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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는 쉬운 것이다·5
-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사도행전 17장 24~25절에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농부일 때는 농장에서도,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장에서, 기술자일 때는 공장에서, 교사일 때는 학교에서, 예술가일 때는 예술작품 안에서, 우리가 있는 어느 곳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내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한 몸 관계로 각각 개인 안에 찾아오셔서 함께 계신 분입니다.교회에 대하여교회란 부름 받은 무리 즉 하나님이 불러내신 무리입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된 선택된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 가운데 있는 무리를 모세를 통하여 광야로 불러낸 것입니다.사도행전 7장 38절에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 7장 53절에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천사의 율법이란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율법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0장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려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부르신 목적은 구원의 소명과 사역의 소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과된 사역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사역이 동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믿는 자와 사역자로 나누어져 믿는 무리는 사역의 사람들에게 사역권을 넘겨주게 되는 결과입니다. 신약시대는 전도 즉 선포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오늘 우리는 경쟁의식을 불러 넣어 무서운 병이 들게 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2장 43~47절에서는 성령이 임하신즉슨 불러내신 하나님의 소명에서부터 온 자연 발생이었기에 47절에서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는 부흥의 일은 인간의 공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하심을 우리는 교회의 의미를 잘못 인식함에서 오는 인위적인 부흥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전도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이유가 바로 성전문화와 신당문화에 매인 상태에서 온 교회당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룹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전도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증거한다’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넣어두려는 것이 전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이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또한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열심과 노력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얻고 못 얻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하나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칼빈의 선택교리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모순임을 지적했습니다.중세교회가 면죄부만 사면 죄를 용서받고, 죽은 부모가 천당 갈 수 있다는 천당 티켓처럼, 오늘의 교회당에서 천당 티켓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천국 가기 위한 무수한 조건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행위는 분명히 기독교 신앙적인 표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부르심은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대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아라” 교회당을 키우기 위한 목적은 아닙니다. 신자들을 충성이라는 명분으로 쥐어짜서 목회 성공의 척도가 거대한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조건부 면제부를 돈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화려한 형태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선교적 목적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연성일 뿐입니다.교회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무리는 부름 받은 순간부터 평준화된 무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준화란 빈부귀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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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는 쉬운 것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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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4
- 성전 문화는 기독교가 아닙니다어떻게 해서 교회가 신당인 성전 문화로 변했는가?주후 313년경 거대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모든 종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자기들의 방식대로 믿을 수 있게 했습니다.로마에 예속된 종족 모두는 정치적으로 지배를 받으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함과 동시에 그 속에 황제가 믿는 신앙 방법으로 마침내 로마의 국교로까지 발전했던 것입니다.이 순간이 주 후 313년이었습니다. 로마인은 기독교라는 우산 속으로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방 종교문화가 자연스럽게 교회의 의식이나 조직의 가치 개념들에까지 유입되었던 것입니다.이때부터 가장 치명적인 것이 교회당 문화이며 절기 문화 그리고 사제 문화입니다. 이 이방적 문화가 버젓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이방 종교의 형태는 신당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는데 히랍의 아폴로 신전, 불교의 사찰, 이슬람의 사원과 같이 신당 문화는 불교의 것도 받아들여 가톨릭과 불교의 공통성을 갖게 되었습니다.이 신당문화에 젖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중세교회가 교회당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가 되었습니다.출애굽기 20장 23절에 “어떤 형상으로도 나를 만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과 같을 수 없는 점입니다.교회당 문화에 매달리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구약교회의 실패작인 예루살렘 성전이나 이방 종교 문화가 유입된 천주교 문화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완성한 십자가의 역사를 무효로 만든 것입니다. 이 무효 속에 현대 기독교도 깊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사람과 함께 거하시고 함께 동거하고자 십자가 사건을 치른 것인데 이미 다 이루신(요 19:30) 것을 하나님과 별거하게 한 것이 교회당 문화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온 이방 종교로 둔갑하게 하여 놓은 이유는 또 하나의 인간이 가로막는 권위로 제사장 문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혼적인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삼분설의 시작이었습니다.