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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독립운동가들을 더 욕되게 하지 말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인물들이 있다. 홍범도, 김원봉, 정율성이다. 홍범도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 그의 유해(遺骸)가 구 소련 지역에서 운구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국가에서 제1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건국훈장을 받은 분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데, 홍범도도 받은 것이다. 홍범도는 이미 1962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는데, 그를 더욱 크게 격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1962년 당시에는 홍범도에 대한 구 소련측 정보가 없었기에, 그의 독립군 당시의 기록만으로 포상하지 않았나 싶다. 홍범도가 독립군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1921년 이후 구 소련의 자유시에서 일어난 참변과 그 이후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의아한 측면이 강하다. 일본군에 쫓겨 독립군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자유시에 모였을 때, 소련의 적군(赤軍) 참여 여부에 따라 대대적 학살을 당한 비극은 두고두고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홍범도는 당시 해를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부대는 적군에 들어갔으며, 그는 모스크바에 들어가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상금과 권총, 군복 등을 받았고, 소련군 대위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련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런 홍범도를 역시 문재인 대통령 시절, 독립군 여러 명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 세울 때에 함께 세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가 과연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귀감(龜鑑)이 되느냐는 것이다. 홍범도는 우리나라가 지난(至難)한 어려움이 있을 때, 독립군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에는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가 소련 사람으로 살았기에 오히려 북한에게는 관련이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인물은 김원봉이다.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의 뿌리’라고 추켜세우고, 그에게 훈장을 추서하려 했다. 김원봉은 처음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 색채를 띤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가 의열단과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하나, 언제나 그는 공산주의 계열에 섰다. 그는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섰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국가검열상,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6.25전쟁 중에는 북한군의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여 전쟁을 독려하므로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김일성과의 권력 암투에서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역시 김원봉은 영원한 공산주의자로, 국군의 뿌리는커녕, 이 나라를 비극으로 몰아넣고 공산화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임에 틀림 없다. 지금 밀양에는 그의 의열기념관이 있다. 세 번째 인물은 정율성이다. 그는 현재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행진가’를 작곡하여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군대가 싸울 때, 중공군을 크게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북한에도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6.25전쟁 때에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우리의 소중한 궁중악보를 가져갔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중국에서 죽었고, 중국 공산당이 만든 혁명투사 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이다. 그런 그를 위해서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기념관을 만들고, 거리를 조성하고, 조형물을 만들고, 기념음악대회를 하는 등 한껏 기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고 모두, 기릴만한 업적이 되는가? 한때 일제와 맞서 독립 혹은 광복군 활동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데 공훈이 없거나, 반대로 공산주의 활동을 함으로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우리 자유대한민국에서 추앙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는 나라 잃고, 국가의 주권이 없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며,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자유대한민국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한다면 국가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들이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탓하기에는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평가하기에는 일정 부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괜히 그분들을 높인다고 들먹거리다가, 과거의 모든 행적이 들춰져 전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민망하고 볼썽사납다. 그분들에게 ‘독립운동’을 넘어 ‘건국’이라는 좋은 옷을 입혀 드리려다 오히려 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엄연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자꾸 변명하고, 항변하고, 두둔하고, 덮으려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편향된 사람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9-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586운동권’ 세대들 반성문을 써야’
