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1(일)

지난 칼럼
Home >  지난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지난 칼럼 기사

  •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찬양하는 가수 노영희 선교사
    “다음에는 아픈 환우들의 위한 노래를 하고 싶어요. 내가 아픔 속에서 겪었던 좌절과 고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찬양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제 찬양을 듣고 아픈 친구들이 희망을 찾고 더욱 힘써 기도하길 바랍니다” 찬양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희망을 그리는 찬양사역자 노영희 선교사의 노래가 새해 유난히 싱그럽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남몰래 스미는 새벽의 잔잔한 광명처럼 듣는 이의 가슴에 은혜와 축복의 씨앗을 퍼뜨리는 노 선교사의 찬양은 새해 교회와 국민의 안녕과 축복을 기도하고 있다. 한때 유명 노래강사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지난해 복음성가 1집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내고, 현재는 CCM 가수 활동하고 있는 노영희 선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행복 전도사다. 노래 강사, 웃음 치료사 등 심상치 않은 경력에서 느껴지듯 그녀의 에너지는 언제나 넘쳐 흐른다. 누구보다 건강한 웃음과 노래로 주변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 노 선교사를 보며 그녀가 한때 몸을 까닥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었다는 사실을 유추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8살에 찾아온 고난, ‘류마티스 관절염’ “내가 찬양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마저 그 분의 계획안에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다. 고난 앞에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그녀에게 처음 류마티스 관절염이 찾아온 것은 젊디젊은 28살이었다. 관절염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나 겪는 병인 줄 알았건만, 예고도 없이 어느날 그녀가 마주하게 된 관절염은 그녀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관절염이 너무 심해 몸 오른쪽이 완전히 변형됐다. 다리는 절고 손은 부채꼴 모양으로 틀어졌다. 2년 넘게 한의원을 전전했지만 병의 차도는 전혀 없었다” 나아지지 않는 관절염도 문제였지만, 더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가방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니고 있던 직장은 관두고, 친구들은 하나 둘 그녀 곁을 떠나갔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사람이 혼자 남게 되다 보니까 의지할 곳이 필요하게 되더라. 그러는 순간 엄마가 말하시던 교회가 생각났다. 예전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교회 나오라는 말이 갑자기 귓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로 교회에 찾아갔다” 그렇게 마주한 교회에서 그녀는 “고난이 축복입니다”라는 설교를 듣는다. 충격이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저주와도 같은 고난이 축복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그날부터 그녀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에 매달렸다. “정말 매일 같이 왜 고난이 축복인지를 알려달라고 부르짖었다. 주일예배 뿐 아니라, 새벽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빠지지 않고 나가며, 기도에 매진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에 쉽게 응답을 주지 않았다. 5년 넘게 기도에 매달렸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 사이 더욱 악화된 관절염에 병원에서는 출산으로 인해 몸이 주저 앉을지도 모른다며 결혼조차 만류했었다. 정말 이제 끝이구나는 생각에 말라붙었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에 응답했다. 바로 지금의 남편을 통해 말이다. 소개로 만난 남편은 그녀의 아픔까지도 감싸줬다. 모든 것은 품어줬다. 포기했던 그녀의 인생에 다시 희망을 불어 넣어줬다. “내가 포기한 나를 감싸안는 남자친구를 보며 다시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먹던 약까지 끊었기에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바로 그 순간 이뤄졌다.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 관절염이 모두 나았다는 의사의 대답을 들었다. 투병생활 8년 만이다. 고난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 사랑의 비밀’ “하나님은 내가 나를 버릴 때 응답을 주시더라. 그 고난을 속에서도 나를 더 버리길 원하셨더라. 나는 고난 속에서 하나라도 더 챙기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모두 비우고 그 분께 나를 온전히 맡기길 원하셨다” 지난 8년간의 투병생활은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정말 눈물나는 투병이었지만, 너무도 감사한 고난이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비우고 하나님께 나를 맡길 수 있게 됐다. 고난을 통해 그녀에게 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녀의 1집 타이틀 곡 ‘하나님 사랑의 비밀’은 고난에 맞서는 그리스도인이 삶의 자세를 담고 있다. “파도야 내게로 오라 그 고난의 거센 파도야 마음껏 찬송 하자구나 마음껏 기뻐하자구나···주님 사랑해요 하나님 사랑의 비밀을 찬송합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 앞에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자는 그녀의 노래는 그녀의 신앙 간증이다. 사실 복음가수가 된 지금 그녀의 상황이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노래강사로 자리 잡았던 지난 날과 비교했을 때 새롭게 들어선 복음가수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고난을 참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시 써주실 것을 믿고,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환우들을 위한 찬양을 부르는 것이다. 자신이 투병 중에 겪었던 좌절과 포기, 하나님에 대한 원망 등 누구보다 환우들의 심정을 잘 알기에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간증을 담은 찬양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특별히 내가 부르는 찬양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게 아니다. 그저 그 분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 분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의 참된 의미를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 분들이 다시 희망을 품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전부다” 한편, 노영희 선교사의 앨범 구매나, 찬양집회 문의는 전화(010-8383-1641)를 통해 가능하다. <차진태 기자>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9-01-12
  • 목회는 쉬운 것이다·18 앞에서 빠진부분
