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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의 행복론 -20
    서울 명동 근처 충무로역에서 내려 남산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와 포플라가 늘어선 그윽한 가로수길이 나옵니다. 남산의 한 자락으로 왼쪽은 숲, 오른쪽은 공공 건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 막다른 곳에 예전에 안기부장 공관이었던 ‘문학의 집’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클래식 음악 선율이 묻어나올 것 같은 그윽한 잔디밭을 지나 여느 현관 같은 곳을 들어서면, 사무실 오른쪽에 작은 공연장이 있습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세 시가 되면 그곳에서 좋은시 공연문학회의 시낭송회가 있지요. 몇 개월 후면 200회 공연을 앞두고 있다지요. 나는 거기서 몸시를 발표합니다. 1971년 9월 15일부터 2003년 1월 30일까지 미국 NBC에서 방영되었던 피터 폴크 주연의 <형사 콜롬보>. 후줄근한 옷차림에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 놓다가, 날카로운 질문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LA 경찰청의 형사 콜롬보 흉내를 내며 멘트를 해 봅니다. “독자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독자를 문학의 場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고 관객을 바라봅니다. 관객들의 시선이 나의 눈가에 머뭅니다. “시낭송에도 탈경계가 필요합니다. 원시 종합 예술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흥이 나면 신나는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뭔가 주문을 읊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시낭송의 새로운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러면서 고개와 팔을 풍차 돌리듯 휘젓는 몸부림춤을 추고,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구성지게 부르고 나서, 진지하게 시를 낭송합니다.너는 깡마른 연어다해발 6300미터를 날아올랐다가태풍과 몸을 섞는 여유그래서 너는 현실이 되고때가 되면 고향으로 회귀하는 귀한 몸이다근육을 찢어 닭가슴을 여미고멋으로 태어나는 사나이 배짱그 때깔로 삼바춤 추며흥겹게 두드리지 책상노래와 호흡 맞춰라 착하기도 하지 너의 입피어오르는 스프링큘러로너의 잔디밭을 적셔라발레의 자유로움으로 태평양을 건너는지느러미의 역동함에 적당히 살을 키우고 빼는 몸은 살아 있다 - 졸시,「몸」전문그렇습니다. 총각 시절 배운 무용 덕분에, 회갑을 넘긴 나이에도 살아 있는 몸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나요. 나 홀로의 멋에 취해 시를 읊조리고, 남산에 흐르는 그윽한 정기에 젖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설사 홀로 적막 가운데 놓인다 해도 시가 있는 한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당신에게 감동을 주지 않더라도 기억할 겁니다. 나의 몸시. 이 몸부림에 당신 안에 숨어 있던 열정을 실어서 한껏 날려 보내도 좋을 겁니다. 상상의 날개를 타고 아름다웠던 추억의 장면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거구요. 어릴 적 전축 앞에서 추었던 나의 몸부림을, 어머니가 칭찬해 주었습니다. 장성해서는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나의 예술끼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칭찬 덕분일까요. 요즘 나는 글 쓰는 멋에 취해 삽니다. 글 속의 화자가 되어 세상을 향하여 소리지르기도 하고, 나쁜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는 질책도 하면서, 참 맛있는 사색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걸 몸이 담고 있습니다. 몸을 통하여 나오는 노래와 춤과 낭송이 나를 멋지게 합니다. 나만의 멋진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아 행복합니다. 그저 밋밋한 나를 이토록 멋진 세계에 들게 해 주신 분은 당신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왕따당하여 소외 가운데 있던 삭개오를 향하여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리라”며 손을 내미셨던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 주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더욱 소중히 간직하렵니다. 아침엔 영감으로 당신을 맞이하고, 오후엔 사색으로 당신과 걷습니다. 당신이 예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오늘도 몸부림춤을 추며 몸시를 낭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주신 행복에 물들며.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8-11
  • 목회는 쉬운 것이다·3
    사람이 만든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마태복음 23장 4절부터는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마 23:1~26)라고 규탄한다.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면서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강조한다면 분명히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인간은 종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발생한 이교도적인 행위를 통틀어서 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이런 것들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격식이나 방법이 필요하다면 또 하나의 무속종교가 된 것입니다.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의 삶이 기독교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사의 새끼들의 행위를 현대교회가 반복하고 있다면 분명히 기독교가 아닙니다.어마어마한 외형적 형태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이고 호화로운 건축으로 세상에 기독교의 위상을 높였다고 하지만 분명히 기독교는 아닐 것입니다.분명한 것은 이교도의 수단이나 방법이 개입된 것은 인간의 위선적 행위일 뿐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종교라는 수단으로 억압한다거나 무시하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본래 종교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잡다한 신을 만들고 그 신과의 중재 역할을 인간이 만든 가지각색의 의식이나 격식을 만들어서 교주로서 신통력을 발휘하는 중간 모리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속이나 이교도들의 행위입니다.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허락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일 뿐이지, 제사장이나 전능자나 능력자라고 하는 중개자는 무용한 것입니다.오직 구원받는 사람과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하나일 뿐이지 그 중간에 인간인 제사장이나 목사나 사제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입니다(갈 1:6~10).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구속사역이 완성되기 전 구약은 많은 사람의 중재자와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적 행위에 대해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 하심이 있었고, 또 성전과 제사장의 무용성을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심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하심에 의한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의 완성으로 입니다(히 10:10, 요 19:30, 시 23편).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인간들(제사장이라는 목사)이 비집고 들어와 다시 지성소의 휘장을 가리는 행위는 이방 종교로 전락시킨 것입니다.