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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37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우리를 억누르는 참소의 내용에서 해방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처럼’ 사는 것은 변화입니다. 변화란 긴박하거나 쫄리지 않는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 개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문제로 삼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면서 자기중심에서 어두운 부분만 계속 발견하는 습관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7장 1절부터 보시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 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에베소서 1장 17절부터 보시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목표의 이탈은 모두가 흔들립니다. 지진의 무서움은 목표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뒤흔들어 놓는 것은 곧 파괴입니다.우리가 ‘처럼’ 살아갈 대상이 예수님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한 번도 궤도를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를 붙들고 그를 믿는 이유입니다. 돈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행정비서나 직원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치우침이 없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왜 ‘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갖가지 잡념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방법과 수단에 능숙한 이유입니다.누가복음 19장 10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9장 30절은 “다 이루었다”. 즉, 잃어버린 자(세상 사람들)를,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일이며 나 자신을 희생함은 돋보임이 아니라 남의 짐을 지는 일입니다. ‘처럼’은 왜 단순하냐 하면 우리가 할 일이 임재하신 하나님이 행하심에 대한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의 행복입니다. 그 가지는 많은 열매나 많은 수확이나 탐스러움이란 사람들의 꿈입니다. 참 포도나무는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분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몹시 산만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말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더 확실히 하나님을 분석하여 알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오히려 평신도만도 못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지배자로 사람들의 순수함을 병신으로 취급하는데 능숙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출 수 있는가?” 예수님의 목표나 기준은 가장 쉬운 예로 설명했는데도 왜 그리 고상해졌는가 말입니다.학문이란 너울이 실크 옷자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삶 자체가 산만해 있습니다. 최신 유행이나 인스턴트와 같은 해답에 이끌려 마음으로 결심했다가도 또 컴퓨터를 클릭하여 목표도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는 삶 속으로 망설임도 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유행의 철새처럼 하루살이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마음에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기 위해서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입니다. 살지 못하는 이유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받으면서 그것이 신앙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창조주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함을 받은 선택된 자들의 삶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사셨던 그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신 그 분의 삶이었습니다.그래서 그 분은 우리 만큼만의 매우 쉽고 단순하고 자연스런 삶이었습니다. 그 삶이 예수님의 대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갈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8-11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4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4. 개혁자의 대명사 세례(침례)요한 페르샤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 분열된 헬라 제국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셀류커스 왕국과 남방의 프톨레미 왕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끔찍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특히 셀류커스 왕국의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다 나라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가하였다. 유다인의 안식일 준수와 절기와 축제들, 제사, 할례의식 등을 금지시켰고, 율법서를 불태우고 유대교에서는 금지하는 돼지고기를 제단에 올려놓고 제사를 드리는 등 잔인한 핍박을 일삼았다. 헬라 제국를 정복한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도 여전히 유다 민족들은 처절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며 아무런 미래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속히 나타나서 그들을 구출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이상 선지자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유다 민족들은 저들의 허전하고 갈급한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고대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한 가지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고 도로망도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로마 전역에 복음이 신속히 전파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어졌다. 마침내 메시야가 도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왕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사명 예수는 비록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출생하실 것이었지만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다. 그 당시에는 왕이 어떤 지역에 행차하게 되면 선발대가 미리 가서 왕이 지나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고 왕의 행로가 안전하게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왕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단계가 필요하였고, 그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예수님 보다 약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요한의 출생도 예수의 출생처럼 예언되어 있었다. 제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 봉사를 하던 중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천사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였다. 그 아내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눅 1:17)할 것이라고 전하였다.