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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41
    오늘과 같이 우리 크리스천에게 지혜가 필요한 때는 또다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말세에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너무나 짙은 나머지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질 않고 분별이 되질 않는다 하였는데, 오늘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한다.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을 살피어 보면, 저들은 경건한 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적들의 더러운 계략과 함정에 빠지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멸망을 당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고난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지혜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너희는 야훼께 부르짖으라. 그가 너희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알게 하시리라(렘 33:3).”하였다.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하기에 앞서서 그의 교회에 보내는 회람용 서신에서, 고난을 겪는 그의 교회에게 깨우쳐 주기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겠느냐?’ 하였다. 수천 년 동안 믿음의 행보와 출애굽의 경험과 바빌론 포수생활을 경험하였고, 국토를 빼앗긴 상실감이나, 주권을 잃고 남의 나라의 속국으로 살아온 경험을 하였던 터이라서 그런지, 저들이 구하는 바가 단지 ‘지혜’ 하나로 표현된 것을 보아서, 지혜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며 바라며 사모해야 할 것이리라. 몇 년 전에도 유대 랍비의 강론을 경청한 적이 있는데, 말라기에서의 ‘하늘 문을 여시고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붓지 아니하는가 보라!’ 하신 선포가 ‘지혜’를 지칭하는 것임을 보면, ‘지혜’란 이스라엘 문학과 삶에서 가장 근저에 자리 잡은 가치인가보다.바울은 자신감 있게 고린도지방의 교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주님은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라고 했다. 뾰족한 창끝처럼 무엇이든지 뚫고 나가려는 저의 신앙의 의지가 확실하게 돋보인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적인 경험에서, 우리는 에스더 서신에서도 어둠의 계략과 하나님의 지혜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려고 온갖 계략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하만에게, 미리 아시고 넉넉하게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지혜가 아하수로왕의 꾸밈이 없는 마음에 전이된다. 이날 모르드개는 높여지고, 하만은 장대에 매어달리고 말았다.오늘 날에도 법학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항상 상기되어온 이야기가 있다면 솔로몬의 재판 판결에서 나타난 지혜일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어좌에 앉아서 정치꾼들의 농간에 좌우되질 아니하고, 치우침과 두려움 없이 국정을 잘 다뤄 갈 수 있었던 담력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아마도 저는 필히 기도에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저가 어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낳아준, 한때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의 활략도 있었겠지만, 그의 아비 다윗의 영적 지지와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아비인 다윗도 역시 환란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사는 지혜로운 성군이었다. 솔로몬의 노랫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아비의 사랑을 입고, 배움을 받았는가를 엿볼 수 있다.다윗의 성장 과정에서도 보면 그의 주변도 역시 어두운 면이 짙었다. 사무엘의 눈에 들기까지 그는 집안에서 변두리에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였고, 항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서 있어서 백전백승의 사람이었다. 그가 이십 세가 채 안되었을 적에 골리앗을 쓰러트린 그 장면은 그의 뇌리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질 않았겠지만, 항상 그의 품에서 사랑을 받아 온 솔로몬의 가슴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약관의 나이에 대담하게 왕권을 거머쥐고, 정적들의 눈빛도 아랑곳하질 않고, 무엇보다 먼저 기브온에 계시는 야훼 하나님께 나아가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는 마침내 이날 하늘로부터 나라를 통치할 크나큰 지혜를 입는다.이방인으로서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하며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그 역사적 시기가 깊은 어둠에 묻혀있던 때이다. 그런데 마침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가 팽배한 흑암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선물로 내어놓으신 것이다. 성령이야 말로 종말의 시간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지혜의 선물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누구이든 권능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 땅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법을 강같이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3-03
  • 기독교인의 행복론 -38
    “산이 다가와 내게 감춘 비밀을 묻는다/ 난 산을 훔쳐보며 엿듣는 거라 말했다/ 산과 나 바다는 한 끈 속 출렁이고 있었다.// 산이 작은 도시의 바다를 내려다 본다/ 늘 고여 오르는 열기에 숨을 헐떡인다/ 묵묵한 그의 마음자리 새가 되어 나는 비늘.// 벌레의 울음소리 산을 가득 덮는다/ 수도자는 비질로 울음을 쓸어 담고/ 그래도 남는 밀어를 혼자 안고 듣는다.// 산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하고 있다/ 입술에 묻어나는 이끼같은 산내음이// 달고도 오묘한 물빛 해동갑을 하고 있다.”(졸시,「산과 포구」에서) 산과 포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동 지역만 가더라도 설악산 가까이에 많은 포구들이 자리잡고 있지요. 이를 보면 산과 포구는 서로 인접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어떤 이는 산만 보이고, 어떤 이는 포구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산과 포구를 아울러 볼 수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의 당쟁도 동인이든 서인이든, 노론이든 소론이든, 다 맞는 말을 하지요. 그러나 자기 색깔만 주장할 때, 상대를 유배시키고 사약을 내리는 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과 포구」란 시를 지어 보았습니다. “산”과 “포구”가 대화할 때, “산과 나 바다는 한 끈 속 출렁이”게 되지요. 남과 북, 동과 서, 진보와 보수 간에 진실과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안목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나는 바다낚시를 좋아합니다. 동호회원들과 동해안과 서해안과 남해안으로 몇 차례 낚시를 다녀 보았습니다. 