여기에서 신자들은 매일 강압적으로 제안하는 행위적인 신앙의 방법에 쫓기는 종교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이 쫓기고 가도가도 올라가도 올라가도 정상이 없는 중압감을 안고 살게 것입니다.결국, 종교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것을 이미 아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교회를 종교가 되게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조직이나 방법으로 매우 쉽고 가깝고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가미한 것은 단순한 것을 지나친 과잉에서부터 하나님이란 이름을 걸고 법과 격식에 매이게 한 것입니다.현대 사역의 범위가 목적보다 방법에 소모하고 있습니다. 선교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조직운영에 소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성전으로 둔갑시켜놓고 유지를 위한 물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 잎을 가리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리개로 끝없는 인간의 힘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8-11
  • 양심의 가책과 믿음 2
    믿음은 죄를 알게 한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에서 그 존재가 규정되고 그 운명이 결정됨을 알게 한다. 성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 그리고 그 밖의 문화 사상 전반에 인간화를 실현하는데 사회적 존재로서 그리고 역사적 인간으로 사는 그 이면을 성서는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구약, 신약 모두가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구약, 신약이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는 역사의 말씀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구약성서는 출애굽의 해방사이며 신약성서는 역사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화를 지향하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지 않았다면 계시나 구원의 역사, 혹은 교회나 믿음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현실성 때문에 죄의 문제의 해결이라는 모양으로 구원의 섭리는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양심은 자아 중심적 고립이 삶을 파괴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인간의 양심은 유기체적 연계성을 끊어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양심은 생명의 끈이 잘릴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 양심은 모든 부조화를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삶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이 믿음은 죄를 가진 인간에게 구원의 사실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도 인간 본래의 심정과 양심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즉 인간 본래의 심정과 양심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한다. 사랑하면 기쁘고 화를 낼 때에 괴롭고 부정한 일을 보았을 때 분개하고 자기를 희생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것에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양심이 이르는 일을 거역하고 배반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힐 뿐 아니라 이 세상살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양심이 이르는 바를 따르면 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밝히고 그 힘의 능력의 빛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과 명성은 두 개의 사물이며, 양심은 너희에게 돌려야 할 것이고 명성은 너희 이웃에게 돌려야 한다”고 함을 알게하며 여기에 톨스토이는 “육체에 꼭 맞는 옷만을 입지 말고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도록 하라”고 하면서 ‘좋지 않는 행동을 숨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자랑하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한다’고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좋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양심은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에 따라 제한을 받으며 그 효과가 발휘된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은 이후에 아무조건이 없이 의롭다함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양심은 이것과 반대되는 믿음에는 죄로 인해 자신을 살펴 크게 회개에 그 비중을 두게 하며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된다. 양심은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의 제한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양심의 가책과 믿음’은 사랑과의 관계에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는 나 자신과 하나님을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한 방향을 위해 있는 서로가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관계는 믿음으로 유지 될 수 없고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다. 마음의 주인이 바뀜으로 성품과 행실이 바뀌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나타난다. 사람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나와 하나님을 겸하여 마음, 목숨, 뜻을 다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유지될 수 없고 깨끗한 양심을 얻거나 유지 될 수 없다. “양심의 가책”은 믿음으로 만 극복된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7-29
  • 52. 제31회 총회장 김응순(金應珣)목사
    황해도 장연군 송천 출신김응순(金應珣, 1891.10.17~1958.1.6) 목사는 1891년 10월 17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송천(松川)에서 태어났다. 호수 항부(航夫)다. 송천은 한글 소리음으로는 ‘솔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응순은 1910년 경성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부터 8년간 고향인 황해도 장연에서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20년 사립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대한적십자사 청년의용단원으로 단원모집과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신문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채포되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1920년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엔 고향 장연군 송천교회(松川敎會) 전도사로 1923년부터 사역했다. 조선 최초의 송천교회 전도사 시무의주에서 기독교 탄압이 자행되자, 송천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소래 출신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자신들의 외갓집이 있는 송천으로 피신와서 그 곳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조선 최초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닌 토착민인 조선청년교인에 의해 설립된 장로교회였다.