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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제26회 총회장 이문주(李文主)목사
- 경남 합천 출신이문주(李文主, 1884.1.23~1945.6.16) 목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陜川)에서 1884년 1월 23일 태어났다. 이곳은 비록 산골이지만 이미 부산에 본부를 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그 힘든 오지 중에 오지 합천에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때마침 구식 교육기관이었던 한문사숙(漢文私熟)을 막 졸업하고 집에 놀고있던 이문주는 왕길지(Rew. G. Engel, 王吉志)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기독교에 입신하여 곧바로 합천교회(陜川敎會 1907. 9. 설립)에 출석하였다. 당시 호주장로교선교회에서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하여 교회에서 1개월씩 소위 달성경학교(月聖經學校)를 개설 운영하였다. 이문주는 이 과정을 매년 한번도 걸르지 않고 열심히 참석해 성경을 배우며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익혀 가며 자기의 신앙화 작업을 쌓아갔다. 그의 이러한 열심을 눈여겨 본 선교사들은 그를 선교사의 순회조사(巡廻助師)로 임명하고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후 호주장로교선교회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신학(神學)을 공부하게 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청년 문주(文主)는 그곳에서 신학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1918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제11회로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가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가 처음 부임한 곳은 대구에서 북쪽으로 20여키로 떨어진 칠곡군 신동교회(新洞敎會)의 청빙을 받아 첫 목회지가 되었다. 후에 달성군 점산교회(오늘의 대구 북구 침산교회?)와 상주군 상주읍교회(尙州邑敎會)를 거쳐, 1924년 3월 대구읍교회에서 분립된 대구남산교회(大邱南山敎會 1915.9. 설립)에 부임하여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6월까지 시무하였다.그는 1936년 9월 10일에서 19일까지 광주양림교회에서 모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6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총회장 이승진 목사를 도와 교회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에서 16일까지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회원으로는 목사 82명, 장로 82명(미참 3명) 선교사 35명으로 모두 196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직전 총회장 이승길 목사가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17절을 중심 본문을 삼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라는 제목의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다. 성찬식을 마친 후 임원선거에 들어갔는데 총회장에 이문주 목사, 부회장에 홍택기 목사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 중 헌의부에 이상한 안건이 하나 접수되었다. 내용인즉 임지없이 있던 무임목사가 장로로 피택될 수 있는가? 라는 질의성 안건이 올라 온 것이다. 이 안건은 각 노회에 수의한 결과 부결 처리되었다. 또 한 가지 큰 안건이 하나가 올라왔는데, 총회상설부서 가운데 하나인 농촌부폐지안이었다. 당시 이 부서의 상임총무는 배민수(裵敏洙) 목사였다.일제의 압력으로 농촌부 폐지배민수 목사는 교육부 총무인 정인과(鄭仁果) 목사와 함께 흥사단 계열 인사로서 미국 유학파였다. 이때 일제의 압력으로 농촌부 상임총무였던 배민수 목사의 사임에 이어 총회의 중요 부서 가운데 하나인 농촌부가 폐지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농촌부가 폐지된 이유가 겉으로 표면화 된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매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이 점점 대폭 삭감되고 있었고, 둘째는 농촌부 총무가 농한기에 개최되는 달(月)성경학교(聖經學校)에 가서 수강생들을 의식화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고, 셋째는 그동안 배민수 목사의 활동으로 농촌교회가 3배나 증가했다는 것이었다.일제를 돕는 일부 총회대의원들은 총회에서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농촌부를 폐지하기로 헌의(獻議)하여 투표한 결과 가표가 78표, 부표가 32표로 농촌부가 폐지되고 만 것이었다. 농촌부가 폐지된 후 배민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삼애운동(三愛運動 ; ① 하나님을 사랑하고 ② 땅을 사랑하고 ③ 생명(사람)을 사랑한다)을 제창하면서 개인적으로 농촌지도자들을 훈련해 배출하는 일을 전개하였다.이문주 목사의 교정(敎政) 후반기에 이르러는 정체의 변동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일제당국에 본의아닌 협력의 길에 들어서는 불가항력적인 일도 겹쳐지고 있다. 이문주 목사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수장이 되던 해에 일제당국의 종교정책 및 식민지 정책에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던 것이다.중·일 전쟁으로 친일화 강요1937년 7월 7일을 기해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장하면서 아세아는 아세아인이 대동 단결하여 서양의 모든 세력을 몰아내자고 하면서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조선으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한달 간격으로 창간 작업을 허락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기독교 계통(Mission School)의 교육기관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해 왔다. 그 결과 기독교 계통 미션스쿨들은 자진 폐교가 아니면 강제 폐교를 당하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일제 당국은 전국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강제 해산 시킬려고 하다가 1년간 유예하였다. 왜냐하면 신사참배가 결의될 것을 알았던 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자진해산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이와함께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조선말을 가르치는 일을 금지시켰다. 이러다보니 교회 안에까지 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문주 목사는 총회장에 취임한 그 해 1937년 3월 재단법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유지재단 이사에 취임했고, 1939년 9월 신의주 제2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朝鮮耶蘇敎長老會聯盟)을 조직할 때 평의원(平議員)으로 참여했으며, 그 해 12월엔 대구성경학원(大邱聖經學院)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경북노회지맹(慶北老會支盟)을 결성 할 때도 이사로 참여했다.기독교 친일인사로 전락1942년 5월엔 기독교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2일 장로회총회 상치위원(常置委員)으로써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주최 황군환자용자동차 3대 헌납식에도 참여하였다.1943년 4월엔 경북노회 상무위원(慶北老會 常務委員)에 임명되었고, 1944년 12월 24일 일본기독교(日本基督敎)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장(慶北敎區長)의 감투까지 본의 아니게 덮어쓰고 만다. 또 그는 해방이 되던 해 1945년 2월 경상북도 도청회의실에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 회의(朝鮮戰時宗敎報國會議) 경상북도 지부이사를 맡아 일제의 앞제비 노릇까지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857참조). 이는 그 시대를 지고 살았던 자들이 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수치스런 역사를 다시 반복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이문주 목사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무리이겠지만, 당시의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이끌어가는 교회의 지도자로써의 뒷모습이 씁쓸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회기의 중요 결의안 들을 살펴보면, ① 농어촌교회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연중 농사철 행사표를 제작 보급하기로 하다. ② 방지일 목사를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서양 선교사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중국 산동에 총회파송 선교사로 임명하다. ③ 최혁주 목사를 만주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가결하다. ④ 조선말로 기도와 설교 금지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왔었음을 공표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문주 목사의 작고 일시에 관하여 총회를 섬기는 일꾼들(2005 장로교출판사 p.117)을 쓴 교회사가 김수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총회장을 맡았던 이문주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몇 개월 앞둔 6월에 한국교회를 떠났다”라고 기록해 행방불명이 된 것인지, 이후의 사망일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제2권 p.857)에서는 분명하게 1945년 6월 16일 사망한 일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첨언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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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제26회 총회장 이문주(李文主)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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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와 성령 2
