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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0
-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은 자신이 신에게 바치길 위해 작곡한 NO.9 교향시를 친히 연주하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이제 세상은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비록 청각기능을 모두 상실하여서 듣지는 못하나, 친히 그의 손에 지휘봉을 잡았던 것이다.“환희여! 환희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모두 정열에 흠뻑 취해/ 빛이 가득한 지성소로 들어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놨던 자들을, 당신의 신비로운 힘이 결합시키도다!/ 당신의 부드러운 날개가 드리운 곳에 모든 인간들이 형제가 되도다!/ 위대한 하늘의 은총을 입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인의 따스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의 환희를 마시라...,”“환희는 입맞춤,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땅을 기는 벌레조차도 환희를 맛보고,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태양이 광활한 하늘의 궤도를 즐겁게 날듯이,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형제여, 그대의 길을 힘써 달리라/ 모든 사람들은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이여 입 맞추라!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으니, 억만 인들이여, 엎드리어 경배하라! 온 세상이여,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라!”베토벤은 연주석에 숨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서 성공리에 교향시 연주를 마친다. 그의 교향곡 NO.9을 듣는 청중들은 감동과 선물을 이미 신으로부터 풍성하게 받아서인지,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흘러내리고, 왕의 가슴에도 짧은 시간이긴 하였어도 오래간만에 평화와 기쁨의 기름부음으로 가득히 채워졌다.한 지인이 지난해 정초에 어느 예배당에서 찬송을 드리는 중에, 동영상 같은 장면을 잠시 보았다. “통일 군(群)이 바로 성루 앞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기도할 때마다 멀리서 가물가물하게 보이던 행렬이었는데, 이제는 선명하게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성으로 들어오려는 군대의 행렬과, 드높은 깃발들이 펄럭이는 가운데, 줄을 지어서, 도성을 향하여, 군대가 행진하여, 도성의 열린 문을 향해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달 후, 저가 예배당에서 새벽 두시 즈음에 결코 잊힐 수 없는 동영상을 거듭 보게 되었다. “황토 빛이 아침 햇살에 밝게 비취는 십차선 즈음 되어 보이는 신작로로, 북쪽 언덕에서 남쪽을 향하여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는데, 어떤 부인은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또 다른 손에는 아이를 붙들고, 어떤 이는 지게에 짐을 한껏 지고, 어떤 이는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어떤 이는 리어카에 짐을 가득하게 싣고서 아랫길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거대한 행렬이 밀려서 밑으로 내려들 오는데, 얼굴들이 저마다 잔치 집에 가는 양 함박꽃이 활짝 피듯이 웃음들이 얼굴에 가득하였는데, 마치 성소에 오르는 이들 같았다. 이러한 광경은 70년 전, 8.15가 되던 날과 다르지 않았다. 이 땅에 다시금 환희가 찾아온 것이었다.”“사람들이 북쪽 언덕에서 나타날 때에 하늘에서 베토벤의 웅장한 교황시가 연주되었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함을 입은 자로다! 하였다.” 이 같은 장면은 마치 우리 민족의 통일이 아주 가까이 온 것임을, 우리의 가슴들이 저마다 이미 알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리라.베토벤은 그의 마지막이 가까워 온 줄을 인식하면서 그의 하나님께 송영을 올리기로 결심한다. 시간이 꽤 걸리긴 하였어도, 그의 마음에 전심으로 신께 바치려는 송영은 비로소 열매를 맺어 교향시 NO. 9 을 완성하였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땅에 살고 있는 온 인류와 피조물들이, 가혹한 역사의 현실에서, 치유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서로 소외되어 있음을 실감하였다. 상처와 분노와 미움으로 인해서 질곡이 깊어진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인해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리라. 베토벤이 하나님께 올리는 송가란, 송가 자체가 아니라 송가의 내용이 이뤄짐으로써 비로소 송가가 되는 찬미였다. 인류와 피조물들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기쁨을 가득히 안고서, 영광이 가득하게 빛나는 지성소로 들어가,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주님께 경배하는 것이 그의 송영이었다.8.15 경축 70주년을 맞이해서, 교회들이 서로 모여 자신들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본뜻을 다시금 깨닫고, 몸가짐을 바르게 세우느라 열심들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에 있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릴 찬송이란 진정 무엇일까? 광장에 모여서 서로 포옹하고 입 맞추며 찬양을 올림도 마땅할 것이지만, 통일을 올려드림으로써 진정한 찬양이 되는 것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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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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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59회 총회장 최동진(崔東鎭)목사
- 경북 월성 건천 출신최동진목사(崔東鎭 1920.3.6(음)~1996. 12. 14)는 1920년 3월 6일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에서 부친 최임순씨와 모친 이귀란씨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 태어난 동진은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6년 건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 1937년 2월 28일에 졸업하였다. 아직 정식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계성학교에서 배운 신앙훈련 덕택에 경주지방에 있는 모량교회에서 조사(助師)로 전도인의 일을 하다가 총회신학교에 진학했다. 6·25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1951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동노회(慶東老會)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경주 모량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 목회자로 정식 출발하였다. 1954년 전쟁이 끝난 이듬해 대구 근교의 경산군 경산읍에 소재한 경산읍교회(慶山邑敎會) 담임목사로 전임해 지도자로서, 목회자로서의 본격적인 수련을 쌓게 된다.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 경산읍교회 시무최근에 간행된 경산교회 100년사 기록에 보면, “…1946년 10월 모량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51년 7월 5일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 경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54년 1월 1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경산교회에 부임하였다. 경산교회에서는 새 교역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12월 31일 많은 교인들이 나와 교회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였다. 교회 마당에 모래를 뿌리고 환경을 미화하여 최동진 목사를 기다렸다. 도착할 무렵에는 교회종을 쳐서 도착을 알리며 온 교회가 환영을 하였다. 곧 예배당에 모여 부임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참석한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최동진 목사는 1954년 9월 5일 공동의회를 거쳐(경산읍교회 제225회 당회록 1954. 8. 29) 1954년 12월 17일 위임식을 거행하여 경산읍교회 제9회 위임목사가 되었다(경산교회100년사, 설천복 편 2010. p.288-289). 최동진 목사는 이 경산읍교회에서 목회의 안정이 서서히 익어가는 중 생각지도 못했던 주기철 목사가 섬기었던 영남지방의 모교회 부산초량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된다. 경산읍교회 성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는 1957년 10월 1일 초량교회로 임지를 옮겨 30년 목회 황금기와 일생을 바쳐 초량교회에서 은퇴(1987. 10. 5)하기까지 심혈을 기울여 승리로운 목회의 장을 펼쳐나갔다.부산 초량교회로 옮겨 은퇴 때까지 섬겨1994년 11월에 출간된 <초량교회100년사>에서는 최동진 목사(1957. 10. 5-1987. 10. 