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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39
    이스라엘 미드라쉬에 보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눈 성소의 휘장을 1m 간격으로 휘장을 겹으로 드리워서, 지성소로 제사장이 들어갈 바깥입구를 남쪽에 만들어 놓고, 휘장 통로를 지나서, 북쪽에 닿으면,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지성소의 휘장을 열어 놓았다. 아마도 처음에는 휘장이 하나일 것으로 설명되다가,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오늘까지, 한 번도 제사를 드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랍비들이 모여서 매일 같이 토론을 하다가 만들어진 궁여지책으로 나온 설명으로 보인다.하스모니안 가의 한 랍비는 필자에게 설명하기를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 휘장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환대를 받고, 하나님이 열어주신 휘장 안으로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 랍비의 설명이 더욱 경전의 전통과 일치되는 것은, 지성소 안에는 본시 등잔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기에 물리적인 방법으로 밝힐 수 있는 도구가 없는 터이었다. 오로지 사면이 막혀있는 방에 율법 궤와 그 위에 속죄소만이 있어서, 사제가 지성소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의 물리적인 빛은 없이, 영광 가운데에 계신 야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이다.랍비들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시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장하여온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으면 그 제물 위로 파리가 달려들질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제물에 불을 붙여야하는 제단의 불에는 비가 오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제단의 불 또한 화력이 다른 불들과는 달라서 제물들이 깨끗이 살라졌으며, 셋째, 제물들이 단위에서 불과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리는 동안에는 바람의 방해가 없이, 곧바로 그 연기가 하늘로 올려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소에서는 떡 상에 진열된 떡도 항시 신선도가 유지되어, 한주 후에 새로운 떡을 올리기 까지는 금방 구워낸 음식 같아서 사제들이 먹는 데에 신선한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에서는 속죄소 위에 천사 두 분이 마주보고 날개를 펴서 법궤를 드리우고 있는데,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진노하시게 되면, 서로 마주보며 율법을 읽고 계시듯 하던 얼굴이 서로 마주하질 못하고 다른 곳을 향하였다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이 되면, 미리 한주 전부터 성전에 올라와서 자신을 성결하게 관리하였는데, 혹시 첫 번째 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자가 열 분까지도 있었다 하니, 이렇게 자신을 성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니, 제단의 불이며, 떡상위의 열두 덩이 떡들이며, 어느 하나라도 소홀이 되어 진 바가 없었다면, 야훼 하나님도 자신의 백성들을 만나실 채비를 단단히 하시질 않았겠는가?성소 바깥에서부터 온 땅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날이 되면, 어린아이까지 하루 종일 금식과 성찰은 물론이며, 속죄의 제물로 준비된 양들이며, 제사에 참여하려는 참배객들이 얼마나 많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던지, 요아힘 예레미아스의 견해대로는 사람들이 몸을 돌릴 수조차도 어려웠다고 하였는데, 성전 가까이에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붐볐던지 창끝으로도 틈을 뚫을 수 없을 만큼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엎드리어 경배를 드릴 때에는 공간이 넉넉하여 졌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이 무너진 이후로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들로 성전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해내려 오는 성전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명절들과 유월절이나 속죄일을 직접 보고 참여하며 경험한다면 공감을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여 불러내시고 성별하셨다는 사실이 매일 매일 현실이 되어서, 자신을 불러내신 하나님 앞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고, 하나님을 항하여 반듯하게 서서 나아가는 것이 나날의 생활이 된다면, 그 열매 또한 확실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들의 종교와 삶이 하나가 되어서 나타나는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노벨상을 타는 이들의 점유율이 30%에 머물러 있고, 자신의 동족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들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돈이 없어서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가 없고, 학비가 모자라서 학업을 포기하는 자가 없으며, 지속적으로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것이리라. 저들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함에 있어서 미련과 게으름을 피우는 것 외에는, ‘거룩’을 내걸고 행진하는 우리로서는 모두 본받아야 할 것 뿐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2-09
  • 71. 제95회 총회장 김삼봉(金三峯) 목사
    전남 순천 태생김삼봉(金三峯 1941.2.15~) 목사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어려운 가정에서 4남2여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때는 일제 말기여서 정상적인 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삼봉 소년이 살고 있었던 순천지방에는 이미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들어와 선교지부(Mission Station)가 설립되어 있었고, 많은 교회의 설립과 기독교게통의 교육기관과 의료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덕택에 기독교복음을 일찌기 접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삼봉 소년이 태어난 1941년은 일제가 조선에 있는 젊은이들을 징용해 가며 여성들은 위안부로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만행이 방방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일제는 전국 요소요소마다 소위 신사(神社)를 설치하고 애국충정이란 이름으로 조선인의 정신 말살 계획을 수립, 신사에 머리를 숙이게 했고, 조선말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말을 공용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성씨(性氏)마져 고쳐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케 하였으며, 신사참배 강요로 조선교회가 혼란 속으로 휘몰아치게 되어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체포 구금되기에 이르렀고, 교회는 문을 닫고 자기들의 명령에 순응하는 천주교와 감리교 외에는 교단을 폐쇠시키고야 말았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삼봉 소년은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교회에 출입하면서 지식과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소년의 마음 속에는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늘 목말라 하던 차에 미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세운 순천매산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꿈을 이루었다. 그 때가 1960년 2월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틈새에서도 삼봉 소년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에 다니면서 장차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성장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신학을 해서 하나님의 종으로써 헌신해야겠다는 소명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 본과를 지망해 서울로 진학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마친지 10년만이었다. 