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지난 칼럼 기사

  • 목회는 쉬운 것이다·11
    한문으로 예배란 단어의 의미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한문자로 보면 ‘신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한다’라는 뜻입니다. 일반 종교적 개념에서는 예배란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배란 특히 예배를 드린다는 습관적 인식이 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져옵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 예배란 한문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나 무의식 간에 신 앞에 절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여 참된 기독교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이와 같은 현대교회의 개념은 절대 기독교적 신앙의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내 속에 와 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생각해 봅시다.최소한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분의 내재로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아닌 동체적 삶에 누룩이 들어가 모두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술로 표현된 발효된 상태적 삶이 예배적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우리는 그분과 함께 삶에 대한 자연반응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빛의 삶이요, 소금적 삶을 강조하신 이유입니다. 빛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없는 것이요, 소금으로서의 삶은 부패할 수 없는 소금의 소멸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뜨거운 물에 커피가 들어옴으로써 물보다 커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포도 열매의 희생으로서의 와인인 것입니다. 원래의 맛은 있을 수 있으나 형태의 살아짐입니다.‘예배를 드린다’ ‘예배 본다’라는 우리가 편의상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결과가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어떤 제물을 바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것에서 어떻게 탈피할 수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나는 지금 예배학적인 학문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있는 잘못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만일 하나님에게 제사(제물)을 드리는 개념으로 예배 행위를 갖는다면 이것은 커다란 잘못인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지 않은 구약적으로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개념은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단번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13절을 보십시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며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예수의 단번에 드린 십자가의 역사를 무용화시키는 데서 오는 교회의 의미 상실을 반복하게 하는 또다시 제사를 드린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거부하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예배에 대한 바른 개념을 설명한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수가 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밝히셨습니다. 5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24절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3절에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 하였는데”란 곧, 장소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21절에서 보시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니.”이스라엘이 분열될 때 북이스라엘과 남이스라엘로 나누어지면서 북쪽사람들은 국경을 못 넘는 죄책감에서 ‘그리심산’에,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신당을 짓고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가짜라고 하여 무시당한 갈등 가운데 있는 그 중간 벽을 허무신 장면이 요한복음에 생수의 공급의 원리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의 진정한 정의를 정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신령이란 로마서 12장 1~2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진정이란 진실하게, 참되게,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신령한 예배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곧 헌신이란 뜻입니다. 헌신은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몸을 드림은 인간 예수와 하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에서 온 거울 속에 나를 비췄으나 그리스도의 모습만 나타나는 것입니다.아내가 거울 앞에 설 때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남편의 얼굴만 보이는 것이 한몸이란 머리와 지체의 완성을 말합니다. 머리와 지체의 정상적인 관계 완성이 생명소통이 가능한 정상적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1-02
  •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사랑 1
    모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새겨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유의지가 같이 하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형상(첼렘)은 ‘그림자’라는 뜻이 있다. 이런 표현에는 인간 성찰을 위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못할 때 그림자처럼 허무하고 헛된 인생살이가 되고 만다는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선포이자 참된 인간성이 회복해야 함을 알게한다. 여기에 삶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간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뉴스와 신문을 통하여 전지구적 가난과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소식을 듣지만 남의 이야기로 들일 뿐이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지나간다. 세상에는 남이란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본연의 뜻이 여기에 있다.1890년 말 대기근이 러시아를 덮쳤을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삶에서 실천한 작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톨스토이주의’가 잘 드러나는 그의 후기 작품은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곳곳에 숨겨진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삶의 지혜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에 평생 빈민 운동에 헌신한 프랑스 성직자 ‘아베 피에르’ 주장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자세를 피력한 신부의 주장을 오늘의 성서의 말씀에서 살피게 한다. 