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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옛날이여 (1)
    내 고향은 경기도 용인에서 먼 '어비리'인데, 69년도에 수몰지구가 되어 물로 가득찬 인공호수다. 사방에서 맑은 물이 흘러 물고기와 먹거리가 풍부한 부자마을로 경치좋고 인심이 후했다. 그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로 수력발전을 일으켜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전기불을 켜고 살았다. 이웃동네 사람들이 밤에 전기불이 환하게 켜진 우리 마을을 바라보면 무척 부러웠다고 한다. 일찍이 새마을 운동을 했기에 소문이 나 타 지역에서 견학과 소풍을 오면 냇가에서 물을 떠 마시곤 했을 정도로 청정지역이었다. 더운 여름날 방과후 먼 집으로 가다보면 왜 그리 목이 말랐는지. 길가에 우물이 있는 집은 으레 지나가는 나그네와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러기에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서 '물 좀 주세유' 라고 하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친구들과 돌려가며 벌컥벌컥 마셨던 그 물 맛! 어찌나 시원하고 달고 맛있었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보리가 피는 늦은 봄날, 운전을 하고 가족들과 드라이브를 하면서 창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똥거름 냄새가 들어와 빨리 문을 닫았다. 70년대 말쯤 어느 외국인이 코리아의 봄냄새 때문에 괴롭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때 깔깔대고 웃으면서 속으론 무척 창피했다. 시골에서 살 때는 당연한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냄새가 사라졌다. 그 시절에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닦아 먹으면 야채와 과일이 꿀맛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몸에 좋아도 제대로 세척하지 않으면 농약은 물론이고 방부제, 착색제, 왁스, 화학제품들 즉 독을 먹는 것과도 같다. 요즘은 국내에 수입되는 여러 야채와 과일이 점점 많아져 다양하게 맛볼 수가 있어서 좋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먹음직스럽고 싱싱하게 공급하기 위해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가 의문이다. 땅도 공기도 오염이 되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직접 재배하지 않은 이상, 도시근교나 차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서 유기농으로 키웠다 해도 안심하고 먹어서는 안된다. 난 시골출신 인데도 특히 먹거리는 청결하게 씻은 다음 요리를 한다. 그래서 마트에 가면 식초 소금 농약세정제를 빠뜨리지 않고 샀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교회를 섬기는 친한 권사님으로 부터 남편(집사님)이 직접 개발한 천연 농약세정제를 선물로 받았다.설명서대로 과일과 야채에 사용을 했더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농약이 빠져나오고 기름이 둥둥 뜨는 것이었다.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것 좀 봐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니?'라고 걱정을 하면서 우리 가족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오랜시간 동안 지켜봤던 그 부부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답게 육을 살리는 제품을 개발했기에 마땅히 축복을 받아야 할 것이다. 너무 좋고 감사해서 주변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어 의아하다 못해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혹시 나를 오해하는 것이 아닌지. 그래도 상관없다. 좋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목사들도 돈을 벌기위해 성도들을 이용하여 다단계를 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 않은가. 최근에는 물질만능, 외모지상주의로 성형은 기본이고, 몸에 좋은 것들을 먹으며 복근운동을 하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몸에 좋은 야채나 과일을 어떻게(How) 세척해서 가족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지 깨어 있어야 한다. TV만 켜면 요리 연구가, 셰프, 남자 연예인들까지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게 요리를 잘 한다. 그런데 과연 그 재료들을 어떻게 세척했을지 궁금하다. 바라기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언제나 정직한 크리스챤 기업들이 성공하길 바란다. 그래서 음식을 맘놓고 먹을수 있었으면 좋겠다. 똥거름 냄새가 나서 코를 막고 뛰어 가던 시절, 두레박으로 퍼올린 물을 친구들과 돌려가며 마시던 때가 새삼 그리워진다. 아, 옛날이여~
    • 지난 칼럼
    • 여성칼럼
    2016-07-19
  • 목회는 쉬운 것이다·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완벽한 삶이란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이단 종파나 우상을 섬기는 금욕적인 신앙 풍토를 그대로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음을 아십니까?오직 진리로 자유함을 체험하지 못하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위선적 행위로 불안해진 사람들의 끝없는 정욕적 노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복음의 가치를 이해하게 하여 생명의 삶으로 행복하게 살게 해야 합니다.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일반종교로 둔갑시킨 유교나 무교로 다져진 터에 서구 유럽으로부터 물려받은 남의 것을 무조건 좋아하는 모방적 풍토의 노예가 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우선 마가복음 7장 6~9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외식하는 자에게 예언한 내용입니다.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너희가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도다.”교회와 종교는 절대로 다릅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종교의 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종교의 범주는 범신론적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격이 철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여 무소 부재하시고 창조주로서의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치리하심에 대한 권위나 섭리나 예정이나 은혜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든 방법이 종교적인 형식에 매여 있으면서 그 형식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이 신앙으로 아는 무서움과 공포 속에 사는 것입니다.기독교를 종교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은 교회를 악마의 영역에 집어넣으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을 통해 이룬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말살하려는 사단의 음모임을 알면서도 자기중심적으로 된 삼분설의 입장에서 신앙의 목적을 기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한국교회뿐 아니라 세계교회가 교회의 순수성을 상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생산된 무수한 프로그램이 화려하게 환상적인 유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능숙한 방법입니다.여기에 매여 있기 때문에 엎어놓은 컵에 소낙비를 맞아도 겉만 축여진 상태로 메말라 가는 생명력이 없는 순간적 말초신경의 즐거움에서 끊임없는 욕정으로 자유와 평안을 체험하지 못하는 끊임없는 논설과 이론으로 자기만족에 살아가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미 신학에서 조직신학 맨 처음인 서론에서 종교와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일반종교, 즉 자연종교로 모든 종족들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것을 묶어 말하여 일반 계시라고 하여(행 17:27~29, 롬 1:19~21) 사람 편에서 신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특별계시의 종교입니다.