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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24 앞부분에서 빠진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의 통로인 것입니다. 나의 주변 모두에게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늘 하나님에 관하여 배워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이 하나님의 통일된 현실인 것입니다.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사도행전 17장 26~28절에서는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신 것입니다. 물고기가 바다에 있듯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습니다.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이론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 모든 것이 거룩한 흐름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임재는 어디서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2장 1절에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드리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예배 그리고 제물이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하나님은 무엇을 해주시는가? 자연, 친구, 부모, 음악, 침묵, 영화, 성경, 직업, 허드렛일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영적인 삶이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서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예수님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한 부분에서 요한복음 18장 33~38절에 나타내셨습니다.33절에서 빌라도가 당신이 유대 사람의 왕이요?(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도 저들이 한 것입니다.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요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37절에서 빌라도는 그러면 당신이 왕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예수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38절에서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유대인에게 말했으며 그는 진리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세상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나라임에 당연한 일인데 세상에 속한 삶을 갈구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우리는 찬송가에서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감동 있게 부릅니다. 나는 495장(구)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나님 나라는 세속적 권리를 지닌 물질적, 정치적 왕이란 빌라도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나라는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으며 우리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 이유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마음만이 느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만의 꿈의 나라가 아닙니다. 빌라도가 생각하는 나라 개념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평안해질 수 없고 계속적인 인간적 투쟁을 일삼는 세상적 지향에 매여 있으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 나라는 절대 체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진리란 물질세계를 넘어서 곧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의 눈을 통해서 참여하는 영적 현실입니다.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26
  • 존재의 의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삶을 사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그 삶은 생존을 위해 사는지? 존재를 위해 사는지를 물으며 살아간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자도 있고, 사색하며 삶에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두고 사는 자도 있음을 본다. 여기에 빌립은 그의 삶에 고백이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하여 말하기 보다는 사람으로 창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에 유의한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심에 유의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과 상응하게 피조자로 지으신 이유로 하나님과 상응하는 이유로 생명을 다스려 그 삶을 영유하도록 친히 아버지가 되시어 창조자와 피조자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 날 수 있도록 관계된 창조임을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전에 신학적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여기에 특별한 관계를 지닌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이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은 스스로 아버지이심에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려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인간의 관계를 의도함에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이 세상에서 삶을 살려 한다면 하나님의 아버지에게서 창조자의 뜻을 살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왜?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가? 함에 주시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삶의 생존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게 한다. 여기에 삶의 가치를 알고 “존재의 의미”로 그 관계된 의미와 이유를 알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의 관계로 하나님 아버지 되심은 같은 형상으로 인간의 삶과 연계되어 있음을 믿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땅위에 있는 그의 형상과 영광이 되게 하는 삶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맺는다. 예컨대 인간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 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필히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예컨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지 일어 날 수 있도록 관계된 창조임을 알게 한다. 곧 이는 창조함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에 앞서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창조되는 인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 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반드시 책임을 추궁한다는 현실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 (고후15:31) 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매일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의미한다. “개신교회”를 라틴어는 “ecclesia semper reformana”라고 하는데 이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는 의미를 갖는다. 과거의 교회사를 보면 개신교회가 16세기의 개혁정신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과거지향적이 될 때 그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이는 삶이 주어진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계속적으로 미래가 오고 있는 삶으로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함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삶은 변화와 성숙의 과정으로 인간의 육체적 생리적 성장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성장관계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삶에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피건 데 믿음의 경험을 통해 거듭 나는 것(중생)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한다. 고후5: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라 함에 주목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7-25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0
