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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직한 삶
    ‘하나님은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성서의 말씀이다(전7:29). 본래(本來)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중에 하나가 ‘정직’이다. 이 마음은 바르고 곧아 정직하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은 세상을 구원하러 십자가를 지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한 삶으로 세상의 삶을 이기시는 순수하고 곧은 삶의 사실(fact) 그대로를 보여 주셨다. 이러한 삶을 삶으로 사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대로 삶을 사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은 거짓된 모습으로 바르지 않는 삶을 산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뜻)를 배반하고 자기의 욕심의 행위대로 사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에 우리는 뱀처럼 재빠르지 말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고 정직한 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실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참과 거짓을 동시에 말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다. 거짓을 상징적으로 배우게 하는 것은 뱀이다. 뱀에게는 두 갈래의 혀가 있다. 두 갈래 혀를 가지는 것은 한 입으로 참과 거짓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이는 참과 거짓이 동시에 존재한다. 예컨대 서부개척기의 혼탁한 미국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덕적 수양을 들고 나온 벤저민 프랑크린(1706.1.17-1790. 4.17)은 미국철학협의회의창립과 미국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잡은 그는 정치, 사회, 과학, 문학 등등의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한 삶에 대하여 원칙’을 세우는 그의 슬로건은 “최상의 정책은 정직”이라 한 말이 요즘 우리 사회의 삶의 정황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니게 한다. 그 예로서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이 미국의 처음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마음의 태도는 “정직함“의 실천에 있었다. 조지가 어렸을 때 자기 집 마당에 벚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 한그루 나무를 호기심에 가득찬 마음으로 자기 도끼가 잘 드는지? 안 드는지? 매우 궁금한 끝에 조지가 힘껏 내리치자 벚나무는 금방 쓰러졌다. 이에 당황한 조지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한참 후에 아버지가 돌아와 보시고 화가 치민 아버지에게 조지는 그 현장에서 숨김없이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말하고 잘못을 구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여기에서 그의 솔직하고 진솔한 사정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당장 웃으시며 ‘솔직하게 말해 고맙구나!’ “너는 정직한 아이로구나”하시며 그를 용서해 주시는 칭찬을 듣게 된 이후 그는 삶의 지표를 ‘정직함’에 두었다. 옛날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정직함’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1789년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의 승리로 독립한 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은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제2대 대통령만하고 법에 따라 권유하는 3선을 하지 않고 물러나서 세계 최초의 자연스러운 권력 승계가 이루어졌고 이 전통이 세계 모든 나라에 귀감이 되는 민주주의 체제를 이룩하여 세계가 우러러 보는 오늘의 최강대국이 되었다. 지난 우리나라는 1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농단’ 파문에 대하여 눈물로 참회하는 모습을 시청하게 되었다. 이는 모든 국민들이 절감하게 느끼는 것은 “정직은 최상의 법”이라고들 한다. 또한 성서의 시편12:1-8에 보면 오늘의 우리나라의 꼴을 장하게 표방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여기에 지도자는 바로 공정한 법으로 악한 사람으로부터 선한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어 선한 사람을 압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제는 삶의 근본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를 알게 한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삶의 바탕을 이루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삶은 보이기 위해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최선을 위해 ‘정직한 마음으로 그 삶을’ 그대로 삶을 나타내서 사는 것이다. 정직(正直)은 사실이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참’으로 ‘바르고’ ‘곧장 진실’만 있고 거짓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 정직해야 할 이유를 성서의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는 곧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할 까닭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중에 하나가 ‘정직’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1-24
  • 목회는 쉬운 것이다·12
    성경이 삶의 유일한 표준임을 믿는 신앙운동은 2011년을 정점으로 하여 교회 지도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백일하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 대단히 중요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이 발표됐습니다. 선언문 중 바른 신앙운동, 바른 신학운동, 영적 생명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 기도운동, 성령운동 그리고 나눔운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찾는 것이 개혁주의생명 회복을 위한 의미였습니다.우선 미국에서 대형교회를 했던 짐 팔머라는 목사가 얘기한 담임목사로서 봉사하면서 후회스러웠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그는 교회는 세 가지 수준에서의 기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명분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는 일.둘째, 공동체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돕는 사람들의 모임. 셋째, 기업성입니다. 지불해야 할 청구서, 맞추어야 할 예산, 유지보수해야 할 건물, 운영해야 할 프로그램, 유급 직원을 갖춘 조직 등.교회는 명분과 공동체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는 사실인데, 그러나 교회가 기업적 측면이 실용적인 필요성과 효율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는 일이 가장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교회적인 사명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목회 성공의 기준은 크기(출석률, 예산, 건물)가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므로 기업화되어 가는 모습입니다.담임목사로서의 자존감(신학, 학위, 계급체계)이 상위석이라는 허영심으로 불일 듯 일어나는 모습입니다.숫자에 집착하고 교파적 자존감과 리더로서 자질만을 위해 컨퍼런스나 세미나, 성장의 과정성에만 매이고, 연구 또는 봉사나 겸손의 순수성은 계속 상실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예배 출석 인원은 얼마인가?