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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음의 자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자기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또한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자신의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잠시 잠간 살다가 소유했던 것 놔두고 혈혈단신으로 삶을 하직하기 마련이다. 성서의 진리는 이 전제된 사실에서 믿음을 갖게 한다. '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보냈을까?오늘의 사회 현상에서 삶의 자리는 착한 마음씨보다 차디찬 인정, 씩씩한 생활 보다는 눈치 빠른 언동, 실력 보다는 돈, 능력보다는 학벌과 문벌, 창의력 보다는 순종과 반응, 비판력보다는 해석력, 친구보다는 권력, 공동체의식보다는 조직, 의리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한국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물질주의 가치관이 믿음의 자리를 훼손하는 것이다. 자기 삶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단 이기주의로 사회구조 악을 만들고 허영과 인기의 상승으로 참보다는 거짓이, 내용보다는 겉이, 의미보다는 실리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으로 올라간 후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믿음의 자리를 잃고 있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산을 내려가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 부패하였다....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힘과 경제(재물)만으로 위대하게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고 성서는 약속한다. 이는 흔히 세상이 말하는 믿음과 성서가 말하는 믿음을 알게 한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상대방으로 인간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먼저 성서를 알고 여기에 따른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우친다. 예수 그리스가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친히 그 삶을 보여 주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고 믿는 영접이 있어야 하며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긍심적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긍지를 가지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행적의 나타남을 믿고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알고 늘 삶 속에서 나의 주인이 되는 삶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삶을 영위하고 성령에 대한 믿음으로 친히 나의 삶에 오신다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증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의 성서 속에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 구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약속이시다. 신약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과 똑 같은 신격 존재이지만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심을 믿는다. 그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밖혀 죽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믿음을 가지는 신앙이 "믿음의 자리"임을 알고 믿게 한다. 곧 '믿음의 자리'는 삶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이 를 위해 성서는 사람을 만드신 분으로 창조주를 알게하기 위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이렇게 사람은 하늘로 부터 삶을 부여받았다. 그 삶은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 있기에 생명의 삶이다. 참으로 그 삶은 위대하다. 이 삶으로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삶은 위대한 일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그리하여 사람은 하늘로 부터 삶을 부여 받았다. 이 삶이 오늘 '지금' 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수많은 과거를 사는 사람 중에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자기 삶을 찾는 것은 자기를 발견하는 일로 출발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한 번의 삶으로 영원의 삶을 찾는 것이다. 이 삶은 사는 관계에서 많은 공감을 주며 그 삶의 철학은 삶을 전환시켜 참 삶을 가꾸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1-23
  • 성육신한 예수교회-37
    새해가 되었으나 교계마저도 침울함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교계는 연합하는 데에 따른 불편한 것들을 정리하려고 애쓰는 듯하고, 한 교단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거룩’을 슬로건으로 들고 나선 것이다. ‘거룩’에 관하여는, 구약의 시대에 성소에서 경험하며 훈련되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학습하며 훈련되는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성소와 지성소의 정결규례가 오늘에도 시청각으로 경험되어질 수만 있다면, 어렵긴 해도 우리가 거룩하여지는 데에 한결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신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거룩함에 근접하려면, 제일 먼저 기름부음을 받은 교역자의 본보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더럽혀진 요인은 신도들이라기보다는, 성소에 매일 출입하는 사제들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도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가까이 함에 있어서, 복음서대로 하였다면 보다 쉽게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었으나, 교회의 권위와 제도가 중간에 다리 역할을 자청하는 바람에, 가톨릭 같은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같은 제도에서 비롯된 폐해를 피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어둡게 된 데에는 우리 지도자들의 욕심이 지나치고 게으른 탓도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에 부흥이 시작되고 있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사도들의 발 앞에 많은 것들을 가지고 왔다. 