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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가진 세계 치유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생태계가 서로 하나 되고, 서로 교제하며 살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런 코이노니아의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서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의 바른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의 궁극적인 관계임을 생명 중심적 환경의식의 변화와 기독교 환경윤리로서의 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 자연을 인간의 지배 개념이 아닌, 가꾸고 보존하여 상생하는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가기 위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이 당시의 종교지도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삶의 행위’때문이라는 실제적인 사실을 알게한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의 행위가 당시의 행동주의자나 마술적인 기적행위자와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그의 행위와 함께 나타난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그의 ‘말씀선포’에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임을 성서는 이를 알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높은 지식에 처하여 있는 현대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오늘의 세계관이나 세상살이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본다든가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행위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행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기에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이나,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살아 있는 생명을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삶의 현장에서 그의 삶의 행위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 세계의 문제를 치유하는 행위였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의 내용은 그저 독립적인 해석이 아니라, 창세기 2장과 연관지어 바른 해석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정복’과 ‘다스림’은 ‘지배’와 ‘통치’의 의미가 아니며, 창세기 2장과 연계하여 해석할 때 ‘돌봄’과 ‘지킴’의 의미로 해석되어 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보전 사상은 구약의 율법서, 성문서,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신약에서는 바울서신과 요한문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전통적 구원론은 구원을 인간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 제한하며 자연의 세계를 소외시켰으나 성서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우주적 구원론을 향하여 열려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희망하는 인간과 모든 창조 세계의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우주적 세계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령론적 이해에 있어서도 성령은 창조사역에 참여하여 삼위일체적 창조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피조물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새 창조의 사역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며 동시에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는 성령을 통하여 자연에 현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며 ‘성령의 전’을 파괴하는 악행인 것임을 알게 한다. 오늘의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사고와 가치관의 문제임을 고려할 때 기독교 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창조 보전(保全.integrity)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윤리는 청지기 윤리와 생태학적 윤리 그리고 생명공동체 윤리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6-10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5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기성 교인들이 이단이라는 단체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으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곳의 가르침이 재미있고 귀에 쏘옥 들어온다는 것이다. 요즈음 세인들이 필요로 하는 바에 답을 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시원하게 행복을 안겨주는 비결을 저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요즈음 젊은이들이 몰리는 강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강사가 시원시원하게 강론할 뿐 아니라, 강의를 듣는 젊은이들도 상당히 운집되어 있다. 교회에서 빠져나간 젊은이들에게 성경과는 거리가 먼 동양철학과 경교회(네스토리안)를 혼합하여 강론 하는데, 듣는 청중은 그 강의가 정말 성경 강론인줄로만 알고 듣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의 시점에서, 교회 바깥의 젊은이들에게도 길과 진리를 보여주고 생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지성과 영성을 갖춘 지도자들을 제대로 훈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우리 교계의 구조는 젊은 지도자들이 일어서도록 하는 기반이 매우 부실하다. 우리 기성세력들이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구태를 벗어나질 못하고 권위적인 억압을 풀지 않아서, 신진들이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어 주검을 맞이한 그 다음 날, 제자들은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비통함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함에 대한 좌절감, 자신에 대한 분노,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그러나 삼일 후, 예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제일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다. 40일이 지나자, 승천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베드로는 동료들을 추스르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다. 저와 동료들이 힘을 내어서 기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엘리사가 그의 스승이 하늘로 돌아갈 때에, 저는 애타게 갈급해하는 기도가 있었다. 엘리야는 바짝 따라붙은 제자 엘리사를 불편해하면서 “너는 여기에 잠시 떨어져 있어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지만, 저는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붙었다.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스승이 묻자, “당신의 영감을 갑절로 받길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서, 원한다고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주고 싶다한들 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위에서 오는 것을 붙드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도 받고, 불과 성령도 받으시질 아니하였던가? 베드로도 동료들과 함께 전심으로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의 불꽃을 받았다. 그의 머리에도 불이 당겨진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지도자들이 시대마다 ‘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전과는 달랐다. 