동해안은 청정한 바다가 좋았고, 서해안은 가두리 양식장이 인상적이었으며, 남해안은 완만하게 굴곡진 포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산을 지나 창2리에 다녀왔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하여 아침 해가 밝았을 때에 포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육지로부터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낚시터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좌대 낙시터입니다. 도시의 실내 낚시터에 비하여 별로 크지 않았지만, 요새 웬만해선 바다에서 고기가 잘 안 잡히다 보니 이렇게라도 고기 잡는 쾌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낚시터 주인은 우리 일행을 통통배로 실어 낚시터에 내려놓고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물고기를 풀어 넣었습니다. 풀어진 고기들은 낚시 바늘을 피하는 요령이 생겨서인지 잘 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나절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젖을 때가 많습니다.동호회원 가운데 P는 바람잡이 역할을 합니다. 그는 물고기를 별로 잡지 못하면서도 낚시하는 분위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언제나 들뜬 분위기로 물때 등을 이야기하며, 몇 개월에 한 번씩 낚시를 주선하곤 합니다. 한 달에 20일 일하고 열흘간 노는 그의 직업 특성상 낚시는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날에는 새벽부터 차량 봉사를 성가대에도 서는 신실한 신자입니다. 그의 아들이 이제 막 목사가 되어 충청도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나도 창립 예배에 참석해 보았지만 신도가 고작 두세 명이어서 그가 아들의 생활비를 보태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동호회원들이 “목사 아버님”하고 불러 주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흘리곤 합니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상 받으면 하늘 나라에 가서 상이 없다”면서 숨은 봉사 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J는 낚시 준비하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바다낚시의 재미를 톡톡히 본 모양입니다. 주로 해변에서 밀물이 들어올 때에 낚시를 하는 데도 대어만 낚아올린 모양입니다. 한 번은 130센티미터짜리 한치를 잡아서 십여 명의 그곳 교인과 어울려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하니, 그가 낚시 취미를 가질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내도 낚시 나들이 준비를 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이번에도 돼지 삼겹살과 부재료, 간식과 라면과 취사 도구 등을 꼼꼼히 챙겨 보냅니다. J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든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S는 낚시광입니다. 좋은 낚시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 틈만 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낚시터로 달려가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S도 요즘에는 고기들이 입질을 안 한다고 투덜대곤 합니다. 그래도 그는 낚시 얘기만 나오면 금방 생기가 돌아 주위 사람들의 기분이 올라가게 하지요.그럼 나는 어떠하냐구요. 나는 낚싯대도 없이 주로 회원들 가는 데를 따라다니는 편입니다. 이제까지 숭어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낚시터의 정경을 페이스북에 올려 낚시하는 기분을 내곤 합니다. 그래도 회원들은 나를 데려가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야 분위기가 업된다나요.이런 동호회 얘기를 하는 것은 주 안에서 행복한 삶을 인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날 위해 기회를 엿보다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행복을 잡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진짜 행복이지요. 산과 포구가 한데 어울리는 것처럼,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주 안에서 한 몸 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예뻐하실 겁니다. 여러분도 행복을 나누어 가지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3-03
  • 목회는 쉬운 것이다·23
    성경에는 “구제를 하되 먼저 믿는 자에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우선 나의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아는 일은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굶주린 사람에게 쌀 한 되를 건네기는 쉬워도 같은 집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생의 자랑이란 공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명분 때문에 이웃 사랑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서로에게 사랑을 나누기 전에 먼저 가정 안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거창한 표어가 아닙니다. 거창한 비전이나 계획이 아니라 너의 그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가까운 나의 그늘에 사랑을 받을 사람이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신앙은 목적이 아닙니다. 살아본 사람들이 목적대로 살았는가 물어보십시오.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에 시달렸는가. 성과에 대한 치수가 나를 계속 본질의 자리를 벗어나게 함을 느끼면서도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사람들은 인간답게 살려면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논리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타고났다. 누구나 타고난 일에는 놀라운 재능이 있으므로 그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타고난 일을 하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세상의 주목과 찬사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사와 갈채를 받기 위해서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 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인간의 최대의 꿈을 이루었을 때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그런 사람 대다수를 세상이라는 괴물이 집어삼킵니다. 그 꿈의 실현은 결국 괴물의 수작이요, 나 자신을 큰 덩치로 삼켜버리려고 세상의 꿈을 갖게 한 것입니다.에덴동산의 아담과 여자는 평생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미래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이미 나와 있는데, 우리는 광야를 헤매는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빌립보서 3장 10절에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시간 맞춰서 기도하는 사람보다 그들의 행동 자체에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자유로움입니다.자기 직업을 삶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직업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슈바이처는 밀림 속에서 악어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이 인생의 목적에 의한 밀려남이 아니라 그 자체 속에서 즐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종교적 행위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닙니다.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중보기도가 아닙니다. 그 중보의 내용이 삶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이고 생활입니다.