것이다”는 말씀의 자리는 “죽어야 사는 부활신앙”을 알게 한다. 인간들이 흔히 사는 삶에서도 이러한 삶의 태도가 위대한 삶의 역사(歷事)를 알게 된다. 예컨대 중국의 오자병법(吳子兵法)에서도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은 성서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태16:25) “죽어야 사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부활신앙을 가꾸기를 기도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4-20
  • 성육신한 예수교회-46
    한 장로교단이 총회에서 ‘다시 거룩하기’의 표제를 내 건지 벌써 6개월을 넘겼다. 이 교단의 한 목회자가 교단이 내건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으로 가까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인이 되신 오병수 목사님의 꿈을 꾸었다. 겨울인 듯, 목사님께서는 여느 때 같이 외투를 입으시고 모자를 쓰시고, 교역자님들의 모임에 가르침을 주시려고 강사로 오신 것이었다. 주최 측에서 오 목사님을 반가이 맞이하며 강단으로 안내하여, 옷과 모자를 목사님 옆에 잘 정돈하였고, 말씀 강론이 시작되었다.오 목사님의 첫 번째 처녀 목회는 1943년 요동벌의 요양(遼陽)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터이라서,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수난은 피해갈 수 없었다. 오지의 한 교회의 교역자도 일제에 붙들려간 지 오래라서 교역자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 교회에서 만주신학교 학장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전도사를 보내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오 목사님께, 학장님으로부터 그 교회로 가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 신도들을 치유하라는 것이었다. 신학교에 들어온 지 불과 일 년이 채 안되어서 담임교역자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학장님께 기도하며 결단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고서는, 밤새 예배당에서 주님 앞에 엎드리었다. 그러자 주님으로부터 요한복음 15장 4,5절 말씀을 들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서는 북간도 오지의 한 교회에 부임하신 이후, 조국의 광복을 경험하셨고, 성북교회에서 은퇴하시기 까지 초지일관 ‘그리스도 중심에서의 삶과 사역’에 전념하시었다.‘네가 내안에, 내가 네 안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바울 신학에서도 들어난다. 모든 삶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찾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형된 세속적 가치관에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짐을 ‘자연인’이라고도 하거나 ‘육적인’, 혹은 ‘육에 속한 사람’ 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성향을 보면 그 집안에 내려오는 가치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알코올 중독은 뇌와 유전자에도 각인이 되어서 후손들이 이 질병의 영향을 받게 되듯이, 사람의 육적 성향과 기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이뤄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성경에서 자신의 부모에게서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자신이 살던 고향 친척에게서 떠나서 낯선 땅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여간 고충이 뒤따르는 삶이 아니었다.바울은 자신의 율법적인 기질과 성향의 프레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가 학문적으로나, 서기관 급의 숭배를 받는 특별한 직위에서, 전통적인 사회적 관습과 기존의 가치에 확고하게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속한 가문이나 그가 가진 학문적 토대가 흔들린다거나 무너진다면, 그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신앙과 가치관이 충돌하였던 첫 번째 접전은, 헬라말로 소통되는 유대 기독교인 집단의 지도자 격인 스테반과의 만남에서 발생하였다. 그가 판단하기로는 가장 위험한 집단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동력을 가장 래디컬하게 이어받은, 헬라 말을 하는 스테반 기독교인 집단이었다. 저들이 갖게 된 가치관과 신앙은 유대 정통에서 너무나 멀리 나아간 신앙이었다. 그래서 그 수장 격인 스테반을 민중재판인 돌무더기로 척결하고, 기독교인들을 잔멸하였다. 저는 지방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의 싹을 잘라내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판단하여서, 이제는 지경을 넘어 다른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까지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 거리까지 진격한 것이었다.그런데 바울은 거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비추임 받으면서 성령의 지식을 얻게 된다. 사람을 자신이 살던 집단에서 떠날 수 있게 하는 운동력은, 경전에서는 모두 위로부터 오는 계시적인 지식으로 비롯되었다. 아브라함도 영광의 하나님을 뵐 수 있었기에 갈대아 우르 땅과 하란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비 집과 친척과 문화와 종교를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출생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보좌에 앉으신, 그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나사렛 예수의 영광을 본 것이었다. 바울은 실제로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이제 그가 사는 것이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고, 모든 죄 값을 치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 것이 바로 예수로 인해서 얻은 새 생명이며, 예수 안에서 시작되고, 예수 안에서 마쳐지는 새로운 삶이었다.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를 ‘말씀 가운데로 나아간다’로 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이라 함은, 곧 ‘거룩한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림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4-20
  • 김봉갑 장로
    교계의 여러 단체 전임회장 모임에 참석… 교제시간 가져 “일하면 젊어지고, 건강해진다”는 김봉갑 장로(80세, 예장고신 동부제일교회)는 노년의 나이에도 콘티넨탈무역(주) 대표로서 일본과 중국을 직접 오가면서 왕성하게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군 생활에서는 카츄사로 복무했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무역대학원을 나온 김 장로는 영어,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다. 그의 분주한 일상을 살펴보면 일본에서 한 주간, 중국에서 한 주간, 국내에서 한 주간을 보내면서 상상할 수 없는 열정으로 아직도 열심히 뛰고 있다.“그동안 해온 수출업에 보람을 찾으면서 40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영위하고 있다”며, 모든 일을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그것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기도하면서 결정한다”고 말한다. 김 장로는 앞으로도 90세까지 계속해서 일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그동안 김 장로는 교단과 초교파 평신도단체 등에서 대표를 역임하였다. 부 총회장을 역임한 고신교단에서는 지금도 역대 부총회장 모임에 참석하고 있고,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단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도권장로회연합회 전 회장 모임에도 참석하여 후배들을 격려하고 친교의 시간을 갖는 것을 중요시 한다.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 전 대표회장들의 친목모임인 ‘평경회’에도 참석하여 건강안부와 교제의 시간을 가진다.김 장로는 온유하고 겸손한 성격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어 함께하고 따르는 선후배가 많다. 누구에게나 듣기 싫은 말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격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맡아온 연합사역에도 모두가 함께 일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받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일해 왔다.김 장로의 선한 양심과 헌신적인 믿음은 지금의 동부제일교회(서울 중랑구 동일로)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노력과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1973년 4월 양성우 목사를 담임으로 모시고 시작한 교회를 묵묵히 섬기면서 양 목사가 은퇴하기까지 교회 부지확장, 신축공사에 이르기 까지 교회를 책임있게 섬기며 헌신해 왔다.이처럼 김 장로는 목회자를 섬기는 열심이 뛰어나기 때문에 고신교단 목회자들도 김 장로를 높이 평가한다. 이는 김 장로의 신앙의 뿌리에서 찾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고향 진해 웅천교회(주기철 목사 기념교회) 주일학교 시절부터 주기철 목사의 “나는 온 천하를 다스림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겠노라”라는 고백을 기억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오늘의 한국교회의 평신도운동에 대해 김 장로는 “평신도 운동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확실한 단체이지만, 사회적이나 국가적으로는 활동이 부족한 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교회 내적인 면에서는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한국교회는 연합사역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하나 되는 일’에 미흡하다”고 지적했다.김 장로는 부산의 제3영도교회 교사였던 석영자(권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을 두었다. 장녀는 일본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으며, 장남과 차남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김 장로의 가정은 겸손, 순종, 화평을 가훈으로 삼고 경건한 가정을 지키고 있다.성경말씀 중에서 특히 로마서를 즐겨 읽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운동은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건강을 위해서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으로 곤봉과 아령을 즐겨 하고 있다고 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4-2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