    현재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는 소위 말하는 ‘586세대’가 상당수 있다. 이들은 1960년대에 태어났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대략 나이로는 50대들이다.(2020년 총선 기준) 이들이 제도권 정치에 대거 참여한 21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가운데 58%가 ‘586세대’이다. 지역구 당선자만 놓고 보면 61%가 ‘586세대’이다. 이는 국회의원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이다. 우리 헌정 사상 이렇게 많은 세대가 한꺼번에 국회 의석 다수를 차지하기로는 역대 최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이 세대는 1980년대 대학가에 데모가 한창일 때, 자신들도 여기에 참여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자부심을 갖는 세대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현실정치에 적용하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586세대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권의 모습은 어떨까? 586세대 가운데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민의의 전당’에 들어갈 때 기대와 우려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려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586세대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586세대라고 모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또 그 시대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제도권에 들어가 모두 정치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그 시대에 함께 캠퍼스에서 운동권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2023년 광복절을 맞은 지난 15일, 의외의 ‘반성문’을 내놓았다. 여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580여 명이라고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이 자리에는 ‘586 운동권’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함께 자리를 했는데, 그래도 대부분은 586세대이고, ‘586 운동권’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비판적인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반성문을 들어보자. ‘586 운동권’ 세대가 말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 벌였던 잔치판을 설거지하여 다음 세대가 새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하자. 먼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담긴 반대한민국적이며, 일면(一面-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적인 역사 인식부터 치우자. 민주화운동의 상징 자산을 주사파가 사취하여 독점 이용하는 이런 어이없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잘못을 바로 잡자’고 하였다. 젊은 세대는 이런 말을 하였다. ‘민주를 말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헌정을 무너뜨렸고, 노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위해 더 어려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 연금 고갈, 부동산 폭등으로 수혜를 받지 못한 계층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희망조차 포기해야 했으며, 미래 세대는 수백 조의 나랏빚까지 떠안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다른 ‘586 운동권’ 세대는 ‘이제는 정말 북한체제를 추종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그런 세력들과는 완벽히 결별한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화 세력이 출범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 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장 경악한 것은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 다수가 조국(전 법무부장관) 가족의 비리를 강하게 비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님이 옳았다. 저희들이 틀렸다. 이 순간 우리는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고 통렬하게 반성한다. 같은 시대, 같은 운동권을 형성했던 사람들의 눈에도 현재 제도권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586 운동권’ 세대에게서 ‘민주화 운동’의 변질을 느끼는 모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586 운동권’ 세대는 전 정권하에 여당의 대표에서부터 국회의원, 장관, 사법부의 중직, 각계각층의 요직, 정치권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바라보는 ‘586 운동권’의 행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은 ‘주사파의 폐해’ ‘내로남불’ 이조 시대에나 있었던 ‘당파 싸움의 재현’ ‘민주화운동의 망령’ ‘피해자 코스프레’ ‘방탄 국회의 선봉장’ ‘제 편 감싸기’와 같은 분위기가 묻어 난다. 그들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참된 민주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을 빙자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결핍 상태를 현실 정치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반 서민들의 상식에서 보아도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막무가내(莫無可奈)이다. ‘586 운동권’이 제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586 운동권’ 세대가 밀물처럼 몰려 들어간 21대 국회를 보면, 그런 기대를 함께 했던 것이 오히려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철저하게 국민들 앞에서 ‘반성문’을 써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고, 민의(民意)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지도자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8-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여야 한다’