    나에게도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음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시절은 한국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부패가 심한 시기였다. 1960년 4.19가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분노한 마산의 학생·시민들은 부정 선거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경찰이 과격한 폭력으로 탄압하자 시위대의 행렬은 약간 움츠러드는 듯하였다. 그러나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당시 마산 상고 1년, 17세)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민중의 분노는 다시 폭발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저항이 누그러들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4월 18일 평화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 날의 테러에 분노한 서울의 학생·시민들은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고, 분노한 시민들은 마침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몰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경찰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피의 화요일’을 만들었다. 그 뒤 항쟁은 부정 선거 반대를 넘어 이승만 퇴진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혁명은 학생과 시민 들이 광복 후 한국 사회에 쌓여온 모순에 맞서 싸운 것이기 때문에 독재 정권의 타도에 그치지 않고 민주·자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어머니 얘기를 해 보겠다. 나의 어머니는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어느 다사로운 봄날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처럼 넓은 들판에서 어머니는 공룡 비슷한 괴물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다른 낭떠러지에 다다랐다. 앞은 깊은 계곡이요, 뒤는 괴물의 커다란 입이 버티고 있었다. 이 순간 어머니는 사생 결단을 해야 했다.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느냐, 괴물에게 물맷돌을 던져 정식으로 맞서느냐. 그때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애롭고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어머니 앞에 서더니 괴물을 향하여 장풍을 휘날렸다. 그러자 괴물의 형체가 모래알들처럼 잘게 부서지며 없어졌다. 어머니는 그 노인의 초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노인이 물었다. “너는 교회에 다니느냐?”어머니가 고개를 가로젓자, 노인은 한참을 묵묵히 서서 생각하더니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어머니는 노인이 했던 “교회에 다니느냐?”라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일날이 되자 어머니는 집에서 가까운 남원 동부 교회에 나가서 예배에 참석하여 보았다. 교인들은 선량해 보였고, 목사님은 경건한 어조로 설교하였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11). 목사님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각각 계획하신 뜻이 있고, 그 뜻에 따라 그 자녀들의 숙명이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목사는 신자가 따라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 어머니는 새신자실로 가서 목사님을 뵙고 지난 밤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꿈을 통하여 주님이 일하셨다면서, 죄인이 죄의 쇠사슬을 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마땅히 치러야 할 죄인들의 고통을 대신 체험하시면서 십자가 보혈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껴 보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처음으로 교회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어머니는 술고래셨던 아버지의 가슴에 손을 대고 새벽마다 기도하였고, 시아버지에게도 꿈 얘기를 하면서 전도하였다. 이제 행복 이야기를 해보겠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행복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데서 온다. 그럼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다. 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나는 기독교인인 어머니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유아 세례를 받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제까지 살아왔다. 소년 시기에는 순수를, 청년 시기에는 열정을, 장년 시기에는 여유를 주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안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올 자가 없느니라. 나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였고, 어려운 고비를 연단을 받으며 사탄 마귀와 영적 전쟁을 하여 왔다. 이와 같은 순수야말로 주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왔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쁜 길에 빠지지 않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7-25
  • 목회는 쉬운 것이다·67
    변비는 몸의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채,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함에 매여 매사에 부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 병은 자기 독선에 매여진 자칭 보수 정통을 주장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 이해나 관용이나 소통은 불가능합니다.“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이 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8).학문이 나 하나를 진실하게 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결국 예수님을 발견 후 배설물이 되어야 함과 같은 사건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값비싼 옥합의 향유가 중요했던 것이 인간의 욕망과 조건의 도구였기에 예수를 만난 후 거추장스럽고 무가치하기 때문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제사장적인 목사들은 이 사건을 얼마나 미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의지와는 정말 다른 이야기를 강조합니다.왜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가?왜 율법을 중요시 여기는가?그 이유는 가장 쉬운 구구단 공식과 같아서 예수를 만났을 때 알게 된 기초가 된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꽉 막힌 사람들 때문에 생명의식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라”라는 말 그 자체입니다.