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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7. 제73회 총회장 이성헌(李聖獻) 목사
    경북 울릉도 출신이성헌(李聖獻 1924.6.1.~ ) 목사는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부친 이종운과 모친 이계연 사이에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성헌이란 이름으로 개명(改名)이 되기 전에는 성우로 불렸다. 이 성헌이 태어난 울릉도에는 침례교 신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울릉도 전지역에 세워져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80퍼센트 이상이 침례교회들이다. 이성헌 소년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조선 천지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간지 오래였고, 백성들의 생활상 역시 먹고 살아가기에 급급하였던 때였으니 섬이었던 울릉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섬에서도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에게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컷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컷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당시의 현실이 소년 이성헌의 가슴 속엔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을 통하여 일본 대학방송통신강좌에 중학과정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비록 어려운 집안 사정이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방송통신강좌를 통해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성헌 소년이 18세 되던 해에 온 가족이 정든 고향 울릉도를 떠나 바다 건너 상상만 했던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그에게 육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고 꿈을 실현해 낼 수 있는 활동무대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어서 먼저 생활의 기초 터전을 마련해야겠기에 양복점 보조일(시다시)을 시작해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시대적 상황은 그가 또 다시 원치않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감리교 유재헌 목사 영향받아 감리교 신학교 졸업 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 공부명신홍 목사 요청으로 대구 서문교회 맡아대구신학교 교장 등 후학 육성에 헌신 당시 일제는 대동아(大東亞) 경영권 확보를 위한 야욕으로 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내몰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래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찾아 간 곳이 강원도 철원의 일본인 농장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다.이성헌은 1945년 8월 17일자로 징병소집을 받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징병 직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성헌은 제대로 병명도 모른체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앓아 눕고 말았다. 어머니는 장로였던 친정 아버지를 따라 신앙생활을 올곧게 하신 분이었다. 거기에다 성품까지 온화하고 인자한 분으로 성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어머니는 마음의 소원을 품고 그를 부흥회가 열려 한창 진행 중인 장흥교회로 그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갔다. 그때 부흥강사로 오신 분이 감리교의 유재헌(兪載憲) 목사였다. 유재헌 목사는 해방 전에는 일본 경찰당국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교파 배경이 없는 독립교회라는 이름으로 목회를 하다가 일경(日警)에 의해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금강산에 연금되어 있다가 해방이 되면서 석방된 후 철원에 있는 장흥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온 것이다. 그 당시 장흥교회는 온 교회가 힘을 모아 한탄강 상류에 ‘대한수도원’을 짓고 있었다. 그 수도원은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기도원이었다. 청년들은 그에게도 함께 수도원 짓는 일을 권유하였다. 수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공사를 하면서 청년들은 찬송도 부르고 때로는 간증을 하며 신앙생활의 체험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때 성헌에게는 저들이 저렇게 절실하게 열정적으로 정성을 기울여 수도원을 짓고 찬송을 부르며 봉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은 생각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저들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겠다는 감동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둡고 캄캄한 강가의 굴속에 자리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간절함 속에 기도하던 그날밤 자정이 넘었을 무렵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성우야!(성헌으로 개명하기 전 이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마태 19:24). 그 굴속에서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의 눈이 변하였다. 날마다 보아오던 것들이 새롭게 보였고 새롭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기쁨이 넘쳤고 몸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일주일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그를 보고 유재헌 목사는 그의 이름을 성헌(聖獻)으로 개명해 주었다. 그 때가 1945년 11월 8일이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유재헌 목사의 추천으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서울생활은 궁핍하였으나 학비 마련을 해가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신학교 3년 과정을 마쳤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더하였다. 일본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유재헌 목사로부터 부흥회 인도차 출타하게 되었으니 본 교회 설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 왔다. 잠시 유학의 길을 멈추고 1946년 10월부터 경기도 용인의 용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그후 그는 다양한 교단 가운데 전통적인 장로교회 신학을 공부해볼 마음이 생겨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현 총신대학교 전신)에 편입하였다. 당시 해방 이후에 장로교신학교가 재편되면서 편입생으로 입학해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2월 12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서문교회 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서문교회 명신홍(明信弘) 목사로부터 그가 서울 장로회신학교에 강의 차 출타 중일 때 설교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이 때가 1949년 11월 추수감사주일이었다. 