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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출산시대 극복 위한 한국교회의 사명-장헌일 원장
    우리나라 출산율은 올해 추정치 기준 1.19명으로 세계 최하위권으로 나타났다. 미국 중앙정보국 월드팩트북이 합계출산율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는 224개국 중 219위를 기록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에 저출산·고령사회의 프레임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사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경고음이 울린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1997년부터 출산율이 1.45명으로 떨어져 초저출산국에 진입했고, 결국 2001년에 1.3명 밑으로 내려간 이후 13년째 1.3명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에 이어 내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세대’란 말이 등장하더니 ‘꿈’과 ‘희망’까지 놓아버린 ‘7포세대’까지 이른 현 세대를 반영하는 슬픈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중 가장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저출산, 출산기피 현상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결혼 시기가 점차 늦어지고 있고, 심지어 결혼 이후에도 육아비용 부담과 자녀의 교육문제 등의 이유로 저출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저출산 문제 극복을 위한 ‘한국교회와 함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출산장려’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방안을 제언한다.먼저 종교시설을 활용한 어린이집 활성화 대책이다. 2014년부터 새로 시행되는 출산장려지원제도에서 국·공립어린이집 105곳을 신설하기로 결정 되었다. 또한 연 평균 150개씩 늘려 2017년까지 600곳을 확충한다고 한다. 전체 보육 아동 중 직장, 국공립, 공공형 어린이집 이용 아동 비율을 작년 26%에서 2017년에 30% 이상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종교시설 활용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다음은 종교적 사회봉사 차원의 접근 방법을 통한 비영리적 운영모델이 필요하다. 최근 잦아지고 있는 보육사고 발생으로 낮은 위탁 신뢰도를 극복하여, 양질의 보육을 위해 책임과 헌신, 그리고 종교적 사명감으로 높은 위탁신뢰도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또한 비영리적 운영 접근으로 육아에 대한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 시켜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교회가 위탁 관리하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려면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교회 내부의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단기간 내 양질의 어린이집 개설 증대가 가능하고 우수한 보육환경과 낮은 보육료로 양질의 어린이집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부모의 선택권 확대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직장 어린이집 개설 지원과 같은 정부차원의 제도적 개설지원이 요구된다. 1층 시설만 인허가 가능한 현행 제도에 대해 안전을 갖춘 다면 2층도 가능하도록 규제 개선이 필요하. 또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중 하나로 국내 입양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 2012년 8월, 입양가족 허가제로 변경되며 입양신청수는 23% 감소했다. 입양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혼혈·연장아동은 국내입양이 어려운 상황이. 입양에 대한 편견(입양가정, 장애·혼혈·연장아동입양, 절차의 복잡함 등)을 개선하는 활동을 통해 다문화, 장애인 등이 연계된 사회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해 나가야 한다.먼저 지역별 입양 네트워크 구성입니다. 입양 가족들간의 정보교류 및 멘토 역할과 교회 유휴시설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여 입양공동체를 형성한다. 특히 TV와 뉴미디어를 통한 공익 광고와 함께 TV 스팟 광고, APP, SNS, 홈페이지 배너광고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입양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정책시행과 함께 한국교회가 범교단적으로 연합하여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상설기구로 생명존중운동본부를 설치하여야 한다.특히 청소년생명존중 기독NGO 연대의 조직화(네트워크)를 통해 청소년 자살 방지를 위한 각 교단 내 기독 NGO를 연대하여 공동정책수립과 대정부, 대국회와 정책 사업을 공유하여 전국화 시키고 확산해 나가야 한다.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공공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여, 생명존중운동과 함께 저출산·고령사회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도록 모든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가는 일이다. -장헌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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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5-09-03
  • 동성애 어디까지 가나? -유 만 석 목사
    지난 6월 서울시청 앞에서는 동성애 퀴어축제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문제점을 제기해도 서울시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수락한 것이다. 지난해 신촌에서의 경우를 보면, 반나체에 가까운 동성애자들의 거리 행진이, 뜻 있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음란공연’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를 서울시에서는 ‘문화축제’로 규정하여 방임한 것이다. 이런 짓을 일반인들이 거리에서 행했다면, 반드시 법의 규제를 받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성애자들은 한국의 유력한 지자체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동성애를 지지하는 미국 및 서구의 외국대사 17명이 동성애 퀴어축제 퍼레이드 현장에 나와서 동성애자들을 지지했다고 한다. 과거 이런 나라들은 동성애를 철저히 죄악시 했었고, 심지어 ‘정신병목록’에 넣었던 나라들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남의 나라에까지 동성애를 허용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기존의 윤리와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문화 침탈’이자, 우리나라의 윤리규범에 대한 ‘내정간섭’이다. 