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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4. 제84회 총회장 김도빈(金道彬) 목사
    전남 정읍 출생김도빈(金道彬 1933.9.14~) 목사는 전라남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정읍은 동쪽으로 임실군과 완주군, 서쪽으로는 부안군과 고창군, 남으로는 순창군과 전남 장성군, 북쪽으로는 김제군과 인접해 있다. 정읍도 대부분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이 지역 출신 인사들에게 풍기는 인삼 또한 푸근하고 도량이 넓어보인다. 정읍 지역은 미국 남장로교 목포지부 관할이어서 비교적 일찍 복음이 전해졌다. 금강 수로(水路)에 접한 구암교회, 만경강 수로의 송지교회가 전파 중심지가 되었고, 서북부 지역은 부위렴(W.F. Bull 1903~1938)과 하위렴(1904~1909, 1913~1928), 어아력(A.M. Earl 1906~1910), 매요한(J. Mac Eachern 1912~1917), 인돈(W.A. Linton 1931~1938) 등의 선교활동으로 남장로교가 확산되었고, 서남쪽으로는 전위렴(1896~1908), 최의역(1910~1916), 이눌서(1903~1909), 배요한(J.B. Vail 1931~1932)의 선교활동으로 김제, 정읍, 금구, 부안, 고창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도빈 소년이 태어난 1930년대는 이들 선교사들의 활동지역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도 도빈은 부모님들의 관심과 선교사들의 돌봄이 겹쳐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큰 환란없이 잘 지내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젊은이들에겐 희망이 되었던 조선대학교 법정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하였다. 해방 후 혼란했던 사회를 목격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에게 법으로 정의사회를 이루고 신생국이 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큰 꿈을 꾸고 있었으나, 광복이 되었으나 해방공간 3년을 지나며 그가 가야할 길과 방향에 큰 회의를 갖게 되고, 이어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이 발발, 사회는 혼돈과 무질서에 휩쓸리고 만다. 이러한 때에 사회는 이념과 이데올로기 사상과 자유주의의 대립이 극에 달해 정국이 혼란에 혼란을 더하게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하다가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 갓 설립된 오늘의 총신대학교가 된 장로회신학교(현, 총회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대가인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문하에서 장차 한국교회와 세계복음화를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품은 채 열정을 다해 신학과정을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된다. 그는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2년 후 강도사를 거쳐 전남노회에서 목회자로 출발하기 위해 목사장립을 받고, 지금의 정읍성광교회에 부임한 것은 1970년 10월 9일이었다. 그는 정읍성광교회에 부임한 후 오늘까지 한 교회에서만 목회에 전념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가 부임한 성광교회는 1946년 10월 10일 정읍제일교회에서 분립해 나온 교회이다. 개척할 당시만 해도 사회혼란이 지속되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정읍제일교회에서 나온 이시문의 사가(당시 정주읍 연지리 338)에서 18명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한 것이 시원이 되어 오늘의 대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 전신) 졸업전남노회서 목사안수 받고 정읍성광교회 부임평신도 양성 위해 전서고등성경학교 설립전북신학교 교장·총회 MIT 이사장 역임처음엔 정읍제2교회라는 교회간판을 달고 시작해 이시문 목사에 이어 김홍래 목사가 부임 시무하였다. 그후 제3대 담임목사로 김도빈 목사가 위임목사로 청빙받아 오늘까지 30년 넘게 승리로운 목회를 이어오고 있다. 1995년 현재 정읍성광교회 교세는 전체교인 2,577명(학생 957명, 장년 1620명)에 이르고 있으며, 교회의 포어로 “말씀으로 변화받고 성령으로 권능받자”이며, 교회의 목표로는 “새 성전의 꿈을 실현하자”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내적인 성장 선상에 머물지 않고 밝은 세상으로도 눈을 돌리자는 비전을 제시하고 단독선교사 2명 파송에 이어 협력선교로 8개처, 농어촌교회 34개 교회 지원 등 한걸음 더 나가 교회의 인재양성을 목표로 재정형성을 계획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정주시 변두리에 4,780평의 대지를 확보, 그 위에 단층 450, 연건평 2000평의 현대식 새교회를 신축하기 위하여 설계 중에 있다. 김도빈 목사와 함깨 교회를 섬기는 정읍선교회 당회원들로는 김형국 김관옥 노점수 고재만 김형래, 김인황, 이승룡, 이현이, 이영준, 은퇴장로로는 이태규, 임병련, 김재근, 김천은, 김헌일 등이 함께 야긴과 보아스 같이 믿음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한편 당회장 김도빈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목회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스스로 자기 계발에도 힘쓰고 있다(총회사진명감, 제3권 배태준 편, 총회사진명감편찬위원회 1995, p.972-973 참조).김도빈 목사는 노회 산하에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전서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고, 교단 인준 전북신학교 교장, 총회 목회신학원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아울러 전북경찰청 경목회장과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총회MIT 이사장과 현재 Biblical 신학원 부설 목회신학원 강사이기도 하다(한국교회목사총람, 강춘오 편, 교회연합신문 2000 서울 초판 p.61참고).그의 이와같은 헌신과 봉사를 어여삐 여기사 그를 1998년 9월 총회에서는 교단의 부총회장으로 당선이 되었고 이듬해 1999년 9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그가 섬기고 있는 정읍성광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4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자리인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그가 재임했던 예장 제84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헌법수정안을 통과하다. ② 동서울노회 분립(동서울노회·성남노회)을 허락하다. ③ 기독신문 사장, 국장은 총회 총대 및 총회적 부서의 위원이 될 수 없다(제76회 총회결의 재확인). ④ 주일예배 외에 임직식·야외예배는 할 수 없음(제41회 제63회 총회결의 재확인). ⑤ 교단(통합) 교류는 총회 허락없이 할 수 없음(제82회 결의대로 개교회 강단교류는 당회장 책임하에 교류). ⑥ 예수전도협회(대표 이유빈)에 대해 본 총회산하 교회는 관계하지 못한다. ⑦ 열린예배는 금지하기로 하다. ⑧ 신 칭호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당하다. ⑨ 기독교장례는 매장을 원칙으로 하되 매장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화장도 가능하다(제100회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찬주 편, 예장총회 2016 p.34 참조).마지막으로 김도빈 목사의 설교 한 편을 통해 그의 목회관과 목회철학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총회 역대총회장의 증언에 실려있는 설교 “겨레여 하나 되자”(겔 37:15-23)와 “오늘의 교회변화”(요한 2:1-11)에 보면, 겨레여 하나 되자에 2006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공동선언문을 서문에 언급한 후, 첫째 화해시대를 잘 수용하자. 둘째 7000만 민족이 단합하자. 셋째 하나님의 주권으로 통일된다라는 소제들을 나열하고서 우리 모두는 지난 날의 쓰라린 역사를 간직하면서 오늘의 화해물결을 마음 열고 수용하자. 그리고 우리 7000만이 방관자가 되지 말고 손에 손잡고 연합하여 평화통일의 주역이 되고 세계선교에 선두에 서는 민족이 되자고 호소하고 있다.오늘의 교회 변화에서는 한국교회 변화가 어디서 올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꿈을 가져라. 노아는 악의 종말을 보며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확신을 가졌고, 바울은 세계복음화를 꿈꾸었다. 둘째, 말씀에 순종하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데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 외에는 없다. 셋째 성결에 힘쓰자. 물이 포도주가 되는데는 깨끗한 한 마디가 필요했듯이 오늘 우리 신자들도 자신을 성결케 해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 기독교는 130년의 역사로 천년의 불교를 앞지르고 200년의 천주교를 앞섰지만 윤리적 도덕적으로 뒤지고 있다. 성도들의 변화와 회개없이는 절대로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없고, 윤리가 바로 회복되기 전에는 참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적이며 복음주의적이며 신적 우위의 목회철학이 배여있는 설교라 생각된다.김도빈 목사는 오정희 사모와 슬하에 2남2녀가 부모들의 신앙을 이어 내일의 한국교회 일꾼으로 세움받아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1-03