그동안은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으로 직장생활을 하며 가사를 돕느라 신학교 지망이 10년이나 늦어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지난 1970년에 총회신학교를 마치게 된 것이다. 서울 신정동서 천막 치고 교회 개척총회 목회대학원 입학해 신학 재교육 받아기독신문·총신대 재단 이사장, 총장 직무대행도 거쳐‘임시목사’제도 없애고 ‘시무목사’로 통일영상콘텐츠 전문성 갖춘 고등학교 설립그는 졸업하자마자 서울 신정동에서 가족중심으로 대한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때가 1972년 6월 18일이었다. 당시 신정 3동에 있는 남의 땅을 빌려 27인용 천막을 치고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의 대한교회(大韓敎會)이다. 1973년 10월 11일 김상봉 강도사는 한서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듬해 1974년 4월엔 같은 강서구 신정1동 372의 2번지에 50평 규모의 첫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다. 1976년 10월 3일엔 강화순, 이문혁 두 사람을 장로로 세워 정식 조직교회로 출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교회는 순조롭게 성장해 갔고 규모가 확대되어 1978년 11월 7일엔 교회 설립 후 첫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980년 4월 9일 강서구 신정1동 981의 12 현재의 위치에 2차 신축교회를 위한 착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교회의 외형이 이룩됨과 동시에 신자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과 노회와 총회를 섬기는 일에도 자연스럽게 앞장서게 되었고, 교회 내적으로도 1981년 11월 5일과 1984년 12월 9일 두 차례에 걸쳐 장로장립과 장립집사 및 권사를 세우는 큰 임직식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1987년 3월 7일엔 또다시 집사 임직과 권사 취임식과 더블어 그동안 추진되어오던 교회 건축이 완공되어 헌당식 예배를 온 교유들과 함께 드리게 되자 중형교회로 성장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가 이렇게 성장 부흥하게 되자 당회장 김삼봉 목사 역시 교회 내외적으로 봉사하는 사역 또한 점점 확대되었다. 먼저는 자신의 역량 발휘인 밑거름이 되어야겠다는 자의식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신대학교에 위탁하여 시행하고 있는 총회목회신학원(M.M 목회학 석사과정)에 진학, 신학재교육 과정을 이수하였고, 1996년 4월 예장총회 한서노회(漢西老會) 제15대 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 해 6월엔 제81회기 예장총회 공천 부 서기로, 이듬해 1997년 제82회기 총회에서는 서기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1998년 4월엔 서북지역노회협의회 회장, 1999년 9월 총회에선 회록서기로, 2009년 본교단 총회 부회장으로 피선, 이듬해 2010년 9월 27일에서 10월 1일까지 강원도 홍천 대명 비발디파크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5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교회선립30주년 감사예배 순서지 2002, 대한교회 p.4. 교회연혁 참조).김삼봉 목사는 총회장에 오르기 전에 이미 2005년 9월 교단지인 기독신문 이사장으로, 2006년 11월엔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2008년 11월엔 총신대학교 총장직무대행 역임 및 부총회장의 경륜을 쌓아 교단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을 나타내 보였다. 그는 교회와 교단 내에서만 그의 역량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사역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서울시 양천경찰서교경협의회 회장, 양천구청교구협의회 회장, 양천구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지역교회와 행정기관과의 협력을 모색 선교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서울지하철선교협의회 회장과 전국교통문화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봉사하면서 특수선교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2002년 6월 6일에는 교회설립 30주년 기념예배를 드림으로 일선에서 물러나며 2011년 11월 12일 대한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김삼봉 목사의 목회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메세지가 있어 여기 소개하면 성경 골로새 1장 24~29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주님의 몸된 교회와 일꾼’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는 세상적으로 훌륭하고 돈많고 권력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모인 곳이다. 그는 여기에서 교회의 중요성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주님의 보혈로 사신 백성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셋째,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 그 어느 기관과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으로써의 모습은 교회의 일꾼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되고 그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며 모든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과 신앙으로 그는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였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진다.김삼봉 목사가 신앙을 교육에 접목해야겠다는 교육비젼을 가지고, 2000년대(3월)에 들어와 3년 과정의 고등학교를 설립 교회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1개학년 6학급으로 3년 18학급(영상콘텐츠학과 영상케미어학과 영상경영과)이 정상운영되고(이사장 윤영민 목사) 있는 것은 한국선교 초기 선교사들의 교육, 의료, 선교를 연상케 하는 간접선교방식으로 중·장기적인 선교과업이라 생각된다. 일반 교육기관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합동측 교단 안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선견지명적인 정책으로 다른 교회에서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삼봉 목사는 앞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새시대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교회로 지향한다고 다짐하고 있다.그가 재임했던 제95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헌법정치 제4장 4조 2항 임시목사의 명칭을 시무목사로 하기로 하다. ② 총회 선거규정을 개정하다(중요개정사항은 총회장 연령 만 60세 이상된 자 삭제). ③ 세례교인 헌금 시행기준을 서울 10,000원 도시 7,000원 농어촌 5,000원으로 하다. 김삼봉 목사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으며 그가 설립 개척한 대한교회를 사위 윤영민 목사가 바톤을 이어받아 원로와 함께 승리로운 목회사역을 이어가고 있다(제100회 총회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2016 예장총회발행 p.40).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2-09
  • 삶의 양심의 비밀