5) 성역기간을 초량교회의 회복기와 성장기로 설정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량교회 100년사의 후기 30년간을 장식한 최동진 목사는 젊은 시절에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져 뛰어난 현실감각으로 6·25전쟁을 전후 한 시기에 청년운동에 관여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게 신학을 마치고 교역자로 활동하는 동안 우리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부임직후 확고한 목회계획을 수립하여 당회원들의 지지하에 착실하게 초량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교회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여 성장의 잠재력을 갖게 되면서 시야를 넓혀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최초로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아시아복음선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해외선교의 선구자로 선교비젼 제시2차로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이철우 목사), 또 스스로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수십 차례 걸쳐 선교집회를 가졌고, 국내 전도를 위해서도 전국 각 처에 부흥강사로 활약을 하였다. 한국교회가 지반이 취약하여 개교회 중심의 사고를 떨치지 못하고 있을 시절에 이와같이 선구적으로 해외선교와 국내전도에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다. 또 합동교단의 총회장으로서 1만교회운동을 주창하여 이를 교단의 방침으로 정한 뒤 이의 달성을 위해 온갖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초량교회를 시무했던 혁혁한 역대 목회자들의 맥을 이은 그 위에 한국교회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는 다른 입장에서 초량교회(草梁敎會)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초량교회100년사. 이태언 박사 1994 부산 p.227).최동진 목사의 부산 초량교회 시무기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최목사가 역사깊은 초량교회를 담임하게 됨으로써 1951년 한상동 목사 이후 좁게는 1955년 구영기 목사 이후의 과도기적 어려움을 과감히 극복하고 초량교회가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교회 내부의 침체된 요소들을 일소하고 활력소를 불어넣어 한강 이남의 어머니교회로서 위상을 재정립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초량교회가 상당한 발전의 잠재력을 마련한 바탕 위에서 최목사는 국내외 각처에 부흥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초량교회의 위상정립이 확실히 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에도 전력을 기울여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선교 초창기에 남미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나아가 아시아선교회를 조직해 나중엔 파키스탄 등지의 현지인을 교육하여 선교사로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어서 대만과 월남 선교에도 진력하게됨으로 초량교회는 아직 한국교회 전체가 세계선교에 대해 본격적 깊은 관심을 가지기 이전부터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제59회 총회장으로서 1만 교회운동 전개최목사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초량교회 부임 후 얼마 안되어 국립 부산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학해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가꾸어 나갔고, 1969년 4월엔 제88회 부산노회장에 피선 노회를 위해 봉사하며 교정(敎政)의 능력도 키워나갔으며, 1974년 9월 서울 평양교회에서 모인 제59회 예장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 교단의 수장으로써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 뜨거운 봉사를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에 이룩한 대표적인 일들로는 ① 군목후보생들은 국방부의 방침 변경에 따라 신학교 졸업 후 즉시 고시부로 넘겨 고시케 하고, 합격자를 임원회에 보고케 한 후 각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해 임관하도록 하는 제도를 확립했으며, ② 전국 산하 노회는 노회 직후 10일 이내에 총회 총무 앞으로 예산 결산서 2통을 제출하도록 한다. ③ 지방신학교로 인천신학교를 총회 인준 인재양성기관으로 결의하다. ④ 미주노회를 중부·미주서부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하다. ⑤ 교회 내의 성화(聖畵) 사용여부에 대하여서는 예배 대상으로 하지 않는한 우상이 아니지만 우상화할 우려가 있으므 사용하는 것을 삼가하기로 결의하였다. 은퇴 후에도 연구에 몰두최목사는 1987년 10월 5일 초량교회를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같은해 10월 14일 개최된 부산노회로부터는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초량교회를 은퇴한 후에도 향학열에 불타 1993년 한해 동안 미국 LA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대학원에 가서 1년간 수학을 하기도 했으며, 침례교계통의 린다비스타 신학대학원으로부터는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1996년 12월 14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 그의 장례는 초량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蔣)으로 사랑하는 초량교회의 성도들과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여기에 당시 설교자로 나선 그의 애제자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평가했다.“목사님께서는 초량교회의 어진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의 어르신이었고 한국교회의 어른이셨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을 떠나 보내면서 사도 바울께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긴 간증이 생각나는군요. 딤후 4:7-8에 내가 선한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신 어른이셨습니다. 첫째, 최목사님은 참으로 신덕(信德)을 겸비하신 어지신 목자였습니다. 둘째, 최목사님은 대설교가요 대부흥사였습니다. 셋째, 목사님은 선교의 비젼을 가진 선교의 프론티어(Fronteer)였습니다. 넷째, 최목사님은 위대한 교정가(敎政家)이며 행정가(行政家)였습니다. 초량교회의 행정을 쇄신하여 장로교회의 전형적인 교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이 되신 후에 목사님이 벌리신 1만교회운동은 오늘 우리교단의 성장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총회목회대학원을 개설 목회자 자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찬하하였다(정성구 박사의 조사, 고 최동진 목사님을 보내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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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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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59회 총회장 최동진(崔東鎭)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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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과 치사
- 우리나라 속담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해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독일 속담에 `한 부모가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그렇다. 이는 사랑이나 인정(人情)은 본디부터 지녀 오는 사람의 마음이기에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는 쉬워도 역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수직적인 관계에 기인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어버이는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롭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다는 의미로 예기(禮記)에 나온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으므로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해 하고 효도하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면서 사회가 존속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현상을 보기도 하고 과거 전래 생활 풍습에서 보기도 하였다. 실로 사랑과 효도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하여질 때 빛이 난다. 