◦ 주일학교 아동의 수는 얼마인가?◦ 소그룹 참여 인원은 얼마인가?◦ 직원 수는 얼마인가?◦ 헌금은 얼마인가?◦ 교회 건물은 얼마나 큰가?◦ 주차장은 얼마나 넓은가?◦ 부지는 얼마나 넓은가?◦ 성공의 본보기인 세미나와 간증으로 얼마나 유명한가?이와 같은 기업적 측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목회성공이요, 교회성장이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영적으로 성장하고 공동체와 명분의 기능으로 진정한 교회 상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현대교회의 목회자가 바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이와 같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과잉보호와 시스템에 적응시키고자 훈련된 목사와 직원들의 감시가 교인들의 영적 탈선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마치 이단과 같은 빈틈 없는 조직에 신자들을 얽매이게 하여 진정한 순수한 예수님과 하나 됨에 대한 자유를 상실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결국, 목회자의 개인적인 체면과 자존감과 생계 및 교회 유지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달렸다는 기업적 사고가 신자들의 참여와 지지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이와 같은 상태에서 목회자로서 진정한 도를 벗어나게 되고 마치 조직에 대한 참여가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프로그램이 행사 중심(절기, 축하, 감사, 임명, 기타), 성경 공부(프로그램 교재 중심, 성경적이 아닌), 헌금 강조(수많은 제목), 필요한 자리 채움, 교회 위원회 활동(소그룹, 갖가지 모임), 방문자의 끊임없는 방문, 애쓰고 땀 흘리는 것과 천국 간다는 조건부터로….결국, 목회가 추구하는 목사의 기업적 방향에 의한 모임 중심이 옳은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이와 같은 목회방향에서의 결과는 예배와 성경 공부, 프로그램, 소그룹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끝나면 다음 모임 때까지 아무런 교제가 없이 관계도 끝나버리는 것입니다.현대 목회자가 순수한 신자들의 자유로움의 신앙적 방향에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한 몸으로서 머리와 지체의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분명히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1-1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29
    김동인의 수필 「내 작품의 여주인공」(<조광>, 1939.4)을 보면 세 가지 유형의 여성이 나옵니다.첫 째는 고등한 교양과 배려의 소유자로서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데서 자기 만족과 환희를 얻고, 남편을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를 인격적으로 존경케 하는 유일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부부의 본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여성입니다. 그야말로 남편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존경함으로써 아내로서의 만족과 진정성을 얻는 여성이지요.둘째는 쾌활한 처녀로서 “천진하고 명랑하고 쾌활하고 열정적인 처녀의 타입으로 이성을 사랑하는 경우일지라도 정열적으로 독점욕으로 猛炎식으로 사랑하지 상대자의 감정의 움직임까지 고찰할 여유를 잃는 狂熱적 소녀 타입”입니다.셋째는 “몰아적이요, 인종적이요,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는 어떤 고초를 겪을지라도 불평을 품기는 커녕 이 고초로써 환희를 느끼며, 비의식적이며 비자각적이요 비이기적으로 全我를 들어서 ‘그’에게 맡기고 일호의 我慾을 세우려지 않는 여성”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 헌신하는 여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김동인은 실제로 첫째와 둘째 유형을 실제로 아내로 맞이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 유형은 김동인이 첫 번째 아내가 일본으로 가출한 이후 맞은 김경애 여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녀는 평남 용강군 오산면 출신으로 그와 열한 살의 나이차가 있으며, 평양 군악의 의명학교와 숭의여중을 나온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한 후 아주 가정적인 가장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김동인이 가족들을 데리고 창경궁에 놀러가는데, 비가 많이 온 뒤라 땅이 질척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들들에게 자신이 디딘 발자국을 밟고 오면 신발이 더럽혀지지 않을 거라며 앞장서서 걸어갈 정도로 자상하였습니다. 그가 김경애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그의 모친 옥씨의 영향이 컸습니다. 옥씨는 남편이 사망하자 열여덟 살의 김동인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하였으며 손톱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넥타이핀을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김동인이 김경애와 결혼하여 잘 산 것은 바로 김경애 여사의 성격이나 외모가 옥씨를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대체로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본 엄마를 닮은 여자를 아내로 취한 경우가 많은데(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합니다), 김동인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둘째 유형은 김동인의 첫 번째 아내 김혜인과 닮아 있습니다. 그녀는 평양 육로리의 수산물 도매상의 딸로서 매우 명랑하고 쾌활하였던 것 같습니다. 김동인의 「배따라기」(1921)에 나오는 여자가 바로 이에 해당하지요. 시동생과 마을 청년에게 활달하게 대하니까 주인공이 질투를 할 정도지요.셋째 유형은 김동인의 『젊은 그들』(1930)에 나오는 ‘연연이’ 같은 유형으로, 남편에게 매우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여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현 대 사회에서는 이들 유형이 바로 우리 주변의 여인들에게서 나타나지요. 바로 여러분의 아내들을 한 번 눈여겨 보십시오. 현숙하고, 쾌활하지 않습니까? 다만 세 번째 여인 유형은 과거 조선조 여인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타입이지요. 중요한 것은 남편들이 아내의 좋은 유형을 발견하는 데 있지요. 아내가 남편에게 내조를 잘 하며 부동산을 현명하게 관리하고, 현숙하게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동호인들과 활달하게 지내는 것은 바로 현숙하고 활달한 유형에 해당할 겁니다. 그런데 멋있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입니다. 바사제국이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던 아하수에로왕 때에, 유다인 모르드개의 조카인 에스더가 왕후가 되지요. 모르드개는 왕의 내시인 빅단과 데레스가 역모하려는 것을 왕에게 알린 인물이기도 하지요. 그때 지위가 대신들보다 높던 하만이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하여 바사 제국에 있던 유다 사람을 멸하려 하니까,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를 에스더에게 알리지요. 이때 에스더가 기지를 발휘합니다.“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스더> 5:1-3)이와 같이 에스더가 왕의 신임을 얻어, 하만과 그 아들들과, 유다 민족을 멸하려는 자들을 제거하지요. 에스더의 지혜는 위기에 처한 유다 민족이 생존하게 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에스더에게 주어진 지혜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1-10
  • 성육신한 예수교회-30
