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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사의 퇴직금
    ◇오늘날 세계 최대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우고, 지난 2008년 은퇴한 조용기 목사가 교회로부터 200억원의 ‘퇴직금’을 받은 사실이 근래에 확인됐다. 국민일보 2015년 12월 11일자에 의하면,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퇴직금은 교회 재정위원회와 당회를 거쳐 정상적인 절차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 목사는 그 중 35억원을 소득세로 납부했고, 나머지 165억원에 대해 16억5000만원을 십일조로 교회에 헌금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될 조 목사의 퇴직금 명세는 일부 ‘교바모’(교회바로세우기장로기도모임) 장로들이 원로목사를 음해(陰害) 한다며 교회측이 강력 대처를 천명하며 밝혀진 것이다.◇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거액의 돈은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생활비를 쪼개고 아끼고 절약해 복음전도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다. 결코 목사가 ‘교회사업’으로 번 돈에서 나온 이익금이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를 하고,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하더라도 목사가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금을 도(度)에 넘치는 퇴직금으로 챙겨간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상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이는 한국교회에서만 있는 일이다. 공교회의 헌금을 은퇴목사가 생활비 외에, 거액을 개인적으로 챙겨가는 것은 범죄이다. 천재(天財)를 황령한 범죄이고, 물욕을 버리라는 목사의 설교를 신뢰해 온 교인들을 실망시킨 범죄이다. 더우기 이 돈이 교회가 그대로 관리하고 있었다면, 그 이자(利子)만으로도 원로목사에 대한 생활비를 지원하고도 남을 터인데, 교인들의 피땀어린 헌금 35억원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날린 셈이다.◇한국교회 목사의 퇴직금 문제가 교계에 이슈화가 된 것은 90년대 말 서울 화곡동에서 20여년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은퇴하는 목사가 4억원을 받아가는 바람에 그 교회가 큰 시험에 든 것이 시초였는데, 그 이듬해 종로구의 한 교회에서 7억원이 나오더니, 곧이어 10~20억원을 호가(呼價)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분당과 강남에 있는 두 교회가 각각 60여억원씩을 퇴직금으로 지급해 교계뿐 아니라,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 가히 세계 최대교회 답게 200억원이 목사의 퇴직금으로 지급된 것이다. ◇이유야 무슨 명분을 갖다붙이든, 수십억 수백억의 퇴직금을 챙긴 목사는 분명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주님이 가르친 기도를 위배한 것이다. 일생을 통해 주님의 기도를 설교해 온 목사가 교회의 공금을 수십억 혹은 수백억씩 자신의 사생활을 위한 목적으로 챙겨간다면, 이런 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단번에 바치고 이 땅에 이루고자 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한국교회는 왜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가? 한국 기독교의 수준이 진실로 이것밖에 안되는가 생각하니 참으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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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4
  • 십자가를 끌어내리는 사람들
    ◇어느날 한국교회 주변에 ‘하나님의교회’라는 것이 나타났다. 그 본명은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이다. 안상홍은 1918생으로, 1947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2년 예수 재림 시기를 안다는 무리와 안식교를 이탈해 부산 해운대에서 “하나님의교회 예수증인회”를 만들었는데, 1985는 안상홍이 죽자 그 추종자들이 안상홍이 “육신을 입고 온 보혜사 성령”이라며, ‘예수증인회’를 ‘안상홍증인회’로 바꾸고, 안상홍이 곧 성령 하나님이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데서 비롯됐다. 그후 안상홍증인회는 서울로 올라와 그 이름을 ‘하나님의교회 세계선교협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하나님의교회는 ‘성경에 있는대로 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있는대로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 무교절, 나팔절, 초막절을 지키며, 또 부활절, 오순절, 속죄일 등을 지킨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나님의교회는 교세가 늘면서 각 지역에 예배당의 필요성이 생겼으나 각 지자체로부터 종교시설 인허가를 받아내기가 어렵자, 기성교회가 새로 교회를 짓거나 타지로 옮겨가면서 매도하는 구 예배당을 사들여 사용하게 되는데, 그 때 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십자가’를 끌어내리는 일이다. 오늘날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는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교회는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신 21:23).◇기독교는 스스로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상징하는 표지가 곧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거룩한 하나님과 만나려면 십자가를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 이룬 속죄를 무시하면 안된다. 거기가 곧 언약궤가 좌정한 속죄소이다. 하나님의교회가 성경대로 한다면서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은 그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를 통해 이룬 대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지 않으면 그가 교회 안에 있더라도 기독교인은 아닌 것이다.