    인간의 삶에서 존재의 의미는 항상 도덕적 가치에 준한다. 인간에게 양심이 없으면 도덕가치와 삶이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삶의 조건에 양심은 필수가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아 그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삶을 주관하시며 실제로 삶을 영위(營(爲)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그 주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 주신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삶으로 영묘한 힘을 가졌기에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한다. 사람을 영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인간에게만 속한 말로서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에게만 속한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을 알게 한다. 동물은 거의 본능이라는 감정으로 삶을 영위하지만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하나님과 영통하는 힘을 알게 한다. 이를 생각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곧 사람의 생명과 그 삶에 축복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 된다. 그러므로 수많은 동물은 있지만 그 동물에게는 혼은 있으나 영(靈)은 없다. 사람은 생명으로 영을 받아 태어나게 된다. 창조에서 모든 만물을 이루어 내는 근본체 그 몸이 한편으로 사람이며 생명으로 영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영의 존재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 했듯이 영의 한편인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과 육과 혼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대한 생명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믿는 것은 사람은 영으로 하늘을 생각하며 영원한 삶을 살고 멸하지 않는 존재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믿음으로 받는다. 사람은 하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대신하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이다. 이 존재가 영의 존재를 알게 되면 사람은 욕심과 부정과 나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죄 짓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친히 찾아 오셔서 그 삶을 친히 십자가로 보여 주심을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믿음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창세기 본문은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하신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은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이 안에 영과 몸이 합하여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 혼(魂)이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받게 되어 영, 혼, 몸이 전구와 같이 빛을 내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본문은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라 함을 알게 한다. 우리가 부활한 주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주님을 의지하고 영으로 우리 온 존재를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알려진 우리들의 삶에서 알려진 말가운데 사람의 천성은 ‘정직’이라는 말에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이라 사람의 천성은 정직한 것이니라는 말이 있다. 사람 안에는 ‘양심’이라는 매우 비밀한 존재가 있다. 이것이 인격과 같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사사건건 개입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사도 바울은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롬2:15).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비밀한 존재가 있다. 이것은 인격과 같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사사건건 개입한다. ‘양심’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얻는 말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있는 양심은 그 모양이 네모가 되 있기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모서리가 닳게 되어 결국 나중에는 옳지 않는 행동을 하여도 아무런 것도 못 느끼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스토리가 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양심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각계 각층에 널려 있어 사회의 많은 핀잔을 받고 있음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흐트러진 모습의 행동을 하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작태를 보면서 사람의 삶에서 그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에게는 모두 그 본성안에 양심이 있다. 사람의 삶에는 항상 양심의 소리가 있다. 이 양심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며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2-09
  • 기독교인의 행복론 -36
    생명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앞으로 120세에 이를 거랍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의 계보가 나오는데,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고(<창세기> 5:5),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창세기> 5:27)다고 나옵니다. 생명 과학에서 원숭이의 수명이 가장 생육이 발달한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5배의 시기를 더 산다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할 때, 인간은 가장 체력이 왕성한 25살을 기준으로 하여 5배를 더 사는 125년이 평균적인 수명이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근데 1900년대에는 공해 등 환경의 영향으로 70여 년을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기대 수명은 생명 과학의 발달로 120년이 될 거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변의 노인들을 보면 90대인데도 정정하게 활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인들 중에는 황금찬 시인이 100세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현재 60세인 노인이 앞으로 60년을 더 산다고 볼 때, 인생 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작가의 경우 70세까지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겠다고 계획하였다면, 집필 기간을 90세, 100세까지 연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곧 생명 연장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것이지요.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에서 내려 600미터를 걸어가면 <방우산장> 조형물이 있습니다. 조형물에는 조지훈(1910-1948)의 시 「낙화」가 시비로 세워져 있고 격자무늬 모양의 조형물과 함께 의자도 몇 개 놓여 있지요. 그는 평소에 지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지조론은 그의 집안에서 가훈으로 내려오던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로 재물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사람을 빌리지 않으며, 셋째는 문불차(文不借)로 글을 빌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조형물 <방우산장> 옆으로 골목길을 들어가면 그가 살았던 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4층짜리 빌라가 들어서 있지요. 그 집은 그가 생전에 팔았던 집입니다. 그 집을 팔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대학 교수였지만, 자녀들 등록금 대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는 재불차(財不借)를 실천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집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매수자와 계약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그 집에서 사는 조건이었지요. 이는 그가 지조론을 얼마나 철저히 실천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지요.필자는 이 일화에서 알파 에이지 시대를 사는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지조(志操)이지요. 