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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는 쉬운 것이다·3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을 위하여 택정하심을 입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1~5).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이 철저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할 일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왜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비교할 일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애쓸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아브라함에 대하여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창세기 13장 8~9절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시되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이삭에 대하여그의 생애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과 순종에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와께 간구하고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이삭은 하나님 소유가 된 사람, 하나님 위해서 사는 사람, 하나님 뜻밖에 모르는 사람,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성경의 강조는 경쟁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경쟁은 전문가와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현대교회는 목회를 경쟁의식에 얽매이게 하여 전문성과 그 기술과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회학이란 자체가 순수성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목회성장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목사를 하나님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리더로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가 쓴 책을 소개한 것을 보았는데, 그 책 제목이 “목회자는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교회와 교회의 경쟁은 지체와 지체들의 갈등입니다. 지체의 갈등은 곧 머리 된 그리스도와 지체된 교회관계에서 생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골로새서 1장 18절에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했습니다.옛날부터 지금까지 ‘부모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형제간의 싸움’이라고 합니다.싸움이란 질투와 자존감에서 오는 경쟁의식입니다. 현대교회는 경쟁으로 제단지기들(종교지도자)의 욕망에서 출발한 프로그램입니다. 결국, 교회의 분쟁이 현대교회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불행입니다. 마치 운동장에서 뜀박질을 뛰게 만들어 우월을 나누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장 작은 자들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과 관계없는 적자생존의 깊은 늪을 만들고 있는 것이 현대교회이기에 세상에서 비판과 치욕적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우리 모두는 욕망이라는 열차가 브레이크까지 고장 난 상태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미래가 없는 막 가는 삶을 살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장자라고 정신병자 같은 독설만 쏟아놓는 것은 분명히 그 가정이 편안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도전하는 죽음을 향하는 것입니다.교회의 지체는 절대로 똑같아질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같아지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4절부터 보시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마태복음 10장 33절에서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라고 했습니다.뻥은 교회가 아닙니다한국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큰소리, 그리고 자신만만함 그 자체가 장사꾼들의 삶입니다. 요즈음 이미 지난 풍속이지만 ‘마케팅 전략’이 능숙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매출로 인한 이익이며 시장 점유율입니다.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돈입니다. 유통자금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크고 많은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6-01
  • 기독교인의 행복론 - 44
    필자는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전후 생존자들이 전쟁의 후유증을 딛고 일상의 안정을 되찾자, 사람들은 다산(多産)을 통하여 친인척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려 하였지요. 그래서인지 베이비붐 세대들은 온순하고 여유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60년대의 보릿고개를 겪으며 생존 의지를 불태웠고, 70년대 고도 경제 성장 시대에는 아랍의 사막으로 달려가 외화 벌이를 하였으며, 80년대에는 민주 사회를 위하여 저돌적인 민주화 담론을 부르짖었고, 90년대엔 일상에 관심을 가지며 근대화의 토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인륜을 쌓았습니다. 2010년대가 되니 그 세대가 은퇴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은퇴를 하여 보니, 처음 찾아온 것은 앞치마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전동차를 타고 오면서 만 원에 두 개 짜리 앞치마를 사 왔습니다. 하나는 군청색, 다른 하나는 빨간색. 설거지를 하다 보면 물이 튈 테니 앞치마를 두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고 속으로 되뇌어 보았습니다. 삼십여 년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게 뭐람. 날이 갈수록 아내의 압박은 은밀히 가속되었습니다. 아내는 세탁기 조작법을 알려 주며 직접 실습을 해 보라 하였습니다(이건 절대 고자질하는 게 아님). 건조대에 빨래를 널 때에는 옷을 탁탁 털어서 널어야 했고, 그릇들을 비누칠한 후 수돗물을 틀어 자연스럽게 씻기게 하면서 설거지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나마 청소는 진공 청소기가 있어 수월한 편이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유리창을 닦고 욕실 등을 대청소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도 그리 힘들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무엇도 못하랴 하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같은 사랑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더라면, 아마 나는 가족들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주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 고통도 마다 하지 않으셨는데, 가족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못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가사(家事)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기세는 더 높아만 갔습니다. 젊은 날 신랑의 밥상을 들여오며 “이것 좀 드셔 보세요.” 하던 아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심지어 가사(家事)를 땀이 나도록 하는데도, 아내는 성에 안 찬 지 잔소리를 늘어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아내는 가정에서 한 국가의 왕비처럼 굴었고, 성년이 된 아이들도 아내 말을 더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어, 이거 봐라. 나는 전세를 역전시킬 준비를 아니한 바도 아니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아내와 큰집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형님을 따로 뵙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형님. 여자가 나이가 들자 남편 앞에서 기세 등등해지는 것은 왜 그러지요?”형님은 형수씨와 아내에게 들리지 않게 조곤조곤히 말하였습니다. “그건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생겨서 그런 거다. 