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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질서 보전의 의미 - 배성산목사
    지금 세계교회는 창조절로 교회력에 따라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인간들과 불가분의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인간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이기 때문에 자유가 있어야 하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질서 때문에 너무 제약되거나 또는 사회의 질서가 개인의 지나친 방종 때문에 무질서 내지는 혼란에 빠지거나 할 때에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창조의 질서는 자연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때는 현존질서라고 말하며 이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봉사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라인홀드 니버 신학자는 사회 정의를 말하여 '독재와 무질서의 양 극단을 피하여 어떻게 기술적으로 두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잘 항해해 나가느냐에 있다' 고 한 말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와 권리가 주장되고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정의가 요청되어 자유와 정의가 잘 균형 잡히느냐에 따라 올바른 질서가 방향 잡히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창조질서의 안목은 보호하며 유지하기 위해 보전(保全)해야 하는 그 의미를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9-06
  • 때가 찼다 - 배성산목사
    예수 세상의 삶은 공생애를 통하여 그 삶은 시대적인 상황에서 삶의 자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를 알게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이미 전도자의 말씀이다. 예수가 살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하고 흉흉하였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탄압과 착취, 로마와 결탁한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횡포와 매국적 행위에 분개한 백성들이 끊임없는 반응을 보고 알게 한다. 수많은 농민들이 빈곤에 찌들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농토를 포기하고 산적의 무리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가는 곳마다 도둑의 무리로 흉흉하였던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8-30
  • 평화통일은 화해 - 배성산목사
    우리는 금년으로 광복절67주년을 맞는다. 우리 민족은 광복 이후 해방과 분단으로 민족의 자주 독립이 아니라 강대국의 열세에 의한 외적으로 벗어남과 붙들림으로 우리의 광복은 치욕의 해방으로 67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고 되고 있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는 전통주의적 시각과 냉전체제하에서 소련과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지배해 왔다. 우리는 남과 북이라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역사로 6,70년대로 식민주의 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에 분단시대의 이념으로 규정지어 분단의 갈등으로 서로 싸우며 살아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0년대 와서 우리는 역사의 민족주체 발전으로 방향을 틀어 진보적인 역사관이 대두됨으로 냉전 속에서 긴장되어온 시대적 흐름을 감지하고 민족의 역사의 분단의식을 서서히 무너뜨리며 그 지평을 열어갈 수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와중(渦中)에서 90년대는 세계사적 현실로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와 변질로 냉전체제의 종식,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 전반적인 보수화와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질서의 형성으로 세계경제의 블록화에 민족 갈등의 심화와 정보산업으로 산업구조의 개편, 지구환경의 위기, 외래문화의 급속도로 침투에 의한 민족문화 정체성의 위기 등을 알게 하고 한반도의 정세변화는 평화통일을 준비하고 새천년(2000년)을 맞아 평화통일을 한 즈믄(千)에 민족사적인 의미로 민족통일을 위하여 화해협력으로 나서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이를 실천하는 통일방안을 마련한 점은 민족의 동질성회복의 일을 마련하게 됨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8-24
  • 행복은 어디서 - 배성산목사
    최근 매일경제신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국가 가운데 34개국중 32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되었으며 이렇게 바닥을 이루는 원인은 공동체의식과 소득분배 악화를 그 원인으로 말하고 있다. 금년 초에도 기획 재정부가 경제, 사회통합, 환경, 인프라스트럭처 등 에서 4개 경쟁력 분야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행복지수는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하느냐가 판가름이 나지만 무엇이 행복함을 결정하는지 어떤 것이 행복한 것인지 참으로 행복한 이유를 궁금하게 한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자연은 하나님의 솜씨인데 창조로 지음 받은 자연은 보이는 것으로 생명의 행복을 알게 한다. 심어 자라게 하시며 열매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또 너희도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33).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8-09
  • ‘바로 지금’이 은혜와 구원 - 배성산목사
    사람이 살아가려면 의식주란 범주로 아름다운 생활공간을 이루며 살아가는 접근한 생활방편이 있고 사람들이 삶의 본질인 살림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생활시간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데 3가지 중요한 ‘금’ 이 있다. ‘황금’ ‘소금’ ‘지금’ 이 그것이다. 절박한 관심으로 ‘지금’이라는 시간을 절선(折線 at hand)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그 중간에 있음을 안다. 그리하여 사람은 시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삶에 맞게 시간을 나누어 놓고 하루가 24시간 일년이 365일 등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혹은 달을 중심으로 우리가 시간을 정하고 산다. 여기에 시간의 흐름은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이다. 그 속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일 뿐 그런 시간 속에서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서 살아간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론에서 시간에 대해서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영원과 시간의 질적 차이를 극복하고 상호매개하기 위하여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으로 화육하여 중보, 속량, 화해를 일으키면서 무(無 영원)의 위협 아래 있는 인간을 안정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함으로 하늘나라를 바라는데 순례자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데 있고 여기에 화이트헤드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통전(統全)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현재성은 인간의 영혼이라 일컫는 마음 속에서 종합된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론자인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자연이란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통전된다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8-03