그는 이때로부터 1995년 11월 17일 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아들 이상민 목사에게 물려주고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한생을 서문교회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한 목회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성헌 목사는 그의 신앙의 멘토가 되어 준 유재헌 목사의 딸 유인애와 결혼하였으며, 1969년 9월부터 총신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하였다. 1971년 9월엔 대구신학교 교장(현 대신대학교 전신)으로 취임하였고,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세계복음화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1976년 7월 미국 페이스신학교로부터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88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자기가 시무하고 있는 서문교회에서 개회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3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성헌 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됨으로 대구 서문교회는 염봉남 목사와 명신홍 목사에 이어 세 분의 총회장을 배출하는 역사적인 교회로 발돋움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성헌 목사가 서문교회 재직시에 특기할 만한 일 가운데 중요한 사건을 열거해 보면,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으로 남하한 많은 피난민들에게 서문교회가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돌본 사실과, 곤경에 처한 피난민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말씀으로 목회함으로 생활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되어 준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1959년 제44회 총회분열로 WCC측과 NAE측의 갈등으로 빚어진 교회 처신이 어려웠을 때 NAE측에 서서 서문교회를 예장합동측에 남게한 공이라 하겠고, 셋째로는 이런 와중에 교회당 점령세력과 탈취세력 가운데 소위 교회 안에 오물투척사건이 발생했지만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한 일과, 마지막으로 오늘의 대 서문교회로 성장 부흥의 원동력이 되게 한 목회역량과 지도력을 들 수 있다. 더불어 한 가지 첨가할 것은 그의 물흐르는 듯한 설득력이 돋보이는 설교에 있었다.(대구서문교회100년사, 대구서문교회 2016 초판 p.298~345 참조). 이러한 배경이 그를 서문교회의 지도자에서 대구영남지역의 지도자로, 나아가서는 전국적인 지도자로 발돋음하게 한 발판이 되었다. 이성헌 목사가 재직했던 제73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찬송가 261장은 우리교단 교회에서 부르지 않기로 가결하다. ② 해마다 발행하는 신앙월력은 전도부에서 간행하기로 가결하다. ③ 기독신보 이사 선임은 노회별 총대 비례대로 하되 총대로만 이사를 구성하기로 하다. ④ 평동노회를(평동노회와 평양노회) 분리하기로 가결하다. 이성헌 목사는 슬하에 3남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장남 성민 목사가 아버지의 목회사역에 대를 이었다.(제98회 총회결의 및 요람, 김영남 황기철 편, 예장총회 2014, 서울 p.28 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01-05
  • ‘처음과 나중’ 신앙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오로지 직선으로 전진만 할 뿐이다.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잠시 멈추거나 잠깐 뒤로 물려주지를 않는다. 시간의 개념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현대 물리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 연속체라고 하는 단일한 양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한순간도 쉬지 않는 우주의 순환 운동은 작게는 초 단위부터 시작해서 분 단위, 시간 단위, 한 달, 1년, 10년, 100년.. 점점 분열하면서 영원한 시간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생명을 키워간다. 여기에 인생의 삶은 단한번의 삶을 산다. 그리하여 한 번의 삶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러므로 처음과 나중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힘을 다하여서 한 철(계절)과 ‘때’를 맞는다. 그러기에 만물에는 ‘철’을 따라 그 삶을 영위에 간다. 그리하여 만사에는 반드시 ‘때’가 있다. 여기서 전도서3:1-3에 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고 하시고 그 다음 말씀 11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성서에서 보면 우주 만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준하여 만물은 시작만이 아니라 끝이며 목표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물을 보는 종말론적 주장들을 통해 우리는 만물을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스도를 곧 만물의 끝이며 목표이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마지막 아담으로”(요한계시록1:17, 고전 15:45) 보게 된다. 이렇게 종말론적인 믿음은 미래에 대한 언급을 배제하는 실존론적인 해석과 개인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와 우주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견해와 신전통주의적 재해석 간의 문제점도 알게 한다. 예컨대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종말론’을 심각한 것으로 그리고 비축자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여 종말론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하고 역사와 우주가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여기에 실존주의적 신학의 장점은 미래에 대해 전혀 언급 하지 않음으로 이 점에서 과학적 견해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효과적인 점에서 보면 인간 양심의 측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긴급성은 시간적인 급박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여 시간의 ‘카이로스’적인 단호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종말론의 근본적인 주장은 창조자이며 주님이시고 예수를 통해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드러낸 하나님의 실제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며 성취가 목표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파루시아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게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는 삶은 인간 서로간의 의사소통, 따라서 공통적인 삶과 역사적 삶의 필수적인 기본이 됨을 알게 한다. 따라서 육체의 부활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삶이 그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생과 그 역사의 의미와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대결하는 자기의지로 만 삶을 살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성이기도 함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여기에 따라서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과 용맹한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게 된다. “이사야서 9장6절”에서 보듯이 성경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가올 메시아, 하나님에 대한 이름은 여러 개가 있다. 야훼, 임마누엘, 등등 백성들이 기다리는 그 속성을 뜻하는 이름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은 실제 불리는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강생하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시어 성체의 모습으로 아니면 우리들 삶 가운데 늘 함께 계시는 구원자 (예수)로서 계신다. 아브라함이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예언자도 그 시대적 열망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였고 그 이름은 불리기보다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육적인 진짜 성적 교재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고 예수님은 육신을 통해 나셨으나 육신으로 난 것이 아니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01-05
  • 목회는 쉬운 것이다·16
