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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서
    ◇구약성경의 아가서에서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은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아가서를 신(神)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노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신약 교회에 와서는 힙포리투스(Hippolytus)의 주석에 의하여 교회론적으로 해석되었다. 이어 오리겐(Origen)은 아가서를 구약성경의 일곱 개의 노래 가운데 가장 숭고한 노래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道程)에서 아가서를 노래하려면 앞서 다른 여섯 개의 노래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것은 아가서를 교회론적 해석과 신비적 해석을 병행시키고 있는 것이다.◇오리겐이 말하는 아가서에 이르는 여섯 개의 노래는 첫째,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이다. 모세는 애굽 땅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라고 노래했다. 둘째는 민수기 21장의 이스라엘의 노래이다. 광야에서 목말랐던 이스라엘은 브엘에서 “우물 물아 솟아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라고 외쳤다. 셋째는 거룩한 땅의 접경에서 모세가 요단 강둑에 서서 부른 노래이다. 모세는 신명기 32장에서 “하늘이여 귀를 기우리라 땅이여 내 말을 들으라”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스라엘이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를 부르기에는 멀다. 넷째는 사사기 5장의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의 노래이다. 그리고 더 진행하여 다윗의 노래에 이르게 된다. 다윗은 모든 적들의 손에서 피하고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 후, 사무엘하 22장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라”고 노래했다. 이것이 다섯째 노래이다. 그리고 여섯째 이사야는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위해 노래”했다. 이 모든 노래들을 부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영혼으로서 신랑과 함께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서를 부를 수 있다고 했다.◇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혼의 도정은 죄악의 세상인 “애굽 땅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회심과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은 홍해를 건넜으나 거친 들과의 끊임 없는 투쟁 속에서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셋째로 우리의 영혼은 신앙생활의 모든 단계에서 찬송을 부른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때에 영혼은 비로소 ‘반구의 소리’를 듣게 된다(아 2:12). 그것은 신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깊은 말씀의 지혜이다. 이것이 아가서를 영적 삶의 절정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친근한 대화로 이해하게 된 이유이다. 따라서 아가서는 영적 생활의 절정의 노래이고 기쁨의 노래이다. ◇그런데 아가서를 세속적인 눈으로만 이해해 남녀의 밀애 소설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단순한 연애 소설이 어떻게 성경 속에 삽입되었겠는가. 심지어 교계주변에서 아가서를 남녀의 성교(섹스)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주장하여 교계에 크게 물의를 일으킨 가정사역자들도 있었다. 그들도 목사라고 불리운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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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0
  • 제도종교와 그리스도교
    ◇우리사회에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라는 단체가 있다. 여기에는 불교, 유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원불교, 민족종교라는 7대 종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는 한반도에 먼저 들어와 터를 잡았다는 이유로 ‘전통종교’로, 유교는 한 때 국가 경영철학이었을 뿐 아나라 사회 도덕율이었다는 이유로 ‘전통문화’로, 또 한국인에 의해 창교된 천도교와 원불교는 아직 그 역사가 미천한 ‘신종교’이고, 민족종교는 그야말로 그 근본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각종 무속집단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그리스도교의 두 종파가 ‘외래종교’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나란히 끼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과연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여러 세속주의 제도종교 가운데 하나의 종교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자,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난 자이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말씀이 육신이 된 자이며, 위로부터 온 자인데, 어쩌다가 예수가 세상의 여러 종교의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 대접받게 되었는가. 성경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라고 했다.◇그러면 그리스도교가 세속주의 제도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그 교주가 자신의 시신(屍身)을 땅에 남겼는가, 아닌가로 갈라진다. 불교의 부타도, 유교의 공자도, 천도교의 수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모두 죽어 땅에 그 시신를 남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그 시신를 땅에 남기지 않고 부활해 자신이 온 곳으로 다시 갔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와 세상의 모든 제도종교와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어설픈 지도자들이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 예수를 설명하다 보니 예수가 여러 종교의 교주 중 한 명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2-4).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예수가 곧 창조주이시요, 세상의 생명인 것이다.◇복음은 이 세상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것이고, 그의 사랑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요, 다른 종교는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누구에게나 절대신념체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그 종교가 가장 지고지순한 사상이요 이념이 된다. 다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여러 제도종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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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8
  • 직업종교인