그러고 보면, 동성애는 단순히 소수자가 아닌 국제적으로 네트-웍을 구성한, 막강한 권력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애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시작되었다. 지지난 해(2013) 동성 결혼식 행위를 한, 김 모 씨와 또 다른 김 모 씨는 서대문 구청에 ‘혼인신고’를 했지만, 구청이 이를 법적 근거가 없다고 거절하자, 이를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불복신청서>를 내어 법원은 비송사건(내용을 비공개)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서대문구청이 관련법 헌법 제36조 제1항의 양성평등원칙과 민법 제800조에서부터 제843조까지의 ‘혼인관련 법조항’에 의해, 거부한 것을 법원이 심리하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분명 헌법 제36조 제1항에서는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兩性)의 평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그런가하면 지난 6월에는 미국의 대법원이 지난 40년간 미국 내에서 동성결혼 문제의 논쟁을 끝내는, ‘동성결혼 합법’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던, 대법관 한 사람의 결정이 결국 미국 전체 국민들의 양심의 소리까지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동성애를 합법화시켜, 신앙과 진리에 조종(弔鐘)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법관 한 사람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지난 달 1일부터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기준법’을 시행하여 남녀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각 지자체에게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라는 것을 기화로, 일부 지자체에서는 ‘동성애 항목’도 슬쩍 끼워 넣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공무원들까지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시대가 된 것인가? 기막힐 일은 또 있었다. 지난 4일, 82세의 나이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우리나라의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만나면서, 한국의 소수자(동성애)보호를 강조했다고 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한국이 변화될 것이란 전망으로 한국을 압박하였다. 일련의 이런 사건들은 왜 일어나는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다. 지난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동성애 단체가 청소년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진정 사건에 대해서, ‘동성애 사이트는 청소년유해매체 아니다’라는 권고를 하게 된다. 사실상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않는 성관계의 보루(堡壘)를 국가 기관이 깬 것이다. 그 이후 동성애 사이트와 카페는 청소년들의 ‘성적 일탈 창구’가 되었고, 호기심 많은 수많은 청소년들을 동성애에 빠지게 하였다. 지금은 동성애자 온라인 커뮤니티가 동성 성매매를 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여, 우리 사회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동성애 사이트와 카페를 속히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해야 한다. 또 국가인권위는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2011년 ‘언론보도준칙’을 발표해, 사실상 언론들이 동성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언론 통제’ 역할을 한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결코, ‘성소수자’나 ‘성정체성’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성의 자유와 방종은 결국은 인류의 파국으로 몰아 갈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의 경계가 더욱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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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8
  • 광복 70년과 분단 70년에 부쳐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일제로부터의 광복이 이루어진지 분단 70년을 맞고 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냉전에 의한 이념 분쟁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은 수 천 갈래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분열의 전쟁터가 되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거주하며 신탁과 반탁이 민족의 새로운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신탁 통치안을, 스탈린은 즉시 독립안을 제시하였다. 투루먼 등장 이후 미소 강대국은 상호 각축을 통하여 마침내 포츠담 선언에서는 38선 획정을 하고 소련의 참전과 함께 38선이 확정되었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그렇게도 원하던 통일 조국은 허리가 잘리는 분단으로 고착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에서의 하지 통치의 미군정 3년사는 일제 36년사의 식민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속과 식민의 통치가 시작 되는 기간이었다. 미국의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적국에 진주한 점령군으로서의 행태를 보였고 “남한 민중각위에게 고함” 이라는 하지의 포고문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40여 년의 굴욕과 치욕, 억압과 수탈로부터의 평화 유지보다는 한반도를 무참히 짓밟고 지배했던 일본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여기에는 친일과 매국으로 나라를 팔고 민족과 민중을 착취한 친일 족속과 민족 탈취의 세력들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체제 유지를 위한 주춧돌로 세우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은 일제의 업적 통치의 40여년과 함께 분단국가의 성립과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를 세움으로 분단의 영구화는 물론 미국의 종속과 식민의 세상이 다시 시작 되게 된 것이다. 