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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목사님 어디로 가셨습니까?
- 나라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배는 산으로 올라가고 민초들은 경제적인 고통 중에 희망의 끈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이다. 전국 곳곳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구속과 탄핵을 주장하는 전단지가 뿌려지고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신앙을 이용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욕되게 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운 전임 대통령과 대선을 조작하고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선거부정을 넘어 국가내란죄를 저지른 현직 대통령과 그 수하들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여권이 주장한 소위 사초라 하는 남북정상회담기록물과 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 논두렁 시계의 진위가 모두 법원에 의해 거짓, 조작되었다고 밝혀졌다. 또한 북의 소행으로써 다른 반론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자 했던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MB가 퇴임하자 국내외의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처음부터 이 사건의 수사와 정부의 해명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점을 제기하는 국민을 끊임없이 종북으로 몰아세우고 대통령을 비방한 전단지를 뿌린 사람들에 대해 처벌하라는 경찰의 지휘라인이 시민들의 궁극의 분노를 사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땜질식 위기처방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설령 현 정권의 때에 운 좋게 넘어갔다 하더라도 다음 정권에 들어서도 국민들의 분노와 처벌 진실규명 등의 요구는 계속 될 것이고 마땅히 하여야한다. 재판하는 자들은 정의로움을 버리고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억울하게 하며 진실을 가리고 사실을 왜곡하는 일들이 버젓이 대로를 종횡무진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러한 자들에 대해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왜곡된 지지와 침묵으로 용인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교회의 교적부에 이름만 올렸을 뿐 전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어용정치 교회지도자들이야 정해진 길로 가겠으나 문제는 성도와 국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할 목회자들이 죄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하나님이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MB를 뉴 라이트라 칭하며 장님이 장님을 웅덩이로 인도하듯 뉴 라이트의 중심에 있었던 목회자들, MB의 부정과 죄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책하지 아니하고 그저 대통령과의 연을 자랑삼고 세상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스스로 아는 체 하며 나라와 국민을 깊은 수렁으로 인도했던 목회자들, 대선부정에 대해 진실을 파악하기보다는 정부의 종북 놀이에 함께 동참하고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서도 완고하고 악의적인 정부의 정치적 기만행위에 신문광고로 정부를 편들던 목회자들, 2014년 12월 전쟁설을 예언하던 거짓 전도사의 말에 현혹되어 그를 초청하여 성도들을 영적 혼란에 빠뜨린 교회들, 현재 그러한 목사님들은 어디로 갔으며 지금은 어찌 잠잠하고 침묵하고 계시는지요? 최근 리퍼트 주미 대사의 피습사건에 모 교회가 한 일은 참으로 민망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다. 외국인이 교회가 왜 저런 식으로 외국 대사에게 과잉 호의와 충성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부끄러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느 네티즌의 말에 격하게 공감이 간다. 하나님은 세상 권력자들의 행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공의로운 심판으로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주의 백성이라 하는 자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다.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의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심은 도를 넘어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고 위정자와 국민을 잘못 인도하는데 앞장서고 있으나 이에 대한 회개와 국민에 대한 사과나 자인도 보이고 있지 않다.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다면 반복됨이 없어야하나 계속하여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아직도 주의 말씀과 세상 사이에 오락가락 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이사야58:1)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이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교회는 두려워하여야 한다. 부산의 어느 한 시민의 시위 팻말에서 ”이게 나라냐! “하는 질타의 소리에서 보듯 이 나라는 정부의 통제력과 권위에 국민이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더더욱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교회 안에서 조차 보기 힘들어졌을 만큼 심히 개탄스러운 상황이다. 이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찢고 철저히 자복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되 정치현장에 다시는 기웃거리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국민을 향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책임을 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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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목사님 어디로 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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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재를 마무리 하며 2
-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구원>이 빠진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구원에도 여러 가지 <구원>이 나오는데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구원도 있고, 마귀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도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구원은 눈에 보이는 구원으로 일시적인 구원이요 불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장하는 참 구원, 큰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구원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단언하건대 성경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죄값으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롬6:23, 계21:8) 그러면 죄인이 구원받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마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는 구원으로 들어서는 입문(入門)이며 회개 없이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회개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회개는 죄인이 하는 것이지 의인은 회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눅15:7 회개할 것 없는 의인) 그리고 죄가 성립이 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합니다. 