어느날 피에르 신부에게 파산한 기업인이 삶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피에르 신부의 조언을 듣고 싶어서 찾아 왔다. 피에르 신부는 그 날도 노숙인을 찾아다니며 옷과 음식 나누어 주는 사역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파산한 기업인이 지속적으로 상담을 요청하자 피에르 신부는 지금은 노숙인을 도와야 하니 ‘지금은 나를 좀 도와주고 당신의 긴박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이 끝나고 들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고 이해를 구하고 함께 노숙인 돕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파산한 기업인은 피에르 신부를 돕다가 자신의 삶의 긴박했던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고 자살까지 하려했던 극단적인 생각도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파산한 그 기업인은 피에르 신부의 가장 적극적인 조력자로 인생의 새출발을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전 지구적 가난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소식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삶도 생활자금을 대출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듣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실적 삶에 대하여 잠언은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여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를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톨스토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했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 경제결정론이나 폭력적 계급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0-21
  • 60. 제30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
    평북 안주 출생최지화(崔志化 1884-1950) 목사는 1884년 평안북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최지화가 기독교에 입신(入信)한 후 출석한 교회가 성내교회(城內敎會)였다. 당시 성내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의 권유로 교인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김정선 장로가 세운 유신학교(唯信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신식교육 기관이어서 최지화도 부모들의 권유로 이 학교에 입학하여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였고, 1911년 선교사들이 경영하고 있던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엔 숭실대학(당시는 전문학교)을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숭실대학을 거친 후, 1917년 1월 평양노회의 입학허락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학업을 진행 중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 일제당국의 요시찰인물이 되어 신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진학하여 1923년 7월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로 장립 받기 전, 1919년 안주읍교회(성내교회의 전신)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장로로 시무하면서 안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장래 복음전도자가 되기로 준비하던 중 3.1독립만세 사건에 연류되어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갔던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중퇴하고 금릉대학 신학과를 마친 최지화는 안주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자마자 1924년 안주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후에 평양노회 소속 연화동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평양노회로 이명했다. 이후 그는 평양노회(平壤老會)소속으로 총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여타 다른 목사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생활고를 모르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보통학교 교육으로부터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성직자가 되었기에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안에서는 실력 있는 엘리트 목사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옥에 티라 했던가. 그에게도 씻을 수 없는 당시 식자(識者)들이면 모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친일사건이 늘 그에게 그늘처럼 따라다녔다. 그의 친일행적을 일견해 보면, 1919년 1월 제15회 평남노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았는데, 같은해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열린 조선독립 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윤원삼(尹愿三), 김선두(金善斗), 강규찬(姜奎燦), 도인권(都仁權) 등과 함께 참가했었고,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 김구(金九), 도인권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는 호소문과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12월 중국 안동현(安東懸)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안병찬(安秉燦)을 총재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할 때 교육부장을 맡았다. 이듬해 1920년 4월 제2회 총회에서는 신설된 서무부장을 맡았다. 같은 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참사(軍務部 參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숭실대·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한 엘리트한때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 활동주기철 목사 면직 처분 결의 당사자일본제국군 위해 전투기·교회종 헌납일제에 항거하지 못한 지식인의 나약한 면모 보여1921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화동유학생연합회(高麗華東留學生聯合會)를 조직할 때, 주요한(朱堯翰)과 함께 금릉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써 의사부(議事部)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 금릉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평양에서 교육강연(敎育講演)을 하였다. 1924년 6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로 있다가 안주노회(安州老會)로 옮겨 그해 12월 안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안주서교회(安州西敎會)를 거쳐 안주중앙교회와 평양연화동교회를 담임하며 목양하기 시작하였다.1939년 9월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評議員)을 맡았고, 동년 12월엔 평양노회장으로써 임시노회를 소집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朱基澈) 목사의 목사면직처분을 결의했다. 1940년 3월 20일엔 자신이 시무하던 연화동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양노회지맹을 결성하고 이사장 겸 평의원까지 맡았다. 1940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88-789참조). 