    저는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을 회복시킬 필요성은 곧 엠마오로 가던 두 청년의 눈을 뜨게 하는 역사입니다.기독교가 일반 종교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사람의 뇌는 특정한 장소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속에 계십니다.종교로 둔갑한 유대 종교나 이슬람 종교나 모든 이방 종교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경전을 중심으로 합니다.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성전의 고정관념을 깨셨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이 성전이라는 사실이 기독교만의 유일한 신앙입니다.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시편 46장 10절에서는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자기 성공에 미쳐버린 사람아 좀 분주한 손을 멈추고 하나님이 너와 관계없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불가능한 이유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어 점점 빨라지는 것과 같습니다.“이는 하나님은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20).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내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십계명 중 하나님과 관계되신 4계명은 완전 불변의 법칙입니다. 불순종이 사망이라는 말은 단번에 숨이 끊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란 살아있으면서도 자유함이 없이 고통의 연속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질병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오렌지 나무는 분명히 오렌지 열매를 낳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의한 고통이란 말입니다. 나무가 굳이 물고기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더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예수 생명 회복운동이란 어설프게 생겼을지라도 성형한 얼굴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대로 가는 것이 마음에 평안을 준다는 것입니다.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닙니다. 매순간 내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신앙의 본질도 교회의 원래 모습의 회복에서 가능하며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실개천이든 큰 냇가이든 강물이든 관계없이 어떤 모습에서도 환경에서도 생명의 흐름이 바른 신앙이요, 바른 목회입니다.우리는 습관처럼 평가하고 비판합니다. 목회 성공이란 어떤 형태든 그 안에 멈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교인이 작으면 목회에 실패했다 합니다. 이렇게 비난하는 습성 때문에 제자들이 겁먹어서 교회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할 일은 격려와 배려입니다. 자녀를 생각하는 부모에게 자녀가 60세가 넘어도 어린애로 보는 자연스러움이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잘못 사용하여 비난할 때 자녀는 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한국적으로 잘못된 표현 방법이 한국교회가 엉켜버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옛날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바른 제자로 성장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지금 현재를 칭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창세기 1장 27절의 깊은 뜻은 변함없이 성경 속에 나온 사건과 인물들에게 임했던 것처럼 지금도 유효함을 알게 하는 것이 예수 생명의 회복인 것입니다.사람들은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적 삶이 아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라는 것은 진리의 순수성입니다. 내가 나인 것이 곧 진리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어진 현장에서의 자유함을 갖는 것입니다.바른 신앙의 정체성을 알면 우리는 천국의 미래적 기다림이 아닌 현재적 삶인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생명의 삶입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심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한 몸 되심이 바로 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평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곧 평안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2-22
  • 성육신한 예수교회-34
    해가 저물어 가면 곳곳에서 교역자들도 평생을 헌신한 목회를 내려놓고 퇴임을 하는데, 농촌 지역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교역자들이 조용히 사역을 내려놓고 떠나간다. 한 오지 마을의 여교역자가 은퇴하는 예배에 참여했다. 여느 교회들은 은퇴식에서도 사람들에게 감투를 씌우는 행사를 끼어 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교회는 전혀 달랐다. 모처럼 마을에 사는 분들도 많이 나와서 환대하는 것이었다. 주변 교회에서도 다들 와서 함께 감사하며, 전도사님의 앞길을 축복해 주고, 참여하신 하객들도 그 마음에 무언가 훈훈함이 가득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느 행사보다도 사뭇 느낌이 달랐다. 사람들은 으레 모이면 조직을 하고, 회장을 세우고, 모집책을 맡아 고생하는 총무도 세워서 이내 질서를 잡는다. 조직이 형성되면 옛날 반상제도가 있던 때의 계급과, 식민지의 완장을 찬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문화에 익수해진 터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곧 잘 적응을 한다. 교역자들이 모임을 갖는 노회나 총회도 가서 보면, 그 곳에서도 제일 먼저 감투 씌우는 일부터 하는 데, 연합회 모임이나 친목회 모임조차도 이와 다르질 않다. 더더욱 교회 행사 때에도 초청을 받아서 가보면, 사람들의 직급을 높여주고 감투 씌우는 행사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피라미드 조직을 갖추고 예전을 치루는 것을 좋아했지만, 교회에 이러려고 나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담임전도사님 은퇴식 자리에서, 순서를 맡은 그 교회의 신도가 내빈들에게 인사 말씀을 하는데, 그가 어릴 적에 이 전도사님을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분은 법학을 전공한 분이기도 했는데, 항시 사물을 관찰할 때에 귀납적이고 논리적이어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을 곁에서 항시 지켜보면서, 그녀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어야겠다는 마음을 심중에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그 분을 통해서 느꼈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 비쳐지기에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변하였고,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섬기는 예수님을 붙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교역자가 그렇게 사람을 움직이고, 그들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고, 신도들의 삶에 진전을 가져온 것들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섬기는 교회의 당회장은 따로 있었는데, 그녀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도 마다하고, 당회장의 자리마저도 비워 논 채 사역을 한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례 적으로 하는 직급 놀이에서 벗어나서, 욕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목양에만 집중한 것이었다. 먼발치에서 몇 년간 그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정말 권세 있는 교훈을 가진 분임을 느꼈다. 사람들은 외형적으로는 사제들이 치장한 옷을 입음으로써 비로소 권위를 갖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것이 없어도 권능을 갖춘 것이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귀신들린 자를 만났을 때에, 귀신을 병인에게서 쫓아내고 건강한 사람으로 되돌려놓은 것처럼, 그녀도 신도들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 여교역자의 형제들도 그날 거기에 와서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 형제들도 모두 목회자이다. 그 형제 중에 한 분도 주변 오지에 들어가 개척을 하고 한 평생 목회를 하였는데, 그도 그의 누님이 갖추고 있는 권능을 갖추었다. 그분의 교회 신도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정말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을 보여주는 목회자이다.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현저히 나타나는 그 무엇은, 세속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오직 복음서를 읽어야만 나타나는 ‘권세 있는 교훈’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그녀의 형제들이 목회하는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도시에서 프로그램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야기들일 것이다.요한 서신에서 ‘메시아가 여기 있다 하여도 쫓아가질 말며, 저기 있다하여도 쏠리질 말라’하는 삼가 경고의 가르침처럼, 요즈음같이 열심히 밭을 일구고, 아무리 좋은 씨를 밭에 뿌렸다 하더라도, 밤이 되면 도적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분별하기 어려운, 유사한 나쁜 씨들을 수없이 뿌려놓고 가는 판국이니, 알곡과 가라지를 식별하는 일에 일대의 혼란이 온 것이다. 제관식을 거행하며 가운을 입혀주는 일들이 일상화된 세대에서, 사제복을 입은 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그리스도께서 보이셨음을 경전에서는 읽었으나, 저들은 어떻게 그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전하는 사역자가 될 수 있었을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2-22
