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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 제86회 총회장 예종탁(睿鍾卓) 목사
    경북 청도 출생예종탁(睿鍾卓 1936.8.30~) 목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각계리 327번지에서 부 예장기와 모 전두이 사이에 2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 역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노략하여 이 백성들이 마음놓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가고 있었고, 조선의 청소년들에겐 정말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경제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부모들이 처한 환경 또한 말이 아니었다. 농사터전에서 애써 농사를 지어 보았자 일제당국에 의해 공출당해야 했고 그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숨겨둔 양식으로 모두가 연명해야 했으니 그 고통과 생활고를 어찌 다 표현하랴. 그래도 다행인 것은 부모님께서 일찌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어 처음엔 팔조령(八助嶺)이란 높은 재를 넘어 대구남성령교회(현 대구제일교회)로 39리가 넘는 거리를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후일엔 청도군 풍각면 소재지 송서(松西)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의 초석을 다지었다. 종탁 소년의 가장 큰 축복은 바로 부모님들의 신앙의 그늘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는 어릴적부터 예배당에 나가 성경을 듣고 배웠고 찬송을 부르며 인격을 형성해 나갔다. 같은 면 소재지에 있는(학산리) 이서초등학교를 다니며 철없는 시절을 자연과 함께 마음껏 호흡하며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는 군청 소재지에 있는 사립학교인 모개중학교로 진학 20리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사회는 희망이 없고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나 부모님의 교육열에 힘입어 순조롭게 중등교육을 받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종탁 소년의 심적 밑바탕엔 신앙이 큰 밑거름이 되었고 힘이 되었다. 어릴때 전쟁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6.25전쟁의 여파로 북쪽으로부터 종탁소년이 살고 있는 청도에까지 많은 피난민이 밀어닥쳤고 청도를 거쳐 정처없이 부산으로 피난가는 행렬을 목격해야 했다. 처음부터 목회자에 대한 소명감이 분명동현교회 개척 설립·세계 각국에 선교사 파송방송 및 문서선교에도 지대한 관심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세계선교비젼 가져1953년 정전이 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갈 무렵 중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사립학교인 대륜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대륜학교는 민족주의자본에 의해 세워진 학교다. 그곳에서 조국과 민족의 중요성을 배우고 깨달았다. 일제하에서 태어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일찌기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정상적인 교육을 받게 된 것은 동시대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동료들에 비하면 종탁 소년에겐 주님의 은혜가 실로 컸다고 하겠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고 있는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 본과로 진학하였다. 고향교회인 학산교회(현 이서교회) 이병철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지 10여년 만에 주의종들을 훈련시키는 선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어느 누구보다 감격스러웠고 새로운 사명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총회신학교 제6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충현교회(김창인 목사)의 교육기관에 속해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맡아 열심으로 목회수련을 쌓아ㅏ다가 이듬해 11월 6일 충현교회의 후원으로 개척 전도사로 파송을 받게되었다.아직 예배처소를 마련하기까지 당분간 당시 충현교회 김경철 집사 개인 자택에서 6명의 개척교인이 모여 설립예배를 드리고 교회명을 서울 동쪽 언덕받이에 있다고 해서 동현교회(東峴敎會)라 명명하였다. 개척 이듬해인 1970년 4월 29일 서울시 강동구 마천동 3리의 3호에 성전 대지 100평을 매입하였다. 5월 17일 교회 대지위에 천막교회를 마련, 임시 예배처로 사용하다가 9월 17일엔 40평 규모의 첫번째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이어 1975년 6월 두번째 성전 대지 188평(마천동 184의 46)을 매입하였고 1976년 5월 13일 예종탁 목사 위임식을 거행했다. 1980년 4월 동서울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 노회를 섬기며 행정의 역량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9월 세번째 성전대지 452평을 송파구 방이동 64-12에 마련하였다. 교회가 은혜 가운데 점진적으로 부흥발전하여 지역 내에서도 중형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자 예종탁 목사는 해외선교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92년 2월 16일 아프리카 잠비아에 홍종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계기로, 1994년 12월 11일엔 에콰도르에 이영, 김진희 선교사 1997년 3월 2일 AX국에 한요셉 이한나 선교사를 계속 파송하였고, 그 사이 1999년 11월 20일엔 어느덧 교회설립을 30주년 기념예배와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이와같은 현지에 파송하는 선교사업 외에도 후원선교와 총회세계선교회(G.M.S)와 S.I.M 한국국제선교회 기독교방송국(C.B.S), D.O.M 선교회, 송파기독교연합회와 송파교경협의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문서선교 일환으로 문서선교(아름다운 동행)를 위해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같은 노력은 예종탁 목사의 선교열정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동현교회 2017년도 교회일람 p.32참조).2000년 9월 예장총회에서 예종탁 목사는 본교단 부총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2001년 9월 18일에서 21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6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총회의 행정책임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그의 리더쉽을 쌓았다. 총회선거관리위원장과 총회 정치부장을 비롯 기독신보 이사, 송파기독교연합회 초대회장, 송파경찰서 경목, 기독교방송 제21대 재단이사장(2003.2~2006.3)을 역임하면서 한때 어려움을 겪었던 C.B.S를 본 궤도에 올려놓은 역량을 발휘하였고, 기독교텔리비젼(C.T.S) 방송국 공동회장을 맡아 봉사하였다. 예종탁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오로지 한 교회만을 위해 전생애를 복음의 멍애를 매고 충성한 모범적인 목회자로 교회행정가로 충성 봉사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2017.2.19 오후 1시 인터뷰).이러한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미국에 있는 트리니티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 박사(D.D) 학위가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의 목회철학은 그의 설교 <세계선교의 비젼을 가진 교회>(성경 사도행전 13장 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안디옥교회를 예를 들면서 어떻게 세계선교비전을 이룰 수 있을까를 되새기고 있다. 첫째, 안디옥교회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마음을 가진 교회였으므로 세계선교비젼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안디옥교회는 희생정신이 투철했음으로 세계선교의 비젼을 실천할 수 있었다(역대 총회장의 증인 홍정이 편, 총회출판부 2005. p.289~292).그가 재임했던 제86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제비뽑기 선기시행을 위해 총회임원 선거규정을 개정하다. ② 북한교회 재건위원회 명칭을 총회 남북교회교류 협력위원회로 변경하다. ③ 총회교육의 개혁과 질적 발전을 위해 총회교육 개발연구원을 두기로 하다. ④ 대신대 칼빈대 M.Div 소지자는 총신 신대원 두 학기를 이수한 뒤 강도사 고시 자격을 부여키로 하다. ⑤ 대한성서공회가 발간한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은 재수정할 때까지 공예배사용을 유보하다. ⑥ 평동노회 분립키로(평등, 서북) 하다. ⑦ 교회간 거리 측정은 대지간 직선거리 300m 이상으로 하다. ⑧ 다단계 판매질의건은 교회에서 판매금지하기로 가결하다. ⑨ 전산문서(FAX)는 취급시 참고문서로는 가능하다. 원본문서만 정식문서로 인정할 수 있다. ⑩ 무지역노회에 소속한 교회와 목사가 지역노회 이적건은 공동의회 결의로 청원하면 교회와 목사를 이명해 주기로 가결하다, 단 고의로 이명해 주지 않을시는 지역노회 결의로 이면한다(제100회 총회 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 편, 예장총회 사무행정국 2016. p.35참조).예 목사 슬하엔 2남1녀가 있으며, 장남 예성철 목사는 아버지가 개척 설립한 동현교회의 바톤을 이어받아 성실한 목회자로 성장해 가고 있고, 차남은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해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예종탁 목사는 37년을 오직 한 교회만 은혜롭게 섬기고 2006년 3월 11일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필자가 볼 때 예종탁 총회장이야 말로 경북의 오지 청도(淸道)라는 개천에서 나온 한국교회의 용의 자리를 차지한 걸출한 기독교지도자라 칭찬할만한 신실하고도 겸손한 성직자 가운데 한 분이라 생각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3-23