내가 대신해서 상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이방종교인 로마 가톨릭의 대신 중재역할입니다. 이것이 대제사장 제도로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제사의 개념을 지금도 계속 반복하는 죄악의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시편 37편 4절을 보면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을 아는 기쁨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목적은 결국 세속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극히 기본적입니다. 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상이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8장 2절부터 3절에서 “어른들은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을 알게 됨의 증거는 사람들 간의 갈증이 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인간의 목적을 놓아버리면 자유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단순함에 대한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나 생각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며 가까운데 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치게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권위이시지만 너무 단순하시고 편하신 분으로 격식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복잡한 격식은 이방 종교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3-03
  • 72. 제93회 총회장 최병남(崔炳男) 목사
    중국 북경 태생최병남(崔炳男 1943.1.2~) 목사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태어났다. 부모세대가 조국의 피폐했던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땅으로 이민 갔던 조선의 디아스포라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위로는 누님이 한분 있었고 최병남 소년은 외동아들로 이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태어난 1940년대는 소위 일제 말기에 속했던 시절로 조선의 미래를 꿈꿀수 없었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8·15 직후 부모님의 손에 이끌리어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다. 최병남은 귀국하여 어린 유년시절부터 충현교회(당시 충무로 소재)에 출석해 신앙생활을 하며 성장했다고 후일에 언급한 바 있다. 그가 기독교에 입신해 신앙생활을 했으나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중학교 1학년때 성령충만함의 은혜를 체험 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할 때는 늘 제일 앞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렸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다가갔다. 그는 고교진학을 앞두고 약간의 고민은 있었으나 미션계통이 대광(大光)고등학교를 선택해 성경을 배우며 정기적인 교내 채플을 통해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받기에 이르렀고, 고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주저함 없이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지원해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최병남은 신학교를 마치고 당시 동도교회(東都敎會·최훈 목사 시무) 전도사로 부름받아 사역하던 중 1975년 이은희 사모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동도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시작해 강도사를 거쳐 부목사로 사역한 기간은 당회장 최훈 목사의 강도높은 목회훈련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동도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중 뜻한바가 있어 도미(度美) 유학의 길에 오른다. 그 때가 1981년이었다. 그 때는 최 목사에게 1남2녀의 자녀를 두었을 때이고 그의 나이 또한 39세로 40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늦은 유학의 길이었다. 주위의 선배들이나 동료들의 만류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로 생각하며 미래의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되어야 겠다는 큰 포부도 있었기에 미련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공부도 해야했지만 교회를 담임하면서 학업을 진행할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서 목회와 학업의 병행이 어려울 것이란 염려에도 불구하고 최 목사는 담임한 교회도 배로 성장하였고 학위도 동료 유학생들 중 가장 먼저 마칠 수 있었다. 목사안수 받은 후 미국 유학서울 왕십리교회서 대전중앙교회로 부임경목 활동 통해 지역사회와 유대 도모기도와 전도와 성경공부로 교인들의 영성훈련총회산하 상비부에 총무제도 신설이렇게 미시간주 그랜드래피드에 있는 칼빈 신학교(Calvin The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마치고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있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로 가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유학생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풍성하게 주셔서(히 4:16) 미국에서 유학생활하던 중 막내딸까지 하나 더 얻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렇게 영성으로 지성(知性)으로 준비된 최목사에게 서울 왕십리교회의 부름을 받고 1986년 12월에 부임해 목회사역을 하게 된다. 부임 후 만 5년동안 1991년 말까지 제대로된 목회철학을 펼쳐보이며 충성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대전중앙교회로부터 또 새로운 주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오늘날 목회현장에 비해 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밖에 없는 인도하심이었다. 왜냐하면 그 흔한 이력서 한장 없이 대전중앙교회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12월에 대전중앙교회로 부임해 2012년 12월 25일 원로목사로 추대 받은 날짜지 20년이 넘게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한 후 교회에 출간한 교회지(敎會誌)「대전중앙」 창간호 특별대담에서 부임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정든 왕십리교회를 떠나 새로운 임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기도하는 중 분명히 하나남의 음성을 들었고 그래서 이렇게 오게 되었는데 장로님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님들이 매우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이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수준도 있고 열심도 있어보여 장래 발전 가능성이 많은 교회로 보였습니다.” 그는 대전중앙교회를 섬기면서 1994년 3월엔 대전노회 노회장으로 봉사하였고, 1994년 4월 25일부터 5월 6일까지 미국에서 개최된 21세기 교회성장세미나에 참석해 세계교회의 교회성장사를 살펴보기도 했다.이듬해 1995년 가을학기부터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계획세미나> 과목을 강의하기도 했고, 대전시 경목(警牧)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와 유대를 도모하기도 했으며,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필자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본 최목사의 풍기는 언행역시 고넬료에 비견할 만한 인물임을 느끼었다. 