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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40
- 세상 사람들은 욕하고 싸워도 뒤돌아서면 다 미움이 사라지는 이유는 술이란 매개체가 감정을 지워버리게 하는 것입니다.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술 취했다고 했는데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술기운이 빠진 세상 사람들의 말대로 악령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는 일입니다.왜 복음주의요, 개혁주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유대인같이 자기의 경계를 지키려고 하는가? 분명히 복음이 세 마가 된 이유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에 집착되어 있는 자일수록 내 코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분별력을 상실했을지 모릅니다.예수님처럼 하는 목회는 무엇인가?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하려고 애씀이 아니라 현장에 머무르는 것”이 진실일 수 있으며 그 일이 참된 목회요,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예수님이 언제나 내가 멈추어 있는 현장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사도행전 1장에 하늘로 오르시면서 가장 마지막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진실 그 자체입니다. 진실은 설명이 아니라 그대로입니다.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입니다. 미래에 의한 반응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것도 아닌 현재 상황입니다.그 분은 정직했습니다. 그 분의 말은 모두 정확했습니다. 그 분의 기록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부정적 행위가 없었습니다. 과장이나 축소가 없었습니다. 위선이나 위장이 없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분의 맘대로 불러낸 사람들은 모든 일 즉, 뒤집히는 일이라도 거꾸로 매달려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어떤 상황이든 내게 해로움이 오는 것 같을지라도 결과는 선한 일이요, 즉 진실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형편에 따라 뒤집히는 간절함을 다해도 그분은 더이상 그 몸부림에 대한 특별보상이 아닌 매우 정상적인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실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진실하심에 정반대되는 일을 잠언에 밝혔습니다. 그런 증상은 곧 진실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잠언서 12장 12절에는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라고 하시고 잠언서 6장 16절 이하에서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 같이 육칠 가지니”라고 하시고 다음과 같이 그 제목을 말했습니다.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하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이동휘 목사가 끝까지 예수님처럼 살 것을 강조하면서 교활한 몸놀림으로 성만찬 예배까지도 감히 꿀꺽 들이키는 파렴치한 가롯 유다를 생각해본다고 계간지인 바울 선교지에 기록하셨습니다.시편 5장 6절에서도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다”라고 기록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부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에 절대 어긋난 것임을 단호하게 규정지으신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본성만이 아주 쉽게 아주 자연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디도서 1장 2절에서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그 거짓의 아비를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하시고, 그 족보를 창세기 3장 1절 이후에 “너는 죽지 않는다”라고 여자에게 말하여 선악과를 먹고 남편에게도 준 최초의 사건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목회자가 진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진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그 이유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목회가 목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목회를 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하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왜 사업으로 생각하는가? 그것은 목회 성공이란 진정한 교회의 의미가 상실된 데서 발생한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운영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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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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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39
- 우리는 미사어구에 능숙해 있음이 곧 위선임을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목회자의 소원은 현장과 침묵입니다. 나로 인한 일이 아닙니다. 나의 삶 그 자체입니다.목회자가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원함은 있으나 감당할 만한 힘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목회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세상적의 꿈과 원함에 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조금 가다 보면 나와 아무 상관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미국의 고속도로에서 한번 출구를 놓쳐버리면 자기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는 길을 한 없이 가야 하는 따분함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면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 지도를 보는 방법과 중요한 원칙이 지도대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의 세밀함을 목적지인 길과 번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지도가 매우 잘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목회자로 부르실 때 미국 지도처럼 확실하고 정확하게 어느 곳이든 정한 곳에 정한 길로 안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찮게 보았던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이 목회자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 일은 너무 쉽고 순수하고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철의 강함은 용광로에서 철을 꺼내 해머로 친 달궈진 그 상태를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강하게 만드신 것처럼 나라는 어설픈 아무런 균형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과정을 지나가면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아닙니다. 불가능성 때문에 목회적 나의 모습이 명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인가?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은 이방 종교의 절대적인 신처럼 섬겨야 하는 분인가? 이것이야말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데 아내가 남편을 섬겨야 하는 존재인가?예수님은 예수님에 의해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인가?사 도행전 17장 24절 이하의 말씀대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예수님이 보이신 삶이 우리의 모본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어린 예수, 12살의 예수는 벌써 하나님의 소명을 알고 있었고 그는 사도들을 모으고 설교하고 기적을 베푸시고 예수는 고향의 자기 사람들에게 내려가 삶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섬긴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결국,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제사장으로 엄포나 놓고 소리나 지르고 자만하여 세상 사람과 구별된 지배자로, 해결사로, 심판자인가? 분명히 아닙니다.예수님이 하신 대로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사랑하여 본업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는 “네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목회는 가정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 듯하고 사람에게 하 듯하지 말라”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의 대상이 하나님의 중요한 선별된 사람들로 내가 마음대로 내버려두고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런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내놓은 금언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했습니다. 그 귀중한 전문직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입 밖에 습관과 버릇처럼 남을 비하시키는데 능숙한 것 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인데 그 일에 가장 숙달되고 능숙한 사람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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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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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52