법이 없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롬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리고 법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법을 제정한 입법자(立法者)가 있어야 하며, 그 법은 시대를 초월하여 완전한 법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에는 그 입법자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출20:2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사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입법자)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과연 그 입법자인 <창조주>가 과연 존재하느냐 는 것입니다. 만일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다면 법도, 죄도, 심판도, 내세도 없으며, 성경의 구원은 허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제일 단계는 <창조주의 존재> 확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he exists) 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기 <그가 계신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법을 알고, 죄와 심판을 알고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죄의 용서를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창조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한 길은 바로 창조가 과연 <과학적인 사실이냐?> 아니면 학교 과학책에서 가르치는 <진화가 과학적인 사실이냐?>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진위(眞僞)를 분명하게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게 하는 교육이 바로 <창조과학>입니다. 창조과학이란 말은 성경 창세기 1:1절에 기록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결코 신화(神話)나 전설(前說)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절대적인 사실(진리)라는 것을 입증하는 학문입니다. 천문학자 갈릴레이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한 권은 자연(만물, 피조물)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으며,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창조과학으로 하나님의 존재만 확인되면 다음 단계인 예수님 신앙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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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연재를 마무리 하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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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8
- 베드로에게 주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다. 그러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라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음부의 권세에 넘어지지 않는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다. 이와 같은 주님과의 친밀한 조우와, 하늘 아버지로부터의 계시와, 주님으로부터의 직접 천국열쇠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된, 주님으로부터의 영적 지지이다. 이렇게 영적 지지를 받는 베드로였지만, 감히 밀려오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내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가시는 길을 미리 아시고 계셨으나, 그의 제자들은 이제서 ‘그가 걷고 계신 길’을 학습 받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갖춘 것만으로는 누가 감히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 하리요? 이 지상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갈 수 있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 주님 예수 외에는 합당하신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베드로이기 보다는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마태에게 더 마음에 와 닿는 또렷한 슬로건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진정성이 있게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깊은 이해가 있었고, 그 가르침을 등한히 여기질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록을 빌리면, 베드로가 욥바 해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서 있는, 밤낮 무두질로 인해서 냄새가 진동을 하는 피혁 가공공장, 무두장이네 집에서 여러 날 묵고 있을 때였다. 저는 오랫동안 중풍으로 인해서 누어있던 애니아를 그 병상에서 일으키었다. 뿐만 아니라 도르가를 주검에서 일으켰다. 정말 그리스도의 수제자답게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렇게 명성을 쌓으면, 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질 아니하고, 강을 건너 지방으로, 도시들을 지나서 중앙 도성에 다다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사무엘의 소문이 전국에 퍼져나갔던 것처럼 그의 영적 권위와 파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그러한 명성과 권력과 귀하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거룩한 몸이 누추한 무두장이네 집 사랑방에서 기거하였다 함은, 실로 오늘을 사는 서울 양반인 우리로서는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중에 베드로 같은 이력과 경력을 쌓았다면, 얼마 전 어느 나라의 한 도시의 시장이 된 아무개처럼 수십억대의 저택에서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터인데, 우리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한 이들의 사고방식처럼, ‘음부의 권세가 넘볼 수 없는 교회’를 그런 형식으로 생각하여서, 교회당을 궁전 같이 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몸가짐을 갖고서 사도들을 바라보아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스스로가 말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어느 군대가 넘볼 수 없고, 어떤 강한 왕이라도 점령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도성을 예비하였던 것이다. 저는 아무 미련도 없이 배를 버려두고서는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연연하지를 않았다. 어느 누구 같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며, 콩이니 팥이니 하고 참견을 하며 시비를 두질 아니하였다. 저는 벌써부터 자리에 연연하질 않고서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다. 우리 주님의 복음서를 기록한, 거룩한 서기관인 마태가 눈여겨 본대로, 사도 베드로는 과연 음부의 권세가 쓰러트릴 수 없는 견고한 도성의 기초가 되어 있었다. 저는 하나님나라의 열쇠를 거머쥔 권세자로서 아주 겸허한 문지기였다. 비록 냄새나는 무두장이네 집의 방 한 칸을 빌려서 자리를 얻어 몸을 두었지만, 그 앞에서는 어둠의 권세들이나 지옥의 창끝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의 사도인 베드로도 역시, 주님처럼 자유와 거룩을 터득하였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서 자유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으나 이성으로부터도 자유 하였다. 그의 부인이 사역에 항상 참여하였음이 이를 밝히 증명하는 것이다. 사도는 오로지 자신의 백성들에게 순수한 복음만을 공급하였다. 그가 말하는 교회란, 몰려다니는 어린아이들이나, 원숭이무리 같은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시민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끈 젖먹이들 같은 양들이 아니라,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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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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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가는 미국, 그리고 주권자의 심판!(5)
