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2(월)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지난 칼럼 기사

  • 낙태는 생명에 대한 부정행위
    이 세상 우주 공간에는 수많은 생명들의 삶이 있다. 여기서 살아가는 우주 공간의 생명체 중 인간들은 때를 따라 변화하면서 환희와 아픔을 나누며 가는 세월 따라 살아간다. 이 삶은 약속을 지키며 순리로 사는 삶도 있고 순리를 어기며 사는 자들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삶은 약속 아래에만 서로 이를 지키며 살기도 하며 순리를 어기며 사는 이 질서를 지키지 못한 자들로 삶을 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의 약속을 지키며 사는 자와 약속을 어기며 사는 자들도 있다. 사람이 삶을 살다보면 기쁨과 아픔이 공존하듯 그 삶이 인연임을 알기도 하고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기도 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이 세상에 생명으로 오신 주님은 오직 삶의 주인이시며 구세주는 우리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믿는다. 그 약속들은 성서의 하늘의 말씀을 믿는다. 그리스도교의 성서의 말씀들은 모두가 약속으로 채워져 있다. 그 약속을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이를 믿는다. 이는 약속을 시련하는 자라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믿고 구원함을 이루는 진리를 믿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곧 약속이요 여기서 그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은 믿음에 있음을 알게 한다. 요즘 항간에 낙태에 대하여 존치론이 극성을 부리고 있음을 보게 한다. 산모가 미성년자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아닌 바에야 ‘스스로의 의지로의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로 임신이 됨을 안다. 그 예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이다’라는 산모역시 알고 있으면서 태아를 살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로 인정하고 살아 왔다. 여기서 산모가 미성년자라고 해서 타당성을 주장해서는 아니됨도 알게 해야 한다. 또한 그 사실 자체를 어기고 핑개 삼아 한 생명의 태어남의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하늘의 약속 어김을 알게 해야 한다. 이는 곧 생명의 책임은 태어남의 약속을 어기는 잘못을 알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책임이 무거움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 우리 삶의 자리는 언제나 그러 하듯이 남아 선호사상이 극에 달해 왔으며 남녀 성 비율이 무너지고 불법적인 낙태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왔으며 80-90년대의 여아 낙태 문제를 알게 하는 습성이 생기기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오늘에도 역시나 남아 선호 사상이 늘어나고 우선하여 낙태를 하는 사례가 생겨난다면 아니 이 법안을 성안허여 합법화 한다면 산모가 낙태로 죄 의식을 강요받은 삶을 누린다면 생명 살해의 큰 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와 생명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흔히 우리 삶의 현장에서 보면 많은 장애아를 둔 부모들을 보게 된다. 사실로 오늘의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처지를 놓고 보면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장애아를 맡기는 것을 우리 삶의 현장의 현실로 보게 된다. 여기서 낙태를 결심할 경우 장애아의 그 인생의 상당한 부분을 부모에게 기대는 것 또한 우리 삶의 현장이요 현실이 되어 왔다. ‘그들은 행복한데 왜? 그들은 죽이려 하느냐?’ 오늘의 현실 삶에서 장애아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가족 중 ‘중증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족 중 누군가? 혹은 가족 전체가 큰 고통을 받는 것은 어느 나라이든 간에 삶의 현실임을 알게 한다. 사실로 여기에 따르는 고통은 여간이 아니다. 이 요인은 개인 차원에서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수입 면에서도 불이익을 불러오는데 여기에 따르는 개인적인 용무나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경제적인 면, 병원 치료비. 등 많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러한 형편에 실로. “이겨 낼 장사가 있겠는가?”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 생명으로 태어나 자기 생명 됨에 그 행동 가짐은 여러 가지를 여부 간에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낙태를 자유롭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여성해방 이라고 긍정적인 것 같으나 여성인권을 해치는 것임도 알아야 한다. 낙태수술을 받는 입장을 생각해 보면 낙태수술은 당사자인 여자가 수술을 받는다는 현실의 사실을 본다. 이는 곧 낙태허용이 여성인권을 위한 길인 것 같아도 아님을 알게 한다. 낙태허용론자의 주장은 미혼모의 경제, 사회적인 인식문제, 장애아동 문제, 강간문제 등은 전부가 사회적인 문제로 이를 피하려고 한다. 여기에 우리는 사회적인 근본문제임을 터득하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9-2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5
    혼자 사색하는 시간에 이렇게 기도하여 본다.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세세무궁토록 영원하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비올라 현처럼 북한산을 타고 내려오고, 우이동의 새소리가 교회 종탑을 간질입니다. 이 시간의 기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고, 성령이 저희 영혼의 문을 똑똑 두드리실 때에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영접하도록 인도하소서. 이 시간 베드로에게 꿈을 주시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허락하셨던 주님이 저희에게도 세계적인 비전을 내리실 줄 믿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희 가운데서 인간미 넘치는 신자가, 세계적인 성직자가, 세계적인 작가가, 세계적인 기업인이, 세계적인 학자가, 세계적인 법률가가, 세계적인 의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북한의 김정은과 주민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 높은 보좌에서 세상의 낮은 자리에 오셔서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자들의 구세주가 되셨던 주님, 십자가 보혈을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임하시고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이, 이 시간 찾아 오셔서 “그동안 믿음 지키느라 애썼다”며 위로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저희를 빛나고 뾰족한 화살처럼 연단시키셔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주님의 계획대로 이루실 줄 믿습니다. 