- 아이들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김동인의 「김연실전」(<문장>, 1939.3)을 보면, 어렸을 적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체험이 어른이 되어서도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연실은 신학문도 배운 여성이었으나, ‘자유 연애를 자유로운 성교性交’로 착각하여 문란한 생활을 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어렸을 적에 체험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어릴 적에 그녀는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첩과 살고 있는 아버지 집에 갑니다. 그 날 저녁 그녀는 잠을 자다가 아버지의 추태를 목격하게 됩니다(김동인,「김연실전」참조). 이와 같은 사건은 평생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잘못된 편견을 심어 놓습니다. 그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며 자신이 신여성임을 자부하지만, ‘남녀간의 육체적인 관계가 자유 연애’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여성이 만나 평생 가정을 이루며 인간미 넘치게 사는 것이지요. 곧 하나님이 맺어 주신 짝을 통하여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멋진 가정을 이루며 해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부자는 행복하고, 서민은 불행’할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아니합니다. 행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몫인데도 말입니다. 행복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과 옆에 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도 천국은 죽어서나 가는 곳이고, 현실은 고해苦海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예수님은 인간이 죄의 굴레에 얽매여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몸소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곧 인간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는 떡과 물고기를, 병든 자에게는 치유를, 죽음을 앞둔 자에게는 부활을 보여 주셨지요. 이는 서민에게도 얼마든지 행복이 있음을 인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골목길엔 한가한 미로가 많다끈적끈적한 정을 대문간에 붙이고주차 구역의 정해진 행보 앞에서후덕한 마음을 촘촘히 엮는약국 아주머니의 수다에 녹는 동네 사람들세상의 무딘 소식이 미끄럼을 타고잘난 사위 강남 갔다고 너스레 떠는자전거포 주인이 꿈의 페달을 돌리고거리로 나선 사내가이래저래 먹고 살기는 하나 본데푸른 하늘에 연처럼 띄워진 시장통의 외로움씽씽 달리는 자전거의 짐칸 위에서장바구니가 시원한 낮잠을 자는 사이에행복을 전하는 배달꾼의 오토바이가휘파람처럼 골목을 휘젓는다 -「골목길」전문행복은 나와 떨어진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도 있고, 내 옆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행복을 형상화한 시를 많이 발표하여 왔습니다. 「골목길」도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가족과 이웃과 평범한 사람 들이 모여 사는 곳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개인은 누구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탄생·연애·결혼에서부터 가정과 국가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경험 양식이 자리잡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 인간미도 피어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개인의 고독에도 행복이 스며 잇습니다. 개인이 혼자 있을 때에 주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질 수 있고, 자신의 참모습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골목길을 산책하기를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이웃과의 다정한 소통이 자리잡고, 온정이 담긴 이야기들이 집집으로 전달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나는 평범한 일상에 동행하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며 찬양하는 것도 삶의 기쁨이며 활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의 이타적인 유전자를 주신 분께 감사하며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낙원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음을 상상하게 됩니다. 낙원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말구유에 나셔서 세상 사람들의 가난을 익히 체험하셨으며, 집이 없다고 낙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주에는 언제든지 필요하면 채울 수 있는 사물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게 눈높이를 맞추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일 對 일’ 관계를 챙기셨습니다.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인간의 죄를 벗어나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살과 피가 영혼의 양식이 되게 하셨으며,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신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셨으며, 사랑을 나누는 행복을 만끽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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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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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덕 장로
- 걷기운동으로 건강유지, 성경공부 설교시청, 전 근무부서 방문 친교 가져 정봉덕 장로(예장 통합 서울서노회 염천교회 선임 원로, 91세)는 매일 아침 5시 일어나 성경 말씀을 읽고, 걷기운동으로 노년의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다.정 장로는 1947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18세에 홀로 월남하여 6.25 참전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치열한 전투가운데서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절박한 신앙으로 전도를 했다고 한다. 군 생활에서도 신임을 받아 군종 하사관으로 근무하였고 1955년 전역을 하였다. 정 장로는 빈틈없는 성격과 책임감을 인정받아 당시 제1군사령부 군목이었던 황금천 목사의 추천으로 제대 후에 갈 곳 없는 청년을 총회 전도부 직원(간사)으로 사회에 진출하였다. 이어 승승장구한 정 장로는 총회 사회부 초대총무, 총회 연금재단과 복지재단 사무총장 등 교단의 중요 직책을 맡아 헌신하였다. 또한 교단 언론기관인 한국기독공보 총무국장을 거쳐 전무이사로 신문사를 경영하였으며, 전국남선교회 총무를 3년간 겸임하기도 했다. 여러 기관에서 총무를 맡아 실무적인 사무체계를 갖추게 한 정 장로에게 교단총회 100주년 기념 ‘봉사상’을 총회장으로부터 표창 받기도 했다.정 장로는 지금도 매주 2회 정도 서울 종로5가 자신이 근무했던 기관을 찾아 후배동료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 함께 근무했던 부서의 직원들과의 친목단체인 ‘덕우회’의 모임에도 참석을 한다고 한다. 정 장로는 총회 기관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기 때문에 사명감이 투철하다.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세계 NGO 104개 단체가 한국에 와서 사회와 교회를 도왔습니다. 세계기독교봉사회가 도와준 결과 교회가 부흥되었고 나라가 발전했는데 감사하면서 우리도 제3세계를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하는 정 로는 가까운 지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성경대로 복음을 전하고 구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당시에 고 박창빈 목사, 이삼열 교수, 김용복 교수 등이 중심이 돼서 외교법인 ‘한아봉사회’를 설립하는데 실무를 맡아 일하였고, 이후 사무총장으로 10년을 봉사 했다. 