-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모 라디오 기독 방송에서 국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목사님이 정치인과 대담을 하는 프로그램을 청취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목사님은 MB 에 대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위를 선양한 분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필자는 목회자도 세상에 대해서는 분별력이 없기는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향후 나라일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과 세계에 유명세를 타는 분이라고 알려진 목사님도 저러한데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분별력 없는 정치성 발언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비판과 조롱이 한때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이 근래의 일이다.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국내외에 알려진 목사님도 주의 영광을 먼저 생각지 아니하면 세상일에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해였다. 그때 필자는 그 목사님에게 한국정치와 이명박, 하나님이 이 나라에게 하시는 말씀 등의 내용이 담긴 장문의 편지를 등기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 MB의 부정과 탈법, 탐욕, 실책 등에 대한 정치권과 국민의 따가운 비판에 대해서 목사님은 지금도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영적인 리더 들의 생각과 판단력이 이 정도이니 일반국민들이 따라 배울까 겁이 난다.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선악을 끼치는지 한국교회는 각별히 조심해야한다. 무엇이 진정 하나님의 공의와 국민을 위한 길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의 명성과 명에를 자랑하지 말고 성령이 말씀하는 현상을 제대로 듣고 국민들의 진정한 진리의 스승이 되어야한다. 한·미간의 관계에서 생뚱맞게 교회와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이유는 한국의 대미 관계의 속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한국의 기독교와 대통령을 비롯한 기독 정치인들이 미국에 대해 맹목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향이 미국과의 종교적, 정치적 동질성을 자랑스러워하고 상대의 본심과 행동에 관계없이 일방적 짝사랑을 나타내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국익을 침해받는 일이 많음에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침묵하며 미국과의 관계를 자랑으로 내세우는 일이 많다. 국제정치는 힘(POWER)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정론이지만 이것이 맹목적이고 일방적 짝사랑 일 때는 결국 뒤통수를 맞게 되어 있다. 미국이 근현대사에서 대한제국과 한국을 일방적으로 따돌리고 일본에게 식민지배의 허용과 분단과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을 우리 국민과 교회는 어찌 그리 관대하며 현재의 것만을 바라보는지 참으로 답답할 일이다. 한국에게 미국은 현재나 미래나 이용할 가치가 있는 힘 있는 이웃이라는 냉철한 시각으로 한·미관계의 사고를 재정립해야한다. 특히 정 많은(?)한국은 이러한 국제적 사고방식이 그 어느 나라보다 필요하며 모든 국민이 국제정치적 감각을 몸에 체득해야 과거의 조선과 같은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게 된다. 미국을 아직도 한국의 진정한 우방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한 것이며 국제정치의 속성을 모르는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과 적은 없다”는 말은 강대국들의 피눈물 나는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부시 대통령의 국방고문을 지낸 리처드 필은 미국이 남한의 대북정책에서 화해의 기미가 보일 때 협력하지 않는 이유를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남한의 안보가 아니라 미국의 안보이고 남한 사람들과 미국 국민들의 이해관계는 다르다”라는 말로 잘라 말했다. 또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차머스 존슨 교수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곳에 평화가 오는 것”이라며 숨겨진 속내를 드러냈다. 그곳은 당연히 한반도이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고착화된 정책이며 그들의 본심이다. 미국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세계정책과 국익의 일부로 치부한다. 이제 혈맹과 한국전쟁의 은인이라는 말로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아야한다. 이용가치가 없으면 언제든 용도폐기 할 수 있는 냉엄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이 그러하듯 한국도 미국을 이용가치로 여기고 연연하지 말아야 피도 눈물도 없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동맹과 국익은 구별해야한다. 이 땅에서 진정한 우방과 도움의 손길은 하나님이심을 특히 영적 지도자들이 정확히 인지하고 국민들에게 알려 주어야한다. 모든 열방은 하나님에게 통의 한 방울의 물처럼 보잘 것 없다. 한 방울의 물과 같은 미국에게 당당할 수 있는 지도자를 하나님이 세워주길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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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가는 미국, 그리고 주권자의 심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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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청년아!
- 올해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직을 했다. 학과에서 1등을 해서 학장상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고, 실력도 뒤지지 않건만 임금이 열악하기 그지없다. 임금의 문제가 어찌 우리 딸만의 문제이겠는가? 지금 온 세계가 겪는 재앙이다. 지난 해 임금 상승률은 50대 이상은 7% 증가한 반면 20-30대의 임금은 0%의 증가에 머물렀다. 이런 현상에 절망하다 못해 분노까지 치미는 이유는 이 시대의 청년들만큼 열심히 산 청년들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원을 돌며 공부만 해야 했고, 대학 때도 학점 관리와 더불어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놓아야 했으며, 영어 실력도 탁월하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좁은 취업문과 도무지 가정조차 꾸릴 수 없는 열악한 임금이다. 청년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열정과 낭만,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치기어린 선택도 해보지 못한 이들이다. 이들이 처한 환경을 생각하면 이 땅에 거대한 저주가 내린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실 이런 문제로 심히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일 년에 수만의 직업이 없어지고, 수만의 직업이 새로 생기는 이 시대에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국민소득은 높아진다는데 서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려워져만 가는 현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Key를 쥐고 있는 가진 자들은 정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이런 조짐들 때문에 십 수년 전부터 심히 고민을 해왔고, 오늘날은 마침내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 땅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때로 눈물을 쏟으며, 또한 가슴을 치며 기도해왔다. 