    ◇한 종교학자는 한국의 직업종교인을 △구원의 대리인을 사칭하는 ‘교주형’ △물질신앙을 조장하는 ‘기복형’ △정치권력, 자본권력, 문화권력 등 세속적 권력에 아부하는 ‘권력지향형’ △시류에 따라 목회현장에 주체적이지 않은 신앙체계를 제공하는 ‘식민신학형’ △예수동호회의 회원과 같은 ‘교파신도형’ 직업종교인으로 분류했다. 직업종교인은 마치 자신들이 성경해석권의 독점권을 가진양 행세하는 종교인을 말한다.◇첫째 ‘교주형 직업종교인’은 재림주를 자처하는 자이다. 그는 재림주가 출현하는 시기와 장소를 특정하며 재림주도 초림주와 같이 육신을 입고 온다고 미혹한다. 따라서 모든 성경을 여기에 궤맞춰 해석한다. 재림주가 인간의 몸으로 다시 온다는 사상은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한 종교 사기꾼들의 전형적 유언비어이다. 예수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말씀이 육신이 되사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분이시다. 예수의 수육(Incarnation)은 하나님의 아들이 단 한 번 인간의 몸으로 와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신 사건이다. 다시 오시는 예수는 인간의 육신으로 오지 않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오신다. ◇둘째 ‘기복형 직업종교인’은 인간의 현세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반대급부를 취하는 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자기중심적 욕망들을 억제하고, 인간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따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가르치기 보다, 썩어져갈 인간의 욕심을 따라 현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데 촛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언제까지나 불안과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기복형 직업종교인은 하나님의 각종 성령의 은사나 신비체험 같은 성령의 능력도 모두 돈벌이로 전락시킨다. 이들은 기독교무당으로 전락하여 종교자본가 행세를 한다.◇셋째 ‘권력지향적 직업종교인’은 벙어리 개다. 세상을 향해 그 불법과 부정을 끝없이 지적하고 회개를 축구해야 할 종교인이 권력의 비호와 명예를 위해 어용목자, 어용신학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종교는 세상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으뜸가는(宗) 가르침(敎)이며, 종교인은 으뜸가는 가르침을 가르치는 직업인이다. 그런데 세속권력과 영합해 권력에 아부하는 비겁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종교인은 세속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다. 권력과 야합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넷째 ‘식민신학형 직업종교인’은 성경이 아니라, 서구신학을 신앙의 표준으로 여겨 맹종하는 자이다. 다섯째 ‘교파신도형 직업종교인’은 특정 교파에 소속한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여기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을 이르는 말이다. 교파신도형 직업종교인은 교회당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실천은 건성이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잘하면 구원받는 줄 알고, 목사를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착각하는 종교인을 이르는 말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지, 제도 교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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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31
  • 세습목회 논쟁
    ◇기독교는 성경에서 제사장 종교 전통이 아닌, 예언자 종교 전통을 이어간다. 그 직이 대를 이어 세습되는 제사장 종교와 달리, 아버지가 목사라고 그 아들이 목사가 되거나, 아버지가 장로라고 하여 교회에서 그 아들이 그 직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소명(召命)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영국이나 미국 등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는 선대(先代)의 목회지를 후대(後代)가 이어가는 세습목회가 하나의 미덕이었다. 할아버지의 목회지를 아버지가 잇고, 또 아버지의 목회지를 아들이 잇는 것은 그 지역의 자랑거리였다. 당시는 교구주위 목회였기에 그 교회 신도들도 안정감을 갖고 대를 잇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고 또 존경했다. 아버지 목사의 영적 지도를 받던 신도가 그 아들 목사의 영적 지도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현대사회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대를 잇는 세습목회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습되는 교회들이 대부분 대형교회들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대형교회에는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종교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를 단지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차지한다는 것은 특혜라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회사에서 대형교회의 출현은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는 모든 교회가 지역의 교구주의나 구역주의 택했다. 거주지 지역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거주지를 옮겨 이사를 가게 되면 출석교회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한국교회도 이러한 원칙이 지켜졌다. 교인이 이사를 가면 이명증서를 떼어주고 이쪽 교회에서 집사직분을 가진 사람이면 이사간 교회도 같은 직분을 허락했다.◇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지역이 도시화 되고, 자가용 등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웬만한 거리는 주일 아침시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도시에 소위 수천명이 모이는 대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수만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대형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를 좀 잘한다는 평가를 듣거나, 신유은사가 나타난다거나 하는 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에도 이 시기에 대형교회들이 나타났다. 오늘날 그 대형교회를 이룬 1세대 목회자들이 은퇴하고 후임목회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세습목회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교체기에 자칫 빠지기 쉬운 교회의 분열을 막고, 또 교인들이 그 아들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따라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세습목회는 아직 과도기적 단계로서, 그것이 한국교회 전체 공동체 안에서 득인지, 실인지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 일부 교단에서 세습목회 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은 너무 서두른 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세습목회 방지법이 자기네 교회 목사를 개교회 공동의회가 결정할 수 있다는 헌법과 차별금지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다만 세습목회가 사적 욕심에서 비롯되었거나, 후임목회자가 노회나 총회에서 자기네 교회의 등치만 믿고 동역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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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대중 여론
