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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제49회·제52회 총회장 김윤찬(金允燦)목사
    평안도 대동군에서 출생김윤찬목사(1905. 8. 23~1993. 1. 3)는 평안도 대동군 청용면 산사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27대를 거쳐 광주김씨 후손들이 둥지를 틀고 내려오는 마음이었다. 약 100여 세대의 김씨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모두가 친족들로 어우러진 씨족 마을이었다. 이 고요한 산사리에 평양선교 기지의 책임자였던 마포삼열(Rev.Samuel A. Moffete 1916~2014)목사가 나타나 노방전도로 복음을 제일먼저 받아들인 부친 김락환이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온 가문이 신자가 되는 길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팻 목사가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사람들을 만드셨으며 복을 주시며 우리 인간들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에 김락환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세상 모두가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상을 만든 분(神)이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교적인 이기론(理氣論)을 믿고 있었던 김락환에게는 충격적이고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 만나마포삼열목사 그가 어찌하여 이 먼 산사리에까지 나타났을까? 평양장로신학교 설립자요 한국선교의 대표적인 인물 미국인 마포삼열목사는 당시 나이 34세 이 땅에 와서 사역하던 중 어찌 김락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곳에서 새문물에 갈망하고 있던 김락환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라 운명적인 진실이 섭리하였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겠다.그의 나이 7살이 되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구학문을 배우게 되는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떼고 사서삼경을 다 마쳤을 때는 소년시절이 다 지나고 18세가 되었다. 서당에서는 어느덧 모범생이 되어 어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구사상을 익혀 가며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1923년 어느날 윤찬은 더이상 구학문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고향 산사리 장로교회에서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삼성중학교(三聖中學校)에 18세의 청년의 나이로 1학년에 입학하였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일본어 산수 국어 역사 지리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그가 어느 정도 신학문에 심취하는 중 4년의 세월이 흘렀고 졸업을 할 때는 23살의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22세의 나이가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배필은 중화군내 상원 내동교회 영수이신 한두협의 딸 한부흥양을 맞이하였다. 아내는 28세의 나이로 믿음이 굳고 신앙생활에도 열심인 양가집 규수였고, 처가의 생활도 부유한 처지라 부모밑에서 잘 자란 처녀였다. 1927년 3월 12일 중화군 내동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윤찬 슬하에는 3남3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산 순교자 김윤찬목사의 신앙과 삶 김재연 저 2014 킴덤스 p.63-80 참고). 김윤찬목사는 1939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34회로 졸업 그해 평양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평양 숭호읍 중부교회에 부임해 목회를 하였고, 1939년 10월 1일 평양의 청룡교회로 전임, 1945년 7월 평양 연화동교회로 옮겨 시무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고, 1950년 8월 6·25 전쟁의 와중에 평양 장대현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다. 그후 1·4 후퇴 당시 월남하여 1951년 6월 부산 평남(平南)교회에서 사역했다. 제49회, 제52회 총회장에 두번 피선1952년 9월엔 총회신학교 재단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6월 서울의 평안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받아 상경하였다. 1961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페이스신학교(Faith Theo, Seminory)로 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수여받았고, 같은 해에 교단지인 기독신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2월 칼빈신학교(현 용인시 칼빈대학교 전신) 교장에 취임,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교육사업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1964년 9월 총회에서 교정(敎政)의 총수자리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 예장의 선봉장으로 교정을 이끌어갔다. 그의 원만한 성격과 강단있는 정치는 총회원과 전국교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1967년 총회에서 재선되는 영예로운 총회장이 되었다. 그가 한국교회와 교단 부흥과 발전, 나아가서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신앙진흥에 기여한 역사를 몇가지 정리해 보면, 김윤찬목사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 곧 한국교회에 평양장로회신학교로부터 내려온 장로교 정통의 킬빈주의신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다는 가장 중요한 이념에 매우 충실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유주의 신앙사조가 공존하는 한국교계에 정통개혁주의와 칼빈주의 신앙이념을 지켜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성경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신학으로부터 장로교의 정통보수 신앙을 지켜 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자유주의 신신학에 맞서 중심적 역할 감당1930년대 당시 김재준은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는 무오하나, 과학적 역사적 측면에서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였다. 또한 김재준은 이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교단신학의 보루였던 신학지남(神學指南) 총회신학교 기관 학술지를 장악하여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중흥을 꾀하였다. 성경 무오성을 부인하는 김재준의 신학은 장로교 정통신학과의 단절을 의미하였다. 결국 예장 제38회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파면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용단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바로 김윤찬목사였다. 김목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통 장로교신학과 신앙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는 총회신학교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하여 매년 학기초에는 전임강사 이상의 교수에 대하여 매학기 초마다 개혁신학에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갱신하는 제도확립에 앞장섰다. 당시 그는 총신 이사장이었고 총회장 지위에 있을 때였다.한편 1959년 제44회 총회를 기점으로 통합측이 분리되어 나간 후 예장합동 총회는 교회의 영적 부흥과 영적회복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에도 김윤찬목사가 앞장서 갔다. 그는 1964년 총회장에 피선되었을 때, 제1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1964년 2월 22일부터 충현교회에서 모인 뒤 지금까지 교단의 일치와 화합 그리고 발전을 도모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난타개를 위하여 총회임원 중심의 기도회에도 앞장섰다. 그는 1964년 9월, 제49회 총회장 시절 주일학교사업을 통한 100만 신도부흥운동 10개년을 계획실행하였으며, 교단설립 80주년 기념 교육대회 개최, 아울러 총회자립운영을 위해 세례교인의 의무제도를 처음 시행하고, 교단성장을 위한 장기계획으로 1968년에는 10의1조 통일안을 마련 시행하여 총회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초를 닦았다. 