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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뜻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이를 믿는 자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닮은 형상이 삶의 관계에서 이를 실행함을 의미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며(히1:2)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기한이 차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다.(갈4:4),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다(막14:36). 요한복음15:15-16절에 보면 "15;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 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너희가 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는 창조자를 말한다. 창조자는 세상을 제조하신 분으로 이를 주관하는 자이고 주인이시기에 세상을 사는 살림살이는 아버지 뜻대로 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삶의 주관자이시며 그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소유이다. 세상에 모든 것은 사람의 것 아닌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내 것이 아니기에 삶의 마지막에는 빈손으로 간다. 다만 아버지의 상속자뿐이다. 소유권은 세상의 것이 아니고 그 소유권은 하나님이시고 그 아들은 관리자로서 상속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성육신 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순수한 보편적 인간성,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삶으로 보여 주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은 그 자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들이 탄생하여 우리도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난을 거쳐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끝내는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오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하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마태복음에서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누구든지)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분뿐이시다." 하심에 주목한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토기장이와 진 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권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만 알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흔히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아빠(ABBA) 아람어로 호칭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 모두가 우리를 하나님 사이를 새로운 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로서 삶을 베푸시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이해한다.'아버지'를 한국 국어사전으로 보면 남성 어버이, 아들이나 딸을 가진 남자. 처음으로 어떤 일을 개척하거나 크게 베푼 사람을 말하고 창시자로 이해하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친근하게 일컫는 말로 "아버지여 제 소원을 들어 주소서"로 쓰임을 알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의 관계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식은 없다. 그러기에 부모와 자녀가 사는 가정을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다 잘되어 나간다는 뜻으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한다. 서로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다르면 그 집안은 불안에서 살 수 없다. 서로의 소통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집은 무너진다. 이 관계를 '물과 어름'으로 그 이치를 비유하고 싶다. 물은 어느 모양의 잔에 부어도 부딪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어느 모양의 잔과도 생각과 뜻을 같이한다. 곧 이는 소통이 가능하고 어울림이 가능하다. 하지만 얼음은 그렇지 못하다. 네모난 얼음을 둥근 모양의 잔에 담는다면 잔을 부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얼음이 둥근 잔과 서로 함께 닮으려면 자신을 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둥근 잔에 들어와 잔을 채우는 둥근 물이 된 후 다시 자신을 얼게 하여 둥근 얼음이 된다. 얼음이 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과 얼음은 무엇인가. 이것은 상이한 두 가지 실체가 아니라 서로의 실체이라는 관계를 알게 한다. 다만 상이한 사물이나 현상이 처해 있는 모양인 그 상태(狀態)로 다르게 존재한다. 얼음과 물의 변화는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그 상태의 변화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얼음과 같은 마음과 물과 같은 마음으로 변화가 가능하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5-14
  • 천국을 닮은 우리집 식탁
    온 동네가 알록달록 꽃으로 뒤 덥혀 아름다운 꽃 잔치를 하더니, 어느덧 나무마다 초록색이 힘차게 뿜어져 나와 가는 닿는 곳마다 초록으로 변하는 5월이 되었다. 봄에는 꽃들이 피어나 사랑스럽고 감사하고, 여름엔 뜨거운 태양이 있어서 감사하고, 가을엔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인생을 다시 생각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겨울은 하얀 눈과 봄을 기다리며 추위를 이겨낼 수 있어서 감사하다.우리가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겨 다시 자유를 찾고자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던 1919년경의 우리나라 문맹률은 90%였으며, 평균 연령도 27세였었다. 그래서인지 일본 아베는 아직도 우리를 미개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화장실도 샤워시설도 없었던 100여 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이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한글을 배워가며 생명을 바쳐 미개한 조선을 깨워주신 것은 하늘의 크나 큰 은혜다.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그들의 사랑과 은혜를 잊는다면 하늘은 노할 것이다. 그때의 옛날 어른들은 불행하게도 공자의 사상을 물려받았기에, 모든 일을 체면 위주로 처리했으며,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무시하며 명령하며 함부로 손을 댔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려는 우리 새 시대 부모들은 옛 조상들의 모습을 버리고 성숙한 모습으로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가정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저녁에 일을 마치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간이다. 내가 존경했던, 유대 교수님 가정은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 항상 전화를 자동응답으로 돌려놓거나 꺼놓아 두었다. 