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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감과 어울림
- 이번 주 서울교회 전체 방에 목사님 ‘심방 문자’란에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은사는 남보다 우월함이 아니고 어울림입니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은혜 말씀에 힘입어 이번 주 설교문입니다. 온통 세상 사람들은 자기 우월증에 빠져 있고 이 자신의 우월감에 세상은 시끄러워진다. 이는 사람의 심리를 파고 드는 것이 우월감이며 바로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것임도 알게 합니다. 이 우월감은 만으로는 세상을 사는데 권위를 내세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현실을 경험한다. 우월감 자체는 사실로 무엇을 모르는 데서 오는 감정이기에 열등감에 빠질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예컨대 가장 똑똑한 사람과 가장 멍청한 사람이 통할 수 있고 지능이 발달한 사람이 지능이 거의 없는 동물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자연을 보고 짐승들을 보면 어리석게 보이는 것들이 그들 나름으로 똑똑하다고 보는 점은 나름대로 생각한 관념으로 행하는 나쁜 습성은 서로의 관계에서 멀어진다. 세상은 계속해서 시간의 흐름에 변화하며 이어가는 것은 서로의 관계에서 일구어 가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 서로의 관계는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여기에 나온 성서의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후예로서 바벨론에 대한 슬픔을 한 몸에 입고, B.C.53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적의 방해에서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며 다리오 왕 치하에서 총독의 자리에서 선지자 학개, 스가랴, 스룹바벨 선지자들의 변함없는 격려에 성전 재건은 BC515년에 완성되어 스룹바벨의 역할과 그 공을 인정하기에 ‘스룹바벨의 성전’이라고도 하였다.오늘의 본문은 스가랴서의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 ‘아름답다, 아름답다!’하고 외칠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본래 어울림은 화해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 자연의 이치는 서로가 함께하는 화해에서 어울림을 깨닫게 한다.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의 흐름이 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지만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끝내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할 그 이름, 영원한 지혜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는 것이다. 그 영원한 지혜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혹자는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으로 이야기하지만 기독교는 엄밀히 따지면 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통하여 계시해 일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영으로 계시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고 참되기 읽고 깨닫고 날마다 말씀으로 깨우쳐 사는 삶의 생활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믿음의 은혜로 사는 삶이다. 자신의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벗어 버리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십자가의 도리를 몸에 지니는 것이다. “광복 70년을 맞는 해”에 하나의 민족이 하나 되어 화해로 계시 받는 통일을 위한 기도하는 2015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소중히 추구하는 남북의 지도자가 평화주의자로 거듭나는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통일을 기도한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른 듯 하지만 한 뿌리에 있다. 이는 삶의 정체성을 가로 막는 무덤과 같다. 부활의 길로 나가는 자는 자아를 벗어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길로 나가는 주님의 길, 진리, 생명의 길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불리는 6.25사변은 하나의 민족이 존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같은 형제도 상관없고 우리끼리만 잘 살아야 한다는 자기 이익추구에만 매몰되어 가는 오늘의 우리나라 현실은 이웃사랑을 내세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일러준 교훈마저도 사회도 교회도 그 말씀을 잃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화해와 용서 이해와 관용이 필요한 때이기에 우리는 어울림의 자기를 찾아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다 지우고 광복 70년을 맞는 해에 화해와 통일의 길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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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감과 어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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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50회 총회장 정규오(丁奎五)목사
- 전남 나주 출생정규오목사(丁奎五, 1914. 10. 14~2006. 1. 19)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용동)에서 정효순(丁孝純)씨와 강누동(姜樓洞)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1907년 9월 18일엔 조선장로교 7인의 목사가 탄생했고, 목사 장로가 중심이 되어 노회(老會)가 형성되었고, 또 1912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총회가 조직된지 2년째 되는 해인 1914년 장차 그 총회를 위해서 사역할 한 주의 종이 조선의 남쪽 끝 나주(羅州) 땅에서 태어났다. 나주는 공교롭게도 이 지역을 선교지로 위임받은 배유지(Rev.Bell Eugene 裵裕址)목사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배유지 선교사가 그토록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몸 바치고 헌신했던 그 땅에 앞으로 그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헌신할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정규오가 태어난 1914년의 방산(芳山)지역은 이미 1896년(고종 33년)에 한반도에 13도 제도가 시행되어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어졌는데, 전라남도로 나누어진 1896년에 전남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래된 지역은 당시 전남의 행정중심지였던 나주였다. 그해 11월에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였던 이눌서(Rev. Reynoles William. D)와 배유지 선교사는 함께 전남지역의 나주를 답사하고 복음을 전했다. 주일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아정규오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고 주일학교에서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훈련을 받았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겨울이나 여름휴가를 이용 성경을 집중연구하는 부흥사경회로 교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는데 치중하였다. 나아가 새벽기도회, 가정예배, 금요구역예배도 거의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정규오는 동내에 세워진 교회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한국인 목사 장로들을 통해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가르침과 신앙교육은 후일 그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누구보다도 확신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갈고 다져진 철저한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얻은 신앙적인 확신에서 였다고 하겠다. 정규오는 당시 방산교회 안에 사립 사설강습소가 있어서 2년동안 학습하였고, 후에는 다도면 판촌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어린 정규오에게 평생을 좌우할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책(冊)이었다. 당시 당산교회 송복순전도사님 남편 남복우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책들이 그에게 넘어왔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동서양의 지식과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책 중에는 일본에서 간행된 중학 강의록과 와세다대학 강의록이 있어 지식의 기초를 쌓았고, 엔사이구로베지아 일본대사상전집, 법학, 철학, 윤리학에 관한 서적과 칼 맑스가 쓴 자본론 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이론 중에 맑스의 사상을 연구한 이유는 그의 생질 이민호와 이론투쟁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문학·법학·철학·신학 등 사상 섭렵그는 1945년 9월 신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독학을 통해 여러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신학연구를 위한 인문소양의 지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이미 한 시대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비단계로 미리 많은 책들을 통해 그의 사상기반을 다지신 것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생애의 큰 사명이기도 했다. 