그 곳에서 함께 기도하던 이들 모두가 성령을 받은 것이었다. 어린아이, 노인, 젊은이, 남종, 여종, 할 것 없이 차별되질 않고, 기도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입혀졌다. 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을 하고, 마치 모세의 동료 70인들이 능력에 취하여 쓰러졌던 것같이, 술에 취한 듯 하나님의 영에 흠뻑 취한 이들도 있었다. 에스겔이나 이사야, 요엘 선지자들이 증언하던 바와 같이, 지도자 한둘에게만 능력이 입혀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각 사람에게 주님의 성령이 임하신 것이었다.예수께서 열둘에게 능력을 입혀서 둘씩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에, 비록 제자들은 훈련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 땅으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각자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을 받고,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니, 세상이 구원을 얻고, 땅들이 요란하게 진동하였다. 악의 실체들이 결박을 당하고, 세상에서 패주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복음 선포가 이방인과의 접경에 이르자, 베드로는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한다.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자, 성령이 그 이방인들 각 사람에게 내려오셨다. 여종이나 남종이나, 친구들까지도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 복음 전도자가 성령의 적극적인 인도에 민감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 선포가 명료하고 간결하였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분에게 권능을 입혀 주었고, 이방인에게는 통과제례가 복잡한 물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의 불로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수여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막을 올렸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6-10
  • 배신자
    지난 4월 11일 토요일 벚꽃이 만개한 자유로를 지나 해이리로 이사간 박강월 친구(주부편지 대표)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12년 전 첫 수강생이셨던 조장희 목사님도 오셔서 무척 반가웠다. 그 당시 친구는 인천에서 선교문화센터를 운영했기에 목회자를 위한 강의를 하도록 문을 열어준 고마운 친구이다. 그런데 12일 주일 예배시간까지도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아버지 이 기분의 의미는 무엇이죠?' 라고 여쭙고 주보를 보니 말씀은 계2;1~7 설교제목은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교회'였다. '왜 에베소 교인들은 처음사랑을 버렸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혹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신가?' 라는 의문이 들어 집중해서 들으며 적었다. 1주일 전에 계2장 큐티를 했는데 그때 2절과 3절(네 행위와 수고와 참고 인내한 것 다 안다...)에선 은혜를 받았지만 4절(그러나 너를 책망 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은 나와 무관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주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첫사랑의 감사 감격도 없이 습관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그것이 마치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에 책망을 하신다는 이웅조 담임목사님의 말씀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집에 와서 '책망하다'를 영어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을 했을까 궁금해서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NIV성경에 의하면 'Yet I hold this against you.' 여기서 '타이르다 나무라다'의 blame, scold, rebuke 등의 고상한 표현이 아니고 'hold against' 즉 '~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다'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77번씩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께서 첫사랑을 버린 자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계신 것이다 '아버지 제가 배신자예요 그런데 무엇에 쓰시려고 다시 살려 주시고 왜 이토록 사랑하십니까?'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이 사역을 하면서 때로 귀한 만남으로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교계의 몇몇 목회자와 관계자들에게 상처를 받고 실망을 하여 다시는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님께서 노하신 것이다. 주님의 일을 마치 나의 일인 양 마음대로 하다니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한들 응답이 있을 리가 없어 답답하고 멀리 계시는 주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자 그 친구와 목사님을 만나게 하셔서 첫사랑의 그 감격을 불러일으켜 주시곤 주일예배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영어성경으로 보게 하신 이유가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지금 한국교계의 여러 문제점들로 인해 크게 분노하고 계신 주님의 마음을 확인 시켜주신 것이다. 얼마나 외로우시면 나 같은 죄인에게 하소연을 하시다니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첫사랑을 회복하는 의미로 무엇을 해드리면 좋으시겠습니까? 다시 목회자를 위한 강의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나는 네가 무엇을 하느냐(Do) 보다 어떻게(How) 어떤 마음의 자세로 임하느냐를 원하는 것이다.' '이 일은 너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다'라고 하셔서 또 엉엉 울면서 나의 자존심, 건강, 명예를 내려놓고 순종하기로 했다. 아직 건강이 완쾌 되지 않아 주위에선 염려를 하지만 요셉이 아버지의 명령에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very well'이라고 기쁜 마음으로 하다 보면 강해지리라 믿는다. 5월 28일 금요일까지도 이 칼럼이 마무리가 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우연히 나의 작은 서재의 게시판에 써 놓고 잊어버린 기도의 내용을 보고는 너무나 놀랍고 흥분이 되어 여성칼럼 담당 차진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랫동안 칼럼이 완성되길 기다렸지만 이토록 힘들게 써보긴 처음이며 질질 끌게 하신 이유가 있었다고. 10년 넘게 무료강의를 해도 예상보다 반응이 저조해 자존심이 무너져 내려 배척 당한 느낌과 경제적 압박으로 가족들에게 원망을 받게 되자 슬럼프에 빠졌었다. 차라리 인기와 수입이 많은 방송이나 계속할 것을... 이런 후회를 한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니야. 지금까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강력한 주님의 이끄심이 있었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자 몇몇 지인들의 의견을 듣고 강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여성칼럼
    2015-06-10
  • 서울에서 남도까지 멈추지 않는 전도 열정