  • 이진호 장로
    오전에 각종모임 참석, 오후엔 몸 불편한 아내 돌보며 집안일 전념 이진호 장로(84세, 기감 성광교회 원로)는 몸이 불편한 아내를 방문요양사가 돌보는 오전시간에 주로 외부 모임과 활동을 하고 있다. 오후시간에는 아내의 병 간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강지처(糟糠之妻)란 말이 있는데, 병고로 어려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요.”매주 목요일 7시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모이는 구국조찬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그 외에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등 전 회장과 임원들의 모임 등에 참석한다. 이 장로가 노년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 세 번 정도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면서도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열정이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비결인지도 모른다.이 장로는 감리교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나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평범하게 교회를 섬기면서 35세에 일찍 장로로 임직을 받았다. 본 교회에서는 교회학교 교사를 50여년 간 맡아 헌신했으며, 재정위원장을 비롯하여 여러 부서를 밑아 봉사하였고 특히 건축위원장으로서 교회당 건축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감리교단에서는 전국남선교회 부회장, 중부연회 남선교회 회장, 교회학교연합회 초대회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등 많은 직책을 맡아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와이즈맨(세계대회 준비위원)과 국제기드온협회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태극기 달기운동’, ‘무궁화 심기운동’, ‘농촌 살리기운동’ ‘법무부 청소년 교화’ 활동 등 사회활동에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이 장로는 교단 선교위원장 시절에는 중국 하얼빈 남강교회 성도들을 이주시켜 지금의 ‘임마누엘교회’(담임 이미란 목사)를 세워 주일낮 2만 여명이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시키기도 했다.이 장로는 군(軍) 생활에서는 학도병 시절 중대장 임무를 맡아 사병 220명을 전도했고, 그중에서 192명이 세례를 받게 하는 놀라운 전도활동을 하였다. 또한 교단에서는 감리교단이 재산문제 분쟁에서 일영연수원을 지켜 내는 일에 연회감독들과의 세력다툼에서 무리 없이 방어하기도 했다.이 장로는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을 맡아 협회 사무실을 확보하여 유지하게 하였고, 교계의 연합과 일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저는 모든 이권에 휘말리지 않고 곧고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분야에서 일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라고 회고했다.이 장로가 교계에서 존경하는 인물은 한경직 목사와 의사인 문창모 장로, 언론인 김경래 장로를 꼽고 있다. “모두가 한국교회에서 보배와 같은 인물이며 존경을 받고 있지요.”라고 말한다.이 장로는 윤현숙 권사(80세)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자녀들을 기도와 신앙으로 잘 키웠지만 목사가 된 장남과, 차남을 연이어 일찍 하늘나라에 보낸 그 충격은 말 할 수 없었다. 그 충격으로 윤 권사는 병(病)져 눕게 되었고, 이 장로의 간호와 돌봄이 매일 같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장로는 아들의 조위금과 자신의 돈을 합하여 1억 원의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15년간 이어 오고 있다고 한다.이 장로는 “우리 교계는 파벌이 너무 많고,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용심이 적어요. 바라기는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단합하고 하나가 되어 통일로 가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라고 그동안 연합운동을 해오면서 느낀 바를 토로하기도 했다.이 장로가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말씀은 요한복은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며, 좋아하는 찬송가는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다. “저는 모세와 같이 건강한 삶을 사는 동안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남은 생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온갖 역경과 환란이 많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은혜라고 말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11-03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7
    BC 6세기 이전부터 그리스에서는 연극이 성행하였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일이 다가오면 희곡을 공모하고 거기서 뽑힌 작품을 가지고 제작자를 공모하여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하였던 것이지요. 마이크 시설이 없던 시절에 배우들이 어떻게 수천 명의 관객을 상대로 공연할 수 있었을까요? 초기에는 코러스(합창단)를 동원하여 노래를 통해 연극의 줄거리를 알려 주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가 전면에 나서게 되지요. 대개 희랍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아서 관객들은 관객석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연극을 관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배우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게 되는데, 그들은 멀리서도 관객에게 잘 보이도록 하이힐을 신고 망토를 둘렀으며 가면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면 위에 등장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었기에 관객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표정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는데, 나는 노래할 때 표정을 살려서 노래하는 편입니다. 