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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바로 여기서 - 배성산목사
    인 생은 타이밍이다. 삶에는 늘 타임만이 있다. 선택과 약속의 시간이다. 여기에 때를 따라 맞추어지게 되어 있다. 삶은 약속이고 그 약속의 시간 안에서 살게 된다. 그리하여 하루에는 밤과 낮이 있고 여기에 따라 시간이 때를 알게 한다. 그 때는 일 하는 것과 쉬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쉬게 되어 있다. 이 때를 아는 것은 생명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서” 삶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1년 365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찾기 위해 정초에 사자성어를 두고 새마음 다하여 삶을 영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서에서 믿음의 선인들이 그 실행을 하기 위해 말씀을 약속하고 지키는 일이다. 이를 우리가 오늘의 삶에서 실행하고자 하려면 “지금 바로 여기서” “때”를 알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려는 요령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2-05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음부의 권세가 넘어뜨리지 못하는 교회를 말씀하셨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넘어뜨리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일까? 얼마 전 교회당을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경기도에 세워진 한 교회당이 이단 종파에게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다는데, 최근에도 경북 어느 지방에서도 예배당을 확장하였는데, 두고 간 예배당이 또 그 집단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들이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전략이나 전술에 있어서도 그 세가 약하여져서인지 최전선은 무너지고 후방으로 밀리는 듯 한 양상들이 뚜렷하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이 책임감을 갖게 되면서, 먼저 자기성찰을 하고 회개를 시작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아직 한국교회가 목사를 채 배출하지 못했던 시절 신학생들과 조사들이 먼저 회개를 시작하였다. 원산에서 발화되어 서울과 평양에 밀려들어온 부흥은 마치 조나단 에드워드의 각성운동 시절, 마을의 어귀나 술집, 길가와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통회하고 자복하며 온 마을이 주님께 돌아왔듯이,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회개와 각성의 운동이 일어났다. 농한기가 되자 전국에서 평양 장대제예배당으로 모인 사경회에서 더욱 큰 규모로 폭발되었다. 한국교회의 선진들은 거의가 자아성찰과 회개를 경험하고 나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마치 예수께서 목수 일을 내려놓으시고, 사람들이 운집한 요단강에 가셔서 세례로 몸을 씻고 물에서 오르시면서 성령을 받으시고, 그러시고 나서야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광야로 나아갔던 것처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29
  • 3. 제13, 33, 34회 총회장 이자익(李自益)목사
    이자익목사(1879~1959)는 1879년 7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부친 이기진(李基珍)과 모친 박정근(朴定根) 사이 독자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하였다. 출생한지 두달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살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일찌기 고아가 되어 살길이 막막해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가는 배를 타고 여수로 건너가, 순천을 거쳐 전남 일실군 신평면 하천리에 도착,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후 일자리를 찾아 하동과 남원을 거쳐 전주에서 김제군 금산까지 가게되어 삼거리에 있는 지주(地主)로서 마방(馬房)을 운영하는 조덕삼 집에서 마부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주인과 함께 교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조덕삼은 당시 금산 일대에서 성행하던 금광사업에도 손을 대서 재산을 모았다. 조덕삼은 장날만 되면 비단을 마차에 싣고 전라도 각 지방을 다니며 장사를 했고, 큰 배나무과수원과 더불어 논농사와 마방을 운영하였음으로 일손이 많이 필요하였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1-29
  • 양심과 영혼이 사는 삶 - 배성산 목사
    지난 한 해동안 우리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세우며 거두는 일로 바삐 살아왔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며 썩어질 것만 위한 일로 질주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마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눅17:27). 이미 노아 방주의 삶의 형편은 온 인류가 살아 온 것에 대한 심판의 사건으로 첫 형편을 우리에게 거울처럼 보여 주는 교훈이 된다. 이 일이야 말로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과 닮아 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관계를 이루는 공동체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양심은 자아 중심적 고립이 삶을 파괴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인간의 양심은 유기체적 연계성을 끊어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양심은 생명의 끈이 잘릴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 양심은 모든 부조화를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삶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신학이나 과학, 철학, 문화, 인류학의 기본적인 물음으로 인간의 내적인 구조와 가치에 대한 의문으로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다. 여기에 인간의 삶의 구성 요소는 무엇이고 사람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 여기에 일반적으로는 ‘영혼(靈魂)’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영’과 ‘혼’, ‘육체’의 세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1-29