이는 아무도 그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식탁위에는 촛불을 놓았기에 아름다운 예식을 위한 식탁처럼 보였으며,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잔잔히 틀어놓는 이유는 분위를 높이고 음식 소화를 돕기 위함이란다.식탁의 맨 끝 의자는 항상 비워 두었는데, 그곳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앉아 계시며, 식사 중 그들의 대화를 듣는 의자란다. 식사를 하기 전 아버지가 먼저 음식을 향해 축복기도를 한다. 모든 음식에는 물이 들어 있으므로, 하늘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아버지의 축복 소리를 들은 음식은, 더욱 맛난 체질로 바뀐다는 것을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또한 자녀에게 음식만 먹이면 밥통이 되어, 하나님, 부모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으므로, 사람답게 살라는 뜻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로 율법도 한절 읽어준다. 그 후, 아내를 향한 남편의 ‘나의 사랑하는 아내여 그대는 나의 면류관이요 보석입니다’ 라는 감사의 노래가 끝나면, 이어서 자녀들도 ‘내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 음식도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라는 찬미 후 식사를 시작한다. 이런 아름다운 찬송을 받는 유대인 어머니들은 어린 자녀를 놓고 절대 집을 나가거나 이혼하지 않으며, 오늘도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이혼율을 가지고 있으니, 가장 높은 노벨상과 최고의 부와 명예를 자랑함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식탁에서 우리도 서로 많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식사 시간 남편과 아내의 흉이나, 교회식구들을 비롯한 남을 험담하는 부정적인 말은 절대 금물이다. 이는 자녀에게 음식과 함께 독을 먹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외국 이민 생활은 외롭기 때문에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주말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회포를 푸는 일이 많다. 내가 아는 권사님과 장로님은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어냈지만 자녀 양육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집에 도둑이 자꾸 들어와 경찰이 도둑을 잡고 보니, 바로 자신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었다. 부모의 물건을 쳤더라도, 부모가 빌며 보석금을 내놓더라도, 교도소로 끌려가는 것이 미국의 무서운 법이다.그 교인들 중엔 7명의 의사 부부들이 있었는데, 주말마다 모여서 식사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주로 자신들 교회의 목사가 얼마나 나쁜지, 그 사모는 얼마나 촌스러운지를 아이들 이 듣고 있음을 상관치 않고 자주 이야기 했다. 10년이 흐른 후, 그 자녀들은 하나같이 성공적으로 자라지 못했음을 보며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세월은 흘러갔고 자녀들의 어긋난 인성은 돌이킬 수 없었다.그러므로 내 마음이 우리 가족들 때문에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지, 그리고 오늘 하루도 내 자녀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즐겁게 보냈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식탁에서 함께 나누자. 우리 가정은 천국이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여성칼럼
    2015-05-14
  • 미국의 위험한 도박
    성경의 예언대로 세상은 종말의 끝을 향한 영적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와중에 열방들은 주의 말씀대로 점차 이성을 잃을 것이다. 그 열방 중 하나인 슈퍼파워 미국이 분별력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의 경고를 계속하여 외면하며 교만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처럼 심판의 길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다. 하나님이 미국에게 허락한 힘과 부를 교만과 우상으로 더럽히며 건너지 말아야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일전에 ?미국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 10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다. 미국의 신실한 주의 종들 또한 미국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보내고 있으며 그 중 헨리 그루버 목사는 “하나님이 미국을 심판하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 사과하여야한다”는 미국 심판의 불가피성을 고하고 있다. 필자는 선지자나 예언자는 아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시대의 징조와 상황을 통해 미국의 교만한 영적 행위와 위험한 정치적 행동들을 진작부터 우려하고 있었다. 2015년 4월 27일 전범국 일본에게는 그동안 허락하지 아니한 미 상하의원 합동연설을 아베총리가 최초로 의회 연설대위에 섰다. 이는 미국의 절박한 정치, 경제, 군사적 필요와 일본이 자국의 국내외적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양국의 이해가 일치되어 만든 정치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장차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불안 심리를 증폭시킨 한국 언론들의 ‘새우’에 빗댄 어리석고 무지한 보도가 국민의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견고한 행동에 서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주의 말씀을 지키며 본연의 사명에 힘쓸 때 그 뒤의 모든 일은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문제는 이 나라의 교회의 자세에 달려있다. 물질과 세상의 정욕과 탐욕에서 결단력 있게 하나님께 돌이켜야한다. 특히 교회 리더 들의 진정한 참회와 그 뒤를 성도들이 동일한 마음으로 뒤따라야한다. 한국교회가 복음전도의 사명과 평화의 전파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할 때 이 민족은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며 또 다시 전쟁의 화를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시대를 깨닫지 못하고 무너진 여리고성을 수축하고자하는 일본의 거짓과 교만은 예비 된 화를 앞당겨 하나님이 준비하신 칼날에 엎드러지고자 자처함이다. 주변정세가 어지러울수록 한국 정치지도자들은 도덕적 반성과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갖추어야한다. 주권과 외교적 차원에서 미국에 대한 정당한 요구와 정경분리의 확고한 원칙에 따라 미·중·일 외교에서 유연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해야한다 2009년 한·베트남 외교관계에서 국력에서 훨씬 뒤쳐진 베트남에게 한국이 무릎을 꿇는 외교 굴욕의 사태가 있었다. 한국은 주권과 국익 앞에서는 강대국들에게도 물러나지 않는 베트남과 이스라엘의 외교를 배워야한다. 나아가 지도자들의 도덕적 양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단결과 정직한 행동들의 교육과 의식 혁명에 힘을 쏟아야한다. 누구든지 미국에게 애굽의 부류와 같은 일본과 손을 잡고 그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미국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진 정치적, 사회적 행위들을 멈추어야한다. 불과 200년의 역사를 사진 미국이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에게 가해자 일본의 왜곡된 역사 행위를 묻어두라는 것은 주제넘은 오만불손한 행위이다. 반성은커녕 진실을 왜곡하며 과거를 지향하고 있는 일본을 저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연합하여 오히려 동아시아의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는 바다. 이는 미국 스스로 자기 발에 차꼬를 채우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애굽을 붙들어 주는 자도 엎드러질 것이요 애굽의 교만한 권세도 낮아질 것이라.”(에스겔30:6)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터전위에 세워진 미국이 우상과 악을 즐기는 일본과 연합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한 애굽을 붙들어 주는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을 상대로 한 위험한 도박행위이며 치명적 자살행위이다. 이와 같은 때에 헨리 그루버목사와 테리 베넷목사는 “하나님은 일본의 견고한 것들을 무너뜨릴 것이며 한국은 미국을 의지하지 말고 주를 의지해야한다”며 사랑이 담긴 조언을 하고 있음에 감사해야한다. 교회와 위정자들은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님이 이 나라를 마지막 때에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의 비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평신도