토지 문서도 갖고 왔겠지만, 이런 것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궁핍의 문제를 신속히 해결 할 수 없었으므로, 공동체의 필요들에 부담을 가진 사람들은 토지를 급하게 팔아서 내놓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 발 앞에 수**억을 가져다 놓는 일이 생긴다면, 그 순간 우린 돌아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흐름을 타고 틈새를 노린 한 부류가 있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토지를 팔아서 그 일부를, 그들이 판 토지 대금 전부인양 행세하며 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사도들은 분별력을 가지고, 끼어든 마(魔)를 잡아채서 깨끗하게 제거하였다. 아마도 우리 같았으면 불가하였을 터인데, 주님이 빛을 비추시고 계셔서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교회 안에서 싸늘한 주검을 맞이하였다. 마치 성소에 다른 불을 들고 들어간 나답과 아비후가 즉각 주검을 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당면한 시간대나, 나답과 아비후가 당면한 시간대가 거의 비슷하다. 하나는 구약교회가 시작되던 때이고, 또 하나는 신약교회의 출생 시간 때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비슷한 공통점을 갖는 데에는 우리에게 시사 한바가 크다.그동안 한국교회가 놓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과 같은 부류일 것이다.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교회의 부흥시기에 이러한 부류를 피해갈 수 없었다. 존 스토트를 비롯한 우리네 초창기 교계 지도자들은 이런 일들을 당면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저들은 당시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욕심을 덜어내면서 바람직한 교회를 세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백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러한 부류에 노출되는 일들이 대표적인 교회들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루가 멀지 않게 매스컴의 표적이 된 교회들은 비리가 들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일반 시민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되도록, 그 미련함을 떨쳐내질 못하였다. 몇몇 교회들이 더럽혀지면서 결국에 가서는 한국교회 전체가 오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한국교회 역사 가운데서 반세기를 목회하면서 경험된 것은, 마치 사사기서의 말기를 보는 것처럼,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저마다 제 뜻대로 살려는 것을 보아왔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례대로 하나님께 나아오질 않는 것이었다. 교회에 들어와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모자 쓰는 일에 혈안이 되고 영악해지더니, 심지어는 거대한 교회 금고에 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천사 같은 위장을 하고 날개를 다는 것이었다.교계가 ‘거룩’이란 플래카드를 요란하게 붙이고 광고를 하는 것은 왜일까? 진정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가까이 하려는 것일까? 민수기 16장에서도 보면 고라가 다단, 아비람 등과 협잡하여 이스라엘 지도자 250명을 끌고 나와서, 저마다 지닌 향로에 불을 두고, 그 위에 향을 올려서 피우며 회막으로 향하였다. 그들이 회막 앞에 섰을 때에, 그렇게 힘 있고, 거룩하고, 위엄 있게 보이던 행렬이, 급하게 공격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불로서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저들이 하나님의 불이 아닌, 거짓된 불로 시위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 아닐까? 야훼 앞에 ‘거룩’을 꾸며대고, 사람의 생각대로 법궤를 길들여 보려고 하는 짓은 아예 그만두시기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1-23
  • 왜 성경적 바른 신앙이 되지 못하는가? ①
    인간의 뇌는 반복됨에 의한 반응이 곧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된다고 합니다. 신경과학이나 생화학, 유전학에 의해 우리 뇌는 반복된 경험뿐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 의해서도 프로그램이 된다고 합니다.반복된 경험을 신경과학자들은 뇌의 기본 패턴과 구조가 어릴 적부터 형성되며 부모와의 상호 작용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서적 기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예수님은 동정녀에 의해 탄생되었고, 우리는 평범한 잉태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아담이 정신적 타락이 원인이라면 예수님은 새로운 길을 여심으로 하나님 같은 인간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사실 그 자체가 예수님이십니다.예수님의 순수한 조건 없는 말씀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불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순수한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거짓된 뇌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이들 말대로 “거짓말이지?”, “공갈치네!”라는 말은 거짓말의 체험에서 온 찌든 뇌에서 발생한 자연 반응입니다.이 낡은 ‘시스템’을 망가뜨려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데 소위 우리가 잘 사용하는 고정관념은 그의 부정적 습관에서 온 것이라면 피해당한다는 공포의식에서 자기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병적 집념이 한국이라는 대국의 틈에서 침략만 받아온 한국적 폐쇄심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유대인들이 갖는 선민이라는 의식이 아주 작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주신 가나안 복지라는 생각은 곧 잘못된 집착에서 발생한 것이 왕으로 오셨다는 예수에 대한 공포의식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라면 망상적 사고에서 병을 유발시킨 ‘장자교단’이라는 이 낡은 사고를 가진 미치광이들 같은 집착에 계속 교단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는 불치병이 된 것입니다.지금 세계가 모두 공통분모에 소통하는 시대인데도 얼마 전 모 교단에서는 장자 교단이라는 썩어빠진 착각이 학자들에게까지 세균처럼 번져가고 있는데 그들이 무슨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신비한 사실을 알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골로새서 1장 2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고 했습니다.영광스러운 비밀,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생명 회복에서 오는 ‘영광의 소망’입니다.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린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 뱀이 약속한 세상적 누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진리에 따라 살기 위한 운영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요 3:36, 6:27~28).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라는 새로운 운영 시스템인 것입니다.크리스천의 삶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즉 창조주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씀대로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준비하시고 장치하신 예수의 생명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1-23