1941년 11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제30회 총회가 평양 창동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목사회원 104명, 장로회원 104명(미참 1명) 207명의 총대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총회에서 선교사 대표는 한 사람도 참석치 않았다. 일제 당국이 적성국가로부터 와 있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막았기 때문이다. 당시 총회장이었던 곽진근 목사는 국가의례를 먼저 거행한 후 부회장이던 최지화 목사는 성경 딤후 2장 5절을 봉독하고 현시국에 기독교인의 생활표준 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서기의 회원 점명이 끝나자 절차 위원장인 이인식목사가 총회 회의순을 보고 하였다. 그 회의순서에 따라 제30회 총회 기념식 현장에서 시난극복(時難克服)이란 결의문을 발표하고 지나주둔황군사령관(支那駐屯皇軍司令官)에게 전보(電報)를 보내기로 가결한 후 임원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총회장에 최지화 목사, 부회장에 전필순(全弼淳) 목사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튿날 11월 22일 오전에는 총회 총대 전원이 총회장 인솔하에 처음으로 평양신사(平壤神社)를 참배하고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총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총회장의 사회로 진행하였다. 예배 후 다시 회의장인 창동교회(倉洞敎會, 1905. 1. 22 설립)로 이동하여 평안남도 후까이 고등과장의 강연을 들을 후, 다시 총회장의 인도로 ① 국기경례 ② 개회사 ③ 궁성요배 ④ 국가봉창 ⑤ 묵도 ⑥ 서사제창 ⑦ 찬송가(제7장) ⑧ 기도 ⑨ 성경 ⑩ 총회년혁보고 ⑪ 기념사 ⑫ 선언 ⑬ 고사(告祀) ⑭ 축사 ⑮ 찬송가(3장) ⑯ 축도 순으로 진행되었다.이미 중일전쟁(일명 支那事變)으로 일본 황군(皇軍)들은 동남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러한 운의 시기를 맞이한 총회는 산하 각 노회로 하여금 조선장로교애국기상당수(朝鮮長老敎愛國機相當數 일본제국군전투기구입모금)를 헌납하기로 작정하고 그 헌금은 유아세례자와 실종자를 제외하고 교인수 비례로 1인당 1엔씩 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일로 최지화 목사는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는 친일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숙청대상자가 되었다. 이 당시 애국기(愛國機) 헌납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각 노회마다 기성회(基成會)를 조직해 그 기구를 발족한즉 실무자로 위원장에 정인과(鄭仁果 제24회 총회장 역임) 목사, 서기에 장홍범(張鴻範 제22회 총회장 역임) 목사를 각각 선임하였다. 특별히 충남 부여 신궁 건설에 전국노회 대표 72명이 1941년 10월 31일 봉사했음을 보고 받았다. 한편 최지화 총회장은 1942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연맹이 주최하는 지방 시국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었다. 같은 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 위원을 겸했고,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이사장으로 각 노회 연맹 이사장들에게 교회종을 헌납한 상황을 급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백남준, 이상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육군 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만3221원 28전을 헌납했다.1942년 9월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간담회 감리회 박연서, 이동욱, 장로교 전필순, 정인과, 성결교 이명직 등과 함께 참석해 일본기독교단 통리 토미타(富田滿)로부터 기독교 각 파의 통합을 권고받고 교파통합을 논의하게 되었다(친일인명사전(제3권) 같은 책 p.789 참조).해방후엔 더 이상 교회에서 목회 할 수가 없어 사임하고 모교였던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0년 6.25 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최지화 목사가 재임했던 재30회 총회결의 안건 중 중요사항을 살펴보면, ① 1941년 11월 22일 총회 총대 일동이 개회 이튿날 아침 평양신사에 총회원 전원이 신사참배하다. ② 부여신궁 건설에 전국 각 노회 대표들 72명이 자진 근로봉사 하다. ③ 1941년 6월 30일 금강산 기슭에 있는 교단 총회 수양관을 철거하기로 하다. ④ 총회설립 30주년기념예배를 장대현교회에서 드리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법도 없지만 좋지않은 역사의 반복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신전의식(神前意識)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0-21
  • 성육신한 예수교회-28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라야 반석위에 집을 세운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과장법이나 강조점을 대할 때에는 오늘의 우리들도 문자적인 것과 상황적인 것에서 고민을 피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고 실천함에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완고한 것을 느낄 수 있으나,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과 관련하여, 율사들이나 서기관들에게서 논쟁과 토론을 거쳐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성격상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나, 사람이 안식일에 숨을 거두는 것과, 아이가 안식일에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랍비들이 백성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면, 옹색하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안식일의 논쟁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답하였다.공동번역 마카베오 상 2:27-48에 보면, 안식일에 싸움을 거부한 나머지, 시민들이 몰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항상 지켜오던 안식일 규례와 전통을 재해석하질 않으면, 앞으로는 씨가 남질 않게 되는 결과가 오게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래서 이들은 안식일보다는 생명이 우선임을 내세우게 되었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안식일에도 적과의 전투에서 맞서 싸우기 시작 하였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과 관련해서 잠언에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있고, 산상수훈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옥토에 떨어진 씨의 비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선조들이 중요시 한 가르침 중에 세 가지는, 미쉬나에도 기록되었듯이,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의무와, 율법 준수와, 적극적인 윤리실천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에게서도 항상 강조하신 바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히 스데반과 같은 일곱 집사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저들이 원시교회에서 제일 먼저 선택되어진 것도 성령도 충만하였지만, 훈련받은 가르침을 지킴에 있어서 탁월한 실천력이 있어서, 회중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탁월하였으나, 당시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전통적인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버터처럼 복음서에 흠뻑 스며들어있는 것은 진리의 보편성 때문이다.