    오카리나 등 근현대 수집품 통해 예술마을 조성 목표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발로 뛰며 복음을 전하는 열정. 서울 거여동에 예수마을을 이루고 싶은 꿈. 오카리나 박물관을 중심으로 마을미술관을 조성하고자 하는 비전… 새소망교회 김완섭 목사를 채우고 있는 사명 가치들이다. 김 목사의 올해 목표는 전라남도 진도에서부터 순천, 대전, 청주, 용인을 거쳐 경기도 김포까지 이르는 제4차 국토순례전도를 완수하는 일이다.김 목사가 이끄는 국토순례전도단의 전국 전도는 2013년부터 시작됐다. 1차는 3번 국도를 따라 남해에서 초산까지 6개월에 걸쳐 진행됐다.2차는 1번 국도를 따라 목포에서 파주까지 9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3차는 7번 국도를 거슬러 양산에서 고성까지 마을 곳곳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올해에는 진도에서 김포까지 4차 전도를 진행하고, 2016년에는 거제에서 중강까지 5차 전도를 추진해 2017년까지는 대한민국 모든 도시들을 직접 발로 밟아 복음을 전한다는 계획이다.“예수님의 마음으로 한국을 바라보면 어떨까?” 김 목사가 국토순례전도단을 처음 조직한 것은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됐다.교회들마다 전도를 하지만 다들 자기 교회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 목사는 이러한 이기적인 전도에서 벗어나 내 교회 상관없이 대한민국 온 땅에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 사역을 시작했다.예수님이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생각으로 뭉친 5명의 목회자들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것이 국토순례전도단이다.이들은 모두 작은교회 목회자들이다. 자기 교회 전도하기에도 급급할 법 하지만 작은 그림이 아닌 복음의 큰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용감하게도 도보로 국도를 따라 걸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지를 건네고 예수를 전해왔다.매주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금요철야를 인도해야 하는 목회자들이지만 월요일과 화요일이면 만사를 제치고 어김없이 모여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긴다.“전도는 아무리 해도 열매가 없는 것 같고, 쉽사리 지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마을에 도착해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고 집결지로 돌아오다 보면 우리가 나눠준 전도지를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꼼꼼히 읽고 있는 사람들은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를 다시 붙잡고 질문을 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피드백들이 저희에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김 목사는 전도를 하다보면 준비된 영혼들이 꼭 있다고 말했다. 이깟 전도지가 뭐라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싶지만 ‘설명해 달라. 교회에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이들을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 자세히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를 해주는 경우도 종종 있단다.그렇게 국토순례전도단이 3차례에 걸쳐 전국 전도를 다닌 거리는 6만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했다. 무려 지구를 한 바퀴 반을 도는 거리다.지금은 인원이 조금 늘어 7~8명이 함께 다니지만 김 목사는 전국 95개 지역에 지부를 만들어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이면 전국에서 동시에 전도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밝혔다.이 일을 위해 김 목사는 작은교회 목회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미약해 보이지만 모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김 목사는 자기 교회만 보지 말고 대한민국 전체를 보고 복음을 증거하자며 동역자들을 찾고 있다.국토순례전도가 1년 내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 외의 시간 동안 김 목사는 새소망교회가 위치한 서울 거여동을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예수 마을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서울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상대적으로 낙후된 거여동을 문화예술마을로 변화시킨다는 계획이다. 골목마다 마을미술관, 예술공방거리를 조성해 체험학습을 가능케 하고 무료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관광자원을 개발해 교회가 지역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이를 위해 김 목사는 지난 2007년 한국오카리나박물관을 열어 세계 각국의 오카리나 15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오카리나 수집을 위해 전국을 돌며 구했고, 외국 경매사이트를 통해 직접 구매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오카리나를 기부하는 사람들도 나타나 박물관을 세울만큼 세계 각국의 다양한 오카리나들이 모이게 됐다고 한다.이곳은 오카리나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박물관으로써 오카리나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매주 강습이 이뤄지고 있다.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 김 목사는 비전을 품었던 2005년부터 거여동 목회자부부기도모임을 시작해 매주 철야기도회를 갖고 있다. 금요철야를 마친 후 목회자와 사모들이 모여서 새벽 1~2시까지 기도와 교제를 나눈다.김 목사는 “지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역교회의 연합이 필수”라면서 “작은교회들이지만 누구보다도 큰 꿈을 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2002년 거여동에 새소망교회를 설립한 김 목사는 목회 끝날까지 거여동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밝혔다.국토순례전도, 지역교회연합운동, 신앙개혁운동, 작은교회세우기운동 모두를 꼼꼼하게 챙기는 김 목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회와 지역과 한국을 바라보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자는 모토로 정진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5-06-10
  • 가정부재 현상을 보며
    '가정부재’란 가정의 기본적 구성원인 부모가 장기간 주거를 이탈함으로써 일상생활에 중요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가정을 말한다. 가정부재(家庭不在)도 따지고 보면 결손가정의 한 유형이지만 결손가정은 부모의 부재현상이 영구적인데 비하여 가정부재는 일시적이라는데 차이가 있다. 가정부재는 자녀들과 부모의 접촉기회가 적어 상호간의 의사소통, 모성애 등이 결여되고 자녀의 교육문제 및 건강관리가 방임되며 가정 내에서의 자녀들의 일상생활이 파괴하게 되어 반사회적 비행화의 우려가 되는 가정부재 현상을 말한다. 오늘의 이 사회는 세속화 속에서 공업화, 도시화, 핵가족, 세대문제로 가정부재현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정부재 현상은 가정이 비인격적 집단으로 변하고 있으며 교육을 가정외의 기관에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음에 그 문제가 있음도 알게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기독교 교육의 차원에서 예일대학의 신학부의 '랜돌프 크럼프 밀러'는 기독교교육의 난제를 풀어 줄 단서를 말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삶을 위한 교육에서 가정을 교육의 장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며 신학의 재발견을 강조한다. 즉 화해의 목회차원에서 가정을 구속적 세포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가정은 기독교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가정의 부모들은 가정을 대화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고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때에 그 대화의 내용은 삶의 물음과 삶의 목적과 삶에서 참을 추구하는 대화와 만남의 공동체로 삶의 가치와 역사의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이는 사람은 측량할 수 없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이 사상과 삶,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주권적 하나님께 예배, 불가학력적인 은혜, 세상은 부정적인 죄에 속한 곳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세상은 하나님의 현존임을 의식하는 생활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 그리고 여기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이고 적용과 선포, 자유적인 여유로 삶을 실현하는데 신앙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기독교교육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인식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게 하며 삶과 실재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 양식과 문화를 세우고 전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오늘의 사회 현상은 교회의 가정 신앙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한 점은 옳다. 