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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기준가치 - 배성산목사
    인간에게는 지구생명의 나이만큼이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자연을 터득해 온 옛 사람들의 삶의 방식들로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삶의 기준으로 살아왔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온 생활의 삶에서 우주의 생명으로 공기, 물, 땅이 삶의 근본임을 알고 이 삶은 공존 공생하는 생명공동체로서 생명작용은 보완, 의존적인 관계로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살아왔다. 이 생명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공동운명체로 유기적인 관계로 이어짐을 알게 한다. 여기에 그 생명이 어떤 형태이든 그 가치와 존엄성에는 차등이 있을 수 없고 각기 안전한 삶을 꾸릴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에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모든 존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하여 생명 사랑을 구현해 왔다. 오늘의 현대 사회는 인간중심의 생명기준으로 살아온다. 오늘의 이 세상은 삶의 행동 기준이 달라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생명의 답을 잃어버린 공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오늘의 우리 현대 사회와 세계와 인류를 중심 원리로 한 코스모스 폴리스적 개방 사회로 달려가고 인류의 기준과 출발점을 여기에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7-11
  • 믿음의 유추(類推) - 배성산목사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왜 사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는 문제는 '나'를 "믿음의 유추(類推)"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고의 신이나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시키는 인간의 내적 태도에서 신념이나 신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의 은총을 강조하는 신앙에서 믿음은 신이 직접 주는 내적인 확신이나 사랑의 태도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인 역사적인 계시에 대해 하나님의 감동을 나타내는 인간의 반응을 알게 하며 인간의 궁극적인 관계에 관여하게 하는 믿음으로 이를 신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관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삶을 사는 인생관과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으로 참 인생의 삶의 의미를 가진다. 인생의 모든 삶의 문제가 생명의 기본적인 것이기에 생명관으로 사는 삶을 살게 한다. 이는 올바른 생명관으로 살아야 자연의 피조세계와 더불어 사는 생명관으로 공생의 삶의 둥지를 틀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7-04
  • 노년은 약속된 은총 - 배성산목사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나 사라지는 것은 만고불면의 법칙이며 한 생명은 땅에 심어서 거두는 생명의 이치에 따라 반드시 생명의 열매로 씨를 품고 다음의 생존의 삶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는 죽어야 사는 생명의 원리를 터득한다. 참 아름다운 노년의 사람이란 마음이 잘 익은 사람이며 그러한 사람은 노년의 삶에서 얻어 낼 수 있는 소중함과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다. 사실로 늙는다는 것은 제아무리 근사한 말로 합리화 시켜보아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삶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노년은 그 삶이 여물 줄 알고 더불어 빛 밝은 성숙한 삶의 희열을 누리는 것이며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노년은 소외되는 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만의 삶에 영글어 간다. 생존을 위한 환경 적응과 두드러진 품위나 처지에 진중한 성찰을 한다. 인생의 노년은 그 깊은 심연의 끝자락에 숨죽이고 있는 찬란한 진리의 빛 밝음으로 노년의 일상을 사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6-20
  •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 배성산목사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지를 방문해 보면 한국의 척박한 삶의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교회가 개화기에 한국 사회에 어떤 삶을 가질 것인가?” 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사랑의 나침반’역할을 하다가 이 땅에 묻힌 그들의 묘지를 보면 많은 감회를 갖게 하고 숙연한 마음 그지없다. 자기 나라를 떠나 어둠 가운데 헤매는 우리 민족을 위해 빛으로 삶의 길을 열어 보인 숭고한 신앙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이 오늘의 교회를 깨우치게 한다. 구원의 나침반으로 하늘과 땅의 방향을 열어 보이신 위대한 신앙의 삶이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한가를 알게 하여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를 서울교회 창립주일에 생각해 본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다. 그 몸이란 유기체이다. 유기체는 전체성을 존중한다. 손가락 하나의 아픔은 그 아픔을 손가락 하나에 국한시킬 수 없다. 몸 전체가 아픈 것이다. 그리고 유기체의 각 부분은 전체의 균형과 발전을 위해 기능 한다. 교회를 몸으로 이해한 것은 바로 단합된 유기체적 공동체임을 뜻한다. 이 공동체는 몇 가지 의식(意識)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공동체는 신뢰의식이 생긴다. 신뢰의식은 자기를 비우는 용기를 요청한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초월하여 다른 경험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하신 당신의 뜻이다. 이러한 공감대 형성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귀하다고 가르치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그 삶을 친히 보여 주셨다. 이 신뢰의식이 공동체를 안으로 튼튼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면 사명의식은 밖을 향하여 예언자적 외침을 외치게 하는 의식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공동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는 사명의식을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6-13
  • 삶의 궁극적 관심 - 배성산목사
    영국의 작가 다니엘디포의 장편소설인 「로빈슨크루소」는 평범한 뱃사람인 로빈슨크루소가 무역선을 타고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대서양 적도로 이어진 기니아로 향하던 도중 서인도에서 좌초되어 홀로 무인도에 표착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조롭고 구성도 평이하지만 출판 당시 작가 자신도 놀랄 만큼 호평을 받아 곧 그 속편을 썼다. 이 장편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모험 스토리’로, 어떤 이는 생존하려는 삶의 ‘투쟁의 스토리’로 이해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역경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신앙의 스토리’로 이해한다. 폴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은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은 삶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문제로 삶에서 궁극적 관심이 경험될 때마다 거기에는 신성이 존재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의심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 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실존적인 존재 또는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한정된 것에만 머물러 좋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데, 그것은 인간을 비존재로 떨어지게 만든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5-29