삼분설은 주님이 친히 보이신 것은 죄인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고자 보이신 성찬에서 그리고 구속받은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거하신 공동체가 교회임을 파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교회당 문화가 교회의 안방을 차지하여 진정한 교회를 거리로 쫓겨내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마는 로마를 내어주고 교회를 통째로 삼켰다”라고 탄식한 사학자의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교회와 교회당은 엄격히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 된 교회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것을 바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현대교회 목회자의 꿈이 되었습니다. 이 착각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교회당을 생각하고 있다는 불행입니다. 곧 성전으로써 하나님을 모신 전이라는 무서운 착각입니다.여기에서 목회자로서 불안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인 주석을 쓰는 것이 신학자들의 허망한 꿈이 되고 있어 더욱 하나님교회에 위협과 불안을 갖게 되고 그리고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좀 배웠다면 모든 주석이 잘못되었다고 무시하고 또 하나의 자기주장을 논설하고자 함이 신학자들의 꿈이 되었습니다.교회당 문화란 교회는 교회당을 가져야 교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교회당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교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신앙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집 혹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사상을 신자들이 갖게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엄청난 죄악입니다. 교회당 강단을 신성시하여 거룩한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특별히 꾸미고 장식하고 엄격하게 구별하여 십자가를 걸고 촛대를 세워 촛불을 켜는 행위도 그리고 꽃으로 장식하는 일이나 휘장을 치고 교회당에 나가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교회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됩니다.교회당과 교회를 혼돈하여 하나님의 전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를 우상의 신당으로 신이 있는 집으로 신전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당에서 불리는 하나님은 이방 신들과 다를 바 없게 되고 창조주 하나님을 비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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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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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21
- 내가 가사 도우미 신세로 전락한 것은 명퇴를 하고부터입니다. 명퇴는 나의 간절한 바램과 희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총각 시절부터 글만 쓰는 전업 작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벤치에 앉아 인간미 있는 존재를 사색하며,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잡지사에 보낼 글을 쓰는 일은 나의 로망이었습니다. 그런 로망을 꿈꾸며 집안에서 여유를 찾으려 할 즈음, 아내의 바가지 긁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집에서 삼식이가 되어 비생산적인 글만 쓰지 말고 나가서 단돈 백만 원이라도 벌어와 봐요.” “아, 생활비는 매달 적당하게 들어오잖소.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래요.” “당신 방구석에 들어앉아 글만 쓰면 병날까 봐 그러지요. 좀 나가서 움직여요. 무브(move).”아내의 바가지에는 묵묵부답으로 있는 게 상책입니다. 딸아이는 이런 내 신세를 『허생전』의 ‘허생’에 비견하였습니다. 7년 동안 아내의 바가지에 시달리다가 홧김에 나가서 돈을 왕창 벌었다는 허생. 그러나 글쟁이는 글만 쓴다고 당장 돈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하늘 아래 멍석 깔아놓기입니다. 뭔가 좋은 글이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허망한 일에 기운을 소진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동안 부지런히 문예지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시집과 평론집을 한 권씩 출간하기도 하였지만, 문학에 관심이 없는 지인들은 나의 책을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런 무반응을 오랫동안 겪다 보면, ‘야. 이거 내가 작가 맞아?’라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글은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으니, 아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볼멘 소리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내 뿐만 아니라 코미디 각본을 쓴다는 후배 작가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선배 하나가 “이번 시집은 읽을 만하다”고 하자, 후배 작가 왈 “그걸 읽기는 했어요?” 하고 반문하는 것이 기증 받은 내 시집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다고 후배에게 직접 물어 볼 수도 없고. 아무튼 명퇴한 지 삼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방구석에서 혼자서 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겠다’ 싶어 신나게 글을 쓰다가도, 열흘이 지나면 ‘에이.’ 하면서 고개를 가로젓던 일이 수십 번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안 일을 하라는 아내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더 버틸 수가 없겠다’는 자조감이 몰려왔습니다. 딸아이까지 “아빠. 직장 그만두면, 가사 도우미 되기로 했잖아.” 하는 데엔 빠져 나갈 구멍이 안 보였습니다. 막상 집안에서 삼식이 노릇을 하다 보니, 아내의 힘이 세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형제들 모임 때, 여자의 힘에 대해 형님께 살짝 의견을 물었더니 형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건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야. 여자가 강하게 나올 땐 무조건 엎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아니나 다를까. 형수는 형님이 집에서 그렇게 번쩍이게 가구들을 닦아 놓는 데도 “형님과 같이 살기 싫다”고 투덜대는 걸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여자가 폐경기가 지나면 남편들이 기죽어 지내는 게 보편적인 현상인 모양입니다. 연로하신 은사인 예술원 회원 M시인도 아내 앞에서 아이 취급 당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신혼 시절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내가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였지만, 집안 일은 청소하는 시늉만 하면 되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차려다 준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나서, 아내가 깎아 온 사과를 입에 넣으며 “당신도 들어요” 하면 행복해 하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남편 공경하라’는 어른들 말씀을 귀가 닳도록 들었는지, 말끝마다 경어체를 붙여 주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엔 꼭 내 의견에 따랐었습니다. 그랬던 아내가 언제부턴가 가정에서 왕비로 군림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집안의 대소사에 대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아내. 집 안의 소소한 것에 대하여 야무지게 닦달하는 아내의 카리스마에 나는 언제나 기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역발상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느니,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가사 도우미가 되자. 