내가 코미디언 이주일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주일(본명: 정주일)은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60년 ‘문선대’에서 코미디를 시작하여, 1965년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였습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1980년 TBC의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로 본격적으로 방송 데뷔를 하며, MBC <웃으면 복이 와요>로 늦깎이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못 생긴 얼굴로 인하여 정상적인 방송의 데뷔가 어려웠던 그는, 자신의 단점을 그 자신만의 개성으로 끌어내어 1980년대를 주름잡는 ‘코미디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로 대표되는 여러 개의 유행어를 남겼고, 수지큐(Susie Q) 음악에 맞춰 추던 그의 특유의 엉덩이를 흔들며 뒤뚱뒤뚱 걷던 '오리춤'은 오랫동안 어린이들에게 모방되었고, 코미디언 이상해씨와 콤비를 이루며 묘기 아닌 묘기에 도전하면서 코미디 프로의 절정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2001년 11월 17일에 폐암 말기를 선고 받은 후 끝내 폐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2002년 8월 27일 오후 3시 15분 경 국립암센터에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이주일 코미디언으로부터 배운 것은 표정 연기였습니다. 그의 우는 표정은 슬픈 듯하면서도 그 슬픔을 극복하는 웃음이 담겨, 시청자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 표정에 배어 있는 그대로 어려웠던 시절을 웃음으로 극복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인기를 얻은 후에도 외아들의 죽음을 겪으며 찾아온 여러 가지 고통에도 그는 오뚜기처럼 일어서 대중을 웃기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코미디가 빛을 발한 것은 1980년대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신군부권력의 욕심으로 생긴 제5공화국에서 개인의 자존심이 매우 위축되어 있을 때에 그는 대중에게 위기와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웃음을 선사하였습니다. <웃으면 복이와요>(MBC, 1979), <일요일 밤의 대행진>(MBC, 1981년)으로 서민들의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9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그는 <이주일의 투나잇 쇼> (SBS, 1996~1997), <이주일의 코미디 쇼> (SBS, 1997~1998) 등을 통해서 그는 웃움이 행복의 조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나는 이주일 코미디언을 통하여 나에게도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언어 예술을 통하여 대중에게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꿈과 의지를 심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과 의지는 웃음을 통하여 대중에게 확산되고, 대중의 자존심을 세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이의 <강남 스타일>에 나오는 말춤이 2억 뷰 이상의 접속을 가능하게 한 것도, 병자호란 때에는 50만 명 이상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근대에도 한국 전쟁을 치르는 등 수많은 내우외환을 겪어오면서도 한국인 본연의 생명력으로 위기를 극복해 온 우리들의 자신감에 찬 웃음이 자신감을 한 몫을 하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웃음은 자손들만은 자신과 같은 고생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선조들의 의지에서 생긴 것이었으며, 붕당 제도로 인한 부조리를 풍자와 해학을 통해 극복하는 지혜의 결과였습니다. 얼마 전 S문인회 시낭송회에서 ‘이주일’ 흉내를 내며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원곡: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의 「봄을 위한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를 불러 보았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듯이 노래 가사에 감정을 실어 표정 연기까지 해 보았더니, 나의 음치가 커버되며 사람들을 빨아들일 듯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는 이주일 코미디언이 나에게 심어 준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낭송회가 열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이 노래를 표정 연기까지 섞어 가며 부르곤 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1-03
  • 목회는 쉬운 것이다·44
    목회자가 매일 삶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알려지신다면, 또 그리스도를 전하는 필수 요소가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 되어서 우리 삶의 체험담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가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삶에 가치를 두어서 그 체험에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심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나누는 것이 목회인 것입니다.우리가 생각하는 열심히 아니라는 것을 로마서 10장 1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예수님처럼 하는 목회는 속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이 예수님이면 너무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걸어가신 아는 길이기 때문에 모험이나 두려움이 없는 길입니다. 또한, 신비로울 수도 없습니다.우리가 하려는 목회성장학이라는 열심의 조건이 순수하고 쉬운 길을 복잡하게 어질러 놓는 일이 됩니다.이미 갔던 길을 왜 일부러 꼬불꼬불한 골짜기를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열심히 예수님을 대적하고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유대인과 한국인의 비슷한 점은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열심히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가 하면 과잉 충성, 열정, 정열이 사탄의 박수갈채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한국적 목회 성공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교회가 아닌 교회당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란 출처가 어디인가? 자기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이 훌륭하고 유창하여 하나님 중심인 것 같으나 일방적인 자기 목표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꿈꾸고 있는 환상적인 환경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열심을 자동차 엔진에 비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동차 엔진이 움직이는 것이 열심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냥 엔진으로서의 일일 뿐입니다.베드로의 누가복음 5장 4절에서 나타난 사건이 열심인가? 밤을 맞도록 그물을 던진 것은 열심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진 것은 열심히 아닙니다. 베드로의 지금까지의 일은 자기란 조건에 의한 열심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3장 19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열심히 무엇인가?어거스틴은 “바른길에서 절뚝거리는 것이 잘못된 길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습니다.이단일수록 열심을 강요합니다. 이단뿐 아니라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목표보다는 속도전인 열심을 강요합니다.중요한 것은 목표에 의한 삶 자체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열심히 욕망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없다는 불안 초조라는 사실을 증거가 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재촉할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따름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입니다. 속도조절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자신의 약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거움입니다.예수님처럼 목회는 속도가 아닙니다자기 몸을 희생하는 봉사가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도 없고, 대속의 피도 없고, 십자가의 능력도 없다면 결국 십자가를 부인하는 그릇된 삶이 될 것입니다.