기독교를 구분하여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하나님 편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하나가 되신 것을 특별계시 종교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적 상태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교회 의식에서나 신앙 행위에서 일반 종교의 틀 속에 집어넣는 행위가 아주 당연한 기독교의 의식으로 거리낌도 없이 받아들이는 보편성입니다.일반종교는 아주 간단한 이론입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개체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자신이 믿는 신과 떨어져 있기에 사람이 노력으로 제물을 가지고 진력을 다하여 찾아가는 제사의식입니다.이 귀중한 사실을 사람들은 복음이라고 하면서 복음의 가치를 일반종교로 무력화하고 이방 종교로 둔갑시킨 현대교회에 바른 신앙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입니다.개체개념이란 신과 사람이 분리된 자리에서 인간은 자기가 섬기는 신을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동체개념이란 구속사역이 완성되지 않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제단을 만들고 지성소 앞에 제사의식으로 대제사장이 대신 속죄하는 일반 종교적 개념이었으나, 신약 교회시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으로, 하나님은 격리된 지성소의 휘장을 거두시고 우리 안에 오셔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우리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함께, 나와 함께,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를 지신 구속의 완성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6-07-19
  • 맥추감사절의 소고(小考)
    맥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와 광야 40년 생활을 하고 이스라엘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농작하여 얻은 농사가 보리와 밀이다. 처음 익은 곡식으로 보리와 밀을 가지고 감사의 절기로 지켰다. 이 전래가 지금에 와서는 수확한 과일, 곡식을 가지고 제물을 드리려 나타내는 예절로 예의(禮儀)를 갖춘 것이 맥추감사절이 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감사절 절기는 맥추절, 초실절, 칠칠절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맥추절은 유대교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초막절에 속한다. 이러한 구약의 절기를 지켜온 오늘의 교회가 지키는 것은 교회의 절기 문화로 '추수감사절', '맥추감사절'을 지켜오고 있다. 이는 18세기에 영국이 북아메리카 땅을 정복하면서 인디안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뺏은 기념일을 지키는 미국의 감사절이기도 한다. 영국에서 미국행 청교도 이민자들에게서 유래한 감사절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지켜야 함을 깨닫게 한다. 처음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왔을 때 수확한 것에 대한 감사해서 유래한다. 개신교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와의 갈등으로 미국의 플리머스로 이주하여 인디언들로 부터 배운 경작법으로 봄에 옥수수를 재배하여 가을에 풍년을 거두었다. 이러한 이유로 청교도들은 농사 기술을 배운 인디언들에게 축제로 그 감사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며 과일과 칠면조와 사슴을 잡아 축제를 하는 전래(傳來)가 되었다. 최초의 봄에는 '맥추감사절'로 가을의 추수를 거두며 '추수감사절'로 지키어 오늘의 교회가 감사제를 지키어 왔음을 알게 한다.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서 착취하고 식민지배 하면서 살아왔던 영국이 유럽공동체를 탈퇴하게 되었음을 본다. 이번에 EU 탈퇴를 투표로 보여주는 영국을 보게 한다. 지금 와서 영국은 유럽에 널려 있는 이민자를 싫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지금 영국에 사는 젊은이들의 생각은 독일에게 EU 연합이 유리해지는 현실에서 이민자 문제에 민감하여지고 이민자가 많아지니까 이민자가 일자리를 뺏는다는 의식이 노동시장 저임금화를 초래하고 이로 인해 사회갈등 요인이 생기며 EU의회 의석수도 사실은 9.7% 밖에 안 되니깐 경제문제로 협정문제에 민감한 태도로 영국은 EU 탈퇴를 가지게 되어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영국이 지금까지 대영제국이라는 전제된 의식에서 식민 지배 하면서 잘 살아왔다는 점을 엿보이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애굽의 땅에서 430년 동안 바로의 종살이를 했다. 모든 주권을 빼앗기고 남의 땅에서 종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야 40년의 고난의 과정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여 씨뿌려 얻은 보리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하고 고난을 함께 한 이웃에게 대한 감사를 나눔으로 함께했던 그 공동체의 그 소감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오늘의 교회는 예배와 문화의 갱신이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교회의 절기에 대한 이해하여야 할 것은 '나눔과 섬김'이라는 교회의 본래의 의미로 되돌아가 '이웃과 민족을 위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 예로 교회 운영구조의 민주적 개선과 교회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예배와 문화의 갱신으로 절기문화를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서구문화 중심의 예배의식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심점으로 드려지는 예배 진행의 절차를 심도 있게 신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시회봉사와 선교에 사용하는 선교 지향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미대륙으로 건너 와서는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그 대신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청교도 문화를 새로이 하여 11월 셋째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면서 크리스마스 절기를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개신교의 추수감사절의 계기는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인디언들을 정복하고 그 결과로 얻은 소출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으며 감사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성서의 추수절은 정당하게 땀 흘려 거둔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고 바친 그 곡식을 남종과 여종, 나그네, 과부, 고아 등과 나누도록 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이 추수제의 원형이다. 추수제는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나눔의 감사인 것을 깨닫게 하는 감사제로 알게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7-08
  • 50. 제20회 총회장 장규명(張奎明)목사