좌·우익 대결 속에 6·25라는 참상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과 허구를 직접 눈으로 체험한 자로써 공산주의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변호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규오목사 생애 가운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 이미 박형용박사가 쓴 한국의 정통 기독교 변증서라고 할 수 있는 1935년판 <신학난제선평>(평양신학교 간행)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을 신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시 조선교회에서 유행하던 이사상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고 비평한 전 18장 850페이지에 달하는 변증서요, 급히 몰아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경고를 시도한 신학서적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서적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나온 많은 사상서들을 읽은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그가 1934년 11월부터 1940년 초까지 광양진상금융조합 서기로 6년간 일할 때에 출석했던 당시 광동중앙교회 담임목사(김순배)로부터 서제에서 선물로 받았던 애장품이었는데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책의 저자 밑에 강의를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책을 열심히 읽었던지 그 책의 내용을 저자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 책만큼은 저자 박박사님보다 제가 신학난제선평을 더 잘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 정규오가 박형룡박사의 책과 만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오는 드디어 1945년 9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8선이 그어져 남북간의 통행이 막히게 되고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산 당하고, 8·15 광복 직후 <남부총회>라는 이름으로 복구되었으나, 총회직영신학교로 자유주위 신학을 대변해 온 ‘조선신학교’가 김재준을 중심으로 일부 교수들이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통보수신학에 반(反)하는 성경관과 신학을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그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 장로교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자 일어난 그룹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였다. 51인 신앙동지회 규합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당시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보수신학을 사랑하는 동지 51인을 규합하여 1947년 4월 18일~22일에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되는 제33회 총회로 내려가 진정서를 제출,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고 그 주동자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진정서 안에는 (전문) 조선신학교에 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의 유시(幼時)부터 가지고 오는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정규오 목사의 신앙관과 정통보수신학과 정의감이 얼마나 투절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여기서 잠시 정규오 목사와 박형룡 박사의 관계를 짚고 가자. 이미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만나기전 그의 저서를 읽고 만난 점과, 해방 후 박형룡 박사는 10년여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목숨을 건 모험끝에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박박사는 고려신학교 초청도 있었지만 51인 신앙동지회 탄원서에 용기를 얻어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하면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여관)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간 51인 신앙동지회를 대표한 정규오 회장과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탄원서한이 없었던들 귀국의 결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칠 때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고백하였다(정규오 생애와 삶 p.34. 2011).정규오 목사를 이야기 할 때는 W.C.C 반대 투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동지회는 1953년 7월 미국복음주희협회와 같은 소속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조직했다. 이 세력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일정한 교권을 형성하면서 WCC에 대항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은 세계교회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1차 총회(1948)와 2차 총회(1955)에 대표를 파송하였는데, 이 WCC문제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1955), 42회 총회(1957) 43회 총회(1958)에서 양측이 충돌하고 말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에큐메니칼연구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지지측에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반대측에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였다. 이 두 그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반대에 박형룡 정규오였고, 지지측엔 한경직 유호준이었다. 이렇게 정규오 목사는 언제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함께 갔고 오늘의 보수신학을 지키는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1979년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제64회 총회시 이끌고 나갔던 개혁측을 자신이 죽기전 합동으로 환원시키고, 그는 2006년 1월 19일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50회 총회의 결의 안건들을 보면 ①교단지<기독신보>를 당국으로부터 인가받아 간행했고, ②교역자 사례비의 5%를 적립해 은급제도 시동을 걸었으며, ③총회신학교 신축건물을 기공했고, ④WCC와 NCC와 관계되는 단체와는 협력 않키로 결의를 했다.김남식은 해원 정규오를 가르켜 <그는 우리 시대의 거목이었다>면서, 고 정규오 목사의 인간됨과 일생을 농축한 말로 쉼표를 찍었다(「해원 정규오목사」 새한기획 출판부 2007. 서울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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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동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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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50회 총회장 정규오(丁奎五)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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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6