학문의 종결은 그리고 나의 성공적 삶의 종점은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애타며 몸부림치는 이유는 나의 종말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30여 년이란 것은 결국 우리 구속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 자의가 아니라 부르시고 선택하신 그분의 계획이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귀중한 사실이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고상하고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 자체인 본성적인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동참할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함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학문으로서가 아니고 설명된 조직이나 구조가 아닙니다.신앙의 본질이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가 오늘 고질병으로 죽어가는 세계교회와 목회자의 긴박한 처방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인 것입니다. 너는 보수신학도 안했는데, 너는 성경공부도 안했는데, 너는 족보도 시원치 않는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이 무식한 사람아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까부느냐, 정통보수신학도 하지 않았는데 학문의 가치로 그리고 출신성분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가 지금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도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바로 안다면 그리고 설명할 수 있다면 교회의 정의를 학문적으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개혁주의생명신학적 기도도 기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방법을 알고 있다면 분명히 이방 종교적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마디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이란 해석이 우리의 신앙을 무속종교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엄마의 관계는 이미 아버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아들의 첫 외침입니다.“아~빠”라는 말 한마디 속에 진정한 소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아빠! 엄마! 는 배운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에서 나오는 반응의 표현입니다.그래서 오직 성경이란 성경을 설명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성경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소통이지 욕구적 반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25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4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 44. 방언은 무조건 성령의 은사인가요즘 퍼져나가는 방언의 파급이 심상치 않다. 불교에도 천주교에도 방언과 신유는 있다고 한다. 오순절주의에서는 이 방언을 그리스도인의 필수 요소로 간주할 정도로 방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런데 이 오순절/은사주의가 오늘날 매우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전 세계 약 20억 명의 기독교인 중 오순절/은사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대략 6억 명에 이른다고 하니, 기독교인의 약 30%가 이 오순절 성령운동과 관련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1900년 초에 시작된 이 운동이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5개의 교회들이 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에 관련된 교회들이다. 오순절주의의 방언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로 ‘방언’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어떤 오순절파 교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인도한 새 신자의 입에서 방언이 터졌습니다. … 나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앙을 해도 방언을 못하는데,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가 방언을 하니 은근히 질투가 생기고 다른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왜 나에게는 방언이 터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걱정일까? 성경에서는 방언이 성령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8~11). 방언은 여러 가지 은사들 중에서도 거의 마지막 위치에 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그 “더욱 큰 은사”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이 말씀 후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장 큰 은사로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권면에 의하면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여러 은사 중에서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은사를 성도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령의 은사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말씀과는 조화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제 막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려는 시기에 오순절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5개 국 이상의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제자들의 설교를 듣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복음은 신속하게 넓은 지역으로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분명히 언어의 은사였다. 그런데, 이 방언이 시작된 지 약 20년 이상이 지난 다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변질된 다른 방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방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단정하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전체의 흐름을 보면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다른 은사와 비교하여 외적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방언에 대하여 긴 권면을 하고 있는 듯하다. “방언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방언을 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으니, 방언 보다는 예언(대언)을 하려고 힘쓰라.” “통역 없는 방언은 예언보다 못하다.” “혀를 가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야만이 된다.” “방언으로 말하면 마음의 열매가 없다.”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 “방언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들을 깊이 숙고해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혼란스럽게 방언을 하는 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방언을, 성령의 은사를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처럼 가르치고 그것을 받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현대 방언의 문제는 무엇인가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도 아니고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아닌 제3의 방언에 해당된다. 우선 오늘날의 방언은 정상적인 통역이 불가능하다. 여러 해 전 미국에서 방언통역에 대한 실험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통역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을 녹음한 후 통역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7명에게 각각 녹음을 틀어 주고 통역을 요청했다. 