전철을 타고 가다가 비닐 앞치마를 파는 상인에게 오천원을 주고 두 벌을 샀습니다. 하나는 빨강, 다른 하나는 파랑 꽃무늬가 그려진 것으로 설거지를 할 때 물이 옷에 튀는 것을 예방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파랑 꽃무늬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였더니, 처음엔 아내와 딸아이가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봅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세척제를 묻힌 수세미로 닦아냈더니, 아내가 내 옆에 다가와 말합니다. “다 씻은 그릇들은 흐르는 물에 놓아 두어야 씻기가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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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인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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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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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 먼저 정직하고 멋진 인격의 소유자로 소명을 받은 후에 목회하게 하소서 매일 지성소를 다녀온 듯 두려운 마음으로 행하게 하소서 99%가 아닌 순금 같은 종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전한 종이 되게 하소서 늘 성실하고 성결하여 가정에서 존경받아 본이 되게 하시며 목회자의 가정이 깨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청결한 양심과 순수함으로 세상 명예와 욕심 물리치게 하시어 흠이 없는 종으로 끝까지 존경받고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상담후 성도들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묵직한 입이 되게 하시고 특별히 선택된 귀한 목자임에 감사드리며 맡겨진 양떼들을 부지런히 보살피게 하소서 권력을 이용하여 나와 다르다고 양을 내치기보다 어떤 희생과 역경 억울함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허물을 끌어안게 하소서 능력과 기적을 행하기보다 사랑이 우선임을 깨닫게 하소서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신뢰있는 종으로 설교와 삶이 일치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심을 잊지않게 하소서 아부하는 자들로 인해 성도들을 보는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특별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목소리의 컴플렉스로 인해 위축되지 말고 주신 음성에 감사드리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랑의 음성을 구사하여 더 큰 은혜와 감동을 주게하소서 실수를 했을때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정직한 종이 되게 하시며 받는것에 익숙하여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세상 지혜를 이용하여 남의 양떼를 훔치는 삯군목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하늘의 지혜로 행하게 하소서 경제의 어려움과 목회 성공을 위한 압박감으로 인해 건강을 잃는 일이 없도록 평안을 주시고 육체를 따라 계획한 세상것들이 교회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소서 크다고 큰교회가 아니며 작다고 작은교회가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한 교회가 가장 큰 교회임을 기억하게 하시며 자손 대대로 축복하소서 행여 목회자의 권력으로 교회를 다스리며 그것을 좋게 여기는 성도들이 없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종이되어 하늘의 지혜와 지식으로 잘 양육하게 하소서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하늘나라 CF광고모델의 주인공'임을 기억하게 하셔서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잘 선전하는 최고의 CF모델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순전한 모습으로 말과 행동 표정을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하늘나라가 그대로 보여지게 하소서 자연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자연스럽기 때문이듯, 교회 강대상의 장식은 자연스럽고 심플하게 목회자의 의상도 자연스럽고 수수하게 보여지는것에 치중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임을 깨닫게하소서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처럼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뒤로 물러나 격려하는 모세처럼 후배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원로 목사님이 되게 하시어 '목사님으로 인해 정말 행복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은퇴 후가 더 멋지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까지 '걸어 다니시는 예수님'으로 기억되는 교계의 롤모델이 되게 하시고 남은 여생 주님의 축복 속에 행복한 여정이 되게 하시고 자손대대로 하늘의 복이 넘쳐나게 하소서 주신 사명 다 마치고 주님 품에 안기는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 받는 귀한 종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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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2
- 우리 동양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에, ‘남쪽에서 가져와 심어놓은 귤나무가 북쪽에서는 탱자나무가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江南種橘江北爲枳)?’ 하는 이야기는 제나라의 안영과 초나라의 영왕이 주고받은 담화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뜻은 사람됨에 있어서 환경과 풍토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일 것이다. 요즈음 기독교 지상에서도 의인과 성화에 관한 신학자들의 논쟁이 한창이다. 마틴 루터가 제창한 ‘열매가 좋아야 좋은 나무라’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향하는 영국 복음주의자 톰 라이트(N. T. Wrigt)의 견해에서,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를 김세윤교수가 수용한 것과 관해서 논쟁이 뜨겁다.이 논쟁은 필시 한국교회의 도덕성 결핍으로 인해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자 촉발된 논쟁일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가 의롭다함을 받았음’에 대한 법정적 무죄 선언이 신자들의 도덕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역사에서 독일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2차 대전 중에 유대인을 600만 이상을 살해하였다. 독일 시민이라면 그 가족 가운데에 한사람이 유대인 살해에 연루되어 있을 만큼, 시민 각 사람의 의식이 복음의 가르침에 훈련되어 있질 못하였던 것이다. 금 번 폭스바겐의 부도덕한 처사에서도 독일 사회의 시민 의식과 도덕성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복음과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졌으나, 실제로는 기술이 규제를 따라가질 못해서 일어난 처사이기도 하다.우리 교계를 살펴보자. 투표 과정을 통해서 교단장이 선출되고, 그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멈춰지질 않고, 당선된 임원 구성에 의해서 정책과 목표가 설정된다. 어디 이뿐인가? 서로 간에 주고받는 전략적 술수에 의해서 부서장과 부서 임원들도 구성된다. 이러한 정치적 책략에 총체적으로 교단들이 휘말려 있다 보니, 도덕성이 훼손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도 교단의 세력에서 자유하질 못하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도 자유하질 못하고, 궁중 신학자들 같이 권력자의 시녀 노름에 어울려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어느 신학자가 개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과 비리에 소금을 뿌려본 일이 있었던가? 