하나의 통일 국가를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갖은 고초를 모두 겪은 진정한 민족 지도자는 모두 죽거나 이념 전재의 희생물이 되고 친일파들과 자기 출세와 부귀영화, 아부 아첨꾼들에 의하여 반쪽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북의 해방군으로 온 소련군은 철수하고 반쪽 국가인 공산체제가 세워지고, 민주의 이름으로 미군정의 종속 하에 세워진 남한의 반쪽국가는 민족과 민중을 팔아먹은 친일파와 그 친일파를 앞세워 동북아의 이권과 세계 패권을 지속시키기 위한 미군정 통치자인 미국의 권력과 하지에 의하여 진정한 민주와 자주를 이룰 수 없는 통한의 오늘을 맞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남북이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각의 분단 70년의 길고도 지루한 갈등과 충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살아 온 과정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수많은 민중의 피를 뿌려서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민주와 자주의 거친 역사의 광야 한복판에서 통일의 길은 요원한 것만 같다. 남은 “북진통일” 북은 “적화 통일” 이라는 악한 통일교육의 틀을 벗고 서로가 함께 사는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1953 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4조 60 항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보장을 위하여 3개월 내에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100만이 넘는 병력과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남은 미국의 핵우산과 생화학 무기를 품은 채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전쟁 상태로 살고 있다. 분단 55 년 만에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고 6.15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평화협정의 단초가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남북은 평화의 길 보다는 죽음이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이 왕성하다. 우리의 해방과 광복은 여전히 더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든 억압과 신식민지에 살고 있다. 자주와 민주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미래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과 암흑의 길로 파멸될 수 있다. 남북한 모두가 함께 사는 평화협정을 이루고 지속적인 남과 교류를 통하여 자유롭게 왕래하며 사는 남북의 통로가 활짝 열려야 한다. 친일과 매국의 길을 버리고, 어떤 친 외세들로부터 벗어나서 남북의 자주 민족 주체적 평화 통일로 나아 갈 때만 우리의 진정한 광복은 성취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8-14
  • 표절 문제로 시끄러운 한국 문단-임영천목사
    최근 한국 문단이 소위 표절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란 장편소설로 국내는 물론, 36개국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널리 그 이름을 날린 신경숙 작가가 요즘 작품 표절 논란의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맨 처음에 이응준 작가가 신 작가의 단편소설 <전설>(1994)에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단편소설 <우국> 표절 혐의가 있다고 지적하고 난 뒤, 이 표절 논란은 일파만파로 크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신경숙뿐만 아니라 이인화 편혜영 이승우 황석영… 등 한국의 모모한 작가들의 이름까지 이 표절 혐의와 연관된 최근의 논의에서 공공연히 노출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응준이 신 작가의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 글이 발표된 지면이 어지간한 사람은 그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듯한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였다는 데 우리는 다소 놀랐다. 좀 우스갯말로 표현해 보자면, 워싱턴포스트라면 몰라도 허핑턴포스트를 어찌 알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아니었지만 허핑턴포스트에 실렸다고 하더라도 그 파급효과가 너무 커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응준은 이를 위해 무려 8년 전부터 문단에 발을 끊었다고 술회하였다. 일종의 문단생활 포기선언을 했다는 것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자기는 “표절 문제 제기 글을 문예지에 실어보려고 했지만 그 가능성이 제로라는 사실 앞에서 새삼 절망했다.”고 하였다. 그 결과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한 온라인 매체에 그 글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그 글을 수정하는 데도 한 달 반의 시간이 걸렸고, 법률적 검토도 거쳤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변호사 선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이런 그의 굳건한 의지와 자세를 보면, 그 글의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자신은 예상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글에 대한 법률적 검토는 물론 변호사 선임까지 마쳤노라고 했는데, 정작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이 신 작가를 사직당국에 고발하자 그는 그 자신의 자세를 이제와는 달리 180도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는 문단의 일은 문인들끼리 해결하도록 해야지 사법 당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기는 약자라서 누군가 자기를 법적으로 압박해 올 것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서도, 그러나 그 자신은 궁지에 몰린 작가를 법에 의해 재단하는 일에는 극구 반대했던 것이다. 혹 그의 이런 자세를 이중적 처신이 아니냐고 비판할는지 몰라도, 이 일은 전혀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겠다. 사회?정치적 약자가 평소에 타인을 옹호하는 삶의 자세를 지녀왔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보호책을 강구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의 법률적 검토와 변호사 선임까지 해 두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런데 신 작가는 이번뿐만이 아니고 과거에도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지 않았다. 단편소설 <딸기밭>, 단편소설 <작별인사>,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에서 표절 의혹들을 받아왔다. 금번 이응준의 문제제기 이후 자신의 처신이 매우 난처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우유부단한 자세를 취한 것이 불행의 불씨를 더욱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이번의 표절 논의에서 박철화, 정문순, 이명원, 고명철 등의 평론가들이 매파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셈이고, 논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아리랑>의 조정래 작가가 그 매파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 되었다. 