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1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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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와 교회의 미래를 위한 현명한 대안 ‘노을동산’
    은퇴자들의 건강한 노후를 보장하는 마을공동체 '노을동산'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단순한 주거단지를 넘어 신앙, 경제, 생태 통합을 목표로 한 '노을동산'이 인구 고령화, 일자리 부족, 농어촌 인구 감소 등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주목을 받고 있다 사)노을공동체를 이끄는 박형희 목사는 지난 11월 27일, 경기도 김포시 본부 사무실에서 교계 기자들을 만나, '노을동산' 사업에 대한 설명회를 진행했다. 박 목사가 성공을 자신하는 '노을동산'은 농어촌 지역에 100여가구로 구성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공동생산 공동수익 공동분배를 통해 자립을 이룬다는 계획이다. 자립을 위한 주력 상품 '효소'를 비롯한 여러 식품이다. 고추장 된장 등의 다양한 발표 장류, 유가공품, 장아찌, 특화 작품 등의 생산을 통해 자립 기만을 마련한다. 박 목사는 "라오스, 미얀마 등 해외 농업법인과 협력해 원재료와 수출 구조를 확보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직접 생산과 유통에 참여함으로 수익 분배를 할 것이다"며 수익은 공동체 유지비용과 인건비를 제외한 후 균등하게 분배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러한 구상은 박 목사가 갖고 있는 여러 식품 특허에서 가능하다. 박 목사는 과거 사자발쑥 효소를 시작으로, 인삼 효소, 인삼 고추장 등 다양한 특허와 식품을 개발했으며, 현재도 특허출원을 준비하는 10여개의 식품들이 대기 중이다. 박 목사는 "서해 북단 서검도에서도 목회할 당시 만든 사자발쑥 효소가 당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국내 유명대학 연구소에서 항암 효과도 인정받았었다"며 "이후 여러 효소를 비록한 다양한 식품들을 개발해 왔다. 수출에 취약한 인삼 고추장 같은 경우 내가 개발한 방법으로 수출의 길을 열 수 있다"고 자신했다. 현재 박 목사는 '노을 동산'의 시범사업을 위해 여러 지자체와 논의 중이며, 이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 중에 있다. 농어촌 인구 감소가 실로 심각한 상황에 여러 지자체들이 '노을 동산' 사업에 상당한 관심과 참여 의사를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허나 박 목사는 무엇보다 교회에서 해당 사업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다. 노을동산은 단순한 경제 공동체가 아닌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복음 공동체이기에 반드시 교회의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헌금했던 원로 평신도들이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바로 노을동산이라고 생각한다"며 "목사님들께서도 이에 관심을 갖고,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성도들에 적극적으로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배려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박 목사는 전국을 돌며 교회들에 '노을동산'에 대한 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단순히 수익을 위한 '사업 설명회'라기 보다는 이 사업이 개인 뿐 아니라 현 대한민국의 현실과 한국교회를 위한 공공의 사업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향후 조직될 마을공동체 안에는 교육기관이 들어서며, 이곳에서 기독교문화전문지도자, 공동체관리지도자 과정 등을 교육할 예정이다. 박 목사는 "노을동산은 단순한 복지대책이나 귀농 지원의 차원을 넘어 전인적 회복, 사회적 재생, 신앙 공동체의 구현이라는 다층적인 비전을 실현키 위한 총체적 계획"이라며 "향후 사업은 단계별로 확장되며, 국내외 협력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공동체 모델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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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3
  • “세계 최대 규모 유엔군 추모 기념물 건립 된다”
    6.25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유엔군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한 사)한국전 참전용사 한미추모사업회가 설립됐다. 이영훈 목사가 초대 이사장으로 나선 본 사업회는 세계 최대 규모의 유엔군 추모 기념물도 건립키로 했다. 지난 11월 10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서울호텔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16개 유엔 회원국에 대한 보은을 약속해 눈길을 끌었다. 참석자들은 “194만여 명(미군 179만여 명)의 참전용사 중 5만 6,442명(미군 3만 6,634명)이 전사하고 10만 4,076명이 부상했으며 1만 11명이 행방불명 됐다”며 “그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공감했다. 음을 강조했다. 창립총회는 한국인 참전용사 한미추모사업회가 준비한 영상을 시청한 뒤 소프라노 강윤정 씨의 미국 국가 제창에 이어 참석자들이 애국가를 제창하며 막을 열었다. 또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영혼을 기리는 묵념으로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이어서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과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이 축사를 전했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도 영상 축사를 통해 추모사업회의 창립을 축하했다. 본 창립총회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를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대표 발기인이기도 한 이영훈 목사는 인사를 통해 유엔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경의를 표한 뒤 “이 사업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미국과 전 세계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용기와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지 않으려는 다짐에서 시작되었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는 부산 유엔묘지나 한국전쟁기념관 등 추모 시설이 있지만 지리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참전용사들의 엄청난 희생의 무게에 걸맞은 규모의 시설이 부족했던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추모사업회는 미국의 사례를 비교하며 추모 기념물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수도 워싱턴 D.C. 중심부에서도 특히 방문객이 가장 많은 링컨기념관 앞에 건립해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있음을 사례로 들어 대한민국 수도 서울 중심지에 ‘세계 최대 유엔군 추모 기념물’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제1차 계획은 추모의 벽 건립이다. 약 48,000명의 산화한 영웅 이름을 돌에 새기는 유엔 한국전 참전영웅 추모의 벽을 최우선으로 건립한다는 것. 이에 필요한 건립 기금은 정부와 기업 및 일반 국민들의 기부를 통해 조달할 방침이다. 여기에 더해 제2차 계획으로 16개 참전국의 전투병 동상과 미군 6개 부대 동상 등 실물의 1.8배 크기 동상들로 구성된 ‘한국전쟁터의 UN군’ 조형물을 조성할 계획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한미추모사업회가 진행할 사업들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한미 양국을 비롯한 각국의 6.25 한국전쟁 참전국들과의 우호 협력을 증진하고 국제 평화에 기여하는 역사적 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재단은 한국과 미국에서 별도로 설립될 예정으로, 미국의 추모재단으로부터 설계와 기술 및 대외교류 등 필요한 지원을 받게 되고 한국 재단은 부지 선정과 확보 및 국내 모금활동을 주관하게 된다. 또한 기부자들의 이름은 공원 내 화강암에 새겨 최고 예우를 다할 예정이다. 추모사업회는 “이 사업을 통해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감사와 보은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한미 양국을 비롯한 참전국 국민들이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며, 지속 가능한 협력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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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2
  • 이슈 / 서울성락교회 왜 분쟁하나?