무엇보다도 김윤찬목사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갈망하는 합동운동에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통합측과 WCC 신학사상 문제로 분열 이후 고려파와의 합동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고려신학교 설립 후 분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보수적 신학을 지켜 가려는 고려파와 반 WCC 에큐메니칼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총회와의 연합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는 고신측과 합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합동추진위원을 10명 선정하였는데 그 중에 김윤찬목사가 있었다. 고신측과의 합동에도 중심양측의 합동결의 상항을 보면 양측은 5인씩 헌법수정인원회를 선임하여 합동을 위해 헌법을 수정하기로 하였다. 합동측 5인 가운데 김목사가 자리했음은 물론이었다. 그결과 1960년 12월 13일 오후 5시30분 서울 승동교회에서 고신측 총대 131명, 합동측 총대 233명이 참석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김윤찬목사가 있었다. 그후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분리해 나간 통합측과 재통합을 위한 모임었는데 이때 제시된 세가지 합동원칙을 보면 ①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고 NCC를 탈퇴할 것 ② 신학교를 보수적이며 복음적 정통신학을 고수 경영하며 ③ WCC적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선교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통합운동의 시기가 바로 김윤찬목사가 총회장이였던 1964년과 1967년 어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통합측과 분열 후 합동측을 추스른 공로자마지막으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은 신학교 재건을 위하여서도 김윤찬목사가 끼친 공헌이 있다. 총회가 분열된 후 소위 통합(W.C.C. 지지파) 측은 막대한 자금의 보고인 미국 남북장로교회의 힘을 빌려 전국노회와 교회를 향한 물량공세로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선교부와 단절된 합동측은 자금줄이 막히게 되자 김윤찬목사가 국제기독교협의회(I.C.C)회장 칼 메킨타이어에 도움을 요청, 당시 미화로 12만불을 지원받아 용산역 부근에 신학교 교사로 활용하기 위해 건물 1동을 매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 성취한 이가 바로 김윤찬목사였다.그는 신학교 발전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총회가 운영하는 총신대학 진흥과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자신이 또 총회산하 평신도 및 기독교지도자 양성을 위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 선생의 이름을 딴 칼빈대학교의 모체 칼빈신학교를 당국에 허락받아 설립, 교단적으로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좀더 자유로운 개혁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칼빈대학교를 설립 오늘에 이르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4-23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11
    바울이 로마로 보내는 서신을 마감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거론되었다. 이들 중에는 교회의 유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로마 바깥에서 거류할 때에 바울을 만나서 비로소 복음을 접하였거나, 이미 로마에서 추방되기 이전에 복음을 접하였지만 바울을 만남으로 인해서 복음을 명료하게 인지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등극하면서 다시금 유대인들을 로마로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때에 다시 로마로 입국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로마에 다시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유대인이 아닌 여러 계층으로 이뤄진 크리스천들이 상당히 많은 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에 유대 크리스천들은 그곳에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방인 크리스천들과의 어울림에서 약자의 위치에 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유대주의자들과 유대크리스천들은 이미 로마시 안에서도 박 터지는 갈등을 야기하였지만, 추방 이후 로마 시 바깥에서도 지독한 충돌을 경험하였던 바이었다. 이들은 로마에 재입국하면서도 복음과 율법의 문제뿐 아니라 새로운 이방인 크리스천 집단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과 사회적 환경에서 명예 문제나 사소하고 미묘하게 차별을 두는 일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공동체 구성원의 복음의 인지도를 재점검하고, 복음의 명료성을 갖추게 할 가르침의 권위, 그리고 리더십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삶에 본보기적인 됨됨이를 갖춘 인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시 발견된 랍비문서를 보면, 유대 랍비의 서신을 갖고서 멀리 떨어진 유대인 공동체에 보냄을 받는 사신들은, 그 서신을 보낸 랍비와 대등한 질적 권위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복음사도를 로마 시에 입국한 이들에게서 고르질 아니하고, 오히려 로마 시 바깥에 있는 겐그레아의 뵈뵈집사를 선택하였다. 바울의 서신을 갖고서 보내어지는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학습된 명료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복음에 적합한 행동과 인격과 영성, 성령의 나타남을 바울과 대등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든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복음의 질에 맞먹는 인격의 품질이 복음을 손상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뵈뵈집사가 로마 시에 가져온 바울의 복음은 마침 시기에 적절하게 적용되었다. 오늘날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남자 교역자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TV 연사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저들의 인격이나 영성이 복음의 질을 넉넉하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안도감마저 드는 것은 마땅한 처사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여성들에게 안수를 하게 된 것은 매우 잘 한 일이란 마음이 든다. 과거 여성 지도자를 어느 교단보다 먼저 배출한 곳은 감리교이다. 교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을 멈추고 장려함으로써 여성 지도자 풀을 넉넉하게 갖추게 되었고, 국가가 여성일군을 필요로 할 때에 저들이 선뜻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교회가 교회 안에서 명예와 권력, 금권의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지만, 원시교회에서도 오늘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화평과 희락임’을 충분히 숙지한 뵈뵈는 분열의 조짐이 멀리서도 인지되던 로마교회를 손수 감싸 안고 효율적으로 치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세상 집단과 다른 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여 한 성령을 마시고, 같은 떡과 잔을 나누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양성을 한 몸으로 세워 가려면, 지도자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높여주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까지는 조직을 성급하게 구성해서는 아니 된다. 단체마다 모임을 가지면 회장이나 총무를 뽑아 조직하는데, 이는 명예나 권력, 이기적인 이익에 고착된 나머지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질 못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유하고, 성령의 각양은사들과, 희생적인 본보기로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가야만 비로소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뵈뵈집사는 공동체마다 가서, 가슴 떨리게 로마서 서신을 낭독하고, 가르치며, 협력을 얻어내어서,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화평과 기쁨의 하나님나라’를 이뤄내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4-22