  • 생명의 고난
    생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의미로 보아 살아 움직이는 시작이라는 뜻이며 비로서 그 창조는 창조자의 섭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생명에서 와서 작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세상 만물, 만사, 만상에서 그 사상(事象,events)의 정상적인 경로에서 자연스럽게 쉽게 그 무엇이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두 종류의 대상물을 구별한다. 예컨대 '창조된 대상물과 시간'에서 저절로의 우연 그리고 다양한 자연과정의 결과로 생긴 대상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눈(雪)송이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양 또한 복잡하다. 그러나 그 눈송이 하나하나는 영도C의 상태 하에서 물의 분자가 ‘자연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생긴 결과인 것이다. 눈송이 패턴을 딴 모자이크 타일의 디자인은 눈송이의 그것보다 더 이상의 대단한 디자인을 보여 주지 못함은 물론 모자이크 타일의 복잡성, 또한 눈송이의 복잡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움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자이크 타일에서 창조된 디자인들은 이 같은 패턴은 반드시 어떤 초월적인 외부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눈송이를 자세히 보면 정육각형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눈송이의 모양이 왜 육각형일까? 눈송이의 주요 성분은 물이다. 눈송이의 물분자가 안정적으로 배열해 얼어붙는 것이다. 물 분자는 온도가 내려가면 진동이 느려지는데 진동이 충분히 느려지는 순간 각 물 분자 속에 들어있는 전자들이 다른 분자를 끌어당겨 촘촘한 정육각형 배열을 이룬다. 이렇게 배열된 물을 육각수라 한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인간은 눈(설)을 가지고 그 이치를 따라 동계올림픽도 유도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놀랍게도 모든 것이 다 창조가 된 그 체계는 외부로 부터 오는 조직의 성질이 각 부분에 새로운 성질들을 부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성질은 체계의 부분 부분이 스스로 개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시간, 우연, 그리고 자연과정이 만들어 낸 체계의 질서는 ‘내부에서 온 결정’인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가 곧 ‘외부에서 결정한 질서를 가진 체계’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게하는 것이다. 여기에 빗대어 생명체계가 그 어려운 과정을 겪는 곳에는 반드시 어려운 ‘고난의 과정’이 따른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렇게 우주 전체와 삼라만상의 생명들은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그 원리대로 생명체계에 따라 질서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한 배려가 잘 반영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적 표준인 질서와 조직인 물질의 성질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기원이 특별한 창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바로 이는 “생명의 고난”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생명의 부활의 약동의 과정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바울은 본문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리도 명백하게 피조물은 창조주를 증언하고 있기에 실제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한 것이다. 창조된 질서 그 자체로서도 우리들 속에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다는 바울선생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의 증거들을 우리 주변에서 아무 까닭 없이 탓하고 원망하는 지천(至賤)이 많이 있게 됨을 보게 된다.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부터의 단절, 즉 영적단절 또는 영적 죽음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몸은 ‘고난과 생명의 소유’로 열매(존재)를 거두어야 한다. 이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려 나가는 하나님의 의지를 은혜라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자의 섭리의도는 생명체계가 질서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한 배려가 잘 반영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3-2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2
    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 02. 성경에 나타난 ‘남은 자’ 개념■ 서언“인류는 발전하지만 인간은 동일하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 역사는 언제나 더 깊은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영향력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인간의 죄된 본성 때문에 사탄의 영향을 더 쉽게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져드는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상황, 즉 그대로 방치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속(救贖) 사업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은 최악의 상태가 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특정한 인물을 통하여 역사를 반전시키는 일을 수행하신다. 그 특정한 인물들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따라서 충실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당대의 의인들이고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남은 자’들을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위 ‘개혁자’들이다. 성경에 나타난 사례들을 보면 대체로 그 과정은, 완전타락 -경고를 통한 개혁 시도- ‘회복’ 아니면 ‘심판’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역사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반복된 패턴이다. 큰 패턴이 있고 작은 패턴도 있다. 우선 대표적인 큰 패턴과 작은 패턴을 하나씩 소개하고자 한다. ■큰 패턴 -노아와 홍수 심판아담의 범죄와 타락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시 인류는 점차로 악해지다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늪으로 빠져든다. 그 죄악의 상태가 얼마나 극도에 달했든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한탄을 하실 정도였다. 홍수 심판의 결말을 보면, 그 당시 노아의 집 외에는 모든 인간들이 완전히 타락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아의 가족들마저 타락해 버리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그 흐름을 반전시키는 일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 절벽의 찰나에 하나님께서 그 당시의 ‘남은 자’인 노아를 불러내시고 그를 개혁자로 삼으신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하”(창 6:9)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개혁의 메시지를 주셨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창 6:17).