그런데 사랑과 효도는 달리 이상하게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내리사랑은 그 도가 지나쳐 자녀를 나약하게 하고 버릇없는 아이로 길러내고 있다. 이에 비하여 치사랑은 교육을 통하여, 서책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조장하여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로 오늘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성서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무조건 주는 사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가페가 사랑받을만 한 자격이 없는 자에 대한 사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어에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담는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쫓겨나거나 자신의 권력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기에 포기만큼 적당한 단어는 없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드러난 권력 포기의 명백한 모습이다. 이미 처음부터 예수의 삶은 이러한 포기를 드러냈으며 이 포기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 포기의 지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이어진다. 예수는 삶 속에서 죽음을 실현하고 죽음 속에서 생명을 꽃피움으로써 죽는 방법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의 죽음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과정이다. 다른 이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온갖 능력을 드러낸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無力)하게 잡히고 무력하게 십자가를 진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무력은 예수가 생명을 얻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기도하러 올라간 겟세마네에서 무장한 적들에게 잡힌다.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은 요란한 무기를 들고 예수에게 왔다. 예수는 그들이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순수하게 자신을 내어준다. 예수의 죽음은 분명히 이러한 내어줌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결코 자포자기나 절망과는 다르다. 예수는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나눔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 피조 세계에 내재하는 분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임재하는 분으로, 그리고 역사에 개입하고 활동하는 분으로,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가 지니는 목적은 성령에 의한 섭리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현존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나타나고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호세아 이전에는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택, 구원, 계약과 섭리적인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나 결혼관계의 사랑에 견주어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성서에서 누가는 사랑의 속성을 누가복음서에 나타내 보인다. 서두에 해당하는 눅2:14의 천사찬송 구절 속에 예수 탄생의 전체적 의미와 활동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이렇게 담고 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이렇게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기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끔 만드는 수직적 기능을 수행하려고 이 땅에 왔다는 점에 유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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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과 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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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17회 총회장 염봉남(廉鳳南)목사
- 충청도 괴산 출신염봉남 목사(1875. 9. 27-1036. 11. 17)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1833년 한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1804년 기능참봉(冀陵參奉)이란 말직(末職)을 받아 봉직한 적도 있는 그는 대구로 내려와 우연히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남성정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결신해 1911년 10월 13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 선교지부에 나와있는 어도만(Rev. Walter C. Erdman 魚도万)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연봉남이 대구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미국인이 서투른 우리 말로 전도하는 것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말로만 듣던 미국인을 직접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미국놈 물러가라”며 욕설을 퍼 붓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간단한 열설을 하고 난 후에는 쪽복음을 나누어 주면서 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공식 선교사로 영남지역의 최초선교사로 부산에 파송 받은 후 대구를 거쳐 나중 평양선교부 교육담당 선교책임을 맡은 안의와(Rev. James E. Adams, 安義窩) 목사였다. 그는 배위량(William M. Baivd, 裵偉良) 선교사의 처남이다.안의와 선교사로부터 쪽복음 받아염봉남은 청중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선교사로부터 쪽복음을(마태복음) 한권 얻어 가지고 와서 그 책을 1장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복음 제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읽는 순간 이 종교는 양반들이 믿을 종교라고 생각이 들어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는 쪽복음으로 된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이 책은 양반 뿐만 아니라 천민들도 꼭 읽어야 할 귀중한 책임을 알고 선교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나섰다. 남문 안에 있는 남성정 선교사집을 찾아가서 대담하게 대문을 노크하였다. 누구요?라는 큰 소리가 대문 안에서 들렸다. “저는 선교사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온 염봉남이라는 사람이외다.” 아담스 선교사는 신기해 하며 문을 열어 주고 염봉남 청년을 반가히 맞아 드렸다. “선교사님 저에게 쪽복음을 팔게 해 주세요. 저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성경 쪽복음을 팔게 해 달라고 하는 염봉남에게 아담스(Adams)는 쪽복음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염봉남은 안의와 선교사의 선교구역에서 일할 수 있는 조사(助師)로 임명을 받고 권서로 활동하였는데, 옆에서 주의깊게 지켜본 안의와는 염봉남의 열심에 놀라고 말았다. 쪽복음 파는 권서로 출발한편 그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해 개설되는 달(月)성경학교에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꼭 참석하여 3년간의 모든 과정을 다 이수하였다. 이에 감동한 안의와 선교사는 염봉남을 1912년 자신의 순회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잠시동안 달성지방 내에 있는 3개처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의 일을 하였다. 염봉남은 이와같이 안의와 선교사의 따뜻한 보살핌과 후원으로 1915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자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던 경산읍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1920년 9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1921년 1월부터 1923년 1월 6일까지 경산읍교회 제1대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잠시 떠났다가, 1925년 2월에 임시목사로 다시 부임 그 해 말에 사임하고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로 전임하였다(경산교회 100년사, 김광남, 2010 대구 pp.196-202).