그는 특별한 사명을 가진 구별된 아이였기 때문에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랍비의 교육을 받는 것이 마땅했으나, 인간이 만들어 낸 세속의 교육을 받지 않고 광야의 외진 곳에서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는 것이 그가 받아야 할 교육이었다. 먹는 음식도 극히 절제된 것이었고 몸과 마음을 순결하고 단순하게 가꾸어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정결한 통로로서 준비되어야 하였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아니한 이러한 교육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 그가, 30세가 되어 그 사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엄 있는 외모와 거룩한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사람들이 목도하게 되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감히 저항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그 동안 대중 앞에서 설교하던 제사장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랍비들과는 차별된 위엄과 군중들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유대 광야로부터 혜성같이 나타난 세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청중들은 요한의 말을 들으면서 새롭고도 이상한 능력을 감지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가혹하고 직설적이었지만 희망이 가득찬 음성이었다. 그는 국가적인 부패를 지적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견책을 하였고, 당시에 만연한 사회적 죄악들에 대하여 가차 없이 질책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귀족들을 포함하여 세리들, 농부들, 군인들, 심지어는 랍비들과 제사장들까지도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침례(이 당시에는 세례가 없었음)를 받았다. 외적인 경건의 모습을 자랑하고 외식을 추구하면서 백성들에게 강요된 존경을 받고 싶어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에 숨겨있던 은밀한 죄악들이 드러났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이 젊은 선생에게 동조하므로 저들의 영향력도 확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침례 받기를 청하였다.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이 참된 회개를 하지 않고 소위 포플리즘에 영합하고자 하는 그 기회주의자들의 마음의 동기를 꿰뚫어 보면서 신랄하게 견책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을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9).세례요한이 가까이 왔다고 외친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메시지였다. 예수를 ‘천국’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를 영접한 마음이 천국, 곧 ‘은혜의 왕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 순결하고 거룩하신 예수를 맞이하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숨겨진 죄들을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예수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마 5:3)라고 말씀하셨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마 5:8)라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정결한가? 과연 가난하고 겸손한가? 과연 날마다 죄를 씻고 살면서 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세례요한이 주는 현대적 교훈예수께서 이 땅에 초림하신 것은 ‘은혜의 왕국’이 임한 것이었다. 겸비한 심령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마음이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미(already) 도래한 ‘은혜의 왕국’에 동참한 자들의 그 다음 희망은 장차 올(not yet)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말 4:5)가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이었고, 예수님도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는 말씀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셨다. 이제 또 한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올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영광의 왕국’의 왕으로 임하실 예수의 재림이다. 예수의 재림 전, 백성들이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이 시대에 세례 요한과 동일한 심령과 사명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는 현대의 엘리야가 필요하다. 그들은 요한과 같은 자질과 성품을 가지고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용기와 영성이 있어야 한다. 견책과 함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위엄 있고 권세 있는 음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처럼, 세속과 격리되어 철저하게 절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다져지고 고착된 확고부동한 믿음과 경건한 삶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아마 오늘날에도 어디에선가 세례 요한의 정신을 품고 마지막 시대에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준비된 개혁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해 본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7-28
  • 믿음은 약속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기본이 있다. 이 기본에 우리는 등한이 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믿음에는 열심도 있고 기도의 열정도 있고 많은 은사도 받았지만 만사의 때를 아는 ‘기다림의 영성’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구주가 세상에 오심의 구주탄생의 의미를 갖기 위해 대림절을 지나 곧 탄생의 날을 맞아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된다. 여기에서 믿는 자가 챙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하는 점이다. 나와 관계는 어떤 관계가 되는가? 그러면 어떻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절기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커다란 의미는 그를 믿고 따르는 믿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시요 세상의 빛이며 영원한 말씀이신 분이며 그의 삶은 철저한 사랑의 화신으로 ‘믿음의 삶’을 사셨기에 여기에 믿는 자로 하여금 우리에게 이 사랑의 믿음으로 약속을 지키게 함을 알아야 한다. 여인의 컴컴한 몸속에서 보내고 탄생 후에는 이름 없는 목수로서 30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은 싸늘한 냉대뿐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예수 오심의 대접은 말구유에 누우심의 푸대접을 보게 하는 것은 눈여겨 살피지 않는 까닭으로 생긴 잘못으로 우리의 불찰(不察)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일을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어 후회막급하다.예수의 삶의 교훈은 약속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는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알아야 한다. 흔히 교우들은 믿음에는 열심도 있고 기도의 열정도 있고 많은 은사도 받았지만 만사의 때를 아는 ‘참고 기다림의 믿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구주가 세상에 오심의 구주탄생일에 반드시 대림절을 지나 곧 탄생의 날을 맞게 된다는 믿음의 과정을 알아야 한다. 이는 믿음이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한다. “믿음은 약속이다.”