그가 은퇴직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으로 여러 부서에서 봉사할 땐 항상 성직자로서 겸손함과 경건성의 리더쉽을 발휘 한기총을 원만하게 협력하며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의 목회비젼은 늘 기도목회라 했다. 그의 지론은 모든 일이 기도라는 무릎만큼 교회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에게도 기도중심의 삶을 살도록 지도한다. 기도없는 삶은 개인이나 교회가 모두 실패라고 말한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강조했고, 때로는 횃불새벽기도회, 때로는 특별산상기도회를 계획, 교인들을 독려한다. 특히 교회창립5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는 1천번제 새벽기도회를 추진 신자들의 영성을 깨우치기도 했다. 다음엔 전도목회를 강조하였다. 최 목사에게 기도가 목회의 우측 날개라면, 전도는 목회의 좌측 날개라 할만큼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조했다. 최 목사는 기도하는 교회로, 전도하는 교회로 지향하면서도 이를 바르게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야 한다는 교회의 영성과 신자들의 역동성을 매우 강조하는 전인적 목회를 지향했다. 최목사에겐 선교적 비젼이 있었다. 그것은 국내 선교와 아울러 해외 선교의 병행이었다. 지역내 열악한 지역에 정기적인 무료의료전도행사를 장애인 선교와 불우이웃에게 사랑의 복음전달 농어촌 미자립교회를 돕는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와 병행하여 몽골에 이혜영 선교사(1991. 8. 파송), 브라질에 양보라 선교사(1994. 6. 파송), 이원길 선교사(1994. 2. 파송), 파라과이에 정금태 선교사(1994. 7. 파송), 북한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파송된 강일구 선교사(1997. 10)를 파송하고, 어떤 곳에는 협력선교를 수행하기도 했다. 최 목사는 목회사역을 하면서 성인교육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제자훈련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교리교육, 책별성경공부, 개인성경묵상, 교회역사 교육 등을 꾸준히 시행해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했다. 구체적으로는 교구별성경공부, 부부성경공부, 제직세미나, 입교자교육, 구역장학교, 중직자교육, 장로피택자교육 등을 통해 교인다운 교인, 제자다운 제자 육성을 위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교인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신앙전달 매체로 <대전중앙>이란 교회신문을 발행 성도들 간의 신앙교류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이렇게 충성을 다해 온 최 목사는 2008년 9월 22일부터 26일 사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3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 총회장)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재임했던 93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총회 로고를 새로이 변경하고, ② 총회산하 상비부에 총무제도를 신설하기로 하다 ③ 2012년 교단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는 기도한국 2009, 칼빈 탄생500주년기념대회를 추진키로 하다. ④ 21세기 총회종합센터 건립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하다. ⑤ 총회주일(세례교인 헌금)을 아래와 같이 시행하기로 하다. •각노회 소속교회 50%이상 납입하지 않을 경우 총대권 제한 •목표금액 95% 이상노회에 대하여는 20%인센티브 주기로 하다. •현행 총대 파송제도(7당회당 목사, 장로가 1명을 세례교인수 비례 총대를 각노회별로 추가배정함으로 교단 규모에 걸맞는 총대수로 확대키로 하다(제100회 총회 결의 요람, 예장총회 2015. p.39 참조). 최병남 목사는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2-23
  • 인간으로 사람은 사랑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의 피조적 삶으로 그 유한성, 개체성, 그리고 시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을 확증하는 근거를 알게 한다. 또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여기에 따른 삶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고 창세기는 증언한다. 여기에 바울은 이러한 견해를 로마서에서 말한다. 성서의 육체적 죽음은 피조적 삶에 부여된 하나님의 질서에 따른 죄이지만 여기에 따르는 인간 구성으로 3요소인 육체, 영혼, 정신으로 살아야 하기에 선함이라는 창조자의 의도적인 사랑의 의지의 결과임을 믿음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여기에 ‘선함’이라는 창조자의 의도적인 사랑의 의지가 그 결과임을 뜻한다. 성서적 인간관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나 이를 지배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인간이라는 선언, 그리고 하나님과 계약을 약속받는 당사자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응성으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는 계획하고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인격적인 성품으로 삶을 두어야 함을 성서는 알게 한다. 이를 실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의 전형으로 그려짐을 믿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에 준하는 인간의 존재 형성, 본래적인 존재에로 회복되는 인간임을 믿음으로 이를 깨닫게 한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그의 부모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알게 된 것과 같이 구원이라는 이해는 은총을 통해서 자녀로 입양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분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엡5:1-2)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실체”는 ‘사랑’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만물이 그 실체가 없음에도 삶에서 생명으로 보이듯이 나타난다.폴 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은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은 삶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문제로 삶에서 궁극적 관심이 경험될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 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실존적인 존재 또는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한정된 것에만 머물러 좋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 데, 그것은 인간을 비존재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면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폴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앙은 어떤 진리 또는 교리에 의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 인 행동 속에서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경험되고 있다. 이 궁극적인 관심이 바로 유한하고도 실존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사는가? 존재를 위해 사는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은 가치와 무관하고, 존재의 가치를 알면 생존에만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향상시키기 위해 생존은 필요하다. 