이것은 가옥구조의 변화, 과학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믿음의 약화에 기인하며, 교회의 미래는 가정에 달려 있고 그 미래는 자녀에게 달려 있기에 가정 공동체 안에서 상호 인격적 성숙을 위해 구성원 서로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기다움을 잃지 않아야 하며, 특히 가정공동체는 진정한 부부 사랑의 결실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상의 선물인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고 성숙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도록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가정을 말한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준비는 혼인하기 전부터 이루어진다. 가정은 자녀 출산이 부부 사랑의 절정이라면, 자녀 교육은 부모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요 의무이다. 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 생명의 전달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본질적인 것도 알게 한다. 부모는 자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전인 교육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진심으로 가득 찬 가정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가정은 성장기의 자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며 체험하고 배운다. 그래서 부모는 사랑에 대한 일차적 교사이며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행동과 언어로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부부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가 가장 좋은 가르침이 되는 것이고 이를 체험한 자녀들은 자신들이 성장하며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랑과의 관계의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엮어 나가는 것이다.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는 인간 삶의 갖가지 어려움과 시련들을 이겨 내고 힘 있게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녀가 성장하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독립할 때까지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화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삶이 익혀 나가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5-27
  • 12. 제69회 총회장 최훈(催薰)목사
    평양 대동강변에서 출생최훈목사(催薰 1926. 9. 26~2008. 4. 28)는 평안남도 평양시 유리(柳里)에서 부친 최병록(催炳錄)과 모친 황병선(黃炳善)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고, 조부님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로써 일찍 개화한 어른이었다. 최훈목사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의 최남단이며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양각도를 건너가는 나룻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최목사는 월남하기 몇년 전까지는 거의 고향에서 살았다. 조부님(최재식)은 고향마을에 ‘송산리교회’를 세웠는데 이 마을 출신 명사로는 연세대 김형석교수와 총신대 김득룡박사가 있다. 부친 최병록은 숭실대학 출신이었으나 최목사가 7살되던 해에 53세의 일기로 작고해 최목사는 어머니와 조부의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향 송산리에 있는 국민학교였던 신망학교(信望學校)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성상업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평양철물조합에서 근무했다. 일제 말엽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평양서기산 밑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44부대 군속이 되어 부대가 직영하고 있던 자활농장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사직 사면하고 재건교회 설립최목사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5년 8·15광복이 되자 고향 송산리에 돌아가 송산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평생 신앙동지로 함께 활동했던 김창인(金昌仁)전도사와 이창환전도사를 신앙의 선배로 만났다. 최목사는 교사직을 사면하고 고향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가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전도사가 재건교회 전도사가 된 배경을 보면,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교회는 사실상 영력(靈力)을 상실하였다. 교회가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게 되자 뜻깊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일제당국의 갖은 압박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투옥되기도 했다. 적게는 몇개월씩 길게는 6,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겐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출옥한 성도들이 볼 때 이미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은 기댈 만한 지도자가 아니고 변질된 사이비지도자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로 일제와 영합한 교권주의자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당신들은 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교회밖에서 여러분 못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노라고 큰 소리치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은 청년 최훈에게도 몹시 실망스러운 현실이었다.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성경대로 믿고 살아야겠다는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였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출옥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재건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일성 일당이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자 교회에 대한 탄압과 핍박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1947년 최훈은 고향 망경대에서 숙청 당한 후 평안남도 순안 원일리 28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재건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다. 청년 최훈전도사는 그 곳에서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생각을 굳힌다. 공산당에 체포돼 집행유예 2년당시 청년 부흥사로 서북지방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창인전도사도 고향 평북을 떠나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재건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을 떠나 서울로 월남하게 되자 그 교회는 후임으로 최훈전도사를 청빙하게 되었다. 최훈전도사가 황주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는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권력이 강회되고 있던 때였다. 