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이것은 일종의 경고였고 개혁의 메시지였다. 성경에 나타나는 ‘개혁의 메시지’에는 언제나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는 심판과 멸망이 온다는 메시지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방주를 짓는 동안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하였다. 누구든지 그 메시지를 듣고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삶을 개혁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가면 용서를 받고 살 수 있었다. 노아는 이 메시지를 120년 동안 외쳤다. 그러나 노아의 외침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아무도 노아의 말을 유념하여 듣지 않았다. 결국 노아의 집 여덟 식구에 외에는 지구상의 모든 죄인들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사실상 홍수 사건의 결과를 보면,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은 필요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120년 동안 경고의 메시지를 외쳐도 한 사람도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아셨을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바로 홍수로 심판을 해도 하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유예 기간을 주신 것은,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시고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120년의 시간을 낭비하신 것이다. 이 홍수 패턴에서 보면, 인간은 늘 죄악으로 빠져들고,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개혁을 외치지만 좀처럼 돌이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작은 패턴 - 니느웨의 회개니느웨는 고대 앗수르 왕국의 수도였다. 니느웨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 흩어진 사람들 중에서 티그리스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 정착한 사람들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로서 여러 세기를 통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매우 큰 성읍이 되었다. 요나서에서는 당시의 니느웨를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욘 3:3) 되었다고 묘사한다. 어느 시대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사람이 많이 모이고 세속적으로 번영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죄악도 비례하여 증가한다. 니느웨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나훔 선지자는 그 성에 대하여 “피 성이여 …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나 3:1)다고 묘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도성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선지자 요나를 택하셨다. 우리는 이 요나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깊은 실상보다는 그저,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나온 특이한 경험을 한 선지자 정도로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요나가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외쳤다. 회개하고 개혁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니느웨 성이 무너질 것이었다.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언제나 개혁자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개혁의 메시지에 효력이 나타났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욘 3:5)고 회개하였다. 이 소문이 왕궁에까지 전파되었고,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욘 3:6)아 회개하며 온 백성에게 금식하며 회개할 것을 권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예정되었던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 이 니느웨 성의 이야기는 개혁이 성공한 사례 중의 하나이다. ■ 개혁자의 신앙과 인품‘남은 자’로서 당대의 개혁자인 노아는 평소의 생활 속에서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이 내려주신 법도를 지키며 살았던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이 된 것이다. 홍수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시대에,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시를 따라서 마른 땅에 방주를 지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와 핍박이 있었겠지만 개의치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큰 배를 만드는 조선(造船) 사업에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히 11:7)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개혁자들이 본 받아야 할 정신이다. 노아가 사람의 눈치를 보며 명예를 탐하고 물질의 욕심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도 노아처럼 오직 “말씀”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개혁자들이 필요하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3-17
  • 기독교인의 행복론 -39
    먼저 김치 한 단을 먹기 좋게 자릅니다. 양파도 적당하게 잘라 국 냄비에 넣고, 참치 캔 하나를 따서 넣어 뜨거운 가스불 위에서 김치와 버무려 볶습니다. 그러면 빠알갛던 김치가 하얗게 변하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깁니다. 그때 물을 김치와 다른 양념이 가라앉을 만큼 붓고 펄펄 끓입니다. 이십여 분이 지나면 김치찌개가 완성됩니다. 다음은 계란찜입니다. 사기 그릇에 달걀 4개를 깨뜨려 넣고 대파 잘게 썬 것을 새우젓 반 스푼(차 스푼, 나트륨이 적게 들어가도록 고려할 것)과 물 반 대접과 함께 잘게 섞습니다. 그리하여 사기 그릇 안에서 달걀 노른자가 거의 미음처럼 되면 대접이 들어갈 만한 큰 냄비에 물을 약간 부은 후, 그 위에 그릇을 얹어 넣고 7-8분 끓입니다. 그러면 계란찜이 됩니다. 계란말이 요리는 인터넷을 찾아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까 참고하십시오. 필자가 이런 요리를 하는 것은 퇴직한 남자들 고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이렇게 요리하고 나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그나저나 설거지통에 삼 시 세끼 먹고 난 그릇들이 잔뜩 쌓여 있네요. 싱크대 위에도 냄비와 후라이팬이 쌓여 있습니다. 저 정도를 설거지하려면 40분은 족히 걸립니다. 설거지를 하기 전에 욕실 앞에 놓인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립니다. 그래야 아내가 퇴근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진 시간 안에 경제적으로 운용됩니다. 목표는 두 시간 안에 후딱 해치워야 합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끝내니,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네요. 그 전에는 무얼 했냐고요. 사색하고 글 쓰느라 하루를 거의 보냈지요. 아내에게 글 쓰느라고 집안 일 못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이 양반, 모르는 소리 허시네. 글 얘기가 나오면 대부분의 주부들이 글 써서 돈이 되느냐, 밥이 나오느냐며 나가서 돈 벌어 오라고 하는데, 그런 바가지 들을 일을 뭣하러 하지요? 차라리 나 혼자 실컷 사색하고 나서 아내가 퇴근할 즈음 해서 두 시간만 부지런 떨면 될 것을. 아참. 요리하느라고 청소할 시간이 부족하네. 우선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대략 테이블 위만 정리해 놓고 청소했다고 뻥쳐야겠다. 눈치를 봐서 아내의 검열만 잘 끝내면, 이삼 일은 청소 안 해도 아내가 눈감아 주지요. 이제 요리까지 해 놓았으니 아내가 집에 들어서서 칭찬해 줄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네요. “여보. 나 왔어요.” 아, 저 꾀꼬리같은 아내의 목소리(나만 그렇게 생각해도 좋음).“별 일 없었지요?”“당근이지.”아내가 싱크대 앞으로 가서 설거지한 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청소는 했나요?”아내가 거실에 먼지가 있는지를 보려고 얼굴을 바닥쪽으로 기울입니다.