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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과 함께 한 교회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적인 문제의 이념들을 앞에 두고 무엇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선교의 목적이 비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소외받으며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고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선교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세워 주신 권세 앞에서 군림하던 나쁜 권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에 귀 기울이어야 한다. 한 민족이 둘로 나누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동안 한국교회는 서로 사는 삶의 사랑의 선교를 하지 못했음을 통해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지금 우리는 단절된 분단의 시대를 거쳐서 민족통일과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서로가 군사력의 힘으로 과시하며 살아왔다.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들이 국방을 위한 군사력에 집중 되어 왔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한편 기술적, 경제적 발전은 노동력의 질적이고 양적인 개선에는 상관 않고 발전된 산업사회로만 지향하는데 몰두하여 삶의 질 향상과 발전에는 외면한 체 요즘 두드러지는 현상에서 정치활동의 리더들의 추태와 가치체계의 지배 논리가 땅에 떨어지는 현상들은 이 나라의 희망을 저하시키고 있음에 오늘의 교회는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하는 지를 묻고 싶다. 이렇게 사회적인 현실과 정치적인 문제들로 오늘의 우리 사회는 대립과 갈등의 분석을 통해서 사는 사회의 삶에 세상을 보는 교회가 어떤 처지에서 무엇했는지를 알게 한다. 지금까지 공존이니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니 등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난 “7.4 공동성명”은 상호가 서로 준비 없이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곧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동형화해 가는 과정을 의미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여기에 냉전이라는 가혹한 대립을 6.25 전쟁을 통하여 그 현실을 양쪽이 모두 비극을 이데올로기 투쟁을 맞게 되었음을 체험하게 됨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6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데올로기는 자유세계의 지식인들과 제3세대의 지도자들과 믿음의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외치어 왔음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민중)”과 지배층을 가리는 말로 쓰였으며 백성과 지식인, 백성과 계급, 백성과 대중, 백성과 시민으로 백성이라는 말은 옛말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로 지난 날 사대부가 아닌 일반 평민을 이르던 말이었다. 즉 지난 옛날 사대부가 아닌 일반 평민을 이르던 말로 쓰였다. 우리가 성서에서 예수님의 수난사를 보면 예수님의 수난사는 그대로 하나의 투쟁사임에는 틀림없으며 예수의 해방운동이 백성을 억압하는 지배층과 싸움을 의미함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원수로 치부하지 않고 백성 해방을 위한 비판의 대상으로 상대하여 이들을 구원함에 그 의미를 가진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구원의 그 의미가 {역사의 예수} 안에서 그에게서 구체적인 실상으로 그를 알게 한다. 예수의 수난사는 그대로가 투쟁사임에는 맞는 말이나 그것은 증오의 폭발이나 힘의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고 맨주먹이나 몸으로 힘의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고 악순환의 역사 속에서 죽음으로 증오와 복수의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자기희생의 대가임을 “민중 신학”에서 알게 한다. 이와 같이 만시지탄이지만 국민의 정부로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의지가 사회 전반에 이루어져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는 기도해야 한다. 이는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서 살피면 역사적 정치적 구원을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보게 한다. 이렇게 남과 북의 삶의 현장에서 문화와 질서를 창조하는 교회는 그 주역이 되어 그리스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새로운 문화와 질서를 창조하는 ‘하나님 선교’라는 입장으로 문화와 질서의 주역으로 교회가 되어야 함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8-27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7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47. ‘기득권’과 ‘명예욕’을 극복해야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2~15).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성결절은 하늘의 천사장이었던 루스벨(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긴 배경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피조물이었던 천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다른 천사들을 포섭하고 미혹하다가 타락하여 죄악의 장본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루스벨의 심리는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성직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때로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기독교의 성직은 부르심으로 시작된다예수께서 30세가 되셨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셨던 일 중의 하나는 앞으로 그분께서 명하시는 사명을 이루고 성취시킬 제자들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인간의 내면세계와 동기와 기질과 됨됨이를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는 현재의 위치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동기와 미래의 변화될 모습을 보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열 한 사람을 불러내셨다. 그런데 한 사람이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천하여 나섰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가룟 유다가 가장 유능하고 쓸 만한 인물로 보였다. 다른 열 한 제자들조차도 유다 같은 사람이 자기들과 함께 예수의 제자가 되어 자기들의 수준이 평가절상(平價切上)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후일의 결과는, 예수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였고, 스스로 나서서 제자가 된 유다만 실패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이루실 때에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에 약하고 미련하게 보이는 자들을 택하여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그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을 불러내시는 기본적인 개념이다.