  • 여행 중 깨달은 주의 지팡이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실까? 필자는 정말 드물게 “주는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믿음이 작은 연고일지 모르겠으나 일종의 확인하고픈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발동할 때가 있다. 주와 가까이 하지 못할 때면 항상 주가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아 두렵지만 주와 동행하고 평안할 때는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감사하면서도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어느새 무감각함에 빠져드는 자신을 보게 된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사는 인간들의 행동처럼 말이다. 어느 개그맨의 “~~해봐야 알지!” 하는 유행어처럼 산소도 없는 달 가운데 있어봐야 산소의 소중함과 그것이 주는 자유로움을 진정 느끼고 감사할 수 있으리라! 이렇듯 인간은 위중하고 고난 속에 있을 때 과거의 일상들과 소소했던 삶들에 대해 추억하고 눈물과 자책, 그리고 진정한 감사를 느끼는 반응이 느린 존재이다. 물론 그래봐야 시간이 지나다보면 또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겠지만 그나마 이러한 존재와 인생의 소중함을 느낄 만한 충격요법이라도 없으면 정말 세상은 ?요지경 속?이 될 것이다. 4월은 그 어느 월보다도 여행하기 정말 좋은 계절이다. 5월만 되도 벌써 더운 공기로 여행지에서 활보하기가 힘들지만 4월은 덮지도 춥지도 않으면서 몸이 움직이는 데 최적의 날씨와 환경을 제공한다. 지금 전국은 주말이면 여행객들과 산과 들, 거리의 꽃들로 화훼군락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배우자를 보내주신지 올해로 27년이 되었다. 젊을 때는 배우자의 존재를 당연하듯이 여기고 살다가 나이가 든 후 아내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부족한 나를 채워주시기 위해 기막힌 계획으로 나의 갈비뼈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탄과 감사함을 뼈 속 깊이 느끼며 산다. 몇 년 전부터 결혼기념을 맞이해 아내와 1박 2일의 여행을 하고 있다. 올해도 강원도로 여행 일정과 계획을 세우고 새벽예배에 집에 남겨둔 자녀들을 위한 기도와 여행의 안전과 운전을 하나님께 의지, 보호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후 300Km가 넘는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오랜 시간 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의 한 휴게소에 들려 점심과 볼일들을 보고 다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꾸만 다시 휴게소에 들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강원도의 자연환경을 유난히도 좋아하여 강원도를 자주 여행하지만 항상 다니던 휴게소만 들리지 낮선 곳은 잘 가지 않는데 이번에는 전 휴게소에서 출발한 후 다시 막 바로 다음 휴게소를 들렸다. 잠시 용무를 본 후 차로 돌아와 타이어에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수석 앞 타이어를 보니 조금 주저앉은 것 같다. 자세를 바짝 낮추고 타이어 밑을 살펴보니 조금이 아니라 거의 바람이 빠져 타이어가 납작한 상태다. 순간 아찔함과 함께 본능적으로 휴게소 정비센터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주유소 옆에 타이어 공기압을 채워주는 기계가 있어 타이어에 바람을 가득 채우고 바퀴를 살피니 커다란 나사가 타이어에 박혀있다. 아직도 목적지를 70Km 이상을 남겨두고 고속도로를 주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한 위험한 일이라 들었다. 네비를 보니 다행히도 바로 코앞이 IC여서 그곳을 빠져나와 보험서비스를 요청하여 수리를 끝내고 고속도로에 재진입,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안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주의 보호하심에 거듭 감사를 드렸다. 만일 타이어를 확인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고속도로를 계속하여 달렸다면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아래 감추사”(시편 17:8) 안전하게 인도하셨던 주님은 무감각한 나를 강권적으로 다음 휴게소로 인도하시고 타이어를 보게 하셨던 것이다. 평범한 일상 하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눈으로 보고 싶어 했던 어리고 약하기만 나를 주님이 이러한 방법으로라도 일깨워 주시려하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두 번씩이나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 구해주셨던 분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무감각하여진 일상 속에서 어리석게도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지?”하는 질문에 친절하게도 하나님은 “나는 너의 영원한 인도자이며 보호자”이심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23편, 121:3)
    • 지난 칼럼
    • 평신도
    2015-04-22
  • 산 속에 살던 물고기를 바다로 보낸 하나님의 계획
    이민교 선교사(북한 농아축구팀 감독) 산속에 살았던 물고기를 전라북도 남원으로 보내고, 소록도로 보내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고, 카자흐스탄으로 보내고, 북녘 땅으로 보내고, 땅 끝으로 보내고….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까? 아니면 내가 원해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땅은 나의 원함대로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일까?소록도 한센인들이 전해준 복음우주베키스탄 농아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거쳐, 카자흐스탄 농아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그리고 지금은 북한 농아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며, 전 세계에서 축구를 통한 하나님 선교를 실천하고 있는 이민교 선교사.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사건과 사연을 안고 있다. 이 선교사는 원래 법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던 사람이었다. 뿌리깊은 원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아와 장애인에게 온 마음을 쏟던 그는 자타공인 교무(敎務)가 될 재목이었고, 원불교 정녀(貞女)인 누님의 권유로 고3때 소록도를 방문한 후 ‘원불교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소록도 생활 7년 후 염불이 아닌 찬송과 방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탐구를 위해 들어간 소록도에서 그는 기독교를 통해 죽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죽음은 중학교 2학년 때 <사랑의 스잔나>라는 한 편의 영화로 시작된 물음이다. 종교심이 유난히도 강했던 부모님의 신앙 따라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손에 이끌려 장례식장을 많이도 따라다녔다. 울음과 통곡이 지속되던 장례식장을 다니며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저리도 슬퍼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스물 즈음에 죽음 이후의 삶을 찾기 위해 무당을 좇아 계룡산을 가고 한국의 민족종교인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를 찾아가고, 길거리의 행려자들과 살아 보고, 부산 당감동 화장터와 서울 벽제 화장터를 다녀 보기도 했다. 다양한 죽음 너머의 삶을 찾았던 고행의 여정으로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록도를 다닌 지 약 7년 만에 소록도 법당 안에서 목탁을 치다가 염불 대신 찬양으로 하나님의 신, 성령이 찾아왔다.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소록도 나병 환자들의 장례식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찬송가 가사가 주님의 성령으로 법당 안에서 목탁을 치고 있던 이 선교사를 습격한 것이다. 그는 “귀신들이 많다고 표현하는 법당 안에도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셨다”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 죽음을 축제로 맞이했던 소록도 나병 환자들의 화장터에서 울려 퍼진 환송식! 그 기쁨의 찬송이 결국 하나님을 웃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축구공을 통해 세상에 전한 복음원불교 법복을 벗고 하나님 성령의 옷을 새롭게 입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자신을 불러 세우신 이유를 찾고자 그는 광야 훈련을 거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다. 