    평북 용천 출신장규명(張奎明 1891. 11. 14~1950)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용천은 의주(義州)와 철산(鐵山)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선교사들이 주재했다.철산과 의주에 와 있던 선교사들의 조사(助師)가 이곳에 드나들면서 복음을 증거할 때, 장규명은 위대모(Rev. 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의 어느 조사로부터 쪽복음서를 받고 완고했던 유교 집안에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장규명에게 영향을 끼친 위대모 목사(1870. 6. 7~1952. 5. 15)는 뉴욕주 부르클린 출신으로 1886년 뉴욕에 있는 파크(Park College)대학을 마치고, 1888년 그린위치 대학과 1892년 예일(Yale)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895년 유명한 유니언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이어서 1895~1896년 사이에는 다시 예일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896년 10월 26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으로 파송받아 평양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친 우수한 인재였다. 위대모 선교사는 1897년 평북지역 선천선교부 개설 책임을 맡았고, 동시에 선천지방 순회선교사로 활동하며 선천읍교회와 선천남교회를 개척하였다. 또 1901년에 이르러서는 선천지역에 본격적인 개척선교에 헌신하였으며, 1902년엔 의주지역 선교지를 책임지기까지 하였다. 1906년 선천에 신성학교(信聖學校)가 설립되자 초대교장이 되기도 하였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서울 p.507~508 참조). 용천지방엔 많은 교회 설립돼정규명은 기독교로 개종 후 조사들의 안내를 받아 1898년에 설립된 동문외교회(東門外敎會) 유년주일학교를 다녔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성례전(Sacraments)을 베풀자 교회가 하나 둘씩 설립되면서 용천지방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1940년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연감 자료에 의하면 58개 교회가 기록되고 있다.제18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경성의 새문안교회를 시무한 바 있는 차재명(車載命) 목사도 용천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용천은 기독교로 말미암아 일찌기 개화문화와 신문물을 받아들인 신흥지역이었다.교회 안에 신식 교육기관인 초등교육기관 병설용천지역에 교회가 점차 늘어나자 가까이에 있던 위대모 선교사가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다. 초기의 조선교회가 대부분 그랬지만 이곳 용천지역에도 개척교회가 시작되면 교회 내에 자연히 부속기관으로 초등교육기관이 병설되었고, 이 기관을 통해 기독교교육이 실시되었다. 당시의 선교부 정책 가운데 하나가 교회 안에 설립 운영되는 초등교육기관 운영비가 별도로 지원되었던 것이 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 세워진 학교라는 교육기관을 통해 불신가정에서 출생한 자녀들이 배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자연히 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로 학생들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지사였던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장규명 소년 역시 용천군 양하면 시남동에 세워진 양시교회(楊市敎會) 유년주일학교(幼年主日學校)에 다니면서 성경도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보성학교(普成學校)에서 보통과 3년, 고등과 3년 과정을 공부할 때 성경과목만은 다른 학생들보다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선천북교회 조사로 사역그후 장규명 청년은 모교인 보성학교 송자현 교장의 권유로 얼마동안 위대모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고, 그 후엔 1912년 3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역자로써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고, 위대모 선교사의 배려로 처음으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의 조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사활동을 하게 됨으로 학비문제가 어려움 없이 해결되었으며, 또 평양과는 거리도 그리 멀지않아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신학교에서 선천북교회로 가곤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주일이면 예배를 인도했고, 토요일이면 교인심방을 열심히 하였다. 한편 그의 주일설교 준비는 항상 방과후 신학교 기숙사에서 원고를 완성했고, 원고는 책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가 주일 오전 11시와 주일 저녁 찬양예배는 설교원고 노트를 꺼내들고서는 열심히 그리고 쉽게 말씀을 전파했다. 그는 주일이 지나면 월요일엔 또 평양을 가야 했다. 드디어 1923년 12월 19일 이승길, 김충한, 이학봉, 김치근 등 31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장로회신학교 제17회 졸업생이 되었다. 선천북교회에서 그의 설교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영력(靈力)의 힘에 이끌림을 받았던 교인들이, 졸업하던 해에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용천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시무하였다. 이미 급성장한 교회로 잘 알려진 관계로 선천북교회는 양전백(梁田伯) 목사가 부임해 있었기에 장규명 목사는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함께 목회를 하였다.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1년 유학이때 교회의 배려로 장규명 목사는 미국 남장로선교부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일본 고배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1년간 연구생활을 하게 되어 유학했다. 또한 당시 미국 조직신학계의 거장으로 있다가 신학교 교장으로 와 있는 홀튼(Holton) 박사의 지도를 받는 영광을 누리며 신학의 세계동향도 파악하게 되었고 목회의 활력소도 얻게 되어 당시로선 좋은 대접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귀국 후 다시 선천북교회 동사목사로 사역하다가 당시 담임목사였던 양전백 목사의 배려와 협력으로 1930년 같은 용천군 용천면 운흥동에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개척당시 선천북교회의 교인 일부를 양전백 목사가 떼내 보내줘 큰 어려움이 없이 개척목회를 성공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선천중앙교회도 모교회인 선천북교회와 대등한 규모로 성장하고 자립해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소식은 장규명 목사가 앞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위한 지도자로 발돋음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 개인에게도 큰 보람이 되었다.제20회 총회장에 선출, 중국 산동성에 여선교사 파송1931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금강산 온정리에 신축된 총회수양관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0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개회예배에서 홍종필(洪鐘弼) 총회장은 성경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으로 산상성회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이어 회순에 따라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선천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장규명 목사가 제20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이 된 것이다. 그가 재임했던 제20회 총회 결의안건들을 살펴보면, ① 중국 산동성에 여선교사 김순호 양을 파송하기로 하다. ② 총회 발전을 위해 3년 진흥계획을 수립하기로 하다. ③ 조선청년면려회를 만국연합회에 가입하기로 결의하다. ④ 남만노회 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남만·북만 노회로) ⑤ 전남노회와 평양노회 재단법인 설립을 허락하다. 장규명(張奎明) 목사는 청년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에 자신이 시무하고 있던 선천북교회에서 선천YMCA를 창설하여 조선의 미래가 청년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음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공산당에 체포된 후 행방불명1945년 8.15광복을 맞이 했을 때 북쪽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그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과 한독당(韓獨黨)과 연락하였다는 허위 죄목으로 공산당(共産黨)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된 후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그의 가족상황 역시 파악할 길이 묘연하다.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수 많은 교계 인사들과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교계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13권 한영제편 1984. 서울 p.524~5참조).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7-08