예수님을 찾아와서 신의 한수를 배우려는 듯이 질문을 하는 사례들이 수없이 많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질문 가운데에 몇 개만 추려서 기록하였다. ‘너의 이웃은 누구냐?’ 라는 질문에 선한사마리아사람이 등장 되었듯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은 모두 전통과 예전에는 숙련되어 있었어도, 실제 삶에서의 윤리적 실천에는 경전의 가르침에 접근하질 못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에게서도 신앙 양상이 다르질 않다. 복음서의 책무도 과거의 종교인들의 가르침과 오늘 우리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르고 차별되어지는가에 대답해 주는 것이었다. 예수가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쳐 주신, 명백하게 차별화된 신의 한수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상을 전달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오직 자기 자신을 떡과 생수로 내어 놓으려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가져 왔는데, 그 선물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시다. 여기에 기독교의 해답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주시는 물을 마시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온 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뜻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풍요하게 하심이다.한 지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마음에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네, 저에겐 ‘사랑’이란 단어와 ‘아바 아버지’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제 마음에 꽉 차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버지’란 단어와 ‘사랑’이란 단어로 가슴을 가득히 채운 분이라면 그야말로 예수님이실 것이리라. ‘아버지’라는 말과 ‘사랑’이란 말은 실천에서 얻어지는 언어이다. 자기 스스로를 선물로 내어놓을 수 있어야 비로소 아버지가 되고,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이단아라고 매도하던 율사들 중에 하나인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뵈었다. 예수께서는 저에게 친절하게 말씀을 건네었다. ‘사람은 위에서부터 출생해야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보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셨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0-21
  • 기독교인의 행복론 -27
    사실 따지고 보면 주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셨으며, 성령이 함께 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보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행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화평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복해 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회개하여 죄의 암흑에서 벗어나 의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시고, 천국으로 가는 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 얼마나 멋지고 위대한 일인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자 합니다.‘사랑’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감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여인](권택영, <영화와 소설 속의 욕망 이론>, 민음사, 1997 참조)이 있습니다. 오레니카는 비 오는 날이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가난한 노천극장 지배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여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하게 삽니다. ‘연극을 보아야 우리의 삶이 풍요해집니다. 연극, 극장표…’. 입만 뻥긋하면 그런 단어들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연극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노천극장 지배인”이었기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객지에 나갔다가 돌연 사망합니다. 목재 상인이 그녀의 슬픔을 위로해 주자, 그녀의 입에서는 ‘목재는 어느 철에 나와야 좋고 건축 자재로는 어떤 게 좋고’ 등, 건축, 목재값과 같은 말만 튀어나오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 행복한 어느 날 목재 상인은 감기에 걸려 앓다가 죽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집에 하숙을 하던 수의사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아내와 별거하고 아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부쳐주며 혼자 사는 수의사에게 그녀는 부인과 화해하라고 충고했었습니다. 수의사가 벗이 되자 그녀의 입에서는 다시 ‘어느 집 개가 무슨 병으로 앓고 가축의 돌림병에는 어떤 게 있다’는 등, 가축, 축사, 돌림병 등의 단어만 튀어나옵니다.그러던 어느 날 수의사는 부대 이동으로 그 마을을 떠납니다. 이제 그녀는 말을 잃고 쓸쓸히 살아갑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기쁨이 사라지고, 주름살과 피곤이 쌓이며, 누구도 그녀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집은 돌보지 않아 서까래가 내려앉고 먼지가 쌓입니다. 그녀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텅 빈 공허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의미는 연인들에 의하여 채워졌던 것입니다. 텅 빈 그녀에게 어느 날 수의사 가족이 찾아옵니다. 부인과 화해한 수의사는 아들의 학교를 위해 그 고장에 머물게 되고 집을 세준 오레니카는 그의 아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이제 그녀는 두렵습니다. 언제 그들이 아들을 데리고 훌쩍 떠나 버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연극에서 목재로, 다시 가축으로 왜 의미가 바뀔까요.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지인들에게 말하는 화제가 달라질까요. 그것은 그녀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따라 지인들에게 말하는 화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레니카의 사랑은 다섯 남편을 둔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원으로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의 대상을 찾아야 하지요. 나의 마음에 영원한 사랑으로 남을 당신. 주님이 바로 내 옆에 계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사탄을 이길 지혜를 주시고, 나의 삶이 영원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11).나는 한때 대학 교수가 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따고 시간 강사 생활도 20여 년 하였습니다.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강의를 나가는 고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네 군데 대학 강의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C국의 선교사로 일하시던 형님이 잠깐 귀국하여 만날 기회를 가졌습니다. 형님은 이러저런 얘기 끝에 나의 소망을 들어 보더니,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따로 있을 테니 내 의지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라고 권하면서, 자신도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얼마 후 실로 기적처럼 나에게 전업 작가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매일 아침 영감을 받아 노트에 적어 내려가고, 오후엔 산책하며 헬스를 즐기는 건강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몸에 있던 병도 치유되어 간다는 의사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증후군이 없어지면서 일상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문이나 문예지에 연재하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0-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10