그 후 GP선교회 선교사 약사였던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당시 선교에 대한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선교비 마련을 위해 자신이 운영하던 약국을 정리한 아내에게 “선교비가 모두 떨어질 때까지 원없이 선교 한 번 해보자”고 한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타슈켄트로 떠난 그는 그 곳의 아이들과 마주한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외치고 강제로 예배에 참석하게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해주고, 일상에서 그들의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햇다. 그런 즈음에 그는 그 곳에서 농아들을 상대로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릴 꺼리를 찾던 중, 그는 축구를 생각하게 된다. 본래 이 선교사는 고교 시절 테니스 선수였지만, 테니스는 다수의 인원이 함께 하기 어려운 경기라는 점이기에, 공 하나만 있으면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축구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한 축구 경험을 토대로 농아축구팀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의 팀은 2000년 아시아 대회에서 3위를 하며, 아시아권의 주목을 받게 된다. 또한 그 지도력을 인정받은 이 선교사는 카자흐스탄으로 옮겨 농아축구팀 감독을 맡게 된다. 그의 인생에서 전혀 상관이 없던 축구를 통해, 선교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놀랍게도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카자흐스탄의 10여년 감독생활이 지속될 즈음에 그는 북한 농아축구팀 감독으로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된다. 다른 나라로 아닌 북한에서의 제의였기에 사실 그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물었다. “북한에 왜 가려고 하느냐? 북한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 “북한에 왜 가려고 해? 일하려고? 아니면 사랑하려고? 일 때문에 가야만 하면 가지 말고 북한 장애인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가라!”그 순간 그는 다시 깨달았다. 축구는 매개일 뿐, 그는 본디 하나님께서 이웃을 섬기고, 장애인을 사랑하라 보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그 어떤 고민이나 이유는 필요 없었다. 이민교 선교사는 지금도 하나님, 그분이 하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 그것이 축구공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거침없이 달릴 것이다. 한편, 그는 최근 책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통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산 속에 살던 물고기에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세상에 나와 놀라운 사랑을 전파하고 있는 이민교 선교사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차진태기자>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5-04-22
  • 사드(THAAD)에 담긴 미국의 국방정치
    예로부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요충지역으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한반도는 주변정세와 국제정치가 요동 칠 때면 타국의 장마당이 되었다. 오히려 여러 카드를 쥐고 주변 정세를 활용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 있는 천혜의 지리적 환경을 갖고 있으나 무지몽매한 정치지도자들은 현재도 이를 활용하여 구심력을 확보하기보다는 외세의 개입여지만 넓혀주고 있다. 최근 미국이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로부터 한국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지상 150Km고고도에서 적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는 문제로 한국과 미·중·러 사이에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단언하건데 사드는 한국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순전히 미국의 국익과 군사전략 목적에 따른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국의 방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첫째, 만일 북한이 미사일을 한국에 발사한다면 미사일이 서울에 도달하는 시간은 불과 1~2분이면 도달한다. 이를 사드 레이더가 이를 포착하고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사드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겨냥한 대기권 밖에서의 방어시스템으로 한국과 같은 좁은 국토에서는 효용성이 없으며 미군 장성들도 검증되지 않은 사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둘째, 현재 한국과 미군의 정찰위성과 조기 경보기, 한국의 이지스함, 무인고도 정찰기 등으로도 북한의 움직임을 충분히 포착하고 타격할 수 있으며 북한 또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장사정포와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만 가지고도 남한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진짜 의도는 무엇인가? 두 말 할 것 없이 미국의 안보다. 안보 결벽증에 걸린 미국은 소련이 무너진 후 중국을 최대 위협 적성국으로 설정하고 군사력의 초점을 중국에 맞추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일본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후 미국은 한미관계를 바퀴와 수레를 연결하는 축에 꽂힌 핀처럼 핵심관계라는 뜻의 ‘린치핀(linchpin)’으로 한국을 추켜세우고 있으나 미국의 전략적 사고에서 한국이 중요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없으면 한국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안보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부소장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미국은 그 시기의 끝은 알 수 없지만 일본이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내부지향적 국가가 된다하더라도 일본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고 한국이 미군의 세계적 전략적 유연성에 능동적,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과 도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한미동맹에 서명할 때 그 목적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역사적 진실을 들추어냈다. 1850년대 일본을 개방시킨 페리제독이 아시아에 제1, 2도련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늘날 현실화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드의 한국 배치의 목적은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일본을 보호하고 한국과 일본에 제2, 3도련선을 구축하여 궁극적으로 미국의 안보를 지키자고 하는 것이 미국의 숨은 진실이다. 한국은 일종의 최전방의 총알받이인 셈이다. 둘째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위기 시에 현장에서 적들을 격멸하여 어떠한 것이든 미국 본토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외교채널로 한국에 경고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사드의 X밴드 레이더가 중국과 러시아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국에 가해질 외교, 경제적 부담은 고스란히 한국의 몫이다. 셋째는 미국의 방위업체들과 국방부, 의회와의 관계이다. 이들은 자국 기업이 개발한 무기에 대한 해외 판매의 일종의 성스러운 의무적 동맹을 맺고 있다. 방위산업은 구매자가 단 하나이고 판매자는 다수인 ‘구조적 수요 독점’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미국 국방부만을 상대로 해서는 결코 돈벌이가 안 된다. 자국에서 개발한 무기를 해외에서의 실전적 테스트와 무기 수출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이때 무기 수출을 위해 동원되는 미국의 수법은 주변정세의 위화감 조성, 상대국가에 대한 압박, 경제적 카드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과 자체 개발이라는 카드를 통해 중국, 러시아에게는 주권국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고 미국에게는 부당한 요구와 압력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이참에 확실히 각인시켜 주권과 국익을 지켜내야 한다.