이 때 이 마을에 살던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먼저 기독교로 개종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조선장로교회는 이렇게 하여 자생교회(自生敎會)로 설립된 교회이다. 이는 선교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로교회보다 1세기 앞선 조선천주교회의 경우도 흡사하다. 이승훈이 북경 한 가운데 있는 북당천주교회를 스스로 찾아가 한문 필담으로 중국교회 신부들과 소통이 이루어져 천주학(天主學)의 도리를 깨닫고 성삼위의 이름으로 영세(領洗 Baptism)를 받고 ‘베드로’라는 영세명까지 얻어 귀국하여 오늘날 명동천주교회가 서 있는 역관 출신 김범우 자택에서 미사행위를 시작해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의 시원을 이루었다. 이 무렵 김응순도 송천교회를 다녔고 송천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경성제일보통학교(6년제)를 졸업한 것이다. 김응순은 1927년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 황해도 봉산군 홍수원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35년 9월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서기에 선출되어 총회를 받들어 봉사하기도 했다. 1936년 6월부터는 황해도 해주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37년에는 황해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548 참조). 친일파 조직 평양 기독교친목회 회원으로 가입이 때부터 일제 당국은 그의 지도력을 알고 있던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평양 기독교친목회의 회원으로 끌어들였다. 이 회를 창립한 인물은 숭의학교 영어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오문환(吳文煥)이었는데, 오문환은 1938년 조선장로교회를 신사참배 쪽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목사 등을 인솔하여,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下開)에 도착,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교토(京都)에 가서 평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다시 도교(東京)를 향해 가서 오늘날도 일본 관료들의 참배로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전범까지 안치되어 있는 야스꾸니(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왔다. 그후 조선교회 목사들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37 참조). 총회장 당선 후 본견적 친일활동김응순은 1942년 2월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주최 지방시국강연회 연사로 참여했고, 같은 해 9월 장로회 헌납 해군기(海軍機) 영명식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자 국민총력 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총회장이 된 후 교파합동, 규칙개정,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재래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본정신(日本精神)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日本的基督敎)를 새롭게 산출하여 수립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1942년 11월 12일 정인과(鄭仁果), 전필순(全弼淳) 등과 함께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써 총회연맹 주최로 황군(皇軍)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을 갖고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했고, 또 같은 달 17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기독교단 제1회 총회 축하사절단으로 김종대(金鍾大) 목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을 비롯 야수꾸니신궁과 메이지신궁까지 참배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1943년 2월 11일부터 12일까지 장로회 연맹 이사장으로써 경성 승동(勝洞)교회에서 일본정신(日本精神) 채득을 목적으로 한 전국노회장 대표 연석회를 개최하고, 참석자들을 친히 인솔하여 남산(南山)에 있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했다. 같은 해 3월에는 “국체 본의에 철저하고 대동아전쟁 목적완수에 매진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을 도모하여 본회의 사명 달성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전시 포교 지침 선언을 만들어 반포하였다. 같은 달 징병제도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여자 대표연성회를 경성 대화숙(大和熟)에서 열고 총회장으로써 훈사를 했으며,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총회 연맹이사장으로써 각 노회 연맹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귀금속 헌납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회’ 설립1943년 5월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을 채택하여 일본기독교단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이르러는 이동욱, 갈홍기, 채필근과 함께 조선종교단체 전시보국회 기독교위원으로 활동,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1945년 5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주최 지방순회 강연회 연사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개신교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 할 때 조선교단의 고문 겸 황해도 교구장을 맡기도 했다.불행하게도 제31회 총회부터 모든 목사들이 약속이나 한듯 앞다투어 창씨개명(創氏改名)하는 풍조가 불어닥쳤다.심지어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회의록마저 일본어로 기록 출판하므로 조선교회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애석했던 바는 총회장이 공식적으로 총회 사회를 보면서 신사참배에도 모자란듯 일본의 전승기원예배까지 드린 일도 있었다.1942년 2월 10일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케 하여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정을 매입 기증했고,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육군환자용 엠블런스 3대, 9월 20일에는 함상 전투기 1대를 구입 기증했으며, 전국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의 종 1,540개를 모아 당국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 종이 어떤 종이었던가. 새벽마다 예배시간마다 신자들에게 모임을 알리는 복음종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시대적인 불가항력적인 전시환경이었지만 비극적인 사례들이요, 복음과 교회의 수난이었다. 교회는 드디어 1943년 일제의 강압적 종교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제31회 총회 당시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① 개회 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먼저 채택하고 총회가 열렸다. ② 경기노회와 경성노회를 병합하기로 결의하였다. ③ 1942년 9월 20일 해군에 헌납한 전투기를 <조선장로호>라 명명식을 가지기로 하다. ④ 총회의 회의록을 일본어로 정리 간행하기로 가결하다. ⑤ 외국 선교사들은 전원 본국으로 출국하기로 하다. 광복 후 월남하여 인천서 교회개척김응순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계속 목회를 하면서 기독교연맹(基督敎聯盟)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1951년 1월 월남해 인천에 정착 후, 1952년 인천에 보합교회를 설립했고, 인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일하였다. 한편, 인천보합공립학교와 보합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아 무산아동들의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지나간 역사이기는 하지만 제31회 총회야 말로 조선교회가 당했던 가장 수치스럽고 미래가 보이지 아니하는 총회라 할 만큼 치욕적인 총회였고, 총대들 스스로가 무능한 총회로 마감한 것은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 과제를 던져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제31회 총회와 같은 총회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대 장로교가 지고 가야 할 사명의 멍에는 무겁고 버겁게만 해 보인다. 다시 한번 손양원, 주기철과 같은 신앙의 귀인들이 필요한 시대가 이 때라 생각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7-29