  • 66. 제61회 총회장 황금천(黃金泉) 목사
    황해도 송화 출신황금천(黃金泉, 1913.12.9~1977.2.11) 목사는 황해도 송화군 천동면 신촌리 21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금천이 14세 때에 사망하고, 어머니 최인서 여사는 황 목사가 47세되던 해에 소천하였다. 황금천 목사는 일찌기 기독교인이 되면서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43년 3월 20일 평양신학교에 입학 2년을 수료하고, 만주 봉천신학교(교장 박형룡 박사)에서 평양에서 못다한 1년을 더하고, 1944년 3월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 4월 25일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사역을 시작할 무렵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이념논쟁으로 북한의 공산당들의 만행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을 대동 월남하였다. 그는 피난지 대구에서 대구대학(大邱大學·현 영남대학교 전신)에 진학, 법문학부에 소속된 철학과를 마쳤다. 그의 경력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목사가 되기전 1938년 10월 황해도 풍천읍교회에서 전도사로 시작해 1945년 4월 25일 풍천읍교회 위임목사, 1946년 9월 15일 마포교회로 전임 사역했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군목 제1기로 훈련을 받고 군목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육군본부를 비롯 제1사단, 제1군단 군종목사를 거쳐 제1군 사령부교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휴전이 되자(1953. 7. 17) 제대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 총무로 취임했다. 재직 중 한국선교70주년기념전도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남한내 무교회 지역에 500개 교회 개척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하였다.다시 1961년 1월 1일 시흥장로교회에 부임 위 임목사가 되었으며, 1962년 11월 20일 경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이어 1976년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교 대강당에서 개최된 제61회 예장총회 총회장에 피선됨으로 교단의 수장(首長)에 올랐다. 평양신학교 졸업 목사 안수해방 후 공산당 피해 가족 대동 월남육군 군목으로 군선교 사역에 매진서울 홍제동에 홍성교회 설립강단에서 설교 중 과로로 숨져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당시 예장(합동)총회가 주류와 비주류의 리더십 교체를 두고 극단적인 대치 속에서 총회장소를 얻을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신학교 강당을 빌려 겨우 총회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총회에서 비주류측에서 민 황금천 목사가 총회장이 되었으니 그의 심적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총회 후견증으로 얻은 지병으로 겨우 1년 임기의 총회장 직무를 마치자 마자 1977년 5월에 소천하였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98. 서울 p.943 참조).황금천 목사의 목회사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는 군종목사로써의 군선교 사역이요, 후반부는 서울 홍제동에 개척하여 교단내 굴지의 교회로 성장시킨 서울홍성교회 목회사역이라 하겠다. 홍제동에 개척한 황금천 목사는 교회 이름을 정하는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홍제교회>로 하려고 했으나, 이미 주위에 감리교회가 홍제라는 이름으로 개척된 교회가 있었고, 은제, 제은교회를 생각했으나 그것도 이미 타교단에서 사용하고 있어 마땅치 않았다. 문화촌교회란 이름을 생각한적도 있었으나 당시만해도 주위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 가난한 피난민들이 많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홍제동(弘濟洞)의 홍(弘)자와 거룩하다는 성(聖)자를 붙여 홍성교회로, 이어 서울홍성교회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도 딱 어울리는 교회 이름으로 교회의 거룩성과 복음사역의 진수를 내포한 것같아 온 교인들이 즐겨 쓰고 있으니 전도자요 개척 목사의 초기 정신이 신앙적으로 잘 베어낸 훌륭한 교회명이라 생각된다.그러나 1961년 1월 24일 경기노회에 정식교회 가입절차를 밟았고, 노회 가입시에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으나 큰 문제없이 노회에 가입하게 되어 교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황금천 목사 재직시 오늘의 서울 홍성교회 새교회 건축역사는 온 교인들과 황 목사의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추진력의 결과로 본다. 교인수가 점점 늘어나자 현재의 교회공간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새 예배당 건축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1968년에 처음으로 신축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해 3월 17일 건축위원회 주관으로 첫 헌신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하였다. 1972년을 건축의 해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3월 21일에 기공예배를 드리고 22일에 착공식을 하였으나 교회대지와 물려있는 시소유 하천부지 불하가 늦어져 새교회 건축이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통끝에 하천부지 문제가 당국으로부터 해결되어 1976년 3월 29일에 재건축허가를 받고 교회가 완공되기에 이르렀고, 박영화 장로의 거금 헌금과 유이근 장로의 사택을 헌납한 계기로 성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이러한 중에도 담임목사는 성도들의 자녀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선교를 목적한 유치원을 개설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 지하 교육관 건축을 계획하기에 이른다.지난 10여년 동안 교회 안의 교육부서가 확대됨으로 교육을 위한 시설문제가 자연히 대두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주변 대지를 매입해 근복적으로 완전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나 교회 형편이 여의치 못해 현재의 교회 건물 지하를 리모델링해 교육관 문제를 해결하기로 중의를 모아 교육관 단독 건물은 후일로 미루고 현재의 상태로 매듭을 지은 것이다.황금천 목사는 군목사역과 총회 전도부 총무사역을 마치고 나머지 여생을 오로지 서울 홍성교회에서 자신의 사역의 종착점을 찍었다. 홍성교회에서 황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어갔던 당회원 홍병수 장로는 황금천 목사의 목회철학의 한 단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황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늘 감사를 강조하셨는데 하나님 자녀의 특성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니(살전 5:18), 감사의 덕이야 말로 모든 덕 중에 가장 으뜸되는 덕이라”하셨다. 황 장로는 또 “황 목사님은 남 보기에는 장대한 어른이요, 건장해 보였으나 건강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총회장직을 맡으신 후 늘상 피곤해 하시기에 적절한 휴식을 권하였으나 일하라고 총회장을 시켜주셨으니 하나님의 일이라면 죽도록 충성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과로한 탓인지 강단에서 설교하시다가 단에서 넘어져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이러한 죽음이 본인에겐 영광이요 명예일지 모르나 우리 모두에게는 두고두고 애석한 일로 남아있다고 토로하고 있다(서울홍성교회 30년사, 같은책 p.77 참조).여기에 황금천 목사가 남긴 설교 가운데, 성경 요한복음 4:13-26, 7:37-39절을 본문으로 ‘인간사막의 생수’란 제목의 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첫째, 이 세상에는 심령에 만족을 주는 생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한다. 