    한해 전인 것 같다. 전국 규모의 목회자 세미나가 한 곳에서 열렸다. 한 연사가 나와 자신의 목회 성향을 말하게 되었는데, 자기 자신은 신도들에게 은사활동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 부흥과 성장이 마치 개개인의 은사활동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란 말처럼 들렸다. 요한복음에서 저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의 전인(全人)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선포하였다. 요한은 이 예수의 말씀에 주(註)를 붙여서 이르기를, 이 생수는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개개인이 받는 ‘성령’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를 점검하여 보면, 신도 개개인이 영적이면서 스마트하게 판단하는 결정 능력이 부재하다. 이는 우리교회의 구조가 예수교회 이전인 모세교회의 구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교회의 시스템에서는 비전을 보고, 음성을 듣고, 결단하는 이는 한 사람이다. 오로지 그 한사람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중세기의 왕권신수설을 빼닮은 꼴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임무와 자격을 받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이 특화된 지도자를 따르기만 하면 되기에, 매우 간편하고 쉬운 구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는 지도자가 모두 책임을 지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의 교회는 이미 유대교에서도 문을 닫은 지 오래이다.주후 70년부터 유대교조차도 이러한 피라미드교회를 신속하게 탈피하였다. 유대교회는 얼마나 스마트하게 발전되고 진화하였던지, 유대인 개개인이 경전을 외우고 실천할 수 있는 제자로 훈련된다. 예전부터 유대교회는 국민 모두가 모세오경을 점하나 틀리질 않게 외워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지켜왔다. 그 중에서도 랍비 가족은 시편이나 전도서를 더 외워서 매일같이 낭독한다. 이들이 제자를 삼은 국민 개개인은, 언제 어디서나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데에 게으르질 않았다. 시문서나 선지서(사 2:3; 미 4:2) 등에서도 ‘율법’과 ‘말씀’을 서로 교차하며 사용하는가 하면, 탈굼에서는 이미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를, ‘말씀을 맞으려고’로 바꿔서 사용한다(출 19:17). 개개인이 경전을 낭독하고 토론하고 학습하면서, 모세가 야훼하나님의 구름기둥(쉐키나) 가운데에 섰던 것처럼, 국민 개개인을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듯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과 경건의 효과로 인해서 이들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들은 허다하다. 노벨상에서부터 과학기술과 경제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선두자리를 내어주질 않는다. 저들은 크고 화려한 성전 대신, 한 사람 개개인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는 성소를 수없이 세운 것이다.그런데 우리 한국개신교는 칼뱅의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하면서도, 신학이나 시스템이 500년 전보다도 퇴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이 나 혼자뿐일까?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신도들에게 지성소를 개방하질 않고 있다. 신도 스스로가 지성소에 나아가고, 신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있고, 신도 개개인의 배에서 성령의 강물이 넘쳐흘러서, 메마른 땅을 적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두려워서 지성소를 독점한 것이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독점되었듯이 성령도 독점된 것이다. 모세교회에서 제공하는 달콤함은 얄팍할 뿐이다. 중앙 성전에 사람들이 붐비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서서 설득력 있는 강연을 하면, 두드러지게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다. 이 경제력이 얼마나 위력이 있던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만용마저 일으키게 된다. 지도자가 이런 상황에 최면이 걸리게 되면, 그는 주검을 맞이하기 전에는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나질 못할 것이다.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하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우리 개개인을 그의 품안으로 초대한 것이다. 이 소중한 초대를 받은 크리스천 개개인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담임목회자들은 지성소의 길을 막을 것이 아니라 열어줘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쏟고, 빛을 비추셨기 때문에, 저는 맏아들이 되시었고, 우리는 주님의 형제들이 된 것이다. 주님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고, 요한이 그 사랑하시는 주님 품에 늘 기대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신도들에게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터 주어야 한다. 그래야 신도들 스스로가, 야훼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생수를 강 같이 세상에 흘려보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1-10
  • 62. 제47회 총회장 이환수(李煥秀) 목사
    황해도 안악 출신이환수(李煥秀 1909.2.8~1985.6.30)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안곡면 복삼리에서 이기범과 김의성 사이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먼저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가 태어난 안악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역이어서 그들이 세운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를 다니며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받게 되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에 입문하였다. 이 때가 1924년의 일이었고, 1932년 부터는 광흥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다. 이환수는 당시 곡창지대였던 대원면에서 쌀을 배에 싣고 진남포까지 왕래하며 사업을 하였다. 후에 안악군 안동면 장월리에 월산소학교(月山小學校)를 설립하고 친히 그 학교에서 몸을 담아 봉사하였다. 이때 성경과 쪽복음을 팔러 다니며 전도하던 어느 권서의 중매로 김익성을 만나 결혼하였으며, 아내와 함께 재령교회 부흥강사로 온 성결교회 이성봉(李聖鳳) 목사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다. 이듬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이환수는 주중에는 신학교에서 신학훈련을 받고 주말에는 안악군 대원면에 위치한 원동교회(元洞敎會, 1918.3.3 설립) 전도사로 시무하며 주의 종의 길을 걷고 있었다.1942년 5월 20일 황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46년 6월 공산당의 박해로 월남하기 전까지 황해도 황주군 흑교면 용현리 용연교회(龍淵敎會 1896 설립)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이환수 목사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성품은 그의 목회 형태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하에서 일경의 요시찰인물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고, 그는 기독교 사상가로, 신사참배 거부로 그들의 눈을 피해 피신하기도 했다. 월남 후에는 서울 원효로에서 피난온 북한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친히 덕영학사(德英學舍)를 설립 운영하며 조봉화 목사, 황금천 목사, 박찬목 목사, 허간 장로 등이 동우회 회원으로 함께 운영하였고, 당시 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덕영학사에 몸담고 있던 100여명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구호물자를 지원받았다. 