- 지난 5월 4일, 바레인에서 입국한, 메르스 질병에 노출된 내국인에 의해서 질병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 된지 53여일이 지났다. 다행하게도 당국의 부단한 노력과 시민들의 대처로 인해서 질병의 세력이 소강상태에 이른 것 같아 시민들의 마음도 안정되는 것 같다. 우리가 메르스 질병을 실제로 겪어보니 그렇게 무서운 질병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질병의 발생국인 중동에서 조차도 자료가 빈곤하였고, 우리 또한 처음이었다. 초기 대응이 민첩하진 못하였으나 잘 대응한 것 같다.우리는 바로 지난해에도 학생들이 타고 가던 세월호가 바다에 드러누우면서 엄청난 슬픔을 맞이하였다. 이웃나라인 중국에서도 세월호와 비슷한 사고가 양쯔강 중류에서 일어났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사건이 수습된 것이었다. 우리의 이웃이지만 달라도 너무나 다르게 사태가 수습되고 마무리된 것이다. 우리는 지난 70년 가까이, 뒤도 안돌아보고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이만큼 민주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정부가 국민을 하늘처럼 무서워하게 되었고, 국가 발전이 조금은 더디더라도 국민을 챙기는 것을 보노라면 얼마나 놀라운지......,세월호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IMF, 태안 앞바다에서의 기름 유출, 대구 지하철 참사, 성수대교 붕괴 등, 우리 국민들은 끊임없이 수많은 위기들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위기들이 안 일어날 수도 있으련만, 우리가 걸어온 과정에서 통과예식 처럼 크나큰 사건들을 치러야만 하였다. 6.25 동란 같이 국가가 통째로 침몰할 수 있는 경험을 하였을 때에는, 우리 민족은 그 때에 끝이 온 줄로만 알았는데, 이웃 국가들이 발 벗고 나서서 우리의 불행에 참여해줌으로서 비로소 해결될 수 있었다. 얼마 전 참전용사가 한국을 방문하며, ‘그때 우리가 이 땅을 떠날 적에, 이 땅이 회복되려면 수 백 년이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었다고 한 것을 되새겨 보면, 우리는 극한위기 가운데서도 행운을 거머쥔 백성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IMF 때에도 우리 국민들은 장롱 안에 숨겨두었던 은금과 목걸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도 아낌없이 벗어서 국고에 채워주었다. 이러한 우리의 광경을 보고서 세계인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으로써, 한국인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우린 위기를 쉴 새 없이 많이 겪어보았지만, 그 때마다 그 위기들을 잘 견뎌내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금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건만......,우리가 조상 때부터 자리를 잡아 살고 있는 이 삼천리반도는, 지형적인 위치가 특이하게도 팔레스타인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대국굴기의 교두보로 이용되는 위치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에서 국제적인 이슈나 현안들이 시기적절하게 맞물리게 되어서 뇌관이 촉발된다고 하면, 지금까지 경험된 아픔과 상처들을 모두 합해놓은 것보다도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되어 질 것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냉전시대 이후 가장 강력한 리더십으로 무장된 군사력과 정치력이 팽배된 상태이고, 중국 또한 세계 제2위의 국력을 확보하더니, 이제는 1위를 넘어서려는 의기가 지나치다. 일본 역시 ‘天津條約’을 맺고 조선에 진출하던 시기와, 작금의 ‘미일방위협력지침’이 이뤄진 시점이 얼마나 유사하던지......, 이를 예지한 미국 역시 일본을 앞세워서 동북아지역에서의 우월한 위치를 점유함에 관해서 우린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동해지역은 겨울에 모두 얼기 때문에, 북한지역의 항구를 이용하지 않으면 무역이 부진할 수밖에 없고, 중국 또한 지형 상 러시아와 북한 땅이 붙어있기에, 동해로 진출하려면 북한의 항구를 확보해야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태이다. 오늘 동북 국경지역에서의 과도한 군사력 증강이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상태에서 현재의 북한 정세의 불안은 10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어서, 일본은 이를 직시한 듯, 부랴부랴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의 기반을 법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물밀 듯 밀려들어오는 위기를 운명에만 맡길 수는 없는 터이다. 독일처럼 갑작스레 통일이 밀려온다 해도 그 경제적 부담은 자칫 커다란 짐이 되기에, 마치 세월호나 메르스를 대처하던 식으로는 했다가는 자못 국가적 재앙이 될 수도 있고, 만에 하나 전쟁이 터져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가 북으로 군대를 들여놓는다면, 우리 민족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한을 또다시 품게 될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진 않으나 전술전략가 경제 정치가들, 종교인들을 비롯한 온 국민이 믿음과 지혜와 능력을 총괄해서 적극적인 대비를 단단히 갖춰야 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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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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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거
- 아버지께서 폐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릴 때 살던 동네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부산시 동구 수정 4동 수정아파트!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이다. 우리 네 남매와 부모님, 거기에 할머니와 고모가 같이 살았다. 고모가 시집을 간 후에는 삼촌이 함께 살았다. 그렇게 여덟 식구가 모여 살았던 아파트는 11평이었다. 요즘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그 좁은 집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함께 그 동네를 찾아가곤 한다. 수정아파트에 가보자고 하니 아버지도 좋다고 하셨다. 내 생각에 아버지도 그곳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하셨을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린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좁은 곳에서 온 식구가 사는 것이 뭐가 좋았을까 싶지만 무엇을 소유하며 사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집이 좁았기에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이 많았다. 콩나물도 같이 다듬었고, 송편도 같이 만들었다. 명절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조청을 서로 잡아당기기 시작하면 어느 새 엿가락이 되어 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볼 수밖에 없었다. 집이 좁으니 무엇을 하든지 함께 동참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부모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될 수 있으면 칭찬을 하셨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작은 음식이나마 무엇을 먹어도 다 함께 먹어야 했고, 놀아도 같이 놀아야 했다. 그렇다고 나만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여름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른하게 낮잠을 청하면 아련한 뱃고동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복도 끝에 걸터앉아 몇 시간이고 바다를 내려다보곤 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바다를 내려다 봤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 사색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은 내 정서의 자양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입담이 좋은 경찰관 삼촌은 집에 올 때마다 수많은 무용담을 가지고 왔었다. 말솜씨가 얼마나 좋은 지 삼촌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모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시 돌이켜 봐도 우리 가족 모두가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렇게 좁은 집에서 아웅다웅 사는 것이 우리 집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가정이 아주 좁은 집에서 많은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출근 시간과 등교시간이 되면 무수한 사람들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수정아파트를 고향으로 여기고 일생 내내 그리워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부대낌과 사람 냄새가 가슴 시리도록 그립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내 행복하다는 마음이 늘 자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지 나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 감격하고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가끔 나의 아이들에게 넌 행복하냐고 물어본다. 별로 행복하다는 것을 못 느낀다는 말을 들을 때 나의 자녀양육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미련을 갖기도 한다. 고도의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집의 크기는 커져가고, 결혼을 하면 분가 하는 자녀들이 늘어나면서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사람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런 와중에 다시 부모와 함께 살고자 하는 신혼부부들이 늘어가고 있다. 부모와의 동거가 좋아서, 부모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자녀를 맡길 때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분가할 만한 경제적인 힘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부모와 동거가 서로에게 불편하고 힘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왕 함께 살아야 한다면 불평보다는 감사의 조건들을 서로 찾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아이들의 정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어릴 때처럼 온 가족이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 여겨도 좋을 것 같다. 부모와의 동거! 억지로 찾아보면 좋은 점도 많지만 독립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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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섭리로 돌아갈 때, 암도 이길 수 있어”