    2015-05-14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13
    요즈음 우리네 교계에서는 ‘사울 증후군’에 몹시 시달리는 계열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위임을 받고서, 특정한 위치에서 사역을 하고서 은퇴한 교역자들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사울 증후군을 비교의식으로 인해서 비롯된 증세로 간단하게 처리하려고도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일반 사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교계에서는 꽤 무게가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으로서, 개 교회나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그는 TV에도 매주 강연을 하는 설교자이기도 하다. 그가 이룬 업적은 그가 속한 도시나 그가 몸을 담은 교단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이다. 그도 나이가 들어서 70을 맞이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권한을 내려놓아야 했다. 허지만 그가 이 모든 것을 내려놓기에는 그의 몸값이 너무 큰 나머지, 그가 벌려 놓은 일거리들 때문에 실제로는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부임한 후임자는 그의 뒷받침을 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는 이미 과부하 상태였던 것이다. 얼마가지 않아서 후임자는 재판에 회부되는 일을 당면해야만 하였다.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사울 증후군 현상은, 마치 중심을 잃고 바다 한 가운데에서 넘어진 세월호처럼, 수많은 교회들과 신도들의 생명을 희생시킬까 보아서 두렵기만 하다. 사울은 그의 주변 사람들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높은 훤칠한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주변의 적들에 노출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과 같이 왕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이러한 요청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자가 사울이다. 이스라엘에 일어나는 모든 정황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이 척척 맞아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 군단이 사울과 접전을 벌이려고 전선이 형성되고 있을 때에, 사울의 군대가 흩어지기 시작하자, 저는 급했던 나머지 사무엘이 도착도 하기 전에, 기다리질 못하고 제사를 집례 하였던 것이다(삼상 13:12). 사울은 ‘제사장 같은 왕’의 흉내를 내었으나, 웃시야 왕도 야훼의 향단에 분향하려다가 문둥병에 노출되어서 평생을 별궁에서 격리된 채로 있었듯이,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거리낌이 되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도 하나님이 경계한 전리품들을 불법으로 챙겼다. 별 가치가 없는 것들은 그대로 행하였지만, 살지고 기름진 좋은 것들은 숨겨 두었던 것이다. 사울이 야훼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은 야훼를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좋은 것들을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를 바르게 식별하시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하였다. 사울의 이와 같은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무엘이 진영을 떠나려 하자, 사울은 그의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길까보아서 사무엘이 동행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행동으로도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울의 행위는 결국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그에게 임하신 성령이 떠나가는 결과를 야기한다. 이렇게 성령이 부재한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자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다윗이라는 양치기 소년에게 기름을 붓게 되고,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이날 이후로 주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고, 그 시부터 새로운 리더십이 이스라엘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엘라 골짜기에 블레셋 군대와 맞서서 진을 친 이스라엘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정황을 우연찮게 보게 된 다윗은 적장 골리앗과 직면하여 겨루게 되었고, 드디어 시민들이 ‘사울과 함께한 자는 천천’이지만 ‘다윗과 함께한 자는 만만’이란 노래가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명성과 백성의 마음이 사울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넘기어 가자, 사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윗을 죽이려 하였다. 다윗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피신을 할 수 밖에 다른 방책이 없게 되었고,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찾아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며 다윗을 옥죄었던 것이다. 오늘에도 한국교회는 사울과 그가 이끄는 군대를 피해서 몸을 낮추고 숨기는 후임자들이 적지 않다. 저들이 숨은 동굴을 거미조차도 안쓰러운 듯이 거미줄을 쳐서 보호하였다는데, 오늘의 한국교회의 미래지기들이 다윗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5-14