한편 이환수 목사는 서울 도화동에 청소년교육을 위한 소년관(少年館)을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다. 평양신학교 졸업청파동에 청암교회 설립정통신앙과 개혁주의 신앙 보수6.25 전쟁으로 제주도서 피난민교회 세워장로교 분열 당시 NAE 보수진영 사수이환수 목사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여 오늘의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97-32에 청암교회(靑岩敎會)를 설립, 한평생을 한 교회에서 성역을 감당하였다. 광복 후 혼란기에 처해 정국이 어수선하던 1948년 9월 19일 청파동에 한국교회 보수신학의 이정표이자 보수신앙의 산실 역할을 할 청암교회가 이환수 목사에 의해 주춧돌을 놓았다. 청암교회가 설립되게 된 계기는 그 해 6월 3일 서울 남산 마루턱에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열고, 이환수 목사가 상무이사로 있다가 김창복 목사의 주도로 천막을 치고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청암교회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다음해에 같은 청파동 1가 97번지 32호 위치에 예배당 건물을 짓고 비로소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청암교회가 정식 인정된 것은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경기노회 제6회 정기회에 교회설립 청원서를 내고 허락을 받음으로 정식교회로 등록되었다. 청암교회의 설립 취지를 청암교회5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p.27~28참조). 첫째 이 교회 저 교회로 방황하는 월남한 교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며, 둘째 당시 청파동엔 교회가 없었음으로 복음전파를 위하여서였고 셋째는 당시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 등을 위시해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몰려와 신앙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통보수신앙 수립의 필요성이 대두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청암교회가 설립되는 동인이 되었다. 당시 교계 분위기와 청암교회 설립 목적을 더하고자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고 했다. ① 성경의 유오성을 주장하거나 모세5경을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거나, 사도신경을 불신하는 신자는 본 교회 강단에 세우지 않을 것. ② 여사(如斯)한 신학교와 신학사조와 유사한 단체와 개인에게는 원조를 하지 않기로 하다. ③ 여사(如斯)한 신학지원자에도 본 당회로서는 추천을 하지 않기로 하다. 이렇게 처음부터 청암교회는 정통신앙과 개혁주의신앙을 고수하면서 진리를 보수하는 교회로서 예배와 신앙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초창기부터 갖은 어려움을 감수할 각오로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와같은 최전선에 북한에서 월남한 이환수 목사가 선두에 서 있었고 배후에는 당시 장로회신학교를 이끌어 가고 있던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청암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박형룡 박사와 이환수 목사는 동향이기도 하였다. 어렵게 자리를 잡아가던 청암교회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본의 아니게 문을 닫고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환수 목사도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난민들은 처음엔 서북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제주의 삼도리에 피난민교회를 세워 대한예수교장로회 피난민제주읍교회라 이름을 정했다.한편 피난민 가족들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성경구락부(Bible Class)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엔 성경구락부를 개편하여 제주피난민국민학교를 설립했다. 1953년 9.28 수복으로 서울로 귀향하게 되어 허물어진 교회를 복구하고 흩어졌던 교인들로 한 둘 모이게 되고 수도탈환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되자 이환수 목사는 서울과 제주를 오르내리며 두 곳의 청암교회를 이끌어 가느라 수고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환수 목사의 청암교회 설교는 주일설교 때마다 눈물로 표현되는 메세지가 늘 감동적으로 교인들 가슴을 움직였다. 이는 마치 1930년대 눈물의 사자로 통했던 감리교회의 이용도(李龍道)가 겨레의 비운과 참담한 시련 속에 가슴이 메이면서 요양차 갔던 고향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고 말없이 흐느끼고 눈물로 설교를 대신했던 심정과도 같이, 달리 언어의 분석이 없어도 통할 수 있었던 백의민족의 설음을 눈물의 통로로써 가능케 했던 것처럼, 이환수 목사의 메세지가 그래서 감동적이므로 청암교회 교인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교향산천과 가족들을 북에 두고 온 이산의 슬픔을 안고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피난민들의 서글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위로와 치유의 역할을 그의 설교가 큰 감동을 준 것이었고, 또 한 가지 이환수 목사의 목회철학 가운데 하나는 복음전도자 그 중에도 교회안의 여성지도자 양성이었다. 그는 월남직후부터 청암교회 안에 한국여자신학교를 설립해 여성지도자를 계속 양성한 것이다. 1959년 5월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에서 분열의 고통 속에서도 이환수 목사는 W.C.C 에큐메니칼 진영에 서지 아니하고 박형룡 박사와 함께 N.A.E 보수진영쪽에서 교회를 지켜냈다. 이환수 목사는 1948년 9월 교회설립에서 부터 1982년 8월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오직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숨가쁜 목회자의 길을 달려 왔다. 청암교회가 경기노회와 총회 안에서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기까지는 청암교회 역사의 뒤안길에 이환수 목사라는 거목이 버팀목이 되어 왔음을 청암교회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교정(敎政)에도 크게 기여했다. 1957년 황해노회 교직자회 회장을 비롯해, 1958년 3월 경기노회장, 1959년 한국 복음주의연합회 회장, 1948년 3월 총회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1961년 9월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에 피선되고, 이듬해 1962년 9월 20일~24일 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7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어 교단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 이환수 목사가 재임했던 총회 중요 결의사항을 살펴보면, ① 총회 설립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다. ② 경북노회를 분립하기로 하다(경북노회와 경청노회). ③ 파숫군 잡지를 신학교 기관지로 하여 간행하기로 하다. ④ 신학교 교장은 1년씩 윤번제로 행하기로 가결하다. ⑤ 미조직 교회에서 강도사를 임시목사로 청빙할 때 안수하여 허락할 수 있다. ⑥ 1962년 10월 말경 고신측이 환원해 나가다. ⑦ 예배시간 중 기도와 설교시 사진촬영과 강단에 등단하여 촬영하는 것은 금하기로 가결하다.이환수 목사는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노년에 이러르러서는 자녀들 가정에서 기거하다가 1985년 6월 30일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그의 장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치루어졌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1-10
  • 최고의 삶의 가치