동시에 공산당이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회에 대하여 가일층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훈전도사는 강단에서 소신있는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온한 전도사로 사상이 다른 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의 설교를 필기해 상부에 보고한 정치보위부 요원의 고발로 1949년 2월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법정에 선 최훈전도사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그후 그의 목회생활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언제 다시 영어의 몸이 될지 모르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지고 평북 강계(江界)로 가서 장백산맥 줄기에 위치한 향내산에서 50일간 산기도를 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던 참에 정말 예기치 못한 6·25동란이 발발해 황주의 재건교회는 지하로 숨어들고 말았고, 최훈전도사도 교회를 사임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그냥 버티다가는 인민군대의 입대에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로 산속으로 피난했는데 그곳에 숨어든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총살 직전에 UN군의 공중 폭격기의 폭탄 투하로 구사일생으로 4개월간 산속을 헤매면서 생사의 가름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평양 떠나 서울로 월남1950년 12월 5일 평양을 떠나 12월 9일 서울에 도착해 재건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있던 재건교회에서 고흥봉(高興鳳)목사를 만났다. 고목사는 한상동 이기선 목사와 함께 옥고를 치룬 동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남으로 다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고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이끌고 항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평생 신앙을 함께 할 멘토로 믿음의 선배 이순남권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권사 역시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신앙인이었다. 이권사는 최훈보다 일찍 월남하여 고흥봉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사였다. 이때 최훈전도사를 만나 부산 영주동교회에서부터 서울수복 후엔 서울 충현교회 그리고 동도교회에 부임하여 이권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믿음의 어머니로 함께 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김해시내에 재건교회 개척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고려파 교회와 직·간접으로 목회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재건교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김해재건교회는 나중에 고려파에 가입해 김해중앙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자신은 부산 영주동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면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 수립당시 고려신학교에는 한상동목사와 박윤선목사가 개혁신학의 수립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고 그동안 받은 은혜와 신앙생활에서 쌓은 경험을 조화시켜 가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었다. 1956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최전도사는 그해 4월 6일 신앙의 선배이며 과거 재건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친분관계가 있던 충현교회 김창인목사의 부름으로 담당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충현교회는 서울에 고려파 교회로써 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맡은 부서는 중·고등부와 대학부 학생회였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를 좀더 넓혀야겠다고 느꼈다. 나이 많은 최전도사는 자존심을 버리고 숭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최전도사가 학문을 더 배우겠다는 겸손과 향학열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싹트기 시작한 그의 예리한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가 숭실대학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면 후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학위논문으로 ‘한국재건교회교회사’를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숭실대학에서 우호익교수, 김양선교수, 서양사의 대가 김성식교수 등의 강의와 지도로, 재건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고 단단한 학문의 기초도 쌓을 수 있었다. 1961년 2월 숭실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졸업 5개월을 앞두고 평생 몸담아 목회한 동도교회로부터(당시 강도사) 청빙을 받아 1960년 10월 25일 동도교회로 부임하여 원로가 되기까지 뜨거운 충성을 다한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그의 교계 활동으로는 모교의 강사를 비롯 숭목회 회장, 한국외항선교회 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사무국장(1982)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대한민국평화통일자문위원, 한국항공선교회 이사장, 미주총신대 이사장, 평양노회 공로목사, 숭실대 모교를 빛낸 숭실인상, 국민일보 선교대상(1997),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1998) 등이 있고, 이를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은 그가 몸담아 사역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지난 2015년 4월 28일에는 그가 섬겼던 동도교회 예배당 본당에서 그가 떠난 후 7번째로 동도교회 성도들과 생시에 함께했던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는 모임에 참석, 새삼 고인의 신앙과 덕망을 느낄 수 있었다.필자는 7주기에 설교를 맡은 대전중앙교회의 원로요 증경총회장 인 최병남목사는 추모설교에서 로마서 14장 7~8절을 읽은 후, 최훈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① 순교자적인 삶을 산 사람 ② 생명을 건 목회와 신앙 ③ 최선을 다한 삶 ④ 믿음과 성령에 의존했던 삶이라고 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5-27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4
    갈릴리 서민 태생 예수가 당시 교회의 권위를 거슬러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율을 깨뜨리고, 회당이나 공고연한 장소에서 장애인을 치유하는 사역을 쉬쉬하질 아니하고 퍼포먼스를 벌리었다. 병아리가 단단한 벽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취득할 수 없다고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하였더라도, 기존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이야기는, 당시 사회에서는 죽음을 내걸고 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더더욱 일반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 관습을 깨는 것도 아닌, 종교의 계율을 무너뜨리는 행위라서 위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예수운동에서 공공연하게 들어나는 것들은 단순히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것만이 아니었다.당시 사회계층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 같은 지도자들에게 모욕감으로 공분을 사게 하였는데, 예수가 진정한 치료자요 구원자로서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저들의 친구들과도 식탁을 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기들의 초대에도 응하였고, 저들은 예수의 환대를 받고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가 성전에서 일으킨 퍼포먼스로 인한 두려움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성전을 기반으로 해서 종교적 권위와 경제적인 특혜를 누리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이해집단들은 예수운동을 잠식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예수를 십자가로 처형하는 계략을 내었던 것이다. 