지금 이 시간이 영감이 쏟아져 나오는 청년 시절이라 생각하고 멋진 글을 연마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도 지조 있게 살아가는 덕목일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헬스장 등에서 체지방이라든가 자기 몸의 상태를 정밀하게 체크할 수 있는 좋은 기계가 많습니다. 지조는 앞으로 3-40년은 청년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자, 의지입니다. 그리고 지조는 양심에 따라 생동하는 삶을 사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알파 에이지 시대를 사는 가장 멋진 방법은 영원 위에 놓인 존재로서 살아가겠다는 믿음입니다. 영원 위에 놓인 존재라면 지금 이 순간의 언행도 매우 소중한 흔적이 되겠지요. 천체의 흐름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100여 년입니다. 우주의 시간에 비하여 티끌 만큼의 길이를 가진 이 시간에 생각하여야 할 것은 주어진 수명을 얼마나 멋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행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몫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몸소 희생양이 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행복입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행복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행복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자의 살아가는 목표도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신자의 멋진 인생을 설계하여 봅시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서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자녀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즐겁게 교제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사랑과 평화로 인간미를 꾸려 갑니다.그리고 기도합니다. 신자가 말씀 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멋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세계 선교를 지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소화할 수 있는 시선과 능력을 허락하소서. 물질적인 가치보다도 영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이 가족과 이웃에게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행복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만인이 알게 하소서. 새벽마다 주님이 찾아 오셔서 복을 주실 때 우리가 마중물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감사드리나이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2-09
  • 70. 제78회 총회장 최기채(崔基蔡) 목사
    전남 광주 태생최기채(崔基蔡 1934. 6. 7~ ) 목사는 광주광역시 남구 임광동 947번지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비교적 순탄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일제하여서 성공적인 삶을 예견할 수 없는 장래가 불확실한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신세였으나 다행한 것은 일찍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라 하겠다. 어린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대촌 지석초등학교 분교장이었던 신도인 선생님을 통해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후 사회활동과 고학하는 시기에는 잠시 동안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세상적인 삶을 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군에 입대하여 155미리 포병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곽금천이란 친구를 만나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가 나를 찾아와 오늘밤에 나를 따라 갈데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 하니까 묻지 말고 꼭 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어디인데? 알아야 따라가지 …교회에 간다. 야! 이놈아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도사처럼 불법을 설파한 자네가 벌써 그 사이에 변절을 해 나에게 교회엘 가자고 하느냐? 다 믿어도 풍전세유같은 네가 믿는 종교를 나는 안 믿는다 이놈아 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죽은 사람 원도 풀어 준다는데 친구 소원 하나 안 풀어 주려느냐?라고 하면서, 따라가서 영 취미가 없으면 안 다녀도 좋다. 그러나 나는 내일 의가사(倚家事)제대 특명이 나 군문(軍門)을 떠나는데 사랑하는 친구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다”라며 간청하는 것이었다.이렇게 되어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간 곳이 강원도 철원군 화지리에 있는 천막교회 수요일 예배에 참석한 것이 잠시 잊었던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오늘의 최기채 목사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저방으로 가라 최기채 지음, 생명의말씀사 2004, p.166~167). 군(軍)에서 친구에게 이끌려 예배 참석담임목사가 지방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공부‘동명(東明)과 결혼’ 교회에 충성 다짐노회와 총회서 뛰어난 지도력 보여시·소설·수필가로 문인 활동“내가 신학을 지망한 동기는 어떤 사람들처럼 사명감에 불이 붙었다던지 환상을 보았다거나 선교사가 되어 땅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확신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교회에 몸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주위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나를 만나면 농담 삼아 최목사 오랫만이여 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다보니 나도 모르게 과연 내가 신학을 전공해서 목사가 되어야 하려는가보다 가끔 생각하곤 했는데 결정적인 계가가 왔다. 당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북에서 피난 나온 홍동근(洪東根) 목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하였는데, 어느날 나를 부르더니 당시 지방신학교였던 광주신하교 야간부에 등록을 시켜주고는 서울로 떠나신 것이었다. 무슨 일에나 한번 빠지면 헤험쳐 나오지 못하는 기질이 나를 신학에 빠져들게 했고 목회의 길로 들도록 꽁꽁 묶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야간신학을 하면서 이렇게 사명의 길에 들어서 봉사할려면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사립 조선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 졸업(문학사 학위)에 이어 대학원(정치학석사) 과정을 마친 후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신학과 목회를 위해 당시 기라성 같은 신학자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의 문하에서 사명자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에 있어 큰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저 방으로 가라, 같은책 p.168 참조). “지방에 있는 대광교회에서 섬기고 있던 나에게 광주시내에 있는 역사있는 동명교회(東明敎會)의 부름을 받고 부임한 나는 ‘동명과 결혼’이란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날이 1974년 3월 24일이었다.” 최 목사는 동명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장기 목회계획으로 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하기 시작하여 교회 성장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① 상회에 순종하여 교회부흥을 이룩하자(74년). ② 사랑과 화합으로 하나 되자(75년). ③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자(76년), ④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77년), ⑤ 말씀과 기도로 뜨거워지는 교회가 되자(78년)에 이어, 제2차 목회계획을 세웠는데, ① 믿고 배워서 자라자(79년). ② 믿고 자라서 힘을 얻자(80년). ③ 믿고 힘을 얻어 일하자(81년). ④ 믿고 일하여 나누어주자(82년). ⑤ 믿고 나누어 주어 칭찬받자(83년).