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에서 살아 온 결과로 살아 온 만큼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믿음은 약속”이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정밀한 심판에 서게 된다는 믿음을 알게 한다. 비록 죄된 인간의 삶이 성화되면 죄를 지었을지라도,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에 그 삶은 구원함을 받는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믿음으로만 그 약속이 지켜지기에 가능함을 믿게 된다. 이는 자기의 수행과 노력만으로는 아니되고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를 받지 않고는 생명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과 우주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창조함을 받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한 바 지음을 받은 그 의도(약속)대로 따르는 것이 이 모든 이치의 뜻이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사는 삶은 그 이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정성스런 창조의 일터에서 사는 삶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삶의 길을 제시하여 약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의 십자가 지신 것은 만인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정성스런 창조의 일터에서 사는 창조자의 뜻을 사랑으로 깨우치려 함임을 알게한다.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삶의 예술가이다. 여기에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타고난 재질이나 복의 근본으로 성심껏 자기인생의 행로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재물의 탐욕에 만연한 삶으로 황금만능주의로 배금주의에 따라 돈이면 최고의 가치로 여겨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의 삶에서 말세를 보고 있다. 성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함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한 생명의 기본 명제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관해 생각을 가지는 존재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7-27
  • 86. 제60회 총회장 장성칠(張聖漆) 목사
    황해도 신천군 출신장성칠(張聖漆 1914~1986. 9. 17) 목사는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신천(信川)군은 서북쪽의 은율군, 북동쪽은 재령군, 남으로는 송학군과 벽성군이 인접해 지리적으로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복음이 평안도 다음으로 교세가 좋은 곳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개한 지역이나 민족들에게 기독교복음이 전파된 곳은 일찍부터 신식문명에 접하는 기회가 되었고 무식한 백성들도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배우게 됨으로 마음이 열리고 머리가 깨어나 사리판단의 개념과 선악간의 개념을 바르게 인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다운 새 세상이 보이게 되어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신천이란 곳은 한편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이 경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경성으로 오르내리는 길목이 되어 일찍부터 전도자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었다. 신천읍 양장리에는 1911년 3월 15일 설립된 양장교회(良長敎會)가 있었고, 같은 읍 사직리에는 1933년 2월 18일 신천동부교회가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1883년 5월 16일에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조선인에 의한 조선의 어머니교회로 소래(松川)교회가 서경조(徐京祚)에 의해 설립되었다(韓國基督敎史總覽, 이찬영 편, 所望社 1994 서울 초판 p.937~943 참조). 그의 소년 시절에 이미 신천지역만 아니라 황해도에 한 노회가 조직될 만큼 황해도 전지역에 이미 예수교회가 곳곳마다 설립되어 있어 기독교에 쉽게 접촉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 계통의 교육기관을 통해 교육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권고로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영문과와 장로회신학교 졸업황해노회서 목사안수 해방후 월남황해도 신천 출신들이 세운 서대문교회 부임경신중·고등학교 교목 및 한성신학교 교장 역임고려측 및 통합측과 ‘합동’ 논의장성칠 청년은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인 언어로 영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며 영어성경을 접하게 되고 도서관에서 외국어로 된 주석이나 기독교관계 서적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소명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활동만 아니라 복음 증거자로써 지도자의 자질을 쌓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숭실전문학교를 고학을 하며 졸업하자마자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3년동안 신학을 이수하고 본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이환수 목사(47회), 문재구 목사(54회)와 함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43년 제38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이듬해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사이 전쟁이 끝나고 광복이(1945. 8. 15) 찾아 왔으나 북쪽에는 민주(民主)와 공산(共産)이라는 좌우 이념의 대립이 심화되어 가고 있을 즈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었다. 36년 동안 일제의 강점으로 언어도, 정치도, 산업도 다 앗아간 일본이 패전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을 맞이했는데, 좌우대립으로 해방정국은 점점 혼란만 계속되었다. 선거가 주일에 공공연히 시행되고 뜻있는 신앙인들은 하나 둘 3.8선을 넘어 월남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김경하 목사와 신천읍에 살던 교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로 남하하였다. 서대문교회(西大門敎會)가 형성하게 된 배경을 잠시 언급해 보면, 공산주의 정권이 득세하던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황해도 신천읍 서부교회(장연군 장연면 서부리 소재) 교인들이 남하해 1949년 1월 서울 서대문구 교북동 100번지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된 이 연약한 교회는 당시 서대문 영천에 있었던 서대문형무소(현, 안양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있던 박상건 목사가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얼마간 기간이 지난 후 ‘인수학원’을 빌려서 교회를 이전한 후 조동진 전도사를 초청하여 설교와 심방사역을 하게 하였다. 이러던 중 1949년 8월 월남해 대구 침산교회에서 목회하던 고향 출신 김경하 목사를 청빙하였다. 여러번 예배처소를 이전하던 교인들은 교회 자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 서대문 일대를 찾아다니다가 송월동(松月洞)112-2번지에 있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자녀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건물을 매입해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예배당 뒷마당에는 높은 종탑을 세우고 매일 새벽기도회부터 종을 쳐서 서대문 일대에 은혜의 찬송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황해도 신천읍에 살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황해도 신자들이 교회를 새로 설립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황해도 사람들과 인근의 장로교인들이 모여들어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거목들의 행진, 서대문교회 60년사, 이계홍 편, 서대문교회 간행 2009 서울, p.24, 28 참조).