한아봉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우리처럼 식민지였던 제3세계는 불교 문화권이었으며, 내란을 겪은 사회주의 국가인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경제성장, 신앙의 자원이 있기 때문에 이 나라들을 섬기고 치유하고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한아봉사회는 그동안 많은 선교와 복지에 후원을 했다고 한다.그러나 정 장로는 은퇴 후에도 선교와 복지에 대한 열망으로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복지기관을 설립하여, 차 상위 계층에게 소액신용대출을 해 주는 일을 10년간 운영해 오다가 유태선 목사에게 물려주었다. 정 장로는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것은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이 맞습니다. 나라가 바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라면서 말 뿐이고 실천이 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권위를 불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배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교회답지 못한 것을 참으시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반드시 벌 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정 장로는 일상에서도 매일 방송 설교와 성경공부를 시청하면서 보낸다면서 “요즘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방송설교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많이 시청하도록 권유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정 장로는 개복수술, 위암수술, 담도수술을 받았으나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2016년에는 자신의 자전적인 글을 모아 ‘생명의 길 따라 온 걸음’이란 저서를 출판하여 감사축하모임도 가졌다. 선교와 복지, 사회봉사에 일평생 헌신해 온 정 장로는 건강하게 함께 해준 조상순 권사(86세)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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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덕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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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56
- 출애굽기에서 야훼하나님의 ‘열 마디 말씀(십계명)’을 살펴보자. 맨 처음 말씀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나는 야훼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를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내었다),’이다. 우리말과 히브리말과의 어순차이가 다르다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이 열 마디의 말씀의 권위와 무게를 어디에 어떻게 두고 있음을 분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어법과 어순은 항시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나, 그의 사도들이 자신을 드러낼 때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 열 마디 말씀은,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하신 이름과 권능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음에 역사적 기반을 두고서 하시는 말씀이다.여느 나라의 헌법을 보면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라고 된 국가들이 있으나, 유독 이스라엘 국가의 헌법 제1조는 야훼하나님에게 근거한다. 이스라엘의 헌법이 ‘종 되었던 이집트인의 땅에서, 야훼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된 백성임’에 근거한 것을 보아, 저들의 정체성이 오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선포되었고, 야훼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적인 개입에 의해서 구원을 입어 형성된 백성에게 명령하신 말씀이다. 세계에 흩어져 유랑객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이천 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건국된 것도 야훼하나님의 은총으로 형성되었음을 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지상에서 가장 단단하게 결속된 국민을 찾는다면 바로 이들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평생토록 세계 각지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복음’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로마서에서도, 이 모세오경의 말씀의 형식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17절에 이르는 문장 형식을 보면 세 가지 포고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만주의 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만왕의 왕으로서 왕관을 쓰신, 이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권자요 온 백성의 통치자이심을 알리는 포고문이다. 두 번째 포고는, 바로 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은, 이 ‘하나님의 복음’을 만 천하에 알림과, ‘믿어 순종케 하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실천하기 위해 특별히 세움을 받은 전권대사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세 번째 선포는, 바울이 선포하는 이 ‘하나님의 복음’을 누구든지 믿으면,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야만이든지 차별되지 않고 구원을 입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나라의 시민 됨을 선포한 것이다.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따로 세움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로마를 수차 방문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질 못하자, 서신으로써 그의 로마 방문 목적을 알린다. 그의 사역과 신학이 총 정리된 로마 서신에는, 그가 평생 선포한 ‘하나님의 복음’이 명료하게 조목조목 기록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나무에 달림으로써 희생된 나사렛 예수의 피 값이, 저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죄를 없이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그를 구주와 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롭게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헌신하고 거룩하게 응답해야 함을 구체적으로 명하였다.모세 오경이 독립된 다섯 권이 아닌, 한권의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 드렸듯이, 이 말씀 안에는 창조와 타락과 회개와 구원과 윤리와 심판이 모두 녹아들어있다. 오경을 받아들이고,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이스라엘 시민이 된 개개인은 저마다 이 열 마디의 말씀을 모두 수용하는 시민이다. 이 열 마디 말씀이 오경 전체에 365개 소극적인 말씀과, 248개의 적극적인 말씀, 도합 613가지 말씀으로 세부화 되었으나, 이 모든 말씀들을 잘 숙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야훼하나님의 구원과 명령의 말씀들을 수용하질 않는다면 팔레스타인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저들에게서 모세오경이 요구하는, 시민권자들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점을 찾아내려 한다 해도 쉽지 않은 것은 이 이유에서일 것이다.구원론에 의해서만 형성된 집단들에게서 나타나는 부실함이란 사회적 책임감의 허술함에 있다. 구원 받았음에만 만족을 하고, 구원으로 인해서 새롭게 형성된 그리스도의 주권과 심판,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책임과, 성령의 훈련에 대해서는 눈과 귀와 몸이 게을렀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인간처럼 된 상태에서 한국교회가 속히 벗어나려면 새로운 신학적 각성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그 신분에 합당한 의무를 강력하게 명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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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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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제45회 총회장 고성모(高聖模) 목사