    • 지난 칼럼
    • 평신도
    2015-04-09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10
    고린도전서를 읽노라면 어느 서신에서 보다도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복음서임을 독자들은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도 오늘의 잘 구성된 교회를 갖춘 입장에서, 교회론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지만 사회학적인 입장에서 고린도교회의 사정과 형편을 살펴보면, 세상에서 이렇게 혁신적이면서 전에는 꿈도 꾸어보질 못한 새로운 사회집단을 형성하는 역동을 볼 수 있다. 당시 사회는 5%의 소수 특정한 집단이 모든 사회를 통제하고 독점하던 시기였다. 엄격한 상하 남녀노소의 차별과 자유인이 있는가 하면 노예들이 있었고, 글을 아는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진리를 알려하는 이들에게 폐쇄되어 있었고, 그 지식마저도 독점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모든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가치관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의 가치관을 가지고서 자율적으로 모여드는 집단이 있었는데, 바로 그 모임이 크리스천의 교회였다. 이들의 공통점을 말하려면 한 복음을 듣고 믿으며, 한 성령을 받아 마시고, 누구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는 똑같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교회 바깥세상에서는 신분과 계급과 종교와 소유와 지식 유무로 인한 차별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 안에는 로마 시민권자도 있었고, 자유인들도 있었고, 귀족도 있었고, 지혜자들도 있었고,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고 노예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집단에서 누가 크냐? 누가 더 좋은 은사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들이 일어나서 소란스러워졌고, 그 염려스러운 상황은 부랴부랴 바울이 보낸 일차, 이차, 삼차 서신으로서 질서를 바로 잡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혼란스럽게 보이는 교회를 바르게 균형 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도의 태도를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세상의 모든 특혜를 거머쥔 5%의 그룹에 속한 이들이 그 안에 없을 리가 만무하였고, 큰 저택의 거실을 교회에게 내어준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저녁시간에 모일 때에 식탁의 교제를 갖기 위해서 넉넉한 식사량과 포도주를 갖고서 참석한 이들이 있었으나, 반면에 주인 밑에서 잔일을 모두 설거지하고 늦게 참석하느라고 식사도 하질 못하고 예배에 참석한 노예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현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 지역의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소외시키는 일들이 바로잡히질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에는 부자들의 이기심 때문에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던 같다. 당시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불이익을 당하고 부자유하게 살던 이들 중에, 성령의 나타남이 그들 중의 어떠한 사람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가 항상 있어왔기 때문에, 이들이 사회적으로 중요시 되고 과시될 수 있는 존재감을 성령의 은사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출애굽기나 사도행전에서 보면,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 성령에도 충만하였음을 모세에서 보여 졌고, 스데반은 초대교회 교인들 대표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을 압도하는 능력과 성령의 지혜를 갖춘 것과, 지식인들이 은사에도 뒤지지 아니하고 영성과 열매에 앞서있었던 사례가 사도바울에게서도 나타난 바이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제도권의 권위와 질서에 맞추어서 운행하시질 않는다. 성령이 교회제도에 맞추어서 운행하도록 규제한다면, 성령을 교회제도 안에 가두는, 성령을 소멸하고 훼방하는 죄를 서슴없이 짖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세속적 구조에서 이미 5%의 집단은 모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집단이다. 그런데 이 5%의 집단이 교회에도 들어와서 로얄패밀리로서의 대접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서인지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질 못하고 괴롭혔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령의 나타남으로 인한 충격에서 서로를 낮추어보고 무시하는 일들이 한동안 비롯되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혼란인가? 5%만이 독점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세상에서, 세속적 가치관과 구조가 새로운 그리스도의 통치의 질서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경이롭고 놀라운가? 부자들도 지식인들도 권세자들도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그 5%가 세워놓은 기성질서에 순응되질 아니하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성령론적인 교회로서의 질서였다. 오늘날 성령의 나타남이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리고, 금권과 지식과 사회적 명사가 로얄패밀리로 자리 잡아 제도화된 교회들로 점령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되어야할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4-09
  • 칼럼 연재를 마무리 하며 3
    교회 부흥의 길은 오로지 하나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당을 마련하여도 적극적으로 밖에 나아가서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 부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고기잡이에 비유하였습니다.(마4:19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기를 잡으려면 물로 나아가서 그물을 던지든지, 낚시 줄에 고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던져야 합니다. 미끼가 좋지 않으면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전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해야 할 현대인들은 종교니, 신앙이니 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한국교회 전도 방법은 대부분 길거리에 나아가서 혹은 집을 방문하여 전도지를 나누어 주거나 문에 붙이고 있으나 거의 모든 전도지는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맙니다. 현대인들이 신뢰하고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과학>입니다. 그들은 과학자의 말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회도 과학을 이용하여 즉 과학에 복음을 담아 전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과학을 통한 전도> 입니다. 