  • 기독교인의 행복론 -34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을 보면 ‘큰바위 얼굴을 닮은 이가 누굴까’ 하고 궁금해 하던 아이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장본인임을 알게 되지요? 사람은 누구나 닮고 싶어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명 탈렌트의 옷차림을 보면서 그의 멋을 따라 흉내내기도 하고, 유명 가수의 노래를 부르면서 멋에 대한 욕망을 대리 충족하기도 하지요. 프로이트가 말한 외디푸스 콤플렉스도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가정 먼저 본 이성이 어머니여서 성인이 되어 어머니를 닮은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아이가 어릴 적에 본 것은 커서도 멋을 추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요. 필자도 어릴 적에 교회에서 헌금송을 부르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는데, 그게 어른이 되어 찬양대에서 노래하는 내 표정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실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찬양을 할 적에 나는 어릴 적 성가를 부르는 이들의 멋진 모습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한다니까요. 이렇게 볼 때 엄마가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멋을 보여 주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나의 은사님이 초현실주의시를 쓰셨던 조향 선생이셨는데, 그분이 제자들에게 늘 하신 말씀이 어린 아이가 폭넓은 시선을 가지게 하는 것이 좋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야 상상력이 발달하여 아이가 큰 꿈을 가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나 바이올리니스트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연습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엄마가 아이에게 자신이 하는 일이 멋있고 재미있음을 각인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가 어느 방면에 소질이 있음을 발견하면 그 능력을 한껏 발휘하고 지속적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명 운동 선수나 연주자들의 멋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김연아 선수나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의 엄마들은 어릴 적부터 그 분야에 시간과 정성을 극진하게 쏟아부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엄마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세세하고 치밀하게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어느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아이가 특정한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나이 경우에는 총각 시절 S예대에서 무용 강습을 받고 늘 서재에서 책을 본 것이 아이 교육에 조금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고, 춤을 춘 것이 아이의 감추어 둔 끼를 발산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팀을 이뤄 학생들 앞에서 춤을 발표하기 시작하더니, 커서는 나의 시를 보고 제대로 된 평가까지 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엄마들에게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지인들끼리 모였을 때에 노래를 부르라 하면 뒤로 빼지 말고 아이 앞에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고, 동화책을 읽어 줄 때에도 감정을 실어서 읽어 주면 아이의 정서나 감각을 훨씬 신장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요즘은 융합 시대입니다. 전화기 녹음기 사진기 등을 예전에는 따로따로 가지고 다녔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에 다 들어가 있고, 인공 지능이나 가상 현실을 통하여 예전에는 공상 같은 일들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학에서도 요즘에는 장르의 구분이 없어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소설같은 시가 나오는가 하면, 수필 같은 평론이 쓰여집니다. 그리고 시에 서사적인 이야기, 극적인 대사, 수필적인 산문율이 얼마든지 융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낭송회에서도 노래와 무용을 곁들인 시낭송이 이루어지기도 하지요.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착된 형식을 깨드리고 여러 가지 탈장르적인 요소들이 융합된 표현을 해야 하지요.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노래는 각자의 능력이 다르고 전문 가수가 아니기 때문에 성의껏 부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표정입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실제 감정이 들어가는 표정이므로, 그것으로 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보는 것이지요. 우리들에게는 각자 달란트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그 달란트를 폭넓게 제시함으로써 우리 아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학생복을 입고 다른 아이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 중 글로벌한 인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부모로서 현재의 교육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1-12
  • 성육신한 예수교회-36