그럴 때는 아내 앞에 바싹 엎드려야 한다.”그러고 보니, 형님도 요즘 형수씨 앞에서 바싹 엎드려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에 두 번 집안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깨끗이 하는 데도, 형수씨는 시동생 앞에서도 형이 나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과감히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야, 남자들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예전엔 안 그랬는데.내가 젊었을 적에, 어머니가 아버지가 퇴근하면 해 드려야 한다고 해삼을 수돗가에 있는 양푼 물에 담가 놓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던 나는, 요즘 세태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여권 상승을 세계 곳곳에서 주장하고,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에는 공무원의 여성 비율을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의 가정을 돌아보면 이미 대세는 여성 우위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들이 양성 평등을 주장하며 여성에게 짓눌린 기를 펴려고 하는 현상까지 보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니까요.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신 줄 알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에게 동행하셨고,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으며, 기독교 박해의 길을 걷고 있던 바울에게 임하셔서 사도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 주변을 돌아 보면 가정에서 기 죽은 남성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한때 산업 현장에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고, 불의를 민주화의 열기로 물리쳤습니다. 이제 이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정을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행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 가정에서 가족애로 행복을 느끼게 하여 주십시오. 이 참에 주 앞에서 고백해 봅니다. 여보. 사랑해애.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5-19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8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 8. 불후(不朽)의 개혁자 엘리야 [2]성경에 ‘엘리야’라는 이름은 104회 나타난다. 성경의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그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의 이미지는 매우 강직하고 용감하고 단호하면서도 때로는 아주 유약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특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전형적인 개혁적 성향을 가진 선지자임이 분명하다. 시기적으로 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한 시대에 부름을 받은 선지자였기 때문에 어쩌면 불가피하게 꼴 지워진 모습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런 성향을 가진 선지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선택하셨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그는 불후의 개혁자였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엘리야는 아합 왕궁을 황급히 떠난 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릿 시냇가에 있는 산 중에 숨어서 기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그에게 먹을 음식을 날라다 주셨다. 그러나 계속되는 한발(旱魃)로 인하여 시내의 물이 말라서 더 이상 그 곳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엘리야는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여전한 가뭄의 결과로 양식이 다 떨어지고 이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나무를 줍고 있는 한 과부를 만나게 된다. 엘리야는 그에게 물과 떡 한 조각을 요청하였다. 평상시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던 이 과부는 엘리야의 말, “…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 17:14)는 약속을 믿고 마지막 떡 한 조각을 지나가는 나그네와 나누어먹는 믿음을 행사하였다. 그 후 놀라운 축복이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임하였다. 개혁의 사명을 받은 자는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하나님이 돌보신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을 공궤하는 가정도 하나님께서 보살피시어 복을 내리신다. 아합 왕과 엘리야의 만남이스라엘을 황폐케 했던 가뭄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시 엘리야에게 임하시어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 18:1). 선지자가 사마리아로 아합을 만나러 가는 그 같은 시간에 아합 왕은 궁내 대신 오바댜를 데리고 친히 물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물을 찾고 있던 중, 오바댜가 길에서 엘리야를 만났다. 엘리야가 그에게 말하였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왕상 18:8). 오바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만약에 그 말을 전했다가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으면 즉시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그를 안심시켰고 오바댜는 함께 나왔던 아합 왕을 찾아서 그 일을 고했다. 드디어 아합 왕과 엘리야의 극적인 대면이 이루어졌다. 아합 왕은 두렵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왕상 18:17). 적반하장과 같은 이 말에 대하여 엘리야는 담대하게 왕을 꾸짖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왕상 18:18). 오늘날 이와 같은 개혁자가 필요하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세기의 대결엘리야가 아합에게 긴급동의를 하였다.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산으로 데리고 와서 바알과 하나님 중에서 누가 참 신(神)인지 대결하자는 제안이었다. 엘리야의 위엄에 압도된 아합은 즉시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사장들을 갈멜산으로 소집하였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세기의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갈멜산으로 모여들었다. 엘리야가 거기에 모인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제사를 통해서 누가 참 신인지 확인하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았다. 불은 지피지 않고 자기들의 신에게 불을 내려 줄 것을 간청하여 불이 내려오게 하는 방식으로 참 신(神)을 가려내는 대결이었다.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정오를 지나 오후 늦은 시간까지 바알신인 태양을 향하여 괴성을 지르고 옷을 찢고 칼로 몸을 상하게 하면서 불을 내려줄 것을 기도하였다. 태양 자체가 불덩어리였지만 바알신은 묵묵부답이었다. 850명의 제사장들이 목이 터지라고 불을 간구하였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다. 850:1의 싸움이었다. 엘리야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이 일을 진행하였다. 제단을 쌓아 그 위에 나무를 펼쳐놓고 제물의 각을 떠서 올린 다음, 물 12통을 제물 위에 들어부었다. 제단 둘레에 파놓은 도랑에까지 물이 가득 고였다. 엘리야가 이렇게 물을 퍼부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비록 제물과 나무가 흠뻑 젖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불이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울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과감한 행동이었다. 믿음은 언제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다.그리고 엘리야는 침착하게 조용히, 그러나 힘 있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옵소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 37).