    한국기독교의 신약교회 운동… 베뢰아 운동의 분열은 막아야 베뢰아 운동의 분열로 가나?“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행 17:11, 12). 김기동 목사가 시작한 한국교회의 베뢰아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신약교회 운동이요, 전도운동이다.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시비를 당해가면서도 꾸준히 부흥 발전해온 베뢰아 운동의 중심교회인 서울성락교회가 최근 분쟁에 휩싸였다. 그간 서울성락교회가 추구해온 베뢰아 운동의 방향과 분쟁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베뢰아 운동이란 무엇인가?한 마디로 김기동 목사의 ‘하나님의 의도’ 신학에 의한 신약교회 운동이고, 신본주의 운동이다. 김 목사는 1973년부터 베뢰아 성경공부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의도 신학을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성경의 모든 말씀, 즉 창조로부터 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시 김 목사는 자신의 집에서 장신대생 11명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1974년에는 총신대 대학원생들이 참여해 40여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목사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들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 의해 1978년도에 ‘베뢰아아카데미’가 출범했다. 베뢰아아카데미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도(意圖)’를 깨닫게 되면 성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베뢰아아카데미는 신본주의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를 밝히고, 능력의 보편성을 증거하여 믿는 자에게 침례를 주고 제자를 삼는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성경공부를 하게 되면 큰 변화가 일어나 목회현장에 능력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특히 말씀대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목사는 귀신의 정체를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고 주장해 이단시비가 알어났다. 사실 귀신의 정체는 성경에서 ‘더러운 영’으로만 불려졌을뿐, 그것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든 김 목사의 축귀와 능력목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서울성락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고, 교단과 베뢰아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 결과 베롸아 운동은 한국교회에 능력있는 많은 목회자를 배출했다.분열의 원인은 ‘세습목회’베뢰아 운동의 분열 배경은 서울성락교회의 세습목회에 있다. 김 목사는 50여년의 목회를 끝내고 은퇴하면서 그의 아들 김성현 목사에게 성락교회 담임과 감독을 맡겼다. 김성현 목사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과 영국에서 10여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이다. 김 목사는 “내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목사로서 일할 수 있는 일터”뿐이라고 말해왔다. 그리하여 김성현 목사는 5년여 전에 성락교회의 담임목사와 감독, 그리고 베뢰아대학원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그런데 김성현 목사가 성락교회를 담임한 이후 교인들 간에 그의 설교가 김 목사만 못하다는 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 김 목사에 비해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는 대형교회를 이룬 큰 목사의 후임이 겪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김성현 목사는 김 목사의 베뢰아아카데미 교육을 거치지 않았다. 베뢰아아카데미 출신이 대부분인 교단내 동료 목회자들과 신학적 갈등이 있었다.분열의 촉발은 예장통합 이단 사면파동그런데 김성한 목사에 대한 불만스러운 교인들과 교단 목회자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운 것은 통합측 제100회 총회의 이단사면 파동이었다. 통합측은 총회창립 제100회를 맞아 희년의 화해정신으로 교단내외에서 치리를 받았거나 정죄를 당한 사람들을 특별사면한다는 결의를 하고, 특별사면위원회를 구성해 통합측이 이단으로 규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국교회에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사과하고, 위원회의 원칙에 따른다는 조건으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특별사면을 공포했다. 이때 김기동 목사는 이미 은퇴한 후이므로 성락교회를 대표하여 김성현 목사가 한국교회 앞에 사과했다. 이 사과가 베뢰아 출신들의 심기를 몹시 건드리는 결과가 되었다. 김성현 목사는 “신학적 해석의 비본질적인 요소로 인해 베뢰아 운동이 소모적인 이단시비에 휘말리고 있다”며, “예장통합교단과 화해를 위하여 특정신학 보다는 보편신학에 발맞추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베뢰아로서는 엄청난 양보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특별사면이 이루어져 교회와 교단에 대해 이단시비가 사라졌으면 그나마 김성현 목사의 공이 드러났겠지만, 제101회 통합측 총회가 ‘이단 사면’을 거부함으로써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김 목사 담임목사직 지지파와 반대파와의 충돌그러다보니 베뢰아 출신 교단 목사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며 김성현 목사에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교회내의 불만세력과 교단내의 불만세력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성락교회는 김성현 목사가 사임하고,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한 가운데 원로 김 목사가 담임목사에 복귀했다. 김목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한 충정이었겠지만,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던 반대파가 노골적으로 김목사를 지켜야 한다는 지지파들과의 충돌이 격화되고 말았다. 이번 서울성락교회의 사태는 원로의 이 복귀를 반대하는 세력과 지지하는 세력간에 분쟁하는 것이다. 베뢰아 운동이 한국교회의 오해와 핍박 속에서 어떻게 여기가지 왔는데, 서로가 한 발짝씩 양보하여 분쟁을 잠재우고 더 이상 분열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 교회는 한번 분열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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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09
  • 이슈 / 한국기독교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1985년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올해 한국교회는 기독교(개신교) 선교역사를 131년으로 잡는다. 1985년에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대회를 치루었기 때문이다. 1985년을 선교100주년으로 보는 것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알렌의 입국 해인 1984년과 1985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입국한 해로 잡은 것이다.그러나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 본명하다. 1800년대 초 서해안을 거쳐간 바질 홀(Basil Holl, 1816))이나 칼 구츨라프(Carl A.F.Gutzaff, 1832)의 선교역사는 두고라도, 1866년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올라오면서 신약성경을 나누어주다 순교한 로버트 토마스(Robert Jemain Thomas)와 1873년 만주 우장에서 이응찬, 이성화, 배홍준, 김진기 등 의주청년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죤 로스(John Ross)의 선교역사는 분명히 한국기독교 역사임이 분명하다. 