    갈라디아서 1장 6~10절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자나 요란케 하는 자나 받은 것 외에는 사람을 좋게 하고,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다윗을 통하여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해달라는 소원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며, 솔로몬이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집을 지은 것이지만,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사도행전 7장 46절 이하의 말씀을 반복하면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목사가 제사장인가?신당에서는 필연적으로 제사장이 요구됩니다. 제사장 없이 신당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단 종파임을 증명하는 것은 교주가 필연적입니다. 불교에서도 주지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당문화란 제사장이 만든 것입니다.예수님 시대에도 그와 동일한 사건에서 보면 신비적인 체험에서 오는 인간의 본능적 심리가 베드로가 변화산상의 고백일 수 있습니다(장막 셋을 지어 모셔두고 싶은 심정). 하나님을 한 곳에 가두어 관리하려는 인간의 본성입니다.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가 우상을 섬기는 불교와 통하는 점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입니다.사람들이 기독교 성지순례란 여행에서도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념관이나 흔적을 남기려는 이들의 신당을 관람하는 것일 뿐,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 보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런 여행을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입니다.신당을 중심으로 한 모든 종교는 제사장이 있어 신을 대리해서 백성에게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중보적 역할이 곧 제사장이었습니다. 신당은 위엄이 있고, 웅장하고 신비롭게 단장되어 제사장의 권위를 높아지게 하는 것입니다.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제사장 된 사람은 신당을 꾸미는 일에 제1차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당의 규모와 꾸며지는 정도에 따라서 신의 권위도, 제사장의 권위도 함께 높여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바로 이런 허망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며, 탈교회로써 진정한 교회가 개척도 불가능하고 엄두도 못내게 하여 유럽이 관광지로써 파괴되고 신당문화에 가장 근사치 된 이슬람으로 모두 둔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는 지적하지 않고 입만 살아서 계속 논설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사람들은 소속된 곳을 위해 제물도 아낌없이 바치고 신당 건축으로 영향력 있는 방법으로 부흥시키려는 또 하나의 욕구를 이루려는 열정에 가득 차 있습니다. 단 회개보다는 나 자신을 복 빌어주는 위임된 제사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시간이 갈수록 우상화 하는 가장 하나님의 축복된 교회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구약의 신당에서 도입된 제사장은 전적으로 인간의 범죄의 중보자로써의 역할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음은 중보자로 오셔서 완성하신 사실을 무용하게 하는 주역들이 목사라는 점입니다.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약교회의 제사장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다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버렸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른 증보자는 영원히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중세교회에서 교회당 문화의 필수적인 제사장(대리인) 제도를 다시 도입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교황이나 신부의 사제제도가 도입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하나님은 교회당 속에서만 갇혀 있을 수 없기에 루터를 비롯하여 개혁자들을 통해 교회당 벽을 헐어버리게 하신 것입니다.예루살렘교회의 훼파와 유럽 전통교회의 폐허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아주 쉽고 명쾌한 답을 숨기고 있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히 기업성공의 원리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가려진 중간 상태가 있는 한, 그리스도의 생명은 절대 소통될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원리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 교회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0-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9
    지금 우리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여 건축하여 헌당 시마다 기도하는 내용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습관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에만 열심을 내는 것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이사야서 66장 1~4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없고…”구약교회가 결정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첫째는 이방 나라를 본받아 왕을 요구했던 일, 둘째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을 짓겠다고 나선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서 1장 28절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살후 2:11~12). 24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이방 나라를 본받아 왕을 세움은 하나님을 정치권에서 밀어내버렸으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을 그곳에 가두어버리는 결과로 인간 중심에 빠지게 했습니다.중요한 것은 인간들은 집을 지어 성전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그곳에 모셔두게 하고 자기들의 편리를 따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사도행전 7장 46~48절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자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신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때 터무니없는 인간들의 행동에 참고만 계실 수 없는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손을 빌려 성전들을 헐어버리시기를 계속하십니다.