- 일반 종교적 관념에 의하면 “신의 완전성”은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을 수 없는 데에 있다. 우리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길은 이러한 신을 닮는 데에 있다. 이 신과 같이 속세의 모든 것을 해탈하여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에 자극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예수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돌로 지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요2;19-20). 그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이다(막 14;5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어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 1;14). 그리스도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 그런데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전이다(고전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고 하심에 주목한다. 성령 강림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깊은 절망감과 외로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한 다락방에 모였다.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깨우쳐 주시던 주님을 잃은 슬픔에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위로가 없었다. 유대 절기의 하나인 오순절 날 이들에게는 예정되었던 성령의 강림이 임하게 되었다. 진리를 온전하게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의 영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금요일에 한 알의 씨앗으로 예수가 심어졌고 부활의 아침에 그 씨앗은 생명의 꽃을 피워 내었다. 그리고 이제 오순절 날, 한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 위에 그 생명이 꽃이 향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향기를 맡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니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났다.하나님은 죄인들 가운데 계신다. 그는 죄인들의 죄를 괴로워하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자기를 떠난 탕자를 기다리듯 그들을 기다린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교회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도 계시고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며 그들의 고난에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 계시듯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있고 또한 몸속에 있다고 한 말은 “정신이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고, 이 정신의 에너지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살아 있는 에너지다”라고 한 말에서 성령의 역사를 깨닫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한 삶”의 의미를 가져본다.성령 강림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잊어버린 진실을 증언하게 한다. 그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우리들이 변화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좁은 생각의 반경이 넓어지고 우리의 닫혔던 마음이 열려 갈등과 분열 폭력과 미움 그리고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긍휼로서 감싸 안았던 사마리아인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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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와 성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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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와 성령 1
- 철학에서 우상(idol)이라는 용어는 명석한 사고를 가로 막는 그릇된 정신 경향을 가리킨다. 편견이나 잘못된 관념으로 흐르는 경향을 우상화라 한다. 성령과 삼위일체의 다른 2위격의 관계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해 온 반면, 동방정교회는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해 왔다. 여하간에 가톨릭과 동방정교의 교인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사변보다는 교회의 성사생활에서 성령을 더 체험해 왔다. 사도시대 이래로 세례의식문은 삼위일체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에피클레시스(epiclesis: 성령강림을 비는 기도)를 드릴 때 성령이 예배를 드리는 교우, 성찬의 빵, 포도주에 강림하는 역할을 강조해 왔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바쳐야 하는 확신, 충성, 헌신을 창조주에게만 바쳐야 하나, 이를 피조물에게 바쳤을 때는 교활한 우상숭배가 된다. 성서의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을 중재하고 행위가 자동적으로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을 거부해 왔음에 주목하는 것이다.“그 날에 인간의 거만이 꺾이고 사람의 거드름은 풀이 죽을 것이다.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우상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사2:17-18). 10계명의 제1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우상숭배를 금지한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과 절대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에는 영구불변의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원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다만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3:17).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훌륭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세상의 창조주 주님을 찾아 모든 사람은 주님에게 헌신하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한다. 참된 교리라 할지라도 그 자체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가리키지 못하면 우상숭배가 된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이 성서로 불리는 것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제함이 없나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한다. 곧 자기의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이 끌리는 대로 하는 행위가 우상화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사랑에 대하여 무언가 갚아 줄 수 있는 자를 사랑한다. 자기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자에게는 주고, 되돌려 줄 수 없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자기에게 아무 것도 되돌려줄 수 없는 자에게도 그의 사랑을 준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는 곧 자기와 원수된 자를 사랑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기적이요 속되다. 갖가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한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 성(性)에 대한 소유욕, 권력과 지위에 대한 소유욕, 명예에 대한 소유욕 등 갖가지 욕심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대개의 경우 우리 인간은 이 욕심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더럽고 속된 존재 일상적인 존재가 된다. 희망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자기를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선다.