예수가 산과 들판에서 사람들에게 던진 가르침은 계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몸을 깨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수용과 용서, 치유와 구원을 가져오고, 두세 사람만 모여도 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에서든지 성령의 임재와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이렇게 예수가 30대의 젊은이로서 당시 기존 질서와 권위에 도전장을 내고, 서슴없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능력과 대담한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당시보다 더 부패하고 세월호처럼 기울어진 오늘의 교계를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예수가 보이신 방안들을 차용할 수는 없을까?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나 이사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의 왕성한 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신앙이나 가치관을 보편화시키질 못하였다.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고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옛날 다윗 왕조시대의 평화와 부귀를 새로이 꿈꾸었지만 매사 실패를 보고 말았다. 마카베오 형제에게 기대했던 조국의 주권 회복과, 더럽혀진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일들이 또다시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형제 중에 하나는 통치를, 또 하나는 사제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이 되어, 모든 권력과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오염된 역사가 번복되고 누적되자, 다윗의 자손에게서 비롯된 메시아사상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는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삼하 7:12,13,16). 인간의 혈통이나 지연, 학연에 연고를 두고 형성되는 집단들은 명예욕이나 권력욕이나 금욕에서 자유 할 수 없다. 이는 그들 역시 사사로운 이(利)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카베오 형제의 난 이후로 더욱 강력한 메시아사상이 발현되게 되었는데, 다윗왕조를 계승하는 메시아사상이나, 선지자들이 언급한 수난을 당하는 메시아사상이나, 성령으로 새로운 체계를 이룩하는 신학사상을 넘어서서, 다니엘서에서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이 땅에 세우실 메시아는, 위로부터 전권을 가지고 구름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야 하였던 것이다.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이 보여준 바와 같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제대로 갖춘 통전적인 메시아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예수운동은 팔레스타인 바깥에서도 일어났는데, 이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보여준 삶과, 십자가에서 드러낸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가치를 두고 일어선 공동체였다. 갈라디아 공동체나, 여사도 뵈뵈가 로마로 가져와 보급한 바울의 복음서신을 보면, 저들은 오로지 예수 안에서 옛 아담 적인 이기적인 삶을 종료하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들을 선물로 세상에 내어주는 삶을 살았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옛 질서와 권위를 깔끔하게 갈아 칠 수 있는,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을 믿고 따르는 수련생들이 아닐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5-27
  • 한국 핵무장을 반대하는 사람들
    최근 들어서 동북아의 국제정치 지각변동과 안보 불안요소의 증대로 인해 한국의 핵무장에 관한 관심과 지지여론이 학계와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정부와 학계의 신중함에 비해 일반인 사이에는 진작부터 한국의 핵무장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핵 자체의 위험성과 인류에 대한 파멸적 요인들로 인하여 할 수만 있다면 지구상의 모든 핵은 폐기 하여야한다. 그러나 이것은 꿈에서나 이루어질 실현 불가능한 일로서 상대의 자제와 평화만을 바랄 수 없는 것이 국제정치의 생태다.안보영역의 관점에서 한 국가의 안보는 궁극적으로 생존이 걸린 공공적 사안이다. 국제정치 영역에서는 안보를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동맹과 세력균형이론 또한 현실적 생존관계에서 비롯된 것들로 이상주의를 주장하는 학파들의 논리위에 서 있다.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현실주의적 경향은 주류적 시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게 제공하는 핵우산과 한미동맹은 한국의 안보역량을 제공해주는 메커니즘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안보 자율성과 주권을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나아가 한국의 독자성에 대한 주변국의 불신을 초래하여 다른 나라와의 보다 넓고 긴밀한 협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의 독자적 안보의 구축을 힘쓰기 보다는 방해와 통제에 두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생각할 때 답답하고 분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대 세력의 첫 번째는 모두 다 인지하듯이 미국이다. 미국의 반대 논리는 ?자신들의 핵우산 제공과 지역정세 불안?을 앵무새처럼 늘 상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퇴조와 국제정치의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들로 볼 때 미국을 믿는 것은 위험한 러시안 룰렛게임에 목숨을 거는 행동과 같다. 최근 국제정치 연구 분야의 관심 주제로 떠오른 것 중 하나가 ?미국의 국제적 무질서와 이율배반을 야기하는 원인 규명?이 국제정치학의 새로운 연구 주제로 제기되었다는 것은 국제사회가 미국을 더 이상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미국의 주장은 순전히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국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하는 일방적 행태이다. 미국의 과거와 현재의 외교정책을 보면 국제적 유 불리에 따라 언제든 손을 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시작한 프랑스의 핵개발을 미국이 강하게 반대와 압력을 행사하자 프랑스는 미국에게 “파리를 위해 뉴욕을 포기 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하며 프랑스의 안보를 위해 수 천 개의 미국의 핵폭탄 보다 몇 개의 프랑스 핵폭탄이 자국의 안보에 훨씬 안전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우리도 똑같이 미국에게 되물어야한다. “미국은 남북의 7천 5백만의 한국인과 서울을 위해 3억 5천만의 미국인과 워싱턴을 포기할 수 있는지” 강력한 질문을 던져야한다. 다행히도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케이토연구소의 저스틴 로건 같은 미국인 중에는 “한국의 핵무장이 북한과 이란이 핵무장을 하는 것보다 미국에게 이로우며 한국이 미국을 적대시할 나라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음을 국내 반대 세력들은 귀담아 들어야한다. 정작 찬성해야할 자들은 반대를 하고 이방인이 오히려 염려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반대 세력은 한국에 넓게 퍼진 비이성적 친미 지식인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미국이 반대한다, 한국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 정보기관의 국내여론 조작과 거짓된 안보 알리바이를 제시하며 끊임없이 자신들과 한국 지식층의 입에서부터 일탈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흘려보낸다. 미국이 금기시하면 한국은 군소리 없이 따라야한다는 뜻인가? 반대자들은 정보와 여론장사를 통해 미국에게 보상을 받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자신의 가정사까지도 관여하도록 용인하는 너그러운 사람일 것이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을 등에 업고 정치를 농단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미국이나 그 어떤 나라에게도 기댈 수 없다. 이제는 결단하고 행동으로 나서야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다가올 사태에 어두운 먹구름에 갇힐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이 오히려 동북아와 미국 모두에게 안보 위험을 제거하는 것임을 적극적으로 주지 시켜야한다. 한반도가 더 이상 강대국들의 장마당이 되도록 용인할 수 없다.