왜냐면 그들에게서 한국인 기독교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사에서 왜 이들의 역사가 선교의 선구자로만 취급되고,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역사쯤로 취급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토마스의 성경을 받은 군인의 조카가 훗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가 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눌서 선교사와 함께 성서번역사업에 종사했던 이영태라는 청년이고, 마포삼열 목사가 1893년 평양에서 학습반을 조직했을 때 거기 나온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에게서 신약성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기념하여 1933년 9월 14일 ‘토마스 목사 기념예배당’도 세웠다.또 죤 로스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의주청년들은 1876년 로스의 매부 매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881년에는 서상륜도 세례를 받고 이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존 로스 목사와 함께 성서번역사업에도 참여했다. 그것이 한글성경 예수성교전서 로스역이다. 토마스와 죤 로스 그리고 죤 매킨타이어는 모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의 한국선교는 성공한 것이 분명한데, 왜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이들 의주청년들의 세례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한국기독교 역사는 1866년이 아니면, 최소 1876년 시작되어야 한다그렇다면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1866년의 토마스로부터 시작되거나, 최소한 1876년 만주에서 로스의 전도를 받은 의주청년들의 세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들은 죤 로스의 성서번역사업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번역한 한글성경을 조선에 반입해 전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천주교의 역사는 이승훈이 1784년 북경성당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날로 시작된다.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1884년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이는 역사 왜곡이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선교맥이 끊기고 후에 들어온 미국 장로교가 이들을 흡수했기 때문에 생긴 왜곡이다. 1884년은 미국 장로교의 선교가 시작된 해이고, 1885년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한 해에 불과한 것이다. 1884년 미국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황해도 솔래에는 이미 교회가 서 있었다. 그렇다면 그 교회는 누가 세웠는가? 1881년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1884년 자신의 고향에 세운 교회가 솔래교회이다.솔래교회나 의주청년들의 전도가 자연히 장로교 선교에 흡수된 배경은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본래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장로교의 것과 교리상 별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한국에서 독립적인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선교의 열매를 맺은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 후에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에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그런데 왜 한국기독교 역사가 1884년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이런 역사 왜곡이 이루어진 이유는 한국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세력이 다른 교파에 비해 너무 커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역사가 곧 한국기독교 역사라고 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선교역사를 자파(自派)의 역사로 볼려는 이기적 시도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역사 왜곡 바로 잡아야 한다1876년 의주청년들의 세례로부터 한국기독교 선교역사로 본다면, 한국교회는 2076년이 되면 200주년이 된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의 선교200주년의 기념대회를 2085년에 할 것이 아니라, 2076년에 치르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이런 주장을 하면 선교역사가 1876년부터면 어떻고, 1884년부터면 어떻다는 것인가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연대가 한국교회 신앙형태나 교회부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라도 최소한 역사는 바로 세워 후손들에게 가르치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1985년에 치루는데 이의가 없었다는 것은 한국기독교 역사가들이 대체로 토마스나 죤 로스의 선교사역을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로만 볼뿐, 본격적인 한국선교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선교의 첫 문호를 연 선교사들을 자연히 미국 장·감 선교사들의 입국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체 6만 교회 가운데 약 75%를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장로교나 감리교의 결정이 한국기독교를 대표하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파주의 교회이다. 수많은 교파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그 역사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발행인 강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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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9
  • 이슈 / 평양노회의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보고
    진정한 죄책고백 있어야 한국교회의 분열과 한반도 통일 열릴 것일제하의 한국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의 어용교회(御用敎會)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기독교의 근본원리는 무참히 짓밟히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본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미가미)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라는 의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4월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감리교에 이어,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결의했다. 이로써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교회들은 문을 닫고 목회자는 모두 교회에서 쫓겨나 감옥으로 끌려갔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는 ‘이단’이 되고,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교회가 ‘정통’이 된 것이다.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천조대신의 신사에 대한 단순한 참배에 그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한국기독교를 철저히 일본국민의 조상신들인 팔백만 잡신을 거느린 태양신 천조대신을 섬기는 요상한 우상숭배 집단으로 바꾸려 한 것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은 ‘성지순례’(聖地巡禮)에 나섰다. 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팔레스틴 땅이 아니라,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있는 일본이었다.