  • “때”가 찼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4:12-17; 눅4:14-15)고 했다. “때가 찼다.” 신약에서 새로운 약속의 시작의 말씀은 이 말로 시작하고 있다. “때가 찼다.” 이 말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때가 찼다”에서의 “때”는, 역사가 말해온 바로 그 때이다. 찼다는 것은 바로 그 “때”가 마침내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 “때”란 어떤 경우나 부분을 말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데 알맞는 기회나 적당한 시간으로 말하지만 대체로 시기. 시대. 연대 따위의 뜻으로 쓰인다. 성서는 수시로 변하는 현 시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삶의 진정한 의미와 참된 가치를 찾도록 도와주는 구도서로써 누구나 삶에서 가까이 할 수 있는 책이다. 성서를 보면 한 저자의 책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많은 저자가 있어 그 당시의 저자들이 삶을 사는 생활에서 사회. 정치. 문화. 경제적 시대적 정황에서 나름대로 경험한 하늘에 계신이의 하늘의 활동을 각자의 신앙의 결단에서 각자가 터득한 신비한 시대적 체험을 자기 문체로 표현한 작품들이 모아져서 말씀이 약속이 되기 위해 구약인 히브리어의 성경이 되어 히브리어로 씌여 졌지만, 신약의 복음서는 코이네(koine)라고 알려진 표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 이는 곧 시대의 그 “때”가 있어 살아 있는 신앙들이 나름대로 삶에 구사(驅使)하는 힘이 되어 죽은 언어가 아닌 살아 있는 언어로 약속의 실현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다양한 문화를 배경으로 여러 시대를 거쳐 다수의 관점에 의해 쓰인 하늘의 활동인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활동이 경전화 된 것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국적인 세계상을 드러낸다. 전도서 제3장에서는 매사에 때가 있다고 한다. 1: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2: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3:죽을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고 성서는 이를 챙겨서 “때”를 말한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 이상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때가 찼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시대정황에 매우 민감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은유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시대변화의 흐름과 감각에 둔한 사람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꾸짖은 바 있다. “너희가,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하심에 주목한다.시간의 두 개념은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 이다. 수평적인 시간 혹은 직선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물리적인 시간개념이고 카이로스는 적절한 순간, 초월적인 순간이란 뜻이다. 성서에서는 “카이로스”로 자주 쓰인다. 일차원적이고 연속성을 가진 흐름으로 이해되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흐름보다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는 수직적인 의미로 그 뜻을 삶에서 이어간다. 사람의 삶에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0년이다. 이 100년은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우리의 삶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쏜살같이 날아간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잠에 들어 있을 때나 기계적인 시간으로 흐른다. 그리고 삶의 끝이 다가온다. 이는 의미 (뜻)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시간으로 지나갔을 뿐이다.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땅의 썩을 것을 위하여 아무리 애쓰고 성공한 것들이 많아도 카이로스 시간의 저울에 달아보아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 그냥 버려진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일생의 한 번의 삶은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그 약속을 믿는 삶을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생명이 있는 생물에게는 생로병사의 일생이 주어진다. 자연의 공부는 결국 시간의 탐구와 같은 말이 된다. 삶은 주어진 시간(일생)만큼 자연을 영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원리는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이다. 생명나무의 씨앗이 땅속에 묻히며 잎과 줄기를 내보이며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씨알을 남기며 죽음이라는 시간을 맞이하듯이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의 부활로 넌지시 “때가 찼다”는 “구원의 때” 를 보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5-07
  • 다양한 경력의 사나이 수필가 순담 최건차목사
    최 건 차 목사(수원샘내교회)매우 다양한 경험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수필가 순담 최건차목사(74세)를 알게 된 것은 오래전 교회연합신문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서 부터이다. 언제나 활달한 성격에 여유로우면서도 정의롭고 당당하게 보이는 것은 철저한 청교도적 신앙의 품격과 과거 장교생활을 했던 군인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최건차목사가 살아온 파란곡절의 역사를 듣노라면 밤을 샐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하여 과도기 이념갈등이 심한 탐진강 상류에서 살다가 유년시절 6�25전쟁으로 빨치산해방구 시절을 겪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미션계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영도 명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한다. 4.19를 지나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부산 해운대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해운대교회 주일학교 선생과 성가대원으로 봉사를 하다, 미8군 카투사로 의정부와 왜관을 거쳐 대구 미8군후방사에서 근무를 마칠 무렵 장교가 되었다.그는 1968년 1월 21일 사태 때 전방 작전장교로 5분대기 전투소대장을 멋있게 수행하고 나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미군 전투선박부대에 필수요원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부산에서 한국 육군 최초의 선박부대를 창설한 장본인이다. 그후 1973년 말 전역해 부산대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1975년 부산을 대표하는 직장예비군 중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알현하기도 하고, KBS 방송국에서 안보에 관한 생방송을 시작으로 부산지역 안보연사로도 활동했다.최 목사는 군에서 제대한 후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부인이 소천하는 아픔을 겪은 후 뒤늦게 안양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렇듯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여 북수원의 변두리 샘내마을에 터를 닦고 30여 년 간을 목회에 전념했다. 대신교단 경기노회장과 수원경목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교계활동과 원로로서 대내외적으로 비중 있는 일들에 자문을 하면서도 정치적 야망이나 욕심을 버린 송죽 같은 야인이다.최 목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명산은 다 찾아 오르는 등산마니아이기도 하다. 혼자서 매주간 1회 이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가와 사회 교계를 위한 기도산행을 한다. 그는 반드시 산 정상까지 올라 기도 마무리 하고 하산한다. 최건차목사는 추억의 흔적을 영상으로 담는데 탁월하다. 등산과 여행을 다녀오면 배경음악을 깔고 움직이는 사진에 자막을 넣고 편집하여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주고 있다. 사진을 컴퓨터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연세가 있는 분이라서 그 열과 성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최 목사는 이처럼 팔방미인인지, 전천후사나이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 우리 가곡은 물론 이태리 민요 여러 곡과 영어권 민요도 원어로 즐겨 부르며, 중학시절부터 야구광이었고, 특히 반세기 전의 국내외 영화에 관해서는 전문가 수준이다. 