  • 성육신한 예수교회-20
    신약이나 구약에 있어서 가장 많이 다뤄진 인물이 있다면 이는 곧 아브라함이리라. 경전이 저를 중요시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은 저들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모세의 율법위에 건설되었다. 이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세운 다윗왕조가 얼마가질 못하고 바빌론으로 붙잡혀 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되자, 비로소 종교 사역을 담당하는 서기관들은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모세 오경을 정리하고 백성들에게 체계 있게 보급할 수 있는 교육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는 회당이었다. 바빌론 이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미 세계화에 적응된 일부 시민들은 귀환하질 아니하고 세계 도처로 흩어져서 살게 되고, 마카베오 형제 난 이후 예루살렘이 안정되질 못하고, 중앙 성전의 역할이 무용지물이 되자, 이집트로 빠져나간 서기관들은 세계화에 적응하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재결집하기 위해서 비로소 70인의 서기관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서 해외에 널리 흩어진 이스라엘은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이 번역한 모세 오경을 회당에서 읽고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구약에서의 아브라함은 혈통의 틀을 벗어나질 못하다가, 예수가 등장하면서부터 혈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아브라함이 정신적인 믿음의 조상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복음서를 기록한 서기관들 덕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최초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한 바울서신의 저자인 바울도 이 70인경에 익숙 된 율법학자였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방인 누가, 가장 아름다운 헬라어로 히브리서를 기록한 아볼로도 이 헬라 역 경전에 익숙 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편화 되었고, 동화 작가에서부터 헐리우드의 영화감독조차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신약성경의 마지막 저자인 요한도 헬라어에 익숙할 뿐 아니라 랍비 전통에도 익숙하였다. 창세기 24장 1절을 원문을 직역하면 ‘그 날들로 나아가다’(went into the days)이다. 랍비들은 ‘그 날들로 나아가다’라는 문장을, ‘아브라함은 야훼 앞에서 그의 백성들로부터 메시아까지의 역사를 보았다’고 해석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8장 56절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문장을 보면 무엇보다도 요한 자신이 랍비 전통과 해석을 세밀하게 알고 있었음은 물론, 논쟁 당사자인 예수님은 랍비의 토라 해석을 잘 소화하고, 자신에게 적절히 적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이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신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적절한 정신적인 아이콘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식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더욱 빛을 발했다. 실제로 우리를 건강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들은 물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도 많은 목회자들이 눈에 쉽게 보이는 것들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자였나? 그는 문명국을 떠나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금 가나안으로, 한때 이집트로 내려간 일이 있었으나, 거대한 피라미드나 소돔문명의 그늘에 안착하질 않았다. 저는 오히려 간편한 텐트 생활을 즐거워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소중한 제단마저도 반시간 만에 수축하였다. 제사를 마친 후에는 훌훌 그 곳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과 다윗을 엮어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궁중학자들 같이, 다윗을 웅장한 성전을 건축한 사람으로 슬그머니 껴 넣으려 하지만, 다윗은 죽기까지 작은 예배당에 나아가 항시 하나님과 대면하였다.요한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들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살림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멀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마음을 빼앗기질 않았다. 저가 그의 주변에 학연, 지연, 혈연을 부르짖는 이들의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다면 결코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질 않았을 것이다. 그가 혈통을 중요시 하였다면 하란에서도 떠나질 못하였을 것이다. 더더욱 이집트에서도 정착하질 않고, 저 멀리 보이는 것을 붙들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저는 마지막에 그의 기쁨이었던 이삭마저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신다. 이 뜨거운 여름, 오로지 믿음만 가진 나를 기업으로 받으신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7-29
  • 기독교인의 행복론 -19
    내가 바둑을 시작한 것은 돌아가신 형 S가 생전에 즐기던 취미 활동이어서 그렇습니다. S는 W은행에 입사한 후 독일?미국?중국 등에서 외환 딜러 업무를 보다가 중국 칭따오에서 한중 합작인 K은행 행장까지 역임한 수재였습니다. 비교적 우둔한 편인 나로서는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S가 하는 취미 활동까지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칭따오에 내가 여행갔을 때에도, 그는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바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후 나는 귀국하자마자 매일 인터넷에 들어가 한 시간씩 바둑을 두었습니다. 바둑 판세를 훑으며 상대가 두고 싶어하는 곳을 가려내 예상치 못한 곳에 착점하는 재미는 스릴마저 있었습니다. 더구나 수를 빨리 읽는 편인 내가 속도를 내어 착점하다 보면 상대로 내 페이스에 말려 착점 속도가 빨라져 승리를 따내곤 하였습니다. 내가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것도 오전에 바둑 두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바둑을 두면서 세운 기세는 대인 관계에서나 협회 일을 볼 때에도 유용하게 작용하였습니다. 가령 선배가 여자 문제로 고민할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말해 주면 상대가 안정을 되찾기도 하고, 협회 일을 할 때 서로간에 갈등이 있을 때에도 원만한 일처리를 하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바둑에서 얻은 기세 덕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바둑의 기본은 자신의 집을 상대보다 넓히는 것입니다. 