필자는 오랫동안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전도지에 관심을 가지고 나누어 주면 버리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는 그런 전도지를 만들 수는 없을까를 고심하던 끝에 몇 년 전에 창조과학에 복음을 담은 창조과학 전도지를 개발하여 한국교회 앞에 선을 보였으며, 얼마 전에는 내용을 알차게 업그레이드한 창조과학 전도 소책자를 국민일보사에서 특별한 전도지라고 기사한 이후 전국 수많은 교회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으며 전도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창조과학을 통한 전도는 지극히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는데 사도들의 설교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메시야> 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만 증거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창조주도 모르는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전에,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이방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 또한 그리스 아테네에서 설교할 때에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17:22-25) 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전도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교회도 무조건 예수님만 믿으라고 접근하지 말고 창조과학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알게 한 후에 예수님을 증거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간교한 마귀는 오래 전부터 과학을 이용하여 그들의 가짜 복음인 진화론을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진화론 앞에는 항상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인 냥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절대로 기원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요, 가설이지 과학적 사실은 아닙니다. 과학적이라는 수식을 붙이려면 과학적 연구 방법인 <관찰>과 <실험>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나 진화론은 이 검증 절차를 거친 적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진화론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과학으로 위장을 하고 마치 진리인 냥 사람들을 기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믿제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시대의 요청에 부합한 창조과학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여야 하며, 특히 청소년들에게 창조과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끝)
    • 지난 칼럼
    • 창조론과 진화론
    2015-04-09
  • 돌들이 소리지른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지질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흙은 암석이 풍화 작용이나 열이나 공기 그리고 수분 또는 생물 등의 작용에 의하여 부서지거나 분해 되어 생기는 것이다. 바위는 깨져서 돌이 되고 돌이 깨져서 자갈이 되며 자갈이 깨져서 모래가 되며 모래가 깨져서 흙이 된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존재가 바윗돌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귀중하고 불가결한 존재이지만 돌이 소멸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인류의 선험적인 신념은 태양의 덕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처럼 돌의 혜택을 생각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태양의 따뜻한 광선처럼 넘쳐흐르도록 많기 때문에 돌은 인류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기 보다 거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돌 없이 존재할 것이 무엇인가? 만유인력을 생각해 보자. 무의미한 존재같이 보이는 돌의 존재가 무시될 수 있는 것일까? 돌이 우리 발밑에 큰 덩어리로 모여 있지 않는다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引力)을 발휘할 물질이 없을 것이다. 바위는 인력(引力)의 근원이다. 우리의 삶의 발판이 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고마운 존재다. 바위가 없다면 인력 없이 상하좌우가 없는 공간만이 도사려 우주는 영원히 무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고 하신 말씀은 삶의 의미로 와 닿는다. 예수님의 이 상징적인 행위는 세계를 위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백성은 이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고 환호를 하며 예수를 맞는다. 그 당시에 초라한 모습의 예수의 입성은 깊은 역사의 통찰을 갖게 한다. 우리가 역사를 들쳐 보면 진리를 정면으로 보고 듣기를 싫어하는 지배층, 그들은 진리를 가장 싫어했다. 새로운 것이 들어옴으로써 그들의 기존의 위치가 무너질까 위험하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의 소리를 비판의 소리로 들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런 증거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당시의 사회의 지배층인 바리새파인들이 예수에게 항의를 한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짧은 말속에는 진리는 반드시 밝혀지고야 만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내포한 엄숙한 선언이다. 폭력으로 뇌물로 저들의 입을 봉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다. 돌들은 역사일 수도 있고 폭력일 수도 있다. 증언은 입으로 한다. 그러나 들어야 할 사람들이 귀를 꼭 닫고 있다. 그러면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귀가 안 되면 눈에 그것도 안 되면 감각기관에 호소하도록 되어 있다. 사실의 은폐는 소용이 없다. 예수의 입성자체는 결코 공격이나 항의가 아니라 그저 진리를 증거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역사에 있는 것이다. 이 자리는 지배자나 피지배자에게 있어 똑같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항거하고 귀를 막고, 입을 틀어막는 일은 스스로 자멸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목격자는 증인이 될 것을 강력히 나타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고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는 중요하고도 엄숙한 그런 의미이다. 분명히 그리스도 교회는 정치나 사회사업만이 목적이 아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의 마지막이자 절정이었고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가 마침내 왕위등극을 위해 오시는 승리의 입성이었다. 그러나 예수 자신에게는 자신의 겸손과 평화, 죽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인류구속사역을 위해 죽으신 수난의 입성이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은 어떤 성명을 발표한 것도 아니지만 곧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말 못하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른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 하고 가슴에 품고 있으면 독이 된다. 끝내 하지 못하는 소리들이 한데 뭉쳐서 마침내 유혈의 폭동이 일어난 것이 역사의 과정임을 세상은 다 보고 알았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말씀에 역사의 증언에 우리가 존재함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4-01
  • 8. 제39회 총회장 이원영(李源永)목사