주님이 저희를 부르실 때에 ‘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희가 주님이 원하시는 소명을 감당하게 하소서’라며 믿음으로 일어설 줄 믿습니다. 저희가 기쁨으로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감당할 때에 저희 삶이 복될 줄 믿습니다.두세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저희가 믿음의 삽을 퍼올릴 때 주님께서는 항공모함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아름다운 리브가를 신부로 맞기 위하여 황혼녘의 황금빛 햇살을 머릿결에 받으며 기다리는 이삭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오니, 성령이여 오셔서 저희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삶이 사건을 멋있게 해결해 가는 콜롬보처럼 멋있게 필력을 휘두르는 작가가 되게 하소서.이 시대에는 콜롬보가 필요하다. 콜롬보가 나타나서, 사회 각 계층에 쌓여 있는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이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워 주었으면 좋겠다. 교계든, 정치권이든, 법조계든, 콜롬보가 필요한 것이다. 가령 모 건설회사 부사장이 자신의 아내를 의도적으로 살인하고 건설 현장에 묻은 후 바닥 콘크리트를 쳐 버린다. 콜롬보는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부사장의 실종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부사장 집의 현관 바닥에서 진주 목걸이로 추정되는 진주를 발견한다. 콜롬보는 부사장이 일하는 건설 현장을 자주 들러 콘크리트 타설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현장 경비로부터 부사장이 밤에 들른 적이 있다는 목격담을 확보한다. 물증을 확보한 콜롬보는 부사장이 살인했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 들른다. 현관에서 부사장에게 두 사람 사이의 부부 관계가 최근 들어 좋지 않았다는 이웃 주민의 얘기를 하면서, 현관 우산 꽂이대에 있던 우산에 자신이 증거물로 가지고 있던 진주를 톡 쳐넣는다. 얘기 도중 부사장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하자, 슬쩍 우산을 치켜든다. 그러자 진주 한 알이 바닥에 떨어지고, “이게 증거죠.” 하면서 사건 당일날 부부 싸움이 심하게 있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콜롬보는 왜 부사장이 콘크리트 타설을 하기 전 날 저녁에 공사 현장에 갔었는가를 묻자, 부사장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백을 한다. 이와 같이 후즐근한 바바리 차림으로 건성건성 말하는 듯하면서도, 완벽한 알리바이를 들이대는 사회 저명 인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콜롬보의 끈질긴 추리에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맛보게 된다. 이와 같이 멋있는 콜롬보처럼 나의 삶이 좀 멋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 서민들의 고충을 널리 알리고, 그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늘 나라의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지상의 낮고 천한 곳에 와서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자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서민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꿈을 꾸어 본다. 물신주의의 옷을 벗고 인간미가 돋보이는 옷으로 갈아 입고 싶다. 그러려면 콜롬보가 필요하다. 퍼머 머리에 의안을 기고도 얼마든지 멋있게 행동하는 의인 콜롬보가 필요하다. 콜롬보가 나타나서 세상의 온갖 비리와 죄악을 파헤쳐서 순화된 사회를 만드는 것을 보고 싶다. 아니, 세종대왕이라도 좋다. 이순신 장군이라도 좋다. 그런 의인이 이 땅에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하여 본다. 나, 또한 풍자와 해학으로 독자들을 웃기고 감동시키는 작가가 되도록 기도한다. 이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개성적인 작업이다. 행복하시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9-20
  • 목회는 쉬운 것이다·72
    교회개혁의 기초가 가정이었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가정을 이루며 가정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청교도들의 삶에서입니다. 어떤 학문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들이 순수하게 오직 성경 중심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백한 교리나 시행하던 예배나 그리고 교회 안에서 유지하려고 했던 정치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교리 개혁에 대하여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전통과 미신으로 오염된 교회를 성경적 교회로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과 교리의 표준과 척도가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로마 천주교회에 의하여 오염된 그릇된 교회, 미신적인 예배, 폭정을 일삼는 교회정치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신학적인 전제가 종교개혁과 함께 다양한 교파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성경을 보는 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전제 때문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또는 전제에 따라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도 다양한 형태들의 상황이 이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정통이란 점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혼란하게 변화된 것입니다.지금까지 많은 이단과 그릇된 교파들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전제에 근거했습니다. 그들은 성경만이 명하거나 교훈하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주장에 성경을 뜯어 맞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천국의 통치 원리를 평등과 자율이라고 제시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된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오늘 우리는 천주교도들의 계급 구조적인 정부형태를 취했는데 그것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성경을 가져다가 맞추는 것이 바로 그릇된 신학운동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함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중요한 것은 성경이 바르게 해석될 때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알 수 있으나 그릇된 전제에 의하여 해석되면 성경이 제시하고자 하는 그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뜻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적 전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이 요구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란 