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등 조선의 대표적 장로교 목사들은 1938년 오문환의 인솔로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 먼저 교도의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어어서 도교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후 이어 소위 지도급 목사들이 수없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모두 노회나 총회에서 내노라 하는 지도자들이었다.그들은 앞장서 창씨개명을 하고, 태양신 숭배에 철저히 충실했다. 또 1945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아예 없애버리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945년 8월 15일 졸지에 해방이 되자, 그들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파는 기독교 목사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회개’를 요구하는 반대파들을 향해서는 “너희만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며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분열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장로교 분열을 가져온 고신파와 재건파의 탄생은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다.300개 장로교단은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죄과오늘의 한국장로교가 300여 개에 이르는 교단으로 분열하는 등 이처럼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비의 죄를 삼사대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면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한국교회는 신사참배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었는가를 알았다면, 해방 이후 신사참배 주도자들을 모두 교회에서 좇아내고 신앙양심을 지킨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혀 새롭게 출발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사참배에 앞장선 지도자들이 해방 후에도 각 지역의 대표적 교회들을 맡아 ‘회개를 촉구’하는 반대파들을 교회에서 내몰았다. 1946년 일명 남부총회에서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고 결의했을 뿐, 그 결의에 대한 회개나 죄책고백은 없었다. 독일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독일교회도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600만 유대인 살해는 독일교회의 방관과 묵인없이 저질러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당시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나치의 어용교회인 ‘독일기독교도(DC)’를 해산하고, 그 앞잡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니뮬러 목사를 중심한 소수의 저항 집단이었던 ‘고백교회’가 그 정통성을 이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독일교회는 모두 ‘독일복음주의교회(EKD)’의 신앙과 양심 아래 모여 들었다.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 살아 있어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해방 후 신사참배 지지자들이 전국 노회의 임원이 되고, 총회장과 총회임원이 되었다. 몇몇 양심있는 목사들이 죽기 전에 자신의 신사참배 경력을 교회 앞에 실토하고 회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고 물신과 물량주의 귀신놀음에 빠져든 것은 신사참배의 열매(罪果)와 무관하지 않다. 태양신이 웅크리고 있던 그 자리에 바로 물신이 또아리를 틀었기 때문이다.지금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유 또한 태양신에 허리를 꺾은 신사참배죄에 대한 회개가 분명치 않은 데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그 무서운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도 단 한번도 진정성을 담은 죄책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국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기철 목사의 복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진정성을 담은 회개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과 선배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또 기독교 자체에서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하고, 그들 친일인사들이 자신들의 안일을 위해 일제하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능욕했는가를 소상히 밝혀 후대에 남겨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태양신이 웅크리고 있던 그 자리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기복주의 물신을 쫓아 내지 못한 채 변질된 제3의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수 없을 것이다. 보라, 한국교회를 키웠다는 목회자들이 은퇴하면서 어떤 물욕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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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12
  • 이슈 / 조용기 목사의 위험한 「평신도를 위한 요한계시록 강해」
    기독교 정통교리는 325년 니케아와 431년 칼케톤 사이에 확립되었다세계 최대교회를 이루어 한국기독교 뿐 아니라 세계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지난 1990년에 발표된 자신의 저서 평신도를 위한 요한계시록 강해(서울서적)의 버가모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예언적 의미로 볼 때, (이) 교회는 주후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포한 때로부터 시작하여 주후 590년까지의 교회 시대에 적용됩니다.‘버가모’란 말은 영어로 ‘marriage’, 즉 결혼이라는 말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와 정치를 혼합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마스커스 감독이 교회와 바벨론 종교를 혼합하여 서로 결혼을 시켜 놓았습니다. 이 교회와 정치의 결혼, 그리고 교회와 이단종교와의 결혼은 결국 로마를 통일시키고 더 굳건히 하는, 말하자면 정치적인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가톨릭교회는 ‘세미라미스’를 ‘성모 마리아’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사실은 교회가 그 이방종교의 여신인 세미라미스에게 절하는 영적 간음의 발람교훈을 따라 범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필자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공인 밀라노칙령은 312년이 아나라 313년이며,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한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니라 392년 데오도시우스이다. 조 목사는 역사적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톨릭 직위 조직은 바벨론 종교조직”또 조 목사는 “당시의 바벨론 종교조직은 요사이 가톨릭에서 볼 수 있는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의 직위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가장 최초로 생겨난 종교이며 가장 무서운 사단의 회(會)입니다.”“이렇게 해서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 백성들이 그 종교를 통해서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분향했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376년에 그라시안 황제가 예수를 믿고 난 후, 자기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므로 그와 같은 바벨론 종교의 제사 직분을 맡을 수 없다고 포기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다마스커스 감독이 자청하여 이 제사 직분을 맡겼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기독교 의식(儀式)을 바벨론 종교의 그것과 합쳤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 가보면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림이나 동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발람의 교회’란 말은 버가모교회, 다시 말하면 당시의 기독교회가 바벨론 종교와 합하여 니므롯의 아내인 세미라미스를 섬기고 그에게 절함으로써 영적인 음행을 범했다는 뜻입니다.”