기자와 함께 수년 전엔 의기투합하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수필문학반에 등록하여 한 학기를 이수하였다. 이후 최 목사는 4년이 넘도록 계속 수강을 하면서 한국수필 등 여러 문학지에 작품을 내고 있다. 지금은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부회장으로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조문예, 운현수필, 대신문학회 등에서 문학활동을 하면서 동인들과의 유대를 잘 쌓아가고 있다.최목사는 본지 발행인과 본 기자와 거의 매주마다 만난다. 만날 때면 반갑기도 하지만 지난날의 애기를 하다가 급변하는 우리 국가사회와 교계를 우려하는 대화를 의미심장하게 나누곤 한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우리들의 매끈한 사상이 천둥번개를 동반하기도 하여 일상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보기도 한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셋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대학로를 거쳐 낙산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청계천을 거닐다가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감성이 깃든 추억을 만들곤 한다.또 우리 셋은 두 차례에 걸쳐서 중국의 변방 실크로드 신장 위구르지역의 타클라마칸(Taklamakan)을 탐방했다. 그곳 오아시스 도시들에 퍼져잇는 옛 동방 기독교의 흔적을 찾아 역사를 탐방하는 시간이었다. 금번 5월말에는 제3차 타클라마칸 역사탐방을 계획하고 있다.<글·김형원장로>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5-05-07
  • 하나님의 사람, 대통령의 사람
    나라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고 국가의 국제적 위치와 안보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100년 만에 다시 잠에서 깨어난 옆집의 용(중국)은 주변국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고 망조 들린 일본은 미국의 환심과 지지를 업고 진실을 숨기는 것에서 몇 발짝 앞서 조작까지 자행하며 ?가든파티의 스컹크?처럼 주변 정세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중국은 과거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씻어내고 옛 영화를 회복하기 위해 도광양회를 벗어 버리고 구체적으로 힘의 투사를 진행하면서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를 배척하며 끊임없이 이에 도전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한국만 태평성대다. 무슨 두둑한 배짱이라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상황을 보면 그러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회주의자처럼 운명의 바람이 그저 잘 지나가길 바라는 요행만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할은 막중하고 그 사명감이 남달라야한다. 세계의 역사와 각 나라의 운명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에게 민족의 앞날을 의탁하고 간절한 도우심을 구해야한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교회와 성도라는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부끄럽고 두렵다. 시민들이 ?교회가 국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들 누가 그 앞에서 당당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지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보자. 고개를 떨 굴 수밖에 없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목회자와 장로의 전성시대라고 SNS에서 나돌고 있다. 그 의미가 긍정적이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추악한 나쁜 이미지로 통하고 있으니 이 얽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가슴이 먹먹하다. 얼마 전 자원외교의 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한 기업의 회장이 “억울하다, 나는 MB맨이 아니라 박근혜 사람이다” 하소연하며 쪽지와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했다. 나는 전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직 대통령과 정권의 인사들을 위해 충성을 다 했는데 왜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이냐는 일종의 항의 표시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학력도 짧은 사람이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고 한 때 잘 나가다가 결국 정치인들에게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의 특성을 이 분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혹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에게 조언 하나 드리고 싶다. 만일 어쩔 수 없이 정치 쪽에 기대어 무슨 일을 하고 싶다면 절대로 ?가지고 있는 티?를 보이지 말라 충고한다. 그들은 당신의 소유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거머리처럼 붙어 있다가 바닥이 보이면 떠날 것이며 또한 순종의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칼을 들이댈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사람의 인격과 있는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뒤의 물질에만 관심을 둔다. 이런 자들에게 고인과 같은 일반인이 당해낼 재간은 없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 자살!, 그런데 그 후의 일이 더 충격적이다. TV화면에 비친 분향소의 모습에서 빨간 십자가와 ?고 000 장로?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장로였어!’라는 탄식이 삐져나왔다. 또 다른 유다를 생각하며 그리고 고인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현직 대통령의 사람”이라는 말에서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느꼈다. 고인이 된 사람의 신앙관이 어떻고 그가 속한 교회의 신앙교육이 어떻고 하는 진부한 말들은 하고 싶지 않다.다만 하나님을 믿었다면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닥친 환난을 묵묵히 견디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고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칠뿐이다. 한 영혼을 귀히 보시며 악인이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을 찾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아가 당당히 법정에서 사실을 진술하고 잘못한 것은 인정하되 시종일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하나님의 큰 자비와 은혜를 입었을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입에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선 되어야한다. 대통령도 사람이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힘도 없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 ?나는 대통령의 사람이다, 이 보다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성도)라면 하나님은 결단코 교회와 이 나라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되는 말인가! 그 분이 친히 나를 위해 싸울 것이고 그 앞에 누가 감히 설 수 있겠는가!