  • 성육신한 예수교회-18
    요즈음 한 예장 교단에서는, 전국을 돌면서 자립을 하지 못하는 교회들에게 계몽 성격을 띤, 교단의 앞으로의 정책을 은근히 통보하는 세미나가 있었다. 세미나 내용인즉, 앞으로는 대형 교회들이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를 감당하는 데에도 여력이 녹녹치 않기에, 미 자립 교회들에 대해서 지금과 같은 지원은 할 수가 없을 것이고, 다만 교역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부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회마저도 미자립 교회를 감당할 기력이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총회가 지향하는 방안이란 도시교회를 비롯한 농어촌의 교회들을 향해서 그저 손을 놓아버리는 듯 하는 무정책이란 인상이 짙었다.이와 같은 현상들이 학원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교역자들을 배출하는 신학대학원들이 얼마 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지방 신학들로부터 시작된 미달 사태가 중앙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문교부에서도 예산을 축소하고 소규모의 학교들부터 문을 닫게 하려고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도, 얼마가질 않아서 급작스럽게 문이 닫히게 될 형편이 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들은 자립도가 버거워진 교회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신학대학원을 나와 겨우 목사로 임직 받았지만, 교회들이 저들에게 사역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질 못하기 때문에, 안수를 받자마자 다른 직업을 병행하여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목회에서 손을 떼고 다른 직업을 찾아가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예비군에 편성되듯이 복음을 들고 사역해야할 고급 인력들 대다수가 안수를 받자마자 복음 예비군으로 편성되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형편을 현장에서 줄곧 보아온 젊은이들은 신학대학원에 들어갈 리도 없겠지만, 안일하게 학생들에게 학위만을 씌워주고 바깥으로 밀어내던 교수들도 강단을 떠나야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한국교회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달리 마땅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권력과 명예욕과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지도자들을 탓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감이 든다. 교단이 운영하는 학원들이나 언론사들도 역시 모두가 대형교회들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고 있던 터라서, 묘한 방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초상집 개처럼 입을 다문 지 오래다. 이러한 경우에는 어떠한 프로그램을 활용해서도 쉽사리 길을 찾을 수 없다. 예부터 늘 하던 방식대로,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가톨릭이 너무 멀리 기본에서 멀어졌을 때에, 오로지 할 수 있는 방안이란 칼뱅의 말대로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듯이 말이다.저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에는 올바른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썩할 때에는 도가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인해서,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민투표와 같은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성난 시민들이 지성적인 판단보다는 눈앞의 달콤한 사탕에 현혹되어지기 때문이다. 요즈음 EU에서 야기된 영국의 브렉시트 현상도 선동적인 포퓰리즘의 결과가 어떠한 쓰나미를 몰고 온다는 것을 선례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기능적인 운동력은 앞으로 대권을 내다보는 이들에게서도 답습되어질 것이고, 누구라도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자유하질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떠나가시고, 그의 사도들도 사라졌을 때에 그 땅에는 마가와 마태와 누가와 요한 같이, 책으로 길을 열어주는 서기관들이 등장하기 시작 하였다. 마가는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마태는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누가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요한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였다. 이들은 글로써 자신들이 당면한 상황과 문제를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처럼 인터넷 시대에는 각양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하고, 사람의 머리에서 상상되는 것이 모두가 업그레이드되고 있어서, 무언가가 해결을 줄 수 있을 것처럼 기대하는 눈치이긴 하지만, 요한서신의 지혜를 빌리면, ‘사람들이 메시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동요되질 말고, 오로지 각 사람 개개인이 기름부음으로 알게 되리라’ 하였다. 각 사람이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시간을 진지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독자 중에서 아주 난감한 지경에 처한 자가 있다 할지라도, 성경에 집중하면 거기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인류에게 참된 구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7-08
  • 김 영 실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
    7월의 파랗고 맑은 하늘처럼, 우리의 인생길에 먹구름은 끼지 말고 항상 행복하길 우리는 간절히 기도한다. 행복해 보려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귀여운 자녀도 낳고, 일도 열심히 해서 돈을 모은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돈으로 큰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고, 비싼 치료비는 낼 수 있으나 건강을 살 수는 없음을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고 있다.돈이 우리 삶에 윤활유 역할을 하기에 없으면 물질이 없으면 무척 불편하지만, 이것이 행복의 해결책은 아니다. 더구나 나의 행복을 남편이나 아내가, 혹은 자녀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기에,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나가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도, 목숨을 건 핍박을 견디며, 어두운 굴속에서도 행복하게 지냈던 것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20년 전까지도 힘들게 살았던 우리가, 오늘날은 모든 것이 풍족하고 행복한 시절을 맞이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됨은 슬픈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방글라데시에서 온 분에게, 그들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의 최고라는 것이 부러워 물어보았다. 대답은 엉뚱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가난해서, 비교할 대상이 거의 없기 때문에 ‘행복’이란 단어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하였다. 지금은 대한민국 시민권을 받는 것이 행복의 목표라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하고 있다고 한다.선진국 사람들과 행복한 유대인 가정을 보면, 그들의 입에서는 “Thank you!-고마워요!” “Excuse me!-실례했어요!” “I'm Sorry!-미안해요!” “God bless you!-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요!” “I love you!-사랑해요!”라는 대화를 끊임없이 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대화는 가정에서 부부와 자녀 사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다. 