그리고 최악으로 치닫는 이 순간, 마침내 학개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문제의 해결을 정부와 기업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욕심과 정부의 무능 앞에서 가슴이 무너졌고 절망을 넘어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셨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데, 열악해진 생업의 환경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 말씀을 남편과 함께 나누며 성도들이 교회에 더 헌신할 때가 된 것은 아닌지 남편에게 물었다. 그 때 남편은 한 마디로 말했다. “평생을 수고하고 헌신해 온 성도들에게 더 이상 헌신하라고 할 수 없소.” 그랬다. 119년 된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힘에 지나도록 교회에 헌신해 왔다. 이제 연로하고 지쳐있는 성도들에게 더 이상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청년들의 헌신이 필요할 때라는 것을. 50대 이상의 성도들은 젊었을 때 참으로 힘에 지나는 충성을 했었다. 밥을 굶어가며,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봉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편견과도 많이 싸워야 했다. 지금이야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얼마 전까지도 술, 담배를 하지 않는 크리스챤은 핍박을 견뎌야 했다. 요즘은 토요일이라도 쉴 수 있지만 그 때는 토요일도 직장에 가야했고, 그나마 오후에는 교회에 와서 주일 준비를 했다. 일 년 내내 거의 쉬는 날 없이 교회를 섬겼다. 그 수고의 보람은 있었다. 교회가 크게 부흥했었다. 그렇게 가진 것 없이 교회 봉사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인도해주셨고, 50대의 임금 상승률은 젊은 층을 능가하고 있다. 우리들에 비해 지금의 청년들은 교회에 대한 헌신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자신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다.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 역시 교회를 섬기는 일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을 했었다. 그러나 그 때도 ‘학개’서의 말씀이 나를 인도했었다. 나 자신의 앞날에 투자하려다가도 학개서를 읽으면 교회를 외면할 수 없었다. 교회 봉사만 하다 보니 실력도 갖추지 못하는 것 같고, 물질도 전혀 없어서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죽으면 산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교회와 하나님을 섬길 때 삶의 길이 열리고, 환경의 축복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청년들이 먼저 하나님의 집을 세우길 원하신다. 주의 전을 먼저 세우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50대가 되었을 때 또 다시 그들이 자녀들에게 교회를 먼저 세워야 한다는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게 되리라! 아, 그리하여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찬란한 하나님의 집들이 대대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갈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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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청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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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칼럼 연재를 마무리 하며 1
- 저는 2008년 2월 5일부터 시작하여 2014년 4월 20일까지 본지에 “창조론과 진화론” 이라는 주제로 창조론 칼럼을 230회 연재하였고 이어서 “창조의 원리에서 본 성(性)이란 무엇인가?” 는 주제로 32회의 칼럼을 연재하였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의 칼럼을 애독하여 주시고 격려와 칭찬을 보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칼럼을 마무리 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간곡한 호소와 제언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지하신 바와 같이 지금 한국교회는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급속한 외적 팽창을 이룬 한국교회는 2000년대 들어와 확연하게 침체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출산율이 떨어져 자연스럽게 교인수가 감소한 원인도 있지만, 개신교가 신뢰를 잃어 교인들이 이탈했다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지난 9월 말 한국 주요 장로교단들이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회의 자료인 총회 보고서에는 교단의 교세 현황이 담겨 있었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이 보고서를 기초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 통합(예장통합), 고신(예장고신), 합신(예장합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 등 6개 교단의 지난 10년간 교세 변화를 분석한 결과 교인 수는 6개 교단 모두 줄어들었는데 그중 예장합동의 경우, 지난해 말 교인 수는 285만 7065명으로 전년 대비 4.6%가 하락한 수치를 보였으며 이는 13만 7808명이 감소한 것으로 웬만한 군소 교단 교인 수보다 많은 숫자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교단도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이대로 나아간다면 장차 20-30년 후에 한국교회 모든 예배당은 유럽의 교회처럼 노인들 소수만 자리를 지키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시급한 대책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여기에는 전문가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분석과 대책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십 년 동안 오로지 창조과학 사역에 올인(all in)하고 있는 필자의 견해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1,200만 명 기독교인 수를 자랑하지만 그 중에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명목상(名目上)교인이 많습니다. 전도대학 학장인 최일호 목사의 말대로 교회 안에는 신자(중생한 자, 알곡)가 있는가 하면 교인(종교인, 불신자, 가라지)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교회 안에 있는 명목상 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창조과학 교육을 통해 <창조신앙>으로 무장시켜야 합니다. 창조과학 교육은 한 마디로 <창조주>의 존재를 확인하는 교육입니다. 창조론 즉 창조주의 존재가 확립되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기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만든 자연(롬1:20 피조물, 만물)이 하나님의 존재와 신성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로 발전하는 현대 과학은 그동안 감추어져 있는 자연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이 위대한 자연이 결코 우연이나 진화의 과정에서 저절로는 생겨날 수 없고, 어떤 위대한 지적인 존재의 설계와 창조행위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知的設計論)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통하여 창조의 증거를 제시하면 불신자라도 너무도 쉽게 창조주의 존재를 알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서나 신학대학에서조차도 이 중요한 <창조과학> 교육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창조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므로 창조주의 존재도 희미하고 따라서 구원의 확신도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 밖에 모든 학문과 매스컴은 빅뱅(Big Bang)에 의하여 우주가 생성되었고, 모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우연히 진화의 과정 속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을 마치 과학적 사실인 냥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창조가 나무로 말하자면 뿌리와 같습니다. 