그는, 신 작가 잘못의 첫째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표절을 했다는 점, 둘째는 발각되었을 때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 즉시 사과하지 않은 점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그의 표절이 대여섯 번일 정도로 상습적이 돼버렸다는 것이라 했고, 넷째는 하필이면 왜 일본 작가의 작품을 그리 했느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표절 작품 <우국>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일제의 군국주의를 옹호한 극우 작가였다는 사실을 시사(示唆)했던 것이다. 구약 성서 가운데 모세의 십계명 중 제8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되어있고, 제10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돼 있다. 이를 문인들에게 돌려 표현한다면 “글 도적질(표절)하지 말며, 아예, 남(네 이웃)의 글을 탐내지도 말라”고 바꿔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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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4
  • ‘동성결혼’과 종말을 향한 치달음-이 광 호 목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가 처한 시대를 정확하게 읽고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리석은 자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기를 좋아하며, 그것이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인 양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와 같은 태도가 제 무덤을 파는 위태로운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에 있지 않았던 이상한 분위기에 빠져 예사롭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죄에 빠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도덕을 소유하고 있었다. 즉 누가 봐도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객관성 있는 윤리적인 척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지 불과 십 수 년이 지나지 않아 도덕적인 척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지난 세기 말인 1960년대 경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인해 그와 같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현재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영역이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이다. 동성애가 고대로부터 있어온 죄악이었다면 동성결혼이란 우리 시대에 생겨난 신개념으로써 원리상 그 용어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는 그에 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동성결혼은 이미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 합법화된 상태이지만, 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세 유럽에서 신앙의 박해가 일어날 때 참된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삭막한 땅인 신대륙으로 이주해갔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을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며, 화폐에는 ‘IN GOD WE TRUST’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불과 며칠 전인 지난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선언했고, 대통령 오바마는 그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거기다가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도 그에 적극 합세했다. 그들은 시대적 형편과 인권을 명분으로 앞세워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게 되자 처세술에 능한 자들은 앞 다투어 그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지금도 전체 인류를 외면한 채 세상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어가는 무책임한 행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들의 판단과 행동은 결코 세계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온 세계와 순박한 사람들을 악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시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혼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은 결국 가정을 파괴하는 양상을 몰고 오게 된다. 앞으로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혹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부부관계를 맺는 복수 관계의 결혼마저도 허용될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장차 상상을 초월한 형태의 결혼이 허용될 것이며 인간들의 가정은 치명적인 위기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인권을 앞세워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세계 지도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만일 저들이 진심으로 동성결혼을 수용한다면 저들의 자식이나 손자, 손녀가 동성결혼을 하려고 할 때 기쁜 마음으로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동성결혼은 지지하면서 자기 자식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세술에 의한 위선적인 반응 이상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는 어떤 전염병보다도 무서운 기능을 하고 있다. 이미 터진 물줄기를 다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는 안타까운 교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동성애, 동성결혼 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그에 맞서 대항하며 세상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그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지상 교회는 급속히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복음을 상속받게 될 다음 세대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세계 지도자 행세를 하는 자들에 의해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희생적인 평화 운동을 펼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어긋난 주장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정신 차려 저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자! -이 광 호 목사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7-09