다만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인 논쟁에 국한되어 있고, 신학적이라 하더라도 교단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는 눈을 감고, 꿀 먹은 무엇 같이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어디 이뿐이랴? 우리 일선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신도들에게 립서비스와 프로그램 진행, 이벤트는 열심히 하였지만, 복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이를 학습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에는 부끄러워하였던 것은 아닐까? TV 생생정보 프로에서 국수집 사장이 국수의 전문가가 되어있고, 국수의 달인이 되어 있으면, 항상 손님들이 줄을 서며 넘쳐나고 행복해하질 않던가? 작금에 와서 종교개혁 이후 문제점이 되어온 신학적인 논쟁은 그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핵심적인 논쟁거리가 되질 못한다. 한국교회사에서 교단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로 분열되었던가? 거의가 권력과 야합한 이해집단의 전략과 전술적인 계략에 신학자들이 들러리를 섰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의 정치 집단이 내건 슬로건들이 정말 그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관이었을까? 오늘날 교계에서 정화를 외치는 지식인들도 거의가 헐리우드 액션에 지나질 않는다. 영화 장면에서 하는 총질이 실탄이 장전되어있질 않고 소리만 요란한 공포탄인 것 같이, 허공에 대한 칼질뿐이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 모임을 운영하려면 기업에서 자금을 빼어내야 하듯이, 기독교윤리모임 집단도 개교회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결국에는 부자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기대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만 요란해진 것이리라. 작금의 칭의론과 성화론 논쟁을 좀 더 단순하게 현실적으로 대해보자. 이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있었다. 이는 자기중심의 구도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구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모두 폐기처분 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바깥으로 벗어나질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아주 경이로운 선물을 우리에게 전달하였고, 성령의 각양 은사들도 가져 왔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열매를 맺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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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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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28회 총회장 윤하영(尹河英) 목사
- 3.1만세운동 가담 1년 6개월 옥고흥사단과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조달 가담미 프린스톤신학교 유학 후 신의주제일교회 담임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연맹 이사장 맡아 친일부역충북도지사·문교부 교과서 편 수관 등 지내 평북 의주 출생윤하영(尹河英 1889. 8. 6~1956) 목사는 1889년 8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 광명에서 윤연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까지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한문서숙(漢文書塾)에서 한학(漢學)을 익혔다. 1907년 구성으로 온 가족이 이사 나왔고, 이듬해 1908년 선천(宣川) 주재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램프(Rev. Henry Willard, Lampe. 남행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입신(入信)하게 되었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 겸 조사(助師)가 되어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때마침 선천에 성경학원이 문을 열게 되자 이 학원에서 3년간 성경과 교양을 쌓았다. 1915년 8월에는 평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다음 해 4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1917년 8월에 정식으로 평북노회(平北老會)로 부터 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향 광명으로 돌아가 장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옥 후 다시 신학교에 복학, 1921년 6월 제14회로 김관식, 김응진, 이대영등과 함께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에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평북 용천군 용계동교회를 맡아 목회하였고, 1923년에는 같은 군 광화교회(光化敎會, 1905. 10. 19 설립)와 덕동교회(德洞敎會, 1909. 7. 12 설립)로부터 공동 초청으로 청빙되어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24년에 중국 난징(南京)으로 가서 어학(語學)을 준비하면서 1928년 8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청원하고 들어가 흥사단특별단우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후 잠시 남경대학(南京大學)에 적을 두고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조달 모금운동에 가담해 활동을 하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 주에 있는 유명한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의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목회하였다.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1938년 4월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생일인 천장절에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시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韓京職) 목사와 함께 5월 신의주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후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곧바로 일제(日帝)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엔 전국교회에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열심히 하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또 총연맹 이사장으로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 26개 노회장에게 공문을 보내 각 노회마다 노회지맹(老會支盟)과 각 교회 애국반을 조직하고 보고 하도록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19 참조.) 윤하영 목사가 신의주제일교회로 부임한 후 교회가 크게 성장, 의산노회(義山老會) 안에서만 아니라 예수교장로회 안에서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1939년 9월 8일 신의주제이교회에서 제29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성경 히브리서 11장 31절부터 12장 2절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어 임원선거에서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원 교체가 끝난 후 9월 11일 윤하영 총회장 지도하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하영 목사는 평생동안 친일부역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살게 되었다. 