    우리는 그가 받으신 고난을 받을 수 없으며 그분의 십자가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주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겪으신 것입니다.목수로 일하면서 보통 사람과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절대로 지금 목사들처럼 평신도와 구별된 제사장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높은 강단과 화려한 삶도 아니고 평신도를 내려다보는 구별된 높은 좌석도 아니고 가운을 걸치고 검정 양복을 입고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규격이 맞는 철두철미한 실수도 없이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사람들과 기쁨, 슬픔, 배고픔, 사랑받고 싶음, 유혹, 우정, 실망감, 권태감, 분노, 영적 고뇌, 연민, 감정적 고통 그리고 육체적 고통도 경험하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에게 시청각 교재로서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현장적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래서 모든 사람, 관원, 율법사, 학자, 천민, 가난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식한 사람, 약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사람까지도 소통되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까지 대화가 되는 삶을 보여주신 이유는 신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근본적 세상 속에서 역사 하시는 범위를 이해시킨 것입니다.그런 우리는 학문과 전통으로 보수라는 사람이나 진보라는 사람까지도 자기 울타리와 올무에 묶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바른 신앙운동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른 신앙운동이란 특별히 구별된 삶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삶 속에서 예수의 생명 자체가 그렇게 하게 하는 삶입니다.예수님의 열린 삶이 온 세상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인간적인 일체가 아니라 영적 즉 생명으로서의 일체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바른 신앙이 바로 다른 이방 종교나 무속종교나 학문이나 전통적 삶에서 절대 체험할 수 없는 영적 일체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하심으로(요 19:30) “다 이루었다”라는 하나님의 창세기 3장 21절에 약속하신 죄인으로서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가죽옷’을 입혀 세상에 살게 하셨던 대신 속죄된 그 삶은 어려운 것이나 금욕적인 훈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우리가 예수님과 아버지와 하나됨을 지금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른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에 우리도 예수님과 아버지의 연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분 사이에 흐르는 영원한 사랑의 흐름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적 일체가 현실이요, 이 현실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인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과 인류의 일체를 가족의 개념으로 말씀했습니다.“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는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가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라 하셨으며 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는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1~14).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나될 속성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은 형제라고 부르신 것입니다.현대교회의 범죄가 부모와 자녀가 따로, 남편과 아내가 따로, 예수님과 교회가 따로, 목사와 평신도가 따로, 이것이 개체 개념입니다.이 사실이 십계명 중 4계명에서 이탈된즉 끊임없는 자기 고통에 매이게 하는 뱀의 능숙한 방법에 깊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9-01-04
  •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의 실천
    생명이 살아 있음은 사랑실천이 그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은 그 사랑 실천함에 있다. 우리나라 말로 전하여 온 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사랑은 없다’는 말로도 그 의미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사에 오셔서 삶을 보여 준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에 근거하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기에 창조자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가 사랑에 있기에 우리 사람은 사랑의 자식으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침(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침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오심의 그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은 이기심으로 생명의 속성이기도 한다.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속성은 이기심이기에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사랑을 둘러싼 동 서양 사상이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인 이기심을 극복하기에 동양에서는 인(因)을 ‘어진 인’으로 ‘자비’라는 사상으로 공자는 ‘효도는 인의 근본’이라는 말에서도 부모 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감정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까지 넓혀가는 것이라 하여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짐’의 인의 시작으로 말하고 묵자는 친족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랑을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로 말하는 것은 ‘자’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된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에서는 마태복음25:35-45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38)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9)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또 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 하였고(41)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3)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그리스도교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런 에로스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질적 차이” 가 있다고 함에 예의 주의해 보아야 한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 관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교제만이 존재함을 필히 알아야 함에 예의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가페적인 사랑관계임을 필히 알게 함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자아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고조도 열광적인 해체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둘의 주체가 마주하여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존재하는 경우에만 이웃사라의 교제도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 필리아의 사랑도 마주하고 존재하는 데에서만 이웃사랑의 교제도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보면 필리아의 사랑도 독립된 이성 간에 성립된 우애임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9-01-03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4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박해를 받을 것을 예감하였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유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하였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사도행전> 21:21)며, 시비거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대책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고 성령이 임재하심을 그들에게 분명히 선포하여야 했다. 