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간,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의 자리에 선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보잘것없이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예언자를 보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냈었다. 우리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을 가지고 있으므로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하여 반응한다. 그리하여 희로애락의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여지고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고통이고 또 고통을 유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불완전한 인간, 세상살이의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에 비하여 하나님은 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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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와 성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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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24회 총회장 정인과(鄭仁果)목사
- 평북 순천 태생정인과(鄭仁果 1888.1.9.~1972) 목사는 평안북도 순천(順天)에서 1888년 1월 9일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정의종(鄭鍾)이었으나 후에 인과(仁果)로 개명하였다. 영문(英文) 이름은 제임스 정(James Chung)이다. 그는 일찌기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40년 5월 고향에서 야소교 소학교와 1907년 6월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에 입학 1911년 5월에 졸업하였다. 그의 재능을 보고 인정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Seminary)에 유학 3년간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다시 뉴욕대학(Newyork Unirersity)에서 1년간 연구생활을 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8월까지 모교인 숭실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훌륭한 신식교육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미국에 체재하고 있을 때 1913년 10월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흥사단에 입단해 흥사단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1919년 4월에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에서 안창호(安昌浩)를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특파원으로 파송할 때, 황진남과 함께 안창호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해 9월 임시정부가 통합 개편될 때 외무부(外務部) 차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1920년 10월 외무부 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과 정치사회학을 공부한 뒤,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년 말경 귀국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초판 p.475 참조). 정인과 목사는 1933년 총회 안에 상설부서인 농촌부(農村部)와 종교교육부(宗敎敎育部)가 출범하게 되었는데, 종교교육부 총무를 맡아 취임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가장 핵심적인 부서였고 종교교육부의 총무는 막대한 재정(財政)을 운영하는 요직이었기 때문이다. 총회산하의 각종 교재(敎材)와 찬송가 등이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인쇄 제작 판매되는 관계로 요직 중 요직이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교육부 총무자리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초대 종교교육부 총무1935년 9월 6일부터 13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81명, 장로 81명(미참 4명), 선교사 4명의 회원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가 모였다.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개회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한 후 회순에 따라 임원선거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성로 목사를 따돌리고 정인과 목사가 제24회 신임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정인과 목사는 경기노회 총대가 되어 총회원으로는 처음 참석하였는데 부총회장 김석로 목사를 따돌리고 총회장에 피선되는 이변을 일으켰으니 한동안 총회장 내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초임 총대가 총회장이 되었으니 당시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의 위세가 어떠했던가를 말해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총회100년 역사상 정인과 목사시대 당시 이외는 지금까지 없었던 유일의 사건이 되었다. 부회장은 김성로 목사가 재선되었으나 그는 총회장은 끝내 못하고 물러났다. 갑자기 총회장이 된 정인과 목사를 미국 북장로교 소속 허대전(Rev. J.Godden, Holdcroft, 許大殿) 선교사가 옆에서 많이 도왔다. 허대전 선교사는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주일학교 교육사업에 투신 경험도 있었고, 전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직 시에도 일익을 담당한 바 있었고(1911. 4), 1932년까지 상임총무로 있으면서 당시 부총무였던 정인과 목사를 훈련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판찬송가·희년 설교집 발행그가 재임했던 총회 중요 결의 사항 중 행정적인 것은 의산(義山)노회를 의산노회와 봉천노회로 분립키로 한 것 외에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총회 종교교육부편으로 출판한 신편찬송가(총400편)를 발행한 일이다. 이 찬송가가 한국교회 오늘의 통일찬송가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큰 사업은 이미 희년(총회설립)은 지났지만 총회 이름으로 희년기념 ‘목사설교집’을 발행한 일이다. 이후 정인과 목사는 1936년도부터 총회의 총대로는 출석하지 않았고, 이듬해 1937년에는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직도 사임하였다. 이후의 정인과의 후반기 활동은 친일(親日)로 일관하였으니 그의 인격과 신앙을 탓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인 시작에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전환되고 만다(총회를 섬긴 사람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p.106).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1937.6) 일경에 체포되어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사업보고를 통해 “비상시기를 당하여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히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戰勝), 무운장구기도, 전사병위문금, 국방헌금, 전상자와 유족위문 등 사적으로, 공동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도 표시되었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할 때 애국운동에 주야로 애쓰신 지맹장 기타 간부 제씨와 활동하신 애국반 제위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 더욱 힘써 흥아사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결심하고 전보다 더 활동합시다”라는 장로교측의 부일협력 상황을 보고했다. 정인과는 같은 해 12월에 이 단체의 총 간사를 맡았고 이듬해 1월엔 감리교의 정춘수 목사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선임되어 노골적인 천일의 사역을 해나갔다.1941년 8월엔 장로회 중앙상치위원회에서 전시체제실천 성명서를 발표하는데도 참여하였고, 이어서 조선장로교신도 애국헌납기성회 발기위원장과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같은 달 삼천리사(三千里社)가 주최하는 임전대책협의회에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1941년 9월엔 임전대책협력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 3일부터 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매일신보」에 종교계의 임전체제라는 시평(時評)에 “일본적 기독교로써 익찬일로(翼贊一路)의 신출발”을 기고해 기독교계의 부일협력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일제의 전쟁물자 동원에 기독교 이용이 글 결론부에서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 사이에 거교단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써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일보 내선일체 철저화의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노력 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하여마지 아니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연맹 총간사로서 각 노회 연맹이사장에게 헌종(獻鍾)보고서 독촉의 건 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교회의 종을 떼어 전쟁물자로 바치고 보고하도록 독촉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19일 장로회 총회장 최지화 및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육군 환자용 자동차 2대 기금으로 장로회에서 모금한 2만3221원28전을 냈다. 