그 삶에서 생명은 창조자에 의해 삶 속에서 사랑으로 삶을 유지한다. 성서는 이 가치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설파하고 있다. 결국 ‘생존’과 ‘존재’는 사람의 실존을 위한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사랑의 관계임을 알게 한다. 생명은 관계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 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생명은 창조의 주관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자신의 형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기로 결심하신 창조 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관계를 맺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인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하여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정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창조자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2-23
  • 성육신한 예수교회-40
    우리가 누가에게 고마운 것은, 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행전에서 저는 교회의 주도권을 성령께 양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에 따라서 호흡을 맞추어 나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천국복음과 사역,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복음과 사역을 그가 기록한 덕에, 성령께서 무엇을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의 교회를 세워갈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가는 히브리적인 문화와 율법적인 교회를, 헬라적인 문화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로 건설할 수 있었음이 오직 성령의 권능과 역동적인 사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증거 하였다.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그가 율법적인 제도와 전통에 갇혀서 주검 가운데 있던 유대적인 교회를, 그리스도론적이며 성령론적인 교회로 헬라문명에 컨버전 할 수 있었던 비결과 지혜를 보여준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을 역동적으로 이끌고 가시는 분이 성령이셨듯이, 누가복음에서도 역시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고 갈릴리로 인도하고 계신 분이 성령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이긴 해도, 만일 누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성령의 부어주심과 오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건설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교회, 물이 샘솟아서 광야를 적시는 이야기는 에스겔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은 누가에게서 이다. 에스겔서에서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주검 가운데에 있는 해골들이다. 그런데 이 해골들이 서로 연결되어 골격을 이루고 군대가 되어서 잃었던 도성을 되찾고, 더럽혀진 땅의 수치를 벗겨주고, 다시 거룩한 도성을 세우게 되는데, 이와 같은 역사는 오로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었다. 성령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데, 이 새로운 교회는 성령의 바람과 복음의 선포로 그 기원이 열리는 것이다. 예전만 있었던 정적인 교회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서, 광야에 강줄기를 대고, 어부들이 살게 되는 세상이 현실화 되는데, 누가의 사역 현장에서 비로소 이뤄지기 시작 한 것이었다.누가행전에서 성령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성령이 임하시고 운행하시기 시작 하신 곳은, 성소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였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하늘에 좌정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임하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불에 타나 살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라는 사람도 거룩하게 되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렇게 되자 노예민은 자유민이 되어 거룩한 민족으로 태동된다. 마가의 집 이층에 모인 120여명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예수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역사가 사도들에 의해서 다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자, 성령께서는 스데반이나 빌립집사를 체인지업 하여서 복음의 동력에 원심력을 갖게 하신다. 어디 그뿐이랴. 생각 밖의 율법학자에게 성령이 부어지시니, 저가 온 헬라세계를 휘젓고 다니면서 교회를 확장한 것이었다.교회란 제도적인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결코 사제나 목사가 아니다. 성령이 교회로 교회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침체를 어떻게 벗어나고, 다시 새롭게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 이는 누가에게 해답이 있지 않을까? 예루살렘 교회가 지역에 한정되어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 예루살렘 바깥 해변의 무두장이네 집에 묵고 있던 베드로에게 성령이 찾아 오셨다. 베드로는 레위기서의 정결 규례에 묶이어서 바깥세상으로 복음을 흘려보내질 못하고 있던 터이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베드로에게서 복음이 외부로 흘러가는 것은 불가해 보였다. 그러나 누가는 임신된 마리아를 요셉에게로 데려올 때에 천사의 조력이 있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 사자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너는 더럽다고 하는가?’라는 논쟁이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이방인 고넬료의 집이란 그의 친구들과 노비들도 모두 포함된 이방세계임을 시사한다. 베드로가 마지못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그 집에 내려오시는 것이었다. 성령은 교회나 지도자들에게 길들이시질 않으신다. 누가가 선포했듯이, 우리가 성령께 민감하려면, 그가 선포한 ‘너희 각 사람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한 바대로, 필히 해야 할 일은 회개일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2-23
  • “깨끗하고 정직해야 하나님은 부어주신다”