    • 지난 칼럼
    • 평신도
    2015-05-07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12
    예수께서 산헤드린 교회에서 정죄를 받을 당시, 그 죄 몫이 ‘성전을 부수고 사흘 안에 짓는 자’이다. 마가복음 14:58; 15:29, 마태복음 26:61; 27:40에서 시사 하듯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유대인의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우려 한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처사이었음을 완곡하게 드러내다가, 복음서로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서에서는 작심하고 복음서의 서두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선포하였다. 예수가 나무에 매어달린 이후 요한의 복음서가 기록된 그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학이 발전되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서 무엇을 이루어 내셨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좀 더 명백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역자이든지 평신도이든지 막론하고, 21세기 현대 교회를 섬기는 왕과 같은 제사장들로서 그렇게 오랜 세월 유대인들의 정신사에서 지켜진 예루살렘성전을 그리스도께서 허물려는 이유를 보다 더 확실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무너진 예루살렘성전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스룹바벨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항상 성전을 재건하려는 시도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성전을 복구하는 데에 전심하였다. 오늘에 와서도 예루살렘성전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를 하겠지만, 도저히 다시 세울 수 없는 딜레마 상태에 있는 것은, 이미 그 장소에 무슬림의 성전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세우려는 시도가 우리 한국 땅에서도 지속되고 있으나, 성전이 완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름하여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발생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타 종파로도 넘어가는 상황들도 어렵지 않게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우리 한국에서 보다 먼저 유럽교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례들이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세우려는 성전은 무엇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돌로 세우려는 성전이든지 돌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세우려 하던지, 그 성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임을 찾아내어서, 예수가 부수려한 성전은 무엇이고, 예수가 다시 세우려는 성전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분별하여서, 함께 비교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워놓은 성전을 목숨을 내걸고 허물어낸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시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시도하셨고, 마틴 루터와 칼뱅도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성전을 제대로 무너뜨려야 새로 짓는 성전이 탄탄하게 지어질 것이 아닐까? 허지만 루터와 칼뱅 이후, 저들이 무너트린 성전이 도처에 궁전처럼 다시 지어져서 도시마다 번쩍이고 그 세를 위시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이다. 요즈음 세상을 개혁하자고 권력을 부여 받고, 칼을 그 칼집에서 꺼낸 자가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기도 전에, 오히려 그 자신이 그 칼날에 제물이 되는 것을 보았다. 갑옷을 입었다고 골리앗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다윗이란 자는 허름한 일상 옷차림만으로도 물맷돌로 단숨에 적을 쓰러트렸으니 말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칼뱅이 무너뜨린 교황의 성전을 도처에 다시 세웠다. 예수께서 무너뜨린 성전을 그의 제자라고 스스로 일컫는 자들이 버젓이 다시 세운 것이다. 그리스도론이 교회론에 포로가 되고, 성령론이 교회론에 포수가 된 것만이 아니다. 실체로 ‘오직 주님!’이란 표제가 무색할 정도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의 사제들에게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도 그의 처소가 된 성전에 나타나시질 않으신 것이다. 교회가 성령을 훼방하고 모욕하여 내어 쫓아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로마교회 같이 자만에 빠져서 성령을 모욕하는 일을 멈추질 아니한다. 어느 신학자는 이를 빗대어 성령께서 수줍음을 타셔서 오늘의 교회에는 들어오시길 꺼려하신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른 신학과 가이드라인을 제시 했어야 할 신학자 자신들이 골리앗의 위세에 움츠러들어서 나무 밑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긴 사울의 군대같이 전의를 빼앗겨서인지 아무도 나서질 않은지 오래다. 혹자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루터나 칼뱅이 로마교회를 바르게 청산하지도 못한 과제를 바르게 처리하려고 하거나, 오염된 교회를 청결하게 씻어내자고 할지 모르겠다. 허지만 복음서의 예수의 성전 사건을 부분적으로 보고서 성전청결이라고만 칭하던 신학에서 떠나, 요한복음서에서 옛 성전을 척결하고 새로운 성전을 건설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전심하여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5-07
  • 부활 모르쇠 믿음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무덤들이 열리고 무덤 속에 잠자던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리라는 이미 예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대 낮에 해가 빛을 잃고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을 하고 바위가 터지니까 놀라서 그제야 ‘아!’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알게 한다. 그리하여 무덤 주변에 있던 주의 제자들이 3일 동안 있다가 3일후 성 안으로 가서 예수 부활을 증거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사람의 존재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해 보면 우주 천체에 하나의 점보다 적고 작은 존재라는 ‘나’ 사람이라는 존재는 예수님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신령체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긍정적인 자부심이요 곧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이를 믿는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종말에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영생의 몸으로 변화 부활시켜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삼는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건성 건성하게 믿고 있다.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정성으로 다 하지 않고 겉으로만 믿노라 하며 생활태도에 아무런 변화 없이 부활신앙을 가진다. 이는 신앙에 대하여 굳게 믿지 않고 그 가르침이나 그에 따르는 신앙생활에서 확실하지 않기에 ‘부활’ 자체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 믿음을 가진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들 하는데 육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오셨고 오시고 있고 재림하신다. 