    오늘의 인류는 생명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나온 20 세기 이래로 인류의 삶을 지배해 온 문명은 인간과 자연 의 생명 권리를 빼앗아 갔으며 더 나아가 후생들의 생명 권리까지도 빼앗아 간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고 또 인류의 삶에 지대한 유익을 끼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발전에 바탕을 둔 산업화로 말미암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인류와 지구 온 생명체의 생존에 위협을 주고 있음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은 신대륙을 찾아 산업혁명 등에서 계속적 인 추진력이 되어 왔기에 밴자민 프랑크린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 서구인을 보게 하면서 “바르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은 거기에 따른 의미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대륙 발견 후에 산업혁명 등에서 계속적인 추진력이 되어 왔으며 그는 삶에 “정직은 최상의 정책”이라는 말을 한 점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를 살다보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정직과 성실 등의 전통적인 모럴로서는 불가능하여 오늘의 삶의 구조는 융통성과 유연성이 더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는 삶에 실제로 실리주의 사고방식으로 살게 된다는 현실의 삶에서 이를 알게 한다. 즉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생활을 하다보면 정직과 성실 등은 바보들이나 사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추세로 살다 보니 여기에서 신앙이나 가치관 등은 도외시 되는 경향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신학자요 신앙가인 ‘본 훼퍼’는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만들어졌기에 절대자를 찾는다.”고 하면서 “인간은 구원받기에 충분하고 그 믿음으로 생명을 산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 사회의 절대적 가치는 근대화를 탄생한 서구 문명의 정신적 바탕을 생명의 그 역사를 보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그리스 그리고 로마 생활의 삶을 알게 한다. 이 두 가지 정신적 조류는 서 로 상극하면서도 서로 융합되어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서구인의 정신계를 풍요하게 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와 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기점으로 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자기 삶에 사명감으로 생명의 삶을 살게 한다. 이는 곧 서구 문명의 윤리기반이 됨을 주목하게 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만들어졌기에 절대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서는 인간이 구원받기에 충분하여 진리로 통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연계의 힘에 순응하거나 부딪히며 문명을 발전 시켜왔고 과학 등의 발달로 힘이 더 생기자 착취로 나아간 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생명의 삶에 문제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진화론자의 말을 빌리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되었다. 그러나 성서는 모든 피조물이 이런 구속(회복)을 신앙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중세기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도 모든 사람은 신앙을 행동규범의 초석으로 삼아왔다. 여기서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위 정신”에서 역설했듯이 종교개혁은 근대 자본주의 제도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칼빈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교리는 경제인들에게도 자기 직업을 하나님으로 부터 일시 위탁받은 청지기의 관리관을 갖게 함으로써 이런 신앙적 사명감과 금욕주의 위해 근세 자본주의제도가 발달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근대화를 탄생한 서구 문명의 정신적 바탕을 한 절대적 가치에 그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그리스 그리고 로마철학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두 가지 정신적 기류가 서로 상극하면서도 서로 융합되어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서구인의 정신계를 풍요하게 했다.이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와 그로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기점으로 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게 한다. 이것은 서구문명의 기본적 윤리가 됨을 알게 한다. 오늘의 인류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죽을 때 까 지 삶을 누리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을 위해 누리고 산 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의 목적을 가지고 올바른 생명 관으로 이웃과 그리고 자연의 피조세계와 더불어 사는 생명관도 중요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1-10
  • 61. 제80회 총회장 정석홍(鄭錫弘) 목사
    평북 철산 출신정석홍(鄭錫弘 1926. 1. 10~2000. 5. 12)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본인이 남긴 회고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그가 태어났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는 일제의 감시와 조선수탈 작업이 한창이던 이 땅의 유소년들과 청년들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암흑의 시기였다. 제대로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 시설이 없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계통의 학교나 한문교육을 받았던 식자(識者)들이 운영하는 사숙(私塾), 유림(儒林)에서 운영하던 서원(書院) 교육이 고작이었을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나마 석홍이 태어난 지역은 일찌기 미국 북장로회 평양선교부의 관할지역이라 철산지역에 세워진 장로교계통의 교회에 부속된 학교와 주일에만 열리는 교회교육을 접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정석홍은 1948년 4월 광복을 맞이했으나 남쪽과 북쪽 지도자들 사이 이념 대결로 혼란에 혼란을 겪던 와중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월남)하게 되었다.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면서도 공부하겠다는 의욕이 강해 1956년 서울 남산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한 후, 1957년 경북 상주읍에 있는 부원교회(상주시 부원동 273)에 부임, 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해 가을 경북노회에서 장로교회 목사로 장립받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13권 p.1534엔 경서노회에서 안수받았다고 기록했으나, 당시엔 경북노회로 부터 경서노회로 분리되기 전이었다). 해방 후 남산 장로회신학교 졸업경북과 대구지역에서 목회서울 대현동 신현교회 두 번 부임전교인 말씀 훈련에 중점 목회 무료신학교(신천지) “신앙적 가치없는 집단” 규정1960년에 대구시 범어동에 있는 대동교회의 부름을 받아 상주에서 대구로 임지를 옮겼다. 다시 1963년에는 대구시 중구에 있는 대구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대구 중앙교회는 1959년 교단분열 파동에 휩싸여 중립을 선언해 교역자가 바뀔 때마다 한번은 예장합동에 소속, 다음 교역자는 또 예장통합 소속 목사를 모시는 것이 관례화 되어 내려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분립 당시 당회원들이 은퇴하게 되자 젊은세대 장로들이 예장통합으로 귀속하였다. 