“……”“청소 했냐고요?”“어? 으으으응”“먼지가 약간 있는 것도 같고…”아내가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벼락같이 뛰쳐나옵니다.“여봇. 화장실 청소를 안 하면 어떡해욧?”아이쿠.“아니, 첨지(우리집 똥개) 똥오줌을 시간마다 치우느라 시간이 모자랐어.”사 실 딸아이가 데려온 첨지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워낙 그놈의 덩치가 커서 수시로 오줌을 질러대는 것도 만만찮습니다. 젊었을 때는 우리 아이들 똥기저귀도 안 갈아 주었었지만, 요즘에 첨지 똥오줌을 뒤처리 안 했다가는 아내한테 혼쭐납니다.왜 이렇게 사냐고요? 나도 이렇게 사는 걸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어 보고 터득했다고요. 여성이 폐경기를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 남성처럼 거세지는 데 비하여, 남성은 뱃살이 늘어나면서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가슴에 커다란 젖무덤이 생기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물어 보았지요. 형들 왈, “집 안에서는 무조건 여편네 말 들어야 헌다. 그것이 나이 들어 편하게 사는 거여.” “아이고 형님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셨나요?” 이런 얘기가 오갔던 것도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자 나이 예순을 바라보니, 아내의 기가 팍팍 살아나는데 아내 뿐만 아니라 처형과 처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더구나 처형은 아내에게 “네 남편이 원래 띨띨하잖냐?”하면서 대놓고 구박을 합니다. 어쩌다가 집안의 군기라도 잡을라치면 아내는 “삼식이가 웬 말이 그렇게 많아. 집안 일 하기 싫으면 나가서 돈 벌어 오면 될 거 아니야.” 허 참. 내가 기가 막혀서 매 달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될 만큼 연금을 타 오는 데도 구박이 저렇게 심하네요.그 러나 어쩌겠어요. 삼십여 년을 같이 살다 보니 정은 들었지. 이 나이에 집 나가서 어디 발 붙일 데라도 있나요? 그래서 꼼짝 없이 가사 앞치마 두르고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할 수밖에요. 어디 나만 이런가요? 나이 든 남자들, 모두의 번민이지요.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03-16
  • 성육신한 예수교회-42
    예전에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얼마나 크게 불이 번지든지, 강원지역에서 일어난 불길이 바람을 타고서 지경을 넘어 접경지역으로 불이 넘어오게 되는 형편이 되었다. 이 시점에 강원 도지사에게서 해당지역 도지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 내용인즉, 내일쯤이면 강원도의 산불이 그 도로 넘어가게 될 터이니 ‘불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난 불을 그가 책임을 맡은 도에서 잡아내야 하는 커다란 과제가 갑작스레 생긴 것이었다. 도청에서는 불을 받을 준비를 하느라 갑작스레 긴급 상황실이 설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해당지역 도지사는 아내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밤을 지새우며 엎드리었다. 그러고 나서 아침 일찍이 재해대책 본부로 들어왔는데, 또다시 강원도 도청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이제는 불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지나간 밤에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지만, 바람이 힘을 잃고 잦아들어서 불을 모두 끌 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야훼 하나님께 엎드린 기도가 상달되어서 강원도에 일어난 불이 잠재워진 것이었다.요즈음 우리나라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면 심상치가 않다. 국민들 모두가 불안해하는 요인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한에서 사사건건 터지고 있는 일들이며, 중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수위를 높여가는 압박과, 일본의 우향우 행보는 웬만한 지혜나 능력으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정황이 된지 오래이다.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사정이 누구하나 섣부르게 다룰 수 없는, 커다란 힘이 표면적으로 대치되어 온 상태이다. 이러한 조국의 상황을 어떻게 풀어서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역사적인 경험을 참조한다면 1940년 5월 10일에 영국의 수상이 된 처칠에게서 그 해법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처칠이 뒹케르크 만에서 두개의 독일군단에게 포위된 자국 군과 프랑스 및 벨기에 군대 338,000여명을 영국으로 무사히 철군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영국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게 뒹케르크에서 포위되었다는 정보를 접하였을 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영국의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뒹케르크 만은 해수면이 얕은데다가 모래톱이라서 그 많은 병력을 실어 나를 규모의 배를 근접시키기도 어려웠고, 그 많은 병력을 짧은 시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영국으로 퇴각시킬 방안이 전무하였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로지 한 가지 방안에 집중하였다. 모든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하여주기를 라디오방송으로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5월 26일에 시작된 철군 작전은 6월4일 완전하게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서 영국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철군하는 지역에는 해가 나 있었던 반면, 독일군대 지역은 지속적으로 비가 내려서 탱크와 군대가 이동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9일 동안에 걸쳐서 구축함을 비롯한 860여척에 달하는 아주 작은 다양한 선박들까지 모두 동원되어서, 총 338,226명의 군사(영국군 192,226명 프랑스군 139,000명)가 탈출에 성공하였다.우리가 역사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지혜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사람들에 의해서만 비롯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역사나 여호수아서의 역사들이 순전히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만큼, 오늘 우리의 강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순순한 인간들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도력을 갖춘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힘일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이 단순하게 우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맞질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땅과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강림하여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작금의 국내외의 사태를 보면서, 자칫하면 예전처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와 미국군대 할 것 없이 이 땅에 들어와 잔치를 벌이려는 기세이다.허지만 이 땅의 궁극적 주인은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이시다. 이 땅이 토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공동체를 더럽혀온 역기능적이고도 부정한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이 세력들을 딱히 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청 앞 광장에 표면화된 혼탁해진 물길이다. 이 오염된 세상이 정화되고 질서가 잡히려면 필연적으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이 있어야 하리라.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능력을 붙들 수밖에 다른 방안이 없으리라. 전에도 책임을 진 지도자들이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여 왔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밤과 낮으로 엎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03-16
  • 74. 제97회 총회장 정준모(鄭浚模) 목사