◇성경에는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지니라”(출 22:18)고 했고,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서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고 했으며, “너는 …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라”(출 23:24)고 하는 등, 네 주변의 사신우상들을 파괴할 것을 명령한다. 그렇다고 지금 성경대로 한다면서 무당을 죽이고, 타종교의 우상물을 파괴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아니다. 그 말씀은 그 시대에 필요한 명령이었다. 이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모든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이 복음서와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이다. 이는 신학의 문제이다. 알라의 코란대로 한다면서 파괴와 살상을 일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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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0
  • 중세의 미신 ‘마녀사냥’
    ◇교회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중세의 미신 가운데 ‘마녀사냥’이 있다. 마녀사냥은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마녀재판’이란 이름아래 광범위하게 연출된 인간 확대이다. 당시 기독교 국가로 자처하던 영국·아일랜드·스코틀랜드·스페인·독일·프랑스·벨기에·네들란드·룩셈부르크·스칸디나비아에서 벌어진 이 종교재판은 전적으로 국가의 관장 아래 교회가 저지른 살인 행위이다. 마녀재판은 1497년부터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었던 1669년까지 무려 3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오늘날 어떤 학자도 이 형언할 수 없는 인간 확대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16세기 말 마녀사냥은 이미 유럽 전역에 걸쳐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557년에 툴루즈에서 40명이 화형당했고, 1582년에는 아비뇽에서 18명이 화형당했으며, 1581-1591년에 로렌 지방에서만 900명이 마녀로 몰려 형을 선고받았고, 1609년에는 400명이 화형당했다. 독일에서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반에 수천명이 화형당했다. 1631-1636년 사이 밤베르크에서 1,600명, 뷔르츠부르크에서 757명이 화형당했다. 여기에는 3-15세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죽임을 당한 여성만 최소한 10만명 이상에 이른다.◇영국에서는 ‘마녀사냥꾼 장군’으로 불린 매튜 홉킨스라는 변호사가 마녀를 찾아내는 전문가로 활동했다. 그는 마녀를 찾는 댓가로 한 명당 6파운드를 받았다. 이를 통해 한 해에 보통 1,000 파운드 이상을 벌었다. 홉킨스의 마녀 판별로 베리세인트에드먼즈라는 곳에서만 68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마녀로 의심되는 여인들의 옷을 벗기고 온몸을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면서 악마의 표지를 찾았다. 고통에 민감해진 부분이 바로 악마의 손이 닿은 곳이라고 판별했다. 또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을 연못에 던진 후 떠오르면 마녀로 판결했다. 홉킨스를 추종하던 무리들은 이제 마녀에 대한 전문가로 여겨져 이웃 도시로 불려다니며 마녀를 가려내는데 앞장 섰다. 마녀로 몰려 밀고되면 당국이 이를 은밀하게 심리했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고문 끝에 마녀로 판결되었다. 마녀의 재산은 몰수해 밀고자와 재판부가 반반씩 나누었다.◇홉킨스 무리들의 마녀 감별은 ‘골’이라고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한 사제가 설교단에서 홉킨스를 공격하면서 영국에서 마녀를 고문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비난받았다. 이로서 홉킨스는 갑자기 인기를 잃었고, 성난 군중이 그를 붙들어 연못에 쳐박자 은퇴하여 그동안 번 돈으로 먹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그해 결핵으로 죽었다. 홉킨스 무리의 마녀 감별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직업적 이단 감별사들의 행태와 너무 닮았다. 한국교회에도 4인방 또는 5인방으로 불리우는 직업적 이단 감별사들은 자신들이 이단 감별의 전문가로 자처하면서 그것으로 직업을 삼고, 한국교회로부터 수천수억원에 이르는 ‘이단대책비’를 거두어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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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3
  • 영혼 불멸설
    ◇지난주 한 교계단체가 개최한 신학포럼은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매우 흥미로운 토론 주제를 다루었다.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라는 주제가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적 기독교의 가르침은 영혼의 불멸 사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에서 왔으므로 그가 온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령’(네페쉬)임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역사적 기독교의 각종 신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성경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숨·호흡)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날 주제 발표를 한 신학자는 “인간의 죽음은 잠과 같고, 그 후의 상태는 모든 의식과 감각과 활동이 중단된 상태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분명하고 확실한데도, 그리스도교의 교리 역사에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이 매우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헬라 철학의 이원론과 몇몇 성경 구절에 대한 오해 때문”(마 10:28, 눅 16:19-31, 눅 23:43 등)이라고 지적하고, “사람의 