그 일곱 가지 통역 중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 아프리카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방언 집회에서 그는 아프리카어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통역은사를 받은 사람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 형제가 방언으로 곧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John P. Ki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 Harper & Row, 1972, p. 63). 그리고 방언과 신유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나 신앙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십 여 년동안 매주 출연하여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목사가 있었다. 한 신문에서, 그 목사가 방송을 하는 기간동안 다른 여인과 부정한 관계를 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대단히 큰 화제거리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것이 그 목사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 23). 성령 은사의 가장 확실한 증거예수님 승천 후에 그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매우 분명하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의 최초 은사는 복음이 전파되는 초기 시대에 큰 능력을 더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의 가장 현저한 역할 중의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회심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시대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복음의 파종기에 이른 비 성령의 역사가 넉넉히 임하였듯이, 예수께서 알곡을 추수하러 오시기 직전에 다시 한번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7-13
  • 교회는 계속 개신(改新)한다
    종교개혁은 역사적 유물도 아니고 박물관의 전시물도 아니다. 그 개혁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중세 교회가 그리스도교다운 자기 모습을 잃고 헤맬 때 개신(改新)을 외치며 개혁의 분신으로 자처하여 ‘개신교(改新敎Protestant)’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고침으로 개신(改新)한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한다.‘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를 알기 위해서는 첫 번은 어디이고? 역사적으로 교회가 개혁된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개혁된 내용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답변은 “16,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거짓된 신앙적 열심과 거짓된 신학, 그리고 성서의 증거로부터 심각하게 멀어진 거짓된 교회의 모습들로부터 성서가 말하는 참된 구원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성서의 증거를 따라 잘 드러내었던 시기였음을 알게 한다. 이 때가 ‘오직 성서로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고 행함을 얻는 지혜를 새롭게 함이었다. 여기에 칼빈을 비롯한 활동이 역사상 돋보이던 시대였다. 바로 이를 교회가 역사상 개혁된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 ‘교회’가 이제는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제2의 신앙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듣는다. 여기에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고한 본문의 말씀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다’는 바울의 고백을 듣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함이 개신교의 이름으로 ‘개혁된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회와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하여왔다. 이런 고속성장이 한국사회와 함께 1세기 반 동안 선교의 연혁(沿革)에서 한국교회는 성숙된 발전의 모습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외적인 급성장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사회의 급성장과 성장주의 신화는 성공주의와 실용주의에 편승해 가면서 교회도 그대로 답습하여 부정적인 현상들은 교회내의 심각한 부작용들과 영적인 질병들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위기상황은 한국교회에 대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교회의 영적각성과 개혁이 시급하게 필요한 현실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내부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이해와 그 권위가 생활의 삶에서 말씀이 포기한 듯 한 믿음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개혁되는 때와 개혁의 주체로서 정체성을 망각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점들을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지적하는 데에 머무르면 아니 된다. 교회는 사회를 보는 배타성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나라 구현을 이루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성서를 제대로 알고(오직 성서로 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오직 믿음으로 만) 그것을 몸소 실행할 때 종교개혁이 가능하였음을 오늘에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성서말씀에는 힘이 생기고 개혁은 성서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행위를 포기하고 오직 성서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서(말씀)를 기준으로 삼아 전통을 타파할 때 발생한다. 개혁된 교회는 이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전체 역사 속에 있는 신실한 교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이미 개혁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는 주의 나라가 다시 온전하게 임하실 때까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16,17세기의 교회와 그들의 신앙고백의 의미는 교회가 항상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신 개혁된 내용 안에서 개혁되어 가는 개신의 과정이었다. ‘오직 성서의 말씀만이’ , ‘오직 믿음으로 만’이 계속적인 개신(改新)하는 신앙이다. 그리하여 개혁의 주체와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내용의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이렇게 종교개혁과 같이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는 계속 개신한다”는 지표로 삼는 신앙으로 교회는 먼저 이를 실행해 알리어 주어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7-12
  • 어떻게 지내십니까 / 김정남 장로