둘째, 이 세상에서는 참길을 찾기가 어려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생수를 찾아야 한다. 셋째, 사막에는 여관이 없다. 그래서 생수가 되시는 예수라는 여관(교회와 성경)서 머물러야 생수도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구원역사를 얻을 수 있다. 이어서 생수를 얻어 마신 결과는 그는 이렇게 강론한다. 첫째, 예수의 생수야 말로 솟아나는 샘물이다. 둘째, 생수는 뱃속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오른다. 셋째, 생수를 마시면 강물같이 흘러내린다. 그는 또 생수 마시는 법을 결론적으로 말하면서 첫째, 생수가 필요한 자에게 마실 준비가 필요하다. 둘째, 생수 얻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셋째,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업디어야 얻을 수 있다. 황금천 목사는 총회 전도부 총무일을 사직 한 후 그가 숨지는 순간까지 오직 서울홍성교회만을 위한 삶이였다. 그가 떠난지 20년이 넘었으나 지금까지 홍성교회 성도들의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 그를 기리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그가 재임 중에 결의한 제61회 총회 결의안 중요사안 가운데 몇 가지를 적어보면, ① ICCC(국제기독교협의회)와는 우호단절을 재확인한다. ② 청주신학교와 수원신학교를 총회에서 인준하다. ③ 서울신학교와 한성신학교를 그 명칭을 ‘서울신학교로 해 통합키로 하다. ④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⑤ 찬송가 합동위원회를 조직 운영하기로 하다. 황금천 목사 슬하에는 아들 신엽(信燁)군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2-22
  •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은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며 출발점과 시작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며 곧 성육신의 사건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확신한다. 그러므로 오시는 분의 기다림에서 맞이하는 것은 삶의 역사적 사건이기에 삶의 현장에 말씀으로 영으로 새롭게 임재 하여 주실 것은 믿는 믿음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주 귀한 "구주 탄생"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육신의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사건이라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오늘의 우리 삶의 현장인 비인간의 역사에 오시는 주님을 맞는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구약의 약속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그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그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기다림이었다. 또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기다렸던 120명의 제자들을 통하여 오순절의 역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태어났음을 우리는 믿고 있다. 성서에서 믿음에 대하여 잘 표현한 말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인간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로서 그 기다림의 약속이 서로 소통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구주가 세상에 오심의 구주탄생일이 대림절을 지나 곧 탄생의 날을 맞게 된다. 그는 누구신가? 나와 약속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절기이다. 우리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씨앗이 싹을 내고 성장하고 때를 따라 열매를 내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매를 거둘 때까지 기다린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을 실감하며 그의 품에 안겨 그 사랑에 한없이 감격스러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다림의 그리움으로 나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부디 바라는 마음으로 마라나타(Maran atha, 아람어 maravna qa)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두 가지 의미로 현재적인 외침으로 '주님이 오신다'는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로 '어서 오십시오'로 그 의미를 가지고 초대 교회의 인사말을 따라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마라나타 주 !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기다림의 간절한 간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물 속에 투영시키고 생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하신다. 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 생명은 모채를 통해 잉태하고 낳는 과정이 사랑으로 이어지며 생명의 기능을 알게 한다. 이렇게 땅은 생명의 생성과정에서 하늘의 창조질서를 따라 생명을 지속하고 유지한다.성서의 창조론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영적 존재로 부터 찾고자 할 때 인간의 신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이버 문화에서 인간의 신체성이 단지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온전한 실재 경험을 위한 필수사항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일로 신학적으로 여기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학에서는 이미 가현설적 예수 이해의 오류와 기만을 파악하고 예수의 신체성을 강조해 오고 있다. 여기에 예수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 나셨고 몸의 아픔을 경험했고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 그리고 다시 몸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의 부활도 역시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 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작용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명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 하신 중에 중요한 것은 창조 안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었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생명의 경외(敬畏)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원래 선했으나 인간들이 그 위에 군림하고 억압하는 타락과 그 죄과로 심판을 받는 점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인간은 모든 생명관계 안에 일하고 섬기며 책임지는 청지기적 존재로서 삶을 영위하며 서로 존중하는 상호적인 관계를 갖게 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12-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15
    이 시점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에서 ‘바른 신앙운동’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그 뜻을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신다는 중책감을 사명으로 느껴야 합니다.예수님은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 있는 곳으로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는 반대로 건물을 세워놓고 “오라”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닌 부류로 만들어 집단주의에 모이게 하는 사단의 방법인 것입니다.오라고 하여서 한 그물에 넣고 자기 재산과 그룹을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그런 사람들로 묶어 가두어 놓고 갖가지의 법을 만들어 붙들고 있습니다.베드로에게도 그물이 넘치도록 잡은 것은 어부의 꿈이었으나 성공적으로 이룬 고기를 버려두고 나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성경적 교회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바울의 기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있기를 빈다.”라고 했습니다. ‘가라’와 ‘오라’는 매우 다릅니다. 가라는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오라는 멈출 수 있는 시설이나 장치와 법이 필요합니다. 