이 돈으로 자동차 3대를 제작해 같은해 11월 조선신궁에서 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로 헌납식 행사를 가졌다. 조선기독교의 일본화에 앞장1942년 9월엔 일본그리스도교단 통리 도미타(富田滿)가 만주국 10주년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가다가 경성에 들렀을 때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마련한 조선기독교의 일본화급무라는 주제의 간담회에 장로교를 대표해 최지화와 함께 참석했다.같은해 11월 조선군애국부를 방문해 지난 1년 동안 일본군이 전승을 거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밤 50석을 내면서 대동아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내의 신도 30만, 더욱이 부녀자들은 지극히 적은 돈을 각출하여 조선의 특산물인 평양율(平壤栗)을 조금이라도 더많이 병사들에게 맛보여 드리겠다는 생각으로 감격한 신도들이 승율(勝栗)을 모아 헌납하는 것이라고 유난을 떨었다. 1943년 2월에 국민 총력연맹 주최의 미영격멸간담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해 연맹 간부들과 함께 미·영폐풍의 교정에 합의하기도 했다. 해방후 1945년 10월엔 백낙준 김찰관 등과 함께 조선호텔에서 이승만을 면담했고, 11월엔 임시정부영수전국환영회 재무부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6년 1월엔 3.1동지회 중앙본부의 평남대표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조선신탁 통치 절대반대 임시정부 절대지지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947년 4월 신진당(新進黨) 간부를 개선할 때 김봉준 김호와 함께 3인의 부위원장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6월 독립협회확대준비회라는 임의단체를 결성, 회장을 맡고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렸으나 서재필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49년 2월 21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건강 때문에 보석으로 나왔다(친일인명사전 같은책 1960년경부터 1963년까지 3년간 경기도 문산법원리 장로교회를 담임하였다. 친일 인명사전에는 1971년 행방불명 p.497 참조)으로 기록되었으나, 김수진 목사가 쓴 총회를 섬긴 사람들 이란 책에서는 1972년 경기도 파주자택에서 영민하였다고 기록하였다(총회들 섬긴사람들. 김수진 저 p.1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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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24회 총회장 정인과(鄭仁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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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4
- 엘리야가 등장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당시 정부가 얼마나 부패하고 쇠약하였던지, 말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던 선지자들은 입을 놀리다가 그만 거의 죽었거나 옥중에서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다. 디셉이라는 촌구석에 한 무명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엘리야’이다. ‘야웨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부모가 작명하여 준 것이라면, 그 시기에서부터 저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증표일 것이다. 어찌하였든지 간에 야웨 하나님을 제 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의지가 강력하게 엿보이는 이름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가 이제까지는 무명한 선지자였으나, 이제는 선지자의 씨가 말라서 엘리야라도 등장해야할 시기가 왔던 것이다.엘리야 선지자는 사람들 앞에 서서 “내 입에서 하늘로부터 비가 온단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이 땅 어느 구석이든지 비 한 방울 안 떨어지리라”하였다. 이는 저들이 숭배하는, 번영과 풍요의 신인 바알을 지명하여 대적한 것이었다. 인간이 모이면 여러 가지 모사를 꾸미고,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꾀하지만, 어디 그러한 것들이 사람 마음대로 되어 지느냐는 것이다. 정치 놀음에서 서로 주고받다 보면, 하나님은 멀리 보내 놓고 술수를 꾸며서, 도덕적인 것은 내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요란하게 하여 종교 의전만 풍성하게 해서, 민중들의 마음만 사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어느 순간에서 부터는 야웨 하나님의 자리를 ‘바알’이라는 풍요와 번영의 신이 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이즈음에 무명 선지 엘리야는, 온 세상에 선지자라고는 나 하나밖에는 남지 않았으니, 내가 침묵을 지키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저는 마지못해서 일어나 일성을 터트리었는데,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적극적이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당시 어리석은 민중들은 늘 상, 때마다 흥겹게 벌이는 축제의 신인 바알이 온 세상에 비를 가져오고, 그 비가 오는 덕에 풍요와 번영이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먼저 형장의 이슬이 된 선배 선지자들은 그 땅의 관리들의 도덕성이 어쩌고, 신앙이 어떻고 하다가 옥에 갇혔지만, 엘리야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 바알이 아니고 ‘야웨가 하나님이시다’임을 선포하고 험증하는 사건을 유발시킨 것이었다.세인들은 엘리야를 볼 적마다 웬 미친......? 하였다가, 일 년 지나 이년 지나 삼년이 되었는데, 정말 하늘이 납처럼 굳어진지 오래고, 웬만한 땅에는 물을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만나 누가 이 땅에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신지, 누가 거짓된 신인지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식별하자는 것이었다. 삼년간 비가 오질 않은 그 땅의 군주는, 오로지 비가 와야 정치적 안정도 함께 오기 때문에, 바알의 사제들을 갈멜산에 집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그 위에 각을 떠서 희생의 제물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였다. 그러고서는 선언하기를, 이 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흠향하시는 분이라야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다. 이날 야웨 하나님은 엘리야 제단의 그 희생에 불을 내려서 흠향하시고, 야웨가 하나님이심을 시위하셨고, 이어서 하늘을 여시어 삼년 육개월 만에 흡족하게 비를 내리시었다.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땅에도 이와 비슷한 정황이 벌어진 것이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거의가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서 권능을 상실한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가져 오시는 분이신가에 대해서 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한 분은 지상에서 공개적으로, S교회의 O목사님이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는데, 그 남은 기회마저 거의 다 써버린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영달과 부귀와 권력을 놓아 보내지 못하는 그 처사를 인지한 이들은 뼈아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으리라.아마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그 제단은 정말 순수한 제물로 준비된 희생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가장 소중한 기우제를 준비한다면, 그도 가장 극상품으로 희생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이 땅을 치유하시고 인류의 죄악을 사유하시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하나 밖에 없으신 유일한 독자 예수를 희생의 제단에 올리시질 않으시었던가?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백성들의 가슴을 하늘의 단비로 적시어 주고, 참되신 하나님을 보이고, 교회를 다시금 일으키려면, 이 땅의 누군가가 딱 한사람! 그 사람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준다면, 바로 그 위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고 비도 내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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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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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싶습니다!