  • 동성애 반대, 개인기가 아니라 팀웍이다-이 효 상 목사
    최근 한 포털사의 여론 조사에서 보면 네티즌의 96%가 ‘국민의 정서와 맞지 않다’며, “퀴어축제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국민들 대다수가 이미 동성애를 우려하고, 동성애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게 통계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국민들의 정서는 이번 퀴어축제 앞에서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법원은 반나체의 음란한 행위를 하는 동성애 거리 퍼레이드를 인정했고, 서울시는 오는 28일 서울시민들이 자유로이 이용하는 서울 광장을 퍼레이드 장소로 허락했다. 이런 와중에 한국교회의 대표 연합기관 및 단체들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제2의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려는 퀴어축제를 막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미래목회포럼, 한국교회언론회 등 5개 단체는 6월 1일 ‘한국교회동성애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최고 5개 기관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지난 한국교회 과거에 비춰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이는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분열과 반목만을 반복하던 한국교회가 동성애라는 비성경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 한 목소리로 반대를 외치는 것은 정치적 이해 관계나 자기 단체의 이익을 떠나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의 건강을 우려한 가장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는 지금의 기회를 결코 허비해서는 안된다. 5개 단체들의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하나된 모습을 보여야 하며, 이번 연합을 계기로 향후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각 단체들에서 파견한 현장 실무자들이 공통된 목표 앞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책회의를 하며, 쌓은 경험들은 차후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큰 동력이 될 것이기에 더욱 큰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성경의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언 24장 6절)”는 말씀처럼 열정만으로 전투에서 승리할지 모르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략이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협심과 더불어 전략이 필요하고 전문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한국교회동성애책위원회는 동성애 및 퀴어축제 반대캠페인, 이론화작업의 일환으로 △‘동성애는 성왜곡이요, 중독이다’ 라는 논문집 발간 △탈동성애 지향자를 위한 상담, 보호와 상담사 양성 △교과서 동성애 조장 및 삭제나 폐기유도 △국가인권위와 기자협회가 체결한 인권보도준칙 삭제 △질병관리협회의 2012년 이후 에이즈발생 원인과 대책, 현황 공개청구 △동성결혼·동거법 대체결혼보호법제정(간통법 폐지이후) 저지 △동성애 지지의원 공개 질의 및 낙선운동 전개 △지방자치조례폐지 및 위헌소송 제기 등의 사역방향을 정하고 추진하게 된다. 이는 이번 연합을 한국교회의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 프로젝트로 보고, 꾸준한 대처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아직도 동성애를 조장하는 일부 세력들은 교회와 강단(講壇)에서 동성애의 문제점을 가르치는 것도 원천봉쇄하는 ‘차별금지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에 심대한 타격은 물론,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동성애는 우리 사회적 전통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성경적 가르침과 교훈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성애조장반대운동의 전개는 우리 자녀들의 건강한 미래를 지키기 위한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건강한 가정과 건전한 사회를 이루기 원하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동성애조장 반대운동에 나서야 한다.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면 할 수 있다. 이제는 개인기가 아니라 팀웍이다. 한국교회, 분열과 갈등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세속과 역사의 현장에서 비겁하게 그 책임을 회피하는 지도자들로도 미래는 없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에 새로운 지도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국교회는 연합기관 지도자를 하나된 모습으로 교회가 대사회적 지도력과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얼마 전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보았듯이 한국교회가 연합기관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는 상황에서 더욱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하나되는 모습은 절실하게 요청되어 진다.한국교회는 복음 선교 130년 세월동안 나라와 민족과 함께 해왔다. 6.25전쟁 65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면 북한의 남침을 한국교회가 맞써 공산화를 막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신앙의 자유를 지켜내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교회는 또 다시 동성애 조장과 확산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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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30
  • 그 사건과 예언자의 목소리-임 영 천 목사