“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버가모교회의 잘못을 얼마나 무섭게 책망하고, 또 진노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의 피로 사신 교회가 이단사신(異端邪神)의 유혹을 받아 넘어 갔으니 분개하지 않으시겠습니까?”“그러므로 버가모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세상과 타협하여 간음한 교회입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순수해지지만 다시 축복을 받고 나면 세상과 타협하여 버가모가 됩니다. 이 버가모 시대는 가톨릭교회가 조직화 되고, 바벨론 종교와 혼합되어 영적인 음행을 행하며,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 타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비극적인 교회 시대입니다”라고 결론 맺고 있다.그런데 조 목사는 이 강해에서 기독교 역사를 심각히 왜곡하고, 역사적 기독교가 결정한 교리 등을 훼손할 수 있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기독교는 312년 이후 타락한 음녀교회로 변해”조 목사는 A.D. 312년 이후에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가 등장했고, 순수한 기독교가 없어지고 타락한 음녀교회로 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사학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등장 시기는 그레고리 1세 로마 대감독(540-604) 시대에 확립되기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만약 조 목사의 주장대로 A.D. 312년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확립되고 그 교회는 곧 이방종교와 결혼한 음녀교회라면 그 시기에 있었던 고대 에큐메니칼 교회회의가 결정한 기독교 교리들은 과연 정통한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A.D.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조를 채택하여 오늘날 세계기독교가 그것을 그대로 믿고 있고,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A.D. 43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기독론과 성령론과 교회론이 확립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조를 믿는 교회는 정통이고, 이것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다.죤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 모두 고대 에큐메니칼 회의 교리 정통교회 결의로 인정죤 칼빈은 “우리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과 제1차 에베소 회의와 칼케톤과 그밖의 이와같은 초기 회의들을 거룩한 회의들로서 기꺼이 공경하여 받아들인다. 이 회의들은 신앙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데 고심했다. 거기에는 성경에 대한 순수하고 진지한 해석이 있었을 뿐이며 거룩한 교부들은 당시에 있던 신앙의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해서 영적인 지혜로 이 해석을 적용했다”고 했고, 또한 “성경을 표준으로 우리는 칼케톤 회의를 받아들이며 제2차 에베소 회의를 배척한다. 에베소 회의에서는 유티케스의 이단설이 승인되었고, 칼케톤 회의에서는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분들은 이 문제를 오직 성경에 표준하여 판단했으며, 우리는 그들 앞에서 빛나도록 그들을 본받아 판단한다”고 했다. 칼빈 뿐만 아니라 16세기 종교개혁자들 모두 니케아 회의를 비롯한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결정한 신조들을 존중했다.그럼에도 조용기 목사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과 성령론이 확립된 시기에 이미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로 오염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조 목사가 역사적 기독교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 매우 위험한 논리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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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29
  • 이슈 / 기독교 정당, 정치실험 무엇을 남겼나?
    정치권 복음화에 소명 가진 참신한 신진세력 참여가 관건 지난 4월 13일 제20대 총선이 끝난 후 전광훈 목사는 개인 이름으로 ‘기독자유당 77만표 지지참여 선거보고서’라는 내용의 광고를 4월 16일자 국민일보에 실었다.전 목사는 기독자유당에서 자신이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 지는 밝히지 않은 채 “기독자유당은 12년 전 김준곤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께서 전광훈 목사와 장경동 목사에게 지시하여 시작이 되었다”고 말하고, “금번 20대 총선을 통하여 77만표 3.2%(13번 기독당을 착오로 찍은 표 포함)를 얻어 국회에 진입할 수 있었으나 몇몇 목사가 한국교회 동의없이 개인적 야망으로 만든 기독당의 방해로 국회 진입에는 실패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자유당은 “몇몇 목사가 한국교회 동의없이 개인적 야망으로 만든” 정당이 아닌가? 기독자유당은 이떤 절차를 거쳐 한국교회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또 전 목사는 “지금부터 이번 선거를 적극 도와주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 한교연, 기지협, 장로총연합회, 평신도연합회, 여성지도자연합회, 여러 교단과 선교단체들의 후원으로 1천2백만 성도들이 매월 핸드폰 요금에 1천원을 더내는 운동에 적극 동참해 주시기를 호소한다”고 공개적으로 정치자금을 모금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광고는 정당의 이름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인 ‘전광훈 목사’ 이름으로 나와 있어 정치자금법 위반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정당에 속한 정치인이 아닌 자연인은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없다.그런데 기독자유당(5번)과 기독당(13번)으로 나누어져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기독교정당’(기독자유당+기독당)은 정당투표제가 생긴 17대 이래 가장 높은 득표율을 나타내 그 가능성은 충분히 보였다. 두 당이 각기 득표활동이 달랐겠지만, 기독교계가 지원한 기독교정당의 전체 득표율은 3.17%이다. 이는 국회에 진출이 가능한 3%를 넘긴 수치이다.기독교정당은 17대에는 228,837표(1.07%)였고, 18대에는 443,775표(2.59%)였으며, 19대에는 257,190표(1.20%)였다. 그러나 이번 20대에는 두 당이 얻은 전체 득표는 756,831표(3.17%)이다.그러나 5번 ‘기독자유당’과 13번 ‘기독당’은 마치 교계연합단체 설립하듯이 난립했다. 이런 정신으로 기독교정당이 지도권에 진입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정계에 영향을 행사할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이번 20대 전국 시도단위별 득표를 지난 18대(이하 괄호안)와 비교해보면, 서울 143,201표(2.88%), 부산 43,578(2.74%), 대구 33,371표(3.09%), 인천 48,607표(4.76%), 광주 16,192표(2.29%), 대전 24,329표(3.48%), 울산 16,177표(3.00%), 경기 178,815표(3.16%), 강원 24,317표(3.43%), 충북 20,563표(2.89%), 충남 34,182표(3.79%), 전북 36,163표(3.90%), 전남 34,860표(3.61%), 경북 51,611표(4.27%), 경남 42,996표(2.86%), 제주 5,024표(1.80%)로 고루 득표했다.또 18대에는 호남지역에서 비교적 고루 높은 득표율을 보였으나, 이번에는 영남지역, 특히 대구 경북지역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불서기(東佛西基; 동쪽은 불교가, 서쪽은 기독교가 성함) 상황에서 특히한 현상이다. 