성경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는 이유가 예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적 입장은 성경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비추어 성경이 보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같은 바른 신학을 재발견한 신학자가 요한 칼빈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원래의 의미를 바로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에 기초하여 로마 천주교회나 재침례교회의 성경해석을 비판하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라고 고백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여 교리를 체계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계시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무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는 존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을 찾아와 그의 왕국의 말씀과 성령으로 살리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죽어있는 자에게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그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뿐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어놓은 세상의 변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방법은 무용하고 헛된 일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9-20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49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9. ‘사랑하라’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 입구나 측면에 부착되어 있는 간판이나 현수막에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다. 기독교 신앙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성경 전체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압축하여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해 놓은 문서는 십계명이다. 그 십계명의 내용은 열 가지이지만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두 가지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피상적이다.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다. 부모는 단지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잘 순종하면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매우 한정적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명백하게 제시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웃 사랑“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이 말씀을 사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자면,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는 못할지라도 미워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거울삼아서 자문자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는 가족을 포함하여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생명 혹은 영생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4,15). 살인을 쉽게 할 수 없듯이 사람을 쉽게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다. 사람을 미워하게 될 때에 즉시로 죽는다면, 우리는 과연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하라=대접하라예수께서 계명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당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아무리 구약성경 지식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구약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랑’은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고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원칙’이라는 것이다. 성도의 삶 속에서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지켜져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이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황금률(Golden Rule)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 마지막 부분에도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오는데 “사랑하라”는 말씀 끝에, 그리고 “대접하라” 말씀 끝에 나온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사랑하라” 혹은 “대접하라”는 것이고,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라면 그 원칙은 황금의 법칙 곧 남을 “대접하라”는 것임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남을 대접한다는 것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물론 대접하는 것의 중심에는 사랑의 동기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1)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든 행위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마음의 동기이다. 그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나를 존중해주고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대접의 출발이다. (2) 말로 다른 사람을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언어이다. 어떤 말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력을 주는 반면에 어떤 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몸을 병들게 만든다. 즉 생명적 언어와 사망적 언어가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해 주면 기분이 좋다. 칭찬을 해주면 힘이 난다. 