    인터뷰/ 기독시민운동중앙협의회 대표회장 원 종 문 목사-기독시민운동중앙협의회는 제7회 정기총회에서 원종문 목사(열린교회 원로, 열린복지랜드 이사장)를 대표회장에 선출했다. 이에 원 목사를 만나 그의 의욕적인 계획들을 들어 보았다. ‘나부터 깨끗하자’는 슬로건으로 출발한 기독시민운동중앙협의회는 회원들의 참여폭을 젊은 층으로 확대하고 한국교회부터 정화되고 새롭게 하자는 운동을 전개하는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대표회장 취임에 대한 소감은…앞서 훌륭하신 분들이 대표회장을 역임하셨는데 부족한 제가 큰 책임을 맡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우리 기독시민운동협의회는 이름 그대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시민운동’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시행해 오던 ‘골목청소 봉사활동’을 비롯하여 시민들과 교회 성도들에게 다가가는 봉사활동을 해 왔습니다.무엇보다 참여회원들이 더 젊어지는 방향으로 참여 폭을 넓혀 나가려 합니다. 사실 우리 시민운동협은 참 좋은 단체입니다. 여러 가지 사업을 제대로 시행하면 매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구체적인 사업계획은?△‘나부터 깨끗하자’ 운동 전개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깨끗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 하나부터 깨끗하게 살면 나와 또 다른 나로 이어지는 이 운동은 모두가 깨끗해지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나부터 깨끗하자’는 운동은 일찍이 오산학교의 도산 안창호 선생이 펼친 운동입니다. ‘나부터 깨끗하자’는 운동은 곧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 이 시대에 시급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앞으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이 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모든 모임과 행사 때마다 어깨띠를 제작하여 두르고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지도자들의 ‘품성과 리더십 바로세우기’운동 차원에서 접근, 영성훈련을 통한 코칭아카데미를 설립할 계확입니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교회가 협력하고 앞장서야 합니다.△출산 장려 운동 확산저출산은 국가적인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있습니다. 매년 30만 명이나 줄어드는 인구 절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이제는 교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녀들이 앞장서서 이 운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고학력자들과 좋은 직장인, 연예인, 방송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출산을 기피하지 말고 솔선수범하여야 합니다. 실제로 아기를 출산하는 자들에게 특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대형교회는 어린이집, 육아시설을 많이 만들어 마음 놓고 아기를 맡기고 직장을 다닐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자녀가 생산되는데 적극 투자해야 합니다. 주일학교가 없어지게 되는데 교회가 무관심하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저출산의 문제의식을 교회는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이 성장하고 부흥하는 길입니다. 아기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젊은이들이 교회야 말로 마음 놓고 올 수 있도록 투자를 해야 합니다.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그리고 이혼을 하는 사람은 취업을 제한해야 합니다. 방송인 연예인 등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도 당연한 것처럼 얼굴 들고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이야 말로 가정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고, 도덕성과 윤리성에 제일 앞장서야 할 사람들입니다.△통일기도 운동 계속저는 백두산 기도회를 반대합니다. 한국교회가 백두산에만 가서 기도회 열지 말고 국내에서 서해 또는 백령도나 북한이 바라보이는 판문점에서 열어야 합니다. 왜 중국 사람들 먹여 살릴 일 있습니까. 통일기도회는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 일 중에 매우 중요한 사명입니다. 정기적인 기도회는 계속하면서 지역별로 기도회를 열고, 각 교회를 순방하면서 기도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목회와 복지사업에 대한 사명열린교회는 저의 아내가 당회장이고 저는 원로목사로 있습니다. 25년째 복지사업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지금의 가평에 건물 짓고 자리 잡는데 많은 예산이 들었고 10여 년이 걸렸습니다. 주거복지시설, 의료복지시설, 목회자쉼터, 힐링하우스, 유료복지시설 등을 갖춘 종합복지타운입니다. 종합복지타운에는 저소득층 기초생활자는 모든 비용이 무료이고, 기타 인원은 실비를 받는 유료입니다.제가 꿈을 가지고 사회사업을 하면서 실패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전적으로 희생하고 헌신봉사할 때 모든 것을 채워 주셨지요. 내가 손을 벌리지 않아도 그때 그때 사람을 보내 주셨지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 주신것처럼 그분을 믿고 갈때에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나눔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은 이루시는 분이지요. 그 뜻을 따라 사명감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연합단체에는 어떻게 참여하고 계신지…저는 예장 통합피어선총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기독시민운동중앙협의회 대표회장을 비롯하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총동문회장, 통일연합종교포럼 법인이사 겸 총재, 세계한인기독교총연합회 상임회장, 한국교회연합 공동회장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합단체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제일 중요한 것이 주어진 직책에 걸맞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회비나 부담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회의와 행사에 적극 참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계획은 …지금의 열린복지랜드와 함께 청소년문화센터를 건립하여 운영하려고 합니다. 청소년과 어르신을 연결하는 성경적 도덕관을 심어주고 정립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청소년을 잘 키우고 교육시키는데 있습니다. 앞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기회가 되는 대로 교계연합과 통일선교를 위해 남은 여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시민운동은 좌도 우도 아니고 하나님중심, 기독교정신으로 임기동안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한국교회에 바라는 것은교회가 교회답게 바로 서야 하고 단체들은 먼저 내가 헌신 희생하는 가운데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한국교회 연합단체들은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잘 지키면서 연합하고, 일치운동하고, 갱신운동을 펼쳐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이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분열은 사탄의 장난입니다. 연합단체가 하나 되어서 한국교회의 힘과 역량과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자 한다면 양보하고 희생하는 모습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연합사역을 하면서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다 겸손하게 자기위치를 잘 지켜 나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고 앞세워 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선거 과열이나 부정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지요.-교계언론에도 한말씀특히 교계언론은 올바르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보도해야 합니다. 절대로 치우치지 말고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해야 합니다. 기독언론은 언제나 교회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나가야 합니다. 물론 열악한 경영환경이 문제지만 교계언로으로서의 사명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언론사들이 난립해 있는데 좀 통폐합이나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형원 주필>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2-23