- 가정의 달 5월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가정이 행복하길 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도 모자라 아이들의 키가 클 수 없었고, 땔감이 없어서 나무를 찍어가니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보니, 한국의 집들은 초라하고 산에는 나무도 없는 민둥산뿐이었지요. 칭찬을 잘하는 성품을 가진 선교사님들이었기에,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와, 하늘이 너무나 높고 푸르네요!’라고 이 나라를 축복하며 기뻐했습니다. 오늘 속초에 강의가 있어 장시간 운전을 하였는데, 눈에 들어오는 산과 들은 내가 어려서 보아온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산은 나무들이 꽉 들어찼고, 하얗고 핑크빛을 내는 벚꽃은 온통 산을 뒤 덮는 듯 피어있었고, 개나리와 진달래도 함께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솜씨며, 그분의 축복 속에 이루어졌음을 감사하며 찬송하니 운전의 피곤함도 사라졌습니다.이렇게 우리나라가 축복의 땅이 되었기에, 우리의 가정도 더욱 축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뉴스에서는 충격적인 소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자녀를 모진 매질로 죽게 하고, 부모를 내 ◎⃝는 자녀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어린 자녀들의 뇌 발달 단계와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기준으로 생각하여 자녀가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운다고 생각하여 부모는 노를 발합니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은 뇌 발달과 언어발달을 위하여 눈만 뜨면 계속 움직여야 하고, 질문을 쉬지 말아야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탐험해야 합니다. 그러다 귀중한 것을 망가뜨릴 수고 물을 쏟을 수도 있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말썽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이를 구박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되기 전, 부모교육은 필수 과목이지만, 교회가 이를 앞장서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나이가 어린 자녀일수록 내 자녀를 잘 키워 효도하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부모님들의 소망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효도를 강조하는 민족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효도교육의 결과가 너무나 다르게 보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기에 유대인들은 모든 방면에 성공적인데, 특히 부모에 대한 경외심과 효도도 전 세계 일등일 수 있을까요?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성경 그대로 믿는 유대인들은, 산하제한을 하지 않기에 자녀가 보통 8명이 넘습니다. 큰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한쪽 의자는 항상 비어있습니다. 그 의자의 주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그러나 항상 그들과 함께 그곳에 앉아, 식탁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의 내용을 듣고 있음을 자녀들에게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들의 식탁 대화는 무척 친절하고 긍정적이고 화기애애합니다. ‘하나님은 해처럼 웃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웃는다!’는 그들의 철학대로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엄마와 아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말을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들려줍니다. 조부모에 대한 칭찬의 언어들을 듣고 자라는 자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상을 익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식탁에서 부모의 입을 통하여, 웃어른이나 선생님, 혹은 영적인 지도자나 이웃에 대한 불만 불평을 식탁에서 듣고 자라는 아이들은 효도의 뇌를 결코 키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키와 몸이 자라는데, 식탁에서 부정의 언어를 함께 먹는 자녀는 불행하고 부정적인 일생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나으니까요. 부모들이여! 오늘도 내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시급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부모들이 어떤 언어와 행동을 가정에서 행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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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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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13
- 주기적으로 성찬을 베풀려고 오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주인은 그에 관한 나쁜 비행을 듣고 격분하여,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심판을 빼앗아갔구나.” 그리고 황홀경에 잠겨 황금 우물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황금 두레박이 있으나 나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맛있는 우물물을 마실까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왜 우물물을 마시지 않는가. 물을 긷는 자가 누구면 어때? 그의 직책은 다만 두레박에 물을 채워 항아리에 붓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환상을 체험하고 그는 돌려보낸 사제에게 사죄하고 다시 성찬을 거행하여 주도록 간구하였습니다. 복음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된 선물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사랑의 편지를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너와 나의 소통을 기다리지요”.하나님 앞에서 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죄인이었던 내가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으니 의인으로 칭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함께 하여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탄을 이길 힘을 주시고, 의인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행복합니다. 나의 삶이 꽃보다 아름다워질 거라고 믿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영감을 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1975년 봄, 나는 ‘대학 신입생 장기 자랑’에서 마당극 ‘춘향전’의 변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 때는 바야흐로 춘삼월. 여기 대한민국을 행복으로 이끌 남녀 청춘들이 모였으니, 얘 방자야. 풍악을 울려라.” 할아버지가 물려 준 한복을 차려 입고 구성진 목소리로 장내를 웃긴 덕에 상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친구들은 나에게 회식 때마다 변사 역할을 하라 하였고, 나의 변사 역할은 참석자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에 힘입어 163가지의 상황에 따른 표정을 노트에 적어 놓고 연습하여 TBC 연기자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2차 면접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그만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예술적 끼를 발산시키는 일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예술적 끼가 있다고 칭찬하여 주던 어른들의 칭찬을 잊지 않았습니다. S예대에서는 방학중에 교사들에게 무용 강습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나는 기꺼히 거기에 신청서를 넣었습니다. 청일점인 상황에서도 나는 열심히 무용을 배웠습니다. 현대 무용을 비롯하여 고전 무용과 탈춤, 에어로빅 댄스까지 배워야 하는 빡빡한 일정을 나는 거뜬히 소화해 내었고, 고전 무용 교수로부터는 당신의 제자가 되라는 제의도 받았습니다. 