하나님의 일꾼이 되고자 스스로 나서는 사람들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 이와 같은 원리에 비추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서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과정이나 방법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나서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지만, 금전을 사용해 가면서 사람들을 포섭하고 자기를 지지하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성직매매와 같은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한 방법과 절차를 거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일하는 기간 내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욕구와 욕망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연약한 인간의 속성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업이 인간 중심으로 변질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소위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면, 자의건 타의건 간에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적 욕심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면,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을 따라 가면 되는데, 출발이 부르심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도 부르심을 따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고리가 이어지고 있는 한,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이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인간 중심으로 일을 할 때에 성령께서 함께 일하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을 육의 힘으로 이루려고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는, 혹시 외관상 발전하고 부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영의 역사가 아니었음이 드러날 것이다(롬 8:7~9).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육적인 본성으로 교회를 지도하고 있는지를 날마다 면밀히 살피면서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아가는 신령한 종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높이고 싶은 자만심,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권력을 갖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명예욕, 이러한 본성적인 인간의 욕망들은 성직자 자신과 교회를 약화시키는 독소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는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와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초기 교회 제자들의 경험이 부흥의 초석이다예수의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받던 3년 반의 기간 동안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형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예수님이 왕권을 회복하면 최측근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던 제자들의 모습, 십자가를 앞두고 모두 도망했던 비겁한 제자들, 그의 선생을 심문하는 법정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 이러한 면면을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다음, 전혀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예수님 승천 후,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였던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타났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에게 보여진 자신들의 모습에 대하여 한없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전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던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었는지를 통절하게 깨달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하면서 회개하고 한 마음으로 연합되기 시작하였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교만심과 자고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한 연합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자아가 죽고 깨어지고 그 속에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실 때에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남이 먼저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나는 죽었는데 상대가 안 죽은 것 같다고 다시 살아나면 헛일이다. 상대방에 상관없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살 길이고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이다. 제자들이 그렇게 서로 회개하면서 자신을 낮추었을 때 연합이 일어났고, 연합하게 되었을 때선교적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닫고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임하였다. 이제 그들은 담대한 믿음과 용기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여 짧은 기간에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 나라들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제자들의 경험이 필요하다. 부르심, 십자가 경험, 회개, 연합, 기도, 성령충만, 복음전도, 이것이 부흥과 개혁을 위한 수순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8-27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2
    그분이 내 안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타자로서 나의 편협한 생각을 해체하고, 보다 너른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 그분으로 인하여 나는 마음과 우주 사이를 오가며 영혼의 여행을 하게 된다. 그분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낮은 곳에 머물러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고,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음을 알려 주셨다. 나는 그분으로 인하여 내 안에 완악하고 음흉한 마귀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퇴출시켜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강한 의지와 인고(忍苦)의 힘을 주시며 나를 단련시키셨고, 물신주의보다 우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다. 나는 그분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려는 용기를 얻었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행복을 얻었다.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됨으로 행복하였던 것이다. 애굽땅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생각난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하러 형들에게 갔다가 그 형들의 질투로 인하여 큰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고, 지나가던 상인들에 의해 발견되어 애굽에 팔려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면서 출중함을 보였다. 