당시 결성식 사회는 곽진근 목사가 진행하였는데, 먼저 궁성요배를 하고 국가봉창 황국신민 서사제창, 찬송가 제창, 기도, 성경봉독, 취지설명 선언, 내빈축사 순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후 의산노회 총대로 총회에 몇번 출석하고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1941년 12월 8일 미일전쟁, 소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돌아온 윤하영을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신의주로 돌아오자 마자 즉시 미제국주의 앞잡이로 낙인찍어 그를 시무하는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쫓아내라고 외압을 가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하영 목사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신의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마(白馬)라는 곳으로 갔다. 역시 미국에서 유학(프린스톤신학교)을 마치고 온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도 같은 처지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24 참조). 1940년 1월이 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의 지시에 따라 각 노회지맹(各老會支盟)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긴급공문을 보내 시국대응(時局對應) 제실시에 관한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같은 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본부의 지시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기원절 봉축행사에 관한 건>이란 공문을 보내 행사 참여를 독려했다. 다음 2월에도 총회연맹 이사장으로부터 <황군(皇軍)을 위한 위문품을 위한 공고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기한을 정해 금품이나 위문품을 총회연맹 본부로 보내도록 했다. 같은 달 신의주에서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의산노회(義山老會)지맹 이사를 겸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이르러는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애국반장에게 <“씨”설정계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포교자(교회지도자)들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8월에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애국반 조직 독촉의 건>이란 공문을 보내 각 교회에 애국반(愛國班)을 조직해 보고하도록 하였다.1939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서 온 공문 70여통을 받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총63회의 통첩문을 보내 연맹의 지시와 통첩에 따르게 했고, 전국 26개 노회 전체에 노회연맹 지회를 조직케 했고, 각 교회에도 730여 개의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일제는 교회지도자들을 배일(排日) 혐의자로 모두 검속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일제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목사직에서 물러나고야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윤하영 목사는 그해 9월 신의주제일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다시 시작했고,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와 함께 뜻을 같이 하여 기독교사회민주당(基督敎社會民主黨)을 결성하여 정당으로 출발했다. 이후 갑자기 북한에 붉은군대 소련군이 진주해 와 종교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자 북쪽에서는 복음전도 활동이 앞으로 원만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직감하자 한경직과 함께 월남하기로 결심하였다. 월남해 서울에서 당시 남쪽에 진주해 있는 미군정청(美軍政廳) 공보부 여론조사과장의 직을 맡아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946년 2월과 1947년 2월 두 차례나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으나 1948년 11월 하순 무렵 구호물자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1949년 1월 충북지사직을 면직 당했다.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도쿄(東京) 주재 미군극동사령부(美軍極東司令部) 공보요원(公報要員)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자 귀국해 문교부(文敎部)교과서 편수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같은책 pp.710~711 참조). 한편 교계를 위해서는 기독교계명협회(基督敎啓明協會)를 조직 문맹퇴치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했던 제28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황동노회와 평등노회 그리고 군산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② 평양에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본 총회가 직영하기로 결의하다. ③ 교역자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성(京城 서울)에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현재 한신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예장총회 사무국편, 예장(합동)총회 2013 서울 p.16 참조). 그는 6.25 전쟁 와중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6년(월·일은 미상) 소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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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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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28회 총회장 윤하영(尹河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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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한다 2
- 남북 화해는 정상들의 협의서나 체결만으로 또는 정치가들의 논의만으로 아니 되고 화해는 남과 북이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인 국민들의 이해도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기도해야 한다.사드(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미사일을 요격하는 종말 모드와 X밴드 레이더로 수천km내의 시설을 탐지하는 전방배치 모드가 있는데 한국과 미국은 사드를 종말 모드로 배치한다고 한다. 정부는 지난 7월 13일 오후 사드를 경상북도 성주군 성산포대에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배치하는 장점은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적의 미사일을 고도의 높이에서 요격 격추시키는 무기이다. 이는 수 천km까지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이다. 또 여기 따르는 문제는 X밴드는 레이더에는 엄청난 양의 전자파가 나와 100m 내에 있는 사람은 사망할 수 있고 3,5Km내에는 특수 장비를 갖춘 사람만이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고도에서 격추시키기 때문에 지상으로 파편이 떨어지면 수도권과 충청권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중요하지만 지난 천안함폭침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의 항공모함 서해진입을 극구 반대하던 중국은 자기들이 설정한 도련선(중국이 스스로 설정한 해상 방어망)안에 있기에 최신 무기인 사드가 도련선 안에 배치된 현실에 신경을 쓴 이유도 알게 하며 탈냉전 이후 중국과 러시아는 상호 전략적 협력을 위해 기회를 가지려함과 그동안 20년 동안 대내적 상황과 국제적 위상이 크게 달라지면 미국을 겨냥한 전략적 협력의 수준의 변화에 공세적 패권적 외교에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게 된 점에 유의한다. 