    경남 울산 출신정준모(鄭浚模 1955.3.17~) 목사는 경상남도 울산시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상장하였다. 그가 태어난 역사적 배경을 잠시 돌이켜보면 1950년 민족통한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해 국토가 분열하고, 휴전으로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일제 시대에 비해 행운이라면 그래도 준모 소년에겐 행운이었던 셈이다. 당시 대구와 경북지역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으로 확정되어 부산에 이어 대구에도 윌리엄 베어드(William M.Baid 배위량)와 그의 처남 제임스 아담스(Rev. James E.Adams)에 의해 선교지부(Mission station)가 설치되었고, 대구에 이어 안동에도 선교지부가 설치된 후라, 대구는 물론 경북 전역에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준모 소년이 살고 있던 산촌에도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고, 초등학교와 중학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며 열심으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 살면서도 이미 상당히 개명(開明)된 사고를 가진 부모님의 덕택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당시 2년제였던 대구교육대학에 진학, 장차 이 나라를 어깨에 메고 나갈 후진양성의 꿈을 꾸면서 열심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업과 인격형성에 미친 것은 신앙이였다. 주의 종이 되겠다는 더 큰 세계적인 비젼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 대구 근교에서 근무하게 되자 내일에 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부족한 학문을 보충하기 위하여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해 문학사(文學士) 학위를 받았다. 앞으로 다원화 되어 가는 사회에 교회가 펼쳐나갈 꿈을 꾼 것이다. 이어서 영남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학교의 사회적 풍토와 아동의 사회화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고, 이때가 1981년이었다. 이어 총회신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 3년 과정을 마치고 ‘성경 영감교리에 관한 역사적 고찰과 성경적 증거’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Div), 총신대학교 일반 대학원에 진학 ‘Samuel F.Moor 한말선교사 활동과 사회개혁에 관한 연구’로 신학석사(Th.M) 학위를 취득하였다(1987. 3). 그리고 좀더 시야를 넓히고 선진신학의 조류를 터득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개혁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석사 과정과 선교학박사 과정을 동시에 이수하였고, 아프리카 남아공의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실천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대구 인근 지역에서 준비된 사역자로 활동하던 중 대구시 남구 송현동에 있는 대구성명교회(大邱聖明敎會)로 부터 부름을 받아(1994년 12월 8일 부임) 20년이 넘게 한 교회에서 한 생애를 주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여 성명교회를 오늘의 대교회로 이끌어 낸 중심인물로 우뚝서게 되었다. 교육대학 졸업한 초등학교 교사 출신미국과 남아공 등서 유학한 신학자교회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제자로 청소년 수련원 통해 미래교회 비전 제시“사회법정 고소자는 소속노회가 면직”결의그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 침산제일교회 고등부 수련회 마지막 철야집회에서 강사로부터 바울의 인생관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자신도 바울 사도처럼 주를 위해 살게 해 달라고 서원의 기도를 드렸고, 이후 6년 동안 위의 기록에 나타난 세상학문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 성직의 길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대구 성명교회30년사, 남문영 편, 코람데오 발행 2001 대구 초판 p.95 참조). 정준모 목사가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울산은 오늘날엔 자동차 산업과 제조업을 위주로 한 공업단지로 유명하지만, 당시엔 한가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산에 일찍 도착한 베어드에 이어 독일계의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왕길지(Rev. George O.Engel) 선교사에 의해 울산지방에는 일찍 기독교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장로회 사기(史記)에 의하면 1895년(을미년)에 울산 병영교회(兵營敎會)가, 1901년(신축년)엔 전읍교회(錢邑敎會)가 설립되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 1928년 p.31, 89참조). 청년기에 들어선 정준모 목사가 대형교회로의 성장기초가 마련된 성명교회에 부임 하자마자 그의 포부는 21세기 모델교회로 예수의 제자되어 제자삼자라는 비전을 선포한 것이다. 정목사가 부임하기 직전 사역자는 법통으로 이름난 조정호(曺正縞) 목사였다. 조목사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을 졸업한 노회안에서도 원칙과 정직으로 통하는 법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그가 10년 넘게 내일의 중흥을 꿈꿀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잘 다져놓은 교회를 패기에 찬 준비된 젊은 목사 정준모가 바톤을 이어 받아 비약할 수 있었다.정목사는 성명교회의 경건한 예배와 봉사의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모시켜 복음의 공동체로 생명이 넘치는 교회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서는 제자화 훈련을 급선무로 여겼다. 1995년 1월 10일 위임식을 거행한 후 교회 앞에 제시한 비젼은 ‘감사하는 25년, 꿈꾸는 25년’이란 목회 표어아래 변화·비젼·역사·치유를 목회비젼으로 제시하고, 이 목표달성을 위해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바로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계획 아래 권찰들을 훈련시켰고, 프리셉트 성경공부반을 개설 전교우들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995년 교회 설립 25주년을 맞이해서는 25주년에 촛점을 맞추고 전교회 기관이 동원되어 백일장, 직분자 좌담회, 역사자료전시, 부서별 찬양대회, 미자립교회 지원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 교인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며 스스로 교인됨의 긍지와 교회사랑은 주님의 은총임을 자각시켰다. 그리고 성경공부 정착화에 힘쓰며 지역사회 발전에 맞추어 새로운 성서(城西)시대를 꿈꾸며 교회 목회비젼으로, 심령부흥회와 청년들의 7대 사랑운동전개 등 미래교회상을 펼쳐나갔다. 따라서 비젼을 향한 헌신의 결과로 21세기 비젼과 대구북부지역에 성서청소년수련원을 마련키로 하고, 택지준비작업에 들어가 기도 중 몇 차례에 걸쳐 청소년수련원 부지가(4026평) 마련되기에 이르렀고, 이곳은 이후 성명교회비전센터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 사이 1997년 소위 경제위기로 알려진 IMF시기를 맞았으나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잘 극복하고 오늘의 21세기 대구성명교회 글로벌시대를 열게 되었다. 2000년은 성명교회가 3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였다. 이렇게 교회가 순조롭게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준모 담임목사의 대·내외 활동 영역 또한 확대되었다. 대구기독교방송국에 정기 설교방송과 기독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로, 총신대학교와 모교인 대구대학교에도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고, 교단지인 기독신문 논설위원 및 교단 장년부 주일 공과집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로, 정책위원으로 대신대학교 교수 및 재단이사로 총회교육부서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2011년 9월 20일 제96회 예장총회에서 부총회장에 당선되고, 이듬해 2012년 9월 17일~21일 사이 그가 시무하던 대구성명교회(비젼센터)에서 개최된 제9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어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그가 재임했던 제97회기에서 결의된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총회설립 100주년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로 하고 종합발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다. ② 총회임원 선출을 절충형(제비뽑기+직선제)으로 하기로 규칙 개정하다. ③ 총회설립 100주년을 기하여 전면적인 헌법 개정을 위하여 헌법전면 개정위원회를 설치키로 하다. ④ 고 박형룡 박사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하다. ⑤ 총회산하기관의 총회결의 없는 부동산 구입은 불가하며 매년 공인감사기관의 감사결과를 총회에 보고하도록 하다. ⑥ 노회와 총회의 결정사항에 대하여 절차없이 사회법정에 직접 고소하는 자가 패소할 시 소속노회가 면직하도록 하고 노회는 5년간 총대권을 정지하기로 가결하다. 정 목사의 슬하엔 2남1녀의 자녀가 있으며 아들들은 모두가 미주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사명자의 길을 걷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3-16