    경북 안동 이퇴계의 후손이원영목사(1886. 7. 3~1958. 6. 21)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조선의 거유(巨儒) 이퇴계(李退溪)선생의 14대손, 이관호(李觀鎬)씨를 아버지로, 김영(金永)씨를 어머니로 1886년 7월 3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15살에 이종헌(李鍾軒)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불행하게도 결혼한지 3년만에 18살의 청년으로 부인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곧 고성인(固城人) 이승건(李乘建)씨의 차녀와 다시 혼인을 하였으나 다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년 이원영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다시 경주인 이한제(李翰濟)씨의 장녀 김기출(金其出)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이원영은 1911년 3월 24일 사립 보문의숙(寶文義塾)을 통해 한학을 연수하고 졸업하였다. 그는 보문의숙에 들어가기전 1891년 3월(5세)부터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그의 총명함이 들어났다고 한다. 1908년 4월 5일에는 봉성 측량강습소(鳳城測量講習所)를 이수하고 졸업하였다.1905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식민지화 된 조선의 뜻있는 민족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민족은 드디어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기미년(己未年)에 전국적인 독립만세 사건이 우후죽순처럼 봉기하던 때에 이곳 안동군 도산면(陶山面)의 다수 종족(宗族) 중에서도 단신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위국충의(爲國忠義)의 불굴의 정신으로 시위를 하다가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으며, 감옥에서 복역(服役)하던 중 동료들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전해듣고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고 기독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3·1 독립만세로 첫 투옥출옥 후부터 열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20리나 되는 원거리에 있는 예안교회(禮安敎會)에, 매주일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교사상으로 짙게 물들어 있는 종중(宗中)어른들의 비난과 가족들의 반대로 한때는 역경과 핍박 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가까운 친족들과 가족들이 합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퇴계 선조의 후예로써 서양종교인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수치요 우리 조상들에게는 용납못할 죄악이니 문중(門中) 밖으로 축출하고 족보(族譜)에서 제명한다는 위협을 당하였으나 이원영의 결심은 이미 죽음이라도 각오한 듯 불변의 신념으로 믿음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결단으로 지금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맞은편 담촌(錟村)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드디어 1921년 1월 8일 예안교회당에서 권찬영(Rev. Crothers 權燦永)선교사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입문이 되는 세례(洗禮 Baptism)를 받았고, 이듬해 1922년 2월 25일에는 안동성경학원(安東聖經學院)에 입학하여 봄과 가을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를 계속해 우수한 성적으로 1925년 12월 23일 졸업하였다. 이어 1930년 3월 12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경안노회(慶安老會)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같은해 6월부터 강도사로써 영주중앙교회와 용상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2월 18일 경안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듬해 1931년 12월 28일 안동 인노절기념성경학원에 교수로 취임하여 열성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1932년 12월 20일 안동읍에 위치한 안기교회(安奇敎會, 안동서부교회 전신)와 신세교회(新世敎會 현 동부교회 전신)의 시무목사로 부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1934년 12월 19일 제24회 경안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젊은 이원영목사는 선비의 후손으로 본격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교정의 한 가운데 서게되었다. 1939년 5월 31일 드디어 전국을 휩쓸던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문제가 안동지방에도 불어닥치게 되어 이원영목사는 몸으로 저항하다가 안동경찰서에 구금되기에 이르렀고, 혹독한 고문과 극악무도한 체형(體刑)에도 의연한 태도와 어조, 그리고 부동의 신앙으로 무정한 법관도 신앙의 숭고성에 머리를 숙였고 미약한 성도들에게 격려의 경종(警鐘)이 되어 당시 조선 교계에 신앙의 정맥을 보존케 하였다. 그러나 연약한 육체는 악형(惡刑)을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폐렴과 건성근막염으로 몸이 쇠약해져 사람을 식별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보는 이들이 모두가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게 야만적이던 일본경찰당국도 할 수 없이 보석(保釋)케 되어 본가에 돌아오게 되자 병세도 많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6명의 딸만 있던 집안에 유일한 후사가 될 아들 요한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천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보게 하였다. 1941년 7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안동경찰서에 다시 구금되어 가족들도 모르게 포항 영덕 경산 등의 경찰서로 전감(轉監)되면서 무쌍(無雙)한 고문을 또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님을 향한 돈독함은 변함이 없었고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좌지우지 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제하 36년의 지옥같은 생활에 벗아난 해방과 함께 드디어 16일 출옥하게 되자 당일부터 여러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며 침체된 교회와 오염된 신앙의 정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죽었던 것 같았던 교회들이 생기를 얻게되고 우후죽순격으로 부흥되어 신앙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교계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게 되었다.경안고등성경학원 창설해방된 이듬해 1946년 9월에는(5일) 경안노회의 이름을 따라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에 취임해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처음 입학생이 18명이었다. 이들을 학생으로 받아 제1회 개학식을 안동교회에서 거행하고 성경학습은 교회 하층에서 시작하였다. 19명이 기초가 되어 매월 한 두명씩 불어 나더니 나중엔 30여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으니 기적이 따로 없었다. 이목사의 강의는 하루도 빠짐이 없었고 한시간도 결강이 없었다. 하교시간이 되어도 이목사는 귀가할 줄 모르고 늦게까지 학교를 지키며 성경연구에 몰두하였다.그의 이런 완벽한 준비와 기도로 진행되다보니 모든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안동지방의 기독교지도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20세기의 미국에 침체된 교계에 디·엘 무디(D.L. Moody)목사가 세운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 출신들이 쇠퇴해 가던 미국교회에 새바람을 이르키며 세계선교에 이바지 했던 역사가 경산도 안동에 있는 경안고등성경학원에 같은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교계지도자를 키웠다. 그 결과 1975년 현재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목사의 수가 46명 지도사 100명이 넘고 있다. 그는 1950년 11월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세번째 경안노회장에 피선되어 1953년 11월까지 4차, 5차 노회장으로 노회와 안동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섰다. 그리고 전쟁이 겨우 휴전으로 진정된 직후 혼란기를 맞이했던 1954년 4월 23일에 한국장로교회의 최고의 명예로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대 총회장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총회장시절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서 채택그가 총회장으로 수고하던 그해에 결의된 안건들을 보면 ①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② 신사불참배 교역자와 신자, 또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학교 각기관에 명하여 그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하였으며 ③ 제38회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를 한인교장 박형룡박사, 이사장에 안두화 선교사를 선임하여 대구서문교회에서 정식 취임케 하였고 ④ 경기노회를 경기 강원노회로 분립을 결의하였다. 