어릴 적 놀이 가운데 하나였던 땅뺏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커다란 사각형 선 안에서 작은 돌을 어느 방향으로 굴려야 자기 집을 확장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돌을 굴려야 하지요. 처음엔 욕심을 내지 않고 돌을 조금씩 튕겼다가 나중에 자기 땅이 넓어지면 마음껏 돌을 튕기게 되고, 끝에 가서 상대의 집 근처에 이르러서는 세밀하게 돌을 튕겨야 온전한 자기 집이 되는 거지요. 바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상대의 집이 넓다고 그곳에 끼어들었다가는 영락없이 자멸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를 막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차분히 넓은 안목으로 자기 집을 지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들이 부동산으로 돈 벌었다고 나도 무작정 뛰어들었다가는 실패하기 쉽지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달란트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감동을 주는 설교로 교세를 확장하고, 작가는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문장을 가다듬지요. 사람들이 다 자기 전문 분야가 있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선교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세계의 오지에 직접 뛰어들어 선교하는 선교사가 있는 반면, 국내에서 선교 헌금과 기도와 편지로 지원하는 교인도 있고,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외국에 나아가 직업을 가지고 선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선교 사업 가운데서도 바둑의 이치가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바둑에서 상대의 수를 간파해야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선교 대상지의 실정 파악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몽골에 비전 트립을 갔을 때의 이야깁니다. 그곳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교회를 세울 때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허가 조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봉급을 받는 집사를 적정 인원 두어야 하고, 세금 내는 것도 감사를 받아야 하며, 교회 통장을 따로 만들어 관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 외에도 그곳의 인종적·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노화 현상이 빨리 오는 편이고, 가을에 낮과 밤의 온도차가 매우 큰 것도 지역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지요. 또한 그곳 사람들은 어학적 두뇌가 발달하여 한국어를 매우 빠르게 익히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선교하기 이해서는 아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데, 시행 착오를 겪는 교회가 없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많은 선교 헌금을 보내 큰 교회를 지었다가, 겨울에 석탄 연료비를 감당 못하여 어린이 예배실에서 주일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동네의 근거리에 서로 다른 교파가 교회를 따로 지어 한정된 주민을 대상으로 경쟁하듯 전도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는 선교 대상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무작정 돌진하는 데서 오는 시행착오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블론과 납달리와 같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지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병자가 많은 곳에 오셔서 그들에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음식을 제공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는 치유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울 때에도 40년의 궁중 생활, 40년의 광야 생활, 40년의 지도자 생활을 하게 하였지요. 주님은 상대를 아는 바둑의 이치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자도 이웃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7-29
  • 목회는 쉬운 것이다·2
    아담의 범죄 이후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일반 종교는 떨어져 계신 하나님을 찾아 섬기는 그런 일을 지금도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죄인이 하나님을 보거나 가까이하면 죽음을 당한다는 두려운 존재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섬기고 속죄물을 준비해야 했던 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라는 십자가의 대속의 완성을 무효로 만드는 행위가 곧 일반 종교적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마저도 이런 종교적 삶을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신약교회 시대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제물이 되셔서 드려지심으로 율법이 요구한 종교행위를 완성하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신과 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주는 우리 안에 우리는 주안,에 있게 되어 한 몸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 근본이 완전히 다른 일반 종교의 방법에 빠져버린 상태로 신자들에게 헤아릴 수도 없는 잘못된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여기에서 파생된 교회의 의미를 상실당하여 건물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집처럼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진정한 성전과 예배의 의미를 상실하고, 의식에 묶인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님을 예배당에 모신다는 우상적 성전을 만들기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신이 있는 신당으로 신성시하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은 개체로서 찾아가야만 만나는 하나님으로 섬기는 대상으로 추락시켰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일반 종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루터의 종교개혁도 로마 가톨릭의 우상화하기 위한 돈벌이 하는 도구로 사용한 거대한 모순을 무너뜨린 것인데, 지금도 교회는 그 귀신을 섬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개념입니다.교회의 구성체는 일반 종교들처럼 하나의 신을 섬기는 신도들의 개념이 아닙니다. 몸으로서의 구성체라는 것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회집체로써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개념입니다.로마서 12장은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에 대한 것을 설명하였고, 고린도전서 12장은 머리 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성령의 여러 가지 현상으로써 곧 은사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예배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란 안식일이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구약의 제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가 일반 종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존재하는 것입니다. 