    지난달 하순(5. 24)에 향년 80세의 백경자씨가 한(恨)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분의 존함을 미처 알지 못하는 이는 혹시 이분이 노령에 이른 어떤 일제(日帝)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중의 한 분이 아닌가 짐작해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분은 소위 그 위안부 여성의 삶 못지않은,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간 한국의 여성이기도 하였다.이분은 1973년 10월 19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강압적인 수사에 의해 이른바 고문치사 당한 고 최종길 서울대 법학과 교수의 부인이었다. 당시 42세의, 앞길이 구만리 같았던 젊은 엘리트 교수를 남편으로 두고 있었던 이분에게 남편인 최 교수의 죽음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사흘 전인 16일 중정의 수사협조 요청에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던 남편이 그 사흘 뒤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버렸으니, 어찌 이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있었겠는가.몇 달 뒤 다가올 올해 10월 19일은 최 교수 서거 42주기의 날이다. 42세였던 남편이 사망한 뒤 그 곱빼기 햇수(42주)가 되는 그날을 차마 살아서(눈뜨고) 맞을 수는 없었든지 그분은 이 한 많은 세상을 표표히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통탄해 마지않았던 모든 이들이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박근혜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소위 과거사 문제 해결에 힘을 쏟은 결과 과거 사건들이 많이 해결(해명)되기도 한 게 사실이다. 그 가장 큰 것이 아마도 인혁당 사건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해명 결과, 실로 8명의 목숨을 재판 직후 전격 처형해버리고 만 이 사건이 실은 날조된 것이었다는 공식 발표에 임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무슨 간첩 사건이니, 또는 무슨 간첩단 사건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거의?) 날조된 것이었다는 재판 결과 발표에 역시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음이 또한 사실이다. 최종길 교수 사건도 ‘그가 간첩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살했다’는 식으로 처음 발표되었던 내용이 그 후의 조사에 의해 그 사건 자체가 날조된 것이었다는 결과 발표에 우리는 분노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민사소송에 의해 몇 푼의 돈이나 쥐어주고 마는 배상 판결로 끝나버리고, 형사 재판은 시효가 끝났다는 것을 구실로 아예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국가의 공신력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는 국민들이 참으로 가련하기만 할 뿐이다.이스라엘의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이 떠오른다.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미가… 등 그 이름만 들어도 위정자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들은 주저함 없이 제왕들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그들의 예언은 당연히 길예연(吉預言)이 아닌 흉예언(兇預言)이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가 아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와 같은 직언 앞에서 속으로 떨지 않을 제왕들이 있었겠는가. 만일 그들이 오늘의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앞서 말한 그런 흉측한 일들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당연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제왕과 그 측근 권부 인사들에게 질타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언이 발(發)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흉예언일 수밖에 없으리라.미국의 신학자 월터 부르지만은 그의 이름난 저서 <예언자적 상상력> 속에서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한 나라의 바람직한 정치와 경제를 이렇게 바라보았다. ‘억압의 정치 아닌 정의의 정치’, ‘풍요의 경제가 아닌 평등의 경제’, 이렇게 보았다. 정의(正義)의 정치가 이뤄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억압의 정치가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의를 하수같이, 공의를 강물과 같이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그 단적인 예이다.풍요의 경제가 백성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경제라는 것이다. 이 평등의 경제를 지향하지 않고 풍요의 경제만을 추구할 때 모든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풍요의 경제는 결국 억압의 정치와 손잡게 되는 법이다. 불평등을 호소하는 백성들의 입을 봉쇄하고, 억압의 정치에 반기를 드는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 인혁당 사건도 날조하고 무슨 간첩단 사건도 조작하고 또 긴급조치법도 만들고 하다가 결국은 무너져 내린 정권이 아니었던가. 흉예언을 발하는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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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9
  •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판단 오류와 교회의 정당한 대응/이 광 호 목사
    이제 며칠 후면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에서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가 열린다. 이는 수년 전부터 열려왔는데 해마다 그 참가자 수가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자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지지하는 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라 해도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직접 그와 같은 퇴폐행위를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그들을 비판하지 말자는 자들도 있다. 물론 그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들도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멸하는 무서운 죄라고 지적하는 성도들도 있다, 우리 시대에는 기독교에서마저 동성애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성이 점차 커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동성애를 죄라고 지적하면 기독교를 앞세우는 옹호자들로부터 상당한 비난을 받게 된다.