- 암 정복은 성경의 삶의 방식으로 완전히 변화할 때 가능 암환자쉼터사랑뜰 조경선 목사, 암환자 ‘자연치유’ 위한 쉼터 조성“암(癌)은 크리스천에 울리는 경종, 죽음 이기는 권세 활용하라”“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거스른 삶의 방식은 몸에 어떤식으로든 문제를 야기합니다. 암의 발생도 이런 탓이 큽니다. ‘자연치유’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17년째 암 환우들을 돌보고 있는 사랑뜰지기 조경선 목사(사랑뜰교회·쉼터). 1989년 건대에 위치한 성수감리교회에서 새신자부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그녀는 6개월 사이 3명의 암 환자들을 만나 1년 새 그들의 투병과 죽음의 과정을 곁에서 목격하게 됐다.전혀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교회를 소개받아 등록했던 암 환자들은 조 목사를 만나 구원의 확신을 갖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조 목사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저는 암 환자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다 데려가셨지요? 도대체 왜 암 환자는 다 죽어야만 하는 것이죠?”그야말로 ‘멘탈붕괴’상태에 빠진 조경선 목사는 그 길로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암(癌) 완전 정복에 나섰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사랑뜰교회와 암환자쉼터사랑뜰(이하 사랑뜰)을 개소한 조 목사는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온 환자들을 위한 무료 쉼터, 암 예방 및 재발·전이 방지를 위한 합숙 힐링캠프, 가정 호스피스, 병원 암 병동 방문 돌봄 등의 사역에 나섰다.사랑뜰을 개소한 이후 아산 병원과 삼성 병원의 소개를 통해, 온라인 카페 ‘암환자들의 쉼터 사랑뜰’을 통해 많은 암 환자들이 쉼터를 찾았다. 매일 오전 5시30분과 11시에 드려지는 예배는 자율참석이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예배에 참석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조 목사가 소개하는 ‘자연치유’를 통해 통증의 완화를 경험하고 있다.조경선 목사도 다수의 교회와 기도원에서 행해지는 ‘능력행함’에 대한 갈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 목사는 “환자들도 저에게 손을 대고 기도해주기를 원하고, 저도 그 능력을 하나님께 구한 적도 있다. 환부에 손만 닿아도 병이 낫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지만 그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온 몸의 근육에 암이 생기는 육종에 걸린 28세 여자 청년이 쉼터에 온 적이 있다. 병원에서도 1년간의 수술과 항암 치료 끝에 치료를 포기한 그녀는 나와 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병세가 호전됐었지만 식습관, 수면습관 등의 생활습관을 바꾸지 못하고 결국 재발했다”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돌아가는 ‘자연치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실제로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지속적으로 받고 통증이 있을 때마다 진통제를 투여 받은 환자는 마지막 순간 통증관리가 되지 않아 고통 속에 임종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자연치유를 했던 환자들은 암 자체가 치유되기도 하고, 고통 없이 편하게 임종할 수도 있다고 조 목사는 전했다.조경선 목사는 “암의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하지 못한 채 병원 검사에서 나타난 증상에 대한 대증요법만 사용해서는 완전치료가 어렵다. 원인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잘라내면 또 생기고 전이되는 법”이라며 “완전치료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성경에 다 나와있다”고 소개했다.이어 조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해 주셨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하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식생활을 조심하고 말씀대로 마음을 다스리면 암을 예방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암이 발생한 사람들은 반드시 열악한 환경을 떠나 삶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조 목사는 △레위기가 소개하는 식생활로 개선 △밤 10시 취침, 새벽 5시 기상 △철저하게 무공해 작물 섭취 △말씀대로 믿는 믿음 △기도하면서 내 몸을 자연 상태로 돌려놓을 것 등의 자연치유 기본원칙을 밝혔다.자연치유의 기본원칙을 착실하게 수행할 때 하나님이 주신 면역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조 목사는 강조한다. 그녀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우리 몸의 DNA에 완전히 입력시켜주셨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 있게 치유력을 주셨는데 사람이 창조 섭리를 어기고 살아가다보니 약해진 것 뿐”이라며 자연치유를 통해 면역력이 살아날 것이라고 전했다.조경선 목사는 암이 이 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라고도 했다. 조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 몸의 치유는 무조건 병원에서’를 공식처럼 주장하지만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구원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며 “병원은 이용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이어 조 목사는 “병원치료는 적정 수준으로 이용하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돌아가 자연치유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교회가 이끌어주어야 한다”며 “더불어 암 환자들이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있도록 죽음을 이기는 크리스천의 권세를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제언했다.한편 조경선 목사는 ‘자연치유’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고 공감한 한 암 환자를 통해 기증받은 충북 괴산 6000여 평 땅에 ‘괴산사랑뜰자연마을’ 조성 사업을 펼치고 있다. 조 목사는 방이동 암환자쉼터사랑뜰을 거점으로 하여 환자들이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회복할 수 있는 자연쉼터를 조성할 계획을 밝혔다.조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극 상품 포도나무로 이 땅에 심어주셨는데, 우리가 창조 섭리를 어겨 들 포도 열매로 열렸다. 회복하려면 고통스럽더라도 가지를 쳐내고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자연쉼터에 암 환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각자 생활하면서 ‘자연치유’에 힘쓸 수 있도록 그들을 적극 도울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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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섭리로 돌아갈 때, 암도 이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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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와 성육신 신학
- 한국의 장로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착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직후에 호주 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에서도 각각 선교사들을 파송함에 따라 서로간의 선교적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선교사공의회’를 조직(1893)하고 선교구역을 분할하였다. 이 네 선교부는 결국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 함께 모여서 ‘독노회’를 설립하면서 단일교단을 형성하였고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장로교회의 신학적·제도적 특징은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개혁교의 일반적 전통에서 서로 다르지 않는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와 그가 세운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건이 분열의 원인이다. 1953년 당시 김재준 목사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한국 장로교는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분열했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성장하던 시기는 19세기 구한말부터 일제의 식민시대를 거쳐 해방과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던 요동기였다. 