그들은 한집안에 살면서, 옷깃만 스쳐도 혹은 식탁위의 소금 통을 집어가면서도 “Excuse me!" 와 ”Thank you!"를 연발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동물과 식물, 옷, 자동차, 심지어 음식에게도 “I love it!"라고 표현한다. 이런 말들은 하루 종일 수백 씩 사용되는 문장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비싼 집이라 해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허가 되고 무너지는 이유는, 사람의 기운과 언어의 좋은 파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부모로부터 칭찬과 좋은 언어를 듣고 자라난 선진국 자녀들의 얼굴은 모두가 영화배우와 같다. 그들의 산과 들과 건물까지도 아름다운 것은 좋은 파장의 언어와 좋은 음악을 듣기 때문이다. 내 자녀가 행복하길 원한다면, 오늘부터 우리 가정에도 이런 대화들이 오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며칠 전 음식점에서는 2돌 지난 아들을 안고 들어온 엄마의 대화를 들었다. “너 자장면 먹을래? 짬뽕을 먹을래?” 아이는 딴청을 계속 피웠고, 엄마는 다그치듯 소리를 높여가며 몇 번을 물었다. 그 장면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2돌짜리 아들은 자장면과 짬뽕의 차이점을 잘 모른다. 그 엄마는 아직 아기인 아들을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린아이가 동생을 볼 때도 우리는 그 아이를 어른으로 취급하는 실수를 한다. “형이니깐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네가 더 크니깐 양보해야지! 목사 아들이니깐 참아야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면서 부모 노릇을 하는지... 자녀들에겐 미안하다는 말 뿐이다.언어를 바꾸자! 자녀와 야외나 등산을 가서 나무와 꽃을 볼 때도 칭찬의 언어를 내고, 멋진 바위와 맑은 하늘에 감탄하며,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감사함을 자녀들 앞에서 말하자. 길가에 어린 새싹이 피어 있는 것은 되도록 밟지 말고 비껴가는 배려심도 자녀에게 보여주자. 그리고 나의 아들과 딸이 되어주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항상 들려주자. 틀림없이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것이다.
    • 지난 칼럼
    • 여성칼럼
    2016-07-08
  • 월간 창조문예 발행인 임만호 장로
    홍정길 목사의 교회개척 동참 40년 동고동락… 김현승 시인 만나 문학의 길로 -월간 창조문예를 1977년 2월 창간하여 20여년 동안 단 한 번의 결간(缺刊) 없이 발행해 온 임만호 장로는 기독교문학 발전을 위해 높은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해 왔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어온 문학에 대한 꿈으로 인하여 시(詩)인이 되었고, 출판인에서부터 순수 문학지를 창간하기까지, 그리고 그의 또 다른 계획과 다짐을 들어 보았다.--임만호 장로의 성장 배경임만호 장로(75세)는 1940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가덕교회에 출석하였다. 주일학교에서 배우고 닦아온 신앙은 지금까지 성실한 삶을 살게 한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 어린 시절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이 작사한 노래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저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내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주님 고대가’를 눈물 흘리며 감명 깊게 부르면서 가슴 설레는 교회생활을 하였다. 성경공부와 새벽 기도에도 열심을 다했다. 당시에 새벽기도에 함께 했던 친구 중 17명이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와 선교사가 되었다.임 장로는 중학교 시절에는 당시 ‘기독시보’라는 주간 신문에서 신앙시를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주여 어서 오소서’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학생들 앞에서 시를 발표하고 국어 선생님은 함평문화원에서 문학공부도 시켜주었고 작품집도 만들어 주었다. 고교시절에는 문예부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문학에 대한 흥미와 동경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문학에 소질을 인정받게 되었고, 함평 지광원(고아원)의 원가(院歌)를 비롯하여 서울밀알학교 교가,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학교 교가 가사를 만들기도 했다.-김현승 시인을 만나 문학의 길임 장로는 당시에 숭실대학교 철학과에 다니고 있던 친구 홍정길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정신으로 설립된 숭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군 복무를 무사히 끝내고 복학한 때에 고향 교회 홍순호 장로(홍정길 목사의 부친)의 편지에서 “우리 정길이와 같이 기독교대학인 숭실대학교에 다니게 되어 기쁘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한 학기에 3만원씩 장학금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에 임 장로는 “죄송하지만 함평 지광원에 고아들을 위해 써주십시오.”라고 정중한 거절을 하였고, 홍 장로는 “만호란 녀석이 훌륭한 고집쟁이군”하고 말했다고 한다.어린 시절부터 시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시를 써온 임 장로는 입학 후 문학청년으로서 당시 대학국어를 담당했던 김현승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시절에도 시를 많이 습작했음에도 김현승 시인은 불호령 같은 책망과 함께 매우 유익한 가르침으로 문학에 정진하게 해 주었다. 마침내 학보에 시가 게재되자 김현승 시인은 “시를 많이 읽고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라”면서 격려를 해 주었에 지금의 시인 임만호 장로가 있게 된 것이다.-김준곤 목사 만나 CCC 사역 참여1970년 임 장로가 재미있게 직장생활을 할 즈음에 홍정길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홍 목사는 당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간사로 설립자이신 김준곤 목사와 함께 대학생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 목사는 임 장로에게 학원복음화와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설명하고 김준곤 목사를 만나라는 것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임 장로를 만나 CCC의 거룩한 비전을 설명하고 CCC가 당면한 사업 중 회관건축을 하기 위해 법인을 설립하였다면서 “임 선생은 제가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학원복음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예비해 놓은 인재입니다. CCC에서 재정담당을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김 목사의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꿈이 임 장로를 감동시켰다. CCC에 합류한 임 장로는 대학에서 전공한 경영학이 CCC재정을 담당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이때 CCC회관을 건축한 경험으로 반포 남서울교회 건축과 남서울은혜교회가 밀알학교를 건축할 때에 건축위원장을 맡아 헌신했다. 임 장로는 CCC에서 1971년 민족복음화운동 요원강습회와 한국교회역사상 최대의 행사였던 ‘엑스폴로 74’대회 등 큰 행사에 준비를 맡아 역할을 감당하면서 열정을 다했다.-문서선교의 사명을 위해임 장로는 CCC에서 후회 없는 사역을 마치고 1976년 선교적 사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서선교에 나서 출판사와 서점을 동시에 개업하였다. 주위에서는 신학을 하여 목회자가 되기를 권유했으나 임 장로는 CCC의 정신대로 순수성을 가지고 평신도로서 민족복음화 사역을 하기로 다짐했다. 문서선교를 하면서 묵묵히 교회를 섬기고 싶었던 것이다.도서출판 크리스챤서적과 아가페서적이라는 서점을 서울 후암동 입구에서 개업했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문서선교의 보람을 체험했다. 영업도 순조롭게 성장해 크리스챤서적은 600여 종의 기획출판과 타 출판사 출판물을 총판하면서 중견 출판기업으로 성장했다.-기독문학잡지 ‘월간 창조문예’ 창간임 장로를 한국시단에 추천해 준 김신철 아동문학가는 “자네가 출판으로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네. 한국에 기독교인이 천만 명을 넘지마는 월간 기독문학잡지 하나 없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네. 