그리하여 종말론은 조직 신학의 중요한 주제요, 그 성서적 근거가 풍부하다. 종말론이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등장한 것은 19세기말 이후였다. 이는 과학 및 기술의 발전과 제3세계 태동 등으로 인한 현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 신학이 종말론과 관련하여 제기한 문제는 종말을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미래로 이해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종말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되어왔다. 현대 종말론의 중심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그것의 현재성과 미래성 중 어느 한편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 역사상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종말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종국적 사건은 부활과 심판이 있기에 여기에 주목하게 한다.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에 빠진 세계의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 회복시키는 구실을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진 곳에서는 그 성취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보이면서 또한 그것을 배제하는 역할도 하여야 하기에 부활신앙이 삶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됨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성서적-신학적 종말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로 ‘때와 시간’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창조, 타락, 십자가의 구속, 재림을 직선적인 시간의 진행 쪽으로 이해하면서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신자들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향이 매우 짙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적 종말론은 ‘때’ 중심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중심이다. 종말론의 핵심은 어느 때 , 어느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예정이나 계획에 매달리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다는 말이다. 특히 복음서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그 청사진을 우리에게 제시하기보다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있음에 주시한다. 성서적 종말론은 언약적 ? 구속사적 - 승리의 종말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라 이루어진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초림에 따라 ‘이미’ 이루어졌으나 재림과 더불어 완전히 이루어질 온 세상의 대 변혁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역사성을 무시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른 변화에 맞추어 그리스도인들과 이 세상에 일어난 종말론의 변혁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4-23
  • 10. 제8회 총회장 마포삼열(馬布三悅)목사
    맥코믹 신학교 출신마포삼열(1864.1~1930.10.24, 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혹은 馬三悅)목사는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하노버대학(Hanovercollge)에서 자연계 계통의 공부을 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였으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의 증인으로 소명받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보수주의 계통의 맥코믹(Meomick)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에 선교사로 나갈 베이드(W. M.Baird)와 기포드(D.L.Gifford)를 만나 동기 졸업생으로 세 사람이 모두 조선에 나와 선교사역을 감당하므로써 조선선교에 큰 족적을 남겼고, 맥코믹 졸업생들의 조선선교의 문을 여는데 선구자적인 역할를 감당해 냈다. 신학교를 졸업한 마팻은 1889년 4월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받고 이듬해인 1890년 1월, 25세의 독신청년으로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사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 도착한 마팻도 한국말을 학습하는 것으로 한국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학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전도사역을 감당하였는데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이 지날 즈음 그는 조랑말을 타고 조선땅 서북부지방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그가 평생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선교기지(Missionstation)가 되었다. 후에 그의 선교활동에 큰 성과가 나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그곳에 북쪽전역의 선교기지가 되었다. 이 여행길로 평안북도 의주(義州)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에서 그는 한석진(韓錫晋)을 만나게 되었고, 한석진은 마팻의 조사(Helper)가 되어 마팻의 선교길잡이가 되었다. 후에 한석진은 한국 최초 7인 목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성장하였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청소년 교육서울로 돌아온 마팻은 언더우드(Underwood)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이었던 오늘의 ‘경신학교’를 맡아 청소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서북지역에 대한 선교사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1891년 봄, 게일(James Gale)과 함께 다시 북쪽에 있는 평안도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멀리 만주(滿洲) 심양까지 가서 한국선교의 기초를 놓은 존 로쓰(Rev. John Ross)선교사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는 함경도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는 이 선교여행에서 평양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팻은 드디어 1893년 평양에 선교거점 허락을 받고 그해 4월 평양에 내려와 본격적인 선교를 펼쳤다. 대동문(大同門) 근처 숨막골에 주택을 마련하고 길거리에 나가 노방전도를 하던 중 후에 바다건너 제주도 선교의 주역이된 이기풍 청년이 던진 돌에 맞아 턱에 부상을 입은 일화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역사에 오래오래 회자화 되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가 이때 일어난 에피소드이다.평양 장대현교회 설립그는 평양 최초의 교인 최치량과 함께 방 한 칸을 얻어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수가 증가해 넓다리골 와가(기와집) 한 채를 구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가 평양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후에 이 교회는 장대제로 옮겨 가면서 장대현(章臺峴)교회가 되었는데 당시에 평양 한가운데 있다고 해서 중앙교회(中央敎會)로 불리기도 하였다. 