한국신학의 발달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전개되어 왔으며 국가 민족 문화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민족적 위기를 겪으면서 신앙과 교회 사상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그 나타남은 '첫째는 개인의 영적구원과 소망에 중점을 둔 교회의 내적 운동이고 둘째는 현실의 고난과 부조리를 극복해 나가려는 외향적 신앙운동이며 셋째는 한국의 전통문화 및 종교와 기독교 복음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문화전체의 의미와 구원을 모색하는 신앙운동이었다'고 유동식 신학자는 말한다. 이 세 가지 신앙운동은 다시 세 가지 신학의 흐름으로 전개되어 보수적 근본주의신학,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 문화적 자유주의의 신학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여기에 박형룡은 신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장로교 계통의 신성중학교 평양숭실전문을 졸업했고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 루이빌의 남침례신학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장로교총회로부터 표준성서주석위원장을 맡아 9권의 표준성경주석을 펴내고 역저 ‘교의신학’을 집필했다. 박형룡은 1953년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입장에서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선교사에게서 받은 신학을 지키며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낳았다. 이때문에 그를 가리켜 한국 칼뱅주의 신학의 기수요 보루라고 한다. 박형룡의 신학을 이어 받은 대표적인 교단이 예장합동, 고신개혁 등 보수 교단들이다. 여기에 진보적 사회참여신학은 ‘삶’이 사회적 살림살이를 통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실현하려는 신학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예수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할)은 바로 이러한 삶의 역사적 실현이다. 따라서 성육신의 사건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참여가 뒤따랐다. 이 신학적 전통을 낳은 대표적 인물이 김재준이다. 김재준은 한국 진보주의 신학의 기수로 불린다.1901년 송창근목사의 전도를 받은 김재준은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숭인상업학교 교사로 재직 중 그는 평양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에 모두 6편의 논문을 발표,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과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라는 논문인데 동정녀를 방년의 젊은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1945년 조선신학교가 서울 동자동에서 새 출발을 하자 교장에 취임하고 조선신학교의 신학이념을 발표했다. 그것은 첫째 조선 전체 교회가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세계수준에 도달할 것, 둘째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되어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할 것, 셋째 교수는 학생들의 사상을 억압하지 말 것, 넷째 칼뱅주의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 할 것 등 이다. 이 이념은 조선신학교의 모든 교수들의 공통된 교육이념으로 오늘까지 한신대학교에 남아있다. 여기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의 신학은 대부분 진보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활동한 교회로서 기독교장로회는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기독교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되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당시의 사람들, 즉 민중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등, 기존 보수적 개신교계가 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적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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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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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와 성육신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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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43회 총회장 노진현(盧震鉉)목사
- 부산 구포에서 출생노진현목사(1908. 8. 28~1998. 10. 15)는 부산 구포에서 아버지 노원필과 어머니 장소개씨 사이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명학교(동래고보 전신)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이 학교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면학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상경(上京)하였다. 그가 소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보를 다닐 때 친구를 따라 구포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서울에서의 노진현은 몇군대 학교를 알아보다가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 허락을 받게 되어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때 마침 보성학교(普成學校)에 다니는 고향 친구를 만나 종로 YMCA 뒤에 있는 중앙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고향 구포(口浦)소학교 여교사로 있었던 분을 만나게 되어 계속 그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방학이 되어 귀향하면 옛날 다니던 구포교회에 출석하곤 하였다. 노진현은 구포교회에서 학습을 받았다. 그를 집례한 목사는 호주장로회 소속 예원배(Rev.A.C. Wright 芮元培)선교사였다. 예원배 선교사는 1912년 내한해 1942년까지 30년간 주로 마산과 진주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간섭과 핍박이 극에 달하자 다른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혹은 추방당하였음에도 예목사 부부는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다가 강제연금 끝에 출국당한 선교사였다.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받음세례(洗禮)는 구포교회에서 주기철목사로부터 받았다. 주목사는 1926년 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부산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처녀목회를 시작했는데 당년 30세의 청년목사였다. 주목사는 노진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구포교회의 당회장을 맡았음으로 종종 사무행정을 집행 하거나 성례식 거행을 목적으로 구포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 그의 설교를 가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진현 목사는 생시에 자기가 순교자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지인들에게 이야기 하곤하였다. 노진현이 세례를 받은 시기는 주기철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한 후 구포교회 당회장을 맡은 1927년 1월부터 노진현이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전까지로 보는데 이 당시에 있었던 비화가 하나 있다.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사람이 없어서인지는 모르나, 노진현은 학습교인으로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목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나 세례를 베푼 후 집사직을 계속토록 했다고 한다.그러던 중 노진현은 장질부사에 걸렸다. 당시 장질부사는 염병이라고 해서 친척들도 외면하는 고질병이었다. 정진희 영수가 은행업무를 마치고 귀가 길에 자주 들려 간절히 기도해 주어 죽을 줄 알았던 노진현 청년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어 몸을 추수릴만큼 회복되었을 때 진주에 있는 광림학교(廣林學校)로부터 교사로 부임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회 선교부에서 1906년에 세워 운영해 오고 있는 소학교로써 학생이 100여명, 교사가 7~8명 가량 되었다. 이 일을 정진회 영수를 찾아가 의논했더니 그에게 목사될 꿈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으로 그곳은 미션스쿨이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을지 모르니 진주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노진현은 광림소학교에 부임하였다. 부임하고 보니 그 학교 교장이 자신에게 학습을 준 예원배 선교사였고 노집사는 광림학교에서 동료교원 중 훗날 출옥성도로 고신 교단을 세운 한상동(韓尙東)을 만났다. 당시 한상동은 노진현보다 3세 연상이었고 기혼자였다. 그후 노진현과 한상동은 일본 고배(神戶)와 한국 평양에서 각각 신학공부를 하였고, 부산이 고향인 이들은 광복 후에도 부산에서 목회를 하며 때로는 동료로, 때론 서로 이견(異見)을 보이면서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역사를 엮어 갔다(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p.20~21 참조).광림학교시절 황봉예와 결혼노진현은 광림학교에 재직하는 1928년 10월에 역시 미션스쿨인 진주 시온여학교 교사로 와 있는 황봉애를 만나 결혼하였다. 