    우리나라에 많은 권력기관들이 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권력기관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영국의 레가툼이라는 싱크탱크가 여러 나라의 권력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 대상 국가 167개국 가운데 한국의 사법부는 155위, 정치권은 114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경제권 10위, 국방력 6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면에서 꽤 앞선 모양세다. 그러나 최고의 권력층에 대한 평가는 심히 부끄러울 정도이다. 특히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은 국가로부터 186가지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데, 그에 걸맞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제대로 일하고 있을까? 어떤 의원은 교도소에 갇혀 있어도 월급이 나오고, 어떤 의원은 잠적하여 국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월급이 나오고 어떤 의원은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고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 곳이 국회이다. 또 심각한 것은 어떤 의원은 나라 팔아먹을 짓을 하고 다녀도 월급이 나온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연봉은 1억 5천 만원이 넘는다. 이 금액은 전 세계에서 미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많이 받는 것인데, GNP(국민소득)로 따지면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그뿐인가? 국회의원들은 해마다 1억 5천 만원의 정치 후원금을 받을 수 있고, 선거가 있는 해에는 갑절인 3억 원을 후원금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선거에서 15%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체를 국고에서 환급해 준다. 결국 이것 저것 다하면 국회의원이 1년에 5억 원은 가져간다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해외여행경비, 자동차 유류세, 운전기사 공무원 채용, 항공기, KTX 무료 사용, 국회 안의 각종 편의, 문화, 복지 시설 무료 사용, 국가의 휴양시설 무료 사용의 혜택을 받고 있다. 또 입법활동비, 정책자료 발간비, 정책자료 발송비, 문자 메시지 발송비, 업무용 택시비 등 수 많은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다. 거기에다 보좌관, 비서관 등 국회의원 1인당 9~10명을 채용할 수 있다. 결국 국회 한 회기의 4년이 끝나면 4~5조원의 국가 예산이 들어간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과연 300명의 국회의원이 우리나라에 필요한가? 국회의원은 100명만 있어도 충분히 입법 활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큰 혜택의 수혜자인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면책 특권’을 이용하여, 국회에서 온갖 잡다하고 허접하고 국민들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말들을 쏟아내도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 ‘불체포 특권’을 이용하여 온갖 범죄와 혐의가 있어도 국회 회기에는 잡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신성한 의회인 국회를 ‘방탄 국회’로 만들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사회 일각에서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회의원 중에는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에 몰두하고 열심인 의원들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국회 무용론’이 나올 정도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국회의원들은 어떨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우선은 보좌진을 줄여야 한다.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는 국회의원 1명당 보좌진이 2~3명이다. 스웨덴은 국회의원 2,3명 가운데 보좌진은 1명이다.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도 문제지만, 보좌진과 비서관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들이 과연 성실하게 그리고 국가의 미래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의정활동에 헌신하고 있을까? 그리고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 인구 50만 명당 1명꼴로 하면, 10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어느 지역에 보면, 갑, 을, 병 등 같은 지역인데, 쪼개서 국회의원 수를 늘이고 있다. 그리고 전국구 의원을 없애야 한다. 이 전국구 의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별별 꼼수를 둬서 의석수를 늘이려는 것을 보아 오지 않았는가. 또 국회의원들에 대한 대우를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과 맞먹는 400만 원대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도 연봉이 5천 만원이 넘는다. 우리나라의 정치권이 세계 최하위 수준의 신뢰감을 나타내는 것은, 최고의 예우와 온갖 특권을 주니, 이것에만 관심이 있고,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권을 줄이면, 명예와 사명감으로 일할 진정한 국민의 일군이 나올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7-2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공영방송 KBS는 신속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민들로부터 심각한 편파방송으로 지탄을 받고, 공영방송으로서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던 KBS에 개혁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KBS는 TV시청료를 현행 전기세에 부과하여 준조세적이며 일방적으로 징세하던 것을 이제는 분리해야 한다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면서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그동안 KBS는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민주노총 산하에 있는 ‘노영방송’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었고,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된 모습을 보여, 공영방송의 신뢰는 무너지고, 오히려 상업방송만큼도 공정성을 지키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런 가운데 KBS는 전기세에 포함하여 걷어 들이는 시청료가 연간 6,2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손쉽게 확보하였다. 그러다 보니 연봉 1억 원이 넘는 직원이 51.3%를 차지하고, 그중에 1,500명은 무보직이라고 한다. 보직이 없다는 것은 책임지고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국민들은 이런 KBS를 위하여 영문도 모르고 따박 따박 수신료를 내온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급기야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서 억지로 낸 TV수신료 환불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7년에는 2만 246건이 있었는데, 2021년에는 4만 5,266건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국민제안 공개토론에서 국민들은 무려 96.5%가 수신료 분리징수에 찬성하였다. 아예 이런 제도를 없애자는 의견도 64%를 차지하였다. 왜 그런가? 공영방송인 KBS가 노조위원장 출신을 3연속 보도국장으로 채우고, 나머지 중요한 보직도 언론 노조 출신을 앉혀서 방송의 편파성을 극대화한 때문이다. 오죽하면 현재 KBS 이사들 일부가 나서서 ‘KBS의 편파성은 독재정권 때보다 심하다’고 폭로하였다. 