젊은 목사 정석홍은 그동안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여의치 못해 못다했던 공부를 하기로 결심, 대구시내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당시 미국 북장로교 재단에서 세운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 문과대학) 지리역사 학과에 학사편입하여 사학(史學)을 전공하고 문학사(文學士)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중국국제신학원(中國國際神學院)과 미국 아칸사시에 소재한 리틀 록라이트하우스 재단에서 운영하는 크리스챤칼리지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도 받았다.정석홍 목사는 단신으로 월남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남한의 예루살렘 대구에서 10여년의 목회사역을 접고, 1966년 3월 수도 서울 대현동 한국의 명문 여성교육의 요람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가까이에 있는 신현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동안 대구지방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과묵하고 성실하고 파워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고, 국내외 초교파 부흥사로서도 꽤 유명한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 목사는 신현교회에서 두 차례나 담임목사로 부름받은 행운의 목회자이기도 하다. 첫번째는 1966년 3월에 부름을 받아 사역한 15년 간의 기간이고, 두번째는 미국에서의 이민목회를 하던 중 다시 청빙을 받은 1981년부터 그가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은퇴한 1996년 12월까지 후반 16년, 도합 31년간 목회한 것이다.그가 신현교회에 두번째 부임하게 된 배경은 정 목사가 미국으로 떠난동안 몇분의 실력있는 당회원들이 이민으로 교회를 떠나고, 또 교인들 일부가 교회에 불만을 품고 교회 분립을 선언하고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져, 교회가 수습이 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진 가운데 다시 자기가 시무했던 교회로부터 재청빙을 받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신현교회에서 정 목사의 전반부 사역은 교회신축이었고, 후반부 사역 역시 교육관 건립을 위한 대지확장과 건축비 모금으로 또 한번의 큰 역사를 이루었다. 그의 후반부 목회활동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것을 정리해 보면, 교회성장을 위한 총동원주일 실시와 40일 다락방 새벽기도회와 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한 금요철야기도회, 해체되고 없어진 여전도회 재건과 기드온 신앙운동과 매년 개최한 전교인 여름수련회, 교회의 다음세대 육성을 위한 신현유치원을 설립(1985년 3월 11일 개원)하여 교인들 자녀들뿐 아니라,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선교적 차원에서 지역의 어린이들까지 입학할 수 있는 교육봉사 사역을 펼친 것이다.재부임한 후 교회는 안정을 되찾아 갔고 교인수도 늘어 2부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발 맞추어 교회의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겠다는 목회철학을, 정 목사는 교인들에게 말씀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월간 목회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크로스성서대학(Cross Bible College)과 한국루터교회 총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신·구약성경을 구속사론적인 입장에서 가르치는 벧엘 성서대학(Bible College) 과정을 교회에 도입, 전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경말씀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먼저 교역자들이 해 기관에서 진행하는 지도자 과정에 등록연수를 받은 후, 1987년 2월부터 전 교인들 대상으로 개강하였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기 실시했던 부흥사경회의 재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막연한 심령부흥회가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라는 말씀처럼, 정 목사는 모든 성도들 마음 속에 성경말씀을 아로새기는 작업을 진행했다.말씀을 귀로만 듣고 잠시 후엔 잊어버리는 바람같은 부흥이 아니라, 음식물을 음미하며 꼭꼭씹는 것처럼 성경말씀을 가슴깊이 생기는 사경(査經)에 촛점을 둔 교육과정으로 벧엘 성서대학과 크로스 성서대학 과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 과정을 전 교인들에게 단계별로 실시한 결과 온 교인들의 삶과 봉사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이같은 결단과 실천계획은 아마 자신의 목회와 부흥사로서 겪고 얻은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였다고 본다. 당시 신현교회는 두 번의 교회분열이라는 아픔에서 벗어나는 계기이기도 하였고, 정 목사의 성역 4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이기도(1988년 9월 28일) 했다. 1999년 11월 11일 정 목사는 은퇴를 앞두고 신현교회 원로로 추대되었다. 그는 교정(敎政)에도 신현교회 부임 이후 서울노회 노회장,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회장, 교단지 기독신문 실행이사,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기독교TV 이사(CTS),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94년 9월 27일 대구 동부교회에서 모인 제79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95년 9월 19일에서 22일까지 서울 논현동 충현교회(당시 김창인 목사 시무)에서 개최된 제8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인 총회장에 피선되었다.그가 재직했던 제80회 총회의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21세기 교단부흥발전기획단을 구성하기로 하다. ② 당시 유행했던 소위 무료신학교(대표 이만희)를 일고의 신학적, 신앙적으로 가치없는 집단으로 밝히기로 하다. ③ 각종 주일실시를 폐지하고 연1회(5월 첫 주일)을 총회주일로 실시키로 하다. ④ 미주총회와는 우호관계를 증진토록 하다. ⑤ 미조직교회도 안수집사를 세울 수 있는 것으로 가결하다. ⑥ 선교사의 이중 교적(소속노회와 현지노회)은 불가하지만 선교후원금은 계속 지원하기로 하다. ⑦ 어린이 찬송가 증보판 발간은 허락하기로 하다. 정석홍 목사는 슬하에 1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들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돈독한 신앙인으로 국·내외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 목사는 신현교회를 마지막으로 사역을 마치고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L.A로 가서 자녀들과 함께 노년을 보내던 중 2000년 5월 12일 74세의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주관으로 총회장(總會葬)으로 마지막 예를 갖추었다.※본란 제1057호(2016.10.2) “제88회 총회장 손계웅 목사”는 제53회 총회장으로 바로 잡습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1-02