이와 같이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과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 다음의 봉사 생활인데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자기를 희생해야 한다고 목사들은 말합니다. 사실상 목사 자신도 무엇을 얼마큼 희생했는가 생각해보면 희생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한 조건에 의한 일을 하고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일 목사가 희생을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1-0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21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1. 목숨을 걸고 진리를 수호한 루터 루터의 개혁적 영향력은 여러 나라에 확산되었고, 그 당시 가톨릭이 왜곡하여 가르치던 성경의 교리들과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의 부패와 타락과 비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웠고 하루 속히 루터를 제거하는 것이 저들의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새 황제 카알 5세가 즉위하였고, 교황권에서는 새 황제에게 축하의 메시지와 함께 루터의 개혁사업을 막아달라고 특별한 부탁을 하였다. 그것은 빠른 시일 안에 루터를 처형시켜 달라는 당부였다. 새 황제는 그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독일 작센의 매우 학식이 높고 분별력 있는 프리드리히 3세는 선제후(選帝侯,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로서 새 황제를 세우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인데, 오히려 루터를 옹호하면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황제에게 조언하였다.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한 황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루터를 소환하여 제국의회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부여하였다. 주변의 많은 동료들은 루터가 의회 앞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폭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의 각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회가 열리는 “보름스 시내의 악마가 비록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들어가리라.”((J.H. Merle D’Aubigne, Ho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7, ch.7). 루터는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하여 담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투사였다. 의회 앞에 선 루터의 담대한 증언루터가 의회에 출두하는 날, 의회로 향하는 모든 길은 로마의 권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이 용감한 수도사를 보기 위해 열광하는 군중들로 메워졌다. 루터가 의회의 재판관 앞에 서려고 하는 순간, 한 나이 많은 노련한 장군이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만일 그대가 하는 일이 바르고, 거기에 대하여 그대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D’Aubigne, b.7, ch.8). 루터는 황제의 보좌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온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드디어 루터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곁에 쌓아둔 루터의 저서들을 가리키며 그 저서가 루터 자신이 것인지, 그리고 그 저서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시인한 다음, 그 내용들을 취소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대답을 해야 하므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할 것이니 잠시 유예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대담하고 비타협적인 성격과는 무엇인가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고 성령의 감동이었다. 하루의 시간을 얻게 된 루터는 많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지나고, 이튿날 답변을 위하여 회의장에 나왔다. 고관대작들 앞에 선 루터는 아주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로 차분하게 어제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서적들 중, 첫째 부류는 신앙과 선행에 대하여 기록한 것인데 전혀 해로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취소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니 취소할 수 없다. 둘째 부류는, 교황권과 로마교회의 부패와 폐단을 폭로하는 것인데, 이런 저서의 내용들을 취소하거나 그 책들을 폐기하는 것은, 로마교의 악습과 악행을 더욱 조장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 그리고 셋째 부류의 책들은 현재 자행되고 있는 악폐들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개인들에 대하여 비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좀 과격하고 공격적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취소할 경우 진리의 원수들이 더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취소할 수 없다. 그의 대적들이 가부간에 좀 더 명확한 입장을 요청하였을 때 개혁자 루터는 대답하였다. “성경의 증언과 가장 분명한 논리로서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또한 본인이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하여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본인은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Stand. ‘저의 신조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라는 의미). 저는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D’Aubigne, b.7, ch.8). 온 회중은 성경에 기초한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와 답변에 대하여 경탄해마지 않았다.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한 황제와 루터의 죽음로마의 황제 카알 5세는 루터의 답변을 들으면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하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선조들의 모본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노라.” 성경에서 벗어난 선조들의 풍습과 부패와 타락과 오류들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정이었다.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는 주권자들은 온 시대를 통하여 늘 이와 같은 입장을 고수하였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무엇이 정의인지 알면서도 불의의 세력에 예수님을 내어 주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던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분위기와 정서와 여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누(累)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정한 개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려면, 권세를 잡은 주권자들이 올바른 정신과 정의감을 가지고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요시야 왕이 율법서를 들고 개혁을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세웠던 여호사밧에 의하여 유다 나라의 개혁이 신속히 이루어졌던 것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정의를 세우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개혁의 지름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의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을 통해서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의회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체포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는 산성 바르트부르크(Wartburg)로 끌려가 비밀스러운 집에 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것은 루터를 보호하려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만들어낸 조치였다. 