만일 진화가 사실이면 창조는 허구요 따라서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도 죄도 심판과 구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설 자리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창조론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라야 전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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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칼럼 연재를 마무리 하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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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65회 총회장 이영수(李榮壽)목사
- 이영수목사(1928~1987)는 1928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383번지에서 부친 이운성집사와 모친 장성금집사 사이에서 3남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15세 때 세례(洗禮)를 받고 안동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예과와 본과를 마치고, 1955년 경안(慶安)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군목(軍牧)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군목 재직시 여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1957년 11월 예편과 함께 대구에 있는 봉산교회에 부임했다가 만 12년이 되던 해에 대전중앙교회 양화석목사 후임으로 부임하여 1987년 작고하기 전까지 시무하였다. 그가 봉산교회에 부임 후 노회 안에서나 총회 안에 서서히 그의 정치력이 발흥하였고 그의 박력있는 리더쉽에 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영남지방의 중심지 대구에 있던 그에게 그의 대전중앙교회의 부름은 지역적으로나 그의 능력으로 보아 교단 전체를 이끌어가고 아울러 가기에 적합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갔다.대구 봉산교회에서 대전중앙교회로대전에 부임한 그는 교회성장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교인 증가로 새로운 예배당 건축 과제가 대두되었다. 대구보다 영역은 좁았지만 대형교회로 선두를 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그의 목회 리더쉽은 자연히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른바 교정(敎政)의 무대 한 가운데 중심 인물로 부상되어 간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영남지역 거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반대 세력의 J목사의 말 “내가 교단내 모든 사람들을 다 이겼지만 이영수목사에게만 졌다”고 실토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목사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이룰 정도로 서로 달랐지만 그의 지도력에 의해 교단을 일사천리로 원만하게 이끌어 가며 교단의 구심점이 되어 예장이 한국 전체 교단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하여서 만은 양쪽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교단 안에 끼친 대표적인 인들로는 교단부흥의 기초석이 된 일만교회운동 전개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1973년 여의도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Billy Graham Grusdde)와, 그리고 이듬해 8월로 예정되었던 전국규모의 Explo’74전도대회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이끌고 있는 김준곤목사의 야심찬 계획을 간파한 이영수목사는 1974년 1월 17일 교단 지도자 20명을 대전 유성관광호텔에 초대하여 교단의 진로와 발전을 위한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비생산적인 교권쟁탈전을 탈피하고 교단의 힘을 전도와 부흥, 교단발전을 위하여 힘을 모으자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지도자모임의 산물이 <일만교회운동>이었던 것이다. 1만교회운동 전개여기에서 다짐한 결의문을 보면, (1) 우리는 우리 총회의 부흥발전을 열망한다. (2) 우리는 1980년대까지 일만교회운동을 전개한다. (3) 우리는 국내의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 합의가 그해 9월 총회에서 교단정책으로 채택되어 교회성장운동과 교회개척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일만교회운동의 실행위원과 기획실장을 맡아 전국교회로 하여금 교회개척과 적극적인 전도운동과 더블어 해외선교와 병행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순회집회와 교단 소속 부흥사들을 동원, 도시와 농촌을 무론하고 교회 확장운동과 전도집회를 이끌어 갔다. 이 운동은 단순히 숫자적인 <일만교회>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합동측 교단 안의 모든 개교회로 하여금 선교와 전도, 구제와 봉사,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확인과 실천에 지대한 각성과 결실을 가져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 운동이 자극제가 되어 장로교의 타교단에서도 3천교회운동, 5천교회운동, 300만달성운동으로 확산되어 가는 불씨가 되었다. 이같은 일은 이영수목사의 리더쉽이 이끌어낸 전도운동이었다.총회회관 건립다음으로 이영수목사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총회회관> 건립을 들 수 있다. 그는 총회 일만교회운동을 이끌어 가면서 교단의 발전에도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목사는 합동교단이 장자교단을 자처하면서도 마음놓고 총회업무를 볼 수 있는 건물이 없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즈음에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이미 총회회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총회회관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목사는 1959년 총회가 분열되면서 당시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던 선교부가 통합측으로 가버린 후, 예장은 총회가 업무를 볼 안정된 장소가 없어 장충교회에 사무실을 대여해 이곳 저곳으로 보따리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총회회관 문제는 1968년 5월 제53회 총회에서 결의되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3년 7월에 영등포구 여의도동 1-708번지 203평의 부지를 매입, 총회센터 건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후 이목사가 <총회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총회를 섬기면서 1980년말 지하 2층 지상 10층의 건물을 건축하기로 했으나 각종 건축규제가 심해 여의도 부지를 매각하고, 1981년 8월 당시로서는 허허벌판이었던 강남구 대치동 산 36-4번지에 560여평의 현 총회회관 부지 매입을 주도하였다. 