가라가 주님의 말씀이라면 목회학이 필요 없습니다. 모양대로 주먹구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적 이론이나 체계나 성공이나 성장이라는 용어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분명히 진정한 교회는 오라는 곳이 아닙니다. 가라고 할 때는 교역자가 무한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학교의 확장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라고 불러 모으면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대기업화된 교회의 수장이 된 목사만 있어도 됩니다. 한 기업이 문어발처럼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적 교회는 존재 가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영적 현실을 담기 위해서 새 포도주의 필수 요소들은첫째, 예수님이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은혜와 포용을 받고 내면화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이 은혜입니다.둘째, 하나님 그리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이자 핵심 원칙이 사랑입니다.셋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사람들끼리의 영적 연합이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코이노니아의 개념에서 초대교회는 일상 속에서 이런 영적 진리를 실천하는 모습이 분명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서로 격려하고 가르치고 조언하며 살았던 장면이 사도행전 2장의 삶이었습니다.성경에는 슈퍼스타인 목회자와 목회 개념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지체로서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지체가 머리에 붙어 존재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기독교가 고도로 조직화된 교파의 시스템으로 쉴 새 없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분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기업과 동일한 조직 모델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그런 모습을 한국의 최대의 교회 집합체라는 한기총을 모델로 백일하에 인간의 최고 추한 꼴인 금권을 드러낸 것입니다. 총회도 목사가 모이는 곳마다 돈에 눈이 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명분 있는 거짓과 위선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는데, 바른 신앙이라고 강요당하는 것입니다.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처럼 기능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교회 즉 지체로서의 솔직함을 위선 하려는 데서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하나님으로 만들고 천국을 가는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와는 만날 수 없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말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하나님과 철저히 거리를 두는 이유가 바로 오늘 교회가 아방궁 같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로 인간의 목적과 성공에 초점을 두는 기업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이 귀중한 사실을 하나님은 말해야 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멸망을 즉석에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예고하십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12-15
  • 기독교인의 행복론 -32
    천재 작가 李箱은 글만 잘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글 밖으로 걸어나와 일상에서도 작가로서의 멋을 추구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화입니다. 당시 시인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며 낭만을 즐겼습니다. 누군가 신문사에서 원고료를 타면 동료 문인들을 불러내어 술을 사는 풍조도 있었습니다. 당시 李箱(1910-1937)은 1931년 <조선과 건축>지에 「이상한 가역 반응」을 발표한 이후 「오감도」등 초현실주의적이고 실험적인 시들를 발표하고, 소설「날개」(1936)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정주도 1936년 <동앙일보>에 시 「벽」이 당선된 후 그 해 11월에 김동리 오장환 함형수 등과 <시인부락>을 창간하여 “인간 생명의 究竟的 경지를 탐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박두진 박목월도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에 작품을 발표하기 전부터 서정주 李箱 등과 어울렸습니다. 그때 서정주는 이 폐결핵에 걸린 사실을 몰랐습니다.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李箱은 매우 멋진 신사로서 하얀 맥고 모자에 흰색 양복, 흰색 구두를 신고다녔다고 합니다. 한 번은 李箱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이 종로에서 만나 통의동에 있던 ‘보안여관’- 1930년대에 개업하여 2006년 폐업한 여관으로, 서정주·김동리·오장환·김달진 등이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기도 하였던 장소- 근처에 있는 일본식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술집은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고 주방 옆에는 스웨터를 입은 여주인이 앉아 있었는데, 李箱은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인의 스웨터 제일 윗 단추를 꾹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여주인이 “왜 그러세요?”라고 몸을 뒤로 빼도 그는 단추를 계속 눌렀습니다. 이를 본 서정주가 “김형(李箱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왜 그래요?” 하며 옆에 다가서도 그는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단추를 꾹 누르더니, 한참만에 서정주가 그의 팔을 잡으며 그만 다다미 위로 올라가자고 하자 누르기를 그치더라는 겁니다. 서정주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李箱은 모더니스트여서 당시에 물질문명이 가져올 위급한 상태를 예감하고 단추를 비상벨로 착각하고 계속 눌렀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화를 듣고 필자는 작가가 글로만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글 밖으로 걸어나와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시 李箱은 폐결핵 3기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고 25세부터 본격적으로 「오감도」등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짧은 기간에 십여 편의 소설과 수백 편의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객혈 이후 마지막 남은 4년의 삶이 매우 소중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글 뿐만 아니라 글 밖의 일상도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내성적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생 금홍과의 동거 생활을 끝낸 후 옛 화신 백화점 지하에서 이순석이 운영하던 낙랑 다방에서 화가 구본웅의 서모가 낳은 변동림을 만나게 됩니다. 아는 시인으로부터 소개를 받기로 한 날, 李箱은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을 하고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방 <제비> 등의 파산 이후 몸도 병약하였기에, 평소에 머리를 자주 안 감아 봉두난발에 까치집같은 머리를 하고, 와이셔츠는 때가 묻었으며, 골덴 바지에 구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너저분한 구두를 신는 등 예전의 하얀 양복 차림의 멋진 모더니스트 차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선 보는 날이니 세수를 하고 나갈 작정이었으나, 약속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나가고 말았습니다. 