    ◇중구삭금(衆口金)이란 밀이 있다. “많은 무리의 주둥이가 쇠도 녹인다”는 뜻이다. 대중 여론(大衆輿論)의 위험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왕조도, 정권도 여론이 나빠지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요즘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재벌들의 처지가 그렇다. 그 동안에는 관행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일도 재벌 2세들이 새삼스럽게 여론의 표적이 돼 범법자처럼 몰려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대표적 기업인 대한항공의 오너 일가에 대한 여론의 뭇매는 세상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예이다. 그리고 여기에다 일반인들은 제 잘난 체 하던 재벌들도 여론 앞에서 쩔쩔 매는 꼴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가진 우리사회에서 기업의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반재벌 여론은 경계해야 마땅하다.◇우리사회에서 대중 여론의 또 다른 피해자는 기독교 신앙인들 가운데 이단 시비를 당하는 집단이다. 이단의 문제는 기독교 내부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이단 시비를 통해서 신학과 교리를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기독교 밖에서는 이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단을 전문으로 감별(鑑別)한다는 ‘이단감별사’라는 자들이 있어서 자신들과 이해 관계가 얽히면 누구나 가차없이 ‘이단’으로 공격한다. 이들의 초기 도전(挑戰)을 제대로 응전(應戰)하지 못하고 ‘내가 이단 아니란 걸 하나님이 알면 되었지 저것들과 싸워서 뭐가 득이 되겠냐’며 무시하다가는 끝내 이단으로 매도되어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전락할 수 있다.◇한번 이단으로 찍히면 어제의 친구나 동료도 모두 외면하고 등을 돌린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 취급을 당해 기독교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소외당한다. 또한 교계언론조차도 ‘뜨거운 감자’가 되어 그들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고, 세속 상업언론은 마치 그들이 사회악을 저지르는 사교집단쯤으로 취급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격한다. 그래서 그들이 이단으로 지목된 그 교회에 이름 난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유력한 인사들이 관련하고 있음이 드러나면 사정없이 반사회적 인사로 매도된다. 이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써, 명백한 인권침해이다.◇이런 종교 문제로 인권을 침해당한 인사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사법부에 자신의 인권 보호를 호소해도 법원은 이를 종교 문제라며 ‘비판의 자유’를 내세워 무시해버린다. 우리사회 어디에도 이들의 인권을 보호할 기관이나 장치가 없는 셈이다. 이번에도 ‘미투’다, ‘구원파’다 하여 이단 시비를 당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사교’ 집단 취급을 한 언론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만 믿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는 아무도 없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마 26:52). 여론은 곧 검이다. 그 검을 함부로 휘두르면 자신도 망하고 사회도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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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0
  • 사회적 병리현상
    ◇결혼한지 몇년 안된 어느 30대 후반의 청년이 처가에서 장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장인이 지금 좌파정부를 비판한 어느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서, ‘이 정부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알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위 왈 “아버님, 지금도 그런 가짜뉴스를 믿습니까?”라고 했다. 그 청년은 언필칭 보수계 언론의 보도는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사회적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30~40대 청년들의 의식구조에 큰 병이 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이 쌓여왔는지는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진보(進步)는 무슨 짓을 하든지 믿을 수 있고, 보수(保守)는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깊은 불신이 이같은 어이없는 사회현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지금 우리사회의 진보를 표방하는 ‘좌파’들은 시민단체라는 이름의 패거리를 만들어, 저들이 그렇게도 불신하는 보수세력이 이루어놓은 사회 정치 경제 질서에 ‘나도 좀 나눠먹자’며 끼어들지 않는 곳이 없다. 참여연대로 대변되는 사회운동가들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 곳곳에 이미 또아리를 틀었고, 무슨 법연구회니 하는 법률가들은 사법부를 장악하고, 전교조는 교육현장에서, 민주노총은 노동현장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들은 정치권에서 단물을 빨며 우리사회에 소위 진보주의(친북 좌파)를 퍼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김일성이 민족전쟁을 일으켜 150만명에 이르는 생명을 희생시키고 오늘날까지 우리민족에 고통을 안겨준데 대해서는 외면한채, 어린이용 한국사에서조차 김일성은 민족의 영웅이라고 추켜 세우고 있다.◇아예 이들은 ‘양심’ 자체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가 양심인데, 개인의 양심은 사람에 따라 그 기능이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이는 수정같이 맑은 양심을 가져 작은 먼지에도 반응하지면, 어떤 이는 발바닥같은 양심을 가져 왠만한 모래 정도는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화인’(火印) 맞은 양심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내로남불’을 정당화 하고,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한다. 남에게는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엄격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 이기주의이다. ◇이번에 ‘드루킹’으로 대변되는 댓글 여론조작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양심은 어떤 것인가. 자신들은 더불어 민주당 당원이면서 여론조작을 위한 댓글은 보수단체의 도덕성을 흠집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30~40대라고 한다. 이들이 우리사회의 중추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사고에 크다란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사고력을 가져야 할 시기에 세상을 읽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병리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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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5
  • 불의한 농부 비유