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 18:38). 여호와 하나님 신(神)이 대승리를 거두는 통쾌한 장면이었다. 백성들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즉시로 백성들에게 명하여 그들을 기만하고 거짓되고 망령된 길로 인도한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을 모조리 잡아서 죽이도록 하였고, 분노에 찬 백성들은 그 명령을 따라서 거짓 제사장들을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일망타진 하였다.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개혁자에게는 백절불굴의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믿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반드시 성취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대승리를 거둔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의 소리”(왕상 18:41)가 있으니 이제는 왕궁으로 가서 먹고 마시라고 권면하였다.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지만 엘리야는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는 장면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확신에 찬 말로 왕에게 비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엘리야는 곧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께 비를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다. 일곱 번의 기도 끝에 3년 이상 굳게 닫혀있던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실감하고 감동하는 순간이었다.오늘날 세속화되고 타락하고 부패한 이 교회에 엘리야가 필요하다. 물질이나 인맥에 매매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타협하지 않는 ‘곧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 진실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므로 성도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마음을 쪼개어 회개케 하는 직설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하다. 현시대에 기독교가 허약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비위(脾胃)를 거슬리지 않는 위로의 설교, 기복설교, 번영을 약속하는 설교를 주로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개혁되려면 엘리야처럼 죄를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목사가 많이 나타나야 한다.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편에 굳게 설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목회자들이 있어야 한다. 누가 이 십자가를 질 것인가?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5-19
  • 시간과 공간에 붙들린 삶
    금번 우리는 대통령 선거 풍토에서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면에서 삶의 자세를 많이 보게 되었다. 그동안 산업사회를 살아 온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정치와 경제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관계를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사회 제도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의 현실에 시달려 왔다. 가치가 혼돈된 시대에 방황하는 국민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인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개혁의 방향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정치인의 의식 개혁이 먼저 더 중요한 정치 현실임을 주지한다. 오늘의 정치의 위기는 잘못된 가치의식과 그 규범에서 유래된다고 본다.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은 ‘정의 보다는 불의, 신뢰 보다는 불신, 질서 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처절한 사회현실’을 보게 한다. 삶의 가치는 반드시 정로(正路)를 걸어가야 얻어진다. 정치가 진실과 정의와 인권과 박애를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이권을 중심으로 음모를 일삼는다든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의 기회로 국민을 기만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결과는 허무와 몰락 일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자기의 양심과 신념, 신조를 속이지 않고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범한 아량을 보여주며 진실을 말해 주는 자세는 존경받는 생활 자세이며 영향력을 가진 몸가짐이라 할 수 있다. 인사권을 가진 사람이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합리적 판단과 소신에 따라 결정 하려고 하는데 이에 다른 결정을 내려 주도록 자기와 친한 동기 동창생이 혹은 친척이 혹은 고향 친지가 부탁해 오는 경우에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힘든 유혹(뇌물)과 함께 요청이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무엇이 그 잣대 노릇을 할까? 생각하게 한다.여기에 오늘의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하나님과 우주 만물을 이분법적인 대립관게로 보지 않고 통전적이며 유기체적인 생명관계로 이해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이트헤드(A.N.Whitehead,1861-1947)는 “과정신학”을 신학에 적용하여 보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살아가는 것을 제시함을 알게 한다. 이는 인간과 공간의 삶의 관계가 내면적이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으로 공간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인간의 생활 속에서 사실과 의미를 갖게 되고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공간, 자연공간,인간적 공간으로 그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공간에 있어 인간은 신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일상의 우리의 모습에서 보면, 전화를 할 때 첫 번째 대화는 “지금 어디야?” 한다. 이는 상대방의 위치에 있는 장소부터 확인하는 것에서 이를 알게 한다. 이를 확인하는 것은 그 공간을 앎으로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삶의 형편인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장소가 없으면 되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은 시간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보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여기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살아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했다’는 것과 그 공간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한다. 지금에 와서는 여기에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창조 우주 세계를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보게 하는 통찰력으로 그 신앙을 갖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 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여기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원점을 태초에 시작함으로 세계의 차원과 우주의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공간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우주공동체 의식’을 제공하는 신앙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를 깨닫게 하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유도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5-18
  • 80. 제89회 총회장 서기행(徐基行) 목사