- 전북 군산 출신고성모(高聖模, 1887~1972) 목사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군산은 전라북도 서북부 금강하구에 위치한 우리나라 굴지의 항구도시로 해외로 나가고 드는 서해안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항구이며, 동(東)으로는 옥구군, 서남쪽으로는 미성읍과 옥산면, 북쪽으로는 금강하구를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과 접하고 있다. 장항과 군산 사이에는 현재의 대교가 설립되기 전까지는 배로만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전래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찍이 들어와 여기저기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군산보다 선교사들은 목포와 전주에 이어 광주 순천에도 이미 래한하였고, 군산에 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은 하위렴(Rev. William B. Harrison) 부부를 비롯, Dysart Julia(1907), J-Dupuy (1938), Earle Plexandia M(1904) 등이 상주했다. 고성모가 태어난 1887년 당시의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황은 이조 말엽으로 백성들의 교육상황 또한 겨우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같은 유림들이 세운 교육기관 밖엔 없어 서민들 자녀가 정상적인 교육혜택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의식주같은 기본적인 문제만 아니라 개인의 호구지책도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 환경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것도 생활에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훈장을 초빙하여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었을뿐, 일반 서민이나 천민들 자녀들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시대의 물결을 타고 1882년 조미(朝美) 수호조약 이후 조선사회가 개방되기에 이르자 이곳 군산에도 소위 양코배기로 알려진 서구인(선교사)들의 모습을 쉽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성모도 조선 외에도 또 다른 대륙이 있고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예수교에 관한 복음의 소식이 군산에도 전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8년 총회에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上 p.72, p.103)에 보면, <沃溝郡 地境里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全緯廉과 堂地人 崔興瑞가 協力傳道하야 信者가 稍進함으로 禮拜堂을 新築하얏고 其後 崔興瑞를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를 組職하얏고 金玉汝 高聖模가 長老로 繼續視務하니라>에 이어 <沃溝郡 地境敎會가 최흥서를 장노로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였고 그후 김옥녀씨와 고성모씨가 계속시무하고 있다>고 반복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성모가 일찌기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전수받아 선교사들이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 초기 고향 옥구 지경리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 틀림없다. 군산 지경리교회 장로 시무 중 장로회신학교 졸업자유주의 신학사조 방어에 앞장선 목사제44회 총회 분열 당시 합동측 합동추진위원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총회에서 총회장 당선전주북문교회 두번 취임 후 목회 은퇴고성모는 전통 양반유교사회에서 탈피 기독교를 통해 신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평양에 있는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제27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듬해 군산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군산노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북노회 노회장은 6회나 연임한 교계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59년 소위 대전중앙교회 제44회 총회에서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분리될 당시 합동측의 합동추진위원에 선출되어 교단분열의 아픔을 치료하고자 무던히 힘을 썼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교사를 위시해 한경직, 강신명 목사쪽의 총대들이 연동교회에서 통합총회를 조직해 나가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며 분열의 현장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총회사진명감 제3권, 총회80주년기념사진명감출판위원회 배태준편 1995, 초판 p.1008~ 1009 참조).이때 고성모 목사는 1960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속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총회 총대로는 고신측에서 131명의 총대, 승동측에서 233명의 총대가 참석함으로 승동측이 당연우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괴롭고 편치 못하였다. 그가 이끌었던 제45회 총회에서 부산과 경남지역을 배경으로 한 고신(高神)측과의 합동문제가 대두되어 잠시나마 통합측의 이탈사태를 위로삼는 격이되어 고성모 목사는 노구를 이끌고 합동에 앞장서서 대업을 성취하고 같은 해(1960년)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던 총회 의장권을 영입한 고신측 지도자 한상동(韓尙東) 목사에게 넘겨주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역사상 가장 짧은 단명의 총회장 역사를 썼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예장통합측이 분리해 나간 상실함을 고신교단을 영입함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합동한지 오래지 않아 고신측 한상동 목사 중심으로 옛 고신측으로 환원함으로 양교단 합동의 명분이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총회 회의록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 고성모 목사는 1934년 제23회 총회에서 만국주일학교 장년부공과 53면 8행 이하의 기사 중 창세기 저자가 확실치 못하다는 문구(文句)가 확실치 못하다는 사실을 총회에 제의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 달라고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당시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가 기독신보 제977호에 <장로의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글에 자유주의신학사상이 나타남을 언급, 바울이 “여자는 조용히 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천년 전에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고 진술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서는 연구위원으로 라부열 선교사(1901년), 부위령 선교사(1898년), 염봉남 목사, 윤하영 목사, 박형용 목사에게 1년간 연구케 하고 오늘 총회에 보고토록 하였는데 그 내용(1935년 24회 총회보고)을 요약하면 첫째,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교역자는 장로회 신조 제1조를 위반되는 자임으로 우리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 둘째,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를 옛날 한 지방교회의 풍속도로 비하하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지적하고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추어 곡해(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고성모 목사는 총회 총대로써 총회에 침투하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사조를 방어하는데 처음 공을 세운 총대였고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고성모 목사는 군산과 옥구 고향에서 목회하던 중 그의 생애 후반부는 전주북문교회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1955년 1월 1일 부로 전주북문교회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 사역했다. 그가 시무 중 1954년 1월 8일 정읍제일교회에서 김신일 장로가 이명하여 왔고, 그후 타처로 이임하였다가 1960년 10월 1일 다시 청빙되어 북문교회를 섬기었다. 전주북문교회는 고성모 목사(제45회 총회장)에 이어 현 시무목사인 이기창 목사가 제96회 총회장(2011년 9월)이 됨으로 한 교회에서 두 명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고성모 목사가 두 차례나 청빙받아 목회한 전주북문교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북문교회가 설립된 계기는 6.25전쟁이 발발 3년이 지나고 있던 1953년 1월 2일 전주시 금암로 195번지 최경천씨 자택에서 기장과 막 분열된 직후 박진서 장로를 중심으로 33인의 성도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물든 금암교회로부터 아무런 조건없이 탈퇴하여 순수한 성도들의 헌금으로 당시 싯가 4,000원으로 전북동 소재(현, 한진고속터미널 건너편 팔달로변) 가택 한 동을 매입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전주북문교회>란 간판을 달고 시작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역대 교역자로는 장학산 전도사, 정기한 목사, 고성모 목사, 서기선 전도사, 성갑식 목사, 이시문 목사, 강기홍 목사에 이어, 다시 고성모 목사, 김상업 목사 이기창 목사(10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교세는 (1995년) 연 예산은 7억, 신도수 2,300명에 이르는 중형교회로 성장하고 있다(총회사진명감 제4권, 예장총회사진연감 편찬위원회편 1995, 서울 초판 p.891참조).