그렇다면 그런 대접을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늘 좋은 말을 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고 좋아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좋아하는 것은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에너지요 활력소가 된다. (3)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생명과 시간과 건강이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차이는 많이 있지만 누구나 재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대접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나눌 때에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고 보람을 느낀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러한 본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의 그러한 성품을 사람에게도 주신 것이다. 사랑의 바탕은 희생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시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보고 한없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4) 구원의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영원히 죽을 인생에게 생명의 복음을 나누고 영원히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대접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딤후 4:2).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36). 이에 대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언제 자기들이 주님을 대접했느냐고 묻는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래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황금률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9-14
  •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접근
    한국 전쟁은 민족 간의 내전이면서 동시에 공산 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누어진 국제 전쟁이 되었다. 6.25 전쟁을 지내 오면서 한국의 경제가 국제적인 관계로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립적인 면이 봉쇄되고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하면서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아 우파가 내세운 반공 이데올로기는 현재에 이르기 까지 반공 이념으로 지배되었고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경제가 의존적이 되어 자립적인 길이 봉쇄되고 종속적으로만 향하여 오던 중 종속적인 발전의 가능성만 오늘에 이르기 까지 잔여로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도 흑백 논리에 근거하여 이분법적인 사회 심리를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한국 교회도 그 영향에 근거하여 공산주의를 인식하는데 유물론에 근거한 마귀의 세력으로 몰아가는 경향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반공적 태도가 환히 드러나 버렸다. 여기에 한국 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당하거나 실종된 교회와 교회지도자를 많이 잃기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이로 인한 반공 논리가 심각해 왔음을 알게도 한다. 이렇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피해는 일후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민족사에 반공이념으로 남북 간의 동족이 분열되고 반공의 이념이 남과 북을 이제는 다시 남과 북의 갈등과 분열로 먹고 이로 인한 하나의 민족의 정체성으로 분열을 막고 갈등을 해소하려 서로의 갈등과 분열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평화와 화해의 실현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는 것 같아 더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한다. 하나의 가정이 분열하는 그 가운데 한 가정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한 가정의 분란에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하듯이 같은 형제가 부모님 앞에서 서로가 용서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극히 타당한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한 민족은 남과 북이라는 이념의 갈등으로 살아오면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질적인 두 사회 체계로 서로 나뉘어 냉전이라는 가혹한 대립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서서 살아왔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지우고 우리는 서로가 한 겨레의 배달의 민족으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이제는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한 때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논 하여 오다가 자유세계의 지성인들과 제3세계의 지도자들이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제3세계의 지도자들의 견해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는 여기에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제3세계의 지성인들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외치어 왔다. 여기에 공산세계에서는 평화공존을 외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았음에 그 과거를 주목한다. 여기서 60년대 중엽부터 주의나 이념을 멀리하는 양 사회체제가 현대기술문명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통해서 서로가 접근해 가고 있음을 오늘의 모든 민족들이 사회 형편의 사실에서 이를 실감하게 한다. 60년대 중간에 나타난 양사회체계가 현대기술문명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보면서 여기에 모두가 접근해 가고 있을 때 서로의 양쪽 이데올로기의 대변인들과 학자들을 통해서 서로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양쪽의 경제학자, 사회학자, 교육학자들은 접근설을 긍정적으로 시인하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서 지나온 7,4공동성명은 상호 준비가 서로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음도 알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체계와 공산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체계가 그 시대의 발전과 여기에 근접한 산업사회를 향해서 가야 함을 알게 한다. 2016년 1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정보통신기술 기반의 새로운 산업시대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캄퓨터,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혁명 (3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혁명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함에 이르러 삶의 자세도 점차 발전해 가는 미래 지소적인 삶의 태도에 많은 변화를 안고 있음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처지를 현실로 받으면서 삶의 변화에 고착화한 삶에서 탈피하여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삶의 변화 갱신을 통해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느껴보게 한다. 근대 민족주의는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처음 발현됨에 오늘의 이 시대의 크리스천은 생각해 볼 일이 많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9-13