    전남 무안 출생서기행(徐基行 1935.10.24) 목사는 전라남도 무안군 몽상면 사천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몽탄면 사천리는 무안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소재지이기도 하고, 사천리 북쪽으로는 전주와 함평이 있어 이곳엔 이미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비교적 기독교 복음을 접할 기회가 잦은 곳이었다. 이는 기행 소년에게는 일찌기 서구문물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무안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광주(光州)와 목포(木浦), 영암(靈岩), 함평(咸平)을 비롯 1900년대 초부터 여러 곳에 이미 교회가 설립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비금, 금성, 해제, 망운, 청계를 비롯 면소재지마다 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서기행 소년이 살고 있는 동탄면에도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무안과 신안 지역에는 당시 성결교 출신 문준경 여전도사의 맹렬한 전도활동으로 100개의 섬마다 문전도사의 선풍적이고도 희생적인 헌신으로 예수를 모르는 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복음의 바람이 지역 고을마다 세차게 불어 닥쳤던 것이다. 기행 소년이 살았던 고향 동탄 지역만 해도 면소재지인 사천리에 몽탄중앙교회, 명산리에는 명산성결교회와 명산중앙교회, 양장리에도 양장성결교회가 설립되었고, 학산리에는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오늘처럼 산업과 농업이 발달되지 못하고 교육시설의 미비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여건 속에서도 기행 소년에겐 이미 복음의 씨앗이 마음밭에 떨어져 믿음의 싻이 뿌리를 내려 미래에 대한 소망이 불타고 있었다. 아울러 청년의 열정과 배움의 갈망이 예수를 알게된 기행 청년을 가만두지 않았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명이 그의 젊음을 불태웠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열망은 신앙생활과 교회봉사를 통해 점점 활화산처럼 속으로 그칠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었다. 서울 이태원 대성교회서 목회사단법인 찬송가공회 회장 역임해외선교에 많은 관심 선교사 지원은퇴후에도 교단 내외서 열정 봉사그가 태어난 1930년대의 조선은 일제의 학정으로 조선청년들에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절이었다. 학업을 마음놓고 할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고, 주위의 똑똑한 젊은이들은 일본군대로 징집이 되어가고 젊은 소녀들은 취직을 미끼로 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시대였다. 방방곡곡마다 세워지는 소학교나 중학교들도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보다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고, 우리 조선의 자녀들은 전시에 필요한 물자공급의 심부름꾼으로 이리저리 내몰려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판국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나 성경을 배우고,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이 서기행 청년에겐 유일의 소망이었고 위안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고 세례를 받은 그날 주님의 소명을 받았다.그는 대한의 청년이면 모두가 가야 하는 군(軍)에 입대해 국방의 의무를 마친 후 바로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에 진학했다. 처음 부름 받았을 때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1962년 총회신학교(오늘의 총신대신학대학원 전신)를 마치고 전도사와 강도사를 거친 후, 196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목포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전도사와 강도사로 2년 간은 김제 송지교회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65년엔 목포 동문교회를 거쳐 1967년 9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대성교회(大成敎會)에 부임하여 2005년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목회했다. 서 목사가 부임할 당시 대성교회는 오늘의 예장합동측 교단 소속이 아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측 총회 소속 교회였다. 서기행 목사가 부임한 후 교회 공식의결 기구인 공동의회에서 그 해 연말 호헌총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한국장로교회의 모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경기노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대성교회를 경기노회 소속으로 복귀시킨 후, 부임하던 그 해 11월 연건평 84평 2층 예배당을 신축함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데 힘썼다. 그리고 1969년 6월 17일 노회의 허락으로 위임식을 가졌다.다시 1970년 9월 10일 다시 연건평 340평 4층 예배당 건축 공사를 착공하였다. 1977년 4월엔 이태원동 301-1의 땅 154평을 매입, 교회지경을 확장하였다. 1981년 5월 24일 목사관을 연건평 70평으로 완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에 3,500평 수양관 대지를 매입해 이곳에 1983년 7월 30일 수양관 별관 건물(식당 및 주거방)을 완공하였고, 같은해 11월 10일 김무열 장로 장립이 있었다. 1985년 6월 7일 처음으로 필리핀에 배상호 목사를 1대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85년 11월 9일 하태초, 박광수, 허기식, 조남성, 장기서 등 5명의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였다.1989년 4월 25일 교회설립 35주년 기념식과 서기행 목사 성역 23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고, 같은해 이태원동에 아파트 1동과 수양관 가건물(본당의 105평)을 신축하였다. 1989년 10월 17일 필리핀 선교지에 선교대지 및 건물을 구입하고 복음선교교회를 설립했다. 1990년 4월 4일 지청진 장로 취임이 있었고, 11월 3일엔 조만제 장로 원로장로 추대와 이순노 장정수 집사 장립이 있었다. 이어 1992년 11월 9일 이태원동 303-25번지를 매입, 이듬해 1993년 9월 11일 지금의 대성전 건축 기공예배(연건평 1200평, 지하 2층, 지상 5층)를 드리고, 1994년 4월 24일 교회설립 40주년 기념주일 감사예배를 드렸다. 1994년 10월 31일, 서기행 목사가 총신운영이사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6년 7월 21일엔 제3차 아프리카 케냐에 이종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지원하였다. 1997년 9월 11일 서기행 목사 근속 30주년 기념예배와 동시 미국 Belhaven 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수여 감사예배를 함께 드렸다. 1999년 8월 1일 제4차로 호주시드니 고강완 선교사를 본교회에서 후원하고, 2000년 12월 14일 교회 가까운 지하철 녹사평역과 자매결연을 맺고 선교의 지역 확대를 기하기로 하였다. 2001년 5월 16일 서기행 목사는 한국찬송가협의회 회장으로, 다시 5월 17일엔 한국찬송가공회 회장(19차)으로 피선되어 교계를 위해 봉사하기도 하였다.2003년 9월 23일 제8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 부총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2004년 9월 21일에서 24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9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서기행 목사는 목사로 준비한 몇년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있는 대성교회라는 한 곳에서 자기의 사역에 최선을 다한 목자였다. 그의 강직함과 정의감과 지도력은 총회장을 역임하고 은퇴한 후에도 교단의 원로로, 고문으로 열정을 다하고 있다. 총회장의 직임을 다 한 후 2005년 10월 24일 대성교회는 그를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그의 교회를 위한 수고에 예를 갖추는 아름다움을 표하였다. 그가 재임했던 제8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총회임원 선거규정을 개정하기로 하다. ② 상비부장 총신 운영 이사장 기독신문 이사장, 사장,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을 제비뽑기로 하기로 가결하다. ③ 목회자 생계비 최저생활비선은 정부 발표선으로 하고 노회와 총회가 적극 지원하기로 하다. ④ 개혁 개정판 성경은 공적예배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하다. ⑤ 중보기도란 용어 대신 이웃을 위한 기도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다. ⑥ 회의 용어 중 ‘자벽’을 지명으로, ‘지시위원’을 광고위원으로 하기로 수정하다.서기행 목사의 슬하에는 2남1녀가 있으며 두 아들은 각각 개인사업에 종사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고, 사위 문석호 박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서기행 목사는 부임 당시 개척교회나 다름없던 작은 교회를 대형교회로 부흥성장시켰으며, 교단 내의 지도력과 봉사를 감당해낸 저력있는 뚝심이 그의 삶과 목회에 기초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목회철학을 보면 교회 안의 성장과 대외적(해외선교) 성장의 조화를 기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5-18