고성모 목사가 재임했던 예장 제45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보면, ① 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 합동하기로 하다. ② 예배 끝의 축도는 “있을찌어다”로 일치하게 실시하기로 하다. ③ 고려파와 합동원칙 방안 등을 결의하다. 고성모 목사는 1972년 짧지않은 85세를 일기로 후손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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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제45회 총회장 고성모(高聖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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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한 진리
- 진리는 영원하다. 진리 안에 사실이 있고 사실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 이는 인간사회에서 삶을 통하여 사실과 진실이 진리 안에서 드러난다. 진리란 참된 도리나 바른 이치를 말한다. 그리하여 진리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으로 참을 알게 하기에 거짓이 없고 바르고 참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진리는 영원하다. 이 진리 안에는 사실이 있고 사실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 그러므로 참된 삶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므로 영원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진리의 정의이다. 그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고소로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그는 주님으로 지상의 생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진리를 증언하는 삶의 목적임을 사실로 증언하기 위해 "진리가 무엇"임을 보여주며 '만 왕의 왕'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무엇인가를 친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서적으로 '진리'란 참되는 사실을 진리 혹은 진실이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들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과 의의 교리도 진리가 된다. (갈2:5,14). 또한 마태복음 24:35에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 함을 알게 된다. 오는 5월9일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일이다. 여기에 대통령 선거를 두고 많은 대통령 후보자들이 서슴지 않게 말을 함부로, 사실이 아닌 권모술수로 함부로 말놀이로 사실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함을 본다. 여기에는 사실과 진실이 숨겨 저 있음을 본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동안 근대화 추진 과정의 부작용으로 인해 사회 전반이 갈등과 모순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에 기인하여 물질 지상주의와 실용주의로 부를 축적한 사회는 배금주의에 빠지고 도덕적 가치가 목표를 잃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이런 현상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일탈 현상을 보게 된다. 이는 인지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의적인 가치의 문제로 번져 서로 양극적인 대립현상으로 혼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다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비방과 인신공격 등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는 사실이 은폐하고 진실이 외면당한 채 말의 공방은 상호 비방과 인신공격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선거에서 익명성으로 대변하는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이 '아니면 말고'식의 명예훼손과 흠집 내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여기에 사실과 진실을 교묘히 호도하여 개인과 집단과 조직을 무너뜨리기도 하며 여기에 정치권은 법과 언론을 장악하여 상대의 정적을 무력화 시키면서 자기들의 이론을 합리화 하여 사실과 진실을 분리시켜 법과 언론을 교묘히 활용하고 있다. 이는 진실 화 되지 않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표하고 정보를 흘림으로 진실의 여부에 상관없이 여론 재판에 의해 무너지는 효과를 노리는 작태를 보게 한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과거 선거 역사가 이릉 증명하는 진실의 자리였으며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살아왔다. 진실이란 거짓이 드러나는 것을 말하고 사실은 거짓이 없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알게 한다. 이렇게 진실은 지혜를 수용하고 사실은 지식을 수용함을 알게 한다. 지혜와 지식은 성(性)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지혜와 지식의 차이이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움으로 틀에 박히지만 지혜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며 사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지식 있는 삶보다는 지혜로운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도 많이 사용할 줄 알지만 지식은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지혜가 없으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요 시체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은 생명의 명령을 받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삶에 명령하는 것으로 생명(生命)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라 할 때 사람, 인간으로 살아있음의 생명이 태어나고 기르며 살면서 성장, 성숙하며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는 사실과 진실이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삶은 사실이어야 할 의무로 계획과 하늘의 말씀들의 심판으로 법과 예언들의 약속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들은 인간의 영적인 생명을 지탱하고 그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강하고 살아 약동하는 하나님의 호흡이 그 순간순간에 말씀으로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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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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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7
-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17. 진리를 지킨 왈덴스 사람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곡해하고 그릇되게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멸망당하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해 왔다. 이러한 사탄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교(異敎)의 풍습들과 로마의 정치와 기독교 교리가 혼합된 상태로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등장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출현은 매우 고무적이고 성공적인 기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단지 교권의 힘에 의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매우 피동적으로 변질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의 말씀을 변형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하며 지켜온 소수의 무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로 무장한 신실한 종들은 그 진리를 수호하는 일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이나 희생도 감수하였으며, 심지어는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때로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며 지켰다. 진리의 수호자들이와 같이 진리를 지켜 내려온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이단자들이다. 