  • 돌 무화과나무에서 내려 온 삭개오 - 배성산목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인간, 역사, 사회를 미래로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하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 한다. 이는 곧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론으로 신학의 핵심이요 모든 세계관, 인간관을 일구어내는 신앙과 삶의 핵심임을 알게 한다. 몰트만은 기독론을 '위로부터' 시작하며 그런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성육신과 부활에서 제시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존재를 '위로부터', 인간의 인식을 '아래로부터' 분류하고 이 두 내용과 방향은 상호 깊이 관계한다고 말한다. 또한 기독론으로 칼 바르트가 로고스의 성육신으로부터 기독론을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기독론의 주체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기독론을 논하는 것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방법론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바르트는 성육신은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신적 행위에 대한 개념적 해석으로서의 임마누엘은 성육신의 모든 내용과 의미와 방향을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7-20
  • 가뭄은 왜 오는가? - 배성산목사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서울지역 강수량은 평년의 6.4%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보도이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08년 이후 104년 만에 최소 수치라 한다. 이번 가뭄은 시베리아 지역의 눈이 지난 4월 하순부터 빠르게 녹으면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가뭄은 왜 오는가? 창조질서의 파괴에서 오는 현상이라면 우리는 창조의 보전(保全 integrity)을 위한 자연현상에 순응하는 태도로 보호하여 유지해야 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는 엄격한 질서 안에서 창조질서를 알게 한다. 자연은 원래로부터 하나님의 창조로 존재하며 사람의 손길을 거치지 않는 존재 그 자체로서 그것들이 이루는 상태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말이다. 예컨대 계절적 변화와 같은 시간적 반복으로 구성된 자연의 질서를 알게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7-12
  • 맥추절의 감사마음 - 배성산목사
    구약시대의 3대 절기는 곡식과 연관되어 있다. 봄의 유월절, 여름의 맥추절, 가을의 초막절이 이스라엘의 3대절기로 곡식의 이삭이 펴는 때에 무교병과 쓴 나물과 구운 양고기를 먹는 유월절과 여름에 첫 이삭을 거두던 날 특히 밀보리를 첫 수학하든 맥추절, 그리고 가을에 모든 곡식을 추수하여 저장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초막절로 오늘날 지키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의미로서 유월절은 유대민족에게 이달은 새해 첫 달로서 출애굽으로 이스라엘백성이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자유민이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맥추절은 광야에서 만나만 먹든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하여 처음으로 첫 열매 얻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지킨 절기이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날짜가 유월절 안식일로부터 제7일의 안식일 7주를 지난 다음날에 해당되므로 오순절 또는 50일의 5순이 이 성일을 오순절이라 하는 것이다. 유월절이 과거의 예표라면 오순절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까지 이어지는 현재의 예표이어서 또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달로 7월 15일로부터 7일동안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집에서 나와 들이나 산에 초막을 지어 그 안에서 7일동안 생활하며 자연에 안겨 절기를 지키는 감사마음임을 알게 한다. 또한 이것의 의미는 유월절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 받은 은혜를 기념하여 감사하는 것이요 이를 감사하여 7일동안 유교병을 먹지 않고 고난의 떡인 무교병을 먹음으로 감사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7-05
  • 생명의 생존과 경외(敬畏) - 배성산목사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생명들은 함께 살림살이를 하는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질서 공동체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는 가운데 하나의 연결 체계로 형성된 기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산다. 이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공존, 공생하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알게 함으로 생명은 "생명의 생존과 경외(敬畏)"를 알게 한다. 이는 생명이 모두가 '나눔'이라는 생명줄로 서로 연결된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하는 창조질서 안에서 그 경외로움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6-22
  • 내림마음의 신앙 - 배성산목사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공생애의 삶 속에 나타난 가난하고 고난 당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자기 희생적 사랑과 섬김을 통한 삶의 실천을 넌지시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제적인 지배적인 통치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통치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삶에 대하여 통전적인 이해를 갖고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는 통합적 또는 종합적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사건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적 현실이다. 그러나 "내림"은 본질적으로 십자가로 사랑의 구원을 알게 한다. 십자가는 단지 절망이거나, 부활을 기다리며 부활로 가기 위한 전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의 힘이며 능력인 것을 ‘내림’으로 그 의미를 지닌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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