통일을 바라는 것은 한 민족이라는 긍지 차원에서 한 국가가 되면 국가신용등급 상승으로 당당한 통일국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미사일을 계속 발사하고 실제로 위협요소를 해 나갈수록 국외의 투자자들은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불안심리가 증가하게 된다. 지금까지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이산가족의 만남을 위한 한 겨레의 아픔을 목숨이 끊기기 전에 그동안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기다린 민족적 비원을 풀어 주어야 한다. 통일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만의 것이다.에베소4:3-4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희망도 하나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이른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으로 알려진 이 법은 보복을 하게 만드는 법이 아니었다. 이 법은 개인적으로 필요 이상의 과도한 보복을 삼가고, 해를 가한 만큼만 처벌을 받는 공의로운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올바른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고대 중근동 나라들의 다른 법체계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이 같은 동해보복의 법 원리는 오늘날까지도 사법적인 판결에 있어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여기 신약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사랑과 용서의 법은 구약의 동해보복법을 뛰어넘는 위대한 것임을 여기에 밝힌다.마태복음5:38-3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시편 46: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꺽고 방패를 불사르신다.”마태복음 26:52,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에베소 4:3-4,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희망도 하나였다.”한국교회는 민족공동체와 인류공동체와 생명공동체로 복음 안에서 화해와 우호증진에 많은 기도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교회부터 하나되어 화해를 위하여 일하는 축복을 일구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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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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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한다 1
- 8.15 해방주일을 맞을 때마다 생각하게 하는 것은 광복 이후 해방과 분단은 민족의 자주독립이 아니라 강대국의 열세에 의한 외적인 벗어남과 붙들림의 와중의 역사이기에 우리 민족의 광복은 치욕의 해방으로 보아야 한다. 회고해 보면 우리는 광복 이후 한 민족의 역사는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분단시대의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60,70년대는 식민주의의 사관의 극복으로 민족사관의 수립이라는 기치에 역점을 가지게 했고, 분단된 조국은 7.4남북공동성명을 내고 종속적인 체제의 현상유지를 극복하는 실현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모색을 하게 되었다. 80년대 이후로는 역사의 주체, 발전방향 등에 관련하여 진보적인 역사관이 대두됨으로 냉전 속에서 서로 긴장되어온 사관의 장벽을 헐고 그 지평을 넓혀 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90년대는 세계사적인 현실로 세계질서의 형성, 미국, 일본, EU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블록화와 그로 인한 국가 간에 빈부격차의 심화, 또한 민족주의의 물결의 고조와 이로 인한 민족 갈등의 심화와 여기에 정보산업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산업구조의 개편, 민족문화 정체성의 위기 등을 직면하고 있다.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토를 국가라 하며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는 나라의 다스림을 나라라고 말하고 민족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몇 가지 문화적 공통사항을 지표로 하여 상호간에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민족의 문화적 사항에는 언어, 종교, 세계관, 사회조직, 경제생활, 그 외 생활양식 등이 포함하여 민족은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설정된 범주를 말한다. 민족을 구분하는 기준은 언어이기에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이 대 전제이고 사람의 사고방식과 심성을 가장 잘 들어내 보인다. 그러므로 민족의식은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됨을 알게한다.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민족의 애환이 서린 동질성의 피붙이 이다.민족은 고도의 공동사회 성격을 갖춘 사회집단으로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강한 동질적 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민족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면서 서서히 그 집단적 확대와 통일을 실현했으며 대민족으로서 우리 같은 집단이라는 자기 정체성(Identity)을 가지게 되어 능동적인 민족적 자의식이 성립하게 되어있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에 합리적익 사상적인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애국사상의 근거로 자기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긍지를 가지게 한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어디서나 사회의 전형이 합리적인 이기주의와 타산적인 행동인 이익사회(Gesellschaft)로 지향함을 본다.그리스도교는 분열과 싸움으로 얼룩진 세상에 화해로 가꾸는 믿음을 갖는다. 해방 된지 오늘까지 우리민족이 분단으로 살아 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반신불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념의 후유증으로 두 나라가 되어 서로 극우와 극좌만을 우대하는 나라의 이념으로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며 살고 있다. 상대방의 피 흘림을 보면서 그것이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다.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여 상대방이 쓰러질 때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승리이며 누구의 기쁨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남의 힘을 빌려 자기 형제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으니 이 세상 천지에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이 어디에 또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평화통일을 지향하려는 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하여 평화통일 운운하는 사람들을 회색분자로 몰아 그 정당성마저도 빼앗겨 왔다. 지금도 이 생각 때문에 민족분단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극심한 계층분열, 지역분열, 계파분열 등 마음 아프다.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 땅위에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인권, 민주화를 위해 기도해 왔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분열시키고 노예로 만든 모든 악의 근본이 조국과 민족의 분단에 있음을 통회 자복한 회개는 이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민족통일은 국민 모두의 회개와 화해하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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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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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제32회 총회장 배은희(裵恩希) 목사