  • 성육신한 예수교회-48
    야구 게임에서 7회 콜드게임같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난 팀은, 그 다음 경기는 대부분 게임이 지지부진하다가 버리게 되는 결과가 허다하다. 촛불 집회도 끝이 났고, 대선도 끝이 났다. 지금까지 밀려오던 에너지의 파동이 갑작스레 조용해 진 것이다. 이러한 잔치가 끝난 다음날, 설거지를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이 되는 것일까? 누적된 상처와 고통들은 치료되질 못하고 방치되기 십상이다. 미주에서도 경험된 것인데, 한 지역의 제방이 무너지고 미시시피가 범람한 이후 다가온 것들은 정치로도 종교로도 해결이 되질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와 요단을 건너 여리고를 점령한다. 요단강을 건넌 것은 믿음의 성과였다. 모세가 죽은 이후 오로지 여호수아만의 리더십에 의해서, 황톳물이 범람하는 요단강을 건넌 것은 모든 시민들에게 커다란 신뢰를 가져온 것이다. 자연적인 장애를 믿음으로 뛰어넘은 첫 번째의 열매였다. 백성들 모두가 저마다 자신들을 성결하게 하고, 법궤를 앞세워서 메마른 땅 같이 요단을 건널 수 있었다. 요단을 건넌 후에는, 광야 길을 건너느라고 40년 가까이 할례를 하지 못하였는데, 길갈에서 적진을 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군대가 모두 할례를 행한 것이었다. 전투력이 제로에 치닫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그만큼 저들의 신앙은 고양되어 있었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고양된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마저 무너뜨린다. 법궤를 앞세워 나팔을 불며 여리고 성을 돌더니, 마지막 날 새벽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았다.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 기다렸던 모든 군대가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는 무너져 내렸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와서 첫 번째로 치룬 전투였는데 승리를 가져온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해 보면 여리고가 얼마나 비옥한 땅인지를 방금 알아차리게 된다. 요단강의 하류일 뿐 아니라 모든 무역상들이 들렀다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성안의 시민들은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는 모양새였다. 오랫동안 광야에서 머물다가 모처럼 문명의 도시를 처음 접수한 이들의 눈은 값지고 기름진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의 첫 번째 것은 신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되질 못하였다.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값지고 탐스러운 것을 몰래 숨겨놓은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는 것 같아서 지도층에서도 눈치를 채질 못하였다. 이 일로 인해서 그 다음 번, 아이 성의 전투가 패배를 가져온 것이었다. 기본이 되는 것들을 관리하질 못하여서 치명적인 손실이 일어나는 경우는 허다하다.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을 잘 지켜내는 시민들과, 공공의 질서를 무시하고 임의로 행동하는 백성들과의 차이는 너무나 현저하게 차별화되는 것이다.1990년 9월 12일 새벽 3시 50분, 행주대교 남쪽 1㎞ 지점. 닷새 동안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강물은 일산 제방을 무너뜨리고 기름진 평야를 삼켰다.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과 지도읍 일대 83개 마을에 수마가 들이닥쳤다. 원당읍까지 일부 침수되고, 파주군에도 물길이 차올랐다. 고양군 전체의 65%가 물에 잠긴 것이다. 새벽 2시40분께. 비상근무에 들어가 제방구간을 순찰하던 장병들이 자정부터 순찰을 돌던 끝에, 조그만 물이 솟는 구멍들을 발견하여 긴급보고를 올렸으나, 농경지는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네덜란드에는 물이 새는 제방을 발견하자, 밤새 손으로 막아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았다는 한스 브링카라는 소년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국토가 바다보다 낮아서, 국토의 25%가 물에 잠길 수 있는 요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둑이 무너지지 않음은 왜일까?오월이 되면서 휴일이 어느 때 보다도 많아졌다. 시민들이 평시에도 산을 덮듯이 산으로 몰리지만, 이번은 어느 때 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선거철이라 들썩이는 것은 매스컴뿐만이 아니었다. 여느 시기보다도 지켜질 수도 없는 선거 공약들이 홍수를 이뤘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러시아 군대는 함경북도 변방 경계 지역에 집결, 중국군대의 15만여 병력은 압록 강변에 집결하였고, 일본 병력과 미국군대의 동해 집결은 모두 선거의 물결 아래로 잠겨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더니, 5월 6일 산불이 전국에서 일어나서 번지는데 종잡을 수가 없었고, 결국에는 민가들을 삼키고 만 것이었다. 행객들의 담뱃불과 농민의 소각으로 인해서 비롯된 재난이었지만, 저들만 해이해진 것은 아니다. 국민 전체가 너무나 오랜 기간 들떠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후에, 이 나라에 발생되어진 국가적 사회적 재앙들은 감당하기가 버거울 만큼 강도가 높아져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5-18
  • 조병해 장로
    기독교회관과 CBS 사우회 사무실 출근 후배들과 친교시간 가져 조병해 장로(86세, 예장통합 소망교회 원로)는 평생동안 언론계에서 몸담고 살아왔지만 후회는 없고, 긍정적인 신앙으로 건강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저는 생활의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914호(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와 광화문의 CBS 사우회 사무실을 오가면서 교계 장로님들과 후배들을 만나 담소하고 식사를 나누고 있어요.” 노년에도 조 장로는 아직도 꼿꼿한 걸음걸이에 건강에 아무 불편함이 없이 외출을 하고 있다고 한다.80년도 CBS 보도국장 시절 곽선희 목사를 만나 소망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부산과 대구 등 지방 근무로 인하여 88년 늦게 장로장립을 받았다. 그러나 그동안 조 장로는 그의 중심에 늘 목회자를 잘 섬기고 교회중심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으며, 지금도 함께 교회를 섬겼던 곽선희 목사와는 가끔씩 식사의 시간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한다.조 장로는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에 KBS 아나운서로 출발하여 CBS에서 은퇴하기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인으로서 온갖 경험을 다 겪어 왔다. 자유당 시절 3.15 부정선거, 4.19혁명, 5.16과 5.18에 이르는 국내 모든 정치변화를 현장에서 경험했다.조 장로가 근무했던 당시 CBS 방송국은 서울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에 있었고, 대주주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함께 80년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을 때에는 이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종로 5가는 민주화운동의 메카로 불렸다.조 장로는 4.19 이후 바로 CBS에서 아나운서 겸 기자로서 박정희 정권의 시작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출입기자로도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할 당시에는 CBS가 많은 탄압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총무국장을 맡아 방송국 살림을 꾸려 가느라 매우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조 장로는 CBS에서 아나운서 실장과 보도국장, 충무국장, 상무에 이르기까지 35년간 방송국에서 언론인으로 살아왔다. 언론인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80년도 전두환 정권 때 언론통폐합을 통해 보도통제, 광고탄압 등을 통하여 고사(枯死) 작전이 진행될 때였다고 했다. 