막상 다방에서 변동림을 만나고 보니, 이화 여전 문과를 졸업한 여류 작가에 미모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맘에 쏙 드는 이 여인 앞에서 그는 여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그만 조그만 종지 그릇에 있는 각설탕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근데 며칠째 손을 씻지 않았던 터라 그만 각설탕이 손때로 인해 시커멓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레지가 와서 다 큰 어른이 이렇게 더럽게 해 놓으면 돼냐며 한바탕 퉁을 주는 바람에, 소개한 시인과 함께 그들은 다른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여인 앞에서 얼굴만 빨개지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정작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는 그렇게 쑥스러운 모양입니다. 결국 그는 속으로 ‘인연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하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뜻밖에도 중매한 시인으로부터 그녀의 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편지에는 그가 마음에 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절에 가서 둘 다 검은 예복을 입고 몇몇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러한 일화만 보더라도 그가 독특한 삶을 산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작품 뿐만 아니라, 일상까지도 개성과 멋을 추구하는 작가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에 관한 논문은 수백 편이 넘습니다. 이는 그가 글 뿐만 아니라 글 밖에서도 멋있는 활동을 하고 감동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12-15
  • 성육신한 예수교회-33
    신약전서 마태복음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그리스도의 계보란,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의 족보라는 말이다. 메시아의 계보이니 얼마나 거룩하겠느냐 마는,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아무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이고, 사람 냄새가 물씬물씬 배어있는 역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사람으로 태어나셨으니, 짐승의 우리에서 나는 냄새 뿐 아니라, 사람 냄새도 흠뻑 젖어있는 것이다. 랍비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마저도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그 이야기들을 경전처럼 귀히 여겨서 백성들로 하여금 외우고 낭독하게 하였다. 서기관들과 랍비들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정제된 이야기로 갖추어지면, 또 다시 그 이야기들은 랍비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낭독하며 토론하고 재해석하는데, 그 모두가 개개인과 사회의 지혜가 되는 바탕이 되었다.랍비들 못지않은 우리 신약 기자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네 땅에서는 설교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고서는 즉시 축도하고 내려오는 바람에, 그 이야기는 우리네 이야기가 되질 아니하고, 다시금 경전 속으로 숨어버린다. 영국에서는 영어로 서민들에게 읽혀지도록 성경을 번역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민들도 글을 읽고 쓰고 볼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광경은 영국과 우리 땅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그런데 우리네는 거기서 더 나아가질 못하고 성경을 읽고, 서로 토론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시킨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도들 영성이 깊지 못한 것이 이것과 전혀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메시아의 계보 소개가 마치자, 야곱이 낳은 요셉, 곧 마리아라는 처녀와 정혼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중심이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 중심’으로 엮어 졌으나, 마태에게선 그녀와 정혼된 ‘요셉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아마도 이야기꾼이나 희곡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나, 촬영장에서 영화를 감독하는 이라면 더더욱 ‘요셉 중심’의 스토리를 놓칠 리는 만무할 것이리라. 부모님들에 의해서 정혼되어 혼사 날을 기다리던 요셉이란 청년은 갑작스런 불길한 소식을 듣게 된다. 마리아란 처녀가 임신을 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오래 전에 나사렛 마을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 곳의 정혼된 처녀가 결혼 전에 이미 임신이 되었는데, 그 처녀의 아비가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던지, 그만 자신의 딸을 돌로 쳐 죽인지 채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지방은 혼전에 아이를 갖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는 일인지를 시사 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신부 측 아비가 혼례식 첫 날 밤에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신부의 방에서 나온 하얀 손수건에 묻힌 그 붉은 색을 보고서는, 동리사람들에게 ‘이것을 보라’라고 소리를 치면, 통과 례가 방점을 찍고 잔치의 흥은 더욱 깊어만 간다.오늘의 젊은이라면 어떻게 이러한 처사를 해결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요셉이 소문들을 들었을 때에는, 동리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나, 집안의 어른들의 근심을 모른 채 할 수 없게 된 터이었다. 공이 마리아에게서 요셉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요셉의 생각이 깊질 못하다면, 그 처녀는 그 날 밤에 돌무더기에 덥힌 싸늘한 주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마을에서 이러한 일들이 항시 있어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도 비쳐진 바이다. 종교재판이나 인민재판에는 승자가 없다.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이다. 오늘 날에 시청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 집회도 역사적인 어리석음에서 자유하질 못하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마저도 회당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서 못질을 하고는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죽게 하였다. 이런 일들은 그가 태어나서 개혁을 일으킨 지 오백년이 되도록 신학자들마저도 덮어 버린 것이었지만, 아벨의 피는 여전히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만연된 죄악과 지나친 분노와 위장된 거짓들을 천사에 의존하여 풀어 간다. 이러한 일들에서 굳이 천사의 도움을 받음은 사람이 결코 해결하지 못해서일까? 요셉처럼 혼란스러움에 빠지면 정말 천사가 달려오기는 하는 것일까? ‘신의 일식’처럼 광기에 취한 히틀러가 유대인 육백만을 가스실로 내몬 처사를 보면, 지옥마저도 지금의 북한처럼 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알았고, 해가 떠오르기 전, 그녀에게 즉시 달려가, 증오와 광기에 노출된 그 여인이 돌무더기에 덮여지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우리의 메시아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12-15
  • 65. 제58회 총회장 박요한(朴堯翰) 목사
    전남 신안군 태생박요한(朴堯翰 1918.5.6.~2016.10.30) 목사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진리라는 전형적인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1918년 조선이 이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 미래가 내다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고,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 경찰들이 장악해 조선총독부의 약탈과 천대만이 조선 전체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그는 1936년 18세 때 선교사들이 세운 순담청년성경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교육다운 신식교육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당시 호남지방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목포 광주를 비롯 순천에 이르기까지 선교사역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지역에 개척되는 교회마다 병설하거나 아니면 독립적인 기독교계통의 학교가 세워졌다. 