이 일을 한번 해 보시게”라고 세 번이나 임 장로를 찾아 권유했다고 한다. 여러 친구 지인들을 만나 의논해 보았으나 임 장로의 고민은 깊어졌다. 적자가 날 것은 뻔한 일이지만 출판사 일에 조금만 업무를 더한다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현대사에서 문학의 변천을 종교적으로 분석하면 고려 474년 역사는 불교사상이 배경이었고, 이조 500년은 유교사상이 이어갔다. 일반매체에서는 유교적인 작품은 인정하면서도 유독 기독교적 작품은 종교적 이유로 게재를 꺼린다. 노벨문학상 70% 이상을 유럽과 미국이 차지한 것도 심사위원들이 기독교적 문화권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배경으로 창조문예는 1997년 2월에 창간호를 세상에 내어 놓게 되었다.창조문예가 창간 된지 얼마 되지 않아 IMF 사태를 맞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챤서적에서 출판한 39권이 되는 전집 ‘알버트 반즈’주석 250세트를 할부 영업을 하는 분이 매입해 주어 극복할 수 있었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창조문예는 금년 7월 234호를 발간하기까지 한 번의 결간도 없이 발행되어 왔고, 직원들의 인건비도 지급 날자를 넘겨 지불한 일이 없다. 출판과 잡지라는 사업이 어렵고 힘이 드는 문화사업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경영학을 전공한 임 장로에게는 기업경영의 특별한 노하우(Know-how)가 있는 것 같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격언을 좋아한다는 임 장로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창조문예는 역량 있는 작가들을 계속 발굴하면서 문학상( 창조문예문학상, 종려나무문학상, 아름다운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우수한 작품집을 발간한 작가에게 상금과 상패를 수여하고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격려, 지원하고 있다.한국교회에 창조문예가 문학적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더욱 교계에서는 진주처럼 그 진가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그동안 각 장르별로 배출한 신인작가는 262명에 이르고, 이들은 한국문단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창조문예는 2009년, 2012년, 2016년 3회에 걸쳐 ‘문화관광체육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상’을 수상하여 저력을 보여 주었다.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임 장로는 “기독교 월간문학잡지로서 위상이 높아진 것에 걸맞는 사명감으로 크리스챤 문인들이 기쁘게 참여하고 발전적인 담론을 펼칠 수 있는 장소와 통로가 되는 문학지로서 튼튼히 자리매김하고자 한다”고 다짐한다.-앞으로의 비전과 역할임 장로는 문학공원 조성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명성 있는 문인을 모시고 추모하며 역사를 기리는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서 이는 앞으로 매우 좋은 명승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또한 한국기독교 문학인들의 신앙적인 시와 작품을 집대성 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윤동주, 박목월, 김현승, 박두진, 황금찬 등 문학의 황금시대를 열어온 인물들을 열거한다. 이는 신앙과 교육에 큰 도움이 되고 복음전도에 크게 이바지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작가 12인이 모여 성경 66권 창세기부터 책별 신앙적 시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또한 일본 기독교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한 동북아기독교작가 모임이 24년이 됐는데 작품을 통해 복음전도의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도 말했다. 임 장로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주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 <김형원 주필>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6-07-08
  • 기독교인의 행복론 -17
    모윤숙. 그녀는 일찍이 『렌의 哀歌』(1937)란 시집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앉아 밤을 샙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작고 큰 별들이 떨어졌다 모였다 그 찬란한 빛들이 무궁한 저 편 세상에 요란히 어른거립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는 무한한 암흑 속에 꼭 파묻혔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허공 중에서 마치 나는 당신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조용히 꿇어앉았습니다.” 깊은 밤에 누구나 한 번쯤 그리운 이를 생각할 법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인간에게 그리운 이가 있다는 것은 행복감을 젖게 하지요. 그녀는 일제 식민지 현실에서의 암울한 심정을 깊은 밤으로 묘사하면서 그리운 이를 통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자아를 회복하려 하였습니다. 그리운 이는 곧 임이며 얼로서,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의 근원이었습니다. ‘시몬’은 기독교에서의 주님으로 확대 해석이 가능합니다. 자아를 숨쉬게 하고, 생동감 있는 일상을 느끼게 하는 주님 말입니다. 광복 후 미 군정 시절에 하지 중장은 한국에서 막강한 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은연중에 김규식을 한국의 지도자로 점찍고 있었습니다. 이때 유엔한국위원단이 한국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을 신탁 통지 할 것인가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유엔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 단장이 바로 메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인도의 네루 수상에 버금가는 역량 있는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 진영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생리를 잘 아는 이승만은 이대로 가다간 북쪽의 김일성 술수에 말려들어 나라가 혼란과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습니다. 당시 작가는 요즘의 K-Pop 가수에 해당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광수 등 당시 내노라 하는 작가는 친일 문제에 휩싸여 반성하는 의미로 칩거하고 있었습니다. 이광수의 문단 후배였던 모윤숙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최종고,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 여성』기파랑, 2012/ 199쪽 참조). 그때 그녀는 이승만의 비서인 이기붕한테서 민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받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박사에게 국내에도 인재가 있으니 난국을 바로잡는 데 활용하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유엔한국위원단 회의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문학에 대한 식견이 높던 메논(유엔한국위원단 단장)을 만나게 됩니다. 메논은 모윤숙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느끼고 그가 주재하는 파티에 모윤숙을 자주 초대하게 되어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메논은 인도 정부의 뜻에 따라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모윤숙은 메논의 태도를 한국적인 입장으로 돌리는 데 온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한만의 총선거론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논은 2,3일 후면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떠나는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모윤숙은 메논에게 말을 꺼냅니다. “인도에는 타지마할이 있는데, 한국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명성황후라는 분인데, 그분 묘가 동구릉 쪽에 있습니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 보면 한국에서의 당신 감회가 남다를 겁니다.” 