    ◇신약성경 마태복음 제21장에는 ‘불의한 농부 비유’가 나온다. 한 집주인이 돈을 많이 들여 포도원을 만들어 짐승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는 등 농장을 완전하게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는데,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농부들이 세를 주기는 커녕 종들을 잡아 심히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해서, 주인은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으나 그들도 맞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그래도 자기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자 오히려 ‘이는 상속자니 아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며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다”고 했다. 참으로 끔직한 일이다.◇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세를 얻은 농부들은 좋은 포도원을 자신들에게 세로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농사를 잘지어 약속한 정당한 세를 주인에게 낸 후에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만에 하나 그 해에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주인에게 낼 세가 사회통념상 너무 높아 불만이 있다면 주인에게 세를 감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옳다. 그래도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포도원을 세로 얻어 농사를 지으면 된다. 그런데 정당하게 그 세를 받으러 간 종들을 죽이고, 아예 그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그 아들까지 죽인 것은 사악한 범죄이다. 이 비유를 보면 자본가를 타도대상으로 삼아 적(敵)으로 규정한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이 떠오른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은 자본가들이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여겨 자본가들의 것을 빼앗아 무산대중에게 나누어줘야 한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사회 일부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지금 우리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모든 혜택을 누리면서도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반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주장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사에서 자본주의 이전에는 자본주의만큼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평등’과 ‘분배’를 통해 국가의 ‘복지’와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은 남들이 힘들게 이루어놓은 것을 함께 나눠 쓰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사회의 재벌이나 자본가들 중에는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반사회적 일탈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자들은 그 부(富)가 단지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지, 사회로부터 자신에게 온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도, 재벌기업을 이룬 사람도, 모두 사회를 위해 자신의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포도원 농부나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같이 오히려 그들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주님은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묻는다.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했다. 청중의 이 대답이 그 시대 그 사회의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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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1
  •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활신앙’이다. 예수의 재림 때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가 모두 살아나 선악간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주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는 죽은 자가 마지막 때에 새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그런데 기독교에는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해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어 육신은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 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입김에서 왔으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설’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을 때 육신과 함께 그 영혼도 죽는다는 ‘영혼멸절설’이 그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기독교 신학은 오래동안 영혼불멸설을 정통으로 믿어왔다. 그래서 영혼멸절설을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영혼불멸설이 부활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비성경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출신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다. 그는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영혼불멸설의 허구성을 성경적,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와 별개로 사후에 존재한다는 설명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성경의 부활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영혼불멸설 역시 성경에서 온 것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1,8).◇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2장은 “인간의 육체는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된다. 그러나 그 영혼은 결코 죽거나 잠들지 않고 불멸의 실체로서 조물주이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죽는 순간 거룩하게 되어 완전해져서 지극히 높은 천상의 나라에 들어가 빛과 영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게 된다. 이미 죽은 모든 성도들은 전과 같이 여전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설 중에 하나는 이단인가. 그 또한 아니다. 두 설은 결국 부활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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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9
  • ‘교회’와 ‘교회당’