교권을 지배하고 있는 다수의 세력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고 그들의 성품은 중상모략을 당하고 그들의 주장을 기록해 놓은 저서들은 몰수를 당하고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채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노아가 그러했고,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예수님도 그 시대의 이단자였고, 사도들이 그러했다. 사도들에 의해서 전수된 복음의 진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이단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변질된 교리가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어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단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졌고, 정통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감소되어 급기야는 소수로 남아있는 정통이 이단이 되고 세력이 커진 이단이 정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어온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정통성을 가진 진리가 보존되기 힘든 이유가 몇 가지 있다.첫째는, 인간의 본성이 죄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통 교리를 따르기 보다는 인간의 성향에 맞추어 보다 편리하고 쉽게 믿을 수 있도록 변질된 교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통에서 벗어나서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교리와 가르침에 물들어 익숙해진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고 술수를 사용하여 사람을 기만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조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는 무력과 폭력을 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나면 자연적으로 비정통 교리를 따르는 무리들의 수는 증가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충실한 사람들의 수는 감소하기 때문에 다수가 소수를 압도하게 되고 정통 교리와 진리를 추구하고 수호하는 사람들은 일반 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권이 확장되고 세계의 역사가 종교암흑시대로 접어들면서 진리를 가진 소수의 무리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숨어 있었다. 부자 상인 왈도의 신앙과 그의 활동가톨릭 교권의 영향력이 강성해지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 12세기 초에 프랑스 리옹 출신의 왈도라는 사람이 이끄는 개혁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왈도는 상업을 하여 부자로 살던 사람인데, 기독교 진리를 배운 후에는 그 진리를 지키고 보존하고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투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도움을 많이 베풀었고, 그의 순수한 자선적인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이 일어났다. 특별히 왈도의 주변에는 그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정통 진리를 수호하고 보존해 왔던 후예들이 많이 있었고, 왈도의 재력과 지도력의 결과로 그들의 활동은 큰 활력을 얻게 되었다. 왈도를 따르는 무리들은 가톨릭의 배도에 과감하게 저항하여 그 교회가 가르치며 주장하는 연옥설, 미사, 마리아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비성경적인 가르침들을 배격하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준임을 주장하였다. 역사를 그들을 ‘왈도파’ 혹은 ‘왈덴스인’이라고 부른다. ■ 왈덴스인들이 남긴 교훈왈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던 사람들이 왈도와 연결되었고, 그 후 또 다른 개혁파들이 왈도의 무리들과 연합하여 개혁 사업을 이루어 갔다. 후에는 이들을 모두 ‘왈덴스인’이라고 부른 것 같다. 어쨌든 이 왈덴스인들의 순수한 신앙과 그들의 열정은 후일에 일어난 종교개혁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오늘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 개혁을 위하여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중시할 뿐만 아니라 말씀의 교훈을 따라 살았다. - 왈덴스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하여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할 정도로 말씀 보존에 충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평화주의자들이었다. (2) 그들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삶의 고통과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 그들은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를 따라 살기가 불가능해진 현실 사회를 떠나 궁벽한 산속에서 삶의 온갖 고통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는 일에 그들의 인생을 바쳤다. (3) 그들은 진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자녀의 신앙 교육에 철저하였다. - 왈덴스인들은 그 소중한 성경의 진리를 후 세대에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녀들을 세속 교육에 위탁하지 않고 목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자신들의 가정에서 철저하게 성경 중심의 교육을 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환난을 견디고, 부모나 지도자들의 통제에 순종하고,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4) 그들은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였다. - “왈도파는 성경과 신앙 서적으로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들은 행상인으로 시골집이나 귀족의 성을 방문해서는 직물이나 보석을 팔려고 내놓았다. 그리고 다른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예, 아주 진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보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불붙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들 행상인들은 보배로운 두루마리 성경을 꺼내어 놓았다.”<아미티즈(Armitage), “침례교도 역사” I. p. 301>.(5) 그들은 배도하고 타락한 교권에 저항하여 오류를 지적하면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 그들은 용감하였다.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지나쳐 버리지 못하는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타락한 권세나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하나님이 사자들이었다. [결론] 가톨릭의 무력과 폭력으로 수많은 왈덴스인들과 개혁 신앙인들이 순교를 당하였지만, 그들이 흘린 피 때문에 진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성경의 능력이 아직도 역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서 보존해 온 진리를 너무나 쉬운 거래를 통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표준을 현실에 맞추어 평가절하시켜 조절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통절히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우리는, 이제 다시 제 2의 종교개혁, 신앙개혁을 위하여 깃발을 들고 일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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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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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6