오랫동안 루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의 적들은 이제 더 이상 루터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루터는 그 조용한 산성에서 소책자들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개혁의 불길을 이어갔고, 특히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인들의 신앙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유럽의 여러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1546년 그의 만년에 출생지 아이슬레벤으로 만스펠트 백작의 상속분쟁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그 해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아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안장되었다. 2002년 미국에서 제작된 루터 영화에 붙여진 “그가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제목이 그의 업적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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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0-27
  • 93. 제66회 총회장 최성원(崔聖園) 목사
    전북 김제 출신최성원(崔聖園 1926.7.21~1985.8.10) 목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최기남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들이 일찍 예수교를 믿었기에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1927년 10월 유아세례를 받았다. 고사리란 곳은 바닷가에 인접한 자그만한 어촌이라 생활이 어려웠다.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는 부모가 신앙인이라 개명된 문명을 일찌기 접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 집에서 부모들을 도우며 살던 성원 소년은 고향에서 꽤나 먼 전주에 있는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전주고등성경학교에 입학, 새로운 영적 세계와 새로운 세계에 눈이 띄기 시작하였고, 성경을 배우며 미래를 꿈꾸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한적한 어촌 집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성장해서인지 마음과 생각은 넓었다.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닥친 광복을 맞이해 혼란한 사회상을 목격하며 한때는 낙심한 때도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서울에서 개교된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전신)에 들어가 한국교회와 조국의 미래를 가슴에 품고 열심히 공부하고 1949년 장로회신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함께 졸업한 동기들 중에는 눈에 띄는 한국교회 기라성같은 지도자들이 보인다. 김삼대 배수환 원승록 이성헌 조동진 한승직 한완석 김복출 김인실 박병덕 등이다(김제노회 반세기, 김요나 저, 김제노회 역사편찬위원회 2002 p.738~739, 한국기독교사 총람 이찬영 편, 소망사 1994 p.951~952 참조). 최성원은 신학교를 마치고 1953년 9월 17일 휴전 직후 김제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은 후 1년만에 목사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에 진출하게 된다.그는 목회를 하면서 미래의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자기 계발에 눈을 떴다. 그 일환으로 같은 지방에 있는 국립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진학 이수하였고, 다시 총신대학교 병설 하기대학과 동기대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의 시무교회로는 봉동 서두교회를 비롯, 군산구삼교회와 여수제일교회, 후에 전주서문교회에 부임했다. 최성원 목사가 서문교회에 부임해 목회하던 중 예기치 못한 교회 분규가 생겨 자기를 지지하던 교인들과 함께 서문교회에서 나와 오늘의 전주제일교회를 설립하여 1985년 그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봉직하였다.이와함께 그의 교단 내의 봉사한 이력을 살펴보면 순천노회 노회장을 역임했고, 군산에 있는 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과 교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9월 예장총회 회록서기에, 1975년 8월엔 총회서기에 당선되어 봉사하였고, 전주노회장 및 동전주노회장과 전주에 있는 총회 인준신학교인 바울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봉사를 하던 중, 1981년 9월 24일부터 28일까지 대전중앙교회(이영수 목사 시무)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6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78 p.831참조). 전주고등성경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졸업김제노회서 강도사 인허와 목사 안수전주서문교회 시무 중 전주제일교회 개척총회 회록서기 및 총회 서기 봉사교단 1만 교회운동 적극 추진그가 총회장이 되던 해 11월 추수감사절 메세지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일별해 보면, 날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여건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막중한 의무와 축복이 있다고 전제하고서, “지난 한 해동안 이 나라를 축복하시고 사회적 안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특히 총회에 내려주신 은혜를 감사했고, 총회회관 건립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 전국교회는 이 일에 힘써 줄것을 당부했다. 다음으로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일과 1만교회 운동에 전국교회가 협력할 것과 이 일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추수감사절이 선교의 절기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며 해외에 나가있는 3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적극 기도와 물질로 지원해 줄 것을 강조했다(기독신문 1981년 11월 14일 p.1 감사절 메세지 참조). 최성원 총회장은 그 해 12월 성탄절 메세지에서는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자신을 조용히 반성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 보아야겠다고 했으며,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첫째,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있어야겠고,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형제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고, 서로가 어떤 영문이었던지 비방하고 규탄해 온 것을 회개하고 서로 용서해야겠다. 둘째, 이웃의 형제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들이 있어야겠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다. 셋째, 이러한 신앙의 기초 위에 교회의 성장발판을 놓아야 하겠다. 