  • 목회는 쉬운 것이다·71
    성경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로부터 시작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 넓고…”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치는 환상인 것입니다.”인간의 죄성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먼저 살리시기 전에는 결코 그 사실을 스스로 먼저 깨달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필요의 충족으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다른 색깔이 가입되지 않은 무색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한 이유가 매우 평상적인 단순한 삶 그 자체로 보여주셨습니다.연합회, 협의회, 대형집회도 아니고 설득하려고 성명서를 발표할 이유도, 방어할 이유도, 어떤 형태도 아닌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완전 패배자로서 가능성이란 1퍼센트로도 찾아볼 수 없는 무력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같으면 높은 권력자라도 아는 척하고 자기변명으로 변호사와 함께도 아닙니다. 피할 길 없이 소나기를 맞아 나 자신의 기본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아주 초라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돈 없는 자도, 무식한 사람도, 병들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어떤 기본조차도 없는 그 사람들에게도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인간은 일시적 필요가 채워지면 진리의 관심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더 큰 필요와 더 큰 자극을 갈구하여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존재입니다.사람들은 자기 필요를 채우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생각지 못한 벼랑에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욕망은 하나님과 관계를 끊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범으로 베드로의 그럴듯한 결단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우리가 실수한 사건들이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안달하는 소위 기도제목의 소리지름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히 그 일이 목사의 소관이 아닌데 자기가 만든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프로그램입니다. 성경에 오직이란 말은 너희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것입니다.인간이 느끼는 필요를 채워주는 곳은 절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고 나면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연결된 조직은 모두에게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교회에서 일반적 교육이론을 받아들여서 시간이 갈수록 심각한 죽음의 현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MBTI」 성격유형테스트를 비롯한 각종 심리상담을 포함하여 출처도 모를 수많은 도구를 밀수입하여 사용하는 주인공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결국, 목사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범하고 있는지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선배 목사들이 만들어 놓은 그곳에 진정하게 목회할 용기를 못 갖게 하는 일을 후배나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필요는 얼마든지 가공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멀쩡한 사람도 정신분석을 몇 번 받고 나면 순식간에 환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심리학으로 대변되는 치료 중심의 가르침 속에 애초에 정상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사람의 필요를 우선으로 채우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한 마케팅 전략은 인간의 재치를 의지한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똑똑한 사람들이 인간의 구석구석을 조사하여 찾아낸 인간의 필요를 채움으로 교회당을 차고 넘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박수갈채를 받고 연예인처럼 그 사실을 선전하려고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사람들이 목사라는 사실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자의 교훈”이라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남이 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모방의식과 남보다 앞에 서려고 하는 열심히 경쟁을 만듭니다. 경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경쟁이란 비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최초 뱀이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죄성적 욕구에서 더 나아 보이려는 생각이 앞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은 타락한 인간의 생리현상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건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위장 속에는 뱀의 조정을 받은 그 여정을 성공적인 신앙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9-1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8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8. 기독교 신앙의 본질-‘하나님의 형상’ 회복 어떤 이슈를 가지고 격렬한 시위를 하는 군중들 가운데는 그 이슈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위 군중심리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교회를 출입하는 수많은 교인들 중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참 뜻을 추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많은데,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마 7:13,14)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지으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 여기에서 복수 1인칭대명사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다음에 나오는 “형상”(히.