  • 청년 주일을 맞아
    청년이라는 성서적 의미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청년을 귀히 여겨 이들을 유혹으로 부터 보호하려 했으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 애썼음을 알게한다. 시편에서 보면 '젊은이가 어떻게 해야 그 인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길, 그 길뿐입니다.'고 하며 잠언에서는 '어수룩한 사람을 슬기롭게 하여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여 주는 것이니'8,에는 아이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하였다. 그리하여 성서에 청년에 관한 기사가 많은 까닭을 알게한다. 말하자면 요셉의 총리 등극, 다윗의 왕위 등극, 이사야의 소명, 예수의 공생에 시작, 젊은 12사도들이 주를 따름, 젊은 바울의 회심 등은 젊은 청년의 때에 일어난 일임을 알게 한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의 약속의 말씀에서 '시간의 때'를 알게 한다.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함에 주목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시간 안에서 "때"란 경우에 그 부분을 말하는 데 여기에 알맞은 '기회'를 적당한 시간으로 성서는 시기, 시대에 연대하는 의미를 알게한다. 한 시대를 바쁘게 살아야 하는 진정한 의미와 참된 가치를 찾도록 도와주는 구도자로서 삶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한다. 이 삶은 처하여진 삶의 현실에서 사회, 정치, 문화, 경제를 시대적 정황에서 하늘나라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전도서3장에서는 '매사에는 때가 있다' 한다. 젊은 예수님의 시대인식은 낡은 시대 유효시간은 끝이 나고 "하님의 나라"고 하는 새 역사를 펼쳐야 한다는 시대인식을 알게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시대적으로 나타난 징후는 경제적 양극화 문제로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으며 무역 수출과 수익은 최고로 늘고 있어 국민소득 또한 높아졌지만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늘어나는 노인인구는 높아지고 여기에 따른 자살현상은 늘고 있으며 지식은 많아지는데 윤리적 무식함은 날로 늘어나 자기 이기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무례함의 그 삶은 오늘의 사회현상으로 무례함의 소용돌이에서 휘말리고 있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젊은 예수는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적, 인간적 문제에 대해 젊음으로 친히 그 삶에 젊고 순수한 기백을 나타내 보이신다. 율법의 규범에 대해서는 그 근본 의미에 뜻을 갖게 하고 유대교예식의 규범에 대하여는 더욱 완화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 가지심에 주목하게 한다. 예수님은 '정결법', '안식일 법', 에 대해서 유대교의율법과 재의 규정을 시행하는 사람들의 냉혈적인 태도와 비인간적인 제도를 분노하였다. 젊은 예수는 압박과 피해를 보는 것에 긍휼한 마음으로 응대해 주신다. 예수님은 비인간적인 굴레에 대하여는 분노했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여기서 깨닫는 것은 이 젊은 예수에게서 창조주와 구속주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창조는 무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주이시며 종말론적인 시간은 구원의 시간으로 창조는 시간의 시작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한다.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서 한 생명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을 삶으로 살아간다. 생명나무가 씨알로 땅속에 묻히어 잎과 줄기를 내 보이며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씨알을 남기며 죽음이라는 시간을 따라 가듯이 한 생명의 과정에서 젊음을 가져야 한다. 33세의 예수의 젊음은 십자가로 생명의 씨앗으로 삶의 생명을 알게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3-16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1
    01. 빛과 어두움의 충돌사람이 범죄하므로 죄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하는가? 다윗은 인간의 출생에 대하여 매우 분명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의 유전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속절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점에 대하여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이와 같은 인간의 선천적인 죄악성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보다 죄된 본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악행을 일삼아 살아가게 된다. 결국 사람의 죄악적인 상태는 극도에 달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한탄하실 정도가 되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측에서 볼 때에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개혁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노아였다. 그 이후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타락과 개혁 사이를 오고가는 단진자(單振子, Simple pendulum: 좌우로 흔들리는 추)운동을 보게 된다. 노아 이후의 부흥기에 뒤따른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에 의해서 형성된 이스라엘 백성의 배도와 타락, 그리고 예수 제자들의 출현, 제자들에 의해서 부흥했던 그리스도교가 후일에 타락한 결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로마 가톨릭교회이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자들의 프로테스탄트교회, 그리고 지금은 종교개혁의 여파로 발생한 개신교회조차 타락하면서 그 단진자 운동처럼 반복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개혁은 중세의 종교개혁으로 완성된 것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개혁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그동안 역사를 통하여 반복된 단진자 운동에 의하면, 지금은 어떤 주체에 의한 또 다른 의미의 개혁이 일어날 시기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에 의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리나 신조가 완성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기대하는 개혁은 그 바로 세워진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나타나게 되는 신앙의 개혁,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개혁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1) 중세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그 배경의 역사, (2)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3) 당면한 제2의 종교개혁의 과제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분법적 개념성경의 내용 전체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역(使役)과 그 구속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탄의 궤계가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투쟁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선(善)과 사탄의 악(惡)이라고 하는 두 개의 큰 축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선’은 의(義), 사랑, 구원, 알곡, 양(羊), 성령 등의 용어들과 함께 한 꾸러미를 이루고 있고, 사탄에게 속한 ‘악’은 불의(不義) 혹은 불법, 미움, 멸망, 쭉정이, 염소, 악령 등의 요소들로 또 다른 하나의 꾸러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예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를 대표할만한 중요한 대립 용어 중의 하나는 ‘빛’과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불러내어 그의 사도로 삼으시면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행 26:18) 하는 것이었다. 