나아가 나의 예술적 끼는 문학에서 제대로 발휘되어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첫째, 나는 어린 시절부터 광대 기질이 있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는 조숙하여 ‘성탄의 밤’을 준비하다가 옆에 앉은 여자 아이의 볼에 갑자기 뽀뽀를 하여 주변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고, 총각 시절에는 맞선 상대를 만나 음식점이나 다방에서 나올 때마다 빳빳한 만 원 짜리 지폐가 수십 장 들어 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하면서 상대에게 여유 있는 척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처갓집에 신선한 과일을 잔뜩 싣고 가다가 차에 펑크가 나서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가족들 앞에 자신감을 보이며 타이어를 갈아끼웠는데, 펑크난 타이어를 다시 끼우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나는 우둔하였습니다. 내가 포천군 일동면에 살 때의 일입니다. 초등 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매일 한두 시간씩 늦게 오길래 아내와 함께 담임 선생님께 사정을 알아 보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모든 과목에서 이해가 느려 한두 시간씩 수학과 음악 숙제를 하게 하고 하교시킨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글씨도 삐뚤빼뚤하게 써서 가정에서의 교육이 절실하다는 말까지 곁들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초등학교 1학년 때 글씨를 그렇게 썼다고 하였더니, 담임 선생님은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럼 아들도 가능성이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아빠가 초등학교 때 그랬으면 아들도 나중에 아빠처럼 박사학위를 딸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나의 우둔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총각 시절, 내가 우둔함을 안 까닭에 결혼은 시력이 좋고 영리한 여성과 결혼하여 영리한 2세를 낳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H여고에서 전교 1등을 하였다는 아내와 결혼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아들의 유전적 요인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취직을 못해 친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서도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일날이면 성가대석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표정을 짓고 열심히 찬양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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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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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12
- 후줄근한 바바리 옷차림으로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 놓다가, 날카로운 질문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LA 경찰청의 형사 콜롬보(피터 폴크 分). 드라마 도입부에 살인범이 먼저 밝혀지고, 범인의 완벽한 계획 범죄가 콜롬보에 의해 밝혀지면서 사건이 해결되는 형식의 형사 추리물인 <형사 콜롬보>. 이 드라마는 미국 NBC를 통해 1968년 2월 20일과 1971년 3월 1일에 2개의 TV 파일럿으로 소개된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는 NBC에서, 1989년부터 2003년까지는 미국 ABC를 통해 13개 시즌에 걸쳐 방영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80-90년대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습니다. 리차드 레빈슨 외 4명이 극본을 썼고, 빈센트 맥에비티 외 4명이 연출하였지요.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인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꼭 형사가 아니더라도 극적 반전을 하는 인물은 많이 있지요.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도, 안동 김씨 세력이 300여 년을 왕비를 안동 김씨 집안에서 간택하여 집권하는 동안, 잔치집에서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어리숙하게 보였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게 되지요. 안동 김씨 세력 등쌀에 시달리던 조대비가 대왕대비로서 다음 왕을 결정할 때에 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정함으로써, 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는 반전이 있게 되지요. 그가 어리숙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씨 왕족처럼 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죽었겠지요. 이와 같은 인생 역전은 짜릿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인간다운 멋을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은 반전에 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멋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과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멋있는 곳이지요. 그러나 그 나라를 언어로 설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나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비유, 산상수훈과 같은 역설로 그 나라를 가르치지요.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태복음> 13:34). 산상수훈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5:4)도 아주 훌륭한 역설이지요. 애통하는 자가 어떻게 복을 받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 깊은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게 되지요.예수님의 멋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 때에 바리새파와 부딪치지 않을 길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혼내지 않았다면, 로마 총독과 대제사장 등 정치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바리새파와 부딪치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대제사장이나 로마 총독 앞에서도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 준 것이 잘못이냐며 항변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상심한 제자들에게 몸소 찾아가 몸에 난 상처를 보여주며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이 함께 함을 알게 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며 아버지의 뜻을 성취한 아들의 멋이요, 인류를 사랑한 그리스도의 진정한 멋입니다.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많이 있지요. 1866년 평양 근처 대동강변에서 한 권이라도 더 조선에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조선군에게 잡힐 때까지 사력을 다해 강가로 성경책을 던진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이 땅에 병원과 학교를 세워 근대의 터를 닦아 놓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당신의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 등은 진정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거룩한 존재이지요. 이들 외에도 세계의 오지에서 열심히 헌신하는 선교사, 기도하고 말씀 보고 찬송하는 신자 들도 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멋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이 교회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며 동역자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받을 멋진 일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이지요.