호남지역에 비해 기독교인이 훨씬 적은 영남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투표에 임한 영남지역 기독교인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정당에 표를 던진 것이다.이로보건대 기독교정당이 4년 후에는 목사들이 아니라 신뢰받는 기독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치고, 또 50개 이상의 주요지역에 후보를 내고, 실천 가능한 공약을 내건다면 기독교인들의 표를 어느 정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려면 지금 기독교정당에 얼굴을 내미는 인사들만으로는 안된다. 특히 목회자들은 뒤로 물러나 후원자가 되고, 정치권 복음화에 소명을 가진 신진 기독정치인들이 나서야 한다. 목사들 중에도 정치에 나서고자 하는 인사는 교회를 사임하고 당당히 후보로 나서는 것이 옳다. 그래서 교계를 향해 “내가 한번 국회에 나가 정치권을 바꾸러 한다”고 당당히 지지를 호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호메이니’ 노릇을하려 해서는 안된다.한국교회는 지금 정치권 복음화가 시급하다. 그러므로 불신받는 정치권을 바꿀 수 있는 참신한 인물들이 필요한 것이다. 복음적 신앙과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참신한 정치지망생이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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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8
  • 이슈 / 2016년을 장로교단 통합의 원년으로 삼자
    이단방지 위해서라도 장로교 통합 시급하다한국기독교는 미국의 교파주의 교회를 받아들임에 따라 다양한 교파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처음에 하나로 시작된 장로교회 마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패배한 결과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원칙없는 분열이 계속되어 300여 개에 이르는 교단 간판이 내걸렸다.그 원인은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선교초기 노정된 지역분할 선교정책이 지방색과 함께 파생된 지역주의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북장로교는 서울과 평양을, 미 남장로교는 전라도를,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를,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지를 나누어 선교했다. 선교회 간 경쟁과 중복을 피하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해방 후 미국 선교부의 권한이 한국교회로 이관되는 과정에 같은 장로교 안에서 지역에 따라 파벌을 만들고 교단 안에서 감투를 노리는 사람들이 그 지역색을 업고 교단을 분열시켰다. 교회가 덩치가 커지면서 교권이 곧 돈이 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세속주의의 결과이다. 교회의 분열은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교단분열을 예사로 생각하는데서 생겨난 폐단이다. 보편적 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을 분열시키는 것은 죄악이다.둘째는 급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교권을 둘러싼 갈등이다. 교회가 경제력이 없어 그 유지가 어려웠을 때는 서로가 경쟁심 없이 협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게 되자, 거기에서 한 줌도 안되는 종교적, 세속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교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을 가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교회에 생활을 의지하고 있는 목회자들이다.셋째는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교회가 선택한 잘못된 역사적 오류를 해방 후에 바로 청산하지 못한데서 교단이 분열되었다. 장로교단 분열의 시초가 해방 후 신사참배 논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신사참배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장로교단 분열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다. 더욱이 장로교회는 개혁교회의 정치 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같이 채택하고 있다. 말하자면 신앙과 신학이 똑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하나되라’는 성경의 말씀과 교회의 원리가 있음에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열시켜 명분없는 교단을 만드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한국장로교회가 신앙, 교리, 신조가 같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분열되어 있는 것은 그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한국장로교회는 이제 교단을 만든지 100년이 지났다. 100년이면 성인이 된 것이다. 철 없는 어릴 때 가졌던 생각과 행동을 접고 성인답게 행동할 때이다. 그러므로 이젠 장로교 통합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는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아예 ‘하나의 단일교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장로교회의 하나되는 운동 없이 한국교회의 도덕성 회복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와 민족 앞에 구원의 주체로서 정당성을 가지려면 당연히 하나되는 운동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2016년 올해가 한국교회가 하나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그 이유는 첫째, 진보와 보수 간에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같은 장로교 안에서 진보와 보수 간에 엄청난 갈등과 단절이 있었다. 강단교류가 금지되고 서로를 이단시 했지만 이제는 그런 험악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다. 둘째, 한국교회는 분열로 인해 먼저 교인들이 상처를 입었고, 그 다음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교회에 대한 신뢰 상실을 가져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단통합으로 사회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셋째, 민족의 평화적 통일이 다가오고 있다. 장로교만이라도 통합된 모습으로 통일을 맞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민족의 교회로서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교 분열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따라서 각 교단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교회론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이고, 특히 신학과 신조를 같이하는 교단은 갈라져서는 안되며, 분파주의는 무슨 명분을 내세우든 이단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암적 요소인 이단 방지를 위해서라도 장로교회의 통합은 시급하다. 그리고 하나의 한국장로교회를 지향할 수 있는 존경받는 인물들을 키워야 한다.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없이는 교단통합은 요원하다. 한국교회에 왜 존경받는 인물이 사라져가고 있는가. 그것은 목회자들이 하나같이 세속적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순수하게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들이 활동할 수 있는 교계의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인물들이 사심을 버리고 복음증거의 효율성을 위해서 반드시 교단을 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때 장로교 통합은 가능하다. 한국장로교회는 대통합을 이루는 순간 장로교 목회자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며, 민족복음화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다. <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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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2
  • 이슈 / 한국교회 분열과 분쟁 어디에서 오는가?