  •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사랑 2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 로서의 인정받고 있다는 점은 정한 이치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로 인정받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즘’의 근간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체의 파악, 형제애, 범노동, 비폭력, 폭력 혁명에 대한 무저항, 범세계주의, 네 복음서에 기초를 둔 원시(原始) 그리스도교의 확립, 평화주의, 사유 재산의 부정, 모든 문화, 문명, 과학과 예술의 폐기, 국가와 그 모든 제도, 특히 교회의 기피이다.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신학이나 과학, 철학, 문화, 인류학의 기본적인 물음으로 인간의 내적인 구조와 가치에 대한 의문으로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다. 여기에 인간의 삶의 구성 요소는 무엇이고 사람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 여기에 일반적으로는 ‘영혼(靈魂)’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영’과 ‘혼’, ‘육체’의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인간은 물질적 요소인 ‘육체’와 비물질적 요소인 ‘영’ 그리고’혼’도 그 구성함을 말한다(창2:7,마6:25,고전5:3,5).이는 창조시 혹은 잉태시부터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으며 죽음을 통해서만 갈라진다. 이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 혼이라는 것은 영혼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영혼의 한 속성으로 보며 혼을 인간과 동물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적용함으로 ‘혼’과 ‘영’이 동일한 표현으로 보여 준다. (전3:21, 사42:1, 렘9:9) 다만 인간의 영, 혼은 짐승의 ‘혼’과 질의 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짐승의 혼에는 단순한 의식, 기억, 정신은 있지만 하나님의 속성인 고도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없으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이성과 양심과 불멸성은 없다. 여기서 아는 것은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불멸의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은 육이 죽어 썩어 없어질 때에라도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어 마음에 찔림을 받는 가책(呵責)을 갖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삶은 죄에 의해 양심의 고통을 당하는 생활을 한다. 양심의 고통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에서 용서를 받는다. 마치 빚진 자가 모든 빚을 탕감 받고 그 채무로 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과 같은 진리의 길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삶의 영이 살아난다.우리에 정신인 생각, 지식이 나의 영보다 높아지면, 영으로서 신령한 생명에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혼(魂) 속의 나를 부인(否認)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도 구원된 삶을 살게 된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에 일을 생각(혼)하나니 내 속에서 영을 따르려는 생각을 가질 때 내 안에서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영적 전투를 할 수 있는 것(롬8:5)을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6절에서는 “육신의 생각(혼)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영생)과 평안이니라” 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육신은 혼에 무조건 따라 간다. 그러므로 혼이 영에 순종치 못하면 자기 생각이 높아 영의 소욕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만이다. 사도 바울도 이 교만 때문에 “세상 것과 율법과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함을 알게 한다. “양심과 영혼의 삶”을 살려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요한복음은 말씀하신다. 모든 만물은 심어 거두는 하늘의 이치를 터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썩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육의 소욕은 옛사람으로서 껍질에 불과 하다. 혼에 의한 몸의 소욕일 뿐이다. 혼 (마음)에 의해서 몸은 움직인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란 주 앞에서의 내가 죽어질 때 성령님이 주시는 영으로 자라서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한다. “영에 소욕과 육신에 소욕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 사랑”을 하는 것이지 자기의 힘이나 소유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1-02
  • 성육신한 예수교회-29
    교회 밖에서 교회를 들여다보는 세인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져버린 지 오래이다. 요즈음의 교회는 교회 자체에서도 칭의론을 의심하는 신학이 고개를 드는가 하면, 외형적으로는 교인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내적으로는 신앙의 정체성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추세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증상은, 개 교회에서 실망을 느낀 나머지 좀 더 나은 교회로의 수평이동이 일상화 되었고, 교회에서 교회로 이동하는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교회에 몸담고 있어야 할 뜻마저 잃은 듯, 더 이상 교회에 소속하질 않는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예수가 등장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이 나타나게 된 동기는, 더 이상 사제들을 신뢰하는 풍토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의 사제집단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 쿰란으로 나갔을 뿐 아니라, 이집트로 내려가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키고, 시민들을 응집 시켜서 경건생활에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치적인 불안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부문에서 심한 피로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요한이 나타나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자,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나가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항상 시민들을 씻기고 거룩하게 하는 종교 전례와 의식이 항시 치러졌지만, 시민들은 이에 만족하질 못하고, 요단으로 몰려가 요한에게 세례와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사제들은 이와 같은 돌발적 운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들어나게 세례요한을 박해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그가 군중의 지지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들과 예수와의 논쟁에서(막 11:30-32), 사제들이 군중들 앞에서 세례요한을 적대시 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타락하고 흔들리면 이렇게 외적으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민을 씻기고 사죄 선포를 하는, 기성 권위와 능력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은 이뿐 아니었다. 예수께서 공공연하게 성전 마당에서, 사제들이 성전제사를 위해서 들고 다니는 기물조차도 금하였고, 환전상들의 상과, 제물을 사고파는 현장을 뒤집어엎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놈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이 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동안에 세우리라(요 2:19; 막 11:16,17)’ 하였기 때문이다.집을 세우는 자는 감리 감독자 아래에서 설계도대로 바르게 건축해야 한다. 특히 100층을 넘어가는 마천루를 건설할 때에는 더더욱 그리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세우고저 하신 교회를 예수님같이 세세하게 모두 들여다 볼 수는 없다할 지라도, 이전에 붕괴한 교회들이 거대한 환란을 겪은 후에 어떻게 수습되어 졌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 이후 교회는 제도화 되었고, 계급과 권력이 들어섰다. 