이렇게 하여 그를 동구릉으로 안내한 후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이승만이 있는 이화장으로 데려갑니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치르려 하는 이승만을 만나기 꺼려 했던 메논은, 이승만이 반갑게 맞이하자 당황하며 차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수많은 사람이 서명한 민원 두루마리를 보여 주며 한국 국민의 염원이 담긴 이것만이라도 유엔에 가져가서 보여 주기를 간청합니다. 이후 이승만의 끈질긴 유엔 외교 덕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경성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일했던 모윤숙은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피신하였습니다. 오랜 피신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 죽음을 선택하려 할 즈음, 그녀는 한 병사의 시신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녀는 젊은 병사의 주검을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민족의 얼을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서 쓰여진 시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입니다.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내리는 풀숲에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부분). 그녀는 병사의 혼에 들어 있던 민족의 얼을 생각하며,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얼을 살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6-07-08
  • 49. 제27회 총회장 홍택기(洪澤麒)목사
    평북 신천 출신홍택기(洪澤麒 1893.5.11~1950)목사는 1893년 5월 11일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고향의 유영제(流英齊)에서 한문사숙을 하였고, 선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여 고등과를 졸업했다. 후에 선교사가 세운 신성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2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1908년 8월 기독교에 입신하여 1910년 7월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7년에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3월 처음으로 교역자의 길인 전도사로 임명 받았다. 1924년 12월 19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김병희, 박승명, 박연세, 방경모, 소병권 등과 함께 제18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2년부터 1943년까지 평북노회 경내에 있는 차련관(車輦館)교회(1905.1. 30 설립)를 담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평북노회 서기를 지냈고,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평북노회장을 지냈다. 그의 본격적인 교정경력(敎政經歷)을 보면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서기(書記)를 시작으로, 1937년에는 교단 부총회장을, 이듬해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이 총회가 바로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지울 수 없는 오욕을 남긴 총회이다. 1938년에 모인 총회라고 해서 소위 ‘38총회’인데, 천추의 한을 남긴 신사참배로 교단적으로 공식 결의한 총회가 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땅을 치며 가슴을 쥐뜯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 당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사실 불가항력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총회가 개회도 되기 전 일본 경찰당국은 평양에서 모이는 전국의 총대들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고, 개회 당일에는 총대 바로 옆에 일본 형사들이 끼어앉아 총회장이 가결여부를 물었을 때 형사들이 총대들의 팔을 잡고 손을 들게 하였다. ‘38총회’로 이름난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의 구성을 보면, 목사 86명, 장로 85명(1명 미참), 선교사 22명으로 총합계 193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설교를 맡은 이문주 목사는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삼고 “신앙의 3대 요소”(믿음 소망 사랑)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임원선거에 들어가 투표를 하니 총회장에 홍택기 목사, 부회장에 김길창 목사, 서기에 곽진근 목사가 당선되었다. 그 다음 날 9월 10일 오전 9시에 속회가 되었다. 박웅률 목사의 기도가 있은 후, 이어서 당시 평남지사(平南知事)인 이시다(石田)가 나와 축사한 후 임원 교체식이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 40분에 공천부장 한태영 목사의 보고를 받은 후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웅률 목사가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채택안을 채용하기로 제안하였다. 사회를 맡아보던 홍택기 총회장은 가(可) 부(否)를 묻기 전에 반대측에게도 발언권을 주어야 하는데 토론없이 즉석에서 성명서 내용을 가결시키고 말았다. 회의 원칙상 가(可)하면 ‘예’ 하시고, 부(否)하면 ‘아니요’라고 하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가만 묻고 부는 묻지도 않고 이 안건은 만장일치라는 누명을 씌운채 총회를 통과, 즉석에서 홍택기 총회장은 가결선포를 하고 다음과 같이 단상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총회의 성명서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連反하지 않는 本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에 神社參拜를 率先斷行하고 追히 國民精神總動員에 參加하여 非常時局下에서 銃後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期함. 昭和13年9月10日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長 洪澤麒이렇게 총회장이 선두에 서서 신사참배 안건을 결의 선포하고, 서기가 이를 받아 대독하자 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선교사회원들은 총퇴장하고 그 중 해밀톤(F.E.Hamilton 咸日頓) 선교사가 일어나 홍택기 총회장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법(不法)이요 라고 힘차게 외쳤지만 그를 경호하고 있던 경찰들의 제지로 아무런 효과를 얻지도 못하고 말았다. 총회 임원진과 각 노회장단, 즉시 평양신사 찾아 참배이렇게 혼란의 와중에서 신사참배 안건이 결의 통과 선포가 되자, 부회장 김길창(金吉昌) 목사는 임원회를 대표하고, 각 노회장들은 노회원들을 대표하여 즉시 평양신사(平壤神社)를 찾아 참배함으로 조선장로교회의 신앙의 등불은 이렇게 꺼지고 말았다. 이 총회에서 결의된 사항을 조선총독과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리대신, 척무대신들에게 전보(電報)로 총회장 명의로 발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하게 되었다는 오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의 상징인 신사(神社)에 한국교회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끓게되는 비참함이 두고두고 한국교회사에 회자화 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만 것이다.이 사건으로 인해 부회장 김길창 목사(경남노회)는 평양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로 낙인찍혀 총회장에 여러 번 출마하였으나 그때마다 낙선되어 결국엔 총회장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역사가 그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이 신사참배 결의로 말미암아 4개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敎)는 즉시 폐교되었고, 선교사들은 신사를 참배하는 조선교회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야 말았다.