  • 창조의 원리에서 본 성(性)이란 무엇인가? (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마귀는 우리의 눈을 자극하여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意圖的)으로 음란한 영화나 비디오, 컴퓨터를 통한 음란 사이트를 보지 않도록 결심하여야 하고 멀리하여야 한다. 낚시꾼이 고기를 잡으려고 할 때는 물고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끼를 던져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음란 동영상에서 보여주는 성(性)은 상업주의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로 정상적인 성(性)이 아니라, 대부분 왜곡(歪曲)되고 비정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그런 것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 장차 결혼을 하여 부부생활을 하는 데에도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음란물은 인간을 마치 짐승같이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을 성적인 노리개 감으로 다루고 있어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게 만든다. 모든 음란물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목적으로 만든 아름다운 성(性)을 아주 추하고 사악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심지어 어떤 청소년은 음란물을 보고 여자를 보는 눈을 버려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으려고 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문란문화의 피해가 이렇게 큰 것이다. 심리학자인 맥거프(J.L. McGaugh)는 ‘남자가 몇 주 동안 음란물을 접하고 나면, 아내와 잠자리를 해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감정적인 자극이 뇌에서 에피네프린 분비를 촉진시킨다. 에피네프린은 화학적 작용을 통해 음란한 사진들을 기억 속에 보존시킨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은 중요한 순간에 툭툭 튀어 나오게 된다.’ 라고 말하였다. 음란물에 중독 된 사람들은 모든 여성을 성욕 해소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모든 여성들을 음란물에 나오는 여성들처럼 대하게 된다. 그래서 성적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 지난 칼럼
    • 창조론과 진화론
    2015-01-16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
    한국 강산에서의 성령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들이 삼천리금수강산에 첫발을 디딘지 20년이 흘러서였다. 가장 먼저 성령의 불씨가 지펴진 구역은 강원도 원산지역에서였다. 20년의 세월이란 선교사들의 사역이 무르익어가야 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아무런 결실이 없었음 알아차리게 된 선교사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영적 성찰이 일어난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 이러한 영적각성이 도래하였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가 자신을 과신하다 보니, 그 한계가 보이기까지는 미련하여서, 그 사역은 벼랑 끝에 다다르게 되고, 그 벼랑 끝에서야 비로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끝이라도 붙들어서 살려하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정치성이 미약하고 사리사욕에서 조금이나마 쉽게 탈출할 수 있었던 그룹이 카나다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검소하였고, 교단의 배후도 미약하여서 세상의 권력욕이라든지 명예욕이라든지 하는 것에서는 멀리 떨어진 구역에 있어서, 자신들을 성찰하는 데에 거치는 것들이 많지 않았던지, 하나님께 어느 그룹보다도 가까이 다가섰던 것이다. 당시 장로교단 같은 경우는 교단이 든든하여서 경제력에서부터 모든 것에 이르기 까지 교단이 주는 후원이 강력하다 보니, 교단과의 결속력이 단단하여진 터이라서 스스로를 살필 만큼의 필요성이 원산 그룹보다는 덜하였을 것이리라. 원산에서 시작된 기도의 불씨는, 교단에서도 좀 더 자유스러웠던, 평신도 선교사인 의사 하디(Hardie, Robert A., 1865-1949)에게서 시작되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16
  • 2. 제1회 총회장 언더우드목사
    1901년 출발한 선교사공의회 시대가 1911년으로 마감되고, 1912년 9월1일~1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열렸는데, 초대 총회장으로 언더우드(1859~1916)목사가 선출되었다. 언더우드(元杜尤, H. G. Underwood)는 인간생태 차원에서는 청교도 출신 크리스챤이자, 사회생태학 차원에서는 앵글로색숀계의 피를 타고난 아메리칸이요. 유럽계에 속하면서도 세계인이며 자연생태인으로 산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 언더우드(1827~1881)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Grant Maire Underwood)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죤 언더우드는 인쇄용 잉크와 타자기, 타자기 리본, 안전수표용지 등을 개발하여 영국 왕실예술원으로부터 공로 메달과 표창을 받기도 했다. 훗날 죤 토마스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맏형 1857~1937)는 부친의 사업을 계승하여 유명한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경영하게 되었고, 그 기금으로 연희대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신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선교자원운동이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며 인도선교사를 꿈꾸었다. 하지만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뉴스에 접하고 조선선교사를 지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5-01-16