당시 신군부는 모든 언론사를 통폐합하면서 KBS와 MBC, 그리고 역사가 오랜 CBS는 마지못해 두었지만 지나친 탄압은 결국 방송국 운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때 군부의 강제지시에 의하여 직원 136명을 데리고 KBS로 가야만 했지요. 그러나 결국 저는 한 달 만에 당시 이사장 유호준 목사님의 권유로 CBS에 다시 복귀했어요.”1972년 유신정권 때 일화로서 CBS 오재경 사장 때에 야당 대표의 유신반대 기자회견을 비밀리에 중계하여 논란이 되어 정보기관의 밀착 감시를 받기도 했다. “채플 시간에 ‘유신규탄’ 성명을 발표하여 당사자가 구속되기도 했지만 저는 그 현장에서 참 많은 탄압을 받았지요.”조 장로는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CBS 방송사상 처음으로 1963년 미국의 빅토리아 농구단이 방한하여 경기할 때 장충체육관에서 중계방송을 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 후로 아시안게임 농구중계와 88년 올림픽 때는 중계방송 단장을 맡았다고 한다.조 장로는 소망교회 성가대 베이스파트에서 80세가 될 때까지 봉사했다면서 음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게 많았다. 대구와 부산 등지에 근무하면서 조 장로의 노력으로 ‘대구장로합창단’, ‘부산장로합창단’ 등 합창단을 창단하여 지금까지 존속해 오고 있다. 본 교회에서도 소망교회 장로합창단, 소망교회 남성합창단을 창단했다.“저도 연합기관인 방송국에서 근무했지만 한국교회는 연합이 잘 안 되고 있어요. 지도자의 확실한 정체성이 부족하고 의식수준이 못 미치고 있어요.”라고 교계연합활동에 대해 비판했다.조 장로는 “새벽기도는 습관이 안 되면 할 수 없다”며 지금도 새벽 4시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조 장로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젊은 시절 배구선수로 활약했고, 테니스, 골프 등을 즐겨 한 탓이라고 한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05-18
  • 목회는 쉬운 것이다·30
    목회는 경쟁이 아닙니다.먼저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주제 발표한 손봉호 교수의 이야기를 말해야 하겠다.한국교회의 경쟁의식은 유교의 잠식된 문화 속에서 온 것임을 말했다. 필자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유교가 도덕성을 굉장히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형성해 놓은 문화는 굉장히 도덕성에 취약하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세계 투명성 기구에 의하면 한국은 투명성 정도가 세계에서 39위이다. 후진국인 아프리카 국가보다 못하다. 유교와 샤머니즘 세계관이 도덕문화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알 수 있다. 유교와 샤머니즘 문화가 도덕적 의식을 결여시킬 뿐 아니라 지나친 경쟁심을 부추기고 있다. 그들은 내세가 없고 오직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뤄야 하기에 엄청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 만큼 경쟁심이 강한 민족은 없다.한국인들은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려면 꼭 1등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80점을 맞고 1등을 하는 것이 95점을 받고 2등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경제성장엔 도움이 됐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다.한국 기독교는 유교와 샤머니즘 문화 속에 깊이 빠져있어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세계 부패 지수에서 한국이 세계 39위인 반면 일본은 17위이다. 한국인 기독교 인구가 전체 25퍼센트 정도지만 일본은 채 1퍼센트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한국교회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세상이 교회를 감염시킨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문화의 복음화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무속화가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이 전형적인 예이며, 이것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킨 것이다.경쟁이란 비교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최초 뱀이 제공한 것이다(창 3:1~).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적 욕구에서 이것보다 더 나아 보이는 생각을 이루려는 방법이 현대 용어로 마케팅 전략이다.예수님은 그 조건을 무용지물로 만드셨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그 조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위장으로 결국 뱀의 조정을 받아서 성공적인 신앙이라는 사람들이 만든 것에 매여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생한 것이 경쟁입니다. 경쟁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성경 속에 나타난 경쟁자들의 종말을 보자.•가인과 아벨 : 가인은 인류 최초로 경쟁심을 가진 사람이다. 동생에 대한 비교와 그 질투심은 결국 살인이란 비극을 불러왔다.•에서와 야곱 : 이들은 태어나기 전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경쟁했다. 야곱은 끊임없이 형이 가진 장자권을 탐내고 장자권의 복을 가로채기 위해 최초의 거짓말을 만들었다. •요셉과 형제 :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겨 아버지께 불효했다.•사울과 다윗 : 노심초사하는 사울의 끊임없는 비교가 자신을 구해준 다윗을 죽이려고 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헤롯과 메시아 : 경쟁과 질투로 모든 자식을 잃게 하여 어미들을 통곡하게 했다.•요한과 제자들 : 사람들이 요한의 칭송이 예수님에게 기울기 시작하자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자신의 스승인 요한에게 괴로움을 주었다.•예수님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예수님 제자들 :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가세한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을 하게 했다.•고린도 교회와 당파 : 자기가 좋아하는 스승을 내세워 당을 지은 사건.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서로 경쟁했다.성경은 경쟁을 용납하지 않는다.요한복음 17장 4절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많이 따를 때도 흥분하지 않으셨다. 반대로 예수님 곁을 떠날 때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바울은 남보다 늦게 사도가 된 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었다. 남들이 하지 못한 체험에 대한 우월의식도 없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05-18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7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7. 불후(不朽)의 개혁자 엘리야 [1] 서언죄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집단은 끊임없이 죄악으로 기울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배도와 타락의 늪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요청은 “회개하라” “개혁하라” “돌아오라”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요청을 왕과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 주된 ‘사명’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에 등장했던 많은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개혁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엘리야를 생각하게 된다.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으로 시작된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 아합의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배도와 우상숭배는 가히 극도에 달하였다.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인 아합은 그 아내의 영향력에 거의 노예가 되다시피 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온 나라를 우상숭배의 소굴로 만들어 하나님의 진로를 격동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의 깊은 산 속에 한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엘리야였다. 