그의 주인인 보디발은 자신의 집 모든 행사를 다 맡겼다. 그러다가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준수한 요셉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동침하기를 요구하였다.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다시 동침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요셉이 이를 뿌리치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요셉의 옷을 보디발의 아내가 취하게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는 이를 가지고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남편에게 고함으로써 요셉은 모함을 받아 왕의 죄수들이 거하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는 요셉에게 꼬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에게도 기회가 왔다. 그가 옥에 갇혔을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애굽 왕에게 범죄하여 친위대장의 집 안에 가두니, 그곳은 요셉이 갇힌 곳이었다. 요셉은 거기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여, 그 관원장이 다시 복직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창세기> 40:14-15).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고 있다가,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자신의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자 요셉을 추천하였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제대로 해석하여 애굽땅에 칠 년은 풍년이 들고 그 다음 칠 년은 흉년이 들므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창세기> 41:33)라고 권합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요셉에게 일어났던 꼬이는 일과 축복받은 일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의 편에서 해석하는가, 세상 편에서 생각하는가에 따라 개인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의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내가 그분의 자녀임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시요 절대자이신 그분은 나를 행복의 세계로 이끄셨다. 그분은 남을 배려하는 삶이 멋짐을 알려 주셨고, 배려로 인하여 생긴 기쁨을 나의 것이 되게 해 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생긴 기쁨을 예쁘게 보아 주셨고, 나는 그분 앞에서 더욱 멋진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분은 죄를 씻는 길을 열어 주셨고, 내 안에 있는 사탄을 몰아내고 나로 하여금 의인의 옷을 입게 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의인으로서의 멋을 알게 되었고,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고 묵상함으로 그분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함으로 행복하였고, 나에게 주어진 행복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지난 생애가 그분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는 이상 삶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었다. 나는 그분이 이 나라를 평화의 세계로 이끄실 뿐 아니라, 세계 평화의 계획도 가지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분은 나에게 순수를 선물로 주셨고, 청춘 시절에 열정의 물을 부으셨으며, 장년 시절에는 유우머가 있는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삶을 재미있고 진지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분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게 왜 아름다운지를 알게 하셨고, 몸소 최고로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다.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음식을 여러 자리에서 제공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소경과 미친 사람을 치유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고,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할렐루야.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8-23
  • 목회는 쉬운 것이다·69
    개혁주의가 어떤 역사적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혁주의의 주제인 5대 솔라(Sola)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이라는 삶의 방법입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방법이 영을 말살시킵니다. 방법과 이론이 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우리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부터 말하려고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이야기를 군더더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사실 속에서 생활이 된 아담이었습니다. 그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몸으로 머리와 지체로 유기적 관계로 행복한 삶의 법칙 속에서 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구약적 제사장이 중간에 끼어들게 했습니다. 그래서사제가 중보자 역할을 다시 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시작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계없이 전통을 다시 고수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개혁자가 바른 이야기를 했는데도 오늘날 목사가 물려받는 이유가 목사의 삼직입니다.오직 성경의 순수함을 제사장이 재해석하여 줍니다. 분명히 주님은 우리의 머리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삼게 한 사람들에게 거룩이란 단어로 갈라놓는 일에 능숙하게 되었습니다.그리하여 오직 다음에 제사장이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그리스도 사이에 오직 믿음 사이에, 오직 은혜 사이에, 오직 영광 사이에 제사장이 만든 제사법칙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의식을 만들었습니다.어떤 한심한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라면과 같다. 라면만 물에 넣고 끓이면 아무 맛이 나지 않기에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각종 수프를 넣으므로 라면의 맛에 특성이 있고 맛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은 뱀 중의 독사로 생각했습니다.오늘 현대의 혼란이 바로 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군더더기는 시날산 외투 한 벌처럼 명품적 요소에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온갖 사상이 하나님의 순수함에 흙탕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순수함, 즉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화 시키는 이런 사람들이 목사일 수 있는 것입니다.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헤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사장으로서 목사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또 하나의 논설이나 학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통하는 생명의 역사는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지금 제사장으로서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유치하고 어설픈 그림들이 나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인해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입니다.