교회가 성장해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교회와 함께 성장해 가야 한다.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성장해 가야 한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뜻깊은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회도 그의 뜻에 따라 성장하게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 성탄절 메세지 속에 최성원 목사의 신앙관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기독신문 1981년 12월 19일 p.1 참조). 그가 총회장에 당선돼 취임사를 발표한 것을 보면 더욱 그의 목회관과 총회방향에 대해 엿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일하는 총회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전제한 후, 12가지의 총회 지향점을 발표했다. 총회가 6년 전부터 실시해 오고 있는 1만교회운동 지속과 외지선교사업, 총회센터(회관) 완공, 개혁신학의 재확인, 교역자 은급제도 실시 등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으며, 전국교회의 협력을 당부하였다(기독신보 1981년 10월 3일 p.1. 취임사 참조). 그가 재임했던 제6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신조 2항 중 ‘자연히’를 ‘스스로’로 수정하기로 하고 각 노회에 수의하기로 하다. ② 총회 서부노회와 미주 서부노회가 경영하는 두 신학교를 통합하여 미주대회(美州大會) 직영 신학교로 운영하기로 하다. ③ 박성만 목사(김천제일교회)를 총회 제5대 총무로 선임하기로 가결하다. ④ 총회산하 전국남전도회 규칙을 인준하다.최성원 목사는 1985년 8월 10일 자택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굴곡 많았던 한국근세사를 살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저버리지 않고 올곧은 삶을 승리롭게 마감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0-26
  • 가위 감사의 갈무리 2
    여기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깊이 통찰하고 알게 해준 이가 현대신학의 과정신학자로 화이트헤드(A.N. Whitehead)를 알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이 세상 만물과 직접 관련이 없는 초월성 혹은 '원초적 본성'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 우주만물과 직접 관계된 제2 의 본성으로써 '파생적 본성' 혹은 '물리적 본성'이라 한다. 그는 이 세계 운주 만물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해 낸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리적 본성으로서 자신의 본성의 일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우주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유비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마음 곧 영적 측면과 몸에 해당하는 물리적 측면이 있는데 이 세상 우주 만물 곧 자연은 그 만큼 하나님과 직접적인 혹은 근원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이 그의 지으신 만물에 보여졌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행복은 감사의 나무에 피는 꽃이요, 불행은 불평불만의 나무에 돋는 독버섯이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신앙은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역설한다. 감사하는 마음의 훈련은 인생의 중요한 훈련의 하나이다.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무슨 일이나 쉽게 이루어지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힘들다. 고생 끝에 목적을 달성해야 감사하는 마음을 느낀다. 추위에 떨어본 사람이 태양의 감사함을 느낀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이 밥 한 그릇의 감사함을 갖는다. 갈증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시원한 물 한 그릇의 감사를 갖는다. 인정에 굶주린 사람이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라는 감정을 심어 주셨다. 우리는 이 감정을 키우고 확대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빛깔을 바로 분간 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한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못 갖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색맹환자이다. 자기 인생에 대하여 아무 것도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옅은 생각 이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감사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병원 환자를 볼 때 자신의 건강함을 감사하자. 앞 못 보는 장애인을 볼 때 나의 두 눈 을 감사하자. 인생은 결코 외로운 것도 아니요, 불행한 것도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마음속에 지닌다면 인생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요,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그렇게 허무 한 것도 아니요, 괴롭기만 한 것도 아니다. 人間到處有靑山이라고 했다. 감사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라. 인생은 기쁨의 샘터요, 행복의 화원이 될 수 있다. 인생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열심히 노력하고 생활한 만큼 보람 이 있는 것이다. 비록 어두움과 절망의 골짜기로 지날 때에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감사의 밝은 태양을 가슴속에 지니고 기쁨의 인생을 기도로써 살아가자.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다. 진정한 감사는 영혼에 더 큰 감사의 햇살이 비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를 아는 것은 감사의 덕이다. 감사는 인간의 본성이다. 새가 노래함같이 인간은 감사한다. 감사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한 인간 의 본능적 반응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씨가 햇빛과 비를 받아 자람같이 우리의 감사도 경험 속에서 자란다. 역대 사도들은 고난 중에도 감사 했다. 독일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는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다.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한다. 인간의 존재도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 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연과 인간이 생존하는 것을 알게 한다. 존재하는 것은 때에 따라 변화하기에 천하만사가 기한이 있어 가을에는 철을 따라 산과 들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제 자리를 지키면서 철을 따라 처한 환경에서 묵묵히 한 생명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라면서 변화하여 세월을 따른다. 그 모습은 다양한 형태와 아름다운 빛깔을 자아내면서 꽃과 나무들로 계곡에 처하여도 기다림과 외로움을 감당하며 생명은 그 무엇이라도 이미 그 자체로서 더 이상 아름다움의 자태를 들어내고 자연에게서 수확한 많은 영글어 가는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0-26
  • 성육신한 예수교회-60