그는 올곧은 정의로움과 관용의 선비 정신으로 어떠한 불의와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종된 사명을 다한 진실한 지도자였다. 서울영락교회 한경직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추모하는 글에서 훌륭한 가문, 고귀한 명성, 영광스런 성직, 실로 값진 것은 한몸에 지닌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그는 일제의 폭정아래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셨다. 그 독실한 믿음, 고결한 인격, 온유 겸손한 성품, 충성된 하나님의 종,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라고 썼다.또 예장합동 총회장을 역임한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이목사님은 참신자, 참 애국자, 참목회자라고 평가하였다. 한 지방에서 평생 친구로 동역자로 안동교회 원로요 증경총회장이었던 김광현목사는 첫째, 애국자이셨다. 둘째,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광복 후엔 경안성경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로 서부교회를 개척성장시켰으며 총회장이 되어 교단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하였다(영원한 스승 이원영목사 김성년 외 공편 기독교문사 2001 p.15, 45). 이원영목사는 무엇보다 한지역에서 평생 헌신한 지도자였고 교회를 세우며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며 인재양성으로 교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일제 당시 당국으로부터 당한 체벌의 영향으로, 또 광복 후엔 교회재건과 뒷수습에 전력을 쏟아부어 헌신하였으나 이로인한 과로와 노쇠로 육체의 질환의 재발로 3년간 누워 지내며 영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58년 6월 21일 그가 그렇게 사모하며 바라던 주님의 영원한 품에 고요히 안기었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4-01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9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노라 하면, 마치 교회론적인 성령론을 다루는 듯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도행전의 기자가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집중 조명하려하기 때문인 것이었을까?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지도자 그룹인 산헤드린으로부터 불법적인 인민재판을 받아 시구문 바깥으로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하고, 이 박해가 시발점이 되어서 -사도행전의 기자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도 수많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잔멸하는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는 예수의 추종자라 할 근거가 될 만한 자들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처리되었다고 믿고, 당국은 한숨을 돌렸다. 박해자 앞잡이가 시리아로 발길을 돌린 그 이유와, 그러한 박해의 태풍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있는 듯 없는 듯이 그 땅에서 버젓이 살아있는 예수의 사도들의 이 이야기를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들어가기란 특별한 설명이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였기에, 요한도 예수가 그의 제자들 일행을 데리고서 과감하게 사마리아에 들어 가려한 이유를 장문으로 설명하려 했듯이, 누가는 사마리아로 경계선을 넘어간 이단아 같은 자를, 박해로 인해서 숨어들어간 것처럼 빌립의 이야기를 남겨주고 있다. 누가는 빌립의 전도로 온 사마리아가 충분이 주님께 돌아왔음에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질 아니하고, 베드로의 일행이 파송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니 저들이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 하였다. 사도들이 안수하기 이전에는 성령을 받은 일이 없었다는 부연은, 마치 로마교회가 진실보다 교회를 우선시하여,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영원한 동정녀-성모라는 특별함을 입히기 위해서, 예수의 형제들을 요셉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듯이, 교회론을 먼저 생각하는 기자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주의 손이 나타난 자에게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그에게 임하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제한 것이었을까(눅 11:20)? 누가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처럼,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고 장시간 복음을 전하고 설명을 한다 해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식탁에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성찬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율법과 복음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율사들과 사제들의 가치관과 신앙이 예수가 전하는 복음과 달랐던 것처럼 만나기 어려운 질곡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를 주의 깊게 읽고, 그의 고른 숨소리를 경청하면, 누가가 적어도 오늘의 우리게 말하려는 바를 들을 수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서 할례를 받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된 크리스천들과 불편한 식탁을 같이 하였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야고보 그룹들과 맞닥뜨리었다. 여지없이 우려하던 일들이 벌어졌는데, 베드로에게 한 사람이 급하게 귓속말로 전달하자, 베드로는 교제 도중에 그의 일행들을 데리고 황급하게 자리를 뜨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황당한 일들이 어찌 여기 한 장면에서만 있었을까?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바울은 날카로운 양날 검 끝으로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이 이 일을 갈라디아 서신에서 명료하게 규명하였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없는 건너지 못할 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서, 오늘날 분단된 남과 북을 아무런 장애 없이 오르내리는 독수리처럼, 모든 이유와 각론을 잠재하고, 다리가 놓이고 오고가는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야기가 누가의 기록에 장문으로 반복되어 다루어졌다. 누가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언어와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긴 장문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교회론 적이면서도 성령론적인 교회론으로 구성하였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주 세밀하게 다뤄졌다. 베드로는 두렵기도 하였겠지만 낯선 이방인의 집으로 일행들과 함께 들어가 저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베드로의 복음 설교가 핵심에 이를 때에, 성령이 그 곳에 모인 이방인들 모두에게, 주인이나 노예나 하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남녀도 차별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각 사람에게 임하신 것이었다. 세례를 아니 줄 수 없게 되었고, 주님의 떡과 잔을 아니 나눌 수도 없게 되었다. 가르침만으로는 전달이 되질 않고, 실천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 전도자들의 한계가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려오시면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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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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