첼렘)이나 “모양”(히.데무트)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는 신학적 시도가 있기는 하나, 유사한 단어를 연속적으로 사용하여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의 표현 방법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과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참으로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외형이나 모습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더 중요한 핵심적인 의미는 그분의 성품을 부여받았다는 것이고, 그 성품의 본질은 “사랑”이다. 태양이 열과 빛과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것이 발산되듯이,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의 본질이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오랜 세월동안 배우고 깨달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매우 심오한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이 범죄하므로 그 하나님의 형상은 크게 훼손되었고 거의 상실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그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비록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악을 행하고 나면 불안하고 불쾌하고 선을 행하고 나면 평안하고 기쁜 것도 아직 사람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성품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예수 그리스도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그 형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최단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모세도 그분의 등만 보았을 뿐이다(출 33:23).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시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을 유심히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한 번은 예수의 제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러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에 성품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마 11:29)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그분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한 헌신과 봉사에 바치셨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마 4:23)는 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을 전인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하셨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셨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분의 성품이다. 사람은 원래 그러한 속성과 성품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예수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하면서 복음전도에 헌신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를 닮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 “몸을 쳐서 복종하게”한다는 말씀이나, “참된 것을” 한다는 말씀이나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는 말씀들은 모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 즉 예수의 성품을 닮기 위하여 투쟁하는 사도 바울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타락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그러한 의식과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성경적 이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고 하였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고 하였다. 예수께서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요 16:13)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창조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 즉 그분의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9-01
  •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처음 발현되었다. 17세기 영국의 민족주의는 후대에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층의 성장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영국 민족주의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했고 18세기 미국 및 프랑스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기하여 만개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두 체제 간에 세계적인 양대 결의 결과로 세계는 이념을 세워 서로 싸워 왔다. 이러한 그 사회적인 성격의 차이로 그 과정과 그 경로가 얼마큼 달라져 왔는지를 알게 한다. 예컨대 세계는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으로 많은 변화 과정을 가져왔다. 이 과정은 삶의 존재 양식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농어민들의 삶의 양식이 산업구조 조정과 도시화 전략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어 왔음을 실제로 존재 양식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한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민족감정의 발흥으로 인해 첫째,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세 봉건사회의 지방 분권주의를 타파하고 영토 확장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켰으며, 둘째, 생활 및 교육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국어가 유행하고 교회와 종단의 구속력이 약해졌으며, 셋째, 상업이 발전됨으로써 중산 시민계층과 자본주의적 기업형태를 창출해냈다. 정치적·경제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영토적 통일국가에는 중세의 종교운동에 견줄 수 있는 열정이 스며들어 있었고 국가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던 군주는 국민주권 이론과 인권사상에 밀려났다. 군주는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었고 국가는 국민의 국가, 민족적 국가, 조국이어야 했다.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었으며 문명은 민족적 문명을 의미했다. 