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안에서 이름난 양반목사로 존경 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구서문교회(구 신정교회) 당회에서 청빙서를 작성해 한 부는 염봉남 목사에게, 또 한 부는 경북노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염봉남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에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학비를 보조해 준 경산읍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처음엔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거절하였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2005. 장로교출판사 p.79). 그러나 재차 신정교회로부터 강력하게 청빙해 오므로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新町敎會)를 방문하여 당회원들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장로님들의 뜻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경북도청이 있는 대구로 목회지를 옮기고 싶지만 목사가 기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진중한 속마음의 거절의사를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정교회 당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설득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회원들 마음 속에 약속이나 한듯,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똘똘뭉쳐 염봉남 목사를 적극적으로 모셔야겠다는 강한 의중을 갖고 염목사를 설득하였다. “예! 목사님의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경산읍교회도 하나님이 세운 교회이고, 대구 신정교회도 하나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렇게도 우리 신정교회 당회원들의 마음과 신정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이렇게 얼마동안 서로간 대화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상면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대구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 목사 사택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염목사 모르게 모여 의논하게 되었다. 당회원들 가운데 어떤 장로는 우리 교회 염봉남 목사를 보다 큰 도시에 가서 목회할 수 있도록 하게 하자고 제안하여 누가 강권한 것도 아닌데 당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당회장 염봉남 목사 사택을 방문해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시어 더 큰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권유를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되자 염봉남 목사의 대구 신정교회로 부임하는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아무 어려운 문제없이 경북의 중심지 대도시인 대구 신정교회로 은혜 가운데 부임하게 되었다. 염봉남 목사가 부임한 1922년 신정교회 교인수는 4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33년 교인총수는 1988명으로 성장하였고 1928년 5월 6일 대지 569평 건평 294평의 새 예배당을 건축 헌당 하였으며, 염목사는 신앙인격과 리더십도 겸비하여 경북노회 노회장으로 두번이나(1920년, 1921년) 역임하였고, 1928년 9월 7일에 모인 (대구신정교회당)총회에서 교단의 수장격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7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대구 신정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총회장으로 당선된 염봉남 목사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정교회 성도들과 경북노회 전교회가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그가 사회석에서 총회를 진행하면서 뜻있는 몇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하다. ② 총회산학 각 노회는 농촌부를 설치하고 동시에 총회는 농보(農報) “농민생활”지를 간행하기로 하다. ③ 조선주일신보 “아이생활”지를 출판하도록 하다. ④ 장로교 감리교가 협동하여 12월에 “신정찬송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를 부흥시킨 목사이고 신정교회 정통성을 이어받은 제2교회 90년 역사에서 노회와 총회에서 많은 공헌을 한 위대한 목사로 역사에 길이 남긴 교회의 지도자로 승리한 주의 종으로 길이 기억해야 할 영남지역의 초기 지도자였다고 하겠다. 1936년 1월 17일 염목사는 조용히 주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박사 저 2015,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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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17회 총회장 염봉남(廉鳳南)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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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동성애를 사라지게 하려면...
- 6월은 메르스라는 독감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뒤덮고 공포의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또한 서울시가 허가해 준 ‘퀴어축제’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걱정과 근심의 한숨만 내쉬는 날들이었다.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는, 각 나라가 지나온 역사를 공부해 보고, 앞날을 예측하며 우리는 어떻게 자녀들을 키우고 살아가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은 건국 이래 모든 초등학교에서 성경과 기도, 음악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1963년 최연소 Kennedy 대통령이 예산 적자라는 핑계로, 그동안 개척자들이 목숨처럼 여겨왔던 기도시간, 성경시간, 음악시간 등을 빼버렸다. 그 후 미국의 인성은 곤두박질 쳤으며, ‘명문 케네디 일가’는 ‘비운의 케네디 일가’로 변함은 미국 교육을 망쳐놓은 하늘이 내린 벌인가? 지난 6월 28일은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 결혼을 인가했으나, 교회는 이번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무관심한 죄를 지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어떻게 나타날지 두려울 뿐이다.서양 역사에 보면 네로를 비롯하여 로마황제들 가운데도 동성애자들이 있었으며, 우리나라도 신라시대 때부터 동성애자가 있었음을 삼국유사가 기록하였기에 ‘왕의 남자’라는 동성애 영화가 인기를 얻었고,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이 동성애 결혼을 공공연히 한 후, 우리나라도 더 심각해 진 것 같다. 구약성서의 롯과 두 딸이 거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보자. 천사가 방문한 것을 본 동네 남자들이 젊은이로부터 늙은이까지 롯의 집에 몰려와 ‘네 집에 온 손님을 끌어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이 동네로 찾아온 남자들과 ‘우리가 상관하리라!’라고 한다. 즉 남자끼리 성관계를 하겠다고 호령하는 것이다. 성에 대한 기준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몸을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결말은 무엇인가? 결국 유황불에서 목숨을 건진 롯과 두 딸은 근친상간을 하여 자녀를 얻는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두 딸이 자라나면서 보고 배운 것은, 근친상간과 동성애뿐이었기 때문이다. 롯과 두 딸의 후손은 암몬과 모압으로, 수천 년을 내려오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원수였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요르단’ 민족이 되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를 할 수 밖에 없는 DNA를 갖고 있다며, 미국의 해머 박사의 연구 논문을 통해 주장했다. 1993년에 해머 연구팀은, 동성애자들의 염색체는 다형질 유전자인 Xq28며, 이는 동성애의 본능과 욕구를 일으킨다고 발표했다. 물론 연구자인 해머 역시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합리화 하려고 이치에 맞지 않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때문에 동성애는 더욱 늘어났다.그러나 1999년에 카나다의 라이스 박사 연구팀은, 더 많은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Xq28 염색체 안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을 더 구체적으로 분석을 한 후, Xq28이 동성애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해머 박사의 연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미국의 뜻있는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제대로 살아보자고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아내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았더니, 얻는 것은 병과 가난뿐이고, 잃는 것은 소중한 가족과 자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아내들도 남편의 성 욕구를 잘 포용해 주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남편이 성적으로 외롭지 않도록 돌봐야 한다. 엄마와 아빠가 다정하고 사랑하는 가정에서 자라는 자녀들은 결코 동성애자가 되지 않는다. 말투와 얼굴까지 차가운 엄마를 둔 아들은, 자라면서도 여자를 혐오하는 마음을 품게 되며, 여자가 두려워서 남자끼리 사랑을 나누게 된다. 또한 엄마나 딸을 함부로 대하고 성폭행 하는 아빠를 둔 딸들은, 남자를 증오하며 두려워하기에 레즈비언으로 변하기 쉽다. 그러므로 엄마는 따뜻한 가슴으로 아들을 대하고 다정한 말솜씨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심어 주어야 하고, 아빠 역시 하나님을 대신하여 거룩함과 남성다움으로 딸들을 소중하게 키워주어야 한다. 부모의 부모다움이 이 땅에서 동성애를 추방하는 최선의 길임을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하며, 동성애를 이 땅에 사라지게 하려면, 교회는 깨어 이를 시시때때로 가르쳐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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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9