몸으로서의 교회인 것입니다. 에배소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이 곧 지체로서의 한 몸 관계를 결론한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에베소서 1장부터 택하신 목적과 죄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임과 십자가로서 화목하게 하신 일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비밀과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과 새사람에 대한 것과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로 주님이 함께 계신 삶 자체와 아내와 남편과의 질서로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자녀와 부모 간의 질서로써 종과 상전 간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장 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진다”라는 삶 자체가 바른 신앙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그러기에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는 몸 안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항상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이와 같은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 사건을 치르시고 부활 승천과 함께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갈등과 목마름이 있는 이유가 일반 종교에 매여 멀리 계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신앙 행위나 구약의 율법의 요구에 따르려는 온갖 예배의식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짐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으로 의식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라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우상종교의 의식으로 사람들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개인 생활을 분리시키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몸의 지체인 동체냐, 떨어져 있는 개체냐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생명이냐, 죽음의 삶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7-29
  • 기독교인의 행복론 -18
    "만성 신부전증입니다.” 직장 건강 검진에서 이상한 징후가 보여 2차로 K대학병원에 가서 받은 검진 결과는 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고혈압과 통풍을 앓고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생긴 결과였습니다. 고혈압은 운동을 통해 뱃살을 빼야 하고, 통풍은 물을 많이 마시고 멸치 등을 먹지 않는 것으로 음식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마 내 신장이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하고 물을 엄청 마셨더니, 이번에는 만성 신부전증이 온 것입니다. 이 병은 통풍과는 달리 물을 많이 마시면 그게 과부하가 걸려 신장 기능에 이상이 오게 되고, 급기야 걸러지지 않은 물이 핏속으로 들어가 몸이 붓기도 합니다. 여기서 어느 한쪽에 너무 신경을 쓰게 되면 다른 쪽에 이상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몸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겠다 싶어 직장을 명퇴하였습니다. 남들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내가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전업 작가 생활이었습니다. 작가라고 해서 당장 집필을 통해 돈벌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가 직장을 다니기에 대신 나는 가사를 책임지면 되었습니다. 아내를 직장에 다니게 한다 해서 몰인정하다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삼식이 노릇 그만 하고 당장에 어디 가서 단돈 백만 원이라도 벌어 오라고 농담삼아 다그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34년 동안 직장 생활 하였으니, 이제 놀 때도 되었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대신 가사를 열심히 합니다.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여자만 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요. 요즘 알파 에이지 시대라 해서 앞으로 인간이 120세 이상 살 거라는 것이 생물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제까지 살아온 만큼의 세월이 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그게 지겨울 거라는 얘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멋지게 노는 것도 한 번뿐인 생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독서하고, 여행하며, 식도락을 즐기는 것도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여행은 마음에 맞는 사람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동호인들과 바다낚시를 자주 다니는데, 그것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즐거울 수가 있지요. 그 가운데 나에게 딱 맞는 맞춤형 취향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스입니다. 시작한 지 한 이 년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집필 활동에 신경 쓰느라 헬스를 자주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중이 많이 불어났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다가 담당 의사한테 호되게 혼났습니다. 체중이 불어나면 신장 기능이 안 좋아지는데, 살이 더 쪄 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몸무게 줄이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주일을 제외하고는 헬스장 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평상시대로 먹으면서 싸이클과 런닝 머신을 매일 한 시간씩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삼 개월 동안에 몸무게를 6킬로그램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어지럽지 않느냐고 묻더니 몸무게를 더 줄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압니다. 몸 안에 있는 체지방과 내장 지방을 줄여야 신장에 부담이 덜 간다는 것이지요. 건강 상식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히 운동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일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식사량을 줄이지 않으면 몸무게가 쉽게 빠지지 않기에, 다이어트가 어려우면 꾸준히 운동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은 아령·역기 등 근육 운동을 한 후 사이클과 런닝머신을 한 시간 동안 하면 내장 지방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근육 운동은 근육이 뭉쳐지지 않게 풀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넓적한 가슴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닭가슴살이나 돼지고기 살을 삶아서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탄수화물이 많은 밥을 소량 먹으면서 고깃살만 꾸준히 먹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근육 운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0년 전에 나와 함께 헬스를 시작했던 이들은 꾸준한 운동 덕에 제법 멋진 가슴 근육이 생겼습니다. 