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아닌 신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성공의 우상을 수없이 만들고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비전성공, 목적달성, 꿈, 형태, 공력, 연민, 인간적 사랑, 수없는 환상적 형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매매하고 있습니다.망령되이 일컫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복적인 도구로 사용합니다. 복 주는 이름으로 염불 외우듯 기도라는 이름으로 뇌까리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정한 날을 위해 성전으로 둔갑하여, 예수께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하나님은 영이시되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그뿐 아니라 제사장이 된 목사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했는데 바벨탑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으로 쪼개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벽돌을 만들고 있습니다. 비겨서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끊임없는 프로그램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고 했는데 조직과 자신의 철두철미한 계획으로 자기의 목적 달성에 정력을 쏟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정하게 되고 하체가 드러나는 비참한 죽음임을 말했습니다(출 20:23~26).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8-23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46
    46. 기독교신앙이 무너지는 이유 기독교신앙의 근본은 성경이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성경 말씀에 충실할 수록 든든해지고 성경에서 멀어질 수록 약해진다. 오늘날 기독교신앙이 현저하게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나 성도의 삶이 성경의 말씀 중심에서 이탈해 가고 있거나 말씀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원인들 가운데 우선 일곱 가지 이유를 선별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1. 감성신앙을 선호하는 그리스도인들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을 지을 때에 땅을 파고 기초를 놓는 것과 같다. 기초 없이 지어진 집은 곧 무너진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17:3)라고 하였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구원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통성기도나 어떤 열광적인 집회에서 마음에 뜨거움을 느끼면 그것이 구원을 받은 표시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신앙에도 감성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앙에도 지(知) 정(情) 의(意)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知)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말씀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감동(情)이 필요하다. 그 다음 단계는 믿음을 가지고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意)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신앙이 든든하게 성장하게 된다. 2. 성령에 대한 오해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능력을 더하시기 위함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리고 성령께서 하시는 또 다른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이와 같은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그리스도인 삶에 맺히는 열매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이다. 3.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습관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제물이었다. 가인의 드린 제물 농산물은 ‘인간의 공로’를 상징하는 것이고 아벨이 드린 피 흘리는 양은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값진 교훈이다. 더 나아가서 가인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림으로 외형적으로나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의 형편이나 사정에 맞춰서 자기 나름대로 신앙의 기준을 정하여, 원래의 말씀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목회자들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깨우쳐 올바른 길도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4. 표적과 현상을 추구하는 신앙인간의 상식이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적(異蹟) 혹은 기적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기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도구가 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적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양식 만나를 40년 동안 매일 먹었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이적을 보면서 살았지만 그들은 쉽게 배도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탄도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므로, 목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쳤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나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믿음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5. 온전한 헌신의 부족“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 말씀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죄된 성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려면 전심전력을 다 해도 늘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부업이 아니라 본업이다. 그야말로 올인(all in)해야 한다. 한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사람들과 친교를 나눈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일반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다가 다시 또 교회에 나와서 동일한 일을 반복하고 산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변화되는 삶을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올바른 신앙심으로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기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포기하고 순교한 사람들, 참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토굴에서 광야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오직 하늘을 바라고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왜 온전한 신앙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가?