    욥의 문학에서 ‘전에는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경이로운 문장이 그의 문학 결론 부문에 나타난다. 듣는 것으로만 인지되던 세상에서 시각적인 세계로 까지 진전되어 인식되는 문화는, 세상이 뒤집혀지는 발전을 가져왔다. 섹스피어의 극들이 영국 도시마다 매일 저녁에 공연되었는데, 당시의 시민들은 매일 같이 열리는 극장에 연극을 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연극 공연을 들으려고 갔다고 한다. 매일 같이 열리는 극장은 3000석에서 5000석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당시 시민들이 한 도시에 10만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한 달 정도가 지나면 거의 시민들 중에 한사람 꼴로 섹스피어의 극들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이들이 듣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는, 거의 시민들 95%가 글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글을 모르긴 하였지만, 저녁마다 극장에 모여 연극을 들으면서 깨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섹스피어의 극은 거의 비극을 다루곤 하였는데, 당시 연극의 테마에는 살인 장면들이 삽입되었는데, 이와 같은 부도덕한 사회적 정치적 정황에 말려들면서, 사람으로서의 선택의 자유와 책임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결단과 행동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르기에, 책임의식이 없이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무모한 것임을 깨우쳤던 것이다. 이렇게 섹스피어의 연극을 보면서 시민들의 자의식은 진보하며 발전하였다.이러던 중에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당시의 영국 국교는 예배당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들 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이다. 이들은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텐트마저도 저들을 모두 수용하질 못하였으나, 당시 설교가들은 얼마나 발성법이 좋았던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운집하였어도 삼만 명이 설교를 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메마른 가슴을 만져준 설교가들은 군중들이 내어놓는 헌금으로 고아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하였고, 저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번역되어 인쇄된 성경들을 시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글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당시 국민(초등)학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국민에게 글을 깨우치는 계몽교육이 한 세기가 되자 영국시민 50%가 글을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듣기만 하였음에도 책임과 자유를 깨우칠 수 있었던 이 시민들은, 이제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황족과 귀족에게만 독점되었던 권력과 돈과 명예와 문학이 점차로 시민들에게도 나눠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백성들과 지식을 공유하기 시작한 이 운동력은 오늘의 한국과 쿠바에 이르기 까지 쓰나미처럼 퍼져나간 것이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영적 운동력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관만 갖고 있던 사죄의 권능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자들 모두에게서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치유하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믿는 자들 모두의 사역이 되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예수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에서든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멈추질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현장은 곧 성령의 나타나심의 장소가 되었다.예수님의 복음이 많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서 독점되고 특권자에게 사유화 되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독점되질 아니한다. 때로는 황금의 입을 가진 자가 독점하기도 하고, 제왕들과 추기경과 교황들이 독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읽혀지는 곳에서는 운동력과 거대한 변화들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수님은 밤중에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위로부터 나질 아니하면 하나님나라가 보이질 않는다 하였다. 당대에 아무리 석학이라 할지라도 듣기만 하고, 진리 안으로 쑥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었다.욥은 고난의 과정을 통과 하면서 그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우리가 항시 듣던 베토벤의 음악도 어느 시점부터는 그 작곡자가 보이길 시작하고, 그와 더욱 깊은 사귐을 갖게 된다. 지휘자만이 베토벤을 객석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도 베토벤을 만나게 하여 주고, 영화감독도 시청자들에게 베토벤을 만나게 하여 준다. 이뿐 아니라 오페라나 무용수를 통해서도 우린 그 작품의 진수를 조우한다. 하루에 6시간 넘도록 건반을 두드리다가 갑작스레 작곡가를 만나는 일들은 언제나 있어온 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감동과 환희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에는 모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주님이 계신 하나님나라야 말로, 그것을 본 자만이 세상에 열어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1-12
  • 68. 제56회 총회장 정규선(鄭奎善) 목사
    경북 구미 태생정규선(鄭奎善 1918.3.20~1990.11.17)목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上毛洞)에서 정인명 장로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상모에는 1901년에 언더우드(Under-wood)에 의해 세워진 장로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한강 이남에서는 초기 선교사로 경성 신문내(新門內·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가 세운 첫번째 교회였다. 이 마을은 동래 정씨들이 일촌을 이루고 살았던 집성촌이었는데,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규선의 아버지 정인명이 이 교회의 장로였는데, 그 당시로서는 꽤나 살기에 넉넉했던 중농(重農)의 가정이었다. 정 장로는 아들 규선을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성봉중학교(聖峰中學校)로 유학을 보내 공부시켰다. 규선은 5년제 중학교를 일본에서 마치고 동경으로 가서 일본대학을 1943년에 졸업하고 귀국해 경성에 있는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결교신학교인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현 서울신학대학교)로 가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에 졸업하고 경북 김천시 황금동에 있는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해 첫 목회의 길을 시작하였다.장로교인이었던 정규선이 성결교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나와서 장로교에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엔 평양으로 갈수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있는 서울에서는 장로교에서도 교리적으로 복음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경선신학교를 나온 신학생들이 목회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교역자의 포화상태가 아니어서 희생적인 목회자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교파를 가리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성결교회 교단에서 월간 신앙지 활천(活泉)지를 통해 한국교회 안에 성결교 소속 경성신학교 출신들이 크게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교단적으로서 자연스럽게 용납되었다. 