  • 새 하늘과 새 땅 - 배성산목사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새해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회복해야 한다. 죄악으로 오염되거나 타락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될 온전한 세상(계 21:1), 이 새로운 세상은 종말에 나타날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것을 그리스도인은 믿는다.(마19:28; 벧후3:13; 계21:1-17). 이에 따라 현재 인간이 살아가는 타락하고 부패한 우주 만물은 소멸되거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세상(우주)이 나타나게 된다. 이 세상은 만유의 회복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구원받은 자들이 장차 들어가 살게 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우리는 믿는다. 모든 생명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한 생명의 일생은 나서(出生), 살다가(存在), 죽어가는 소멸(消滅) 등 3단계로 간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죽음으로 인해 불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알려진 과정을 거쳐 지옥으로 가거나 종말이 올 때 까지 일종의 기다림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주장을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이라는 점을 밝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은 생명사상의 관점으로 이 생명은 영속적인 살림살이의 순환으로 규정한다. 이 삶과 죽음은 또 다른 역할 또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생명의 순환과정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미래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주인이라는 점을 밝힌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5-01-16
  • 창조의 원리에서 본 성(性)이란 무엇인가? (27)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죄는 눈으로 보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사회 환경은 온통 유해(有害)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우선 배움의 전당이라고 일컫는 대학교 주변의 환경을 보자. 학생들과 어울리는 책방은 별로 보이지 않고 극장, 인터넷 방, 소주 방, 노래 방, 비디오 방, 대화 방, 전화 방, 디스코장 등으로 포위되어 있다. 대학가 주변이 이러할진대 다른 곳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보이는 것들 대부분은 모두가 다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것들로 특히 인간의 원초적(原初的) 욕망인 성욕(性慾)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아직 성(性)에 대한 이해나 가치관(價値觀)이 정립되어 있지 아니한 청소년들이 쉽게 탈선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지금은 가정이나 사무실마다 컴퓨터가 놓여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음란 사이트에 접속을 하여 음란한 장면 소위 야동을 볼 수 있다.
    • 지난 칼럼
    • 창조론과 진화론
    2015-01-09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2013년 말, WCC 제 10차 총회를 개최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였다. 무언가 우리 한국교회의 교회론에서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저마다 교회를 위한 교회에 집중하다보니 성령론적인 교회로서의 모습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예수중심, 교회중심, 교역자중심’ 이란 표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수한 유기적인 몸으로서의 시스템을 갖춘다하기 보다는, 세상이 이미 갖추고 있는 익숙한 구조의 시스템을 선호함을 내포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항시 가시적 존재가 목회자이다 보니, 목회자 중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읍하여 성전이 건축된 이후, 400년간 지속된 예배의 예전이나 사제들의 사역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모세가 이집트에서 자신의 백성을 탈출 시킬 때에, 이집트 제국이 바탕하고 있는 종교가 거짓임을 밝혀내야 했고, 그 제국이 터를 둔 그 바탕마저도 거짓의 기반 위에 형성된 제국임을 만민들에게 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권의 권력 유지를 하기위해서, 그들의 백성들 가운데에 귀족이나 황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예 계급으로 전락되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이 왕의 무덤과 전승 기념 도시를 세우는 데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이집트 제국의 종교는 권력을 뒷받침하는 시녀에 불과하였고, 사제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부와 권력에 편승하는 데에 시간을 모두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기업으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 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 하며, 자신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움직이게 하는 데에 높은 공감대를 끌어내었다. 이집트인들마저도 모세 편이 되어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약자의 집에 곡소리가 나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그 신음소리가 이집트인들의 진영으로 옮겨 붙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신뢰가 공고하게 되고, 역사적인 야훼의 새로운 공동체로 출애굽하게 된 것이었다. 모세가 절제 있게 날린 열 가지 하나님의 능력 펀치는 효율성이 극대화되어서,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되면서 승리의 음악과 춤의 잔치가 열린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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