서대문교회 연혁(2017. 1 간행)에 보면, 1954년 5월부터 2개월간 송월동 112의 55호에 총경비 127만원을 들여 목조와 가 단층 55평 예배당을 신축하였다고 기록하고, 1960년 5월 제1대 당회장 김경하(金慶河) 목사가 사임하고 후임으로 장성칠 목사가 부임하다라고 적고 있다(서대문교회 2017년도 요람 p.9 참조). 교회는 임시로 조직을 갖추기로 하고 북에서 장로로 섬겼던 사람들인 김도측, 이춘화, 한철수, 김명원, 박태환, 문성훈 등과 함께 당회를 조직해 교회다운 면목으로 일신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18일 6명의 장로 취임식을 거행하였는데 바로 1주일 후 6.25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을 빼앗긴 기간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교인들이 9.28 수복으로 다시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예배당을 수축하고 재건하는데 열심을 내던 교인들은 그해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예배당을 뒤로하고 피난을 갔다. 1953년 공산군이 퇴각하고 다시 서울이 수복되자 교인들이 돌아와 다시 교회문을 열었다. 당시 서울에 있는 교회 가운데 피난 갔다가 돌아와 제일 먼저 문을 열고 예배드리기 시작한 교회가 서대문교회였다(같은 책, 거목들의 행진, 이계홍 편 p.32).1960년 11월에 부임한 장성칠 목사는 1963년 6월 18일 새예배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5월 7일 창립 15주년 기념 및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72년 3월 9일 미국으로 가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74년 5월 27일 교회설립 25주년 기념예배를 드렸고, 이듬해 7월 31일 교육관을 완공하였다.그 사이에 장성칠 목사는 경신 중고등학교 교목과 경기노회 노회장, 경기노회 직영 한성신학교 교장 겸 교수를 역임하며 두루두루 교회 행정면에도 경륜을 쌓아갔다. 드디어 1975년 25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0회 총회에서 그의 덕망과 목회사역과 교단을 위한 수고를 인정받아 교단의 수장자리인 명예로운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엄격하고 부리부리한 호상(虎像)으로 생겼지만, 자상하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목자상이었다. 1975년 11월 8일 장성칠 목사 성역 37주년 및 서대문교회 시무 15주년 및 교육관 헌당식을 가졌다. 1979년 9월 3일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한국음악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980년 11월 교회본당을 증축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교세는 장청유년을 합해 5000명이 넘었다. 중형교회의 발판이 되었다. 1984년 5월 31일 연건평 598평 대성전이 완공, 교회설립 35년만의 대사였다. 장성칠 목사는 목회사역을 마치고 명예로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서울노회로부터는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퇴임후 2년 후 1986년 9월 17일 주님의 부름을 받아 가족들과 사랑하는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영면하였다. 그의 천국 환송예배는 총회장(葬)으로 치루어졌으며 그의 유해는 서대문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그가 재직했던 예장총회 제60회기의 결의안을 요약해 보면, ① 목사 인식년제도를 실시키로 하다. ② 한남노회 분립을 허락하다(한남노회·남서울노회로) ③ 전북노회 분립을 허락하다(전주노회·동전주노회·북전주노회) ④ 조직당회로 있을 때에 합법적으로 청원되어 노회가 위임을 하였으면 폐당회가 되었다 해도 그 목사의 위임은 해제되지 않으나 2년 내에 당회가 복구되지 않으면 자동위임이 해제된다. ⑤ 미주 중부노회를 조직하다. ⑥ 일만교회운동은 추인하고 적극 추진하기로 하다 ⑦ 고려측과 합동문제는 시기를 보아 추진키로 하고, 통합측과는 이미 합동원칙을 세운 바 그 조건이 가하면 합동키로 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7-27
  • 성육신한 예수교회-53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명령을 내린 것에 관하여, 구약의 서기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고레스’라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대관식을 갖는 통치자에게 항상 붙여온 칭호였다. 이 칭호에 관련해서 오늘의 21세기 통치자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특별히 불릴 만한 이름이 있다면, 이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 일 것이다. 그녀는 백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여 독일의 인구 감소를 해소하고, 일할 수 있는 젊은이들과, 차세대의 든든한 기반이 된 어린국민들을 갖출 수 있게 하였고, 인류 역사상 100만이나 되는 난민을 자국의 시민으로 모두 수용한 정부와 국가가 지금까지 없었으니, 참으로 온 세계에 귀감이 되는 인류애의 공덕을 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평생 선포해야할 직무를 지닌 자라면, 모든 인민을 구원으로 초대하고, 저를 믿는 자에게 천국시민권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왕국의 통치자로서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의 선언문인, 로마서 서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단순하게 사람의 구원을 다루려고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가치를 개혁자들의 가치관과,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시대적인 토픽 관심사에 머물다가 보니,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복음’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퇴색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제도적인 교회를 굳히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하고, 교회론적인 성경 해석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들을 교회를 위해 사장시켜 왔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새로운 교회들도 역시, 한 편으로 치우친 교회론적인 성경해석에 중심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난당한 자가 그 지경에서 잠시 벗어났다고 해서, 더 크게 둘러싼 세속적인 미로에서 쉽게 빠져 나온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듯이,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왜곡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질 못하였다.바울이 선언한 ‘하나님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이 복음은 ‘바울의 복음’이 되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복음’의 미션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 아버지 보좌 우편에 등극하시었다. 이를 칭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였고, 혹은 ‘십자가의 복음’이라 하였으나, 거의가 구원론에 편중되었을 뿐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임을 받은 이후,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평생 자신이 전해야하고 믿고 실천하는 ‘바울의 복음’이 된 것이다. 바울은 평생 죽음을 맞이하기 까지는 이 책무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모세 오경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유대 서기관들은 모세 오경을 모두 한권으로 인식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려면 출애굽기 하나만으로는 불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로만 인식하는 데에 그친다면, 아마도 2차 대전에서 빚어진 600만 홀로고스트 현장에서 벗어나질 못할 것이다. 최근에 우리 한국교회는 세월호가 바다에서 전복되자, 그 선박을 운영하는 단체와 꼬리 자르는 일에만 급급했다. 