- 3·1 만세운동 및 민족운동 신간회 참여전북 전주지역에서 목회 활동해방 후 ‘전북치안대책위원장’맡아 치안유지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1951년 달성군 보궐선거 국회의원 당선 경북 달성 출생배은희(裵恩希, 1888~1966.2.5) 목사는 1888년 구한말 경북 달성(撻城)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는 마을에 있는 한문사숙(漢文私熟)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를 익혔다. 17세 때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잠시 방랑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교회에 발을 드려놓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로인해 자신이 살던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교회 안에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세워 피폐했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스스로 전도자, 학교장, 교사 등의 1인 3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의 교역활동은 자기가 살고 있는 달성뿐 아니라 경산(慶山)과 멀리로는 청도(淸道)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담임하며 순회전도자로써 열심을 다하였다. 배은희가 처음 공식기록에 나타나기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서 이다. 1912년(壬子) 全州郡 西文外敎會에서 牧師 金炳禮를 講聘하여 視務하게 하고, 其後 金仁全, 崔義德, 呂博師, 裵恩希가 相繼하였고, 助師는 崔祥燮, 李守鉉 等이 視務하니라(下券 p.171 참조)는 기록에 보이며 같은 책 전북 노회 기사 중 全州 西文外敎會에서 임시시무 하는 裵恩希를 該敎會에 정식 視務 허락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史記 下券 p.281 참조). 한편 배은희는 1920년 평양 장로교회신학교를 조선교회 영남지방에서 특출한 목회활동을 펼쳤던 기라성같은 김병호, 박덕일, 박문찬, 박명석, 염봉남 등과 함께 제13회로 졸업하고, 그들과 함께 조선교회를 이끌어 가는 기둥이 되었다. 신학교 재학시절에도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을 맞이하여 학생시위 운동에 앞장서 민족의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에도 주도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후 일제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일경의 눈을 피해 마산과 부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당시 경주지역 계남교회 시무시에 전주 서문밖교회(全州 西文外敎會)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인연으로 1921년 고향을 떠나 전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 목회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배 목사는 전주에서 목회하면서 1927년 경성(京城)에서 조직된 국내유일의 민족유일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전주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신간회 발족의 근본 목적은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굴레에 꼼짝 못하고 있는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예속의 굴래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일제 당국과의 어떠한 타협도 배제한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나, 좌익과 우익과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 되어 조직된지 4년만에 해체되고만 민족운동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3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p.662 참조). 교회 안에 유치원 설립과 무산아동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해 민족의식과 자립자활의 의식을 깨우치는데 앞장섰다. 야학은 한때 학생수가 5,6백명에 달하기도 했다. 또 1932년과 1936년 두 차례나 전북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협소한 기억자(ㄱ)예배당을 헐고 연건평 240평에 이르는 새 예배당 건물을 지어 호남지역의 굴지의 교회로 자리 매김을 하기도 하였다. 1938년 조선교회에 신사참배 바람이 불어닥치자 더 이상 육영사업(育英事業)을 이어갈 수 없어 유치원은 이창환에게, 무산아 야학(夜學)은 박심근에게 이양하였다. 배은희 목사는 1929년부터 신현창(申鉉彰), 유상백(劉尙伯), 강봉의(姜鳳儀), 김병수(金炳洙) 등과 함께 <독신전도단>을 조직, 농촌교회부흥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대상지역은 전북 일대였다. 후에 전북노회측과 약간의 갈등이 생겨 독신전도단을 <복음전도단>으로 개편하여 재출발했으나 일제당국과 신사참배 문제로 또 갈등이 생겨 강제해산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이때 김가전, 최양서 등과 함께 잠시 투옥되었다.1943년 일제 패망직전에 더 이상 교회에 머물며 정상적인 목회활동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전주교회를 사임하고 의사인 장남 배보석의 집으로 거쳐를 옮겨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배은희 목사의 몸이 지병으로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러나 아들 의사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기에 이를 즈음,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되는 1945년 8.15를 맞게 되었다. 그는 해방과 함께 독립치안유지를 위한 <전북치안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혼란한 정국에 치안평정을 위한 일역을 감당하였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기독교문사 1982. p.342 참조).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43년 5월 7일 일제당국의 조선 종교정책에 의해 총회장 김응순 목사가 총회장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교단을 해산해야 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본 제국주의 시책에 협력했던 총회장 김응순 목사는 새로이 출발하는 일본 그리스도교단(日本基督敎敎團)에 모든 교권을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교단이 출범하자 박학다식한 채필근(蔡弼近) 목사가 초대통리(初代統理 교단장)로 선임되었다. 이 일로 인해 채필근 목사는 죽을 때까지 친일부역자(親日派)라는 낙인이 찍혀 불행한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 한 마디로 자업자득이었다. 다시 1945년 7월 7일 일본 기독교조선교단(日本 基督敎朝鮮敎團)을 창설하여 초대통리에 김관식(金觀植) 목사가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얼마 못가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일본기독교조선교단도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일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은 남부기독교회(南部基督敎會)를 재건한다면서 김관식 목사를 회장으로 재선임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회 쪽에서 이탈해 나가 조선감리교회를 재건하였다. 처음에는 장로교회도 참여했지만 배은희 목사는 남부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이미 전국에 조직되어 있던 교구(敎區)를 노회로 전면 개편하였다. 