평양 장로회신학교 폐교이뿐만 아니라 총회는 계속 일제의 전쟁승리를 위해 국방 헌금을 했고, 전투기 2대를 구입해 바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감리교의 양주삼(梁柱三), 장로회총회 부총회장 김길창, 성결교회의 이명직(李明稙) 목사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신궁(伊勢神宮),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등을 직접 찾아가 참배하고 돌아왔다. 홍택기 목사는 1939년 9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평의원을 맡았고, 1940년 2월엔 국민정신총동원 평북노회지맹(支盟) 이사를 맡기도 하였다. 1944년 8월엔 징병제 실시 기념강연회 연사로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했다. 홍택기 목사는 이렇게 철저하게 변질된 모습으로 총회를 친일적으로 이끌어 갔고, 5도 16개 노회 연합의 주최로 퇴수회를 이끌어 가기도 했다. 이때 총회가 신사참배하고 난 후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감옥에 갔다 나온 이기선 목사의 간증설교는 참석한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해방 후(1945.8.15) 북한교회 수습방안이 대두되자 당시 만주 봉천에 있던 만주신학교 교수로 재직한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수습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홍택기 목사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은 조선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했다는 변명을 하였다. 애석한 일이지만 광복 직후 신사참배 문제로 예장고신 교단이 분리되어 나가게 된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 교역자들에게 자숙 요구옥중에서 출옥한 고난받은 성도들은 교회 정화의 논리로 일제하 신사참배 했던 교역자들과 신자들의 자숙을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신사참배에 동조한 자들은 일제치하의 감옥생활에 버금가는 고난 속에서 신사참배를 해 가면서 교회를 지켰다고 주장하며, 서로의 입장만 내 세우다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된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복음의 본질을 무시하고, 이해와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덕을 피차 세우지 못하고, 상대를 용납하지 못한 결과로 분열하고 만 것이다.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감옥에 들어가 고난을 겪은 성도들이나, 또 당신네들은 감옥에 가서 고난을 겪었다지만 우리는 교회와 신앙을 지키고 부지해가기 위하여 감옥밖에서 그대들이 겪은 고난에 버금가는 수모와 역경을 지탱해 내었다고 하는 아집 때문에 결국은 교회가 분열되고 형제가 원수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8.15광복 이후 홍택기 목사는 평안북도 월곡교회(月谷敎會)를 거쳐 철산군 점면 신곡동교회(1914.3.15 설립)를 담임하던 중 1950년 6.25전쟁시에 행방불명되었다. 북한에서 피난 나온 한 교계인사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로당(南勞黨)으로부터 숙청된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어 그가 언제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1938년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의 한 장면인 것 같아 씁쓰레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6-06-30
  • 예수 제자로 사는 삶 2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 자기의 삶에서 존재가치를 드러내야 한다는 뜻을 지닌다. 이 세상 천지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 하나 뿐인 생명(生命)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오직 자기생명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돌아보면 세상에 거하는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시장에서 그 사물의 시장가격을 정하여 가지고 거래를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이 생명만은 그 값을 매길 수 없다. 사람의 생명(生命)은 가격을 매기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존귀하다. 생명은 살아 움직이고 있는 힘이다. 생명은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에 하늘이 내는 것이어서 사람만이 유일한 목적가치요 사람 이외의 사물의 가치는 삶을 위하여 수단가치에 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이 사회에는 조직과 제도가 있으며 정치와 경제가 어울려 생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목적과 수단의 가치와 질서가 바로 서지 못하면 사람이 사는 삶의 사회에는 비극과 문명의 위기가 닥친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재에는 나의 뜻이 아닌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결심과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책임 하에 ‘자기’라는 존재만으로는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람으로 살아가며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으로 타의(他意)에 의한 결정으로 된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 사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을 한문으로 生命 즉 그 생명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의지로 우주를 지배하며 인간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계획을 이루려는 뜻이 있음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삶을 말씀하시기를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불신자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 됨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친히 보여 주시는 것 그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9:58)라 말씀이시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문화생활의 일부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제처 놓고 예수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라고 하심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책임진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3). 다만 생활의 보장을 위해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생각해 볼 일이다. 노숙자의 처지가 되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로 제자 됨의 삶을 선택해야 할 준엄함을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리라 하시니라” (눅9:62). 제자가 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여기에 있으면 이것이 삶의 전부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당시 예수님의 심정을 4복음서가 일제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누가복음 19:41-42에 주목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하시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때 예수께서는 수많은 인파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설교를 하신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는 말씀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씀 하시고 “내가 곧 가더라도 성령이 와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내 말씀을 지키는 것인데 새 말씀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부탁의 말씀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마지막 권면의 말씀을 제자되는 믿음의 삶으로 “예수 제자로 사는 삶”을 깨닫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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