- 최근 한 교회에서 은퇴한 목회자와 교회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권력의 자리에서 은퇴한 목회자에게 그동안 억압되었던 신도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 목회자의 은퇴식은 마치 왕의 퇴임식 같았는데, 왕좌에서 내려오자마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흔히들 권력의 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요란하다. 마치 한국교회의 모퉁이 기둥이 꺾기는 듯하다. 지금까지 찬란했던 한국교회의 영광은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 더욱 확실하다. 우리에게 더욱 절망적인 것은 기독TV에 출연하고 있는 스타들마저도 바로 그 뒤를 연이을 것이란 추측 때문이다.이러한 소식이 한국 교계에 들려질 때마다,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나의 눈에 영화장면 같이 선하게 떠오른다. 모세는 눈도 밝고 치아도 건강하고 마음마저도 총기가 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는 물론 명예와 권력을 모두 여호수아에게 넘기고, 느보산에 올라 이 땅을 미련 없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모세의 삶을 오늘 또 다시 되새김은, 과거 우리가 가난할 적에 느끼던 느낌과는 달리,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가 더욱 놀라운 인격을 갖추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기 때문이다. 모세는 불행한 삶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왕의 무덤이나 도시를 짓는 히브리노예 가운데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노예 인구소멸정책으로 인해서 죽음의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집트 궁의 공주에게 건짐을 받아 양육되었다. 태중에서 어머니가 느끼던 불안감과 두려움, 사람들의 환영도 받지 못한 긴장상태에서 제대로 울어 보질 못하였다. 아마도 모세가 말을 어눌하게 하게 되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주 취약한 공포의 상태에서 숨을 죽이며 아이를 키우던 그의 어머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되자, 아이를 단념하고 광주리에 넣어서 나일 강에 띄어 보낸다.모세는 여러 번 버림을 받았다. 생모로부터의 버림받음, 양육한 어머니와 주변의 가족들과 함께 공부한 동료들로부터도 떠나야 했다. 모세가 그의 안락한 이기적인 삶에서 그의 바깥 주변의 노예들에게 까지도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때는 40이 되어서야 비롯되었다. 링컨대통령은 40이 넘어서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모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 곧 얼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세가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그가 처한 세상에 도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변화만 있었을 뿐, 더 이상 진전하질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잠시 빗겨날 수밖에 없었다.모세에게서 진정한 삶의 변화는 광야에서 빚어졌다. 흔히들 광야에서 인물이 난다고 하질 않던가? 모세는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야훼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는 인생 80의 나이였으나 비로소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다시 일어서서, 노예로 신음하는 치유 받지 못하고 있는 땅을 향해서 나아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종교가 정의를 바로 잡질 아니하고 권력의 시녀 노릇만을 한다면 그 종교는 흔히들 말하는 정적인 권력자의 탐욕의 도구일 뿐이다.어디 이 뿐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단련된 지도력이 발휘되길 시작 하였다. 그는 궁궐에서 많은 실력을 갖춘 자이긴 하였어도, 그가 발휘하는 능력은 세속적인 지식의 활용이 아닌, 하나님과의 조우에서 얻어진 지도력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열개로 나눠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얼마나 그 펀치가 절제가 있던지, 이집트의 군사력이 당해내질 못하였다.지도력은 전쟁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세의 백성들은 노예출신이라서 상처가 치유되질 아니하여서 성격화된 데다가, 부정적 사고와 행태는 도저히 하나님나라를 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데도 실패를 하질 아니하고 백성들과도 거리감을 두질 아니하였다. 그에게서의 카리스마란 겸손과 온유함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백성들 가운데에 있는 장막에, 하나님도 내려오신 것이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성숙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38년의 광야생활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에 그의 행렬은 모압과의 경계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우물 하나를 발견하였지만 메마른 우물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둘러서더니 합창을 시작하였다. ‘우물물아 솟아나라’. 경이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거룩과 성장이 지도자에게서 백성들에게로 옮겨간 것이었다. 모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연연하질 아니하고 느보산에서 그를 보냈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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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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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38회 총회장 명신홍(明信弘)목사
- 평안도 평원출신명신홍목사(1904. 4. 14~1975. 10. 14)는 평안남도 김제면 원장리 145번지에 명진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께서는 무식했고 딸만 셋이나 낳다가 네 번째 장손인 신홍을 얻어 어떻게 해서라도 교육을 해야겠다는 열심히 있어 나이 5살 때 집에서 4리쯤 떨어진 리인리(里仁里)에 교회가 들어서고 또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학교 관란학교에 입학시켰다. 신홍은 생애 처음으로 배움의 터전에서 자랐다. 9살 되었을 때 합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데 다른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산술만은 아직 아라비아 숫자도 익히지 못한 터라 3학년의 산수를 따라 갈려니 어려워 학교 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손위 누나가 위안을 주며 친히 가정교사 노릇을 해주어 점점 공부성적이 뛰어 올랐고 얼마 후에는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하였다. 집에서 5리가 넘는 교회도 주일 낮 예배만 아니라 칠흙같은 어두운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다닐 정도로 신앙생활에도 열성적이었다.