장대현교회는 후에 길선주목사가 담임목사가 되어 여러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하면서 평양의 어머니교회로써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했다. 마팻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북도는 김관근에게, 평안남도는 한석진에게, 황해도는 길선주에게 맡겨 전도하게 하여 이 일대의 교회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마팻이 세운 교회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은퇴할 무렵에는 서북지방에만 1천 여개의 교회가 설립되었으니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교회개척설립의 공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겠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마팻이 한국선교에 끼친 공로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장차 교회를 이끄러갈 지도자 양성기관으로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세운 일이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교회와 교인들을 지도할 목자(牧者)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교부에서 신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우면서 선교사들을 리드 해 나갈 정도로 높은 학력이 되지 않도록 하며 일반 대학수준보다는 조금 낮은 위치의 학력을 갖추는 원칙을 세워 선교사 자신들의 리더십(Leadership)을 초과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하에 드디어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김종섭과 방기창 두 청년을 자기집 사랑방에서 선교사 그레함 리(Rev. Graham Lee)와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학교육 수준은 성경(聖經)을 가르치는 성경학교(Bible School)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의 신학교육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듬해 학생수가 6명으로 늘어나자 한국에 나와 선교하던 4장로교회측, 즉 미국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로 구성된 ‘장로교협의회’가 평양에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마팻(Samuel A.Moffett)이 시작한 신학반(神學班)을 정식 신학교(神學校 Seminary)로 인정하여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4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였기에 ‘연합신학교’(Union Semimary)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장로회신학교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양 장로회신학교 혹은 평양신학교라 일반적으로 불리어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양성 위한 숭실전문대학 설립마팻은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24년까지 이 직에 머물면서 초기 한국신학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초창기 신학교육 제도는 한달 공부하고 3개월 동안은 목회지에서 사역하고 다시 와서 공부하는 방법으로 5년 과정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1907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7인의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름들이 저 유명한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서경조 방기창 양전백 송린서가 바로 그들이다. 마팻은 한국 독립노회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교회 조직에 큰 공을 세웠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여파로 조선인 목사가 총회에서 선출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총회장으로(1919. 10. 4)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린 제8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어 어려운 때에 교회를 이끌어갔다. 마팻선교사가 교육선교사업으로 한국교회에 뚜렷한 선교사역의 열매로는 대학을 지향해 세운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大學)의 설립이다. 이 학교는 1894년부터 평양 넓다리교회에서 이영언을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숭실대학교의 시작이 된 것이다. 숭실전문학교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의여자전문학교로 발전해 나갔고 이를 일컬어 ‘삼숭’(三崇)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1918년부터 1928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신학교와 더불어 숭실을 통하여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마팻선교사가 남긴 또 하나의 큰 공적을 든다면 이 땅에 보수주의 신학의 정초(定礎)를 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을 보면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신앙은 주로 전천년설(pre-milhnialism)의 영향을 받아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강조하면서 세계선교에 나선 선교사들이 많았다. 이렇다보니 마팻에게 교육받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은 그의 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수주의 신앙 한국교회 성장 발전의 원동력마팻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신앙은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초한 기도, 성수주일, 십일조, 엄격한 치리, 근검, 절약으로 이어지는 청교도적인 신앙으로 개척기 조선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힘을 발휘하였다. 한편 보수가 지닌 배타성이 강해 다양한 진보 자유주의 수용이 어려웠고 단순성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약점도 동시에 지니기도 했지만,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보수성에 둔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하겠다. 마팻의 이 보수적인 신학사상이 오히려 일본제국주의가 1910년대 개정사립학교법으로 성경교육을 금지할려고 할 때 적극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그는 격동기 한국 근세역사 속에서도 50년간을 조선선교에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다. 마팻은 말년에도 투지있게 활동하였으나 예기치 못한 육신의 질병으로 치료차 귀국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39년 10월 캘리포니아의 돈노비아에서 타계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가,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주선으로 그의 유언대로 그가 섬겼던 교정에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다섯 모두가 대를 이어 한국선교에 매진했다. 그중 셋째 아들 마삼락(Samuel Hugh Moffett)은 부친이 세운 장신대학의 교수로 학장으로 수고했고, 넷째 아들 마화열(Howavd Moffett 馬和悅)은 의학박사로 대구 동산의료센터 이사장으로 사역하였다. 마팻선교사의 한국선교 사역은 그가 이 땅을 떠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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