한편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식민지로 있었다. 민족주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로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므로 대개 식민지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과거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은 빈민의 처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여기에 종교적 윤리적 확신을 결합시키려는 운동으로 알기도 했다. 여하 간에 이러한 그 시대의 풍조와 그 시대의 유행의 시류를 알게 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사회주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형편에 의해 1889년 ‘그리스도교사회주의자협회’가 조직되기도 하였으며 20세기 초 몇 년 동안 구원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회복음운동이 번창했음을 알게 한다. 여한 간에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사회주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를 포함한 또 다른 그룹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유사성 및 맹점을 발견하기 위해 19세기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를 근대 산업사회에 적용하려는 교의와 그 운동을 알게 한다. 19세기에 일어난 이유는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치 경제 활동을 주장하는 연관되어 있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소유나 생산, 교환수단의 통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카톨릭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봉건적 협동조합 제도로서 통상의 사회주의와는 전혀 별개의 질서이다. 19세기에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를 근대 산업사회에 적용하려는 교의와 그 운동을 알게 한다.한편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를 포함한 또 다른 그룹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유사성 및 맹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이제는 한국 분단의 역활에 대해서 용서를 선언하고 6.25전쟁의 와중에서 서로가 당했던 증오를 용서하고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한 민족의 신뢰성회복으로 여기에 서로 희망을 갖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8-30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3
    너의 표정은 독특하다. 네가 다소곳이 웃는 모습은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편안함을 느끼는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다. 네가 우는 표정으로 노래부르는 모습은 영락없이 뮤지컬 배우와 다를 바 없다. 너는 때로 춤춘다. 팔은 천장을 찌르듯 높이 쳐들고, 허리는 뱀처럼 또아리를 튼다. 몸을 오십 센티미터 위로 떠오르게 하고, 머리를 사물놀이할 때처럼 흔든다. 얼굴은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활기차게 돌리고, 팔은 풍차 돌리듯 마구 흔들어 댄다. 너는 대형 무대에 설 필요가 없다. 너의 일상이 곧 무대요 활동 영역이다. 너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노래 부를 수 있고, 춤출 수가 있다. 그것이 너의 개성이니까. 너는 그분 앞에서 노래한다. 그분은 너의 어머니요 아버지니까, 너는 그분에게 예뻐 보일 필요가 있다. 가령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맛있는 걸 사 달라고 졸라댈 때 안 사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 너는 그분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도 좋다. 너는 그분의 자녀이니까. 그리고 “하나님, 저 예뻐요?”라고 속으로 되뇌어라. 그분은 너의 믿음을 가상히 여기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그분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죄악에 빠지는 건 염려하지 마라. 그분이 네 마음을 주관하시니까, 너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다만 그분이 너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분의 의에 따르는 한 너는 안전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그분은 너에게 “변화산”과 아름다운 곳도 보이셨다. 그분은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고백할 만큼 나름다운 곳에서, 세상의 그 어떤 세탁업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흠결 없는 옷을 입으신 네 앞에 나타나셨다. 너는 우주의 한 곳에 서서 네 안에 죄의 티끌이라도 있을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 지나온 과거가 그분이 인정할 만큼 깨끗하였는가를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라. 네가 회개하고 그분이 구원의 문으로 안내하실 것을 믿는 이상, 너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다. 변화산에서 천사들이 수종드는 그 거룩한 모습을 기억하라. 그분은 변화산에만 계시지 않았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만 보아도 그분은 우리 옆에 계신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수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부어 그분의 발을 씻겨 드리신 것만 보아도 그분은 분명 현실에 분명히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네 안에 계시다는 것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잊지 마라. 가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면서 조금 색다른 상상을 해 보곤 한다. 너는 시인들의 출판 기념회를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너는 남산에 있는 문학의 집, 종로에 있는 H관, 서대문 역사 박물관, 안산에 있는 S카페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주로 네가 사회자에게 다가가서 축가를 부르겠다고 신청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너의 제자가 반주 MR을 만들어 준 덕택에 거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수필가 K는 사회를 보면서 네가 축가를 부르겠다고 자청해서 순서에 넣었다고 청중들에게 알리는 바람에, 장내가 웃음 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너는 자신감이 쌓였고 ‘KBS 전국 노래 자랑’ 1500회 특집에 출연 신청을 하였다. 대개 신청한 사람들이 대중 가요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너는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들고 예심장에 나갔다. 600여 명의 신청자 가운데서 네가 본선에 뽑힌 것은 순전히 너의 표정 때문일 거다. 