이때 반대 세력들은 이목사의 독단 무모한 사업계획을 우려하면서 재정적 도움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목사는 이곳이 곧 서울 강남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오늘의 총회회관이 이미 설계되어 있던 설계대로 교단 행정 중심센터로 자리잡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을 보면 그의 패기와 선견지명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총신대학교의 양지캠퍼스 마련세번째로 그가 이룩한 업적이 있다면 오늘의 교단 인재 양성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총신대학교의 성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목사는 자기의 모교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총신을 아끼고 성장시키고 사랑하는 인물이요 지도자였다. 그가 총회직영신학교 재단 부이사장과 이사장 시절 1981년 3월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 41-1번지의 22만3329평의 야산을 매입하여 동작구 사당동 캠퍼스에 이어 제2대학캠퍼스를 꿈꾸며 총신대학교를 세계적인 청교도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요람으로 우뚝 서게 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영수목사는 정부가 대학 지방 분산 정책을 발표하기 전부터 탈(脫)서울 계획을 세우고 총회센터 부지와 함께 동시에 신학교 부지 물색을 진행시켰다. 학교당국은 여러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적당한 땅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용인시 양지에 당시 백화소주사장 강정중씨 소유 야산이 회사의 채무관계로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영수목사는 즉시 강사장을 만나 구매 교섭을 하였다. 5억짜리 땅을 깎아 4억2천만원에 매입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그중 5천만원은 강사장이 학교에 기부(헌금) 하기로 해 실제 지불액은 3억7천만원에 해결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땅에 이미 심어놓은 유실수 및 관상수가 당시 싯가로 1억원에 이르는데 이것까지 넘겨 받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2억 7천만원에 총신부지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총회 세계선교부 창립또 한 가지를 이야기 한다면 총회세계선교부(G.M.S)를 말할 수 있다. 이목사는 자신이 섬기는 대전중앙교회에서 1983년 정홍권선교사를 미국에 흑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었고, 1985년엔 김효곤선교사를 독일에 파송한 바 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교단차원에서도 선교사 파송의 필요성을 느낌과 함께 선교사 양성을 위해 초교파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하였고, 총회직영 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1972년에 조직된 한국해외선교단체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고, 그런 토대 위에 오늘의 총회산하에 있는 세계선교훈련원의 기초와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2013년말 한국교회가 해외파송 선교사 총수 23,331명 중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예장합동 소속선교사임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찬송가 통합에 공헌마지막으로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통일찬송가의 발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새찬송가’ ‘합동찬송가’ ‘개편찬송가’로 나뉘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 일에 주도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여러가지로 나누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단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하나의 ‘통일찬송가’로 묶는 작업은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기여하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뒤늦게 참여하기는 했지만 한국찬송가공회의 공동회장이 된 이목사는 교단의 힘을 배경으로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찬송가를 통한 복음선교와 교단간의 일치와 연합뿐 아니라 선교에 큰 원동력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찬송가공회 이름으로 통일찬송가 10만부를 인쇄해 군선교회에 기증한 것만 보아도 찬송가연합의 일이 개인적인, 또는 개교단적인 소승적인 이익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 유익과 미래선교의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는 갔으나 그가 끼친 복음의 열정과 확산 인재양성의 높은 이상은 길이길이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할일을 다하고 1987년 12월 2일 한참 일할 나이인 60세로 생을 마감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는 또힌 짧고 굵게 살아간 교단의 걸출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한국교회의 거인(巨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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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65회 총회장 이영수(李榮壽)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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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를 지고 사는 삶 - 배성산목사
- 신세를 지고 사는 삶산다는 것은 신세(身世)를 지고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먼저 창조하고 사람을 나중에 창조한다.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신세를 지고 사는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몸은 이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요 영혼은 저 하나님의 나라를 상대하고 사는 삶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삶은 서로의 삶에서 신세를 지면서 서로의 삶을 관계하며 신세지게 한다. 그 이치를 깨닫는 이성(理性)과 열성으로 사는 세상의 삶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을 사는 이치를 알게 한다.성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의 실상(實狀)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한다. 믿음은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 목적을 이룬다고 한다. 믿음은 실제의 상태를 알아보는 실상이기에 그 증거로 '신세를 지고 사는 삶'으로 사는 것이다. 앞서간 선진들이 이렇게 살았다. 신세란 ? 자기 한 몸에 관한 처지와 형편으로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 괴로움을 끼치는 일로 '신세를 진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미(性味)를 갖지만 인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신세를 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삶의 자리는 이세상과 저세상, 이것과 저것을 상관하며 산다. 살아가는 길에 있는 삶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으로 저 세상의 고향의 삶을 그리워한다. 여기에 삶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쏠리며 그 가는 곳이 어딘지를 믿게 하고 세상을 지으신 분을 알게 하여 세상 마지막 하직하는 날 하늘나라로 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신세 진 것을 아는 것이요 이것이 믿음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서 신세를 지고 와서 저 세상으로 가는 신세로 산다. 가진 것 없이 세상에 태어나 가진 것 없이 가는 삶이기에 태어남과 돌아가는 삶은 신세를 짐으로 이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인생임을 본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사는 오늘의 세상살이에서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을 저버린 흔적들로 가득하다. 서로의 불신의 벽의 골이 너무 깊어가는 현실을 본다. 