오늘도 나는 그리스도가 걸어간 거룩한 길을 반추해 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며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신 분, 가난하고 소외받고 애통하는 자에게 다가가 위로해 주신 분,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 분, 그분이 계시기에 나는 행복하고 낮고 천한 곳에서도 빛을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는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만나고 북녘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며, 주일날 진정한 예배를 통하여 주님과 만나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삶을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이제 조금 있으면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옵니다. 봄은 그동안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단단한 흙을 뚫고 일어서게 합니다. 이들의 생명은 주님이 세워 놓으신 세계의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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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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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3
- 얼마 전 가톨릭의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에 의전용 차량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논이 많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 회사의 S 차량이 낙점 되어서, 사람들은 정말 그분이, 우리 평민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타는 줄로만 아는 이들이 많았다. 국가적 이득과 한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 차량을 의전용 차량으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지만 성직자들이라고 한다면 생각이 많이 달라지리라는 판단이 든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처사가 일반 신도들의 눈을 가린, 깊은 신앙심을 이끌어내는 일에는 실패를 야기하진 않았는지......, 의전용으로 특별하게 제작되어 나온 차량은 세계 유일한 고가품으로, 말이 소형차이지 결코 소형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명예와 국가적인 위엄에 걸맞게 특수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용이라하면 아마도 이 세상에 가장 고가인 차량과 맞먹는 인력과 기술과 시간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마차를 타는데, 전통적으로 세상에서 유일한 고가의 비용을 들인 의전용 차량을 탔다면, 아마도 전통을 따르느라고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허지만 오늘의 종교가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의전과 전례에 숨어버린 후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드리질 못하였다. 오히려 세속적인 인기와 권력과 명예심에 고양되어서 본래의 자리를 떠나버린, 예수를 못 박아서 십자가에 매어단 그 당시의 사제들과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오랜 동안에 지구촌의 수많은 신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존 스토트 신부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기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유작이 있는데, 그의 평생의 삶과 신학과 믿음을 대변하는 글들이 간단하게 압축되어져 있다. 우리말로는 ‘제자도’라고 번역되었으나, 원제는 “The Radical Disciple”이다. 이 책은 마치 영국인의 신앙심을 구원선에 비유한다면, 마치 배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추와 같은 느낌을 같게 된다. 지난 20세기의 영국인들의 삶을 안전하게 인도해준 거대한 균형 잡힌 크루즈 선이라고 할까나?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안전감과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2차 대전에서 영국이 독일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외적 요인 보다는 저들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이란 것이었다. 존 스토트가 말하는 교회란, 거친 바다에서 맥없이 넘어져 침몰한 세월호 같은 류의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얼마 전인가 분당의 W 교회의 목사님이 이웃교회의 헌신예배에 오셨는데, 간편한 차를 몰고 들어오는 것을 청년들이 보고서는, 다들 ‘역시 저러니까......,’ 하였다는 소릴 들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몸집을 너무나 키웠다. 아무도 우리 교회가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커지는 바람에 아무도 이 사이즈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설계를 하질 못하였다. 세월호를 제작하고 운행하는 책임자들이 오로지 돈에만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밀려들어오는 것만 좋아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만한 구원선을 운행할 수 있는 항해도나 엔진이나 운영진이 부재하다. 크루즈 선을 운행하는 책임자라면 당장에 내릴 수 있는 조치란 무엇일까?아마도 세월호의 사고 기록과 전복의 요인들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무게 중심에 맞추어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인원과 물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어네스트 섀클턴이 남극 탐험 중에, 배가 부빙에 갇혀서 깨어지자, 모든 승무원들이 탐험대장 섀클턴의 지시에 따라서 ‘인듀어런스호’를 버리고 하선한다. 감당할 수 있는 짐만을 갖추고는 미련 없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데, 살아서 돌아오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하는 교회와 고향을 버리고, 심지어는 가족들마저도 챙기질 못하고 야반도주하다시피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가족들이 흩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잠자고 입을 것도 없어서 사경을 헤매었으나, 그 때 살아남은 신앙인들은 다시금 조국과 교회를 일으킬 수 있었다. 바울이 금고상태에서 로마로 가는 배에서 하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도 버려야 한다.” 그 후 저들은 살아서 로마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리려는 의지가 있다면, 시간적으로 선택권이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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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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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제37회 총회장 김재석(金在錫)목사
- 전라남도 광주 태생김재석(金在錫·1900~1959.10.6) 목사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1900년 초에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부 소속 배유지(Rev. Eugene, Bell, 裵柚祉) 목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1914년에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성실하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고 교회에 잘 다니는 그를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광주지역 선교부 책임을 지고 있던 배유지 선교사가 그가 설립한 숭일학교 초등학과에 입학시켜 졸업케 하였다. 이어 고등과에 진학 3년간 열심히 학업을 닦고 졸업하였다. 김재석은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과 논어 맹자 등을 통해 배운 유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새로운 근대지식을 맛보게 되었다. 그는 당시 숭일학교(崇日學校) 교장이었던 타마자(Rev. John Van. N. Talmage 打馬字) 선교사의 인격적 신앙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후일 목사가 될 마음을 가졌다. 숭일학교 재학시 학교 경건회 시간마다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억압받고 자유가 없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기독교인들이 할 일이라고 늘 가르쳤다. 