    • 지난 칼럼
    • 평신도
    2015-05-27
  • 노방전도자 송세현목사
    시끄럽다 욕하고 주먹질은 다반사···연장으로 살해 위협도 “행여 경찰서에 끌려가 소음방해죄로 없는 돈에 벌금을 내거나 억울하게 구류를 당하고 이해가 안되는 죄목으로 어려움 고통에 있어도 오직 나는 나라와 민족의 그 십자가를 지고 영과스럽고 거룩하며 가장 선하고 귀한 복음전도 피켓을 높이 쳐들고 만민 앞에 당당하게 전해야 한다”‘예수 천국’, ‘불신 지옥’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출퇴근 하는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노방전도자들이라 부르는 이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골라 다니며, 목이 터져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쳐대는 탓에, 하루에 한 번, 많게는 서너번씩 이 말을 듣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런 그들을 고성방가를 일삼는 예수쟁이라고 폄하하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교회에 있어 매우 큰 역할을 해 온 사람들이다. 노방전도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눈에 확 띄는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큰 모자 눌러쓰고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는 건 웬만한 담력이 있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이들을 보며 그 힘든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하는지? 남한테 민폐만 끼칠 뿐이지, 같은 기독교인이 봐도 이해가 안된다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이들의 행위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우리나라 전 국민 중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무종교인이나 심지어는 타종교인도 이 말은 안다. 그럼 성경적으로 봤을 때 이 말이 틀렸는가? 오히려 기독교의 존재 이유와 우리 신앙의 목적을 가장 분명히 해주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저들로 인해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은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 진리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44년을 이어온 노방전도의 열정송세현목사는 ‘대한민국 복음전도목사’를 자처하며, 지난 44년간 노방전도에 목숨을 건 신실한 목회자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오직 기도와 전도 뿐이 없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노방전도를 워낙 안좋게 보는 시선이 많은 탓에 파출서와 경찰서만 100번도 넘게 들락거렸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일을 주저치 않고 있다. 그는 노방전도에 대해 “강하고 담대함이 없고 부끄러워 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룩하고 특별한 일이다”고 말한다. 송목사의 강인한 전도론은 때때로 스스로를 위기에 빠지게도 했다. 그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다 승객들에게 주먹과 발로 종종 폭행을 당했으며 한번은 쇠스랑을 들고 찍어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당시 정말 극심한 공포심에 온 몸이 굳어졌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송목사의 담대한 전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통일교 집회에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큰 목소리를 “거짓된 문선명을 믿지 말고, 통일교에 속지말고, 예수 천국 가자”고 외쳤다. 그 이후의 상황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노방전도를 하는 전도자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지만 송목사에게도 생활고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하루종일 오직 전도에만 매진하는 탓에 어떤 때는 끼니를 이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알려져 교인들이 가져다 주는 과일, 음료수, 음식, 피로회복제 같은 것도 먹을 수 있지만, 무명인 30대에는 밥을 거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뿐 아니라 전도가 끝나고 집을 가야 하는데 버스 토큰 하나가 없어서 곤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환승이라도 되지만 예전에는 버스 한번 탈 때마다 토큰을 사야 하니 집에 갈 토큰까지는 안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영광’ ‘아멘’ ‘감사’만을 외치며, 예수님을 전하는 순간이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그의 전도를 향한 열정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 목과 입술에 피가 새어 나와도, 며칠을 굶어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든 지경에도 결코 식지 않는 순수한 믿음 그 자체인 것이다. 노방전도 44년이라는 이력은 한국교회에서도 쉽사리 찾기 힘든 것으로, 세월을 뛰어넘은 그의 노력은 차츰차츰 인정받게 됐고, 이제는 개교회 부흥회에 1,700여 차례나 강사로 초청될만큼 유명세를 탔다. 또한 그를 주제로 수많은 언론이 기사를 내고, 책과 만화책, 심지어 비디오도 제작됐다. 조만간에는 그를 주제로 전도영화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렇게 유명인이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어깨에 빨간 띠를 둘러메고, 노방전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남들은 은퇴하는 7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 더 열렬히 ‘예수 천국’을 외치고 있다. ‘노방전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한낱 소음공해나 고성방가로 밖에 안 들리겠지만, 그 수많은 이들 중 어떤 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위로하는 천상의 메시지로 들릴 수도 있다.송목사는 바로 오늘도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비록 누군가는 또 그런 송목사를 향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댈지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기다리는 길잃은 양들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전도는 멈출 수 없다. 한편, 송세현목사는 경기도 양평균 지평 출신이다. 그는 지평초등학교 시절 그곳 지평교회에 출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7년 군생활 중 감리교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아 노방전도자가 됐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5-05-21
  • 11. 제71회 총회장 안중섭(安仲燮)목사
    황해도 황주 출신, 단신 월남안중섭목사(1918-2004)는 1918년 7월 9일 황해도 황주군 청수면 원정리(중동) 210번지에서 아버지 안용수(安容洙)와 어머니 김사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생 승섭(承燮, 1920. 8. 15), 팔섭(八燮, 1026. 3. 16), 봉섭(鳳燮, 1929. 1. 5)이와 여동생 화섭(花燮, 1923. 3. 15)이 있었으나, 단신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생사는 알길이 없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교회에 나가는 형제들이 없었고 혼자 유년주일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젊었을 때에는 중화장터의 씨름판에 나가 황소 한마리를 상으로 타 집으로 몰고 왔을 정도로 우직한 성품이었고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같은 성품이 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나 성경말씀과 배치되는 일은 절대로 타협 못하는 올곧은 성격을 평생 유지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안목사는 처음 예수 믿었던 시절에 겪은 사건에 대하여 안재정목사가 출판한 <원로 목사행전>(목양사 1977. p.127-129)에 보면, 어느 해인가 한번은 조상기일이 하필이면 주일이었다. 보통때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올 수 있었는데, 이 날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백부(伯父) 댁 식구들과 안목사 가족들 그리고 숙부(叔父)님 댁 식구들까지 대소가 가족들이 모여 차례대로 조상의 신위 앞에 절을 하고 제사가 끝나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제사지낸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식들의 도리이니 우상숭배가 아니겠지 하는 생각과, 다른 한편에서는 아니야 하나님 외에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하고 섬기면 우상이야 하는 생각으로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과 상의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 순간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 예배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기도했다. 