사후에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불멸의 본질을 가진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있다가 부활 때에 육체와 만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는 영혼불멸설은 성경이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그는 사람이 죽은 후 육신과 영혼이 따로 분리돼 육신은 땅에서 썩고, 영혼은 낙원에 가 있다가 마지막 심판 때 천사장의 나팔 소리에 깨어난 육신과 영혼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잠을 자던 육신과 영혼이 함께 부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몸(전인)의 부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사를 보면, 초기 신조들은 모두 “몸이 다시 사는 것”(사도신경), “죽음에서 부활”(325년 니케아 신조), “죽은 이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들의 몸으로서의 부활”(450년 아다나시우스 신조)을 강조하고 있을 뿐, 영혼의 불멸에 대한 언급은 없다.◇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비로소 영혼 볼멸에 대한 신조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제1신앙고백에는 “영혼 불멸에 대하여”(제17조)라고 했고, 1561년 벨기에 신앙고백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땅에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이 전에 있었던 본래의 몸들과 연합될 것이다”(제37조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라고 했으며,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람이 죽은 이후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가 썩을 것이지민, 그의 영혼은 불멸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에게로 곧 바로 돌아간다”(눅 23:43, 전 12:7)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이 두 사상은 다같이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하지만, 그 개념은 많이 다르다. 따라서 이런 신학적 주제를 빌미로 네가 믿는 것은 틀렸고, 내가 믿는 것은 옳다거나, 너는 이단이고, 나는 정통이라는 식으로 적대시 하지 말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이 믿는 교파적 신앙적 전통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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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0
  • 한국교회의 정통과 전통을 위해
    본보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매체를 표방하고 나선지 어언 창간 25주년을 맞았다. 25년은 한 세대가 바뀌는 시간이다. 이 기간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본보가 추구해온 에큐메니칼은 오히려 퇴보하고, 연합과 일치는 분쟁과 분열로 치달았다. 교세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일탈은 교회 밖에서 조차 한국교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언론으로써 구실을 다하지 못한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급성장한 한국교회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배경에는 세속주의와 물량주의에 그 원인이 있지만, 분열과 분쟁을 가져온 실제적 상황에는 한줌도 안되는 세속적 이익을 노린 교회연합운동의 얼치기 직업군들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 명예욕에 찌든 대교단 지도자들의 이기주의가 맞물려 벌어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70~80년대 민주화와 평화통일 세력으로 화려한 이력을 가진 교회협(NCCK)은 왜 약화되었으며, 보수 기독교 세력을 대변하던 한기총은 왜 분열했는가? 그로인해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상징인 ‘부활절연합예배’마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지금 한국교회는 1천만명의 교인, 6만 개의 교회, 12만명의 목사 등 참으로 큰 종교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사회로부터 얕잡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연합과 일치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에큐메니칼 운동 없이 300개가 넘는 교단을 어떻게 한 목소리로 묶어 낼 수 있겠는가. 에큐메니칼은 교회는 ‘하나’라는 교회론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한 양보와 아량에 있다. 양보와 아량의 정신 없이 교단간 연합과 일치는 불가능하다. 본보는 지난 25년동안 그 편집방향과 논조가 한번도 바뀐 일이 없다. 오로지 사시대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라”는 원칙을 지켜왔다. 그럼에도 때때로 어떤 이는 왜곡되었다고 불평을 토하고, 또 어떤 이는 사법당국에 고소장을 제출하기도 하고, 그리고 어떤 이는 신문을 끊으라고 소리지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기사에 이해관계가 얽힌 독자가 받아들이는 감정이 달랐을 뿐이다. 본보의 편집방향은 보편적 한국교회의 유익에 있다.본보는 특정교단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이단옹호지’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본보의 기사 중 어느 부분이 이단을 옹호한 것인가를 제시해 보라는 요구에는 아무도 그 증거를 내어놓지는 못했다. 다만 그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한 개인이나 집단의 광고를 실었다거나, 그들의 집회를 소개했다 등 자신들의 마음에 안드는 단순보도를 문제 삼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특정교단의 일방적 결의만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교계언론으로서의 사명과 임무는 부정하는 교계 풍토에 때로는 실망하게 된다.그러나 본보는 이 걸음으로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기도와 적극적 후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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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2