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 자들이 도리어 신앙이 없는 자로 간주되는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인 동성애자들을 위하는 듯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왜곡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은 겉보기에 저들에 대한 사랑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와 같은 주장은 그들을 더욱 심각한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동성애자들은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신앙을 가진 성숙한 성도들은 저들의 죄를 명확히 지적하고 그 자리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동성애 이외의 다른 죄를 범하게 될 경우에도 그것을 죄라고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 자에게 그것이 괜찮다고 격려한다면 그로 하여금 더욱 깊은 죄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된다. 우리 시대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인권을 앞세워 동성애를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이 많이 있다. 저들의 죄를 일깨우고 그로부터 돌이키도록 도와주어야 할 자들이 어정쩡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저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죄악의 수렁으로 몰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성애에 대한 현대 한국사회의 입장은 불과 15년 전과 비교해볼 때 완전히 변해 있다. 2000년 당시 유명 연예인 가운데 한 사람이 동애자로서 커밍아웃을 했을 때 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동성애가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사악한 행위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공영방송에서는 그의 출연을 전면 금지했으며 방송국의 그런 처사를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 자들은 거의 없었다. 이는 지금 30대 중반이 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판단과 반동성애 입장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것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지금은 동성애가 무서운 죄라는 사실조차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마저 그와 같은 발언을 하면 벌떼처럼 덤벼드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복음이 불과 몇 년을 사이에 두고 그처럼 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15년 전에는 하나님이 경멸하는 악한 죄로 인식되던 것이 15년 지난 후에는 동일한 행위가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즉 성경의 진리는 시대적 환경이나 세태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수천 년 전이나 수백 년 전에 죄로 규정된 것이라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죄가 된다. 인간들이 아무리 죄가 아니라고 부르짖는다 해도 그것은 죄일 수밖에 없다. 혼탁한 시대에 존재하는 지상 교회는 세상의 시류에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죄를 보고 죄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즉 세상의 눈치를 보고 우왕좌왕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세상은 점차 교회를 포위하여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현대 교회는 그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악한 세상의 편에 설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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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봄철 속의 이 잔인한 달들 -임 영 천 목사
    서양의 어느 시인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그 이름난 시인이 한국의 4월까지를 염두에 두고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의 결과는 바로 적중된 표현인 것 같다. 적어도 지난해(2014)부터는 더욱더 그러하다는 판단이 앞서는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60년 4월에 이른바 4·19혁명이 일어나 많은 젊은이(특히 대학생)들이 산화했었다. 정치 일선의 실권자들이 물러나고 새 정부가 들어섰으며 새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고작 1년 만에 군부 세력에 의해 소위(所謂)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4·19의 의의는 역사 속에 점차 묻혀져 갔다. 그러나 T.S.엘리엇이 말한바 “4월은 잔인한 달”이란 말속에는 다분히 역설적(逆說的)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4월은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뒤흔든다.”란 유명한 시구에서 볼 때 그 복잡 미묘한 뜻이 독자들에게 뚜렷이 전달된다. 그(시인)에 의하면 4월이 단순히 잔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시들어버린 뿌리에서 생명체를 일으켜 세울 봄비를 내리는 계절이라면 4월은 ‘잔인’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의미만을 지닌 계절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4·19 의거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역시 대단한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정치적으로 이미 죽어버린 땅(死地,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키워보려고 젊은이들이 일으킨 일대 거사였고 이로 인해 이 땅에 일시적으로나마 시들어버린 뿌리에서 무언가 생명이 꿈틀거리게 봄비를 내려 준 의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무수한 젊은이들이 죽고 또 다쳤다면 이런 동력을 제공해 준 4월이 잔인한 달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그런데 지난해(甲午年)에 일어난 4·16 세월호침몰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 4월이란 계절을 우리나라에서 더욱 잔인한 달로 인식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판단된다. 예부터 무슨 세계7대불가사의란 표현이 자주 사용돼 왔는데, 이 ‘세계’란 말 대신 적어도 ‘한국’이란 말로 바꾸어 사용할만한 거리는 될 수 있는 게 이 사건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세월호 사건은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것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하다.”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사건이었기에 정상적인 인간의 머리로는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이 이상하고 야릇한 사건이었다는 말인가. 