  • 기독교인의 행복론 -37
    1997년 독일 Munich에서 공연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1958-2009)의 「빌리진(Bille Jean)」을 동영상으로 보는 순간, 나는 그 멋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여행 가방을 들고 무대에 나가서 가방을 열고 검정색 반짝이 가디건과 모자 등을 절도 있게 꺼내들고, 각이 살아 있는 기계적인 몸놀림과 스멀스멀 이어지는 듯한 발동작을 하고 수십 개의 조명과 한 개의 메인 조명을 번갈아 받으며 노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현란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멋있을 수가 있지.’ 나는 혼자서 그의 동작을 몇 번이나 따라 해 보며, 나 자신이 마이클 잭슨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그 러다가 ‘제1500회 KBS 전국 노래 자랑’에 출연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때 TBC 탈렌트 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는 만큼, 노래하면서 표정 연기를 해 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천진난만하고 감미로운 표정을 짓다가 열광적인 몸짓과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포부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섰을 때 천진난만한 표정은 살릴 수 있었으나, 막상 열광적인 몸짓을 하려는 순간 “딩동댕” 소리가 나 미처 내 장기를 다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1500회 특집인지라 프로 가수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본선에 오르는 바람에 인기상도 탈 수가 없었습니다. 아쉬움을 안고 주일날 교회에 가서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H장로에게 KBS 출연 사진을 보이며 말했습니다.“장로님. 제가 이래뵈도 ‘KBS 전국 노래 자랑’ 본선에 올라 여기 이렇게 사진까지 나왔는데요. 아, 우리 교회 교인들만 나의 음악성을 몰라 주네요. 저에게 대예배 헌금송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이렇게 H장로에게 떼를 쓴 지 두 주만에 대예배 헌금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주를 바라볼지라」복음송을 동영상으로 수십 번 보고 가사도 외우고 해서, 자신감 있게 지휘자 앞에서 리허설도 하였습니다.“박자가 너무 빠르네요. 속도 조절을 해서 잘 해 보세요. 가사를 보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이렇게 해서 드디어 800명 이상의 교인이 들어선 예배당에서 찬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자신 있었던 노래였는데, 막상 무대에 서니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아나아아아님에에 사아랑으을 사모하는 자아아아--- (덜덜덜)” ‘목소리가 왜 이렇게 떨리지?’ 하면서 무슨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이었습니다.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엉덩이를 절도 있게 앞뒤로 움직이는 멋진 모습. 그래서 ‘안 되겠다. 마이클 잭슨처럼 자신감 있게 해야지.’ 하면서 절도 있는 몸동작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모습이 너무 마이클 잭슨처럼 보였는지 교인들이 의외라는 듯 뻥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노래를 제대로 끝낸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담임 목사님이 “KBS 전국 노래 자랑에 출연한 문학 박사”라고 나를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나는 손을 입술에 대었다 떼면서 절도있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성가대 총무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W교회 역사상 헌금송을 그렇게 웃기게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내가 마이클 잭슨 흉내를 낸 것이 웃겼나 보구나.’ 하고, 그냥 무사히 지나갔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직장에서 건강 검진을 받는데, ‘만성 신장 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K대학 병원 J교수가 말했습니다.“통풍과 고혈압이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통풍으로 인한 가시바늘 같은 요산이나 뭉친 혈전이 뇌나 심장에 가서 갑자기 막힐 수도 있으니,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나는 평소에 건장하였던 나에게 그런 병이 찾아온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왜 이런 병이 갑자기 생겼지요?”“그 원인은 찾기 어렵습니다.”그 후 나는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 보았습니다. 평소에 건강을 장담하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내가 그 날 대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마이클 잭슨 흉내를 내다가 교만 죄로 인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요즘 나는 행복합니다. 약을 꾸준히 복용함으로써 건강이 다시 찾아왔고,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전업 작가의 길도 걸어갈 수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예배하며 찬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찬양 가사에 맞는 표정 연기를 함으로써, 교인들로부터 “은혜로운 찬양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마음이 흐뭇하기까지 합니다. 노래 부르기를 워낙 좋아하지만 이러한 장기를 주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할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과 대화해 봅니다. “주님! 저 예뻐요?”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2-23
  • 종교에 얽매임 ①
    마태복음 25장 35~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7~39절에 “언제 그랬느냐”, 45절까지에서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이슬람교는 연민을 가르칩니다. 무함마드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꾸란에 의는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친척과 고아, 가난한 자, 나그네, 거지에게 그리고 포로들의 해방을 위해 재산을 나눠주는 것입니다.석가모니도 연민을 베풀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힌두교도 미래의 힌두교는 힌두교 유산을 잘 보존하는 동시에 적극적이고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헌신해야 합니다.유대교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정의를 강조합니다.이들 모두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와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모든 일에 사랑을 강조했습니다.어거스틴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서는 의견의 차이를 딛고 힘을 합치라고 했습니다.종교의 틀에 얽매인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하지만 그들의 일치를 빌미로 자신의 교리를 강요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거부합니다.