-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16. 진리의 등불이 꺼진 암흑세상천지를 개벽시킨 예수와 그 제자들의 엄청난 위력의 효과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사탄의 집요한 방해와 전략도, 세상의 어떤 공격이나 핍박도, 폭발적으로 번져나가는 성령의 능력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제자들의 능력 있는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께로 나아왔다. 하루에 수 천 명씩 세례(침례)를 받아(행 2:41)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천국 복음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지나 로마 전역으로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로마 유수한 귀족들이나 권세 있는 자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서기 60년대에 등장한 사악한 황제 네로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그 박해의 불길은 네로 이후 약 10대의 걸친 황제들을 통해서 매우 조직적으로 잔인한 방법으로 감행되어 이제 막 태어난 기독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더욱 단합된 힘으로 로마에 저항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수는 오히려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입증해 주는 다음과 같은 세계사의 기록이 있다. “이 일신교(一神敎 : 기독교)는 로마의 다신교(多神敎)와 충돌하여 280년간 역대 황제들의 사정없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도들의 열성과 붉은 피는 나날이 신도를 늘게 하니 콘스탄틴 황제는 마침내 그 신앙을 공인하였다.”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과 기독교 타락콘스탄틴은 매우 영민한 황제였다. 그가 통치하고 있는 로마 제국 안에 거대한 두 종교집단이 있었는데, 한 무리는 기독교도들이었고 또 한 집단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스라 교도들이었다. 콘스탄틴은 이 두 무리를 하나로 연합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하면서 의도적이고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경쟁자였던 멕센시우스와의 전투에서 기독교의 신이 자기를 도와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침내 콘스탄틴은 서기 313년에 밀란칙령을 내려 그 동안 박해하던 기독교에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군복무 면제, 세금 면제 등 많은 특혜를 베풀었고 기독교인들을 선대(善待)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AD 313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은 당시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들에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핍박을 당하던 교회 지도자들이 황제의 인정을 받고 후한 봉급까지 받게 되니 이교도(異敎徒) 사제들도 기독교로 함께 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제들이 개종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의한 형식적인 개종이지 실제적인 개종은 아니었다.”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스라교가 혼합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도들의 수(數)가 크게 증가하여 기존의 기독교인들의 세력보다 더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기독교는 이제 세상에 영향을 주는 종교에서 이교도의 영향을 받는 종교로 변질되었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콘스탄틴이 시도했던 매우 교묘한 전략 중의 하나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의 신(하나님)을 믿도록 권장하는 과정에서 이교도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예배일(일요일)을 기독교에 접목시킨 것이다. 그 당시 태양신을 섬기던 미스라 교도들의 예배일은 일요일(Sunday)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배경을 가지고 콘스탄틴은 마침내 321년에 일요일 휴업 법령을 반포하였다. 물론 이 날에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은 아니었지만, 자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위가 조성된 것이 사실이고, 바로 이것이 효시가 되어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에서 일요일을 공휴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역사적 기록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원래 일요일을 중히 여기는 일은,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나 ‘미트라주의’(Mithraism)에서 ‘태양을 존경하는 날’ 즉 Sun-day로 ‘태양’이라는 일(日) 요일이었고 태양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이들과 동화하기 위해서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주님의 날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기독교에 유입되는 오류와 함께 탄생한 가톨릭그후, 기독교 안에는 이방신들을 섬기는 수많은 풍습들이 들어와서 기독교의 본질은 왜곡되었고 세상을 비추고 있던 성경의 진리의 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암흑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그 당시 이교도로부터 기독교로 유입된 풍습과 교리들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부활절행사 도입(325년), 로마교회 감독이 이교도 승원장 겸직(378년), 로마 교회 감독을 교황이라고 호칭(590년), 마리아 숭배(800년), 묵주기도(1090년), 종교재판소 설립(1184년), 화체설(1215년), 고해성사(1215년), 평신도 성경 금서(禁書)(1229년), 연옥설 확정(1439년), 면죄부 판매(1506년), 영혼불멸설(1513년), 교황무오설(1870년) 등. 이 외에도 이방 종교를 본 받아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었고 성경 말씀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며 오랜 세월동안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어 지배한 교회가 바로 가톨릭교회이다. 기독교가 가톨릭교회로 변질되고 발전한 과정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① 서기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란칙령 이후 기독교는 세속화, 정치화, 이교화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기독교 안에는 이교도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면서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교도들이 기독교의 분위기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② 서기 331년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옮김에 따라 로마 교회의 감독이 로마의 실질적인 주권자가 되어 그 세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③ 니케아(AD 325)와 콘스탄티노플(AD 381)의 두 공의회(公議會)를 거쳐서 “보편적인” “일반적인”의 의미를 가진 “가톨릭”(Catholic)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교회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④ 당시 교세가 가장 크고 강력했던 로마 교회 감독의 지위와 권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378년에는 로마 교회 감독이 이교도의 승원장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⑤ 395년에는 로마가 동서(東西)로 분리되었으며, 서로마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476년 완전히 패망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 교회의 감독이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에서는 가장 큰 권력자가 되었고, 동로마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⑥ 590년에는 로마교구 감독 그레고리에게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후에 동로마 황제 포카스가 607년에 교회의 수위권을 로마의 대감독 보니파시오에게 수여하므로 ‘교황’ 명칭을 공식화 하였다. ⑦ 그 후로 교황의 세력과 권위는 점차로 확대되고 강성해져서 마침내 로마의 황제도 교황의 말에 복종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시킨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카놋사에 찾아가 용서를 구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그 당시 교황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가톨릭교회는 이와 같은 풍토와 배경에서 자라난 ‘변질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그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본질상 변함이 없고 정치적 요소와 이교적 요소들이 혼합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교회이다. 아마도 개신교의 어느 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연옥설이나 마리아 숭배나 고해성사를 가르친다면 당장 이단으로 정죄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톨릭교회를 정통교회라고 인정하면서 함께 연합하려고 하는 오늘날 일부 한국 개신교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지금 한국교회는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만 하는 절박한 위기의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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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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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제92회 총회장 김용실(金容實) 목사