이 ‘불가사의한 일’의 실체를 풀어야 할 책무가 ‘흐르는 세월의 배’ 위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얼마 전에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의 재가를 미루고 즉각 재협의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 성명의 내용 가운데 그 시행령이 “사실상 조사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공무원이 특조위의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 대문이 나오는데,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특조위의 이 시행령이 불가사의해도 보통 불가사의한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닌가. 1961년 5월16일에 소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후에 이 세력은 피의자 8명 처형의 이른바 인혁당 재판이란 극도의 잔인한 사건까지 날조해 가면서 3선 개헌에 득의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했지만 끝내 역사의 엄중한 심판에 의해 그 세력이 소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이의 “나는 잔당이 아니고 본당이다.”라고 큰소리쳤던 것처럼 요즘 그것의 잔당 아닌 본당 세력이 재집권에 진입하면서 한국의 정치적 불운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4월은 잔인한 달에서 이제 5월도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성싶은 일이 이어져 가는 편이다.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80년 5월18일에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민중항쟁은 그 하루 전 날 있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학살 만행 때문에 촉발된 것이어서, 그 책임을 통감한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 이미 보상 절차까지 거의 끝나가는 현 시점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에 의해 북한 공작원 개입 운운의 망발이 발해지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라고 하겠다.4·16 세월호 사건, 4·19 의거 사건, 5·16 군사 쿠데타,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등은 한국의 잔인한 집권 세력들과 어떻게든 관련된 사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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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8
  • 죽었으나 산 자의 오월은 진동한다-홍 성 표 목사
    지금부터 35년전 오월 18일 광주는 억압과 폭정에 맞서 불법 신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오직 하나 뿐인 생명을 내걸고 싸웠다. 박정희의 종말과 함께 그의 가지인 전두환의 권력욕과 파시즘적 지배 욕망이 광주의 하늘과 땅을 피빛으로 물들게 한 것이다. 필자는 그 오월의 한 해 전 79년에 기장 전국청년광주대회에 참석하여 박정희의 18년 절대 권력의 통치에 저항하는 기도를 드리며 광주의 시내 금남로를 거닐었다. 일제의 청산을 묻고 반토막의 나라 분단의 땅에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민족의 독립과 투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피의 갑을 외면한 채 권력의 욕정에 빠져 4.19의 맨 가슴에 무너지고, 무능한 민주당 정권을 짓밟고 나선 박정희의 군화 발에 민족과 민중의 꽃은 무참히도 폭압에 스러져 갔다. 그 어둠과 죽음의 가지인 신군부 전두환의 공중권세가 민주를 부르짖는 하늘의 소리를 총과 탱크와 무자비한 학살과 살육으로 붉은 선혈로 광주를 덮은 것이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의 세계가 무너진 지 몇 성상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분단의 무거운 벽이 둘러 선 이 땅에는 반도의 냉전으로 악한 권력과 탐욕을 유지 하고 있다.신군부가 권좌에서 형식상 물러가고 87년의 신군부 끄나풀인 거짓 보통의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한 87년 6.29 그날의 일이 꽤 오래 지나갔지만, 여전히 부정과 간교로 부활한 악의 세력은 민족과 민중의 눈과 귀를 속이며 조중동 더러운 언론과 아부와 아첨을 떠는 존재들과 함께 보수의 찌꺼기의 이름으로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시키고 호도하며 민중의 심장과 가슴을 도려내는 사기극을 연출하고 있다. 밥벌이에 여념 없는 어용 지식인들과 비굴하고 비열한 반역사적 종교인들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역사의 어둠을 깊이 하고 있다. 오월의 피는 아직도 식지 않고 뜨겁게 끓고 있는데 허리 잘린 반도의 몸은 타 들어 가고 있다. 불의와 거짓에는 침묵하고 썩을 것들에는 존재와 가치를 썩고 있다. 무어라 말해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붙잡고 허덕이고 허기진 속을 채우기는 역사의 텅 빈 공간의 계곡은 수천 길 낭떠러지다. 조용히 걷고 싶은 오솔길은 역사의 심장을 두드린다. 오월의 소리를 억압하고 외면하고 등 돌리는 울음들이 내 발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요동치게 한다. 체념과 갈등과 전쟁과 싸움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허무와 허무주의로 유혹한다. 신자본주의와 그 끝자락으로 치닫는 인간의 탐욕들이 존재와 가치의 의미들을 희석시키는데 신록은 짙푸르러만 간다. 오월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던 날에 애절한 생명의 미소 머금고 잠벵이 걸치며 이슬 내린 논둑길을 걸어간다. 푸른 보리밭은 바람에 춤추고 수줍은 봄은 태양을 품속에 안는다. 오월은 죽지 않는다. 오월의 노래는 그치지 않는다. 세월호가 이 땅을 메아리 치고 큰 물결 새로이 잦아든다. 죽은 자여 부활 하고 산자는 춤을 추라. 제주의 한라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백두의 심장까지 부서지고 깨어진 몸을 다시금 고추 세워 살지 못한 한의 응어리들을 풀어 가리라. 존재의 깊이와 높음과 넓이를 다하여 거친 땅 갈아엎고 새로운 나라 기필코 만들어 간다. 죽은 민주 살려내고 상처 입은 나뭇가지 손등으로 막아서서 내 작은 가슴으로 호흡하리라. 일어서야 한다. 소리쳐야 한다. 살려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포기해서는 아니된다. 가쁜 숨 몰아쉬고 새벽처럼 달려가야 한다. 산과 강을 넘고 바다도 단숨에 건너 가서 잃어버린 혼을 찾아와야 한다. 허물 수 없는 벽을 허물고 잃은 땅 회복하여 다시 세상 섬겨야 한다. 아직도 더럽고 추한 이름 하여 보수언론들은 오월을 종북과 빨갱이로 매도하며 그들의 피 흘리는 가슴을 후벼 판다. 거짓과 불의를 밥 먹듯이 하여 밥벌이 욕망을 채우는 악한 세력들이 오월의 자존을 짓밟아도 역사는 죽은 것이 아니다. 한 생명 바쳐 그래도 민주의 이름은 얻었지만 살아 있는 부끄러움은 여전하다. 광주의 오월, 금남로의 오월 분단의 오월, 그리고 언제인가 반드시 오고야 말 통일의 오월, 기다리던 님 그 오월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푸른 하늘과 생명의 땅을 이어가리라. -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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