그리고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심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동시에 알려야 하는 복음 사역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의 형제들-제자들과 사도들-은 묘안을 짜낸다. 이방인 사역으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바울,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자가 회심하여 기독교 이론을 정립하는 위치로 바뀐 바울을 박해자들로부터 구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때 예루살렘에는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서원한 네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의 형제들은 바울이 성전에서 그들에게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게 하여 유대인의 율법에 결코 저촉되는 일이 없었음을 보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들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다. 그러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에게 충동질을 하였다.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사도행전> 21:28)며, 바울을 비방하였다. 그리하여 바울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들과의 긴 논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가는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오늘날의 기독교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필자가 방점을 두는 것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갈 때 겪은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을 보자. 이는 <사도행전> 27장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다른 죄수 몇 사람과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었다.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이 그들을 호송하였다. 그는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그들을 오르게 하였다. 그 배가 그레데 해안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로웠다. 이때 바울은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칠 정도로 위험하다고 말하였으나, 율리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고 항해를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맞게 된 것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사도행전> 27:14)이다. 이로 인해 사공들이 배의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배의 기구를” 내버리는 등의 “타격과 손상”을 입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은 바울의 말을 율리오 백부장이 안 들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그로 인해 바울도 유라굴로 광풍을 거쳐야 했다. 그럼 우리 인생에서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없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와 같은 광풍이 없지 않다. 필자도 여러 차례 광풍을 맞은 적이 있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한동안 교수 임용이 되지 않아 힘든 적도 있었고, 작가가 되고나서 베스트셀러를 꿈꾸었으나 그게 그리 쉽지 않아 좌절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광풍을 하나님의 의대로 해석하였을 때 심오한 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제목을 ‘고난이 축복인 이유’라고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대로 생각하면 될 수 있다.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접할 수가 있기에 축복이다.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좌절과 절망과 고독에 처해 있었을 때에 나는 비로소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주님이 내 고난의 짐을 대신 지고 걸어가셨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은 이러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롬 8:2) 나를 해방시키셨다. 그리하여 나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롬 8:4)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나는 넉넉히 이길 수가 있었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롬 8:39) 거할 수가 있었다. 곧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가 있었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 안에서 행복한 나는 예배를 통하여 찬양을 열심히 부를 수가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9-01-03
  • 목회는 쉬운 것이다·81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7~50).목회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목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목회는 하나님이 약속한 자유와 안식과 기쁨을 맛보고 누리는 삶의 양식인 것입니다. 목회사역이란, 종교 비즈니스 또는 고객 서비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목사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에베소서 4장 11절에 직임으로의 사역을 분담하게 했습니다.목사의 사역을 두고 “너희 행함을 설교하라, 너의 의문을 설교하지 말라” 목사는 들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답이 곧 목회일 것입니다.목회자의 목회 처신을 위한 윤리를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기가 고생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목회자는 자기 자신이 남을 섬기는 자임을 결코 망각치 말아야 합니다.◦아무리 중대한 일이 닥쳐왔다 하더라도 일신상의 안전을 핑계로 목회자가 자기 교구의 회중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목회자는 자기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목회자는 자기 봉급으로 자기의 일을 측정해서는 안 됩니다.◦목회자는 자기 이름을 조심히 사용해야 합니다. 확신할 수 없는 일에 서명 날인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다른 전문 분야에 참견해서도 안 됩니다.◦목회자는 자기 교인의 말을 잘 들음으로 그 성직을 낮추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목회자는 교회와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성직자로서 목회자는 자기의 일을 제 일로 치고 보수는 둘째로 여겨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 내에 파당을 조성할 수 없습니다.