하나님이 헐어버리신 것을 지금도 계속 성전이라며 짓는 것이 목회성공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어찌된 일입니까?하나님의 원하시는 성막은 출애굽기 25장 8절과 2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 찌니라”.이 말씀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되심을 실증하신 것이며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성막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 역할자 즉, 중보자로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의 역할이었습니다.이 성전을 헐라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라는 구속 사역의 마침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전의 무용성입니다. 외형적 건축물인 신당의 무용성과 동시에 신당으로 먹고사는 장사꾼들이나 모든 구조물들이나 의식과 제단과 장식까지도 그리고 신적 권위자들까지 모두 정지시킨 것입니다.교회는 부름 받은 사람들 즉, 구원받은 자들의 구성체라면 그리스도는 그 중에 거하시는 분입니다.광야에서는 성막이 있고, 가나안에서는 성전이 있고, 신약교회에는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전은 예수일 뿐이지 교회가 아닙니다.예수는 교회 안에 거하시는 영이시고, 그 영을 받은 성도가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오늘날 교회당의 원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전의 의미를 혼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당이 성전의 개념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당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에게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성막이나 성전의 의미는 예수께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형태이든 성막이나 성전의 의미를 되살리려는 것은 적그리스도요 이단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0-12
  • 기독교인의 행복론 -26
    기독교인의 간증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이 있었는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거슬리게 행동하였던 사람이 반전하는 존재로 변화될 때, 청중은 그에게서 역동적인 힘을 발견하게 되지요. 인생 역전, 그것은 반드시 간증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도 반전은 있고,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문열의 「익명(匿名)의 섬」에는 성폭행을 당한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정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작중 화자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과거를 회상하게 됩니다. 교육대학을 갓 졸업한 화자는 “백여 호 정도의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로 부임하여 갑니다. “드물게 보존된 동족 부락”인 그 마을에는 “깨철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요, 무슨 남 안 가진 기술이 있지도 않았으며, 재담이나 익살로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일도 없었”지만, “마을 전체의 부양을 받으며 마을의 성원이” 되어 “하루 세 끼의 밥과 저녁에 누울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을 아낙네들과 간통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성불구자라고 치부하며 대충 얼버무려 버립니다. 그것은 그가 간통 혐의를 받고 “젊은 남자”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깨철이가 성 불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화자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군에 간 약혼자가 월남 전선으로 파병되기 전의 휴가를 서술자와 보내기로 하여, 그녀는 “1주일을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냅니다. 그러나 약혼자가 끝내 오지 않자, 그녀는 그만 허탈감에 빠져 돌아오다가 깨철이한테 겁탈당합니다. 이를 통하여 그녀는 깨철이가 동족 부락에서 “마을 아낙들의” “잠재적 연인”으로 살고 있음을 직감합니다.내가 주목한 것은 작중 화자가 자신의 과거를 그냥 추억의 한 토막으로 넘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아픔을 겪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 아픔을 슬기롭게 잘 넘겼습니다. 그 극복 과정은 생략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회개하고 치유의 과정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당한 억울함을 누군가가 인정하고 치유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끝내 불행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줄 존재입니다. 주님은 신자에게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중국에서 합작 은행인 K은행장까지 지내신 형님이 목사가 되어 C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시다가 순교하셨습니다. 그는 한때 일류대학을 나와 외환 딜러의 전설이 되어 미국과 독일과 중국을 전전하며 생애 최고의 호강을 누린 적도 있습니다. 여성들의 로망이 되어 멋지게 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부르시기에, 그는 회개의 가정을 거쳐 육십대의 나이에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변변찮은 음식을 먹으며, 말씀 보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복음 전하는 활동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형님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이를 보고 서운해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주님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썼다. 이제 선교사업은 가족들에게 맡기고 천국으로 들어와라.’ 우리 형제들은 주님이 이렇게 인정하셨다고 믿고 그를 영원으로 보냈습니다. 그가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믿음이 없었다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회개는 사람을 변화시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문입니다. 나는 한때 노래를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KBS 전국 노래 자랑 1500회’ 특집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지인들 앞에서 ‘뭇여성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방 가수’라고 자부하며 몸부림춤을 추고 구성지게 노래불렀습니다. 그리고 교회 대예배 헌금송 시간에 마이클 잭슨처럼 자리를 흔들며 복음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나의 교만을 가만두지 않으셨습니다. 건강하던 나에게 갑자기 통풍과 고혈압과 만성신부전증 같은 대상증후군이 생겼습니다. 직장을 명퇴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으며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나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찬양대에서 주님께 예뻐 보이는 찬양을 드리고, 전업 작가로서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행복한 일상을 신자들이 감지하도록 영감과 필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면서 주시는 영감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망나니 역할로 사람들을 웃기게 하려 했던 저를 회개의 과정을 거쳐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0-12