그는 어떤 특별한 직책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으며, 평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말씀에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던 그의 마음에, 아합 왕의 타락과 국가의 배도에 대하여 불타오르는 의분을 느끼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엘리야의 믿음과 용기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의 단호하고 신속한 조치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엘리야는 주저함 없이 담대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왕궁으로 직접 들어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였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갑작스러운 엘리야의 출현과 그가 경고한 재앙에 대하여 황당해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합 왕을 뒤로 하고 엘리야는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왔다.산천초목이 우거지고 늘 풍부한 물이 흐르고 있던 이스라엘 땅에 갑자기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는, 큰 비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노아의 메시지 만큼이나 생소하고 믿을 수 없는 예언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고, 그 믿음에 기초하여 곧바로 왕에게로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개혁자의 매우 중요한 특성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 성취를 미리 바라보고 확신을 갖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에 적용된다.태양이 주신(主神)인 바알 숭배는 이방 여자 이세벨에 의해서 이스라엘 땅에 만연된 신앙이다. 바알 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초목과 각종 곡식과 식물(植物)들이 자라나는 것은 태양신이 내려주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와 이슬을 내리지 않는 재앙을 통해서 저들이 믿는 신(神)이 아무 것도 아닌 헛된 신임을 깨닫고 천지만물을 지배하시는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더욱 강팍해진 아합과 이세벨비가 오지 않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땅에는 극심한 가뭄현상이 일어났다. 비옥했던 이스라엘의 토지는 풀포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땅이 되었고 ,짐승과 가축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다. 백성들의 아우성이 왕궁에까지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더욱 강팍해졌다. 니느웨 사람들과 그 나라의 왕은 이방인들이었지만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였으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은 회개하지 않았다. 태양 광선이 진흙에 닿으면 흙이 딱딱하게 굳어지지만 구두약이나 왁스 같은 물질에 닿으면 그것이 액체로 녹아지듯이, 인간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여전히 바알 신을 철저하게 믿고 있던 아합과 이세벨은, 비가 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일이 아니라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엘리야만 죽이면 비가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엘리야를 찾아서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내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에까지 연락하여 엘리야를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엘리야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알의 제사장들이 비를 오게 하려고 바알 신에게 수많은 제사를 드리고 빌고 간청하여 현 사태를 반전시켜보려고 온갖 노력을 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오히려 그들이 섬기는 태양은 더욱 강렬하였고 온 대지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태양을 저들의 신으로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집과 편견과 우매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그의 존재만 믿을 뿐, 그분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 14:1)고 한다. 악은 악을 낳고 선은 선을 낳는다엘리야를 찾아서 죽이려는 노력이 아무런 성과 없이 수포로 돌아가자, 화가 치밀어 오른 이세벨은 이스라엘 나라 안에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죽이려고 결심을 한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바알의 제사장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하나님께 충실한 선지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이 선지자 부류에 들어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쨌든 암암리에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선지자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세벨은 이러한 선지자들을 찾아내어 죽이면서 그 분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악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른 악을 생산하여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마침내 멸망을 초래한다. 이것이 악의 속성이고 결말이다.그런데, 이 사건 속에서 한 특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합 집에 궁내 대신(大臣)이면서 하나님께 충실한 인물 오바댜라는 사람이다.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추진할 때에,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던 오바댜는 “선지자 일백 인”을 선별하여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왕상 18:4)여 살려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과 용기의 사람이다. 발각되면 즉시로 자신이 죽을 일인데, 그런 일을 감행한 것을 보면 오바댜라는 인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유용한 청지기였던 것 같다. 사람이 선을 행하여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변화되려면 마음의 샘이 바뀌어야 한다.개혁자들 중에는 그 성향에 따라서 두 부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선두에서 일하는 엘리야 같은 개혁자가 있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치 소금처럼 백성들 속에 섞여서 주변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는 오바댜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부류의 인물들이 많이 있어야 진정한 개혁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큰 목소리를 내고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령한 감화력을 통해서 개혁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면 진정한 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5-08
  • 79. 제48회 총회장 이수현(李守鉉) 목사