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희생하며 헌신하는 신앙의 회복되어야 교회가 살아날 것이다. 6. 가라지 신앙의 보편화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고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자신의 신앙이 자라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도 장애가 되고 시험거리가 되는, 영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가라지’ 혹은 ‘쭉정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인간의 죄된 성향 때문에 교회 안에는 언제나 알곡보다 가라지가 다수를 이룬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다수를 아우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라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편안하고 안일한 설교를 해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설교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다 보면 교회의 전반적인 영적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가라지’를 기준으로 하는 신앙의 분위기가 보편화되어 간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의 기독교신앙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7. ‘말씀’에 대한 무지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심도 있게 열렬히 연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질문을 가져오는 ‘성가신 교인’들에 대하여 부담을 갖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교회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무지가 편만하다. 구원과 영생의 원리나 도리도 모르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도 점점 모호해진다. 소위 기성교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들이 오히려 성경을 더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조직적으로 한다. 성경을 깊이 알고 싶어하는 많은 지성적인 교인들이 그런 교회들을 찾아 떠난다. 그곳에 가서 잘못된 교리들을 조직적으로 배우면서 이단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요즘 한국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말세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호 4:6)한다고 하신 말씀이 이렇게 성취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시 힘을 얻어 부흥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8-09
  •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험되어지는 은총이다. 인간은 경험되어지는 은총으로 그 삶을 성서에서 배우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수난)으로 이끌어 가는 잠재적 그리스도로 구원의 자리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오늘의 본문 요지에 근거하여 잘 드러난다. 사람은 원래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하느님이 창조자이심으로 그 하느님은 사람의 궁극적인 실재이시기에 그 삶의 모두를 거두시는 생명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시며 그 삶의 존재가 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삶을 사는 과정에서 사람은 언제나 그 궁극적인 실재 앞에 서 계시는 하느님은 항상 임재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전 지구적 가난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소식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삶도 생활자금을 대출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듣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실적 삶에 대하여 잠언의 지혜는 해결의 실마리를 말씀해 주고 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여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혔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인간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를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알게 한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거룩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는 (고전15:54-58) 말씀을 얻게 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이렇게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삶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뉴스와 신문을 통하여 전 지구적 가난과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소식을 듣지만 남의 이야기로 들일 뿐이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지나간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이란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본연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1890년 말 대기근이 러시아를 덮쳤을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삶에서 실천한 작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톨스토이주의’가 잘 드러나는 그의 후기 작품이다.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곳곳에 숨겨진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삶의 지혜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이를 포함한 10편의 동화 같은 단편들은 간명한 이야기이기에 선명하게 보이는 선과 악으로 우리의 복잡한 현실을 더 쉽게 돌아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8-0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81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토를 많이 확장한 왕으로 꼽힌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는 데 사용할 백향목이나 대리석 등 최고급 건축 자재를 그의 재임 시기에 이미 구비해 놓았다. 그러나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건축 꿈은 솔로몬왕 때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역사는 ‘하나님의 때’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고증하였다. 최근 들어 황혼 이혼을 하는 부부가 없지 않다. 일본에서는 노년의 여성이 남편의 퇴직 때를 기다려 이혼하고 위자료를 받아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노년을 보낸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노년이 되면 남자들의 신세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 남자가 사는 곳은 요즘 재개발 붐이 한창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파트와 오피스텔의 건물들 층수가 뚝딱 하고 올라간다. 건물 외벽이 4층이 되었다가 10층이 되었다가 어느새 고층 건물의 뼈대가 완성된다. 버섯이 자라는 모양이 속성 사진으로 찍힌 것처럼, 고층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선 다가구 주택들의 밀림 사이로 해가 바뀔 때마다 솟아난다. 