  • 성육신한 예수교회-27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들이 대형화되고 물질과 권력이 풍요해지면서, 교회의 비중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론이나 성령론이 교회론에 잠식되었거나, 교회론적인 그리스도론, 혹은 교회론적인 성령론으로 질서가 왜곡되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만큼 성령론을 왜곡시키고, 성령의 선물들을 부끄러워하고, 성령의 은사들이 무시되고,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임재가 이렇게 한국교회에서 퇴색되어진 때는 없었던 것이다. 저마다 교회의 성장에 욕심을 과하게 채우려하다 보니, 교회 자체가 갖추었어야할 열매들이 빈궁한데다가, 신도 개개인에게 갖추어져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들이 매우 궁핍해진 것이다. 교회들과 교단들이 교황청이나 교황보다도 얼마나 강하게 비춰지는지, 서로가 양보하질 않고 대치하는 것을 보아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나 여력이 모두 소진된 것처럼 보인다.예루살렘 교회가 쇠퇴해지고 패망하였을 때에, ‘누가’는 ‘성령론적인 교회론’의 깃발을 올리고 새로운 교회로서의 항해를 시작하였다. 누가복음에서는 교회의 주도권을 제사장들이나 대제사장에게 넘기질 않는다. 이미 사제권을 발동하던 성전중심의 교회제도가 패망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의 중심에 있으면서, 제도권의 권좌에서 권력을 누렸던 사제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어단 이후로는 이천년 넘도록, 그런 성전을 다시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사도행전을 설교하면서도, 누가가 세우려는 교회보다는, 패망한 사제집단들이 고수하던 성전중심의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행보인가?누가는 사도들의 행전에서 조차도 사도들에게 주도권을 주질 않았다. 사도행전에서는 마치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그의 교회를 넘기려는 듯이 하질 않았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여호수아는 다행스럽게 모세의 후유증상에서 한층 자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마저도 모세의 손길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야훼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수가가 믿음으로서 황톳물로 넘쳐나는 요단강을 넘어설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모세에게 예속되질 않고, 모세의 그림자에게서 떠나 여리고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는 예루살렘 패망 이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결코 사도들 중 누구 하나를 특화시키질 않았다. 누가는 보편적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는 권능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 하였다. 누가는 마치 한 인간의 권력이나 제도에 의해서 교회가 서게 되는 것처럼 복음서를 구성하질 않았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서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 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에도, 누가는 그 핍박의 모진 파고와 풍랑을 이겨내는 영예를 사도들에게 주질 아니하고, 일곱 집사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게 된, 얼마 안 되는 헬라 말을 하던 유대 교민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이 오늘의 교권을 주장하는 제도권처럼, 사람에게 매여 기록이 되었더라면, 전혀 지금의 사도행전 같은 기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측하여 본다면, 먼저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러고 나서 다른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고, 아마도 추측하건데, 일반 신도들은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게 됨으로서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졌을 것이다.누가는 심지어 바울에게도 사적인 특권을 부여하질 않았다. 바울에게도 바나바와 같은, 교회가 파송한,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로서의 칭호를 사용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적인 역량과 권능을 갖추었음에는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위탁하였던 것이다. 잘못 관찰되면, 바울이 마치 예루살렘의 제도권의 권위 아래에 있는 듯하지만, 그는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사도로서의 사역에 힘썼던 것이다. 사마리아 교회가 마치 사도들의 안수로 인해서 성령을 받은 것처럼 인식되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마리아의 구원마저도 성령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교회론적인 성령론이 아니고, 성령론적인 교회를 세우고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가증된 것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차지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누가의 강령처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와 같이, 그 자리를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 내어드려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0-12
  • 59. 제79회 총회장 김덕신(金德信) 목사
    경남 부산 출신김덕신(金德信 1929. 8. 20~2009. 11. 18) 목사는 고향이 경상남도 부산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난 1930년대는 조선의 국권이 이미 상실된지 오래되었고, 민생들의 생활고는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피폐될 대로 피폐되어 어린 덕신에게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다. 교육다운 교육의 기회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어나 성장한 항구도시 부산만해도 늘 외침의 전초기지로 지역이 낙후한 가난과 혼란의 도시였다. 물려받은 재화(財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특별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지만 어릴적 가까운 이웃에 있는 교회에서 듣고 배운 어슴프레한 예수님에 대해 들은 성경 이야기가 늘 덕신 소년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이 읽다가 버린 책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베였다. 어떤 때는 밤새껏 호롱불을 밝혀놓고 신문이나 잡지로부터 쪽복음성경 등을 밤새워 읽었고, 때로는 당시에 향학열에 불타고 있던 조선 청소년들을 위한 일본의 유수한 대학들이 펴낸 통신강좌 교재가 눈에 들어왔다.그가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날 당시로서는 대구 유일의 정부(문교부)인가 신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평동(중구)에 있는 최정원(催正元)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대구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이 학교는 후에 대한장로회신학교(합동측)와 재단이 합해져 대신대학교(경산 소재)로 병합되었지만, 6.25 전쟁이 막 끝나고 혼란한 와중에서도 대구와 경남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로는 호남지방에서까지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최정원 목사(기독교성결교 소속)의 소문을 듣고 젊은 기독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최정원 목사는 명성 그대로 전국에서 청함을 받고 있는 유명한 부흥강사였고 신학교수였다. 