    전국원로장로회, 바이블아카데미, 평지협 등 여러 단체 참석 김 정남 장로(77세, 예장합동 장위제일교회 원로)는 새벽4시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후에 60여명에게 ‘카톡전도’를 전하고 이미 성경을 100독을 했지만 성경을 읽고, 남은 시간에 간단한 실내운동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교계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장로는 은퇴하였지만 매일같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김 장로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군(軍) 입대하기 전 대구 성덕교회(당시 배순조 목사 시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총회가 운영하는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며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전역 후 69년에 서울로 와 꿈꾸고 계획했던 신학은 포기하게 되었고 사회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의류생산업체인 성은상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 장로는 사업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1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함으로 빠르게 경제적인 기반을 닦게 되었다.김 장로가 사업을 하는 동안 부도와 여러 어려움도 많았지만 다시 재기하여 62세가 되까지 성공적인 사업을 토대로 자녀교육과 노후대책을 든든히 세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동대문시장에서 사업을 하면서 ‘동대문선교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며 여러 선교사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점포를 임대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김 장로는 서울에서 장위제일교회 개척당시부터 섬기면서 35세 이른 나이에 장로로 장립 받아 본 교회에서 담임목회자를 3대에 걸쳐 모셔왔다고 한다. 교회를 섬기면서 “항상 감사하고, 또한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고 있습니다.”김 장로는 총회 총대로 나가면서 교단의 정체성과 목표를 잘 알게 되었고, 경기노회에서는 일찍 부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교단적인 연합활동에도 앞장서온 관계로 서울지구 장로회연합회, 전국장로회연합회, 전국남전도회연합회의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은퇴 후에는 전국원로장로회연합회 부회장과 초교파연합회인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공동회장을 맡아 열정을 다하고 있다.김 장로는 지금까지 말씀과 기도, 찬양 중심으로 살아왔으며,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로 충현교회를 담임했던 고 김창인 목사님이라면서 “나의 흥망이 하나님께 매여 있다는 분명한 소신으로 성경에 기초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살아왔다”고 말한다.김 장로는 부인 이호순 권사(75세)와의 사이에 3남을 둔 행복한 신앙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진실, 성실, 성결을 가훈으로 자녀들을 키웠다고 한다. 지난날 자신이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어 장남이 신학을 하도록 하였으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에 자신이 없다고 다시 경영학을 전공하여 사업에 열중하고 있으며, 차남은 직장에 3남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김 장로는 3남 모두가 결혼한 후에 각 각 주택을 마련해 준 것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너희들은 이제부터 부모를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각기 자기 생활에 충실해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김 장로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하여 안타깝고, 진실로 구원의 등대와 방주가 되어야 한다”라면서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다.연합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수하게 복음을 어떻게 잘 전하겠다는 계획보다는 자리다툼으로 서로가 고소고발로 얼룩진 것을 보면서 한탄스럽다면서 진리 안에서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김 장로는 “저는 노후대책도 되어 있고, 우리 부부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저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신앙의 계대(繼代)를 이어 선교의 가문을 이루는 것이 남은 생의 소원입니다”라고 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7-12
  • 기독교인의 행복론 - 79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행복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동안 여러 번 행복을 찾아나섰었다. 행복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여행을 다니며 사물을 관찰하기도 하였고, 철학 서적을 통하여 행복을 말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도 읽었다. 물질적 부를 좇아다니기도 하였고, 문우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나 행복이 손에 꽉 잡히지 않아 나름대로 고민하였다. 왜 나에게는 행복이 없는가. 국민 소득이 그다지 높지 않은 네팔 사람들도 행복지수가 높다는데. 행복을 찾아 집을 나선 후 첫 번째 고개에서 나는 물질적 부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저택에서 멋있는 오픈카를 타고 나가 편백나무가 늘어선 시골길을 달리는 광경도 그려보았다. 세월이 흐른 후 실제로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질은 나를 일정한 채움으로 만족시켜 주기는 하였지만, 영원에까지 나를 데려가지 못하였다. 물질은 여전히 어느 곳에 놓여 있을 뿐이고 영원까지 가지고 갈 생명수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내려와 여행을 다녀 보기로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선호하며 권하는 여행은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들로 인하여 나의 눈을 맑게 씻어 주었다. 수천 개의 석회암이 돌출해 있는 베트남의 하롱베이에도 가 보았고, 버스를 타고 달려도 달려도 2천 미터 이상의 고산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로키 산맥도 구경하였다. 여행사를 통해서 전국 방방곡곡의 명승지를 가 보았지만, 한 번 다녀온 산야는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나를 영원에까지 데려가지 못하였다. 물질과 여행의 고개를 넘어온 나는 그렇다고 영원으로 가는 길찾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수천 권의 책과 논문을 발췌해서 읽었고, 멋진 시를 읊조리며 낭만 가객의 역할을 해 보았다. 여러 시낭송회에서 시를 읊조리면서 인간미가 있는 존재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나를 멋있는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다만 나에게 수천만의 독자를 감동시킬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왔다. 물론 나는 요즘도 계속 사색하고 작품을 창작하는 일에 매어달리기는 하지만, 그 일이 나를 영원에 데려다 줄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좋은 시는 시인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어서 줄기차게 내 가슴을 울릴 만한 담론과 이미지를 찾기에 골몰하여야 했다. 나는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시 짓는 일을 놓아 두고 다시 행복의 길을 찾아나섰다.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강원도 밤하늘의 별무리도 바라보고, 몽골 초원을 달리며 고독의 시간을 가져 보았다. 고독은 나에게 나 자신과 대면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분이 성직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동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삭개오 이야기가 나에게 다가왔다. 주님은 삭개오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세리였다. 당시의 세리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분봉왕에게 납부하여야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세리들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왕따시켰다. 삭개오 역시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그는 군중들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먼 데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고 싶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꾼 표적을 보였을 뿐 아니라,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배고픈 자에게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음식을 제공하셨다. 