이렇게 합성학교를 마친 후에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그때 마침 숭실중학교에서 우호익선생을 중심으로 한 시험관이 합성학교에 와서 입학시험을 치루는데 부모님께서는 장사 밑천을 대서라도 공부를 시켜보고자 해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합격이 되어 그해 4월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15세의 소년으로 숭실중학교 기숙사의 찬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며 1년간 다섯 명이 한 방에 살면서 때로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가 처음으로 조국이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 조선도 어서 속히 독립국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음에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한 30리쯤 떨어진 평원군 덕산면 봉도리로 이사를 했다.18세가 되던 해에 다시 숭실중학교 4학년에 복교해 졸업하고, 1929년 겨울 김제면 원양리에 살던 차도정(車道正)씨의 장녀 차덕실(車德實)을 만나 결혼하였고 1남 3녀를 낳았다.명신홍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변화의 계기가 왔는데,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세계와 내일을 준비하는 유학의 길이 트인 것이다. 여러 어려움을 겪은 생활이었지만 내일의 한국교회의 큰 일꾼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기도 했다.동경에 있는 일본대학(日本大學)에 들어가 고학으로 공부했다. 정식 졸업은 못하였으나 수료과정을 마치고 같은 지역에 있는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 본과에 진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고 수료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제하라 더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일본에서의 생활을 접고 1933년 귀국선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1937년까지 평안북도 평원군에 있는 진지동교회에서 처음엔 전도사로, 나중엔 목사로 장립을 받고 목회를 하였다.미국에서 신학공부, 한때 미 군정 통역관 활동명신홍목사는 보다 먼 미래의 조선교회를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1937년 도미 계획을 실천, 태평양을 건너 보수정통신학의 명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하여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마친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칼빈신학교로 가서 대학원과정을 이수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동아 전쟁의 여파로 귀국할 형편이 못되어 뉴욕으로 가서 귀국 기회를 엿보면서 뉴욕에 있는 비브리칼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시 신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졸업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할 형편이 또 미루어지면서 잠시 동안 미 국무성 우편물 검열국에서 검열관의 자리를 얻어 1945년 8월 귀국하기 직전까지 근무하였다.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이 되자 즉시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자마자 미쳐 정부수립 작업의 과도기로 유엔 감시 하에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정부격인 미 군정청(美軍政廳)에서 고문관으로 봉직,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이승만)가 정식 발족되기까지 해방공간 2년간의 환란기를 통역관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국가발전에 일시적이었지만 크게 이바지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서 목회1946년부터 1957년까지 만 10년이 넘는 인생 황금기에 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에 부임, 담임목사로 지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써 리더십을 십분 발휘한 기간이기도 했다. <서문교회 100년사>를 쓴 이혜정박사는 정재순목사가 사임함에 따라 1946년 명신홍목사가 신정교회(新町敎會)에 부임했다. 명신홍목사는 1946년 7월 24일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8·15 해방과 6·25 전쟁 등 한국 격동기 11년간 시무하면서 교회 창립 40주년 행사 등 교회를 안정시킨 목회자이다. …명신홍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신 목회자로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1947년 2월 16일 위임받아 1957년까지 11년간 담임목사로 헌신하면서 특히 미 군정청 고문관 시절에 영어 통역관의 역할을 하면서 대구시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1948년 10월 17일부터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을 개원 운영했고, 1950년 6월엔 ‘중등부’가 조직되었고 1952년엔 전쟁의 와중에서도 교회 설립 4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했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편 p168).총회신학교 교수 및 학장 역임명신홍목사의 인생 후반부 사역과 활동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교단의 인재양성 기관이요, 목회자 양성기관인 총회신학교 교수사역과 학장의 활동이라 하겠다. 그가 총회신학교와의 인연은 6·25전쟁으로 인해 총회신학교가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잠시 운영되고 있을 때부터 교단의 요청으로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본다.그는 이미 경북지역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목회자로 서문교회만 섬긴 목사가 아니라 경북노회(1951년)와 전쟁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1953년 4월 자기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3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이미 교계에 익히 알려질 정도로 지도자상을 나타내 보여주었다.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되자 총회신학교도 자연히 정부를 따라 수도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명신홍목사도 교수자격으로 서울로 이거하게 되었다. 그가 상경한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1953년 4월엔 화란 왓스코텐 개혁교회 동부대회에 한국대표로, 이듬해 1954년 8월엔 미국 프린스톤 개혁교회세계대회, 1955년 8월 미국 에번스톤 세계기독교연합회, 1959년 3월 미국 미주리 주 타키오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D.D), 1962년 9월 총회장으로부터 교단과 신학교에 끼친 공로로 표창,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사(H.L.K.X 방송), 장로교와 개혁교회 소속 세계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드디어 1965년 2월엔 그가 평생 몸담아 가르치던 총회신학교 수장(교장)의 자리에 올라 1969년 2월 퇴임하기까지 봉사하였다. 예장총회장을 지낸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명신홍목사를 “목회자, 교회행정가, 뛰어난 교육행정가”로 평한 바 있으며(신학교육과목회, 정성구, 1997. p.47), 대성교회 원로요 총회장을 역임한 서기행목사는 “…명(신홍)박사님은 오늘의 우리 예장통합 측을 있게 한 공로자요, 오늘의 총신대학교의 기초를 쌓은 분”(같은 책 p.50)이라고 했다. 박형룡·박윤선·명신홍 3대 거장그의 제자요 총신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김의한 박사도 “명(明)목사님은 명(名)목사님이셨다. 목회에 대성하셨고 총회장도 역임하셨고, 총신의 교장으로도 봉사하셨다.”(같은 책 p.201)<신학교육과목회>라는 제목으로 명신홍박사의 전기를 펴낸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우선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체계를 세웠던 일이고, 나의 영적 아버지였던 박윤선 박사님으로 부터 선경신학의 맥과 신앙의 참모습을 전승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신홍 박사님으로 부터는 설교의 신학과 실제의 참뜻을 배웠다. 세 분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기에 후일 편자가 칼빈주의 사상을 정리해서 20년 이상 가르칠 수 있게 된 동기가 되었다”(같은 책 서문, 정성구의 글 p.37-38 참조)1953년 4월 24일~28일에 있었던 대구서문교회 총회에서 결의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① 통일 없는 휴전 반대하기로 하다. ② 10월6일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교 설립허가를 받다(교장 감부열 선교사). ③ 경안노회를 경안·강동 노회로 분리 허락하다. ④ 예배당에서 성극과 유희하는 것은 가히 합당치 못함으로 각 당회가 신중히 처리하기로 하다. ⑤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 결의 위반 및 성경 유오설을 주장했음으로 목사직(牧師職)을 파면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하다. ⑥ 기독교장로회 측이 분열해 나가다(제98회 총회 찰요, 예장총회 2014. 3 p.18 참조).현재의 사당동 총신대학교 종합관 새 건물 이전의 본관건물은 학교발전계획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본관 구건물은 명신홍목사가 육신의 질병을 몸에 지닌 채 본관건물 신축을 위해 미국에 가서 교통비(비행기를 타지 않고 선편으로 귀국함)를 아끼고 숙식비를 아끼며 모금한 미국교회의 후원으로 건축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전설처럼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명신홍 학장의 총신사랑의 열정을 후학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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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38회 총회장 명신홍(明信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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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의 주인공