◦목회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일꾼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목회자는 다른 목회자에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목회자의 직무가 그곳 목회지의 다른 교회의 교인들에게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다른 목회자의 인격이나 전임자나 후임자를 헐뜯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입니다(엡 4:11~12, 시 23:1, 겔 34:5, 히 13:20).마지막으로 매듭져야 할 이야기◦목회는 아주 쉬운 것이며 기업이 아닙니다.◦목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목회는 고난이 아닙니다.◦예수님이 목회자와 함께하십니다.◦목회 운영 방법도 계획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목회는 명분이나 성공이 아닙니다.◦목회자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목회는 기업이 아닙니다(기업은 자기 일입니다).◦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목회는 심리학적 분석이 아닙니다.◦목회는 마케팅전략이 아닙니다. ◦목회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닙니다.◦교회개척은 개업이 아닙니다.◦목회는 목회를 위한 준비물이 아닙니다.◦목회는 냉수 한 그릇입니다.◦목회방법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목회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목회는 내가 있는 현장입니다.◦목회는 가정입니다.◦목회는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목회는 내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목회는 시작입니다.◦목회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목회는 그냥 하는 것입니다.◦목회는 완벽이 아닙니다.◦목회는 성공의 개념이 없습니다.◦목회는 경쟁이 아닙니다.◦목회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목회는 내게 있는 것을 나눔입니다.◦목회는 내 일이 아닙니다. <끝>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9-01-03
  • 구주로 오시네
    메마른 광야 땅에 비가 와서 메마른 땅을 적시면 생명들이 살아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약동하는 생명들의 힘을 본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보고 오시는 하늘의 하느님을 알아서 오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한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그의 영광과 함께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젖을 것이며 그는 죽어가는 땅을 생명의 물로 촉촉이 살려 죽음을 삼켜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심에 대한 찬양이 그의 믿음의 고백에서 이를 기뻐하고 찬양하며 이를 감사하며 기뻐하고 이를 믿음으로 고백함에 예의 주시 하게 하신다. 이는 ‘오시는 하느님의 구원’에 경험을 갖게 한다. ‘구주로 오시는 하느님’의 그 은혜에 대한 신앙의 예우를 다 하게 한다. 지금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다. 구주 예수의 탄생으로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맞는 교회력의 절기로 이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로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신지도 2000년이 되셨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빈 구유 바닥에 눕혀 지내심을 안다. 마구간의 식구들로 상징되는 온 생물은 물론 구유로 상징되는 마구간 식구들에게 말없이 밑바닥이 되어 준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까지 하느님이 오시는 그 까닭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에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인생들 ‘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시기도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맨바닥, 땅 바닥에 누워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이 나눔의 완성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셔서 삶을 공유하신다. 생명은 생물로 만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특성은 땅이 무질서하게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고 생명은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 성장과 자기 유지에 이용하려 함을 이미 만물의 첫 창조하신 에덴에서 생명으로 삶의 의미를 보여 주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 Energy) 공급원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느님을 의존해야 삶을 구원할 수 있음을 함을 알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라는 증거를 알게 하신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느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만 구원의 삶을 살게 하신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이 낮은 땅에 내려오심을 찬양하는 계절이다. 온통 이 지구 땅에 세상은 구주 오심의 의미는 잊어버리고 상관없는 축제에 빠져서 호화찬란한 네온사인과 흥청망청 축하연으로 들뜨고 있음을 본다. 그 옛날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든 천사들이 온 누리의 백성들에게 감격에 찬 목소리로 ‘구주 탄생에 대한 찬양’ 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소식이야말로 얼마나 기쁜 소식 인가! 생각하게 하는 크리스마스! 아! 생명의 계절인가? 생각하게 한다. “Merry X-mas!”“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 멘.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2-21
  • 목회는 쉬운 것이다·80
    나눔운동은 성령의 반응입니다.“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나눔의 시작은 믿는 사람이 함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임무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합니다. 소유권의 자유로움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갖고 있는 잉여가 아니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필요에 의함입니다. 필요한 사람의 사용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합니다. 주 안에서 주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씁니다. 끊임없는 예배입니다. 집에서 떡을 뗍니다. 가정교회가 기초입니다. 먹는 기쁨을 갖습니다. 두레상적 삶입니다(둥근 밥상). 한국적 전통이 두레상과 품앗이요, 콩 반쪽입니다. 두레상은 얼마든지 초청하지 않은 불청객도 포함됩니다. 품앗이란 남의 일이 곧 내 일입니다. 이 운동이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콩 반쪽이란 아무리 작은 것도 쪼갤 수 있습니다.나의 것이란 다른 사람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수확이 아니라 남기는 것입니다. 그 여분이 나그네를 위한 몫입니다. 이 풍토가 서구사람들의 팁 문화일지 모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맡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진정한 자유는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 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3~15).명예와 지위를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과 같이 타인을 섬기라.“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5).자기중심적이 되지 말고 타인을 즐겁게 하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4~29).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2-21