그런 후 1946년 광복 이듬해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를 개최 총회장에 배은희 목사를 선출하였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려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우연히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세우고 교육자가 되겠다고 평양 장로교회신학교까지 졸업하여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교육자가 된 입지적인 인물로 교단내 인사들로부터 그의 신앙과 능력을 인정받아 해방 직후 혼란기에 처했던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세움받게 된 것이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40 ~141 참조). 1947년에는 임시정부를 반대했다 하여 괴한의 피습을 받기도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반탁과 친탁으로 소란했던 해방정국이 혼란할 때 배은희 목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자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1948년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 고시부장으로 피선되었으며, 1951년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목사로써 해방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영광의 기회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에 국민부장을 거쳐 경남자유당 위원장을 맡아 국정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1954년 5월 20일 민의원 선거시 대구갑구(甲區)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배은희 총회장이 재임했던 제32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38선이 철폐되면 남북이 통일한 총회를 조직키로 하되 현이남 12개 노회가 총회를 조직, 회의를 진행키로 하다. ② 1938년 제27회 총회시 가결한 신사참배는 전국교회의 신앙부족으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저지른 잘못으로 알고 회개하고 이를 취소하다. ③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총회사무국 편, 대한예수교장로회교회 2013. p.17 참조). 남긴 저서로는 <나는 왜 싸웠나>가 있으며, 은퇴 후 자택에서 1966년 2월 5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영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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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제32회 총회장 배은희(裵恩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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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1
-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금년 여름은 유난히 더운 듯하다. 이런 여름에 여지없이 찾아드는 행사는 신도들의 수련회도 있겠지만 교역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예년처럼 지방에서도 교역자를 위한 세미나를 동반한 부흥회가 개최되었는데, 초빙된 강사가 교역자에 대해 많이 고심하며 원고를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에 있긴 하지만, 강사 자신의 교회나 목회 경력이 상승 기류를 타고 있어서인지 대부분 어두운 부문 보다는 앞만을 내다보고 강의하는 것 같았다.이 강사의 오후 강론이 ‘복음’에 맞추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정리가 되질 못한 것임을 아쉬워하며 ‘복음이 무엇임......,’에 집중하려 애를 쓰는 가운데에 정의가 내려지고, 교역자들이 복음에 더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이 강사가 강조하는 강의 전체가 ‘승리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지난 백여 년의 세월에서 기복적인 복음과 승리주의 복음에서 자유하질 못하였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느 종교에서도 다르질 않았다. 기복주의 종교란 대다수의 교역자들이 바르게 인지하고는 있으나, 전혀 그 스타일에서 순수한 복음으로는 돌아서질 아니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떡이긴 하지만, 결코 실천에 옮기진 않는다는 말이다. 기복종교는 항시 국가와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왔다. 과거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서 국가의 종말을 맞이할 때에, 종교가 호국불교로 타락한 나머지 정권을 유지하는 종교로 전락하므로 인해서 국가나 국민 의식을 계도하기 보다는 정권의 시녀, 혹은 국민의 정서에 아부하다 보니 함께 망해버린 것이었다.‘승리주의’에 관해서는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에게서 명료하게 분별하여 진 것 같다. 저는 출애굽기를 다루면서, 승리주의에 취한 이집트 종교와, 하나님의 계시에 귀와 눈이 밝아진 모세의 종교를 비교한다. 승리주의 종교는 귀족과 권력자와 가진 자의 시스템을 현상 유지하는 것에 주력하는 종교이다. 그 당시 이집트의 종교는 권력자 파라오의 정권 유지 시스템의 시녀였다. 허지만 모세가 만난 야훼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집트의 권력에 억압되고, 정권 유지에 희생되던 히브리인들은 오로지 승리주의에 도취한 사회적 시스템에서는 노예이며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러나 광야를 넘어서 그 끝 부문까지 다다른 모세는 고통 가운데에 있는 자들의 신음을 들은 야훼신과 마주친다. 여기서 승리주의에 오염된 종교와 모세의 교회와의 현격한 차이와 충돌이 일어난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에 들어가, 악과 고난 가운데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공감대를 이뤄서, 마침내 이집트에서 출애굽을 하여 자유인이 된다.오늘의 가치관에서, 가진 자의 편에서 보면 가난한자는 실패한 자이고, 권력과 부의 대열에서 이탈된 자는 항상 피지배자가 될 뿐이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세우고 많은 회중들을 끌어 모은 이는 마치 목회에 성공을 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해도 빚에 매여서 마지막에는 회중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고, 건축된 예배당은 필연 다른 이가 넘겨받는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승자의 대열에서 배제된 목회자는 죄인이 되고, 승자들의 비난거리가 된다.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를 성공한 목회자라 하는 기자들의 말에 답한 것처럼, ‘내가 목회에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예수님 앞에 가서야 판결이 날것이다.’함에 무게를 두어야 하리라. 오늘의 한국교회는 불을 지핀 가마솥 안의 개구리 같은 현상이다. 조금 있으면 물이 펄펄 끓어오를 터인데, 아무도 눈치를 채질 못하고, 자신의 영달에만 집착된 상태이다. 얼마 전 교계에 얼굴이 무쇠처럼 뻔뻔해진 지도자와, 저를 줄곧 비판해온 평신도 지도자가 종교행사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비판하는 이의 소속된 재단이 비판을 받는 자의 후원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저들의 어정쩡한 얼굴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오늘에 이르러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승리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복음마저도 오염시켰다. 우리는 복음이 승리주의에 오염되고, 교회주의에 오염되었음을 알아차리질 못하고 있다. 요즈음 기사를 보니, 교황이 마리아 상을 바라보고 제단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실족하였다는데, 우리는 이 휴가의 계절에 예루살렘 성전 바깥, 영문 바깥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제단에 오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화려한 성전을 떠나신지 오래이다. 그의 가르침에 훈련된 제자들이 돌덩이로 지은 성전을 건축한 일이 없었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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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