    개혁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면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요즘 한국교회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대관절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교회’란 무언가? 라는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한다. 교회는 그것이 어디에 무슨 이름의 간판을 달고 있던지 교회론을 무색케 하는 분열과 분쟁이 심화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라는 보편적 교회론에서는 있을 수 없는 개교회주의가 만연하며, 마치 세속적 사업체를 운영하듯이 은퇴하는 목회자가 잉여금을 남겨 거액의 퇴직금을 챙겨가는 따위가 무슨 관행처럼 버젓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는 세상의 인본주의적 세속적 종교기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더욱이 교회는 세상의 여타 종교기관과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행태는, 개신교 목회자들이 잘못된 교회라고 비난하는 로마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를 비롯한 구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성공회나 루터교 등 다른 개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타락 현상은 개혁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면 어떤 형태로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극심한 연합단체들의 분열과 분쟁한국 기독교에는 교단만 수백 개로 분열해 있는 것이 아니다. 연합단체나 기관들도 거의 날마다 분열해, 자고 나면 따로 간판이 하나씩 늘어난다. 무슨무슨 기독교연합회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렵고, ‘한국’이니, ‘대한’이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기독교총연합회도 수십 개에 이른다. ‘대한예수교장로회’만 모인 연합회만 해도 4-5개나 된다. 똑같은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너무 많아 기자들도 헷갈린다. 그래서 그 단체의 정체를 알려면 대표자가 누구인가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대표자의 이름을 들어도 생소할 때가 많다. 그런 단체에서 교계를 아우르는 지도력이 나올리가 만무하다. 다만 몇 사람이 ‘거룩한 기구’를 만들어서 밥벌이를 하고 행세를 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교단과 연합단체들의 분열은 결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지도력만 약화시킬 뿐 아니라, 민족복음화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의 힘을 약화시켜 세상에 비웃음거리로 만든다.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미국의 교파주의 교회를 물러받았으므로 연합과 일치라는 에큐메니칼 없이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 시대부터 선교사공의회 등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어져 온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한국교회가 되어 성경도 번역하고, 찬송가도 통합을 이루었으며, 서회나 방송국 등 선교기관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갈갈이 찢어져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그럼에도 누구나 다 입은 살아서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하지는 않는다.개교회주의의 폐단처음부터 기독교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una sancta catholica ecclesia)이다. 이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 밖에 있는 것은 이단이다. 이 하나의 보편적 교회 안에 가시적 교회(可視的 敎會)와 불가시적 교회(不可視的 敎會)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지교회(支敎會))가 있을 뿐, 개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 그 양심에 따라 교파와 교단의 존재만 인정될 뿐이다.그런데 한국교회는 어쩌다가 개교회주의가 만연하다. 심지어 특정 교파와 교단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는 개교회주의로 운영된다. 이런 형태는 우리사회에 있는 일명 ‘무당 절간’ 운영과 같은 것이다. 흔히 무당 절간이라고 부르는 종교기관은 그 외형적 형태는 불교의 사찰과 유사하다. 간판도 불교적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불교의 종교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속적 가치를 따르는 것이다. 점과 굿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면 그 절간을 자녀에게 상속하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한국 기독교 안에 널리퍼져 있는 개교회주의가 바로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복음이라는 종교적 상품을 내세워 신도들을 모으고, 거기서 나오는 재화로 먹고 살다가 그 교회를 팔기도 하고 상속도 한다. 그런데 이런 교회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교회들이 있을 땐 한국교회 전체가 크게 영향을 받는다. 현대 한국교회가 왜곡된 배경에는 이런 개교회주의적 대형교회들이 크게 영향을 끼쳐 왔다.목회자 거액 퇴직금의 문제이건 정말 심각한 타락 현상이다. 당장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 전체가 국민들로부터 깊은 불신에 쌓일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는 일생을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위한 교회의 봉사자로 부름 받았다. 당연히 교회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교회가 주는 것이 불만족 하면 직업을 바꾸면 된다. 목회는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다.개신교 목회자들로부터 성경적 기독교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신부나 힘 있는 주교가 수십억 수백억원의 퇴직금을 받아간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관절 목회자가 거액의 퇴직금을 받아가는 것이 성경적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성경은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라고 말하고 있다.그런데 목회자가 도(度)에 넘는 거액의 퇴직금을 받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건 순전히 자신이 목회자(목자)가 아니라 한 종교집단의 ‘삯꾼’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 돈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 독립시키고 달랑 두 부부만 남았는데, 죽을 때까지 교회가 생활비를 지원하면 되었지, 무엇이 크게 모자라 수십억 수백억원의 퇴직금을 챙겨가는 것인지, 이런 교회가 세상에 한국교회 외에 어디 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같은 교단 안에서도 목회자 간 부익부 비익빈 현상이 너무 심각하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건강성을 회복하기 어렵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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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9