그 남자는 버섯 모양 솟은 고층 건물과 앉은뱅이처럼 낮은 다가구 주택 사이에서 산다. 그 남자가 산보를 하다 보면 그는 마치 20세기와 21세기 사이를 롤러코스트 타는 기분이 된다. 그 남자의 아파트는 높은 빌딩과 낮은 집들 사이에 있다. 조금 오래 된 아파트 입구부터 중앙 광장에 이르는 길가에는 제법 우람한 측백 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여러 색깔의 영산홍이 정원 울타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남자는 길을 따라 가다가 광장의 400년 된 느티나무를 지난다. 나무 한 쪽은 어린 아이가 들어앉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나무도 나이 든 티가 난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전철을 타면 경로석을 기웃거릴 만큼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젊어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새 날개짓 모양의 무용을 하긴 한다. 그건 순전히 그 남자의 마음에서 형성된 주관적인 몸짓이지, 전문적인 예술가의 공연은 아니다. 하기야 예술가의 무대라고 따로 한정된 것은 없다. 그 남자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장년이 있었다. 그 남자는 신혼 시절을 생각해 낸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아내가 예쁜 쟁반 위의 작은 접시에 사과를 내 온다. 예쁘게 벗긴 사과 껍질이 토끼 귀 모양 예쁘다. “당신도 들지 그래요.”“난 나중에 들테니 먼저 들어요.”아내의 말이 매우 공손하다. 그 남자는 신문을 들여다 보면서 포크로 사과를 찍어서 입에 갖다 댄다. 아랫목에 앉은 그 남자의 모습은 제법 의젓하다. 신혼 시절 이후 삼십 년이 지났다. 저녁 식사 후 아내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한다. “여보. 사과 좀 깎아줘요.” “음? 으응.”그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껍질째 먹을 테니까 수세미로 박박 밀어 깨끗이 씻어요.”그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지? 그 남자는 어느 순간 바뀌어 버린 부부의 위상을 헤아려 본다. 그때가 아마 아내의 폐경기가 지났을 때부터인 것 같다. 그 남자에 대한 아내의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어 있다. “나도 당신 만큼 직장 생활 했으니까 우리 집안 일은 반반씩 나누어서 합시다.”아내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건 이제까지의 관습에 비하면 좀 심하다.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아내가 가사(家事)를 책임지는 편이다. 대개 아내가 요리를 하고, 청소와 세탁과 설거지도 한다. 그것이 남편이 삼십 년 이상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가정을 책임진 데 대한 보상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은퇴를 하고 나니 아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것도 많이 달라졌다. 은퇴 후, 아내가 그 남자에게 내민 것은 앞치마 두 벌이었다. 그것도 전철 안에서 산 비닐로 된 앞치마였다. 하나는 빨간색, 다른 하나는 군청색. 그 남자는 그걸 받아들고 뻘쭘하였다. 그리고 못내 섭섭하였다. 이건 아니다. 여기서 물러섰다간 앞으로 가정에서 아내의 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단호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대부 역할을 하는 형님인 S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최근 그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알렸다. 그 남자의 말을 듣는 S의 태도가 자못 진지하였다. S는 다소 신중한 태도로 그 남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 주었다. 그 남자는 S에게서 명쾌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남자가 S에게 귓속말로 물었다.“형수씨는 형님한테 그러지 않지요?”형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까 남자가 아내 앞에 바싹 엎드려지내야겠더라. 아마 여성이 폐경기가 지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생겨 강해지나 봐.”그 남자는 생각을 정리하였다. 남자가 나이 오십이 지나면 아내 말에 잘 따라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보다. 그 후 그 남자는 가사(家事)를 열심히 하였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8-09
  • 목회는 쉬운 것이다·68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알고 있는 것이나 아는 척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에서 온 것인지 네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가 예수쟁이라면 양심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너는 네 속마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있지 않으냐? 지금 치매나 변비 환자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눈이 밝아지기 위함인지,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너 자신은 알고 있지 않으냐? 라는 것입니다.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가? 목사가 제사장인 척하고 있지 않으냐? 너는 네가 치매인지 변비인지 자기증상에서 알고 있지 않으냐?지금 우리의 유창한 변론 속에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느냐? 정말 양심적으로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입니다. 왜냐하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내 것이 아니어야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곧 우리의 자유이면서 수월함입니다. 생명 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즉각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가진 특성이 보내신 이의 것이기에 상대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상황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명입니다. 사명은 자아의식이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입니다.지금까지 꿈을 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유 없는 극단적임을 말했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결국, 우리가 수다스럽게 말하고 밤새워 써놓은 글들의 목적은 자기영광이라는 것입니다.성경공부를 시키고 은혜로운 설교라고 해도 상담하고 바르게 가르치려고 하는 모두가 나 잘난 것에 대한 변증입니다. 그런 것들 모두가 우리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겸손하게 “내 생각입니다”라는 말 자체도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만일 진정한 주님과의 관계라면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의 변화일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형편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지금처럼 핸드폰을 하고 문자를 보내겠습니까?지금까지 행한 일은 자기가 빠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참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됨에 대한 결과가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불의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자체에서 믿음의 진정한 의미가 불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의 증거는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학문 자체가 남의 이야기와 자기의 변호이며, 합리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곧 생명적인 삶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확신을 주는데 곧 실천법칙입니다.