오늘날 예장합동과 통합측의 지도자들의 면모만 보아도 경성신학교 출신 장로교인들이 장로교회 안에서 목회에 성공한 인사들이 많이 있다. 우리교단의 지도자들이 된 사례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정규선 전도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1년 5월 경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북 북부지방에 있는 점촌제일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장기목회를 하였다. 이 기간이 정규선 목사에겐 목회 황금기였다고 보여진다. 1959년 9월 제44회 예장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였는데, 경기노회 총대 문제와 소위 에큐메니칼 지지와 반대의 이슈로 말미암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는 불행한 사태가 야기되자, 이 파급영향이 전국 각 노회로 그대로 이어지게 되어 한국장로교회가 6.25 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이고도 혼란한 사태가 교회 안에 불어닥쳤다. 장로교인으로 성결교 경성신학교 출신1959년 분열 당시 반에큐메니칼 노선 택해유교적 훈육받은 유학자다운 기개 가져대구신학대학 학장 역임교정에도 능해 경서노회장 5회 연임전국 교회와 노회가 에큐메니칼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지게 되자 각 지역의 노회로 이 정치사태가 그대로 어어지게 될 때, 경서노회 안에서 반에큐메니칼 전선의 선두에 서게 된 지도자가 바로 정규선 목사였다. 정규선 목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합방으로 조국의 미래가 암담했던 시기에, 또 아버지 정인영 장로의 선견지명의 기독교신앙의 안목으로 아들 규선을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선진국 일본에 유학을 시켜, 강직하고 철저한 현대문명을 접하게 한 것이 정규선 목사가 교회지도자로써 활동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엔 통합측으로 기울어진 교회들도 많았지만, 정 목사는 한국교회의 보수신학과 개혁주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데 경서노회의 지도자로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데 필요한 교정(敎政)의 경험을 경서노회를 지키므로써 인정받게 된 것이다.이 기간동안 정 목사는 동역자들과 후배들의 인정으로 경서노회 노회장을 5회나 연임하기도 했고, 그가 경서노회 지도자로 있을 때 노회가 설립한 경서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지방의 평신도지도자 양성에도 심혈를 기울였다. 정규선 목사는 점촌제일교회를 사임한 후 잠시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충무교회와 대구 반야월서부교회에서 봉사하기도 하였다.그리고 대구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같은 문중 출신 정규만(鄭奎萬) 장로가 필생의 과업으로 한강이남에서 화강암으로 건축해 세운 대구 서현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기도 하였다.정규선 목사는 유교적인 가문에서 훈육을 받고 일본에서 신식교육을 받아서인지 그의 풍모에는 유학자다운 선비의 모습과 현대교육의 결과인 포용력과 엄격함과 추진력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흉내낼 수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양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목회일선에서 쉬고 있던 그가 총회신학 인준신학교로 있던 대구신학교(大邱神學校·현 대신대학교) 초대학장으로 1981년 8월 취임하게 된다. 그는 대구신학교로 부름받기 전에도 리더쉽을 인정받아 총회임원(부회록서기)을 비롯, 영남협의회 회장(1968), 초대 영남대회장(1969)을 역임한 바 있었고, 대구신학교가 대구신학대학으로 인가 승격이 되자 학장이 되었다.그가 대구신학대학 초대학장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여러가지 어려웠던 학내 사태도 지혜롭게 정리되었고, 1987년엔 교단의 공기인 기독신문 사장이 되어 마지막 교단을 위한 봉사를 하기도 했다.2015년 9월 총회출판부에서 간행한 <역대 총회장 증언>에 실린 그의 육필설교 ‘가장 높은 차원의 은혜’란 설교문을 보면, 그의 신앙관과 목회이념을 엿보게 하는 영성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본문은 고후 12장 7~10절을 기초하여 설교한 것인데, 정 목사는 여기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하면, 죄에서 구속받은 것은 너무나 큰 사실이기에 예외로 하고 세속적인 면에서 보통 생각할 때 병들었던 자가 기도로 나았다든가, 가난한 이가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든가, 그 외에 여러가지 자기의 기도하던 바가 하나하나 이루어졌을 때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믿고 진실되게 살아나가는 성도들은 남이 볼 때나 자신이 생각할 때도 분명히 불행스럽게 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간증한 이 은혜를 가장 높은 차원의 은혜로 여겨야 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가시를 주신 것을 큰 은혜로 생각했다. 둘째 기도의 불응답을 오히려 심오한 은혜로 생각했다. 셋째, 남보다 수고 많이 한 것을 은혜로 생각했다고 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것은 정규선 목사의 평시 목회관이었고, 그의 신앙적인 삶의 표현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라 보여지는 것이다.드디어 1971년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그가 총회장 당선 소감을 말했을 때, 그 어느 총회 때보다 더 회한이 컷을 것이다. 왜냐하면 1959년 9월 모였던 교단의 큰 상채기를 내었던 대전중앙교회(제44회) 현장에 그가 섰지 않은가? 그가 재임했던 제5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타교파(고려파, 기성, 예성 제외) 강단 교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② 제주노회를 복구하기로 하다. ③ 총회신학대학의 이사회(재단과 일반(운영))를 재편하기로 하다. ④ 총회센터를 건립하기로 하다. ⑤ 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공동번역성경을 본교단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하다. ⑥ 대만장로교총회와 일본개혁장로회와는 우호관계를 맺기로 하다. 정규선 목사의 자녀로는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정은숙 권사가 있다. 정 목사는 1990년 11월 17일 88세를 향유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딸 정은숙 권사에 의하면, 아버지 정규선 목사는 공적인 일에는 한없이 엄하고 정의로웠고 원칙에 따른 삶을 사셨으나, 가정에서는 그렇게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였다고 증언했다.(2016.12.29 전화 인터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1-12