닭가슴살을 먹고 운동한 이는 아주 멋진 근육이 만들어졌고요.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건강한 삶을 위한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은 당신의 살을 빼 주면서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는 보약이지요. 운동으로 얻어진 앳된 얼굴과 멋진 몸매는 보는 이들을 신선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삶에 활력이 생기게 합니다. 나의 친형이 외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다가 나쁜 공기와 저칼로리 음식으로 인하여 백혈병을 앓다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의 병력도 개인의 건강에 관련이 있습니다. 건강. 신경 쓰면 얼마든지 삶을 멋지게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헬스장에 들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운동을 통해 멋진 몸매와 건강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몸으로 멋진 신앙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7-19
  • 51. 제22회 총회장 장홍범(張弘範)목사
    황해도 안악 출신장홍범(張弘範 1878.2.23~1950.5.25) 목사는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1878년 2월 23일 태어났다. 젊은 시기에 친구의 권유로 당시 안악읍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에 입신하여 신자가 되었다. 이때가 1908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1909년에 안악읍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이수하고 안악읍교회(安岳邑敎會)에서 운영하던 안악보통소학교에서 1909년부터 1914년까지 교사로 봉직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게 병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이 국권상실의 비참한 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었고, 우리가 힘을 합쳐 조선독립을 쟁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일하였다. 장홍범은 1914년 3월에 안악보통소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4년 12월 3일에 안악군 북율면 상거동 예배당에서 모인 제7회 황해노회에서 당시 함께 장로회신학교 학생으로써 계속 추천받은 후보생 18명 명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 하권, 한국교회사학회 편 1968, 서울 p.146).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 황해도 지역서 목회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9개월 간의 긴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안악지방과 재경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소안론(Rev. William L Swallen) 목사와 이길함(Rev. Graham Lee) 선교사의 당회 구역의 순회조사(巡廻助師)로 활동하였다. 1918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그해 9월 황해노회(黃海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군 용문면 동창교회(東倉敎會 1910 설립)에 부임해 첫번째로 공식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재령군 남율면 해창리에 있는 해창교회(海昌敎會, 1899. 3. 3 설립)와 모동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1921년 모동교회 재직시에 황해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린이부흥회 강사로 활동그는 특히 아동교육에 관심도 많았고 소질도 다분히 갖추고 있어 1924년부터는 전국 여러 지역 노회와 연합회로부터 어린이부흥회 강사로 요청을 받아 주일학교 부흥사역에 일익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는 동요도 잘 부르고 동화도 잘해 전국을 다니며 어린이전도와 부흥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그의 활동이 전국주일학교연합회(全國主日學校聯合會)를 창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는데 발기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위원회를 조직하고 드디어 1924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어 임기 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선교회 어린이교육과 영적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1925년에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북리에 있는 사리원 동부교회(1922. 1. 1 설립)에서 목회하던 중 황해노회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 총무로 발탁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도 다른 노회들에 비해 종교교육, 특히 아동교육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바로 황해노회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교육부 부장 선임장 목사는 보통소학교 교사로 봉직했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고 큰 자산이기도 하였는데, 본인에게 가르치는 소양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1925년 제2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1932년 9월 9일 평양창동교회에서 모인 제21회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 종교교육부 부장으로 선임이 되기에 이른다. 그로인해 그는 이듬해 1933년 9월 평안북도 선천남부교회(宣川南部敎會)에서 모인 제2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총회는 목사회원 73명, 장로회원 73명(미참 2명) 선교사 회원 34명이었다. 제22회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남궁혁 목사는 신약 성경 사도행전 20장 17절~34절 본문으로 위기에 당면한 조선교회와 진정한 부흥운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새로 선출된 총회장 장홍범 목사가 회장으로 회의를 진행할 때, 각부에서 상정된 헌의안들이 기각되는 일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교인 1500명당 목사 장로 총대를 각 1인씩 파송하자는 안이 부결된 것이라든지, 특별히 함남노회(咸南老會)에서 상정한 여성장로 안수 허락의 건이 정치부에서 부결되었다. 이 안건은 함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노회에 올린 것인데 총회에서 부결됨으로 결국 교회 내에서 남성중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만 것이 아쉬움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의 총회장이었던 장홍범 목사는 평생을 후회하였다는 말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 등 이단 규정제22회 총회 결의가 이러한 아쉬움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제22회 총회의 중요결의 안건 가운데는, ①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 등을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② 중국 산동(山東)에서 실시하게 해달라는 산동대회 개최는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③ 교단 최초의 면려회보를 창간하기로 가결하였다. 또 다른 총회에서의 기각된 안건 가운데에는 평안노회와 황해노회에서 공동으로 위임목사를 4년에 한번씩 시무투표로 하자는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그 외에 제22회 총회의 업적을 몇가지 남겼는데, 당시 개교회에서 무곡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제22회 총회에 와서 비로서 곡조(曲調)찬송가를 발행 보급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2년 간의 작업 끝에 1935년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신편찬송가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행한 것이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00-101). 