- 종교 중심의 중세시대가 끝나고, 인간중심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때 가장 힘을 받았던 사상은 이성주의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감성과 이성으로 정신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근대에 와서 인류가 발전을 하기 위하여 이성주의에 매몰되고 있다. 이 이성주의는 베이컨의 경험론과 자연과학의 발달로 극대화 됐다.그러나 실로 이성주의는 크게 모순을 유발하고 있다. 이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제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의 현장을 보게 됨으로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하며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부하던 인간들의 눈에 비이성적인 참상을 당하고 나서 그 답을 세계인들은 감정에서 찾게 되었다. 요즘 세상사 살아가는 꼴을 보고 있다. 학식으로 인간을 설득시키려는 논리와 합리가 극대화되고 있지만 감정은 메말라 감성만이 중요함을 사회생활에서 느껴본다. 그 예를 들면 친구끼리 다툼이 났을 때 잘 설득되는 이유는 감성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보자면 자기만이 옳다고 자기의 주장과 근거만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우겨봐야 다툼하는 것으로는 결과가 없다. 감성적으로 양보와 포용만이 이성의 논리를 이길 수 있다. 사람은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그 사랑은 서로가 같이하는 성격이기에 자기만의 고집으로는 되지 않음을 감성으로 처리하게 된다. 오늘의 시대는 무지와 혼돈의 시대를 넘어 理性의 시대에서 感性의 시대로 가는 것은 본래 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으로 본성으로 이행되고 있다. 이성만으로는 방향을 이끌어낼 뿐 세계를 변화시켜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 사람을 변화시켜내는 힘인 사랑, 즉 감성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理性과 感性의 바탕의 주인공이며 그를 조율할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진정 필요한 시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욕망이 시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성을 늘 목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속화된 종교와 정치권력은 그 파괴적 자본주의의 충실한 종으로서 많은 이들을 혼돈과 무지 속에 가두고 이성적인 생활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본래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의 주관을 잊으며 삶을 이기려 한다. 인류의 진화는 理性이 남성성의 시대로 그리고 感性이 여성성의 시대로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으로 그 어울림은 그 둘이 어우러지는 시대를 살아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감과 공감은 결국 누구든지 함께 더불어 공유할 때만 일어나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이성은 방향을 이끌어낼 뿐 세계를 변화시켜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 사람을 변화시켜내는 힘은 결국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랑, 즉 감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욕망이 시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성을 늘 목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속화된 종교와 정치권력은 그 파괴적 자본주의의 충실한 종으로서 많은 이들을 혼돈과 무지 속에 가두고 있다. 지금은 진정 "이성과 감성의 주인공"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그 발현이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동, 감격, 공감 같은 것을 제외하면 인간에게서 분발심이나 자기혁신을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에서 인간이 이룩한 풍요를 누리면서도 사람 사이의 정에 굶주리는 인간소외에 괴로워하면서 정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본다. 정을 찾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감성의 욕망을 전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감성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는 끝이 없고, 하나의 정이 이루어지면 싫증을 느끼지만 그것은 다시 재생산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감정에 복받치면 이성을 잃고 어떤 일을 저질는지 모른다. 감정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감정이 안정되어야 이성도 작용할 수가 있다. 무시되었던 인간의 감정이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적극적인 관심사가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과학은 감성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시작하였다. 심리학에서 감성이란 기본적으로 감각기관에 기초를 두는 심리적 작용임의 하나임을 밝혔다. 감각기관으로부터 독립된 능력인 이성과 구별되고, 일상생활에서 인정, 향수, 애착, 정감, 동정심, 미의식이나 상상력 등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동, 감격, 공감 같은 것을 제외하면 인간에게서 분발심이나 자기혁신을 기대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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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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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 동질성 회복
- 정부는 올해 남북 간 동질성 회복의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여 한반도 통일시대를 개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년은 해방 70년이자, 분단 70년을 맞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리는 민족 동질성 회복과 실질적 협력으로 여기에 임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정부는 인도적 지원이나 협력에 민간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남과 북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민생협력을 추진하고 사업의 범위와 그 폭을 넓히고 사회문화 교류 및 인도적인 사업을 확대하고 민간 교류의 참여도를 넓혀 광복 70주년의 기념으로 북한과 함께 추진할 수 있도록 남북관계 발전이 이루어져 서로의 협력의 관계로 이산가족의 만남을 숙원 한다. 남과 북은 한 조상 때부터 살던 한 나라의 조국이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모여 살아 온 한 자손의 배달민족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민족으로 그 문화와 삶의 역사가 같다.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의 시작은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에 합법적인 진출로 일제는1894년 갑오농민항쟁(동학)을 핑계로 청일전쟁이 발발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통치권을 장악하며 농민군을 유인해 전멸에 가까운 결과와 소탕작전을 펼친다. 일제는 열강들 간의 힘겨루기에 활로를 모색하던 중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듬해 1895년 명성황후를 난도질하여 살해하고 불태워버리는 을미사변을 저지르고 이로써 친일내각의 기틀을 완성한 일제는 대부분의 시설권, 개발권을 우선 점유하고 실질적 대리통치를 자행하고 형식상의 일제강점기에서 제외된 구한말의 식민지수탈은 본질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유명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청산리대첩과 헤이그특사(고종황제 밀명으로 특파)의거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독립투사들의 첩보와 거사) 등의 조선독립의지는 남과 북의 분명한 비사도 같다. 