- 충남 서산 출신김용실(金容實, 1945. 2. 10~) 목사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 역시 우리나라가 일제하에서 36년이란 긴 터널속에서 광복을 예상할 수 없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태어났으니 그의 장래 역시 한치 앞도 가름할 수 없는 가난과 고통, 혼란과 배고픔 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고학으로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가 태어난 충남 서산(瑞山)은 충남 서북단 반도부에 위치한 지역이나 동쪽으로 예산 당진으로 이어지고, 동남쪽은 홍성, 북쪽은 황해에 접해 삼면은 거의 바다에 싸여있어 해상교통의 요지이나 서울로 가는 육로는 그리 발달하지 못한 곳이어서 주민들의 말투가 상당히 느리다. 이런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어느 집에 남매가 있었는데 오빠가 군에서 휴가를 왔다가 기간이 다 되어 기차역에 나가 이별을 하며 동생이 오빠를 향해 ‘오빠 잘 가유’라고 하는 소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차내 방송은 다음은 용산역입니다. 내리실 분들은 소지품을 잘 챙겨 안녕히 가십시오 하더라는 웃으게 소리가 가끔 나이 많은 노인들 대화속에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을 박차고 서울에 올라온 용실 소년의 용기와 기개는 참으로 대단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변찮은 직장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당시 광복 이후 설립된 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중앙신학교는 종로 세운상가에 이호빈 목사가 야간학교로 운영하고 있었다. 용실 청년은 이 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행복한 학창생활을 할 수 있어 그나마 고향을 뒤로하고 의지할데 없는 서울이란 곳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행운아였다. 그는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에서 교내 설교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훈련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장총회신학교에서 목회지망생 특별과정 모집 소식을 알고 응시하여 합격해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운영하고 있는 총회신학교 별과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는 1971년 3월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5일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이듬해 1972년 10월 16일 목사로 임직 받았다. 그가 총회신학교를 다닐 때는 서울의 성도교회 임묘선 권사님의 후원으로 신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신학교를 마친 김용실 전도사는 신학생 시절 후원했던 권사님의 도움으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흥2동 284의 40번지에 연정교회(姸正敎會)를 설립하여 부임하였다. 중앙신학교 거쳐 총회신학교 졸업성남시에 연정교회 개척 설립분당 신시가지에 대지 구입 교회 건축제92회 총회서 부 총회장 거치지 않은채 총회장 당선‘연정교회’는 ‘꿈과사랑의교회’로 명칭 변경땅을 기증한 임묘선 권사와 함께 1971년 5월 1일 교회를 시작, 6월 29일 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렸다. 입당예배시에는 새신자 3명이 참석하여 가족들과 함께 하는 감격적인 감사예배였다. 다시 1973년 2월 1일 수정구 신흥2동 284-37에 48평 부지를 매입하고, 1975년 7월 15일 본당을 증축했으며, 1977년 8월 1일 새성전 건축에 들어갔다. 같은해 11월 28일 새성전을 완공해 봉헌예배를 성황리에 거행하였다. 1984년 3월 4일 교회설립 후 처음으로 박재용 김정웅 장로 장립으로 조직교회로 발돋움하는 토대를 마련, 처음으로 당회를 조직해 교회는 정상적인 행정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같은해 6월 12일 김용실 목사 위임식을 노회 위임국 주관으로 성대하게 치루었으며, 조직교회로서 힘차게 출발하였다. 1985년 3월 16일 수정구 복정동 523-1 번지에 새로운 새 성전시대를 열기 위하여 대지 520평을 매입하였고, 1991년 6월 30일에는 교회설립 2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같은해 10월 31일 분당 신시가지 수내동 21블럭 630평의 대지를 다시 매입하였다.1992년 1월 8일 김노미 황선옥 김규례 김정희 유효순 박난양 최경란 황금순 권사취임예식이 있었고, 1994년 5월 1일 현재 대성전 건물을 착공해, 같은해 11월 28일 온 성도들과 함께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리하여 연정교회란 이름으로 설립된 교회는 중대형교회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2천년대에 이를 즈음엔 3000여명에 이르는 성도 수만 보아도 개척자인 김용실 목사와 당회원들과 성도들은 모두들 감사 감격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11월 26일 건축기술설계부문에 이름있는 정림건축설계사와 새성전 신축공사 계약 체결을 하고, 대지 1,000평에 연건축 면적 2,835평 규모의 교회건축에 들어갔다.2002년 4월 7일 김주량 집사를 장로가 장립됨으로 당회가 보강되었다. 5월 1일 교회건축허가가 구청으로부터 떨어졌고, 9월 2일 이레종합건설회사와 건축도급계약을 체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99번지에 새 성전공사가 착공되었다. 9월 8일 온 교우들이 모여 착공감사예배를 드렸다(현재 꿈과사랑의교회 Computor 파일에 담긴 내용 정리, 2017. 5. 26 정리함).9월 28일에는 남상목 조규술 장로 장립과 강두애 집사 외 55명의 권사 취임식이 있었다. 2007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본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92회 총회가 회집되어 본교회 담임 김용실 목사가 총회의 수장(首長)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는 기쁨을 맞이하였다. 그 해엔 유독 목사 부총회장 후보가 4명이나 입후보해 3명이 제비를 뽑지 못하고 나머지 한명인 김용실 목사가 빨간색의 제비 구슬을 뽑아 예상 외의 인물이 부총회장 후보가 총회장으로 뽑힌 극적인 순간이어서 총회를 개최한 연정교회 교인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총회 대의원들은 모두가 놀랐다. 일부에서는 총신대학교 본과(신학대학원) 출신이 아니어서 불가 여론도 있었으나 총회장으로 당선 선포가 되어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꿈과사랑의교회 원로장로 김주량 장로의 증언 2017. 5. 1). 2009년 12월 16일 박주명 장로가 장립해 당회를 보강하고, 2012년 9월 2일 본교회 개척설립자 김용신 목사가 원로목사로 취임과 동시에 은퇴했다. 그 해 10월 31일 제2대 담임목사로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의 아들 김동원(金東元) 목사가 본교회에 부임하였으나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사망하게 되어 잠시동안 교회는 검은 시름과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당회원들 중심으로 새로운 도약의 문턱에 큰 시험에 들지 않을까 염려하며 기도하던 중 교회는 중의를 모아 2015년 1월 1일부로 그동안 사용해 오던 연정교회라는 이름을 ‘꿈과사랑의교회’로 바꾸고 새 헌신과 봉사를 다짐하며 기도하던 중 2015년 11월 1일부로 총신대학교 교수로 사당동 기숙사 사감으로 있던 김동진 목사를 청빙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2016년 1월에 미국 유학(Fuller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한 육군 군목(대위 예편) 출신 박종건 목사가 수석부목으로 동사목사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매진하고 있다. 김용실 원로목사는 예장 총회산하 친목모임인 예장증경총회장협의회 회장(2015년)으로 인생의 남은 이력을 교단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있으며, 사모와의 슬하엔 1남1녀가 있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92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총회기간을 하루 연장하여 매년 9월 3차 주일 후 월요일 오후 2시에 개최하기로 하다. ② 대회제 실시는 제도적 요건을 충분히 갖춘 후 시행키로 하다. ③ 21세기 교단비전계획을 승인하고 총회임원에 맡겨 추진하기로 하다. ④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은 지속사업으로 민족복음화 대부흥운동을 추진키로 하다. ⑤ 영주권자도 총회상비부장 및 총회임원 입후보자 자격을 주기로 하다. ⑥ C.E(청년면려회) 연령제한을 50세까지 하기로 하다. ⑦ 이단관련 위위원회를 이단대책상설위원회로 통합키로 하다. 김용실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에 투신, 오직 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인물로, 후배들에게는 큰 격려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지도자로 한국교회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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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제92회 총회장 김용실(金容實)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