황봉애 사모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고배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 즈음 광림학교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여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어 노진현은 예원배 교장에게 일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의 소개로 일본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의 입학 허락을 받아 도일하게 되었고, 재직했던 광림학교는 1929년 폐교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 신학사상에 기초한 5년제 학교로 1년에 10명 이상을 받지 아니한 고로 전교생 수가 50명을 초과하지 않았다.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되 크게 규제 하지는 않았다. 이 학교출신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유력하게 일한 지도자들이 많다.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가가와 도요히꼬가 있고, 한국인으로써는 김우현 전필순 김치선 유호준 김만제 김광현 한명동인데 거의 장기목회자로 혹은 각자 속한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노진현은 특히 풀턴 교장의 조직신학과 그의 신앙인격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4학년일 때 학생들이 매년 2회씩 실시하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폐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교수회에서 집에 돌아가 1년 쉬었다가 오도록 결정했으나 교장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울 때 카나다 선교사 영재형(Rev. L.L.Young) 목사가 그를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영재형목사는 노진현을 독일인이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 맡겨두어 치료받게 한 후 치료가 끝난 다음부터는 선교사 서기일을 보게 하여 졸업할 시에는 비교적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유학영목사는 원래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했으나 카나다 장로교회가 타교파와 연합하게 됨으로 합류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선교하고 있었는데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목사의 양 아버지로도 알려진 분이다. 노현진목사의 목회사역에 대해 고찰해 보므로 그의 지도자상을 살펴보자. 노진현목사는 일본에서 10년동안 3개 교회를 담임한 적이 있고, 조국 대한민국에서 1975년 은퇴하기까지 30년간 승리로운 목회사역과 교정(敎政)의 일생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첫 사역으로 신학교 재학 중 와까야마 교회를 맡아 전도사로 봉사하였고, 후에는 교토(京都) 한국인 교회로 임지를 옮겼는데 이는 고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대구출신 최경학목사의 임지와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노진현목사는 교토로 목회지를 옮긴지 6개월이 지난 1935년 6월에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 안수는 잠시 귀국했을 때 경남노회에서 주기철목사의 안수로 목사장립을 받게 되어 더욱 감격적이었다. 일본에서의 목회가 평탄치는 못했다. 일본 현지임에도 조선인과 조선인 교회에 대한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면서도 헌당식이나 입당허락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노목사는 말했다. 그후 노목사는 오사까(大阪) 니시나리 한인 신앙공동체인 대판서성교회(大阪西成敎會)에 부임하며 귀국하기까지 7년간 사역하였다. 이곳에 있을 때는 일본말로 사회하고 일본말로 설교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일본말로 하고 없으면 조선말로 설교했다.부산 YMCA 재건사업1945년 6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기의 공습이 강화되고 일본이 패색이 짙어갈 무렵 노진현목사는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3개월만에 8·15 광복을 부산에서 맞이하였다. 초량교회 양성봉장로의 요청으로 청년의식의 중요성을 인식 YMCA 재건사업에 양장로는 회장으로 노목사가 총무로 Y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2일 첫주일에 노목사는 부산중앙교회를 설립했다. 감리교회였던 대청동의 교회를 그 교회목사로부터 안수받아 교회를 시작했다. 노목사는 이 중앙교회에서 평생목회의 과정을 영광스럽게 마치게 되었다. 이 날은 서울에서 한경직목사가 베다니교회를 영락교회로, 송창근목사가 바울교회를 성암교회로, 김재준목사가 야고보교회를 경동교회로 바꾼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2015. p.788~798참조).그의 목회를 요약하면 ①신학적 바탕 위에 설교하라. ②모든 목사는 다 부목사(주님의)이다 ③예절과 유머를 겸비하라. ④기도와 심방을 게을리 하지 말라 ⑤일치와 화합하는 일에 투신하라. 노진현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된 것은 1959년 9월 제44회 대전총회의 분리사건을 예견이나 한듯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1958년 9월 25일 서울 영락교회에서였다. 총회장 당시 결의된 중요 안건들을 보면 ①지금까지 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행된 주일공과를 총회이름으로 개편, 아동들의 연령계층에 맞게끔 계단식공과 발행을 정책적으로 결의한 것, ②계류중이었던 경기노회를 경기노회와 한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 ③월남에 선교사 파견하는 안건 결정, ④각 신학교수들은 3년마다 해 이사회에 서약하게 하는 것 등이다. 노진현목사의 목회와 교정(敎政)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경총회장 장차남목사는 그는 목회자이면서 뛰어난 교정가(敎政家)였다고 한마디로 결론짓고 있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p.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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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동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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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43회 총회장 노진현(盧震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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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6
- 엘리야, 엘리사 이후 그 땅에 남은 종교란 게하시 종교였다. 꿩 대신 닭으로 대치된 모양새였다. 선지자 적인 모세의 종교가 급격하게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정적인 아론의 사제종교로 전락하였듯이, 엘리사의 종교도 역시 게하시의 종교로 전락한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 명명백백하지만, 이러한 종교의 왜곡된 역사가 오늘의 지성인들 집단에서 조차도 바르게 잡히질 않고 지속되고 있다.사도시대의 원 교회 이후,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제도권의 지도자들은,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기 보다는 왕권에 빌붙어 사는 게하시 같은 부류들이었다. 저들의 신도 수가 수만 명 있었다하더라도, 그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부와 권력과 명예와 지식을 독점한 5%의 계층의 입맛에 주문된 자들일 뿐이었다. 우리가 왜곡하고 있는 지식 중에, 르네상스가 모든 국민에게서 일어난 운동인양 착각을 하고 있으나, 그 운동마저도 그 사회의 독점세력 5% 내에서 일어난 저들만의 운동일 뿐이었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칼뱅의 교회당에 모인 시민들이 그 시의 지배계층이었고, 일반 서민들까지 앉을 수 있는 좌석은 없었다. 오늘날 교황이 높은 창 발코니에서 군중들에게 잠간 강론을 하는 것은, 그 시민들을 그들의 미사에 모두 들일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고, 서민이나 낮은 계급이 성당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이유는, 수문장이 출입자를 걸러내느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가 온갖 역경을 경험한 개혁자이긴 하나, 그 또한 그를 후원한 제후의 세력에서 벗어나질 못하지 않았던가?설교를 공공연하게 만인이 들을 수 있게 된 시기는 조지 휫휠드가 야외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할 때부터일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었던 시기는, 하늘의 음성과 양심의 소리에 예민한 선각자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목숨을 바친 시기부터이다. 그리하여 그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교회에서 주일학교, 혹은 교회학교를 열어서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모국어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가정교회라면 몰라도, 콘스탄틴 황제 이후 돌로 지어진 교회당에서의 정기 예배에 서민들이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하였다. 