그는 계속하여 교회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계획하였다. ① 부목사 제도 신설 ② 당회원 증원과 목사관 신축 ③ 목사관 건축 위해 건축위원회 구성 ④ 교회 개척 전도단 조직으로 교회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계속하여 교인수 증가에 따른 행정의 원활화를 위해 교회총무 제도 신설과 1977년 8월에는 교육관 신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부임 후 교회는 일취월장 부흥에 힘입어 유년주일학교와 중고등부와 대학부가 성장함에 따라 인재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동명장학회(東明奬學會)를 설립하여 대학에 훌륭한 성적으로 입학은 하였으나 경제가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는 교인들의 자녀들을 돕기시작한 것이다. 이에 뒷받침 한다는 취지로 당회장 최기채 목사의 저서 판권(인세)을 장학회에 내놓아 장학재원 조성에 기초를 놓기도 했다. 이럴 즈음 1978년 10월경 동명교회에 속한 총회에 교단 이탈 조짐이 나타나 광주중앙교회 정규오 목사를 추종하여 총회 분규상황에 처했을때 본교회 최기채 목사를 중심으로 대성교회 서문교회 대광교회 중흥교회 한마음교회 남평교회는 교리상의 문제가 아닌 상황에서 인정이나 지역상황을 빙자해 명분없는 총회 이탈을 할 수 없다고 의중을 모았다. 그 중심이 동명교회 최목사가 되었다. 최기채 목사는 이렇게 자기의 목회지 동명교회 지도자로써 뿌리를 내렸을뿐 아니라 교정(敎政) 에도 크게 이받이 하였다. 한국찬송가공회 회장으로, 교단지 기독신문 이사장으로, 총신대학 이사장, 학교법인 광주동명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며, 전남노회장과 호남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D.Min)을 이수했고, 카자흐스탄공화국 국립대학교에서 그의 지도력을 인정, 명예문학박사 학위(H.Litt.D)도 수여하였다. 그의 지도력은 본교단 호남지방의 대부로 교단 내외에서 존경받고 있는 신사목사이기도 하다. 최기채 목사에게 또 한 가지 명예가 있다면 문인(文人)이라는 점이다.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에도 시를 쓰고 소설을 집필하고 있으며 목회 현장에서 느낀 바를 수필로 발표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있다. 이런 그의 역할을 인정해서인지 1993년 9월 21일부터 24일까지 그가 목회하고 있던 광주동명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8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으로 선출되어 그가 사랑하고 뜨겁게 사역했던 교단을 위해 마지막 혼신의 정열을 받쳐 봉사하고 많은 후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목회 2선에서 교단과 국가의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재임했던 제78회 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살펴 보면, ① 교단발전을 위해 일만교회운동을 재가동 하기로 하다 ③ 학생지도국, 농어촌국, 재무국을 설치하기로 하다 ③ 평신도 성경교육대학을 설립 추진하기로 하다 ④ 70세 정년 범위는 당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목사, 장로, 권사, 집사에 적용하되 신학교수는 65세로 적용한다 ⑤ 브라질에 지방신학교 인준하기로 하다 ⑥ 트레스디아스는 경계단체로 제지하기로 하다 ⑦ 성경공회 설립을 허락하기로 하다 ⑧ 면직된 목사는 강단에 세우지 않기로 하다 ⑨ 표준새번역 성경사용은 금지하고 개역성경을 바른번역으로 출판하도록 하다(100회총회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16 서울, p.31-32 참조). 최기채 목사는 1974년 3월 24일 부임해 한 교회에서 30년 사역을 영광되게 마치고 2004년 12월 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은퇴해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고 장남 최석 목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의 선교사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다른 자녀들도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2-03
  • 세상살이
    한 해가 가고 또 한해가 왔다. 한 시기를 모아 세월을 보내고 새 시간에 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그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물음으로 “세상살이”를 다짐해 본다. ‘온갖 모든 삶에는 때가 있다’고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고 한다. 만사가 인과(因果)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무슨 결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나는 것이며 주는 것만큼 받고 거두는 이치가 이 세상 우주의 원칙이 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모든 것이 심는 것의 여하에 따라 결과를 가져 온다는 이치를 이렇게 터득하게 한다. 이러한 결과는 모든 것이 심는 것의 여하에 결과를 가져 온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한다. 이는 인과응보의 길로 교훈을 알게한다. 이를 우리가 인과응보의 원칙을 한번 실험해 본다면 사실로 맑은 거울에 대면해서 지금 내가 울고 있는 표정을 쓰면 거울에 내 모습은 울고 있는 모습으로 대면하게 된다. 반면에 웃으면서 거울에 대면하면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은 웃는 얼굴의 표정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인과응보의 교훈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 내가 하는 것 그대로 내가 받는 것을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을 엿보게 된다. 이는 천하만사가 모두 인과의 법칙을 따라 살아간다는 도리(道理)를 알게한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을 강조 하시면서 다만 ‘사랑’만은 다른 면을 알게 한다. 사랑은 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믿음의 은혜를 알게 하여 사랑의 진수를 갖게 한다. 여기에 내가 조건 없이 주고 싶어 하는 하는 마음에서 믿음의 은혜에 참된 사랑이 나옴을 깨닫는다. 이는 믿음이 조건이 아닌 사랑이라는 무조건 사랑을 알게한다. 사랑은 서로가 이해해 주고 이해하여 용서하고 용서로 진정한 참 사랑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과 믿음은 조건이 없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진실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진실한 삶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것을 믿고 행하는 것은 사랑의 신앙이다. 그리하여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는 사람의 도덕성을 말하면서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다”고 했다. 이는 성서가 풀이한대로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다음에 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곧 하나님의 율법에 그 말씀을 새겨두신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심을 믿게 한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으로 이를 판단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양심의 방향으로 자유를 옳게 사용할 줄을 알아야 한다. 이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다.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양심은 다 새겨져 있기에 이 행위에는 반드시 믿음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말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인과응보의 삶을 영위하려고 하지만 천지 창조는 이유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가게 함을 알게한다. 이를 위해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스스로 게시며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창조함을 받아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의 능력을 갖추시고 용서의 사랑을 하신다. 그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건적인 삶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적인 삶을 통해 사랑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건적인 삶이 아니라 서로의 용서의 삶으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는 말씀에 한해 1년 동안 삶을 사는 이 믿음은 사람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 스스로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삶에서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2-03