후에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살전 5:5)한다고 언급하면서 ‘빛’과 ‘어두움’의 개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하면, 개혁이란 ‘어두움’ 속으로 ‘빛’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 빛이 간직하고 있는 열기에 의해서 주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빛을 싫어하는 어두움의 속성 때문에 빛과 어두움이 충돌하면 투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어두움의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요 3:19)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개혁의 참 의미는 ‘빛’을 따라 사는 것성경에서 ‘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창세기 1장의 창조 시에 나타나는 빛은 물리적 빛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물리적 빛 속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태양에서 발산되는 빛에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를 ‘빛’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도 ‘빛’이라고 하였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어두움에서 불려 나와서 빛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빛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빛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 의미가 명백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그 빛을 유지할 수 있고 어두움이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신자들이나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된 인간의 속성을 따라서 살기 때문에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는 언제나 죄악의 세력이 크고 강력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어두움의 세월이 훨씬 깊고 길었고, 빛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를 몰라보고 싫어하였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래서 빛 즉 말씀의 능력에 의한 의로운 힘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두움이 즉시로 대결하여 싸워서 그 힘을 소멸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 죄악 세상에서 ‘개혁’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투쟁과 피흘림이 없이는 개혁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의 실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는 “말씀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되어 왔다. 필자는 이번 종교개혁 특집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여 부활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엔딩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03-03
  • 사순절을 맞으며
    그리스도인은 “사순절을 맞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부활절을 앞두고 자신의 신앙을 보다 깊이 생각하며 지나온 삶의 태도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결단하는 신앙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신약성서에서 교회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부활절 전까지의 6번 주일인 40일 간의 수난 기간 절기로 지키는 사순절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 받으신 일과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신 일을 기념하는데 그 의미를 가진다. 흔히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교회력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을 두는 때 이다. 신앙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기에 사순절은 인생의 광야를 살아왔던 삶을 체험하며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 자연이 자연 순환의 법칙을 따르듯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 갈 것을 생각(창3:19)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며 세례 받을 때의 그 결단을 생각하며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는 사순절의 의미를 안기는 것이다. 예컨대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며 준비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삶을 같이 하심을 알게 한다. 또한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지으신 후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시기 위해 40일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심을 알게 한다거나 또한 에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의 민족이 노예 생활을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까지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계명을 받기 위해 40주야를 지켜야 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기 위하여 40일간을 밤낮으로 걸어야 함에서 ‘40’이라는 숫자'를 알게 한다. 40이라는 기간은 속죄함을 받은 은혜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함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회개의 속죄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준비의 마음으로 신앙해야 함을 알게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한다. 이렇게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사순 시기를 이 ‘재(災)의 수요일’로 부터 시작하여 재의 수요일 후에 첫 번째 주일을 시작하여 사순6주일과 재의 수요일로 주님의 성지 주일로 지키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사순절을 맞아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메시지에서 나타난 삶의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의 죽음의 복음은 그 사실(Fact(事實)이 무엇인지를 알게 것이다. ‘고난은 고통을 받는다는 일만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고난과 고통은 다르다.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실이 아니 된다. 사실인즉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과 복음’은 이를 위해 괴로움과 어려움을 맞는 ‘고난’을 겪은 것이다. 예수님의 길은 죄인의 고통이 아니라 삶의 의미로 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 길은 복음과 영광을 위한 고난의 길임을 알게 한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영광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고통으로 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고 고난으로 가는 영광과 복음을 위한 삶의 길이 곧 승리의 길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복음이 착함과 선함의 기준이 되는 복음이라는 그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재(Ash)재의 수요일은 나를 불태우고 나의 삶과 나의 정욕을 불태운다는 의미가 더 여기에 그 내용이나 깊은 뜻이 함축(含蓄)들어 있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순절은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가 생동하는 삶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기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사순절은 세상.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 구속성으로 삶의 진가를 보여주는 절기인 것이다. 이는 생명이 살아나는 이 “사순절을 맞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사는 방법으로 그 고난으로 의미와 생활을 신앙생활로 깊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3-03