  • 하박국의 호소
    ◇선지자 하박국은 일찌기 세상에 간악(奸惡)과 패역(悖逆)이 난무하며, 겁탈(劫奪)과 강포(强暴)가 횡행하는데도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라면서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느냐며 신랄히 항의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1:13)라며 따졌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뭐라고 할 말이 있는지 성루(城樓)에 올라 서서 들어보겠다고 비아냥 거렸다. ◇하박국이 본 이 불의한 세상은 인류사회에 언제나 있어왔다. 권력자의 착취, 힘있는 자의 횡포, 머리 좋은 자들의 사기, 세상은 온통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박국은 막상 여호와께서 이 불의한 자들을 처단하겠다고 일어서자, 깜짝 놀라 오히려 이대로 좋으니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마시라고 애원한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고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고…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른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시지 않고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번 진노하시면 세상이 모두 뒤집어지므로 오래 참으시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세상의 불의한 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악용하고 조롱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해 악(惡)을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가는 일어서신다. 그리고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하박국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이다.◇하박국은 결국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요한계시록은 이 사실을 더 명확히 하고 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그러므로 너무 세상을 한탄하지 말고,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22:11)고 선포한다.◇성경은 우리에게 인류사회에는 온갖 종교와 철학과 진리라는 것들이 있고, 부정과 불의와 패역과 부조리가 있지만, 세상 끝의 유일한 승리자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 만믈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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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9
  • 물신에 굴복당한 교회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초대 기독교는 로마사회의 ‘불법적 종교’로 규정되어 박해를 받았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여서 로마가 지배하는 여러 민족의 종교를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합법적 종교’인 유대교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기독교 역시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불법적 종교로 취급된 것이다. 로마의 황제는 그가 죽었건, 살아있건 간에 그가 곧 신(神)이었고 법(法)이었다. 그로인해 기독교는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고, 또 그 박해를 이기지 못해 믿음을 떠난 수많은 변절자를 배출했다. 그같은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까지 이어졌다. 기독교는 250년 간의 박해 끝에 드디어 로마사회의 하나의 ‘합법적 종교’로 인정받은 것이다.◇기독교는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392년이 되면 로마사회의 유일종교가 되어 로마의 ‘국교’(國敎)가 된다. 복음의 승리였다. 이젠 황제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한 사람의 신도일 뿐, 더이상 신(神)이 아니었다. 황제를 신도로 거느린 기독교는 이때부터 새로운 교회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모든 교회의 공의회는 황제의 이름으로 소집되고, 황제가 주재했다. 이제 기독교는 가톨릭(catholic, 보편적)이란 이름아래 황제의 교회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세 로마사회는 황제와 교황이라는 두 권력이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의 능력을 한껏 과시하며 세속과 종교를 통치했다.◇로마 안에 머무르던 기독교는 로마가 망한 후에 온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완성되어 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전세계에 기독교가 퍼지지 않은 곳은 없다. 다만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서슬퍼러던 로마의 박해 아래서도 복음에 대한 변절을 거부하며 끝내 황제도 굴복시킨 기독교가 현대사회에 이르러 물신(物神)에 굴복하고 있음을 본다. 교회의 강단은 복음이 변질된 ‘값싼 은혜’인 기복주의가 잠식하고, ‘돈이 있어야 교인노릇도 한다’는 지극히 타락한 세속주의가 횡행한다. 그래서 일찌기 예수님이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던가!(마 6장).◇기복(祈福)을 팔아 교회가 챙긴 것은 교인들의 삶의 축복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도 아니며, 오로지 목회자들의 윤택뿐이었다. 교회가 달콤한 기복을 팔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고, 목회자는 제사장처럼 행세하며, 교회의 예산이 늘어나 목회자의 생활비가 풍족해진다. 교회가 부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능력을 잃고 재빨리 무속화로 달려간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을 보라. 어디에서 사탄과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가. 지상에서 승리하지 못한 교회는 ‘승리자의 교회’(에클레시아 트라움판스), 즉 새예루살렘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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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6