먹고 살만 할수록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패륜(悖倫)의 사실은 검게 타 오르고 있다. 인간의 패륜의 세력은 배움도 가짐까지도 상관하지 않고 흡수한다. 오히려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기승을 부린다. 여기에 먹고 살기가 바쁜 이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가진 것이 많아 문제 되는 죄의 경우가 너무 많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天倫)과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인륜(人倫)을 따라 살아간다면 복이 있겠지만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면 결국은 피차가 망하는 경우를 보고 살아가고 있다. 정초부터 한 해를 살아가야 할 우리의 결단이 여기에 있다. 세월을 붙잡아 때를 알고 바라는 소망과 순리에 따라 희망을 얻어 새 한해를 살아야 한다. 이는 천하만사가 하늘의 뜻에 의한 이치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트이며 삶의 처음 바탕이 되어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인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인 하나님의 형상회복으로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얻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사회는 이웃사람들의 삶의 은혜에 감사하고, 행동을 통하여 헌신과 희생을 실천하며, 기쁨과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인격의 실체인 이성에 그리스도인의 이성인(Logos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부정적 감정이 승화되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위해 속죄의 언약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은혜의 언약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모든 언약에는 약속과 요구가 있다. 은혜언약의 약속은 나와 너와 네 대대자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있으며 이 언약의 요구에 응함으로 언약의 약속이 충당하는데 여기에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을 받아 들여서 그 삶은 생명에 이른다.내삶의 오늘이 신세타령으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지만 말고 자기 자부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부인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아버지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사는 삶”으로 사는 믿음이 증거되어야 한다. 내 삶의 처지는 그 인생살이가 매우 초라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사는 믿음은 내가 세상을 지으신 주인의 자녀임을 알 때 아버지의 자녀의 기쁨은 섬광과 같이 빛나며 내 마음에 기쁨과 희망이 넘칠 것이며 이 자부심은 어느 누구도, 무엇도 나를 넘어뜨리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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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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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를 지고 사는 삶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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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7
- 예수님 당시 Mishnah, Priq aboth에 보면 세상을 떠받드는 기둥이 세 개가 있는데,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전, 나머지 하나는 신도의 경건과 윤리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이 세 가지를 절대화하여서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무너지면 세상이 모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성전신앙과 이를 기초로 하는 경건생활과 윤리생활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히 여겨지는 가치관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이같은 사회 체계에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세우려는 복음의 창시자들이나 이를 기초로 한 하나님나라의 가르침을, 바울서신과 사복음서가 그저 지나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율법과 성전예전과 백성들의 삶을 아주 예리하고 시원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예수께서는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시고 성전의 예전 같은 기능과 제도를 통해서 강도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제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생활이나 경건성이 과연 실천이 이뤄진 적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비판은 예레미야나 에스겔, 이사야 선지자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예수께서 등장하기 까지는 그 율법적인 것과 성전의 기능과 역할이 보완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예수께서 가르치는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건설은 이 세 가지 기둥을 새롭게 갈아 치는 새 포도주였으며, 그 가르침을 담지 하도록 새롭게 제안하는 새 부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기적과 표적이 동반됨에 따라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믿음 대상이 예수께로 전환되고, 백성들의 삶이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형태로 전환되는 조짐이 일고, 당시 권력자들과 사회적 가치의 중심권에 있는 자들에게, 이전의 가치관과 제도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붕괴의 두려움이 가중되자, 예수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말았다.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희생이,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위한 하나님께, 필연적으로 드려야하는 속죄의 제사가 되었고, 세상 짐을 모두 안고 십자가에서 도말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어 지시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다시금 전열을 정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한 곳에 모여 기도하였는데, 저들 모두가 예수께서 약속하신바,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특정인 몇몇에게만 기름 붓던 것을, ‘말세에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이 이뤄진 것이었다. 이날 이후 성령은 하늘로부터 강림하시어서, 주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이에게 내주하시는 영광을 신도들 모두가 받게 되었다.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바 된 이 선물은, 그의 영이신 성령님도 함께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시어서 인간에게 내어주신 바는, 경이로울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신데, 시인들도 이를 말과 붓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신비이다. 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우리의 인격 안에 임재 하시게 됨을, 그의 은총과 거룩함을 그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에 있는 언어로는 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요한의 복음서에 기자는 말하기를, 아직은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지만,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는 예수님의 초막절 끝날 행사의 절정에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모든 믿는 자의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와 사역과 능력과 순결과 거룩을 일컬어서 가리킨 것이었다.