  • 성육신한 예수교회-38
    예수님이 하루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셨다. 씨와 관련해서는 창세기부터 기록된 바이지만, 씨란 사람에게도 해당되어온 이야기이다. 역대상 17:11의 씨와 관련된 스토리가 바로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씨를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300년 역사에 다윗만큼 잘 알려진 왕이 없다시피 한데, 그의 허리에서 모든 인류가 기대하는 인물이 태어나게 될 종자는 과연 어떤 종자였을까? 인간의 바람과 역사는 계속되어 진화하는 마당에 딱히 탁월한 씨앗이 관연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다윗의 허리에서 나오는 씨앗은 하나님나라를 견고하게 세우는 사역을 할 것이며,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어지게 되는데, 그의 통치가 영원히 견고하다고 하였다. 오늘과 같이 땅속에서 올라오는 안개와 연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세상이 앞날을 예측 못할 정도로 혼탁해지는 상황에서, 이런 좋은 씨앗을 구할 수만 있다면 겨울이 지나가고 다가오는 봄에는 땅을 더 깊이 기경하여 조심스레 뿌려볼만 할 것이리라.랍비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이야기 중에도 씨앗 이야기가 있다. ‘네 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자는 좋은 밭이 못되고, 이런 밭에 씨앗을 뿌린다면 그 씨앗의 열매는 소출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것도 네 것이고, 네 것도 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밭은 옥토와 같아서 많은 추수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랍비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도 하신 바이고, 마태 공동체를 비롯해서 복음을 듣고 익히는 교회에서는 항상 가르쳐온 바이다. 가르침대로, 한사람 한 사람의 토질을 개량하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로 하는데, 커다란 세상의 기후와 토양에서 해마다 파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국제열대농업연구소가 아프리카의 식량 해결을 위한 옥수수 품종 개발을 위해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였으나, 연구진들도 지쳤을 뿐 아니라, 국제 옥수수 밀 개량 센터(CIMMYT) 아프리카 식량 조달을 위한 교잡종 옥수수 개발 정책이 이미 바꿔진 때에, 한국의 김순권 박사가 아프리카연구진에 합류했다. 옥수수란 냉대식물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와 같은 더운 지역에서는 본시 적합하질 못하였으나, 그래도 옥수수만큼 식량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서부지역도 옥수수로 식량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뒤늦게 연구진에 합류한 옥수수 김박사는 동료 연구진과 당국으로부터 여간 핍박이 아니었으나, 연구비의 절반이 준 상태에서도 옥수수 종자 개발을 해 보겠다는 김박사의 의지는 꺽질 못하였다.김박사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연구실로 나갔다가, 저녁 식사 이후에도 연구실에서 지냈다. 옥수수 품종개발을 위해 밭에서 무릎을 꿇는 일과, 엎드려 밭에 입 맞추는 일들은 흔한 일들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지성소란, 다름 아닌 연구소와 품종을 개량하는 밭이었다. 하루는 꿈에 옥수수를 결혼시키려고 주례를 서는데, 그 옥수수가 열대지방의 품종 1368과, 미국에서 가져와 개량한 9071품종이었다. 악마의 풀로 알려진 ‘스트라이가’를 이기고 자라나는, 적도지역의 식량을 해결 할 품종의 옥수수가 탄생된 것이었다.요즈음 우리나라는 가장 왜소해지고 허약해진 반면에, 우리 주변국들은 사상 최대로 강한 나라들이 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은 역대 가장 커다란 쓰나미를 가져올 요인들을 이미 갖춘 것이다. 이 뿐 아니다. 세계전쟁의 요인들이 중동과 유럽에서 감소된 반면, 남중국해와 동북아에서 긴장이 증가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인가? 세계 정황이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우리 국가와 교계는 아무런 대책을 갖추질 못한 채 절제와 지혜는 온데간데없이, 당쟁과 헐뜯기와 더러운 추태를 서슴없이 하며 새해를 맞이한 것이다.고대 희랍의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이 모두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바빌론 포수 후에 아람어역 경전을 편집하였고, 그 이후 흩어진 유대인을 위해 희랍어로 칠십인역을 내어 놓더니,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지중해 야브네에서 구약을 재편집하여 경전화했다. 이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에 파종할 새로운 품종을 내놓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저지하려는 제자들에게 ‘한 알의 씨알이 그대로 있으면, 할 알 그대로이고, 한 알의 씨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을 마치시고는 십자가로 향하여 나섰던 것이다. 요한은 격동하는 새로운 세상에 “죽어서 다시 산, ‘좋은 씨앗’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2-03
  • 기독교인의 행복론 -35
    충무로역에서 내려 명동쪽으로 가다가 작은 골목을 끼고 남산을 올라가다 보면 ‘문학의 집’이 있습니다. 길 초입부터 우람한 나무들이 버티고 있어 숲의 기운이 인간을 감싸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곳이지요.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정원(옛 중앙정보부)이 있던 자리지요. 그런 서슬퍼렇던 곳이 교통 방송 소방안전본부 등의 건물이 들어서서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지요. ‘문학의 집’도 옛 중앙정보부장 관사였던 곳을 리모델링하였지요. 경비실은 찻집으로 바뀌었고, 2층으로 된 주택 외관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의 싯구가 적힌 현수막이 늘어서 있고, 주택 안에는 한용운을 비롯한 시인들의 사진과 현대 시인들의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곳 1층 홀에서는 문인들의 시낭송이나 문학 강연 등이 주기적으로 열리는데, 좋은시 낭송 문학회에서는 매 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시낭송회를 열고 있지요. 좋은시 낭송 문학회는 공연과 함께 하는 시낭송으로 독자와 친밀감을 가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문학 단체로 신규호 시인이 회장으로 있으며 회원은 33명입니다. 매월 초대 시인을 초대하여 시낭송을 합니다. 이복래 시인이 ‘봄날은 간다’ 등의 흘러간 노래를 연주하고 나면, 신규호 시인이 인사말을 합니다. “사람의 얼굴 구조는 여타 동물과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있도록 턱뼈가 약간 각이 져 있고 성대가 발달되어 있지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바로 그 인체 구조의 특성을 제대로 인지하여 과학적으로 글자를 만들어 낸 겁니다. 서울대 언어 연구소에서 사람이 ‘ㄱ’자를 소리낼 때 턱뼈를 X선으로 찍어 봤더니 근육이 영락없이 ‘ㄱ’자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요.그런데 요즘 신문 기사를 보면 언어를 활용할 줄 아는 인간이 더 사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 계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을 봐요. 이건 웬만한 동물도 자기 새끼를 그렇게 하진 않아요. 우리가 시낭송을 꾸준히 하는 것은 인간의 품격을 좀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키자는 거지요. 여러분의 좋은 낭송을 기대하겠습니다.”S신학대학에서 부총장을 지낸 신규호 시인은 언제나 겸손하게 문단의 이면사를 후배 시인들에게 들려주곤 합니다. 경주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을 만들 때 장윤익 교수가 동분서주하였던 일, 1980년대에 “어용 교수 물러가라”는 데모가 한창일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방식이 개발도상국에 로드맵이 되는 성과를 강의실에서 꿋꿋이 말한 일 등을, 그는 마치 동화를 구연하듯이 주변 문인들에게 말하곤 하였지요. 그런 느긋한 성격 때문인지, 그는 시낭송 모임을 200회 가까이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과천에 있는 대형 교회에서는 수백 명의 교인들 앞에서 공연을 하였고, 대학로에 있는 연극 공연장을 빌려서 낭송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문학의 집’ 공연은 10여 년 이상을 이어온 편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합니다. 