한국교회는 한 이단 종파의 구원론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결과가 오늘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전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미 맛을 잃은 소금 같이 되어서, 세인들에게 짓밟힌 지 오래다. 육백만이 희생된 유대인들마저도 우릴 꾸짖을 명백한 신학적 오류들을 잘 알고 있고, 세인들마저도 공개적으로 우리 꾸짖는데, 우리만 우리의 잘못을 아직도 바로잡질 못하고 있다.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복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신 예수의 피로써, 죄 값을 지불하고 산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책무를 맡기고,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주어 참여케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되는 광명의 빛’을 그의 마음에 비추임 받은 이후부터는, 하루도 그를 부르신 주님에게서 빚진 자로서의 책무를 잊은 적이 없다. 바울이 이방인을 구원하여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었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이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으로 초대된 자들에게, ‘당신을 부르신 그리스도의 부름은 무엇입니까?’의 질문에 대답하고, 순종하는 시민이 되도록 더욱 훈련에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7-27
  • 유경선 장로
    파고다스튜디오 출근, ‘한고운’ 선교에 열중하며 지인들 만나 유경선 장로(예장합동 대서울교회 원로, 78세)는 종로5가 자신의 사무실 파고다스튜디오에 매일 출근하여 사진·영상 사업에 전력하면서 지인들과 만나 친교를 나누고 있다. 유 장로가 지난 40여 년간 파고다스튜디오를 운영해 오면서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온 자료는 한국교회에 중요한 역사자료가 된다고 한다. “오랜 동안 운영해 온 이 사업은 현재 적자가 나지만 계속하고 있는 것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 연합기관 등의 행사에 대한 모든 역사 자료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지요.” 라며, 현재 휴대폰을 비롯하여 수많은 영상 문화의 발전으로 사업이 위축되고 있다고 한다.유 장로는 지난 77년에는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담은 ‘사랑의 원자탄’을 영화로 제작하여 대한극장 등 전국에서 개봉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00년 북한의 스커스단이 한국에 와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일주일간 공연 할 때의 사진을 8권의 앨범으로 제작하여 보낸 것이며, 교계 행사는 ‘74 엑스포대회에 130만 명이 참석한 사진을 꼽고 있다. 유 장로가 가지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중요한 역사 자료 사진들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 받을 만한 귀중한 사진자료들이다.유 장로는 선교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그동안 서울지구장로회연합회 회장을 맡아 캄보디아에 교회를 건축하는 등 선교에 힘을 다했다. 최근에는 사단법인 한민족고구마나눔운동본부(한고운)를 박형서 러시아 선교사와 함께 설립하여 공산권에 굶주림을 해결하는 사업을 해 오고 있다. 고구마의 우량종순을 국내 비닐하우스에서 길러내어 종순 줄기를 분양하는 방법으로 운송이나 전달에 매우 편리한 수단이며, 국내산 고구마의 맛이 매우 달고 크기 때문에 품질이 우수하고 수확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북한의 230개의 군 단위 지역에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북한의 양강도를 비롯하여 함경북도, 평안북도 등의 농민조직에 2년간 고구마를 심어 90% 이상의 근착율에 많은 수확을 냈다고 한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고구마 종순을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남북이 막혀 있는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통일부 법인으로 출범한 한고운은 열방을 향한 운동으로 전환하였고, 동남아 아프리카 등으로 확산하기 위해 ‘1004후원 운동’으로 돕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은 “막힌 북한은 유보하고 태국과 필리핀, 캄보디아에 고구마심어주기 운동을 전개한 결과 큰 호응을 얻고 있다”면서 앞으로 자금이 준비되는 대로 네팔에도 갈 준비를 하고 있다.유 장로는 예장합동교단에서도 총회 여러 상비부에서 활동했고, 평신도 단체에서도 헌신을 다 했다. 총회 재정부장과 예산심의위원장을 맡아 일했고, 순교자유가족부에서는 이 부서를 상비부로 승격시키는데 역할을 다했다. 서울지구장로회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전국남전도회연합회부회장을 역임하여 교단에서는 잘 얄려 진 지도자이다. 유 장로는 초교파 연합단체인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을 맡아 평신도의 위상을 높이는데 많은 노력을 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문화예술분과와 북한돕기운돈본부 등에서도 활동했다. 현재 한국사진기자협회 감사를 맡고 있다.유 장로는 찬양사역에 큰 달란트를 가져 음악에 대한 재능을 살려 코랄카리스(장로합창단)에서 20여 년간 베이스 파트에서 활동했고, CTS 장로찬양단 및 CBS 장로찬양단을 창단하고 고문을 맡고 있다.연합사역에 저극적인 유 장로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에 지도자들이 소극적인 이유는 상대를 배려하고 양보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말하고”특히 평신도들은 섬김과 봉사에 인색하여 복음 선교에 등한시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는 성구를 좋아하는 유 장로는 서은자 권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고 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7-27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9
    한때 성에 대하여 탈경계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적인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욕이 불일 듯 일었습니다. 심리학을 연구하면서도 퍼소나(Persona) 밑에 감추인 그림자 현상(The Shadow)-마음의 어두운 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본능적 충돌들-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으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이 생겼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8:4). 곧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이 나를 주관하시도록 기도하고 믿으면 주님이 나를 어두움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5-37).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여 죄악 가운데 빠지지 않게 인도하실 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성령이 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로마서> 8:39).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는 주님이 원하는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작가로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형상화하는 일에 골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원하는 집안일을 도울 수가 있고, 자녀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만 보아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므로 나는 주님께 간구할 수가 있고, 주님이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헤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 9:16). 나는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걸르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1-3).