이는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초강수로 친일내각 마저 해체되고 고종황제의 실질적 통치권은 박탈되고 만다. 이도 남과 북의 한일합병으로 시작된 일제강점기 역사도 같다. 이에 1919년 3.1조선독립선언과 독립항쟁이 최소 2개월 이상 지속되고 600만 명 이상의 시위가 역사에 남는 기록도 같다. 1919년 3.1독립항쟁으로 무차별 총기난사와 구속투옥 및 학살 등으로 국제적(특히 러시아 등)으로 비난받자 1920년부터 문화통치라고 미화해서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투사들이 망명하거나 국경을 넘어 만주와 러시아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독립투사들도 같다. 1943년 일본이 하와이로 지칭되는 진주만 폭격을 감행하고 선전포고도 없었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대대적인 전쟁참전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본강제 징용과 학도병 징집 및 일본군위안부 징발 등이 이 시기에 자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식민지노예에서 직접적인 전쟁노예로 전락하던 대사건의 역사까지도 같다. 상해임시정부를 주축으로 항일무장전쟁사의 큰 획을 기록한 대한광복군과 미 해병대 소속 한미연합특수부대가 탄생했던 이유이다.항일전쟁선포는 축소되고 가려졌지만 상해임시정부의 가장 구체화된 한국해방전략의 전술도 남과 북의 역사도 같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의 의지와 꿈을 이은 정통세력은 임시정부에서 ‘해외파’로 김구와 이승만을 포함하고 ‘국내파’로 김일성을 포함한 독립운동자들을 생각해 보는 해방운동의 선봉자로서도 같은 인물들이다.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1945년 해방 후 한반도의 북한은 공산당이 포진하고 남한은 이승만이 기득권을 잡으며 대립하는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 다른 쪽으로 갈라지는 남과 북의 다른 정부가 되어 하나의 나라가 둘이 되었다. 과거의 동지가 해방된 후 적이 되어 세상에서 물과 기름처럼 순식간에 민족이 갈라지는 1950년 6.25 사변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민족이란 이해를 언어, 공통의 문화유산, 종교, 관습과 같은 객관적인 기준이 민족을 형성한다고 보는 것에서 민족은 나라에 선행하며 공통의 역사적 가치와 사회적 유대에 기초를 둔 “실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민족이란 국가나 정치형태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민족의식 혹은 민족주의라는 것도 이런 원초적인 동질성에서 점차 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공유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인정되는 집단. 이 경우의 문화란 언어·종교·세계관·사회조직·경제생활 및 그 밖의 생활양식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뜻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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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 동질성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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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8
- 발달심리학의 입장에서 신도들의 신앙발달이나 도덕발달 등에서 나타나는 법칙을 보면, 발달단계에서는 결코 월반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발달단계는 점진적인 발달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달단계의 특성상, 각 사람의 인격발달 단계의 처한 위치가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해야 하고, 인격적으로 만나지기 위해서도 획일적으로 수련생들을 다뤄서는 더더욱 아니 될 것이다.우리 교계는 여름철이 다가오면 심신 수련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구성되고, 교회들이나 단체별로 저마다 진행되어지는데, 진행 단체의 구성원들의 관심은 모두다, 행사에 참여한 수련생들로 하여금 지금의 현재 상태에서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깊은 성찰과, 성찰로 인해서 깨닫게 된 더 나은 가치관의 발견, 그 새롭게 발견된 가치관의 의미와, 완성을 향해서 새롭게 나아가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동력을 얻게 하는데 있을 것이다.바울에게 있어서 그가 사람들에게 주려하는 선물들이 그의 서신들에서 발견되는데,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는 선물들은 세 가지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은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과 은사가 역학적으로 작용해서 개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성과인 성령의 열매들이다.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실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 신도들의 신앙발달 단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도들 중에 어떤 이는 치유를 받지 않으면 더 이상의 단계로 나갈 수 없는 고착 상태에 머무른 이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질 못하여서 그리스도마저도 자신의 아집과 욕구의 도구로 이용되는 어둠에 머무른 상태로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껍데기를 깨트리고 과감하게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맞이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신도들이 저마다 성장하기 위해서, 개개인이 자숙하는 시간과 공간을 향해서 나아간다면, 마땅히 환대를 받아야 할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 개개인이 저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해도, 우리가 처한 사회적 문화적인 수준이, 개개인의 변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수용할 만큼 그릇을 크게 갖추질 못하였다면, 사회적 구성원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그들을 구성한 사회적 문화적인 틀을 넘어서질 못한다. 종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종교는 세상에서 그 어느 것 보다도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어서, 그 패러다임이 넉넉하질 못하고, 사회적 변화에 적응력도 게으르기 때문에, 변화하려는 세상을 억압하려고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역기능적인 방해기제로 전락될 수 있다. 그 병폐적인 사례들이 중세기의 종교 활동에서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나타난 바 있다.무엇보다도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은, 교회가 새로운 틀과 새 부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구성원들은 모두다 이 낡은 부대를 터트리고서 빠져 나가 버릴 것이다. 이미 2,000년 이전에, 예수께서 건물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지 아니하셨던가?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서, 이제는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성령이 거주하시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 진 것이다. 이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 이전과 뚜렷하게 달랐다. 성령이 한 사람에게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에게, 개개인에게 다양하게 부어 진 것이다.교계의 지도자들은 이제 교인들 하나하나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설 수 있도록 하는 마음가짐부터 추슬러야 할 때이다. 우리 교회가, 신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될까 보아서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만 있다면, 우리 영적 지도자로 일컫는 이들은 옛날 제후들과 왕들이 버림을 받고 처형되었듯이, 그렇게 되어 질 확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TV매체에서 서비스를 하는 일은 재고되고, 본을 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재편성되어야 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유니온신학교에서 강연한 것 같이, 오늘의 기독교 문제는 설교자들의 부재가 아닌, 순교자들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질 아니하고 고린도교회를 효율성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재구성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말로서는 다 가르칠 수 없는, 신앙의 본을 꾸준히 보임으로써 거룩한 신부로서의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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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