  • 천국과 지옥 체험 간증
    ◇한국교계에서 상당한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던 한 중진 목회자가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다며 남긴 간증문이 보수주의 한국교회의 천국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슬하다. 그는 어느날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살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퇴원하여 집에서 임종을 맞았는데, 두 천사의 안내로 천국과 지옥을 보고 다시 회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른 천국에는 각자 개인이 사는 집들이 있었는데, 그 집은 땅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재료로 지어진다고 했다. 예배 드리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전도하는 시간, 헌금, 십일조, 교회 봉사하는 일 등을 많이 하면 크고 좋은 집이 지어지고, 적게 하면 작은 집이 지어지며, 안 하면 개인 집이 없고 공동주택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자기 집은 어디에 있는가 보고 싶어 천사를 따라 가 보았더니 짓다가 중단된 3층 집을 보여주어 크게 실망했는데, 집안에 들어가 보니 벽면에 상장 2대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18세 때 고아원에서 성탄절을 지키러 교회로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에게 잠바를 벗어준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금할 돈으로 붕어빵 두 개를 사드린 일이 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여 괘 큰 예배당도 짓고,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했으며, 의지할데 없는 과부들을 위해 교회 옆에 아파트도 지어 나누어 주는 등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는데도 그런 것에 대한 상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천사에게 왜 그런 것은 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네가 땅에서 국민훈장도 받고 상을 많이 받아서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 하더라는 것이다.◇이 간증은 한 마디로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천국이라는 관념에 투사(透射)한 것에 불과하다. 그 자신이 평소에 상상하던 천국의 모습을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려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무당들이 이승의 모든 삶을 저승에 투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의 처럼 산다고 믿는 것이다. 그의 체험 간증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천국의 집을 얻는 것을 공로사상에 둔다는 점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헌금과 십일조와 교회봉사, 이런 것은 모두 믿는 자의 기본생활일 뿐이다.◇또 그는 지옥에서 아우성치며 고통당하는 영혼들 가운데서 한국교회에서 이름있던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도 많이 보았다고 했다. 그들은 태양신을 강요하고, 교권과 명예를 위해 정상적인 신앙을 떠나 자기 유익을 구하고, 교회와 총회에서 싸움과 분열을 일으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찢고 부순 자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유황 불못에 온 것이라고 천사가 설명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장로교 목사인데 과연 장로교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성도의 견인’은 어디로 가고 그리스도의 피아래 있는 사람들을 지옥에서 보았다고 말하는가?◇천국과 지옥의 체험은 그 자신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타인에게 객관화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과 지옥은 비유로만 말씀하셨고, 천국을 체험한 사도 바울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고후 12:1-6). 개인의 천국과 지옥 체험에 대한 간증이 한국교회의 천국관을 왜곡시켜 비기독교적으로 이해될 소지가 많다. 유의해야 한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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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8
  • ‘씨알’과 ‘거룩한 씨’
    ◇함석헌은 “정신이나, 물질이나, 인생이나, 자연이나, 존재라는 존재, 또 그 존재들의 하는 변천이란 변천이 다 한 뜻인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 하나님의 뜻 없이는 한 물건, 한 일도 없다고 본다”고 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을 우주와 역사를 영원히 새로워지려는 운동으로 보고, 이 운동의 주체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 즉 씨알이라고 했다. 유영모나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얼’을 살려야 참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몸에서 맘을 살리고 맘에서 얼을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씨알 정신은 몸을 위한 물질보다 ‘뜻’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인간 생명의 기본이 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주체가 되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함석헌은 또 “우주안의 생명은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이지만, 그 자기 스스로 함이란 영원한 뜻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와 근거를 갖게 된다... 