  • 이슈 / 한국교회 이단논쟁 ‘갑’의 횡포에 맞선 ‘을’의 반란
    이단연구 신학적·신앙적 지식 갖춘 연륜있는 인사들이 나서야한국교회는 이번 총회를 통해 이단감별사들의 폐회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아마도 각 교단 간의 이해가 맞물려 있는 데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그동안 본보를 비롯한 교계언론들은 일부 특정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폐해를 수없이 지적해 왔다. 그럼에도 교단들은 ‘내 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터콥’과 ‘두날개’ 등 특정교단과 관련된 인사들에 대한 이단시비가 제기되자 그 해교단들이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갑질’에 대해 “우리도 억울하다”는 ‘을’의 주장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한기부’와 ‘한장총’ 관계자들의 이단 퇴출 선언한국교회를 이 꼴로 만든 것은 이단감별사의 횡포를 방치한 예장통합측의 책임이 크다. 통합측은 대교단의 힘만 믿고 80년대부터 특정인사들에 대한 이단시비를 시작했다. 80년대 초 조용기 목사와 권신찬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로 교계의 이목을 끈 통합측은 이후 합동측에서 전입되어온 최삼경 목사가 사실상 통합측의 이단문제를 주도하면서 한국교회 이단논쟁을 격화시켰다. 최삼경은 통합측 이대위를 업고 20여년간 60여 건의 이단 문제를 제기해 이단문제의 전문가로 등극했다. 그러자 교계에는 4인방 혹은 5인방이라는 이단감별사 패거리들이 무소부위 이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그 폐해가 결국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까지 악영향을 끼쳐 한기총이 갈라지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이런 상황을 예견한 교계언론인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본보는 이 점을 끊임없이 교계에 환기시켜 왔다. 그 결과 이번에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한기부) 회원들의 이단감별사들에 대한 투쟁 선언과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이단대책위원회의 이단감별사 퇴출 선언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선언을 보고 이단감별사들은 ‘이단연구의 활동을 방해하고 이단을 이롭게 하기 위한 이단옹호자들’의 수작이라고 오히려 비난하고 나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계가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에 대한 폐해가 도를 넘었다는 심각성을 인식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단은 그 열매로 안다모든 종교활동에는 ‘이단’운동이 따른다. 특히 기독교의 복음선교는 진리운동임으로 더욱 그러하다. 역사적 기독교도 초기부터 이단과 싸웠고, 한국교회에도 이단은 끊임없이 생성돼 왔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교회에 이단은 있다. 그 지도자를 신격화 하는 교주우상주의 집단과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왜곡하는 집단이 그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도 그 가르침이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그런데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문제는 그들의 열매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은 모두 이단으로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떤 특정인의 주변에 사람과 돈은 좀 모이는데 그 신학적 교단적 배경이나 울타리가 부실해 보이는 사람만 골라 공격한다. 그것도 ‘내가 해석해 보니 이단이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운다. 아직 그가 이단인지, 삼단인지 그 열매가 열리지도 않았는데 이단이란 결론을 내어놓고, 신론이 어떻고 기독론이 어떻고 인간론이 어떻다며 멋대로 해석을 붙여 ‘그러므로 이단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을 대교단의 이름으로 발표하니 누구나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그러나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나무는 그 열매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알고, 알곡과 함께 밭에 있는 가라지는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자칫 가라지를 속아내려다 알곡도 다칠까 염려한 것이다. 이단은 한때 유행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되어 있다.절대 ‘갑’에 대한 ‘을’의 반격한국교회 이단연구는 대교단 이대위를 업은 이단감별사들이 절대 ‘갑질’을 해왔다. 그들이 아무개는 이단이다라고 선언하면, 그는 아무런 변명의 기회도 갖지 못한채 곧 한국교계에서 이단으로 매되되어 교계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양이 좀 달라져 가고 있다. ‘내가 왜 이단이냐’고 항의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 안에서 상당한 동조자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단감별사들의 갑질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데서 나오는 동조현상이다.그럼에도 한국교회 이단연구는 필요하다. 그러나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부분별한 ‘갑질’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국 교회를 분쟁과 분열로 몰아가는 것이다. 지난 주 이들로부터 이단시비를 당한 한 교회에서 일어난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드러난 대로 이단감별사들은 아무런 책임없이 아무개가 이단이다라고 선언하지만, 그 순간 그 교회 구성원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엄청난 고통에 휩싸인다.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가족들로부터 이단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압박을 받다가 이혼까지 가는 경우도 생기고, 직장 동료 간에도 이단교회 멤버로 몰려 소외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이단의 문제는 이제 단순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문제만이 아니다.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을의 반격은 당연한 일이다.그러므로 이제 각 교단의 이단대책이 달라져야 한다. 이단 문제를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이유로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신학적 신앙적 지식과 상식과 연륜이 있는 자들이 나서야 분쟁을 줄일 수 있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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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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