몇 시간이 지나 집에 왔을 때는 제사가 이미 다 끝나고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어른들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음으로 쫓겨나던 말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는 제사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치고는 냅다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따라 나오신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할머니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셨다고 했다. 안목사는 “이 날이 내가 예수 믿고 처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린 날이고 하나님께 감사한 날이었다”고 고백하였다.서당에서 한문공부해 한시 즐겨안중섭목사는 일찌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과 동몽선습(童蒙先習)과 명심보감(明心寶監)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마치고 시경(詩經)을 배우다가 신학문이 들어와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그는 생시에도 한시(漢詩)를 좋아하고 즐겨 외웠으며 설교에 응용하기도 했다. 당시 학교생활이란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시 시국상황이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한 야심으로 철도부설과 도로공사 비행장 신설에 혈안이었고 심지어는 군수품 공장과 염전에까지 학생들을 동원 1년 중 절반은 보국대란 명분으로 노동판에 끌고 나갔으니 학교생활이 재미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만이 쌓여갔다. 안목사는 이러한 한심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살맛나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도 버티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영접한 예수님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는데 나도 우리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시대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판국에 예수를 믿으며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데 기독교 지도자의 길, 목사가 된다는 결심은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려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거느리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아내(이섬녀, 1920. 3. 19)와 첫아이 은신(恩信, 1942. 1. 5)이까지 있는 한 집안의 장남으로써 가사(家事)를 포기한다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상황이 아니었다. 더우기 일제 말엽이라 평양신학교가 이미 휴교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안목사에게 드디어 상상하지도 못했던 8월 15일 민족해방의 날이 다가 온 것이었다. 한때 경찰에 지원 순경생활도안목사(당시 집사)는 우선 사회질서 확립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동안 경찰에 뛰어들어 순경이 되었다. 고향 중화지서에서 근무할 때 동리에서 해방을 맞이해 기념하는 동네 굿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변 모래밭에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유명한 무당 다섯을 데려다가 큰 굿판을 벌여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동리에 있는 각 기관과 유지들이 기부금을 낸다고 야단이었다. 일제 때 천황을 섬긴 것도 억울한데 이제 막 해방이 되어 자유를 찾았는데도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무당을 데려다가 굿판을 벌리며 미신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각 기관에서까지 이를 권장하며 기부금을 내고 백성들에게 우민정책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안중섭 순경은 지서장에게 이번 동네 굿은 못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나 지서장은 백성들이 해방을 기념해서 기쁘게 놀아보자는 것인데 반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가버렸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마당에는 온갖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사상에는 돼지머리가 올라와 웃고 있었다. 무당들은 돼지머리에 돈을 꽂은 사람들을 위해 한바탕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안순경은 총을 들고 굿판에 나가서 굿을 못한다고 큰 소리쳤으나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안순경은 총을 공중을 향해 한발 쏘았으나 여전했다. 안되겠다 싶어 총구를 무당을 향해 걷어 치우지 않으면 쏘겠다고 했더니 무당과 모인 무리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쳐 굿판은 막을 내렸다. 사실 8·15의 감격은 잠시였고 2~3개월이 지나자 북쪽엔 붉은 군대 소련군이 신의주와 만포로부터 진주하게 되더니 갑자기 공산주의(共産主義)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경찰서가 내무서(內務暑)로 바뀌게 되자 안순경은 사직하였다. 그때 마침 개교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북한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으로 제대로 신학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곳에서의 신앙을 유지하기란 생사를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자 안중섭은 1년의 신학을 마치는 둥 마는 둥 이젠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이르자 38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다. 북쪽에 가족을 두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온 안집사의 삶도 평탄할 수 없었다. 6·25전쟁으로 남쪽에서 목회곧 터진 6·25전쟁으로 안목사는(당시 전도사) 경상북도 청도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 곳에서 청도신읍교회를 거쳐 동곡교회 전도사로 후엔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다가 경청노회가 설립될 때 창립노회장(1962)을 역임한 후 수원제일교회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로 목양지를 옮겼다. 수원제일교회에서(1966부임) 교회 앞에 선언한 안목사의 목회철학은 ① 주일성수 ② 온전한 10의 1조 ③ 배가 전도 ④ 교회개척 ⑤ 의로운 교육이었다. 안목사의 5대 목회철학은 바로 자기의 일생 실천하고 겪었던 신앙철학이기도 하고 목양의 지표이기도 했다(수원제일교회 50년사 2004. p.237~305).안중섭목사의 목회관을 이야기하면서 특기해 둘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6·25동란 직전, 신학교 재학 중 강원도 횡성군 소재 공근교회 전도사로 사역할때 겪은 고난의 승리 사건이다. 오늘날처럼 국가 행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식이 아니고 국기에 대한 배례라고 하면 선 자세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던 시기에 자기교회 국민학교에 다니는 김안위라는 학생이 아침조회 때 안전도사에게 배운대로 절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가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을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낸 사건이 터졌다. 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달했을 때, 그 학생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이 국기에 대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했다고 했다. 이 일로 안전도사는 1950년 1월 20일 강원도 횡성경찰서에 연행 구금되는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었다. 춘천 구치소로 이감되어 있을 때 어떤 군목이 면회를 와서 “당신을 위해 전국교회가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를 했다. 이 일로 인해 최동진목사 이영수전도사 등의 연명으로 경무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하게 되었고 이승만박사의 지시로 국기에 대한 배례가 오늘의 국기에 대한 경례로 바뀌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안중섭목사의 투철한 성경적인 신앙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어여삐 보셨던지 하나님께서 1986년 9월 제71회 합동측 교단 총회장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 이룩된 몇가지 사역을 열거해 보면 ① 총회 부채를 청산하였으며, ② 교단적으로 어려웠던 이영수목사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③ 손영준교수가 개인적으로 이끌어 오던 선교훈련원(M.T.I)을 오늘의 세계선교훈련원으로 정착시킨 것 등을 들 수 있다. 은퇴 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수원제일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노회와 총회 일을 염려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나다가 2003년 10월 예상치 못한 뇌졸중으로 병상생활을 100여일 신고하다가 2004년 1월 13일 오전 1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면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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