    에스겔서에서, 그에게 지속적으로 보이는 환상들은, 죽은 시체더미가 쌓였던 해골 골짜기에서 해골들이 일어나 정예한 군대로 조직되고, 짓밟혀지고 더럽혀진 고토가 탈환되고, 그 도시 중앙에 제단이 다시 수축되어 거룩하게 된 후, 시민들과 국가가 재건되는 일들이다. 이러한 꿈을 간직한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가 꾸던 꿈을 현실적으로 오늘의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하였다. 이들은 600만이라는 동포들이 희생되는 처참한 역사적 경험을 감내한 터인지는 몰라도, 이들이 앞으로도 세워 나갈 도시나 국가란, 오늘의 인류가 기대하여 온, 가장 이상적인 스마트한 국가로 건설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든다.신약을 신중하게 검토해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좀 더 높은 버전들을 내어놓은 느낌이 든다. 교회라는 것이 거룩함을 전제한 제도이긴 하지만, 그 제도도 역시 사람들로 이뤄진 시스템이라서, 제도권으로부터 가장 고귀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사제들이라 할지라도 타락을 하게 되면, 야훼 하나님이 그 곳에서 떠나시기 마련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교회란 죽은 생선 같아서 사람의 더러운 것과 악취만 남기 마련이다. 그렇게 유대 종교는 변질되었고, 교회만 붕괴된 것이 아니라, 국가마저 파괴되어 국민 모두가 주변국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포로가 된 이 백성들은 전과는 전혀 다른 꿈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던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높은 곳에 우뚝 선 시온 성전 문지방에서 샘물이 솟아나, 그 산 아래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비전인가? 요한계시록에는 더 아름다운 아주 완벽한 환상이 열린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강물들은 광야 같은 척박한 땅을 살려내서 열두 과일을 맺는 과수들이 경작되고, 어부가 그물을 치는 곳이 되며, 온갖 짐승들이 거하는 에덴동산이 된다. 그런데 아뿔싸, 그 아름다운 꿈이 저세상에서나 이뤄지는 꿈이 된 셈이다. 현실이 너무나 버거워서 묵시록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죽어서나 가는 교회로 바뀐 것일까? 우리 한국교회 어른들은 천당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한정하였다. 죽어서나마 요단강을 건너가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나온 역사적 과정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이렇다 보니, 천당은 죽은 자의 것이 되었고, 지금 여기에 사시는 분들은, 천당을 현실적으로 구경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교회에서 가끔 예배 때에만 들을 수는 있어도, 천당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만 것이리라.요즈음 죽어서 가는 천국을 미리 보고 온 사람들의 유투브에 올린 동영상을 듣노라면, 아예 천국이란 저 세상에나 있지, 전혀 이곳에는 없는 것처럼 인식되어진다. 요한계시록이 밧모 섬에서 기록되어 세상에 퍼져 나간 지 십년이 흐르자, 새로운 복음서가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는데, 바로 그 경전이 요한의 복음서이다. 이 요한의 복음에는 교회가 건물에서 개인으로 변환된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이신 거룩하신 영이 사람에게 임하신다. 사람의 인격에 임재하시고, 사람과 소통을 하시며, 그 사람 안에 계시며, 또한 그 사람도 예수의 영 안에 거한다. 그가 누구이든지(배웠던지 못 배웠던지,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혹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신 유일하신 독생자(獨種子)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그도 그의 배(人格)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흐른다. 요한은 이에 대한 주석을 붙이기를, 각 사람이 받을 성령이라 하였다.요한의 복음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은사와 직임을 받는다. 그가 예수로부터 받은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 생명이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얻는 생명이며, 이 땅에서 만이 사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마땅히 교회에서 샘물이 흘러 나와서 온 땅을 적셔내고, 그 물이 강물이 되어 사해를 살려내고, 어부들이 그물 치는 곳이 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꿈이 지속적으로 좌절되어온 것이다. 에스겔 이후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교회도 역시, 헤롯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정치권의 마수를 벗어나진 못하였다. 그 성전도 파멸된 이후, 이천년이 흐른 뒤에, 마침내 유대인 개개인들이 교회로 건설되었다. 그들은 개개인과 가족들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시간의 지성소와 말씀 앞에 선다. 유대교 버전 3.0, 이제야 아주 스마트한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집을 나간 둘째가 돌아온 듯하다. 이들에게 마무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이 임하시면, 신부 같은 교회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0-26
  • 기독교인의 행복론 - 56
    작가가 된 후 나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이 있다면 고독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명퇴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하루 반나절을 사색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쓸데없는 짓으로 건강을 해칠지 모른다고 염려하지만, 사색에는 나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혼자서 역사 속의 인물이 되어 보거나, 사건 현장을 더듬어 나가는 추리와 상상을 해 보는 것도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르는 크나큰 즐거움입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 놓다가, 날카로운 질문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LA 경찰청의 형사 콜롬보. 드라마 도입부에 살인범이 먼저 밝혀지고, 범인의 완벽한 계획 범죄가 콜롬보에 의해 밝혀지며 사건이 해결되는 형식의 형사 추리물인 <형사 콜롬보>(리처드 레빈슨 등의 각본, 피터 폴크 출연)는 미국 NBC 방송에서 드라마로 1971년 9월 15일부커 2003년 1월 30일까지 방영되었고, 한국에서는 KBS TV에서 1974년 4월 6일부터 9월 28일까지 방영되었습니다. 가령 모 건설회사 부사장이 자신의 아내를 의도적으로 살인하고 건설 현장에 묻은 후 바닥 콘크리트를 쳐 버립니다. 콜롬보는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부사장의 실종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부사장 집의 현관 바닥에서 진주 목걸이로 추정되는 진주를 발견합니다. 콜롬보는 부사장이 일하는 건설 현장을 자주 들러 콘크리트 타설 광경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리고 현장 경비로부터 부사장이 밤에 들른 적이 있다는 목격담을 확보합니다. 물증을 확보한 콜롬보는 부사장이 살인했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 들릅니다. 현관에서 부사장에게 두 사람 사이의 부부 관계가 최근 들어 좋지 않았다는 이웃 주민의 얘기를 하면서, 현관 우산 꽂이대에 있던 우산에 자신이 증거물로 가지고 있던 진주를 톡 쳐넣습니다. 얘기 도중 부사장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하자, 슬쩍 우산을 치켜듭니다. 그러자 진주 한 알이 바닥에 떨어지고, “이게 증거죠.” 하면서 사건 당일날 부부 싸움이 심하게 있지 않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콜롬보는 왜 부사장이 콘크리트 타설을 하기 전 날 저녁에 공사 현장에 갔었는가를 묻자, 부사장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백을 합니다. 