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나아갔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요셉은 종의 신분에서 총리의 신분으로 상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이 나를 진정성 있는 작가로 세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이 동행하시는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나를 한때 미천한 자의 길을 걷게 하시고, 이제 주님이 동행하시는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청년 시절의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문학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추를 심하게 조여 오는 여자 청바지를 입고 대학 4년을 버티게 하셨으며, 믿음으로 열심 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하시고, 멋있는 변사 연기로 낭만적인 일상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착한 아내를 만나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교회 연합 신문>에 수필을 연재하도록 인도하셨고, 신앙심이 묻어나는 글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W. D. Cornell 작사). 주님은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동행하십니다. 나에게 샘물처럼 솟아나는 영감을 주시고, 나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7-27
  • 목회는 쉬운 것이다·36
    목자와 양의 친밀 관계를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감찰하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6). 그리고 주님의 곁을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 12:12).◦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골 4:2),◦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에스겔서 37장 1절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개혁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우리가 잘 사용하는 임재란 우리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그 손과 내 귓전에 맴도는 그분의 들리지 않는 음성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시편 기자는 하루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시편 5편 3절에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말없이 바라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임재의 삶에 대하여, 먼저 “듣지요”, 그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는 미소로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분도 들으신답니다”로바크라는 분은 하나님께 여쭙는 방식으로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 제가 지금 주님 뜻 가운데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처럼’ 산다는 것은 모방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 분이 내 맘 속에 계시다는 삶 그 자체입니다.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목회란 그런 것이 아닌가?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뒤돌아 보십시오. 뭐 거창하게 스토리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6개월, 광고 우편물 뜯는데 8개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고 1년 반, 줄 서서 기다리는데 5년을 보내게 된다.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겠는가?“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이 시간도 다스려 주옵소서. 예수님, 주님은 나의 쉴 곳이 되십니다.” ‘처럼’ 삶이란 너무나 단순한 삶입니다. 주님의 요구하심도 아주 쉬운 일들입니다. 구태여 주님과 만남을 위해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뚫어진 구멍을 매우려고 온갖 방법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잘 해보려고’라는 주제가 정확합니다.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원에 가서 해결을 봤다고 하면 그 해결이 무엇인가.그래서 사람들은 목적보다 방법이 더 호화롭습니다. 그런 일의 반복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건강을 위해서 많은 기구를 사용합니다. 헬스클럽에 가서 온갖 기구를 사용하고 비싼 돈으로 온갖 기구를 사 놓고 쓰지 않는 도구가 얼마나 많은가?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위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에 눌려서 질식하게 하는 것도 아는가?그럼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쉽게 죽는다는 것도 아는가? 인간이 만든 격식이 이단으로 둔갑하는 것도 아는가 말입니다.‘처럼’ 사는 것은 방법과 장소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있는 그 자리가 현장입니다. 모든 문제가 두고 생각해보는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시즉시 손을 빈 사람에게는 짓눌릴만한 먼지나 찌꺼기는 없습니다. 분리수거란 즉시즉시 구분하면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때에 맞추어 파종하면 모든 것이 매끄럽게 성사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처럼’ 삶이란 무릎을 꿇을 이유도 합심할 이유도 어디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그곳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부엌이든, 교회당이든, 버스 안이든, 교실이든, 기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이 계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7-2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13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13.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정신 유다 민족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매 주전 537년 바사 왕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의 귀환 명령을 내렸다(스 1:1~4). 이때에 유다 백성들의 귀환을 주도한 인물은, 여호야김의 손자인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었다. 그가 4만여 명의 유다인들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최우선적으로 시도한 사업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나라 백성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은 쉽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멸망한 북방 이스라엘의 열 지파 자손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이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에 동참하려고 하는 의사를 보였지만, 그것은 남방 유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성전재건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고, 그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른다. 다시 주전 520년경 다리오 1세가 내린 조서(스 6:1, 8~11)에 따라 유다인 2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이미 재건된 스룹바벨 성전의 미흡한 부분들을 완성하여 성전을 봉헌하게 되었다(스 6:13~18). 마침내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 왕이 3차 귀환령(스 7:7~26)을 내렸고, 이 3차 귀환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곽을 수리하고, 유다 나라의 자치권을 회복하기까지 헌신한 두 지도자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이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스 7:6)였다. 