공식적인 학교라는 기구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서는 교회 안에서 비형식적인 형태로 주일학교를 비롯 주간학교(週間學校)도 간혹 운영되었고, 때로는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와 같은 일정기간 안에 단기적으로 성경과목을 비롯 일반교과목을 편성하여 교인들의 자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불신자들의 자녀들까지 가르쳐 전도의 발판을 마련했고, 또 간접전도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요한 소년도 청소년기가 되기까지 제대로된 초등교육(初等敎育)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부모들의 일손을 도우며 성장해 오다가 드디어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온 것이다. 1936년 3월 순담에 있는 청년성경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고, 졸업한 후 1943년 12월부터 함평군 손불면에 있는 궁산교회(宮山敎會)에 전도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로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 치하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군으로 출발하게 되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었고, 이 젊은 청년지도자에겐 구원의 진리를 전하며 가르치는 목회자의 길목에서 온 정성을 다해 복음을 위해 젊음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고, 그것이 청년 요한 전도사에겐 큰 보람이었고 사명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박 전도사는 그해 11월 당시 남한 유일의 총회에서 인준한 경성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문을 두드렸다. 지방 성경학교 출신으로 조선신학교 입학함평군 궁산교회 전도사로 목회 시작신앙의 절개 굽히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대전남부교회 총력 전도로 부흥 “성전은 예배 행위 이외엔 어떤 행사에도 사용불가” 입학 후 3년 만에 1947년 12월 본과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당시 조선신학교 교장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박요한은 1948년 7월에 보수주의와 개혁보수를 지향하고 새로이 출발한 박형룡 박사가 이끌고 있는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본과로 진학, 졸업 후 1949년 5월 10일 목포노회(木浦老會)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스스로 세운 목회철학(牧會哲學)이 있었다. 그것은 청렴과 절제 그리고 교회와 신학의 세속화로부터 보수개혁 신학 과 칼빈의 하나님 절대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철저한 청교도적인 실천신앙에 역점을 두었고, 자신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며 지도해 나갔다. 박요한 목사는 1967년 10월 13일 한국의 중심지에 있는 대전남부교회(大田南部敎會)의 청빙을 받았다. 박목사는 일제의 핍박 아래서와 6.25 당시 공산당의 위협 아래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은 대쪽같은 강인한 성격의 지도자였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 역사속에 길이 남아있는 <조선신학교 51인 진정서 사건>의 일원이었고 주인공이었다. 1947년 김 교수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반대하는 51인의 신학생들이 연명한 진성서를 1947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에 제출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 진정서에 서명한 당시 대표적인 교계 인사들로는 박요한, 김준곤, 신복윤, 조동진, 차남진, 한완석, 박창환, 황규석, 임병길, 김상대 등이었다. 이들 중에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크게 헌신하고 봉사한 분들이 많았다.박 목사는 1967년 10월 대전남부교회에 부임하여 1987년 은퇴할 때까지 20여년을 치밀한 목회계획을 세워 교회를 섬기며 성공적인 목회의 길을 걸었다. (대전남부교회50년사, 임해순편 2005, p.80~81 참조).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나서면서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교인들이 9.28 수도서울수복으로 하나 둘 대전으로 돌아와 교회로 모여들었고, 외지에서 피난 와 대전에 정착한 피난민들도 합세하다보니 교회는 점점 안정기로 접어 들게 된 것이다. 이 무렵에 박요한 목사가 남부교회에 부임, 목회현장을 지키게 된 것이다.교회성장이란 목표달성을 위하여 박목사는 전도전략의 일환으로 교구 확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1971년가지 4년 동안은 교인 배가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72년부터 매월 마지막 주일을 전도주일로 선포하고 상시 전도활동을 해 나섰다. 이 전도운동은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고 청년교인들에겐 어깨에 교회명의 성구가 새긴 띠를 띄고 적극적인 전도운동에 힘을 기울이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총력 전도운동에는 대전에 주재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도움도 컸다. 미국 장로교(P.C.A.) 소속 신내리(Rev. Sneler Alvin Roy, 1959 래한) 선교사와 현요한(Rev. Hunt John K, 1958 래한) 선교사 등이 차량을 지원하여 주었고, 당시 전도운동에 조직적이고 기동성이 있게 하였다. 이 전도운동은 교회주변 뿐만 아니라 변두리 지역이었던 가수원 지역에는 의료팀이 나가 진료함으로 큰 성과를 가져왔다. 당시의 의료선교는 의료품 지원이 이루어져 전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전도운동에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에 전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한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전도운동에 큰 기초가 되었다. 1972년 부터는 주일 낮예배시간 참석 인원이 300명을 넘어서면서 1968년도의 10개 교구에서 1978년에는 14개 교구로 증가했고, 1987년에 이르러는 25개 교구로 크게 성장 확대되었다. 중형교회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교회는 전도운동을 통해 내실을 기함과 함께 대외적인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교회 안에 있는 베드로전도회는 공주군 반포면에 있는 경천교회를 후원하게 했고, 요한전도회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영산도교회를, 마리아전도회는 금산군 복수면 염정교회를, 수산나전도회는 신안군 흑산면 오리교회를, 청년회는 신안군 흑산면 하태도교회를 지원하도록 자매결연을 맺게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한편 교인들을 향하여서도 지속적인 신앙성장을 위하여 주일성수와 십일조로 헌신적인 삶을 강조함과 동시에 경건생활의 장려를 위해 새벽기도회 강조, 단기성경학교를 설립, 때로는 달(月)성경학교를 개설 교인들에게 건전한 개혁주의 신앙생활의 지속을 위해 말씀과 신앙, 기도생활의 조화를 강조하는데 주력하였다.박 목사는 교정(敎政)에도 자신의 능력을 활용, 교단을 위하여 여러 방면에 헌신하였다. 남부교회가 속한 대전노회와 충남노회장을 위시하여 1986년 10월 교단지 기독신보 이사장, 1987년 5월 제6대 대전신학교(총회인준)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에 앞서 1973년 9월 20일~24일까지 인천제2교회에서 모인 예장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됨으로써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그가 재임했던 총회의 중요한 결의안을 몇가지 살펴보면, ① 타교단과 연합사업을 하거나 강단 교류에 대해서 총회결의 위반했을 때는 해당노회로 하여금 시벌키로 하다. ② 타교단 인사들과 초교파적으로 연합(관계)하고 있는 자는 노회가 시벌하도록 하다. ③ 정치문답조례는 본 총회가 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고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수정할 수는 없다. ④ 앞으로 개척하는 교회는 무지역노회 가입을 억제하기로 하다. ⑤ 국가 행사시 국기경례 후 맹세하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각 교회에 지시하기로 하다. ⑥ 성전(예배당 및 부설시설물 포함)은 예배행위 이외엔 어떤 행사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일임을 결의하다. 박요한 목사는 1987년 7월 30일 대전남부교회의 원로목사로, 명예로운 복음사역을 마치고 퇴임해 있다가 2016년 10월 30일 88세를 일기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고, 11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모셨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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