  • 73. 제90회 총회장 황승기(黃承起) 목사
    충남 서천 출생황승기(黃承起 1938.2.17~) 목사는 충청남도 서천 출생으로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소명을 받아 선지학교를 진학하기까지는 녹록한 여정이 아니었다. 승기 소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해에 태어났으니 그 시기는 일제가 조선의 목줄을 쥐어잡고 마지막 숨을 조이는 소위 일제말기여서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의 성장과정 역시 순탄할 수 없는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하며, 정치적으로는 조선이 끝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고물기차처럼 미래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시기였다.그는 농촌에서 부모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래도 큰 희망이었고 큰 위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열강제국들도 조선은 염두에도 없었고 민족지도자들은 조국해방을 위하여서는 힘이 있어야 된다고 러시아로, 만주로, 미국으로 내일을 기약하고 하나 둘 해외로 떠나가야만 했다. 일제의 학정은 도를 넘었다. 이 민족을 짐승처럼, 노예처럼 취급하기 시작하였고, 내 손으로 피땀흘려 가꾼 농산물도 공출이란 명목으로 싸그리 탈취당했으며, 아들들은 징용으로, 딸들은 취직을 미끼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납치돼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승기는 그래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8.15광복을 맞이하였고, 조국의 기초 교육기관이었던 국민학교 교육을 해방과 더불어 받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 속에 있었으나 점점 안정되어 갔고, 승기 소년 역시 교회와 학교라는 기관에서 지덕체(智德體)의 삶의 본질을 터득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 남부지역 고향서 목회인본주의적 교회성장주의 경계교계 안팎의 여러 기관 맡아 교정에 기여‘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적극 참여“면직 확정된 목사는 교단 산하 교회서 성례나 예배 집행할 수 없다” 결정1959년 서울에 있는 총회신학교 예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본과(3년 과정)로 진학 본격적인 목회자 훈련을 받게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곳이 고향에 있는 고내곡교회였다. 농촌의 자그마한 교회였으나 신학훈련 후 처음 부임지라 발이 부릅트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앙적 열정을 쏟아 부었다. 얼마 후 고내리교회와 홍산교회를 거쳐 공덕중앙교회를 담임했고, 후에는 강경제일교회와 논산중앙교회에서 자리를 잡고 목회사역을 하던 중 대전남부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교단의 중진이신 박요한 목사로부터 후임으로 와서 목회해 달라는 부름을 받아 대전남부교회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그때가 1987년 8월 1일이었다.황승기 목사는 주변을 신뢰하고 포용하며 후진들에겐 관대하지만 매사에 원칙 적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만은 개혁주의적이고 보수성이 강해 자유주의적 신앙에 대하여서는 엄격하고 단호하였다. 황승기 목사는 철저한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성경에 입각한 정확한 해석과 적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목회 역시 역사적 칼빈주의에 입각한 목회였다. 교회를 운영하고 치리하는데 있어서도 외형적인 성장을 위한 인본주의적 방법보다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교회를 이끌어 갈려고 애썼다(대전남부교회 50년사, 임해순 편, 금강문화사 2005 대전, p.96~97참조). 그의 대표적 설교라 할 수 있는 본문 사도행전 20장 25~35절을 인용한 <교회를 보수하자>라는 설교에서 그의 목회정신과 철학이 잘 표현되고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신앙생활로 판별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과 생활이란 합성어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내우외환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수하여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 p.340 참조).그에게는 교정(敎政)의 수완도 있어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직분을 맡아 교단과 교계를 위하여서도 기여하였다. 1989년 제74회 총회에서는 총회 부서기로 활동하였고, 1990년 제75회 총회에서는 서기로 교단행정을 맡기도 하였다.총회 안에서도 법통으로 인정되어 85회기 선거관리위원장, 87회기에선 총회재판국장을 맡아 교회의 질서와 총회의 기강확립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경목부장,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와 재단이사로 교단 인재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총회 인준신학교인 대전신학교 교장과 이사장으로 봉사하며 후진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지방에서 사역할 때에는 군(郡) 정화위원과 강경경찰서 경목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청주신학교와 대전산업대학에 출강, 사회를 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황승기 목사의 목회사역 중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사회 봉사분야가 있다. 그것은 한동안 한국교계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랑의장기기증운동>에 심혈을 기울인 일이다. 이 일에는 설립자 박진탁 목사와 함께 초창기부터 계속 참여해 나중에 운동본부 재단이사를 맡았고, 대전 충남 본부장을 맡아 교계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회자로써, 지역사회 지도자로써 생명존중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폭넓은 신앙과 지도력에 바탕한 일이었다.1992년엔 대전시기독교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교계지도력을 이끌어 선교에 이바지 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대전엑스포 당시 <EXPO 선교협의회> 대표회장으로 선교하는 공을 쌓기도 했다. 황승기 목사의 이와같은 폭넓은 대외적인 활동으로 대전남부교회를 대전의 중심교회로 인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고, 이와같은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5년 9월 27일에서 30일까지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9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그가 재임했던 제90회기에 결의된 중요 안건을 적어보면, ① 1979년에 이탈한 개혁총회(정규오측)와 합동하다. ② 총회 임원선거 규정을 <총회선거규정>으로 개정하다. ③ 성서공회와 합의에 의해 수정된 개정개역판(제4판) 성경을 본교단에서도 채용하기로 하다. ④ 2007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사업을 총회 산하 각 노회 교회기관 전체가 참여하여 전개키로 하다. ⑤ 서북노회 소속 평강제일교회 및 광성교회 가입을 취소하고 총신대학 교수회가 제출한 박윤식 관련 연구보고서를 총회공식입장으로 채용하다. ⑥ 총회 규칙상 총무선출과 관련 조항을 개정하다(임기 5년, 지역순환 구도로 선출) ⑦ 성경과 헌법과 총회 결의를 무시하고 교단 및 총회장을 피고로 하여 소송을 제기한 자는 교단 산하 모든 공직을 정지시키기로 하다. ⑧ 면직 확정된 목사는 교단 산하 교회에서 성례나 예배를 집례할 수 없다. ⑨ 2000년 제85회 총회에서 수정된 7년에 1차식 시무투표의 기준년도는 헌법개정일 공포(2000년 9월)로부터 시행한다. 황승기 목사는 대전남부교회 부임 후 전임 박요한 목사에 이어 한 교회에서 두번째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 슬하에는 최지선 사모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그 중 2녀는 목회자 사모가 되어 미국 유학 중에 있으며, 나머지 자녀들도 부모의 신앙을 대이어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구성원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대전남부교회50년사, 임해순 편. 같은책 p.96~97참조). 황승기 목사는 그의 체구가 말해주듯이 대전남부교회와 한국교회의 든든한 기둥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신앙의 용장이기도 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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