  •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완벽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따라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창조하신 뜻대로 역사하시기에 창조함을 받은 생명은 그 모든 삶이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개인과 국가와 일류를 통치하시며 섭리하신 “하나님의 시간”안에서 그 삶이 영위(營爲)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공익성(公益性), 독립성, 영원성, 통일성, 불변성을 알게 함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모든 생명은 그 앞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그리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들은 과거, 현재, 미래로 크게 볼 때 동일하다. 이는 모든 생명들의 삶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들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변함없으시기에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에 따라 종말을 향해서 진행하고 있음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하나님의 시간”으로 삶을 산다. 시편 본문에서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 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는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통치하심과 섭리하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끊임이 없으시기에 믿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가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에 따라 종말을 향해 진행되고 심판을 깨닫고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심판과 종말을 대비하면서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삶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본문12절의 말씀인 여기서 우리는 우선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이다. 여기에 성서가 가르쳐 준 말씀에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예컨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또한 여기에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 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고 함에 주의를 가진다. 여기서 “때”라는 의미는 ① 시간의 어떤 점이나 부분을 말하고, ② 좋은 기회나 운수, 알맞은 시기, ③ 끼니 또는 끼니를 먹는 시간, ④ 어떤 경우, ⑤ 시대, 연대, 그 당시 등을 말하며 시간의 세 얼굴로 ‘시간’ ‘때’ ‘시제’를 말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삶에서 갖는 유일하게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정한 일정한 길이의 그 동안을 시간이라 한다. 또 철학에서 시간이해는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옮아간다고 생각 되는 것, 공간과 더불어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말한다. 하루의 24분의 1을 한 시간으로 하는 ‘동안’의 단위를 알게 한다. “시간”의 개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고대인들은 이미 시간이 상대적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시간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시간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표현하며 ‘카이로스’ 시간은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 시간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 시간이라 한다면 카이로스시간은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 시간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진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 시간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을 말한다. 이 시간은 비록 '찰라'일지라도 구체적 사건 속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시간을 가리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의 의미로 카이로스 시간인 “하나님의 시간”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된다. 바울 사도도 여기에 그 의미를 두고 고후 6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헤어 보면서 ‘카이로스’ 시간으로 이런 삶을 고백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1-12
  • 목회는 쉬운 것이다·17
    한국교회의 문제점 중 중요한 문제는 종교의 틀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틀이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종교적 행사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중예배, 성찬식, 성경을 읽는 시간이라든지 수없는 절기 문화에만 국한하는 이유가 이방 종교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교회가 주일만의 행사와 무수한 프로그램에서 학자들의 주석이나 학문적 틀에서의 교회의 정의와 용어가 이방 종교적 해석이라는 점입니다.목사들은 그 틀만 붙들고 있는 제사장이란 잘못된 인식이 삶과는 관계없이 교인을 몰아붙이는 형식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들의 가슴에서 울렁이며 기쁨과 확신을 주는 예수 생명이 그런 종교적 의식에서 무수히 소멸하고 암 덩어리처럼 굳어 있습니다.우리 자신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일하든 고민하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언제라도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입니다.예수님은 예수의 생명을 자연 비유를 통해 영적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겨자씨, 무화과나무,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 알곡들, 물, 불, 해, 사람, 비 같은 것이나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통해 주님은 설명하셨습니다.회당에서 예수 생명을 학문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예수 생명을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 조용하고 고독한 곳을 찾으신 것입니다.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질문한 그들 속에 이미 있다고 하신 것은 이미 너희 속에 예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예수 생명은 인간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 이미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요구를 순간순간 사람의 노력으로 응답하시는 무속적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미 너희 욕구나 목적이나 정욕의 간절함 이전에 내가 너와 함께 너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종교적 행위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회당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이기 전에 이미 교회 오기 전에 이미 내가 원하는 복을 너희 삶 가운데 주셨으니 주일은 제시가 아니라 감사와 축제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속에 왔다고 하셨습니다.