    ◇“○○교회 매매.” 이 말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불쾌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용어이다. 흔히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한국기독교의 타락상을 말할 때 제일 먼저 꺼내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 이름 팔아서 사람 좀 모우고 땅도 늘려 돈을 챙기기 위해 교회를 부동산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과연 교회(ʼεκκλησι′α)를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 이는 한국기독교가 제대로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 혹은 ‘예배당’(禮拜堂)을 구분하지 않은 채 그 용어를 혼용해 사용하는 데서 오는 오해스런 현상이다. 한국기독교도 전래 초기에는 ‘교회’와 ‘예배당’으로 구분해 사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배당’은 사라지고 모두가 ‘○○교회’라고 불린다. 기독교가 마땅한 용어를 제시하지 않으니 어떤 이들은 ‘교회’와 ‘건물교회’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한국천주교의 경우는 ‘교회’(敎會)와 ‘성당’(聖堂)을 명확하게 구분해 사용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고,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축성한 거룩한 건물, 신자 공동체가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다. 중국기독교도 역시 ‘교회’(敎會)와 ‘교당’(敎堂)이 명확히 구분한다. 이를 혼용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만이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교회’로 통칭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당 매매’라고 해야 할 것을, ‘교회 매매’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흔히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신자가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당에 가는 것이다. 교회당에서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에 교회론이 흔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가 신자 공동체인지, 눈에 보이는 십자가가 달린 건물인지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신학교에서는 교회와 교회당을 구분해 가르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목회자가 섬기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당은 아니다. 그것이 곧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즉 교회가 교회당이고, 교회당이 곧 교회라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언어가 개념의 표현으로 사물의 가치를 나타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경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고전 1:2),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골 1:26)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을 지어 헌당하면서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인용하여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이 ‘집’은 하우스를 뜻하는 ‘오이코스(‛οικοs)’를 사용하고 있으나,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의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에는 아직 그 용어가 개발되지 않아 잘못 혼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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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1
  • 순진한 안보
    ◇구약성경 열왕기하 20장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1년 앗수르에 망한 후, 남왕국 유대의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들었는데,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통고를 받자, 면벽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는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하며 심히 통곡했다. 사실 히스기야는 성경에서 보기 드문 선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우상을 철폐하는 등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키는데 앞장 섰다. 그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받았다. 그 때에 동쪽의 신흥 제국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진 특사를 보냈다. 이에 감격한 히스기야는 그 특사에게 “자기 보믈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며” 환대해 보냈다.◇이 소문을 들은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가서 “저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라고 물었다. 왕은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이사야는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며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히스기야는 그런 날이 올지라도 “내가 사는 날 동안에는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된다”며 오히려 이사야를 속좁은 위인으로 무시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대 왕국은 오래지 않아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왕궁과 성전의 모든 금은보화는 늑탈되고,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그리고 70년의 세월을 보냈다. 국가 지도자의 순진한 안보정신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평창올릭픽에 북한이 참여하자 청와대는 한반도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며 북한이 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까지도 다 해주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우리가 저들에게 이렇게 잘해 주면 저들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대화와 교류로 나울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순진한 히스기야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적장을 환대하고, 한미 연합훈련도 연기하고, 정상회담도 추진하면 과연 그들로부터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안보를 위협하는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저들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이제까지 한 번도 바꾼 일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고 저들도 진심에서 그 손을 잡으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천암함과 연평도는 누구 짓인가. 솔직히 김대중도, 노무현도 저들에게 줄 것 다주고 결국 빰 맞았다.◇세계사에서 민족 간에 전면전을 치룬 나라가 대화와 교류로 평화통일을 이룬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남북은 이미 한 차례 비참한 민족전쟁을 치루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역사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힘이 강한 쪽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순진한 안보정신은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
    • 연지골
    • 연지골
    201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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