느헤미야 역시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도 왕이 순순히 들어주었다. 유다 왕국의 회복과 개혁의 완성은 사실상 이 두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에 이 두 사람의 인품과 신앙과 개혁정신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에스라의 인품과 그의 개혁정신에스라는 유다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혈통적으로도 아론의 16세손이었고, 원칙에 매우 철저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그의 백성과 함께 귀환하려고 할 때에 그들이 가지고 가는 많은 재물과 보물 때문에 혹시 이주하는 도중에 노략을 당할 위험이 있어서 왕에게 함께 동행해 줄 군사를 요청할 마음이 있었으나, 에스라는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가 왕에게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스 8:22)신다고 하였기 때문에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스 8:22)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 믿음인가? “믿습니다”라는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모든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보려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매우 값진 교훈을 주는 대목이다.그의 이러한 성품과 신앙 때문에 그가 아닥사스다의 귀환 명령에 따라 유다 나라로 돌아가서 나라의 회복과 개혁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작정한 다음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이것이 그의 회개의 기도였다. 모세나 다니엘이나 위대한 지도자들의 특성은 언제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겼다는 점이다. 특히, 그가 회개한 것은 유다 백성이 이방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자식을 낳은 것이었다. 이러한 죄악을 선두에서 저지른 사람들이 유다의 “방백들과 고관들”(스 9:2)이었다. 에스라는 이 일에 대하여 통절하게 회개하고 유다 관원들의 협조를 얻어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개혁은 매우 구체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우선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의 명단을 세밀하게 작성한(스 10:18~44) 다음, 그 이방인 아내들과 자식들을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는 뼈아픈 개혁을 시작하였다. 개혁이란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고치는 것이다.에스라는 학문에 깊은 통찰력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백성에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에 비추어 그들의 죄와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에스라가 일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성경 연구의 부흥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흥과 개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거부하거나 핑계를 댈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 할 핵심적인 교훈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모든 교리나 영적 표준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성도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에게 설교를 할 때에도 그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말씀을 강론할 때에, 성경절 한두 절 읽고 나서 정치 이야기나 자신의 자랑 또는 인간적 이론을 전개하는 일은 성도들의 회개나 개혁, 영적 성숙이나 건전한 교회 성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한다.느헤미야의 능력과 과감한 결단느헤미야는 신앙심이 투철한 정치가였다. 느헤미야가 비록 포로로 잡혀온 유다 민족의 후손이지만 바사의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술 맡은 관원직을 부여한 것은 그의 능력과 정직하고 냉철한 성품을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후에 그가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그는 조직적이고 유능한 정치적 지도자였던 것 같다. 그가 왕궁에 거하는 동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유다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하였다. 유다인들이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느 1:3)는 보고를 들은 느헤미야는 며칠 동안 통곡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유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나라를 회복시켜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에게 특별한 기간을 할애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많은 물자와 물품들을 제공하면서 성을 수축할 것을 허락하였다. 느헤미야는 편안하고 아무런 염려가 없는 왕궁을 떠나 시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조국을 향하여 머나먼 여정 길에 올랐다.무너진 성벽을 수축하고 불타서 못쓰게 된 문짝들을 달고 성을 재건하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방해와 파도같이 밀려오는 도전들이 있었다. 특히, 그 당시 사마리아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산발랏과 그를 돕던 도비야의 음모와 방해는 매우 집요하였고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떠한 협박과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52일 만에 공사를 마치고 성벽과 성문이 든든하게 세워졌다. 느헤미야는 그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있었으나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느 5:4) 백성의 피폐한 형편을 고려하여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고 자원해서 봉사하는 어질고 자비심이 많은 총독이었다.그들은 유다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민족의 영적 부흥과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희생하면서 헌신한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성경을 깊이 철저하게 연구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찾아서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한 에스라와 같은 목회자, 정당한 보수까지도 거절하고 순수한 봉사와 희생의 정신으로 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복리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7-26
  • 85. 제68회 총회장 배재운(裵在雲) 목사