    전북 군산 출생이수현(李守鉉 1895.5.8-1984.5.28) 목사는 전북 군산시 구암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나이 7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12세 때 군산(群山)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해리슨(Rev.W.B. Harrison, 1894~1928 河緯廉)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다. 하위렴(Harrison) 선교사는 군산에 오기 전 서울에서 어학을 익힌 후 전주에 파송되어 오늘의 신흥중고의 모체가 된 아이들을 모아놓고 주간학교(Weekly School)를 개설,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다. 1898년 같은 군산지부에서 활동하던 데이비스(Miss. Martha. V. Davis)와 결혼, 부인은 전주로 옮겨 아이들과 부녀자 및 병든 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본인은 군산에서 장터전도에 매진하였다. 1903년 부인이 사망하자 계속해 군산과 목포지역을 오가며 선교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다가 1928년 과로로 인해 미국으로 귀국한 후 생을 마감하였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1884~1984), 한국기독교연구소 1994, p.256).수현 소년은 선교사의 손에 이끌리어 14세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해리슨 목사의 주선으로 군산영명학교를 마치고 광주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순천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1916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근속하였다. 이후 일제의 학정에 견디지 못해 만주로 피신하여 그곳에 있는 만주신흥군관학교에 입학, 조국광복의 꿈을 꾸며 공부하면서 한편 봉천에 있는 한인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후 귀국하여 평양에 있는 기독교 계통 학교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1918년 2월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경찰당국에 의해 다른 동료 24인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해방 후 이로인해 건국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특별 표창을 받기도 했다. 만주신흥군관학교 거쳐 독립운동 가담서대문형문소에서 옥고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 전남노회서 목사안수부흥사로서 국내외 초청집회 활동36년간 군산에서 목회이때부터 이수현 목사는 자신을 드려 일생동안 전도사업에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후일 밝인 바 있다. 그는 곧 평양장로회신학교로 가서 교역의 길을 준비하여 입학해 열심한 결과, 1925년 평양신학교를 제28회로 졸업하였다. 동창생들의 면모를 대강만 살펴봐도 길진경 김방호 양화석 이기혁과 같은 한때 한국교계를 움직였던 지도자들로서 기라성 같은 어른들인 것을 한 눈에 알아 차릴 수 있다(야소교장로회연감, 1940 야소교장로회총회 발행 참조). 졸업한 그 해에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광주중앙교회로 부임하였다. 1929년 마산문창교회로 전임했다가 1931년 순천중앙교회를 거쳐 군산 개복동교회와 군산중앙교회에서 23년간 시무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관계한 연유로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과 문화부장을 역임하였고, 5.10선거 당시에는 군산지구 선거위원으로 봉사한 바, 건국공로자로 군산시장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매년 성탄절 때는 군산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5공군 부대에 성가대를 동원 위문한 공로로 미 제5공군 사령관의 표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교육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광주에서 사범학교를 나온 덕에 순천매산학교 봉천동하현 한인학교, 평양순덕학교 등 교사로, 광주 숭명학교에서는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수, 순천,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 등 부흥사로도 전국을 향해 뛰며 한국교회 지도자로 봉사하였다. 일본, 동경, 대만, 중국 서탑교회 등 수많은 집회초청을 받아 활동하였고, 광주 도제직회 회장을 비롯, 군산 NAE회장, 순천노회 주일학교 대회장, 순천노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대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남노회장, 순천노회장, 전북노회장, 군산노회장과 평양신학교 이사와 군산 맬볼딘여학교, 군산영명학교 이사를 역임하였고, 군산YMCA 회장으로 대사회 봉사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다양한 교회 내외 단체에서 행정경험을 쌓았고 교정(敎政)의 경험을 맡았다. 드디어 1966년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숭동교회에서 모인 제4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의 자리인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총회장이 되기 전 총회 안의 여러 부서에서 진심어린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총회 협동총무로, 총회 전도부장, 부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군산중앙교회를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노회에서는 공로목사로 추대받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2권, 한영제편, p. 1255 참조).그가 오래 섬기며 목회했던 군산중앙교회를 개척 설립하면서 회상한 글 한편이 남아 있어 여기에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 처음으로 군산에 올 때 기억을 그는 이렇게 썼다. 경성에서 장항선을 타고 달리면 열차는 장항역에 도착한다. 장항역에서 연락선을 타고 도착하는 곳은 군산항이다. 한국 서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유명한 군산은 옛날 백제 의자왕 때 나당연합군에게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패하자 3천 궁녀가 백마강에서 몸을 던졌다는 그 백마강이 흘러 들어오는 곳이 군산이다. 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망국의 역사가 스민 광경을 지켜보던 역사의 시간은 흘러갔을지라도 그 흔적을 어찌 잊겠는가?이러한 숨막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독교 복음의 사자들이 찾아들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결과 이곳저곳 언덕받이에 교회들이 드러선 5대 항구도시로 발전한 고장이다. 이수현 목사는 전도자일 뿐 아니라 그는 음악도 좋아해 목소리도 곱고 찬송가를 잘 불러 음악가 목사로 알려져 있었다. 위에 기록된 군산을 비롯 여기저기 목회를 했으나 결국 45년의 목회활동 중 36년 간을 고향 땅 군산에서 목자의 역할을 했으니 그에겐 군산에서의 회포가 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건물없는 군산중앙교회에서 그가 당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한민국 온 민족이 기다리던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블어 군산지역에도 여러 개 교회가 여기저기에 개척설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수현 목사 역시 개복동교회를 사면하고, 1947년 4월 20일 중앙교회 개척을 결심하고 맨손 들고 개척을 시작하였다. 주일이 되면 건물이 없어서 산과 들을 찾아 장소를 옮겨가며 예배를 드리고 잔디밭에 머리를 처박고 피눈물나는 하소연의 기도를 드리며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군산시내에는 높고낮은 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데 왜 우리에겐 저런 건물을 주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기도하고 마음놓고 예배할 수 있는 예배당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교인들의 기도를 듣는 목사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게 하고 서글프게 하기도 했다. 맨손으로 개복동교회를 나와 몇몇 교인들이 울부짖던 기도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간의 노고를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함께 교회를 이룩하기까지 고생했던 교인 중 심학륜이 장로가 되고 지금은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이금은 임정덕 장로 등이 기도와 봉사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다. 이 목사를 도와 함께 개척한 초기 신자들이 오늘 중앙교회 이곳 저곳에서 믿음의 기둥들이 된 것에 대하여 평생 감사할 조건이라고 이 목사는 회고하였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편, 성은출판사 1978, p.666~668참조).그가 재임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8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개혁파 교회 세계대회에 본교단도 가입하도록 결의하다. ② 정치 제12장 2조 총회총대 10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을 7당회로 개정키로 하고 각 노회에 수의토록 하다. ③ 총회창립 50주년 기념화보를 발간하기로 하다. ④ 문교부에 사회단체로 등록해 정식으로 허가받기로 가결하다. 이수현 목사는 전도자로, 독립운동가로 지역사회 지도자로, 교단의 지도자로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봉사한 교단의 지도자로 헌신하다가 1984년 5월 28일, 89세의 일기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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