이미 관료들과 지배층이 자리를 채웠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들어가기에도 좌석수가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권력층과 이(利)를 따르는 계층들로 구성된 자리에서, 그들로부터 녹을 먹고 있는 설교자가 그들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초월한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강론은 축소시키고 전례를 화려하게 하는 것이 편안하였을 것이리라. 그래서 저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소홀이하고, 성령과의 조우는 생략하였던 것이다. 저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산과 들과 해변에서 설교한 뜻을 알아차렸어야 했다.엘리사와 게하시의 차이점은 오늘의 지성인 이라면 능히 분별해 낼 수 있다. 엘리사는 저를 방문한 아람나라의 국방총리 나아만을 버선발로 나가서 맞이하여 주질 아니하고, 오히려 문전에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하였다. 국빈 환대와 예절을 떠나서, 한 영혼을 살리려는 예리하고도 섬세한 통찰력을 읽을 수 있다. 저가 나아만을 직접 고쳐주었더라면 치료비 명목으로 후한 접대는 받을 수는 있었어도, 저의 영혼 구원은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아만이 병에서 회복되어 사례하기 위해서 돌아 왔을 때에도, 선지자는 또다시 저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게하시는 그의 스승이 거절한 사은품에 욕심내어, 저에게 달려가서 금과 은을 취하고, 명품양복 두벌도 얻어냈다.진정한 선지자라면 게하시가 하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누구라도 엘리사의 영성을 가진다면 게하시가 지금 하나님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것은 다 인지할 것이다. 저는 엘리사의 흉내도 내질 못하였다. 선지자의 손에 물을 붓던 여호수아나 엘리사는, 모두가 성령을 받아서 그 시대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좋은 기회를 모두 놓치고 임금의 설거지나 하는 자로 전락하였다. 엘리사 주검의 뼈에만 스쳐도 죽은 자가 살아나건만, 선지자가 마지막 떠나면서 그렇게 넘겨주려고 한 영적 유산에는 게으르고, 눈앞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만 탐하였다. 엘리사가 떠난 이후, 그 시대에 밀려오는 난제들을 극복할 능력이 게하시에게는 부재하였다. 선지자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입질 못하였으니, 마치 엘리사제가 법궤를 빼앗기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 땅을 떠난 것처럼 되어 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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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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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 친구여
- 때는 2015년 유월 모날 모시, 보랏빛 날선 번개가 빨갛게 타오르는 칸나 꽃 위로 내려 꽂힙니다. 순간 하늘 사랑에 타오르는 심장을 가진 친구의 모습이 샤갈의 몽환적 그림처럼 시공간 속을 떠다닙니다. 그렇게 친구여, 초대받았던 성령강림주일 <그날>, <그곳>. 비로 인해 강물이 넘쳐나 연인 상드에게로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건반을 두드려댔던 쇼팽의 빗방울 소나타처럼,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주님을 그리며 <다시 갈릴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겐 또 하나의 큰 은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봄만 되면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흠뻑 취하여 물에 빠져 노란빛 수선화로 피어나는 공곶이 마을이, 붉은 동백꽃의 꽃잎이 선혈처럼 흐드려져 있는 지심도가, 이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포로수용소가, 천주교 순례길이 이웃하며 곁에 있다는 것 또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그리고 뒤늦게 말씀드립니다. 아유타 왕국의 공주 허 황옥이 그날 그곳에 함께 했습니다. 그녀는 늘 제 삶의 숙제인 양 시간도 장소도 아랑곳없이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곤 합니다. 2천 년 전 인도에서부터 신랑되는 가야 김수로왕을 찾아온 그녀는 겨우 불과 16세였다 합니다. 일설엔 도마의 제자였다는 말도 들려옵니다. 여하튼 그녀가 붉은 기 꽂고 거친 바다 파랑(波浪) 헤치며 오직 신랑 생각에 뱃길도 배도 좋지 못했던 그 시절에, 도마가 시킨 대로 파사의 돌 다섯 덩이 싣고 그 멀고 먼 험한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수로왕릉 납릉정문 문설주 위에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문양이 있습니다. 또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이라 하여 돌 다섯 덩어리가 누각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연상되는지요...친구여, 전 벳세다 들판의 오병이어를 떠올렸습니다. 동시에 이미 부활하시어 다시 갈릴리로 오셔서 제자들을 위해 하늘 숯불 위에 떡과 고기를 구워주시던 그분의 예표를 보았습니다. 여하튼 지금 잠자고 있는 허황옥 그녀 묘지 위는 참으로 쾌적합니다. 그 주변의 쑥, 씀바귀, 냉이, 미나리아제비, 민들레, 소리쟁이 등 그 줄기가 억세어지고 스러져 가며 말을 전합니다. “이미 봄이 저만큼 뒷전으로 물러났어요” 그 소리가 마치 친구가 언젠가 저를 가을, 그것도 황혼의 노인네로 부른 것과 같은 씁쓸함과 외로움으로 전해져 옵니다.그런데 친구여, 조금도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곧 바로 제게 눈에 보이지 않는 봄날, 못다 핀 꽃 피우게 부채질하여 봄바람 보내 주겠노라는 친구의 바람에 이미 새로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서 있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 윤동주 <새로운 길>-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친구여,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에 모가지 드리우고 피흘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한 윤동주 님이 마치 친구만 같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일어서는, 날선 검,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로고스 시인 말입니다.아니 오늘은 한 번에 지구 반 바퀴의 거리를 날 수 있다는 날개 큰 알바트로스 새 같습니다. 아니 이것도 아닌 침묵하고 있는, 단단하고 품위어린 산봉우리 품속 같습니다. 아니 또 이것도 아닌 다시 갈릴리로 오라는 주님을 닮은... 그래서 잠자고 있던 영혼을 깨우고 소명을 다시 일깨워주는 진정한 스승 같습니다,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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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곳,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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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36회 총회장 권연호(權連鎬)목사
- 경북 안동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권연호목사(1898-1979. 1)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 양반가문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김인서는 이에 대해 “권연호목사는 이조판서 준(俊)의 증손으로 예수 믿는다는 죄명하에 안동 권씨 족보에서 할명(割名)되었다가 이즈음 복보(復譜)되었다”(신앙생활 1954. 5·6월호 참조)고 쓰고 있다.권목사의 형제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때를 1908-1910년쯤으로 생각되며 안동지역의 최초교인으로 국곡교회를 세운 권수백 조사(1923년 장로가 됨)가 1908년 사랑방 사숙(私塾)을 개설하고 강낙원을 교사로 초빙하여 신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권연호, 권건호, 이장윤, 이부돌, 이삼돌, 이태술 제씨가 일직면 경내의 장사리교회의 교회학교를 설립한 것이 나타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짐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고향을 떠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사범학교 구기과(球技科)를 1914년에 졸업하고, 잠시 소학교(오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미국 북장로교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安義窩) 선교사를 만나 객지생활에서 일시 중단되었던 신앙을 되찾게 되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경성 사범 출신으로 교사생활1916년 평양으로 간 그는 숭실대학에 입학하였고, 함일톤(Rev. F. E. Hamilton 咸逸頓) 선교사 댁에서 고학하며 공부하였다. 당시의 급우들로는 현재명, 김무생 등이 있었다. 고학과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잠시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하였다. 완쾌된 후 윤산온(Rev. G. S. Mccune, 尹山溫) 교장으로부터 “병약한 몸으로 대학 졸업은 아니 해도 좋으니 신학(神學)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기독신보 1969. 7. 26.). 그래서 1918년 대학을 2년 수료한 채, 다시 잠시동안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몇 해 동안 교편을 잡고 일하던 중 교사직에 회의가 들어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제국주의 교육을 하는 것이 마음에 번민과 괴로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서울창신교회 70년사. p.77).