최근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 시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편입니다. K-Pop, K-Drama, K-웹진 등이 성행하다 보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 2만 명 이상의 시에 관심이 있는 동호인들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시 낭송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편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주로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곤 하지요. 노래라고 해 봐야 딱 두 곡,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안치환의「위하여」를 부르는 것이 고작이지만, 노래를 부를 때의 그 멋스러운 기분은 나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언제부터인가 대중과 함께 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독자에게 시를 읽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시낭송의 멋을 독자에게 보임으로써 시의 맛을 느끼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주변에서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점잖은 인상이 깨진다며 글이나 똑바로 쓰라는 비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시는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동인(動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문학의 집’에서 시낭송을 합니다. 이는 인생을 멋있게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작가로서의 로망을 꿈꾸고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나의 모습을 귀여워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계신 주님은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아 주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겁니다. 주님은 말씀 보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지혜를 주시고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함께 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그 자녀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2-03
  • 목회는 쉬운 것이다·20
    사랑이 치유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과학에 의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깊이 연구한 가운데 발견한 과학적 증명입니다. 용서의 사랑은 참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창살 뒤에서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패턴이 깔렸습니다. 그런고로 온갖 부정적인 비판과 자기 비하가 우리 안에서 들끓고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이 형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습니까. 거기에서 온 죄책감에 의한 수치심이 상처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늘 두려움 때문에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사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이방 신처럼 개체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서 솔로몬 성전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만 계시게 하여 가두어 두려는 참으로 어리석은 그 행동의 유전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하나님은 주일날 성전(예배당)에 가두어 두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돈도 받고 지극히 사랑한다는 허울 좋은 슬로건을 앞세우고 에봇을 걸치고 장자 교단이라는 뚜쟁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여 수많은 제자가 그들의 제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오늘 죽음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개혁주의생명신학 회복을 가장 영적 대안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조금도 변화가 없는데 사람들이 변절하신 하나님으로 둔갑시키는 이유가 자기들이 하는 일에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머리로만 아는 예수정철어학원의 정철 이사장의 말에 한국인에게 영어가 어려운 이유는 머리로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예수를 믿고 보니 기독교인들이 머리로만 계산하고 설명하고 머리로 믿는 신앙이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한국 기독교는 머리로 계산합니다. 이 시스템을 유럽신학이라는 죽은 신학의 오염이 급속도로 잠식한 이유가 남의 밥에 든 콩을 중시하는 모방의식에서 장마철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그곳에서 돈 없고 영어 안 되어서 10년 이상씩 있었던 사람들의 콤플렉스가 집요한 자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교수라고 하여 자기 주변을 볼 수 없는 장님처럼 된 사람들이 신학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젖어진 수많은 제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능성을 갖는 사람들에게까지 방해와 무관심과 무력함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선언한 중심이 된 사상을 실천을 위한 프로그램이 말과 제시가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내면화해야 합니다.갈라디아서 4장 6~7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이 진리에 눈을 뜨인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머리에서 마음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사건입니까.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예배, 기도, 헌금, 봉사 등 모든 의식이 그리스도가 하감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가 신을 불러내는 것과 같이 우리의 거룩한 행동으로 끌어내리려는 무속주의가 한국의 바른 신앙을 망가뜨린 것입니다.우리 마음에 와 계신 하나님 그 생명이 머리 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사실에서 생명적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입니다. 나의 지식이나 이론이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와 계신 예수 생명이 우리의 사상이나 머리의 기능이 생명적 기능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내가 용서와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2-03
  • 69. 제64회 총회장 한석지(韓錫祉) 목사