친히 개척해 세운 공평동교회는 성경박사로 통하는 최 목사가 세운 신학교와 함께 소문난 교회라 전쟁과 가난으로 찌든 소망없는 서민들에겐 큰 위로와 소망이 있는 복음의 현장이었다. 그가 세운 신학교는 3년제였지만 교파를 초월해 전국에서 영혼이 갈급하고 전쟁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시내에 있는 큰 장로교회에 나가는 현직 집사와 장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을 이루고 있는 공장장들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해 청년들이 모여들었다.최 목사는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오늘날 겟세마네 동산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였다. 한번은 새벽기도회 때 당시 신학교 학생들이 최 목사를 시험하기 위해 어느 간 큰 학생(김종규 목사 증언, 현 예장통합 은퇴목사)이 살금살금 기어나가 그가 기도하는 얼굴 앞에 오른손을 들고 슬쩍 지나쳤는데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 신학생들 사이에는 진짜목사라는 별명이 나돌았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김덕신 청년이 바로 이 최정원 목사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 6.25 전쟁 직후 혼란했던 대구에 생활터전을 잡고 있을 때 생긴 생애의 전환기가 될 줄이야… 임마누엘파 대구신학교 졸업신정교회(서문교회)서 정재순 목사에 영향 받아북일·서부·동부교회 시무대신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활동동부교회서 손계웅 목사 이어 2대 총회장김덕신이 대구에 왔을 때 출석한 교회는 대신동 서문시장 가까이에 있는 신정교회(新町敎會, 현 서문교회)였다. 그는 당시 대구 경북지역의 기라성 같았던 정재순(鄭在淳) 목사가 신정교회를 담임하고 있어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이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28. 제17회)을 역임한 염봉남 목사가 시무했었던 교회였다.이런한 배경에서 신앙이 성장했던지 그가 목회한 목양지도 시내에 있는 북일교회(北一敎會), 서부교회(西部敎會)와 마지막 임지였던 대구 동부교회(東部敎會)이다. 한때 그는 최정원 목사가 운영하는 대구신학교 성결교단에서 운영하는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교리의 오해를 산 적도 있었으나 그의 신앙의 뿌리와 기준은 장로교회였다. 그는 대구신학교 졸업 후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고(1977), 1981년엔 미국 Prince George College에 가서 공부한 적도 있으며, 1982년엔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박사(D.Min) 학위과정을 마치기도 하였다. 김덕신 목사가 이렇게 독학으로 시작하여 정식으로 학교교육을 받기까지 있었던 요인은 그의 강인했던 건강과 뜨거운 향학열의가 일구어낸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사역했던 북일교회(현 서석수 목사 시무)와 서부교회(현 남태섭 목사 시무)와 동부교회(현 김서택 목사 시무) 교인들의 공통된 김 목사에 대한 평가를 참고해 보면, 첫째 독서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 분이다. 둘째 무슨 일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철두철미하다. 셋째 그의 끊임없는 학구열을 든다. 넷째 기도를 하면 성취할 때까지 뿌리를 뽑았다고 한다. 다섯째 당회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는 스타일의 지도자이다. 여섯째 설교 중에는 예화를 사용,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는 장끼가 있었다고 했다.한 번은 같은 지방에서 김 목사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면, 대구 대신동에 있는 기독교서점에서 만났는데, 어떻게 나오셨느나고 인사를 했더니 다음 학기 강의시간이 이단종파연구라고 하면서 두 세권의 중요서적만 구입하면 될 것을 20권이 넘는 이단 관련서적을 몽땅사서 보따리를 꾸리는 것이었다. 목사님 두 세 권 사서 보시면 될터인데 왜 이렇게 많은 양의 책을 구입하시느냐 했더니 요즈음 학생들 가르칠려면 교수가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많은 책을 타고 온 차 트렁크에 싣고 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구 동부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던 정태호 목사 증언에 의하면, 김덕신 목사의 목회의 중점은 주일낮 설교에 있었고 주일 낮 예배가 11시에 시작되면 오후 1시 넘기기를 예사였다고 한다. 한편의 설교준비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고 하면 주일이 지나도 매일 그의 서제엔 새벽 1시 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설교에 나선다는 것이었다.동부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해 일생을 바쳐 30년 3개월의 세월을 마치고 은퇴한 전임자 손계웅 목사의 바톤을 이어 받아 1976년 부임하여 2000년 1월 21일 은퇴, 동부교회 원로로 추대받았으며, 그는 교정(敎政)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지역교회와 지역사회 지도자로서도 큰 몫을 감당하였다.1955년 목사 장립을 받은 후 오늘날 대 교회들로 부흥 성장하고 있는 대구 북일교회와 서부교회를 비롯 대구 동부교회를 마지막 임지로 끝내면서, 가장 오랜기간 동안 목회사역과 함께 힘쓴 일이 있다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여한 1975년부터 시작된 그의 모교이기도 한 대신대학교에서의 실천신학교수 사역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그는 목회학과 설교학 뿐만 아니라 이단종파연구 및 예배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사역에 큰 보람을 느끼며 후배를 양성하였다. 1993년 9월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1994년 9월 27일에서 30일까지 그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9회 총회에서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 교단을 위하여 1년간 혼신의 정력을 다해 교단 수장으로써의 사명을 다하였다. 김덕신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므로 동부교회는 손계웅 목사(1968. 9. 제53회 총회)에 이어 두 사람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김덕신 목사가 재임했던 제7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교단정책위원회를 부활시켜 규칙대로 시행하기로 하다. ② 선거공영제를 도입 실시키로 결의하다. ③ 성경공회를 전면 개편해 재추진하기로 결의하다. ④ 이단조사연구위원회를 조직해 상설기구화 하기로 가결하다. ⑤ 지역노회 경내의 타지역 노회소속 교회는 해당지역 노회로 보내기로 가결하다. 단, (1) 무지역노회는 제외키로 (2) 분리 당시 총회가 인정한 것은 제외하기로 하다. 김덕신 목사는 퇴임 후 미국에 있는 자녀들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2009년 11월 18일 서거하였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이 있다면 그가 총회장을 지낸 후 후배들에게 ‘내가 총회장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언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총회장 되던 해의 개혁측의 분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었고, 생애 마지막엔 주위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매우 미약했다는 후문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0-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