    황해도 은율군 출신배재운(裵在雲 1913. -1995.2) 목사는 황해도 은율군 은율(殷栗)이란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은율은 산야에 가을이면 밤나무에서 밤이 많이 열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다. 은율군의 지형을 잠시 살펴보면 동쪽은 안악군, 서쪽은 송화군, 남동쪽은 신천군, 북쪽으로 황해와 대동강 하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곳 역시 가까운 평양에 기독교 복음이 일찍 들어옴으로, 일찌기 복음을 가지고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와 전한 곳이다. 재운 소년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부모들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랐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친구따라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에배당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전도자들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계속해 교회에 다니다보니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어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처럼 재운 소년은 친구따라 영생의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되어 성수주일 지키기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제사를 못 드린다고 하여 부모님과 친척들로부터 생각하지 못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재운이 태어난 시대 역시 일제하여서 조선말도 못쓰게 하고 이름과 성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등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러나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선교사님들이 조선말로 설교하는 말씀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도 하였다. 북한에서의 신앙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북쪽은 공산당들이 정권을 휘어잡고 예수 믿는 사람들과 대립도하며 핍박하기 일쑤였다. 소련군들이 신의주와 평양을 점령하고 정치를 펼치기에 이르렀고 애국지사들과 많은 지주(地主)들도 앞다투어 남쪽으로 피난을 가거나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러시아로, 멀리로는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북쪽사회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리만큼 점점 혼란이 가중되었다.배재운 청년도 친지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와 잠시 서울에서 머물며 살고 있었으나 전세가 기울어져 남으로 남으로 정처없이 설음많은 피난민이 되었다. 그는 피난 중에도 다행히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교된 총회신학교를 찾아가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3년 과정을 하나님의 은헤로 공부할 수 있었다. 전쟁통에 먹을 것, 입을 것, 거처하는 모든 것들이 원만하지 못하였다. 총회출판부에서 펴낸 ‘역대 총회장의 증언’이란 설교집에 단 한편 남은 설교를 보면 그의 일생을 그대로 토로한 것 같아 읽다가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성경본문 사도행전 7장 30절~38절, ‘광야교회’란 제목의 설교에서,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었다(38절).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하시었다. 이로 보아서 교회는 생명의 도를 받아서 하나님께 제사와 경배를 드리는 장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선조들이 하신 일들을 더듬어 보고 오늘 우리도 거기에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첫째는 노아의 방주교회입니다. 사십일 사십야 내린 홍수로 온 세상이 멸망받았지만 노아의 8식구는 믿음을 지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6.25 피난 중 대구서 총회신학교 졸업부산 광안제일교회 피난민 교회 맡아 목회지역사회 봉사로 내무부장관 표창 받아“NCC계 교단과 강단교류 할 수 없다” 결의둘째는 아브라함이 드린 모리아 산상교회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에게 대신 수양을 예비해 아들 이삭을 살려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다니엘의 가정교회입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늘 기도했습니다. 사자굴에 던짐을 당하고 풀무불에 던짐을 당해도 기도함으로 살아났습니다(단 6:10~17). 넷째는 사무엘의 제단교회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도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화께 기도하리라(삼상 7:5). 이어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미스바와 센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썼다(삼상 7:5). 다섯째는 다윗의 목양교회입니다. 다윗이 양을 치면서 조용히 기도한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은 목양교회입니다(삼상 16장). 여섯째는 솔로몬의 성전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솔로몬을 낳기 전에 평강의 사람이라고 계시하고 알게 하시어 그로하여금 성전을 짓게 한 것이 솔로몬의 교회입니다(왕상 8장). 위의 교회를 통틀어 광야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 속에 배재운 목사의 생애와 신앙과 삶이 녹아진 핵심이 들어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못 배우고 못 입고 살았지만 여호와를 알게되고 예수님을 믿게되어 축복을 누리게 된 자신의 진심이 담긴 간증설교가 아닌가 생각된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초판 p.106~120 참조).그의 목회사역을 잠시 일별해보면, 부산 수영구 광안4동 741-1에 있는 광안제일교회에서 한 생을 다했다. 이 교회 역시 6.25 전쟁으로 부산까지 남하했던 피난민들이 주축이 되어 1955년 6월 6일 김감금 유정필 외 10여 명이 모여 한원돈 목사를 초대 교역자로 모시고 천막을 치고 개척한 교회였다. 배 목사가 부임한 날이 1963년 7월이었다. 신생교회로서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했다. 13년만에 겨우 사택(5평)을 마련해 배재운 목사를 4대 당회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배 목사 부임 3년만에 77평의 교회당을 기공하여 그해 12월 29일 교회당과 사택(목사관)을 준공해 교회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이듬해(1967년) 12월 9일 성전봉헌예배를 드렸으며 함께 이명수 집사를 장로로 세워 당회를 보강하게 되었다. 1971년 11월 6일 임은식 장로 취임, 임창도 김동수 박정용 임성은 장로 장립이 있었고, 그동안 교인들의 증가로 1973년 3월 9일 새예배당을 지하1층 지상3층 연건평 200평 규모와 목사관 20평 관리집사 사택 10평 규모의 신축교회 기공식예배를 드렸다. 1974년 3월 1일 손성원 장로 장립과 황용이 장립집사 안수와 최강수 오진화 김은양 원미례 권사 취임식을 가졌고, 1976년 4월엔 목사관 2층 15평을 건축했고, 11월 10일 새성전 및 목사관 준공식을, 11월 27일 성전 봉헌예배를 노회와 당회가 주관 성대하게 치루었다. 1979년 12월 22일 황제면 안증임 이상덕 집사 장립이 있었으며, 1983년 11월 26일엔 안중일 이상덕 최동수 장로 장립이 있었고, 함께 황재홍 김철주 이한영 안수집사 장립과 조원숙 권사 취임식을 거행했다. 1985년 7월 11일 당회장 배재운 목사는 22년간 본교회 시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배재운 목사는 총신대학교 이사를 역임하였고, 내무부장관으로부터 지역사회 봉사경력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은 바도 있어 지역사회 유지들 사이에 덕망있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광안제일교회 2017년도 요람 p.31-32 참조).이러한 그의 희생과 봉사를 교단이 인정하여 1988년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평안교회에서 모인 대한수교장로회의 제68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가 재임했던 제68회 총회 결의안을 요약하면, ① 총회 개회일자를 9월 셋째 주일 후 화요일 오후 6시 30분에 개최하기로 하다. ② 1만 교회운동 중앙위원회 제1차~8차까지의 경과를 보고 하다. ③ 통일교 호칭문제는 문선명집단, 문집단으로 칭할지언정 통일교단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의하다. ④ 군산노회 분립을 허락하다(군산노회·이리노회로) ⑤ 청년회를 청장년회로 개칭하고 회원의 연령은 20세~45세까지 하기로 하다. ⑥ 선교100주년기념<한국교회교육100년사>를 발행키로 하다. ⑦ 재판국을 제외한 16개 상비부원 수 27인을 33인으로 규칙을 수정하기로 하다. ⑧ 무지역노회는 가급적 속한 시일내에 지역노회로 귀속하기로 하다. ⑨ 강단교류 할 수 있는 교단은 비NCC계의 교단이며 본 총회가 규제한 NCC교단 인사를 초청하여 학술세미나도 못한다(단 총회가 인정하는 연합집회는 예외로 한다.)배재운 목사는 월남하여 고학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오직 한 교회에서 평생 승리로운 목회사역을 마치고 1995년 2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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