사랑이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입니다.희락이란 자기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화평이란 자기의 손실에 무관심한 것입니다.인내란 자기 곤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자비란 자기권리를 눈감아 두는 것입니다.양선이란 자기감정을 억제하는 것입니다.충성이란 자기를 억제하는 것입니다.온유란 자기 장점을 잊는 것입니다. 절제란 자기욕구를 억제하는 것입니다.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 희락, 화평이고, 사람 관계에서는 인내, 자비, 양선입니다. 나 자신에서는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가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입니다.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8-09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45
    45. 복음이 상품화 되고 있다스데반 순교 이후,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초대교회 시절,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성령 충만한 빌립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그 성에서 유명한 마술쟁이 시몬도 세례(침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녔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전도에 합세하여 침례 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본 초신자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 8:18,19) 라고 요청하였다. 시몬은 ‘성령’을 상업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먼저 자신이 약간의 자금을 투자하여 그 ‘성령’이 임하게 하는 능력을 구매하면,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성령’을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으로 착각한 것이다. 형태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오늘날 현대 교회가 ‘복음’을 고객(교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새로운 상품으로 계발하고 변형시켜 판매(설교)하는 일이 보편화 되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이 능력이 상실되고 고객들의 구미에 따라 다양한 상품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의 궁여지책(窮餘之策)인가“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행 2:42)는 것이 초대교회 성장의 핵심 비결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늘 함께 거하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행 2:44~47)으면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그 당시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47절)므로 교회가 성장한 것이다. 교인들의 연합된 모습, 그리고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성도들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구제와 봉사의 삶,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교회 성장의 동력이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고 사람의 상태는 달라져도 복음이 퍼져나가는 원리는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의 정신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채,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와 논리로 교회를 성장시켜 보려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마케팅 정신이 교회 성장 원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교회 건물을 고객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어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도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 세속적인 요소를 다분히 첨가시켜야 한다. 물론 설교도,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에 피곤하고 지친 상태로 교회를 찾아온 손님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하고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도록 구색을 잘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주일에 또 교회에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이 기준인가 ‘사람’이 기준인가성경의 내용은 대체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함께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 간의 투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뚜렷한 현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타락’과 ‘회복’이다. 인간은 타고난 죄악성 때문에 계속 악으로 기울어져 넘어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일으켜서 세우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타락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율법’ ‘계명’ ‘교훈’ ‘말씀’ 등의 단어로 표현하며, 그것은 어느 시대나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바로 세우시는 말씀의 원칙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처럼 불변이다. 그래서 그것을 불변의 진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사람의 형편이나 환경에 따라 변형, 혹은 변질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세상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성장과 교회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양보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죄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거나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 ‘진리’의 말씀은 가려두고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들을 묘하게 모자이크 하여 원래의 뜻이 왜곡된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공의’가 없는 사랑, ‘순종’이 무시된 은혜가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오도(誤導)하고 있다. 고객(교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교회의 노력은 교회 운영의 여러 측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설문으로 고객의 필요를 조사한 다음, 교회는 그 욕구를 채우는 일에 아무런 원칙 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 까페를 설치하는 것은 이제 기본이고, 심지어는 흡연실까지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의 어느 교회는 대예배실을 레스토랑 분위기로 꾸며서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식사를 하면서 웨딩홀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러한 편의를 제공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그러한 분위기나 편의시설에 이끌려 모여든 교인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성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은, 전하는 복음마저도 고객 중심으로 변질되어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력 있는 복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지식인들의 시각은 매우 냉소적이다.