너는 오십 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십대의 표정을 짓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16명이 본선에 오르는 무대에 네가 뽑히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딩동댕”이 아닌 “땡”으로 처리될 예정이었지만, 너는 거기에 들지 않기 위해서 밤새도록 박자와 음정을 표정까지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외웠다. 그 덕에 너는 특집의 여덟 번째 순서에 노래를 하여 텔레비전에 나왔다. 그러나 너는 노래의 질보다도 표정에 신경을 쓰다 보니까, 노래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땡”으로 처리되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너는 주위의 지인들에게 1월 31일에 방송되니 시청하라고 대여섯 번씩 문자를 보냈다. 지인들은 평소에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네가 나온다니까 그냥 인사치레로 전국 노래 자랑을 시청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너의 순서가 되자 너는 온갖 인상을 써 가며 노래를 불렀다. 지인 한 사람이 친구 병문안을 갔다가 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틀어 너의 노래 부르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자 병실에 있던 환자가 투덜댔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힘들여 노래 부르지. 보는 나도 힘드네.” 그 얘기를 듣고 너의 지인은 얼른 병실을 나와 버렸다. 그렇다. 너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너는 이제 너의 달란트를 찬양을 통해서 발휘해라. 진지하고 거룩하게, 친근하고 온유하게 노래 불러라. 그분이 너의 예쁜 모습을 보고 ‘그놈 참 귀엽다’는 혼잣말을 되뇌이도록. 그러면 너는 축복받은 것이다. 그러니,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8-30
  • 목회는 쉬운 것이다·70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곳만이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알아듣지도 못할 말과 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요란하게 하여 계속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나와 함께 계심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일을 제사장이 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매우 단순한 복음의 가치를 복잡하게 만든 화려하고 찬란하게 보이는 인간적 욕망의 꿈에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유교적인 전통과 무속적 신비주의로 자리가 굳어진 곳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대단한 선교적 열정이 있었던 초기의 선교적 역사는 급진적으로 발전할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 보면 기독교가 무섭게 변질되어 명목상의 기독교일 뿐 복음과는 관계가 멀어졌다는 것입니다.유교의 기초를 버리지 않은 그 위에 구약적 제사장이라는 의식이 굳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만인제사장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 속에 유교적 질서와 윗사람 위주의 중심이 귄위주의, 사회질서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하나님이란 이름을 남용하여 심판하고 형벌만 주는 가까이할 수 없는 분으로 제사장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여기에서 당회장권, 목사의 권이 남용되어 설교나 신학적 바탕을 유교식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된 것입니다.남성 중심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으로 남자는 치유될 수 없게 되었듯,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요, 동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둘을 따로 봄으로 성경의 근본적인 기초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절대로 기독교가 아닙니다.이들은 가문을 지나치게 유지하려는 정통주의에서 발생한 신학도 학문으로 단순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복잡하게 만들어 엄청난 범죄를 일삼고 있으면서 듣기 좋은 말과 용어를 사용하는 가증스러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 중 가장 부흥했다고 자랑만 일삼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상처가 곪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없게 위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받아들여 수입한 신학을 학문이란 겉옷을 겹겹이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진들의 눈물과 피로 닦아 놓은 터 위에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오늘날 우리 교회의 흐름은 자료에 의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18세기 대각성운동의 주역)는 “부흥은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며 인간은 부흥을 가져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그러나 찰스 피니는 “부흥이 인간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준비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사실 한국교회는 찰스 피니의 사상에 매여지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영감주의자인 노오만 빈센트 필은 ‘부흥에 있어서의 인간적 역할’을 강조한 저서인 「확신의 삶」, 「적극적 사고력」의 정신적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서 스스로 하는 신앙, 꿈과 환상의 필요성 강조, 심리학적 정신치료법 강조되었습니다.그 후 필의 수제자 로버트 슐러의 대중적 부흥운동, 교회성장 원리, 적극적 사고, 환상, 상상, 심리적, 상업적 기술에 근거하여 ‘적극적 사고에서 위대한 힘이 생긴다’는 주장이 한국교회를 흔들어 기형적인 성장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현장을 옥성옥 씨가 「마케팅에 약해진 기독교」, 「심리학에 약해진 기독교」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목사들로부터가 인간의 본질상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 필요를 교회가 채워줌으로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자신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방 종교와 똑같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으로 재판도 필요없이 즉결사항에 속한 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행동은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에서 만들어진 위선일 수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8-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