틀에 갇힌 이유는 성경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종교의 틀에 가둬놓고 종교라는 안경을 쓴 채 모든 구절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의 역할을 할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해석해 놓은 소위 학자라는 전문가들의 생각에 의한 해석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는 능숙한 수법이 성경 원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학문으로써 끝내려는 현대 알 만한 지도자들이 하나님과의 순수한 각 개인만이 느끼고 감동될 수 있는 실재를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요한복음 7장 18절에서는 아주 귀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을 위한 것이 곧 학문입니다”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41절에서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심은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뿐이었다는 것입니다.만일 개인별로 다가와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오늘과 같은 수단과 방법에 능숙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하는 아는 사람들의 논리나 증언이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기적 중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은 영적으로 필요한 일을 육체적인 차원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영적 눈이 치유 받으면 성경이 성경으로 바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와의 공동체적인 가장 실제적인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현장에서 겪어야 할 일이며 목회자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방법이었습니다.거 기까지는 제자와 함께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다음 구분이 구속자로서의 고난이나 십자가 지심과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그리고 우리와 40일을 함께 보이시고 승천하신 일은 그분만의 몫이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1-05
  • 기독교인의 행복론 -33
    그 날도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함박눈이 곱게 내리더니 어느새 아스팔트 길이 하얀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지요. 가로수도 그들의 뺨에 눈을 잔뜩 바르고 있었지요. 가끔 싸라기눈이 새때처럼 피어올랐다가 먼 산을 넘어갔습니다. 잿빛 하늘 아래 공항으로 가는 길가의 산들이 하양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미국에서 교통 위반에 걸리면 차창을 열어 놓고 운전대에 손을 올리고 있어야 한다더라. 괜히 손짓을 하거나 움직이면 경찰이 총을 쏠 수도 있대요. 초등학교 앞에서는 절대 경적을 울려서는 안 된대. 교통 범칙금이 장난이 아니래.”나는 운전을 하면서 몇 번이나 U(딸)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실제로 내가 강의하던 대학의 학생은 하와이에서 운전을 하다가 경찰의 정지 신호를 받고 차를 멈춰 따지다가 강도로 오인받아 죽은 적도 있었습니다. U는 미국 미시건주에 있는 M주립대학 근처로 떠납니다. 사위가 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혼해서 두 달을 신랑과 떨어져 있다가 가는 길이어서인지 U는 마음이 착잡한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도 딸과 식사를 같이 했었습니다.“아빠. 내 돈가스도 더 먹어.”미국으로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딸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U가 몇 개월 사이에 무척 어른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얘. 미국 가면 애 낳고 당당하게 살아. 한국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고. 항공비는 염려하지 말고.”“그래도 절약하며 살아야지.”“아빠가 그동안 너에게 섭섭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중요한 건 현재니까, 서운했다면 다 잊어 버려라.”“아니야.”공항에 도착하자 입국장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습니다. 철제 빔 위의 유리 천장에도 눈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위의 공간이 어전지 휑해 보였습니다. 아내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혼자서 훌쩍이자, U도 울먹였습니다. “엄마. 왜 울고 그래.”“그래. 서류는 잘 챙겼지. 미리 들어가서 면세점에서 사 갈 것 챙겨.”U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길에는 앞차의 바퀴 자국만이 선명하게 검정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거북이 걸음처럼 천천히 차를 몰았습니다. 머릿속에는 U가 애를 잘 낳을지, 살림을 잘 할지 등으로 여러 이미지 조각들이 떠다녔습니다. 아내는 차 안에서 코까지 풀어가며 훌쩍였습니다. “똑똑한 사위 만나 잘 살러 가는데 왜울어?”내가 한 마디 거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먹입니다. 사람은 헤어질 때를 대비해서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U가 대학 시절 가끔 엄마 몰래 용돈을 안겨 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주어도 주어도 바닥나지 않는 것이 부모의 정인 것 같습니다. “에이, 차는 왜 이렇게 막히고 그래.”괜히 교통 체증에 짜증을 내 봅니다.“그래도 U를 보내고 나서 막히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U가 갈 때 막혔으면 큰일날 번 했잖아요?”“하긴 그래.”아내가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당신, U결혼식 때 U를 데리고 들어서는 모습이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요? 마치 러시아 근위병이 발을 높게 쳐들고 열병하는 것 같았다니까요.”“내가 그랬어?”“그래서 사돈댁하고 나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U와 사위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거든. 그래야 U가 시집가서 기 안 죽고 살 것 같았어.”집에 도착해서도 아내는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왠지 잠이 안 와서 서재에 들어가서 U를 위해 썼던 시들을 음미해 봅니다. 직장 일을 끝내고 즐겁게 귀가하던 U의 모습이 천장에 아른거립니다. U가 퇴근하면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즐겁게 하였던 나. 가족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던 추억을 떠올리며 혼자서 미소를 지어 봅니다. 아침이 되어 늦은 잠을 자려고 서재를 나오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립니다. “아빠. 나, 잘 도착했어. 수하물 캐로셀에 있던 이민 가방을 옆에 계시던 남자분이 들어 줘서 짐도 잘 찾았어.” “그래. 우리 딸 장하다. 열심히 살아라. 파이팅” 아내도 그제서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납니다. U가 애 잘 낳고 멋있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밖에는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앉고 있습니다. 행복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 U가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1-05