교회의 입교 절차가 흐려졌고, 국교로 선포되다보니 관리들은 거의 크리스천이 되었고, 국민들 모두가 자연스레 기독교에 들어왔으나 거의 신앙고백과는 무관한 기독인이었다. 공산국가의 종교담당 부처가 기독교를 관리하듯이, 국가 부서에 기독교를 관활 하는 부처가 생겨났고, 하나님나라가 세속 정부의 관할 아래 들어간 것이다. 교회가 성령이 임하시므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제도로써 갖춰진 세속적 종교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도권에서 임직식이나 헌당식을 거행할 때면, 으레 성령이 이루셨다는 정도로서 방점을 찍긴 하나, 성령보다는 교회의 제도가 앞서는 것을 바로잡질 못하였다. 예루살렘 성전 붕괴 후에는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유대교도 스마트하게 재정비 되었지만, 교회는 구제도에서 뚜렷이 탈피하였다. 교회가 유대 지경을 넘어서 세계로 나갔으나, 이방인의 종교제도를 모방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였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오염되고 잘못되어져 있다면, 굳이 구습과 전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맨 처음의 교회처럼, 기도처 형식으로 단순화 시키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는 거의가 권사이거나 장로이다. 유교적 관습에서 직분을 갖는다는 것은 구원이고 권력이며 계급이다. 이 같은 제도에서는 성령이 운행하시는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은 매장되고,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된다. 교회가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와 이권에 노출된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신도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랑의 열매를 맺음에 비효율적이다. 초대교회가 구 교회와는 철저하게 다름으로 차별화 되었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오백년의 칼뱅 전통이나 백여 년의 구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활로를 개통해야 할 시점에 들어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1-02
  • 기독교인의 행복론 - 28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피부는 바짝 말라 있었고, 입가와 눈가에 주름살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이거, 내 얼굴 맞아? 웬 할아버지가 여기 앉아 있지?’ 보고 또 보아도 분명 내 얼굴이 맞는데, 엊그제까지만 해도 지인들이 나의 얼굴에 동안이 남아 있다던 소리를 듣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딸아이가 한 마디 거듭니다. “아빠 솔직히 말해서, 요 몇 년 사이에 아빠 얼굴이 확 늙어 버렸어.” 나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래방에서 내가 계발한 몸부림춤을 추면 좌중이 웃음 바다로 변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동호외원들 앞에서 노래를 하며 춤을 춰도, 사람들은 웬 주책이냐는 듯, 자기들끼리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이거 안 되겠다. 이대로 내 젊음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습니다. K부장이 교내 S 도서관 개관 기념식 때 공연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내 젊음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노래는 잘 알려진 한명희 시, 장일남 작곡의 ‘비목’을 준비하였습니다. 마침 같은 부서에 있던 여선생이 악보를 구해 피아노 반주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유명 인사들도 오는데 더 잘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절은 여선생이 피아노 연주를 하고, 나는 무용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랫만에 춤을 춰 보는데, 청년 시절 지도 교수가 춤을 잘 춘다고 칭찬해 주던 추억까지 떠올랐습니다. K부장도 내 춤을 보더니 괜찮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외부에서 국회의원과 기관장들이 오시니 연습 많이 하세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대화도 화끈하게 진행되고, 하던 일도 술술 풀려 학생들 앞에서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형사 콜롬보>(1971-2003)의 주인공 피터 폴크 흉내를 내 가며 강의도 열정적으로 하였습니다. 2주간의 준비 기간이 훌쩍 지나가고 드디어 개관식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연장에는 국회의원인 안** 선생을 비롯하여 유명 인사들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사회를 보던 K부장이 이정길&#8228;나훈아&#8228;김흥국 등 유명 탈렌트와 가수 들을 배출한 학교여서 개관식에 공연을 준비하였다고 하면서, 노래와 무용을 선보이겠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재단의 실세인 K이사도 무대의 맞은편 정중앙에서 잔뜩 기대를 하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유명 성악가 흉내를 내 가며 멋지게 ‘비목’을 불렀습니다. 이제 2절에서는 무용을 할 차례였습니다. 무용 타이즈를 입고 발레화를 신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몸의 가운데가 튀어나오면 꼴불견일 것 같아 와이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준비하였던 한국 무용을 시작하였습니다. 발을 들고 치마를 살짝 집어올리는 부분도 완벽하게 소화하였고, 관객석 아래의 넓은 데로 가서 어깨를 45도 각도로 회전을 하면서 뒤로 두 번씩 스텝을 밟아 뒤로 2미터 가량 물러서는 동작도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장이 무용복이 아니어서 그런지, 안의원은 나의 무용을 보지도 않은 채 옆 사람과 계속 대화를 나누었고, K이사도 자리를 옮겨갔습니다. 무용이 지속될수록 공연장에 침묵이 잔뜩 흘렀습니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K부장이 재단 이사장실에 들어가 얼굴이 굳어진 채 나와도, 나는 그가 K이사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물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K부장은 평교사가 되었고, 나 역시 과장에서 밀려나 퇴직할 때까지 평교사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명퇴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마무리를 잘 하여야겠다며,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주말이면 퇴직 후에 거할 집필실도 알아 보며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퇴직을 한 달 앞두고 강의 시간에 학생들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들도 내가 도서관 개관식 때 와이셔츠 차림으로 무용을 하였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열화같은 성원을 마다 할 수도 없었고, 그들은 인터넷으로 내가 좋아하는 송창식의 ‘고래 사냥’도 틀어 주었습니다. ‘교실에서 강의 시간에 무용이라.’ 나는 학생들을 다독거렸습니다. “애들아. 참아라.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보기라도 하시면 놀라 자빠지실 거다.” “아니예요. 저희가 망 봐 드릴 게요.” 십여 분을 설득하였지만, 도저히 강의가 더 지속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잘 하던 몸부림춤을 선보이기로 하였습니다. 교단을 몇 번이나 도약하면서 몸을 사물놀이 하는 것처럼 흔들어대자, 너무도 신기한 광경에 학생들이 내 주위로 바짝 다가섰습니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오 삼등 삼등 완행 열차 기차를 타고 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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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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