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는 교회, 회사처럼 운영되는 교회, 사장처럼 보이는 목사를 보고 사람들은 무기력한 교회를 비웃거나 경멸한다. 결국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기초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터전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의 몸”(엡 1:23)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를 … 교회의 머리”(엡 1:22)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 용서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도록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쳐주고, 그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역할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성경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건의 연습’(딤전 4:7,8)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불신하고 불순종하면 심판과 멸망이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가르쳐 줄 책임이 교회에게 있다. 이러한 엄연한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엄숙하게 경고하였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이제 우리 교회를 책임진 지도자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양심적인 대답을 하여야 한다. “교인들이 만족할 때까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인들의 상태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질 때까지 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고 변화되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7-26
  • 목회는 쉬운 것이다·45
    우선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 분이 조선일보에 소개된 것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분의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답변이 “농촌 목회요? 그냥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거죠.”그 냥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냥이란 말을 잘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이 목회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간암 수술을 세 번째 했습니다. 그다음 검사에 왜 자꾸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독촉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의사와 면담 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물어보았습니다. 10여 년이 넘도록 만난 담당 의사의 딱 한 마디, “함께 사는 겁니다”라는 귀중한 답변을 들었습니다.만일 나에게 목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저는 그냥 대충 사는 사람입니다.이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영화 상영하고, 어르신들에게 컴퓨터 가르치고, 미생물을 이용한 농업 기술을 강연하고, 수목 조성과 들꽃 축제를 열고, 아이들과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등하교 버스 운전까지 한다는 것입니다.이런 일을 하는 분은 보령시 천북면 들꽃마당시온교회 김영진 목사입니다. 들꽃마당시온교회는 들꽃과 나무천지인 평화로운 농촌교회의 담임인 김영진 목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바쁜 목사입니다.주민들이 내 집처럼 교회에 드나들도록 활력을 불어넣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끊어다가 스크린을 만들고 빔프로젝트를 사서 영화 상영을 하여 노인부터 동네 꼬마까지 예배당 ‘마을극장’으로 모여들게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네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동네 사람들과 추수한 것을 모아 감사하고, 고기도 굽고, 전도 부치고, 두부도 하고, 송편도 함께 하여 교회마당의 들꽃들의 이름을 배우고, 힘을 합해 들꽃 축제도 열어 보령시에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재정도 지원을 받았습니다.다른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습니다.“농촌목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도시 교회처럼 생각해서 혼자 열심 내고 그러면 3년을 못 넘기고 좌절과 실망, 낙담해 떠나게 될 것입니다.“농촌에 오면 농촌의 속도로 사는 게 좋습니다.”농촌교회는 주민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제대로 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낙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목회는 의욕이 아닙니다. 내가 처해진 환경에 흐름을 같이 타야 합니다.종교적 열심을 말할 때에이슬람교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이슬람교의 기본원리는 6신(信) 5행(行)이 있습니다. 즉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행합니다.6신이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선지자이다, 꾸란 만이 성전이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재림을 믿는다, 심판을 믿는다.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모방해 창시된 것입니다.5행이란 신앙고백입니다(항상 중얼거리면서 신앙을 고백한다). 기도입니다(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한다). 금식, 구제, 성지순례입니다.이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 종교의 하나일 뿐입니다. 알라라는 신에 맹종할 뿐 그 열심히 결국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로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오일머니라는 검은 물결의 세계에 깊이 잠입하고 있음은 무서운 사건임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신앙생활이란 열심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생활이 이방 종교와 이단들의 형태로 바뀌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목회도 대부분이 열심히 했다고 고백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힘을 다했다고 말하면서 목회 성공을 회상합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결과가 현재의 성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것이 무슨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인가 말입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출처가 자기 자존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말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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