    평북 강계 태생한석지(韓錫祉 1922.1.17~2016.12.27) 목사는 평안북도 강계군 외궈면 이남동 에서 태어났다. 한석지가 태어난 강계지역에는 이미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말하면 조선이 1905년 한일합방이 되었고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일반 백성들은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아가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제대로 된 교육이나 미래의 꿈을 꾸고 살아갈 처지가 못되었다. 다행히 선교사들이 일찍 전해준 기독교복음을 접하게 된 것이 행운 중의 행운이라 하겠다. 고향에서 부모님들을 도우며 농사일이나 돕고 살아가고 있던 그에겐 한 줄기 소망이 있었다고 한다면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통해 인간의 귀중함과 어슴프레 그래도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 주일이 기다려졌고, 복음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 올랐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죄악된 인류를 구속하여 천국백성이 되게 한다는 구속의 도리를 깨달은 한석지는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갖은 학정과 수탈로 주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 없었다. 나중엔 교회를 향하여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해 이곳엔 사람 살 곳이 못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청년 한석지는 한숨만이 나왔다. 이러한 절박한 시기를 지나고 아무도 예상 못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될까 희망을 가졌으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 이젠 남과 북 사이에 민주냐 공산이냐 하는 이념의 대립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 대두하자 남과 북의 민족지도자들 사이에 암투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자유와 새로운 삶 찾아 월남청주에서 학업과 신앙생활로 장로장립총회신학교 졸업 후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남북통일과 북한선교에 특별한 관심교단의 후진 양성에 헌신청년 한석지는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삶의 전개를 위해서라도 고향을 등지고 월남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잠시 생활터전을 충청북도 청주에 정착해 북쪽에서 마음껏 배우고 싶었으나 생활형편이 여의치 못해 할 수 없었던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청주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연마한 법률지식은 후에 그가 교단을 위해 노회장으로 혹은 총회임원으로 봉사하면서 법적인 문제를 슬기롭게 짚어내며 법리에 밝은 지도자로 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1년 대학을 마치고 교회를 섬기며 평신도로 봉사하였고 장로임직을 받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의 음성을 듣고 서울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 3년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가 1962년 평양노회에서였다. 청주에서 살고있던 한석지 목사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동암교회로 부임해 함남노회 노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청주에 있을 때는 청주시온초등학교 교사로 후엔 교감이 되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그의 대표적인 봉사사역을 살펴보면, 1955년 청주중앙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고, 1960년 총회신학교 재학 시에는 학우회 회장이 되어 그의 지도력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처음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평안교회 부목사로 잠시 사역하였고, 1964년 동암교회 위임목사로 청빙 받아 승리로운 목회를 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피난 온 동역자들로 구성된 무지역노회로 불리는 함남노회(咸南老會) 노회장을 다섯 차례나 역임하며 교단을 위하여 봉사하였고, 1972년엔 서북대회(西北大會) 대회장으로, 1980년엔 잠시동안 교단 인재양성 기관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서리로 수고하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총신신학원 운영이사로 나중엔 부이사장으로 재선되어 총신을 위하여서도 섬김의 손길이 이어졌다.1991년에는 총회신학원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1992년 동암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함남노회 공로목사가 되었다. 한석지 목사는 월남한 사람으로 그 어려웠던 정치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도 대학교육을 받고서 주의 종이 되기 위하여 총회신학교로 진학, 3년의 정규과정을 마치고 한 교단의 수장이 되었으니 가히 입지전적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교단의 후진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언제나 조국의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에 큰 관심을 가진 지도자였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에는 미국 애트란타(Atlanta)에 있는 임마누엘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다. 총신대학교 김영우 총장은 그의 하관예배에서 그는 평생 교회와 총회, 총신을 위해 봉사한 어른이었다고 피력하였다. 한석지 목사는 가정적으로도 요셉처럼 자손들이 번성하는 축복을 받기도 했다(크리스챤포커스 2017.1. 3자 뉴스 및 기독신문 2017.1.3(화) p.2 기사 참조). 고인의 장례예배에서 총회장 김선규 목사는 고인은 1979년 대구총회에서 비주류측이 개혁을 빌미로 개혁총회가 분리되어 나가는 틈새에서 교단의 안정을 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64회 총회장으로써의 리더십을 발휘 교단의 안정에 크게 이받이 하였다고 치하했다. 한석지 목사는 총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총회회관 건립과 총신신대원 양지캠퍼스 조성에도 그의 역량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설교 중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본문으로 탕자의 회개라는 제목의 설교에 나타난 그의 신앙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탕자가 자유와 향락을 위해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났으나 자연히 비애가 일어났다. 이것은 인류의 가련한 상태이다. 인생은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참 만족과 자유가 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재물과 인격과 자유와 향락을 다 빼앗기고서야 비로서 자기가 있었던 아버지 집의 참 행복을 깨닫고 탕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와 참 행복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그 설교는 자신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첫째 부모슬하에 있었던 생활을 언급하면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의 슬하에서의 안정됨과 행복함을 언급하였다. 둘째, 부모를 떠난 아들의 방탕한 삶의 실태롤 언급하면서 탕자의 생산은 없고 낭비의 삶과 그 결과 궁핍과 배고픔의 모습을 논하고 있다. 그로인해 고통과 저주의 삶으로 전락한 모습을 강조하였다. 셋째, 탕자의 회개를 언급, 아버지의 슬하를 떠난 실존의 모습을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함과 그 자리에서 좌절하지 않고 신앙으로 일어서는 기립의 의지를 회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언급했다. 넷째, 이러한 결단으로 다시 축복의 생활로 복귀하는 탕자의 모습을 통해 큰 축복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을 결론지었다. 여기에서 한석지 목사의 목회관과 삶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의 신생과 신앙, 나아가서 그의 목회철학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저 에장출판부 2015 서울 p.86-88참조). 필자의 생각으로도 이 설교 속에 그의 목회관과 신앙의 핵심을 읽게하는 철학이 담기었다고 보여진다. 그가 재임했던 제64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주교통신학교를 주교통신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기로 가결하다. ② 방배동 소재 총회신학교를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수습을 위한 21인의 전권위원을 선출하다. ③ 미주대회 고시는 미주대회에 전권위임해 주기로 결의하다. ④ 부산노회를 3분(부산, 중부산, 울산) 하기로 가결하다. ⑤ 총회산하 전국교회가 연1차씩 선교협력 기금을 내기로 하다(도시교회는 연 2만원, 지방교회는 연 1만원, 미조직교회는 연 5천원). 한석지 목사는 2016년 12월 27일 94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그가 평생소원했던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슬하엔 2남3녀를 두었는데 장남 한철선 박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총신신대원 원장으로, 2남 한용선은 호주 시드니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혜선, 혜신, 혜옥은 각각 가정을 이루어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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