이로써 바울은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세 가지 기둥으로써 건설하였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과 열매로써 본을 보임이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서 가르침과 능력과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고, 그 결과 삭개오 같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듯이, 예수와 제자들에게서 복음 선포와, 성령의 나타남과, 본을 보임에 일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사도가 어떻게 하였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아주 짧은 기간에 건설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교회는 마게도니아 지방에 모범이 되는 교회로서 믿음과 생활에서 좋은 소문이 자자하였던 것이다. 바울, 그는 단단하게 무장된 복음과, 성령의 온갖 은사와 능력과, 성령의 열매로 본을 보임으로서 사역한 결과이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온전하게 갖추고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놓친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과 본을 보임은 어떻게 해야 되찾아 올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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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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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가는 미국, 그리고 주권자의 심판!(4)
- 기울어가는 미국, 그리고 주권자의 심판!(4) 미국의 전략적 음모(2)20세기 중반 이후에 자동차, 철강, 조선, 기계 등 세계 중화학공업의 제조 산업을 제패하던 미국은 1970년대에 이르러 이들 산업에서 서서히 손을 떼기 시작하였다. 정부도 이들 산업에 대한 지원을 줄여나가고 대신에 에너지와 식량과 같은 교통수단의 필수적인 원천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유지의 수단인 식품산업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키신저가 “석유를 통제하면 모든 나라를 통제할 수 있으며 식량을 통제하면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정부에 미래의 세계를 장악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 이후 미국은 실제로 이들 에너지와 농업과 식품산업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였다. 세계인들은 우주를 왕복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에너지와 1차 산업 같은 개발도상국들이나 하는 산업에 왜 저리 관심을 기울일까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진작부터 눈에 잘 띄지 않는 농업과 에너지산업을 장악하는 것이야말로 세계를 영구히 장악, 조종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에너지와 농업을 국가의 전략 수출산업으로 육성시켜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 나라가 현대적인 산업과 발전에만 치중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 후 정작 자신들은 다른 길로 달려갔다. 현재 석유와 가스와 같은 에너지와 관련된 전쟁과 쿠데타, 암살, 종교 갈등의 배후에는 거의 모두 미국이 배후에 있다. 최근에는 석유와 식량산업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주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것은 근본적인 목표라기보다는 미국외교의 전통적 특성인 반사외교에 따라 가상적국을 만들어 놓아 전쟁의 합법성을 확보하고 애국과 민주주의, 세계평화라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국민들을 세뇌하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자는 1%도 채 안 되는 극소수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뿐이고 이는 세계 최대 인종 전시장인 미국에서만이 도덕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미국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실지적으로 자신들의 본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세계를 장악하고 자신과 혈육들의 부와 안위만 확보된다면 그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고 있음을 오랜 세월동안 보여주었지만 정작 세계가 이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2003년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발생한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37만의 사상자와 270만의 난민 발생을 두고 워싱턴은 이를 대량학살이라 규탄하고 수단의 내정에 간섭할 채비를 갖추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서방 언론은 미국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NATO 연합군과 유엔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야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행보에 힘을 실어주었고 세계 각 나라도 미국과 서구 언론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미국의 추악함이 있었다. 수단에서 대량의 석유가 발견되고 중국이 이에 접근하자 미국은 수단인민해방군을 훈련시켜 정부에 반기를 들게 하고 인접 국가들을 동원하여 전쟁을 부추겼다. 그리고 수단 국민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방관하면서 인종 학살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세계를 자극시켜 자신들이 개입하여 수단의 원유를 독차지하려는 음모를 단행하였다. 또한 21세기 신 아편이라 불리는 유전자변형식품(GMO)은 1985년부터 미국정부의 지원 하에 록펠러 재단이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식량생산의 증대‘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구체적으로 연구, 개발하여 지금은 대량생산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미국은 이를 WTO(세계무역기구)를 통해 각 국에 강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GMO의 해악은 과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나 미국정부와 언론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 보도를 금지시켰고 세계 각 나라의 정치인들도 미국의 요구와 압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가지의 사례를 들었지만 미국의 악행은 잘 짜여 진 규범처럼 늘 이런 식 으로 어두움 속에서 항상 장기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여 왔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와 우주,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혹자는 미국이 엄청난 축복을 받고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과, 폭력, 물리적인 압박과 교만으로 다른 나라를 괴롭히고 자신들의 배만 충족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영적인 이스라엘은 국가와 개인이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한다. 나와 내 나라만 잘 먹고 잘 살려 발버둥치는 것은 악이요 죄인 것이다. 말씀에서 떠난 미국은 주권자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가 없다.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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