  • 성육신한 예수교회-35
    사람들은 자격을 갖춤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알기위한 방안으로, 학위 유무와 자격 고시 같은 식별 방법을 활용한다. 최근에는 그 사람의 됨됨이나 성향을 알기 위해서 인성 검사나 도덕적 지수를 활용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력을 채용하는 회사로부터 그의 사적인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추적되기 마련인데, 우리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검증되고 채용되었을까? 아마도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기관과 단체, 교회의 지도자들마저도 세속적인 유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복음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훌륭한 랍비를 만나기 위해서 제자 후보생들은 돈 보따리를 들고서 자신의 스승들을 선택하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는 달리, 스승 자신이 훈련 받을 제자들을 선별하여 불러낸 것이었다. 아무런 등록금이나 자격 지침이 없이, 스승만이 아는 식별력에 의하여 채용되었던 것이다. 많은 생도들이 부름을 받아서 선별된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훈련 과정에서 탈락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자훈련을 마쳤다. 신약의 사복음서의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무리 되는 장면이지만, 이 훈련된 제자들이 예수의 바통을 잇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마가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 받는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들은 구원을 받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사유의 은총을 거절함으로 인해서 야기된 정죄는 피해갈 수 없음도 함께 선언된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부여된 권능은,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잡아내고, 독을 마신다 해도 해를 받지 않고, 병인에게 손을 내밀어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 모두에게 확대하였다.마태에게 있어서는, 율법으로 인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옭아맨 유대교의 짐과 죄를 벗겨주기 위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법으로 구원을 주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온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하기 위해서 파송된다. 파송을 받은 이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함께하여 주심을 보장 받는다.누가에게 있어서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예수를 구주로 선포하는 사역이 시작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성령이 임하시자, 하늘로부터 기름부음 받았음이 선포되었고, 그 기름 부음으로 인한 메시아의 사역은 이사야의 예언으로도 확증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서 메시아 사역을 하고 있음을 만인이 곳곳에서 듣고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이 어떠한 말씀인가?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니 나가는구나!’하였다. 누가는 사람들과 지도자들에게, 예수가 이러한 능력을 가진 분임을 천하에 공포함과 동시에, 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도들도 또한, 위로부터 오는 성령을 힘입어서 권능을 갖추어 선포하였다. 누가는 그의 선포와 같이, 성령께서 마가의 집에 모인 회중들 모두에게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역시 권능을 받고,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업적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한다.요한은 어떠하였는가?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세계의 석학들 모두를 포함할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율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사제들에게 까지 해당되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를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는다. 이는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 행위조차도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죄악과 허물들은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서 사유되는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수가성의 여인 같이 온갖 종교와 문화에 혼합되고, 정체성이 혼란스러울지라도, 예수께 나오면, 저는 그 내면에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나게 되고, 황막한 세상이 비옥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 하시자, 그의 제자들에게 오셔서 부활하신 영광의 몸을 나타내 보이시며, 그의 사도들을 파송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하시고,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기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하셨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자라는 자의식을 가졌다면, 훈련된 것만으로는 파송될 수 없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권능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권세 있는 새 교훈’을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숙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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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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