총회 종교교육부 감사로 성경통신교재 발간장홍범 목사는 총회장을 역임한 후 사리원 동부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중에 1937년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였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총회 종교교육부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이긴 하였지만 목회현장을 떠난 장 목사에겐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목사는 이어서 총회 출판부장의 일까지 맡아 주일학교 교재와 성경통신과 교재 발간사업까지 맡아 교단의 교회교육을 도맡아 하는 중요한 과업을 맡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재능과 역량을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위해 목회의 소명과 버금가는 헌신과 희생의 사명을 감당한 지도자로 기록된 총회장 출신의 교회교육의 실천자이기도 하다.6.25때 행방불명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앞두고 일제당국의 형사에 의해 김선두, 강병주 목사 등과 함께 구금 당했던 일도 있었다. 출감 후에는 다시 총회 종교교육부의 일을 맡아 수고하다가 총회가 해산이 되자 경성(京城, 서울)을 떠나 고향 안악으로 귀향해 그곳에서 목회하던 중 1950년 6.25 동란으로 행방불명된 후 사망일자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편, 1984 기독교문사 p.649-65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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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19
  • 성육신한 예수교회-19
    요즈음 브랙시트 투표이후, 영국은 여성 전성시대로 들어섰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난 지 26년 만에 테리사 메이(59)가 두 번째 여성 총리로 지난 13일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 지도자들도 역시 여성이다. 영국은 지금 사회 전반에 걸쳐서 앞장선 이들의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은 편이다. 이 뿐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 60개국이 여성 총리이거나 여성 대통령이 지도자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 도전에서도 여성 후보가 대두되고 있어서, 앞으로의 세계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일선에 나서서 세상을 이끌 전망이다.우리 세계에서 중동만큼이나 보수적인 곳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보수적인 유대인들도 골다 메이어 여성을 이스라엘의 총리로 뽑아서 앞세웠다. 오늘의 세계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유리천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지금 독일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과 영향력이 세계 1위인 것을 보면, 여성들에게 편견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적 추세가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유독 종교단체에서는 편견이 사라지질 않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여성은 죽어서 다시 남성으로 태어나야만 한다 던지, 여성은 주기적인 생리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는 둥......, 그러나 보수적인 종교단체일지라도,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해소시킬 구체적인 노력이 현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세계적인 성숙과 변화를 우리 개신교가 직면하면서, 사람들의 회집이 이뤄진 교회 공동체도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교회주의론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경전에다가 자신들의 욕구와 가치관을 삽입시킨 것에 대한 학문적 성찰도 필요할 때가 된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교단에 소속되어 있고, 교단의 영향력으로 부자유하지만, 경전 사본사에 있어서, 보다 후에 첨부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과 관계된 문항을 공개적으로 학술적 토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항은 그 서신의 저자인 의도와도 맞지를 않고, 불합리하며, 후에 어느 사본에는 이 쪽 문장에 첨부되었거나, 어느 사본은 저쪽 문장에 첨부되어 있어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항과 문장이 지도자들과 필사자의 교회주의적인 입장에서 첨부된 것임을 알 수 있다.‘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문구가 아예 오래된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러한 정황을 살필 때에, 오늘과 같이 여성들이 지도자로 진출하고 있는 사실적 정황에서 굳이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에게 기회를 일찍이 배려한 교단들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으나. 여성의 권한을 축소하고 억누른 교단에서는 여성들이 성장할 수도 없었고, 저들이 활발하게 세상에 진출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가 여성에 관한 편견이 지나친 것은 유교적 가치관에서 탈피하질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편견과 오염을 씻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여성에 대한 편견은 물로 씻기듯이 지워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은 복음서들 가운데에 가장 후기에 기록된 복음서로써, 요한복음처럼 여성에게 남성과 같이 공평하게 가르침과 문장과 문단을 배려한 책은 없었다. 요한복음의 기적의 첫 사건도 여성에 의해서 연출된다. 그리고 예수의 사역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면과 예수부활의 첫 대면도 여성이다. 예루살렘의 랍비 니고데모는 예수와의 대화에서 책망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수가성의 여인은 그 도시의 시민들을 대낮에 예수께로 이끌어내는 선지자로 부각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당시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뜬 선각자들이 얼마나 과감하게 남녀 편견을 뛰어넘고 고정 관념을 탈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려내었음을 명명백백히 알아 차려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은퇴한 연세대 김 모 교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란 구절이 있었는데, 그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종교적인 편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한번 몰트만의 ‘성령론’을 읽고서 그의 강론을 요약하여 발표하였더니, 몰트만이 성령 받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누가 강의하냐에 따라서 그가 성령 받은 자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우린 요한복음의 다양한 강론들을 많이 보면서, 불자나 유학자나 철인들의 요한복음 강론이 저마다 강조점과 결론이 달랐음을 보아왔다. 우리가 만일 성경을 그리스도론 보다는 교회론(교단)적인 범주에서만 고집한다면, 원 저자의 의도가 퇴색되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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