이와 같이 후즐근한 바바리 차림으로 건성건성 말하는 듯하면서도, 완벽한 알리바이를 들이대는 사회 저명 인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콜롬보의 끈질긴 추리에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맛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어리숙하면서도 냉철한 판단력으로 악인을 단속하는 드라마 속의 콜롬보는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닮고 싶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우둔하여 평론을 집필하면서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더디긴 하였지만, 끈기 있는 독서 생활로 글의 주제에 걸맞는 논리적인 체계를 구축하여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 때문인지, 아내는 내가 우둔한 데 비하여 무던히 노력하는 편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살아오면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달란트를 조물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달란트를 최선을 다하여 다듬어 나갈 때 좋은 결과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0여 년을 꼬박 글쓰기에 매달렸더니, 최근에는 나에게 어느 정도의 필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교회 연합 신문>에 40개월 이상 수필을 연재해 오고, 여러 문예지에 꾸준히 글을 발표하는 것도, 작가로서의 끈기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강릉에서 H시인협회 세미나 발표가 있었습니다. 김동명 문학관을 돌아보고 점심으로 80여 명의 시인들이 순두부를 맛있게 먹은 후, 세미나 발표장인 녹색체험센터로 갔습니다. 조가비 모양의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세미나장은 확 트인 산야와 더불어 파아란 하늘을 담도 있는 듯 깨끗해 보였습니다. 세미나장은 무대와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고,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담한 곳이었습니다. 강릉 출신의 시인들이 시낭송을 하고 난 후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기발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미나 발표를 굳이 앉아서 할 게 아니라, 서서 하면서 ‘형사 콜롬보’ 흉내를 내고 싶었습니다. 시낭송가들의 낭송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탁자 앞으로 갔습니다. 가슴 속에서는 ‘형사 콜롬보’처럼 논리적으로 사건을 추리하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1980년대의 현실은 언로가 탄압되는 가운데 위정자의 위선이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시도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개인의 자아를 확대하여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서정주의시, 부조리한 현실에서 위정자의 독재에 항거하는 현실주의시, 다양한 표현 기법으로 현대의 상황을 돌파하려는 모더니즘시 등이 그것입니다. …”. 오 분 이상을 나는 무대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콜롬보처럼 손짓을 해 가며 서두를 이끌어 갔습니다. ‘아, 내 콜롬보 흉내가 성공하였나 보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한 시인이 불쑥 말하였습니다. “앉아서 하세요.” 물론 서서 하든 앉아서 하든 발표하는 건 발표자의 자유지만, 콜롬보 흉내 내기 참말 어렵데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0-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43
    인간사에 나타난 모든 일들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여러 가지 나열도 우리 기준의 이야기입니다.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소명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소명하신 분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에 우리 자신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목 회자로 부름 받았다면 어쩔 수 없이 수단과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마치 유치원에서 배운 파란 불에만 건널 수 있다는 교통 방법을 잘 알기 때문에 빨간 불을 보고 건너는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 봉사라도 파란불을 기다립니다.예수님께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치원 아이들에게 손을 잡고 파란불이 켜졌을 때 건너가신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돌이키게 하신 것입니다.◦그의 무릎은 예수님 이름 앞에서 기본적 습관의 무릎을 꿇는 기초적 예의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임을 보이신 것입니다.◦세상 권세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자기포기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따지고 논설이 아니라 무조건 침묵과 포기일 때 사단의 불타는 욕망의 불을 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람이라면 그 일이 가장 큰 임무이기 때문입니다.◦정복은 복종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8장 34절부터 보시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했습니다.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사실 목회란 죽고 사는 것입니다. 목회가 기업이면 분명히 죽은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는 목회, 세계 제일의 교회, 눈코 뜰 새 없이 팔려나가는 스타 부흥사, 그런들 무슨 유익이 있는 것입니까? 꼿꼿하게 세운 목덜미 위의 머리가 온갖 세상을 꿰뚫어보는 신통력도 무익한 것이라면 아주 슬픈 일입니다.하나님 나라 법칙을 아십니까?예수님처럼 입니다.여호수아 1장 3절에 여호수아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했습니다. 신발이 아니라 발바닥 맨발입니다. 노예는 신발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목회자에게는 편리함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원리가 현대 사회에 이토록 모든 얽혀진 결박에서 해방하는 원리가 될 줄은 너무 감사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이제 실제적 이야기들예수님의 생애와 목회자의 삶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 유사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우리의 문제는 한국적 유교 문화에서 물려받은 성의라든가 정성이라든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더 잘 해보려는 아주 좋게 보이는 그런 습관이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큰 장애의 요소라는 것을 알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예수님처럼이란 그런 인간적인 생활 습관에서 벗어나면 너무 쉽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하나님은 예수님을 사역하도록 보내셨습니다.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고,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고, 생활의 삶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기도 생활을 하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세례를 받으셨고, 세상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교회 탄생을 위해 죽으셨습니다.예수님이 구속사역을 감당하시도록 하나님은 도우셨습니다.목회자의 삶 자체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행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목회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자로서의 삶의 총괄적인 지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델이 되시고 비유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하듯 목회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가 되며 또한 그 결과 그들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가든지, 심방할 때든지, 설교할 때든지. 기도할 때, 방문할 때, 목회자가 어디를 가든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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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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