  • 성령강림절에 듣는 음악 - 배성산목사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회에 문화적 능력과 구조를 부여하고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통하여 역사를 창조하여 유지하며 이를 향유하게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감사의 중심에 있지만 사회적, 문화적 감사도 상호 연관되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교회에는 생동감 넘치는 삶과 생활에 리듬이 따른다. 성령은 우리 사회가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구원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 교회는 살아 숨 쉬며 생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서 향유(享有)하는 삶을 누리고 가짐으로 존재함을 알게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셨다. 교회가 태어났다. 그 교회는 예수의 삶, 가르침, 고난, 생명의 부활로 삶의 활성화를 이 세상에 성령이 역사하시며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성령은 삶의 자리에서 환경을 조성하시고 감성을 통하여 신앙의 분위기로 마음, 말, 행동으로 기쁨과 희열을 갖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5-16
  • 사랑은 서로 하는 것 - 배성산목사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아래와 같은 천사 미카엘의 대사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하 나님은 사람이 떨어져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그리하여 저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살기를 원하시며, 그리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모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드러내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을 위한 걱정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이 사랑에 의해서만 산다는 것을 이제 이해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편에서 주인공 구두장이 '시몬'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농가에서 구두수선을 하며 사는 가난뱅이다. 양가죽 외투를 사기 위해 마을사람에게 빌려준 5루블 20코페이니까를 받으러 농부의 오두막을 방문했지만 허탕을 친다. 울화가 치민 '시몬'은 보드카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벌거벗은 채 교회에 기대어 앉은 거지 청년 '미카엘'을 발견한다. 구두수선공 ‘시몬’은 그 청년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갈 곳 없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저녁식사를 대접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5-08
  • 말씀과 약속의 기다림 - 배성산목사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사가랴’(Zacharias)는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의 남편이며 세례 요한의 아버지였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으로 활동하던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2)가 헤롯왕을 통해 유대를 통치하던 시기였다. 당시 로마와 결탁하여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며 보수적 기득권층을 이루었던 타락한 사두개인과는 달리 사두개인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었던 사가랴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으로 활동할 즈음 하늘의 말씀을 받는다. 하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는 말씀으로 사가랴에게 그에게 펼쳐질 미래를 계시하시고,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게 하셨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4-18
  • 부활을 본 바울 - 배성산목사
    한 소경과 앉은뱅이가 있다. 소경은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튼튼한 다리가 있고, 앉은뱅이는 걸을 수 없는 대신에 눈을 가지고 있다. 앉은뱅이의 눈과 소경의 다리는 따로 떨어져서는 불완전한 존재였지만, 소경이 앉은뱅이를 등에 업음으로써 훌륭한 동반자, 하나의 완성체가 될 수 있었다. 실 체(essence)와 인지(perception)와의 관계는 소경과 앉은뱅이의 관계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실체는 내용, 즉 '속(알맹이)'이요, 인지는 현상, 즉 '겉'이다. 실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인지에 의해서 현실 속에 발현되어야 그 존재가치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인지되지 않는 존재는 공허할 뿐이고, 존재 없는 인지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그것에만 집착하며 살려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현상에 근거하여 인지하고 가치판단을 내리며, 현상의 ‘속’, 즉 그 본질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4-10
  • 성실과 진실로 사는 사회 - 배성산목사
    지금 우리의 사회현상 가운데 국민의 불신의 의식에는 정치와 권력 지향적인 성향이 짙게 배어 있다. 우리는 정치, 경제 제일주의와 권력이라는 등식관계가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사회 제도 속에서 권력 남용이라는 인식의 현실에 시달려 온다. 가치가 전도된 시대에 방황하는 국민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인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그러나 그 기대는 실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개혁의 방향은 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정치하는 사람, 하려는 사람에게 더 의식 개혁이 중요한 정치 현실임을 보고 있기에 이를 주지한다. 오늘의 정치의 위기는 잘못된 가치의식에서 성실과 진실이 결여된 그 사람(인간)에게서 유래된다고 본다. 즉 양심의 빈곤, 윤리의 타락, 질서의 굴절이라는 정신적 질환은 정의 보다는 불의, 신뢰 보다는 불신, 질서 보다는 무질서가 속출하는 처절한 사회현실을 보게 있기에 그렇다. 삶의 가치는 반드시 정로(正路)를 걸어가는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에 준한 삶에 성실과 진실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달려있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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