풍랑이 심하게 이는 호수 위를 걷기도 하셨다. 뭇백성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사람에게 여러 표적과 말씀으로 군중을 감동시키는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을 삭개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서 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싶은 그의 소망이 통했는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주님이 삭개오를 바라보더니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묵겠다”. 내가 행복이 있는 길을 찾아나서면서 삭개오 이야기를 접하게 된 것은 나에게 매우 뜻깊은 행운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에게도 삭개오와 같은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학식과 경험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나는 그분이 나의 집에 방문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마음에 빗장을 걸어두고, 나만의 철학적 체계와 아름다운 글을 모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가에 꽂힌 책처럼 장식만 되어 있을 뿐 내 안에서 생동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오셨다. 그분은 마음의 집 마당에서 미적 감각과 정서를 담고 계셨고, 성령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할렐루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7-12
  • 목회는 쉬운 것이다·66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배우고 느끼고 연구하고 아는 것에 능숙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아는 것을 자신 있게 토해냅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나의 이야기에 동의하기를 바랍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네 이야기를 하라고 목사로, 교수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했습니다.“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요, 의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동일합니다.기도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그 의문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이렇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아느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곧 하나님이기에 그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지 너희 자신이 설명하고 증명할 자료를 만들어 이분이 이런 분이라고 낳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요한복음 7장 15절에 깜짝 놀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0여 년이 넘도록 잘 알 건데 이 사람은 배운 일도 없고 율법을 알지도 못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유식하게 우리를 가르치고 말하느냐라는 것입니다.유대인은 찔림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다면 우리는 그런 말도 하지 않을뿐더러 놀라지도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저 사람이 아무리 그렇듯 한 말을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의 이야기로 무시할 것입니다.이때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 속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한편, 생각해 보면 유대인이라고 아직 주님의 초림도 믿지 않는 율법주의자들이 세계 학문에서 신학을 연구했다는 학자들의 견해에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이상히 여길 정도로의 관심인 동시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교만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예수의 전문인이라고 하는 예수쟁이들은 사회변화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아픔에 대한 것조차도 무식한 울안에 갇힌 독선적 삶이 바른 신앙이라고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간이 굳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요즘 무더울 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선풍기와 에어컨을 켜고 문을 꽉 닫아 산소의 소멸로 죽었다는 사건입니다.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문 닫고 믿는 신앙입니다. 오직 정통이란 하나님중심이라는 고집이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숨 막혀가는 현장에 예수님이 우리 호흡의 통로를 만드신 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인 것입니다.치료될 수 없는 숨 막히는 신음소리가 아주 고막을 망가뜨릴 정도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이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속에서 두 가지의 불치병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치매와 변비입니다치매는 과거의 성공이나 공력과 사건은 기억하나 현재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과거의 사건에 매여 사는 것이라고 하면 변비는 영양소를 다 흡수하고 남은 찌꺼기를 배설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배설의 순환작용이 막힌 증상입니다.치매가 왜 무서운 병인가 하면 과거의 공력을 말하는데 능숙해지면 현재는 무감각하여 주위 환경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인데 신학적 전통과 관습에 묶여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 경험과 전통에 묶여 먹고사는 도구가 되어 있는 치료 불가능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세상의 것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으나 아무런 감각이 없이 모든 환경을 더럽히는 주인공입니다.그래서 출애굽기 20장 26절에서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12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3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3. 영적치유인가 심리치료인가 교회와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사의 직무 중 하나는 ‘상담’이다.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인간의 삶의 제반 분야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목사에게 가져와서 해결해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목회 사역 중에서 상담 분야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상담자로서의 목사는 피상담자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룰 때에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나 학문적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영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런데 요즘 목회자들이 교인들과의 상담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기독교상담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다 보면 기독교의 신본주의 신앙이 인본주의 신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상담이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이러한 경향을 간과하거나 방치할 경우, 조만간 기독교영성은 시들어가고 인간 중심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심리학과 기독교신앙사전에서는 심리학을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는 단어는 ‘과학’이라는 말이다. 