칼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칼빈의 주장에 얽매여서 이론 형성이 안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신학 교리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본질이라는 중요한 일을 종교라는 안경을 통한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독교라는 명분으로 또 하나의 고상한 이단을 만들고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금 다른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곧 틀이요, 이단성의 본성인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실체요, 소망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누구도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사람들, 모두가 그분의 형상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나 마틴 루서 킹이나 간디가 보여준 것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내재한 매우 보편적인 틀을 벗어난 반응인 것입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소박한 말입니다. 거기에 나의 존재가치나 성공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분출입니다.그러나 종교집단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급급한 조급함에서 영적 정체성을 망각합니다.우리가 행하는 현실적인 시급한 사건일수록 기도하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그것이 신앙적 표현인 것처럼 남용합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언사는 현실도피성인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상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은 미래 지향이 아니라 지금 부딪혀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위선적 행위가 곧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즉, 중보기도는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미래가 아닙니다. 믿음은 현장입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했습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서 기도하겠다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수저 하나 더 놓으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목말라 죽을 지경이라면 물을 주는 일이 신앙입니다.압제자의 학대를 받고 있다면 압제에서의 해방입니다.질병으로 죽어간다면 치료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스스로 살아가기 어렵다면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의 가치는 그의 신학이 얼마나 옳으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하나님이 보시는 초점은 사람의 가치가 그의 학문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너희 각 개인의 마음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적 이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이기 때문입니다.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정말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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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광재 칼럼
    2017-02-23
  • 목회는 쉬운 것이다·21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 진리는 내 정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점점 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포용(은혜)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운영 시스템으로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 귀중한 사실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라고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 황홀하고 거대한 구속의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회개란 잘못을 뉘우침이 아니라 예를 들면, 밧데리의 기능이 탈진된 상태에 다른 밧데리의 점프로 건강한 파워를 전수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정신을 얻어 신경통로와 패턴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요소(생명, 사랑, 기쁨, 평화, 은혜, 연민, 자유)입니다.즉, 정신을 바꾸어 그리스도의 운영 시스템으로 정착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시스템으로 운영되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고 결국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그 삶의 원동력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인 것입니다.이럴 때 내가 사는 환경이 변화되고 내 경험이, 내 이웃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정신적 변화는 하나님이 이미 깨인 사람들을 통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생명의 역사입니다.이제 결론적으로 신앙의 핵심을 바꾸어야 할 긴박성은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체개념과 개체개념이 죽고 사는 것으로 나누어짐을 말하려고 합니다.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생각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의식적인 위선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합니다.교회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임재는 내 안에 있다. 형식적인 예배 의식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함과 진정한 행복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생각과 기독교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모방하는 사람이나 ‘처럼’ 살게 하는 것은 마귀가 제공한 방법입니다.하나님을 알아서 좋은 점은 그분이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는 생각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 사랑이요, 기쁨이요, 평안입니다. 사랑과 기쁨을 기다리기 전에 그리스도의 삶입니다.목사, 리더자 그리고 선생이 나를 인도하고 가르치고 훈련한다는 생각과 내재하시는 성령이 나의 주된 선생이 되신다면 수 없는 실망이나 불만이 사라지고 주의 평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내 행동을 바꾸는 것이 목표라고 하는 생각과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라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겉으로 보이는 육체가 사람의 전부라는 생각과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영적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완전한 삶이란 인간의 행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언제인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과 하나님 나라는 지금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 의식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에 방해요소가 바로 여덟 가지 생각에 대한 모순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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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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