  •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예수의 구주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에 의한 절기를 대림시기, 대강절, 강림절 등으로 부른다. 그 뜻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가신지도 2000여년이 지나게 되었다. 예수께서 마구간에 당시 낮은 이들로 여긴 들의 목동들에게 먼저 인사를 나누듯이 세상의 낮고 천한 밑바닥 어두운 인생들 ‘ 땅의 백성’(암 하 아레츠)들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 이는 삶의 바탕에 같이 함으로 그 생활에서 자신의 삶의 전체의 자세를 표방하며 이를 친히 그 삶에 함께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상태를 유지하려하고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는 생명으로 오셔서 구원의 빛으로 그 모습을 친히 견디어 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엔 인간의 본질, 곧 그의 근원과 성질과 운명으로 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타나기에 빛으로 그 삶의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그 빛을 이어 받은 것이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빛은 그 빛을 받은 모든 면은 그 빛에 의하여 나타내 보이게 되어 있다. 본문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빛이다’라고 말하시면서 예수 자신의 성격을 10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생명을 얻게 됨에 의미를 함축하게된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로 보면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생명이신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신다고 한다 (창 2:9). 즉 에너지( Energy) 공급원을 두신 것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야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말하면 그 열매를 먹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등의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기능과 능력들, 곧 이성, 선택의 능력, 지능 등을 가지고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동물들에 비하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성은 하느님의 뜻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이 시대에서의 삶은 '빛'이 되는 "생명의 삶"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력으로 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루어진다. 그때서야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작정하신 모습대로 만들어진다. 충만하고 완전하고 온전하고 건강하여 속죄 받은 사람, 우리가 이런 것을 인식할 때 그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때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될 것이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이렇게 새로운 삶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러한 삶의 신앙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속의 참된 재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이 오심은 어두운 삶의 태도를 밝히심에 그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러한 변화된 삶이 신앙이 된다.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악과 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어두운 빛을 잃은 인류의 삶 어두운 삶 속에서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들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썩어져 가는 인류를 밝은 빛의 은총으로 변화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교회의 큰 직임을 맡은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이러한 빛의 은총이 없다면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교훈이나 수단도 이는 참다운 빛 외에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빛을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과 이웃에게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12-1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92
    일연의『삼국유사』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선덕여왕 때 일이다.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구리는 겨울에 동면한다. 그런데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우는 거예요. 겨울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무슨 민란이 일어날 징조다’, ‘염병이 돌지도 모른다’, ‘다음 해에 태풍이 올 징조다’ 등으로 소문이 퍼져, 선덕여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여왕은 이것이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를 보고하라 하였다. 그랬더니 바로 ‘여근곡(女根谷)’에서 들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여왕은 대신 회의를 열고 결정을 내렸다. “이는 백제 군사가 그곳에 숨어 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러고는 두 각간으로 하여금 각각 오백 명과 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는 여근곡을 포위해서 백제 군사를 물리치라는 어명을 내렸다. 각간들이 여왕의 말대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 보니, 과연 여왕의 말대로 백제 군사들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포위해서 백제군을 섬멸하고 돌아와서 어떻게 여왕이 그곳에 백제군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를 두 각간이 물었다. 그러자 여왕이 하는 말, “여근곡(女根谷)은 그 지명을 풀이하면 여자 인체의 뿌리가 되는 계곡이라는 얘긴데, 그런 곳에 남자놈들이 들어왔으니 별 수 있겠냐?”는 거였다. 대신들이 여왕의 진한 농담에 웃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에만 속하는 야사(野史)것일까. 분단 현실도 이러한 지혜로 풀어 봤으면 좋겠다. 조선조에 광해군이 명·청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고나서 바로 청나라에 투항하게 하여 멋진 외교 전략을 펼친 적이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때가 바로 이때이다. 인간 심리에 카인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이 야훼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동생을 죽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형제 등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질투심이 있다. 이를 선의의 경쟁으로 유도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다. 