시시각각으로 낡아가는 세계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원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지만 시시각각으로 사랑의 손을 아낌없이 대신한다. 이리하여 영원히 새로워지는 생명의 역사바퀴는 구른다”(새 삶의 길, 1959년)고 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곧 ‘씨알’의 정신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씨알 운동은 우주 전체의 뜻인 하나님과 관련을 벗어나 추구되지 않는다.◇이사야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마음이 둔한 백성들로 인해 성읍들은 황폐하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가 전폐되는’ 시대가 도래하여,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사 6:13)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던 인간들이 전쟁과 환란으로 모두 죽거나 끌려가고 보잘 것 없이 그 땅에 남아 있던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돋아 ‘거룩한 씨’가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그러면 ‘씨알’은 누구이며, ‘거룩한 씨’는 누구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니다. 인권 차원에서는 인간은 모두 같은 존재이지만, 신앙과 철학의 문제에 가면 각기 다른 존재가 된다. 몸은 맘을 위해 필요하고 맘은 얼을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몸만 중시해 세속적 물질주의에 빠져 있다. 과학과 현대주의가 낳은 병폐이다. 그로인해 종교는 초자연적 유신론으로 치닫고 과학과 철학은 무신론적 자연주의로 매몰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한 ‘씨알’과 ‘거룩한 씨’가 요청된다. 여기에 부름받은 소명자가 필요한 것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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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2
  • 기복주의에 잠식당한 설교
    ◇초기 기독교의 설교는 ‘나사렛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사도들은 이를 증거하기 위해 예수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을 증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예수의 생애는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마리아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비로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선재(先在)한 존재로서,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 박해 속에서도 초대교회의 설교였다. 여기에는 어떤 개인의 경험이나 철학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더우기 성령의 역사와 인도가 강조될 뿐, 기복(祈福)이 개재될 공간은 없었다.◇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사회의 하나의 합법적 종교로서 자격을 얻고, 나아가 로마의 국교화 됨으로써, 로마사회 내에 있는 온갖 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관습들이 기독교에 습합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강조되고, 성경해석과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설교도 변질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설교의 통일성의 필요를 느끼고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전체 공의회를 열고 교리를 통일했다. 그것을 우리는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부른다. 기독교는 325년 니케아회의부터 787년 니케아회의까지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등을 통일하고, 통일성을 강조했다. 교회의 모든 행사는 통일된 의전(儀典)에 따랐다.◇중세교회의 설교에서 통일성이 강조되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전에 따른 교회의 가르침은 획일화 되고, 이에대해 다른 소리를 내는 자는 모두 이단(異端)으로 몰린 것이다. 심지어 신학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는 성경을 읽는 것까지 금지되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이단설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종교개혁은 이 통일성만으로는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할 수 없다며, 다양성을 역설한 운동이다. 이제 설교는 획일화를 벗어나 다양화 되었다. 그러자 여기에도 부작용이 나타났다. 설교에 개인의 경험이나 온갖 철학이 개재되어 제 멋대로 성경이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기독교를 부정하는 또다른 이단들이 나타났다.◇현대 기독교 개신교파 가운데는 많은 교파가 의전이 따로 없다. 이 주간에 설교자가 어떤 성경 본문을 읽고, 어떤 주제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지침도 없다. 설교자가 멋대로 본문을 정하고 설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경우 과연 그것이 설교인지, 만담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심지어 무당의 점괘인지, 철학관의 예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온갖 잡소리가 석여 나온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복음’으로 소시민의 종교적 심성에 야합하려는 심각한 기복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기복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바로 서려면 설교에서 기복주의를 몰아내야 한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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