이 때 완고했던 고집과 유교 사고방식에 꽉 사로잡혀 있던 그도 나도 선교사들처럼 일본 식민지 아래서 억압받으며 소망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조선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수십번 마음 속으로 하였다.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사안수이렇게 목회에 뜻을 두고 기도하던 중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930년 3월 제25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 동기들로는 나지환, 백남주, 이원영, 공성택, 이창호, 오윤호, 주남고 등 23명이 함께 졸업했는데, 그 중엔 제39회 총회장 이원영 목사도 있었다(한국기독교회사 총람, 이찬영 편, 소망사 1994. 서울 p.948). 김재석은 졸업하자 마자 고향이 가까운 전남 광산군 송정읍교회의 청빙으로 전도사로 부임해 사역하다가, 그해 9월 전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1931년 봄 3월 정기 전남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전도사로 시무하던 교회의 정식 청빙을 받고 송정읍교회 위임목사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교역(敎役)에 힘을 쏟았다.신천읍 온천교회 부임그가 목회를 잘 한다는 소문이 황해도 신천읍까지 알려져 1935년 김재석 목사는 신천읍에 있는 온천교회(溫泉敎會)의 청빙을 받고 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도로 목회지를 옮겼다. 이 교회는 1914년 3월 3일 설립된 신천읍 송도리에 있는 교회로, 당시로써는 자립교회로 성장한 교회였다(예수교장로회연감 1940년간, 예장총회 발행, 황해노회 교회현황 참고).그는 이 교회에서 4년간 목회를 하다가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같은 신천읍 내에 있는 동부교회(東部敎會)로 임지를 옮겨 시무하게 된다. 이 교회는 신천읍 사직리에 설립된(1933.2.18) 교회로 온천교회 보다는 조금 늦게 세워진 교회이나 교세는 단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을 맞이 했으나 한국사회는 준비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라 사회질서가 혼란에 혼란을 더해갔다. 북한지역에는 소련군이, 남한지역에는 미군이 각각 질서회복이란 명목으로 진주했으나 3년간의 해방공간의 무질서 속에 얼마 가지 않아 민족상잔의 상징인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남북 공히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였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의 힘을 빌려 공산당들이 공공연하게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미국의 스파이로, 미군들의 앞잡이로 몰며 공산당에 협력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특별히 조선기독교도연맹(朝鮮基督敎徒聯盟)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은 보통 고통을 받는게 아니었다. 공산당 탄압 피해 월남김재석 목사에게도 공산주의자들의 마수가 미쳤다. 몇 차례나 협력을 요청받았으나 신앙양심상 하나님을 배격하는 공산주의 무신자들에게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렵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와 교인들을 뒤로하고 1947년 10월 가족들을 이끌고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감시가 심해 몇 차례나 실패하였다. 얼마 후 인민군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고 전문 안내인에게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간신히 3·8선을 넘고 난 후 김목사는 두고온 신천읍 동부교회의 교인들을 생각하며 북쪽을 향하여 사죄의 기도를 올리며 안타까워하였다. 얼마동안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워했고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김재석 목사는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 서부교회(西部敎會)에 목회자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목사의 소개로 1948년 월남하던 이듬 해에 광주에 있는 서부교회에 부임하였다. 광주서부교회는 고향 출신 목사가 왔다고 반가워하며 전 교회가 대대적으로 환영을 해 주었다. 김목사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교인들을 돌보며 제대로 된 목회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였다. 이렇게 피난 나온 목사가 성공적으로 목회가 자리잡아 나가자 노회 안에 자연히 목회 잘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전남노회가 개회되었을 때 자신이 예상도 않았던 전남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광주제일교회 시무 중 6·25 맞아그는 노회장의 중책을 맡아 수행하던 중 광주제일교회(光州第一敎會)의 청빙을 받아 교회를 옮겨 목회하던 중 통한의 민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들은 삽시간에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와 7월 22일에는 전남 광주까지 점령했다. 김재석 목사는 이미 북한에서 공산당을 겪었기에 광주에서도 정상적인 신앙생활과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가족들과 교인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조국과 교회의 운명을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다 북한에 두고온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죄스럽기 그지 없었다. 전쟁이 유엔(UN)군이 참전해 반전의 기회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상황이 호전되자 김목사는 광주제일교회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온 김재석목사는 전남노회 노회장을 6번이나 역임하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교회당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구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7회 총회에서 피선그의 지도력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지 1952년 4월 29일에서 5월 2일까지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된 조선야소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혼란과 혼돈의 와중에서 그를 지도자로 뽑아 공산주의자들이 파괴하고 부숴버린 교회를 재건하고 정비하는데 최전선에 세워 한국교회를 재정비하는 일에 쓰시었다.그가 재직했던 조선야소교장로회 제37회 총회 의결사항들을 잠시 살펴보면, ①목사가 관공리나 국회의원으로 전직하게 되면 안수(按手) 목적에 위배됨으로 마땅히 성직(聖職)인 목사직을 사직해야 한다. ② 노회분립을 허락하기로 하다.(평양, 평북, 안주, 평동, 용천, 황해, 황동, 평서, 함남, 함북으로) ③ 목사자격 시취의 건에 대하여서는 비상사태로 선언하다. 김재석 목사는 탁월한 언변과 행정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구비해서인지 총회장으로써만 아니라, 총회 정치부장으로 섬긴바 있고, 여러 기독교협의체의 의장직과 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으며, 총회장이 되던 해에는 교단직영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 이사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광주숭일중고등학교장에 취임 봉사하기도 했고, 1957년 4월에 총회산하 지방인재 양성기관으로 세운 광주신학교(光州神學校) 교장에 취임, 지방교회 인재 양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959년 10월 16일 가족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그리고 그리던 주님의 품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민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한영제편 1981, 기독교문사, 서울 초판 p.2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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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동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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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제37회 총회장 김재석(金在錫)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