북한이 더 이상 핵무기를 통해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 그래서 필자는 <탈경계의 시학>(시문학사, 2015)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탈경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제 시대는 융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탈장르로 장르간에 경계도 없어졌다. 사물 인터넷 시대에는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 존재와 존재 간에 탈경계가 요구된다. 경계를 넘어서려면 경계의 안팎에 있는 여러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여러 가지 경계가 횡행하고 있다.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간에 갈등이 있고, 신자본주의가 부자와 빈자간에 새로운 경계를 그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경계를 푸는 해법은 사물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포월적 시선으로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기독 계통의 신문들에서 독자들이 식상해 하는 것도 집단들간에 너무 경계를 지으려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인 말씀에서 해법을 찾기보다는 말씀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으로 갈등을 빚는다든가, 하나님의 의나 사랑보다는 율법에 치우쳐 서로 갈라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해결하셨을까를 하나님의 편에서 해석하면 화해나 조화로 나아갈 수도 있다. 교회에서도 여러 기관이나 사람 사이에 경계가 없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달란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하면서 말씀 보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신앙 생활의 멋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 13: 14,15) 그렇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주님이 함께 하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교회를 다니지 아니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선배 교사의 권유로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한동안 교회 다니는 생활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서먹서먹한 데다가, 주님의 동행하심이 실감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나에게 즐거움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할 것을 권하셨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나누는 일을 주 안에서 자유롭게 즐기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찬양도 감정을 넣어 멋있게 하고, 기도도 작가로서의 달란트를 살려 멋있게 하였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12-14
  • 목회는 쉬운 것이다·79
    성령은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사도로부터 안수 받고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우리의 습관은 육신적인 것으로 세상을 의식하기 때문에 내게로부터 나타나는 이론을 말합니다. 그리고 혼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여 신비스러움의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영접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속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생각하여 인간의 삶에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을 의식합니다.성령은 우리의 생애 속에 거룩함을 가져오십니다(요 17:17).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요 14:26).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요 16:13).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요 14:16~18). 성령은 아들 된 것을 확증하십니다(갈 4:6, 롬 8:15~16).성령은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 8:26).증인이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과 복을 주심은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주신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 자체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함께하실 때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의 삶의 모습을 성령의 열매로 설명되었는데 그 자체가 성령운동의 기초요, 증거된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증인의 삶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요 15:16). 이 열매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요 15:18).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16).성령운동이란 열매의 풍성입니다.중요한 것은 열매가 어떻게 맺느냐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증인으로서의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너무 알기 쉽게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매와 이웃을 향한 열매와 자신을 향한 열매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었습니다.하나님을 향한 열매사랑(롬 15:3) :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34),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은 바 되고(롬 5:5), 항상 그의 사랑이 강권하시고(고후 5:14), 실로 사랑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희락(잠 7:18) : 사람들이 왜 희락이 없는가? 복음 자체는 기쁨입니다(눅 2:10). 희락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빌 1:18). 성령의 기쁨입니다.화평(롬 5:1) : 날마다 전쟁, 경쟁으로 고발, 비난, 시기, 질투로 분열이나 성령 충만의 삶은 화평의 열매입니다. 이웃을 향한 열매오래 참음(고전 13:4) : 사랑으로 오래 참음으로 희락의 승리로 사랑이 오고 화평은 평안의 사랑이며 오래 참음은 시련 가운데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의 열매인 것입니다.자비(빌 2:1) : 자비는 이웃을 향한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은 곧 선입니다(롬 3:12). 양선(엡 5:9) : 양선은 자비에 비해서 능동적인 선입니다.자신을 향한 열매충성(딛 2:10) : 믿음과 충성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롬 12:3, 고전 12:9).온유(마 11:29) : 온유는 회개와 겸손에서 오는 부드러운 심정입니다. 온유는 도덕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합니다(마 5:5).절제(벧전 1:5~7) : 절제란 자제를 뜻합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갈 5:21~24).성령운동이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사랑입니다. 결국, 성령운동은 사랑운동입니다. 성령운동이란 사랑입니다. 희락은 기뻐하는 사랑이요, 화평은 휴식하는 사랑이요, 오래 참음은 지치지 않는 사랑이요, 양선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자비는 긍휼에서의 사랑이요, 충성은 전장에서의 사랑이요, 온유는 억제하의 사랑이요, 절제는 훈련 중의 사랑이요. 이 모두가 성령운동이요, 곧 증인의 삶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12-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