목회자들이 이 ‘과학’을 신앙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이 과연 과학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과학이란, 어떤 가설에 대하여 동일한 실험을 할 경우 항상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일정한 법칙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수많은 변수와 다양한 상황에 의해서 변화무상한 인간의 심리는 과학적인 데이터로는 결코 정리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심리학을 과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한 감이 있다. 그리고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이다. 인간으로 시작하여 인간으로 끝나는 학문이 심리학이다. 반면에 기독교신앙의 근간이 되는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심리학과 기독교신앙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만약에 이 둘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할 경우 수많은 부작용과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심리학’이라는 위장된 이름으로 심리학이 교회 안으로 깊이 스며들고 있어 기독교영성과 신앙에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심리학의 두 얼굴심리학을 기독교신앙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인물들 중에서 한국에 잘 알려진 목사로는 이미 고인이 된 미국 크리스탈 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와 ‘긍정의 힘’의 저자인 레이크우드 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치는 신앙 철학은, 하나님의 의지도 인간 자신의 긍정 사고에 따라 움직이며 따라갈 정도로 ‘긍정의 힘’이 강하다고 가르치는 인간 중심의 논리로 발전되었고, 결국 정통신앙의 기준으로는 기독교신앙에 부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듣기에 공감할 수 있는 ‘긍정적 사고’라고 하는 것은 뉴에이지의 심리기법이나 자기최면과도 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비성서적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심리학과 관련된 이러한 논리들을 기독교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신앙에 접목시키는 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다. 긍정적 사고 자체는 좋은 것이나, 그것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도구로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또 다른 신(神)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위 기독교심리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강조하는 세 가지 항목은 ‘자기 사랑’(자존감 회복), ‘긍정적 사고’ ‘성공의 법칙’이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무의식 세계를 자극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내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첫째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고 권장할만한 이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존감이 강해지고 자아가 굳게 확립될수록 하나님의 존재와 멀어지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관심이 옅어진다는 것이다. 신앙과 영성이 자아에 밀려나고 결국에 가서는 기독교정신과 신앙을 상실하게 되어 몸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마음은 기독교인이 아닌 상태로 변질되고 만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내용은 ‘긍정적 사고’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면 자신의 원하는 모든 일들을 성취할 수 있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 사고가 성경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매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말씀과는 다른 성격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어도 긍정적인 사고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수 있다는 말일 수 있다. 결국 ‘긍정의 힘’이란 인간의 무의식에 긍정적인 암시를 주어 그 긍정을 현실로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이 기독교심리학은 이러한 긍정 암시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성취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기독교심리학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옥성호 씨가 저술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부흥과개혁사 간)에 매우 예리하고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기독교상담을 통한 영적 치유성경에는 사람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여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다양한 방법과 원리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복잡한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그것을 가장 쉽게 확실히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기계를 만든 기술자다. 사람을 치유하는 원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제대로 고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상담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원리는, 인간 ‘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는 성경에 가장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상담을 통해서 성도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목사는, 그 치유하는 방법을 심리학적 기법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서 찾아야 하며, ‘긍정의 힘’으로 치료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을 통한 치유 사역에 있어서, 심리학적 기법과 성경의 원리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소유권 개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말씀하시는데, 심리학에서는 “너는 네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에 기록된 치유 원리의 기본은 마태복음 11:28,29절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 중에 ‘쉼을 얻으리라’는 구절이 바로 치유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자신의 어떤 문제를 자력(自力)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타력(他力)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암시를 주고 긍정적 사고를 만들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나아와 치유함을 받으므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치유받기를 원하면 ‘자존감’을 세우려 하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천국시민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언한다. 비워진 마음에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이 기독교상담의 기본원리이다. 사도 바울도 그 사실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성도들을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때에, 자칫 잘못하면 최면술로 진입할 수도 있는 심리학적 기법을 사용하지 말고 치유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채워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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