이 무렵 1921년 2월 5일, 안동 주재 미 북장로교 안대선(Rev. W. J. Anderson 安大善) 선교사가 안동읍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처음 조직하였는데 당시 이 모임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기독신문 2009. 6. 24.). 중요활동으로는 청장년들의 신앙생활훈련, 회원상호간의 친목, 교양 함양과 절제운동이 핵심 사안들이었다. 얼마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을 위해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과 더불어 평남 강서의 기양교회 조사(助師) 일을 보면서 한 학기 공부하고 1년간 목회실습을 하며 다니다 보니 10년만인 1936년에야 졸업하고, 평서노회(平西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목회사역을 보면 한 마디로 훌륭한 목회자상을 보여준다. 그가 가는 임지마다 아무탈 없이 승리했다. 그의 중요한 사역지로는 신학교 시절의 기양교회(1928-1937), 평북 철산읍교회(1937-1940), 만주 안동제일교회(1940-1945), 경성 창신교회(1946-1969) 등에서 착실하고도 타의 본이 되는 목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초기 목회지였던 기양교회에서의 장기목회(9년), 철산읍교회(4년), 만주 안동교회(6년), 경성 창신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24년가까운 자기목회를 한 것을 들 수 있겠다. 권연호목사와 동사목회를 한 바 있었던 부산 온천제일교회의 원로목사요 예장합동 증경총회장(91회)을 역임한 장차남목사는 최근 간행(2015. 3. 20 쿰란)한 그의 목회회고록(p. 772-775 참조)에서 권연호목사의 목회특징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① 이성문제 철저, ② 물질적 청렴, ③ 도시목회에는 설교를 짧게. 이같은 목회철학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늘 되새겨 주곤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도생활의 특징으로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개인기도를 보통 3시간씩 드리며 하루에도 틈틈이 기도하는 시간 5-6시간은 되었다. 다음으로 그의 설교의 특징이 있는데 성경적이며, 반드시 원고 설교를 하며, 짧으면서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을 비롯 결혼예식이나 장례예식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일 뿐만 아니라 장중미가 넘쳤고, 당사자들만 아니라 모든 참여하는 회중들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게 하는 정중미가 있었다고 한다. 권연호목사의 개교회 목회활동은 창신교회에 부임하고 난 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주(滿洲) 땅에서 목회하다가 해방된 조국의 중심지 수도서울에 귀환한 입장이었음에도 여기저기에서 권목사를 필요로 하였고 불려다니다 보니 주어진 소임들이 자연히 많아지게 된 것이다.1946년 형목제도, 6·25때 군목제도 실시에 기여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① 오늘의 교도소 목사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후 미 군정 시대에 감리교인이었던 군정장관 러치 장군을 만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교도를 위해 형목제도를 실시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일은 당시 천주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단체들이 죄수들을 상대로 교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각 종교단체장들이 명예를 걸고 추진하고 있었는데 장로교 대표로 권연호목사가 합세하여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1946년 1월 군정청령 제70호를 발령, 전국 18개 교도소마다 형무소 소장을 임명했는데 장로교 13명, 감리교 5명이 교무과장으로 부소장급 대우로 임명되어 오늘의 교도소선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② 주일에 실시하려는 선거를 평일로 바꾸는데 큰 소임을 다 하였다. 당시 미군정청 사령관 핫지 중장이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최초의 총선일자를 주일(主日)인 1948년 5월 9일로 결정 공포하였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권목사는 핫지 중장을 방문해 항의하였다. 핫지 장군은 이승만박사와 상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갔다. 처음엔 “주일예배 후에 교인들은 선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권목사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항변해 이해를 시키고 다시 핫지 중장에게 갔더니 그날이 주일인줄 몰랐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즉석에서 이승만박사에게 전화해 5월 10일 월요일로 연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박사는 권연호목사를 달리 대우했다고 한다. ③ 해방 후 혼란기에 문교정책을 맡았던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국가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배례(拜禮)를 강조했다. 권목사는 여러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신앙적인 문제라 이승만박사를 찾아가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꾸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회고했다. 주일성수 문제와 국기배례 문제는 이미 북한에서도 문제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많이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④ 6·25 당시 서울로 내려온 북한피난민 교우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활동했다. 이같은 일은 김구선생으로부터 찬하를 받을 만큼 동족구원에 앞장섰던 것이다. 미군 당국에 청원해 얻은 천막을 창신동 고지대 언덕받이에 치고 월남한 교우들을 수용해 구제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북으로부터 계속 피난민이 내려오자 미 북장로교선교회에서도 안두화, 권세열 목사 등과 이인식, 권연호, 선우훈 장로 등이 합세해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⑤ 또 권연호목사는 신생 대한민국 군대에 장병들의 신앙과 정신지도를 위해 오늘의 군목제도의 원형인 군속군목제도를 설치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후원했다. 문필가요 목사였던 김린서는 그의 잡지 신앙생활(信仰生活)지에 6·25 전후 지송암, 김영환 두 목사가 제3육군병원에 가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병원장 정희섭 대령이 종군목사란 직분을 정한 것이 군목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썼다. 종군전도의 시작과 동시에 권연호목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삼 진언하고 각 교파와 선교회가 연합청원을 해 대통령령으로 정식 군목제도(軍牧制度)가 실시되었다. 이는 1884년 선교승인과 함께 조선역사상 최고로 귀중한 축복이었다고 김린서는 쓰고 있다(신앙생활 1953년 성탄호 기사). 교회언론에 관심가진 선비다운 목회자⑥ 권목사는 장로교 정통신학교육 방면에도 크게 기여했다. 원래 선비문화 속에서 자랐고 자신이 또한 교사(敎師)요 문사(文士) 출신인 연유도 있었겠지만, 고향 안동 장사리교회 안에 교회학교를 설립한 일로부터 만주 안동제일교회 재직시 고등성경학교와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성경학원에 김인서를, 봉천신학교엔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가르치게 한 것 등은 그의 교육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일괄 취소하고 총회직영 단일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한 당시의 총회장이었으니 교육적인 관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총회장 권연호목사는 총신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의 신학정로를 계승해야 할 것이라고 개혁신학전통에 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⑦ 권목사는 1954년 4월 안동에서 모인 제39회 총회에서 교단 안의 기독공보와 신앙생활 잡지 등 언론활성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권연호목사는 목회자로써 교정(敎政)을 맡았어도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서도 선비다운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은퇴 후 자녀들이 사는 미국으로 거쳐를 옮겨 쉬지않고 공원에서 로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개인전도를 하며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79년 1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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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동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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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36회 총회장 권연호(權連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