국민들의 시청료 납부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는 KBS가 공정성, 공공성, 공익성, 공평성을 크게 상실한 것이다. 그야말로 공영방송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런 KBS 안에도, <새로운KBS를위한KBS직원과현업방송인투쟁위원회>(새KBS공투위)가 조직되어 1,100명의 직원들이 나서서, KBS의 고약한 실태를 알리며 국민들에게 엎드려 사죄를 한 것이다. 이들은 현 경영진이 퇴진하고 KBS 자체에 고강도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이 지난 21일 발표한 대국민 성명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KBS는 지금까지 오직 운동권과 민노총과 민주당만을 위한 방송을 해 왔습니다. 견해가 다른 국민들의 시각은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국민들을 훈계하고 윽박질렀습니다. 우리는 경영진과 이사회만을 탓할 수 없습니다. 불공정 방송과 무능 경영을 통해 국민의 자산을 가로채고 횡령하고 낭비하는 범죄행위가 버젓이 벌어지는데도 우리는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부당한 보도, 불공정한 시각을 강요하는 보도,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몸을 던져야만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의 편안한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 와중에 회사는 썩어들어가고, 오늘의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국민들께 사죄드립니다. 토를 달지 않고 이유도 달지 않고 사죄드립니다. 국민들은 무조건 옳습니다. 앞으로 국민들께서 더 회초리를 들어주십시오. 무조건 다시 기회를 달라는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역시 국민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다시 KBS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는 사뭇 비장한 어투로 대국민 사죄 성명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투쟁 방향을 제시하였다. 현 사장과 본부장, 이사진 전원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 모든 민노총 출신 간부들이 민노총으로부터 탈퇴하라.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 방송 현업인들은 민노총을 탈퇴하라. 민노총 간부들의 모든 부당한 요구를 거부한다. 이런 투쟁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고강도의 투쟁에 돌입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동안 KBS 안에도 바른 목소리를 내는 제3의 노조가 있었지만, 이번과 같이 강력하게 개혁을 요구하지는 못했었다. KBS가 진작 그런 자체적인 개혁의 목소리를 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당장 수신료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런 자구책을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지금은 KBS 구성원들이 그런 얕은 잔꾀를 부리다가는 공멸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제라도 KBS가 심각한 편파성의 악몽에서 깨어나서 그동안 끔찍하게 불명예스럽게 들어왔던 ‘노영방송’이나 ‘정치방송’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KBS는 편향되고 정치 이념에 사로잡힌 인적 청산도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공영방송의 각오를 새롭게 다져서, KBS의 구호대로 참된 ‘국민의 방송’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6-23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왜 성경과 성탄절을 문제 삼나?'
    최근에 불교 언론을 보니, 불교계에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성탄절’에 대하여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정립해서 사용해야 한다며 내부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즉 성경은 ‘바이블’로, 성탄절은 ‘기독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불교계가 ‘석가탄신일’로 하든 ‘부처님 오신 날’로 하든 상관한 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 시 의회 연설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가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문제 삼아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결의했다고 한다. 불교계는 ‘종교 편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그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모양새다. 정부에서는 이번 5월부터 전국의 70여개 사찰들이 그동안 오랫동안 받아오던 ‘문화재 관람료’ 대신 이를 100% 국가에서 보전(保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이 자그만치 올해에만 419억 원이 지원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언론들에서는 각 사찰들이 문화재 관람료를 ‘무료’로 한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것이 무료인가? 각 사찰들이 현장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려면, 불교의 문화재를 관람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심지어 법원에서도 그런 행위는 ‘부당하다’고 판결까지 내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고 수고하지 않아도 재정 지원이 이뤄진다. 그야말로 정부와 지자체가 따박 따박 재정을 지원해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무료라고 하는가? 이것은 엄연히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에서 보전해 주는 것이다. 불교계의 이런 모습에 2021년 국회에서 모 의원은 ‘봉이 김선달’이란 말을 사용했다가 불교계로부터 호되게 항의를 받고, 항복하기도 했다. 혹자는, 이처럼 불교계가 문화재 관람료 대신 국가로부터 100% 재정 지원받는 것은 우수한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정책 차원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동안 정부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국가 예산 집행을 하지 않았던가? 지난해 문화재청이 낸 보도자료에 의하면, 2023년 문화재청 예산을 1조 2,935억 원으로 잡았고, 그중에 문화재 보존 예산으로만 6,814억 원을 책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상당수의 금액이 불교계의 문화재 보존에 사용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문화재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동안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이 계속 종교계에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들어갔지만, 그에 대하여 공개적이며 투명한 감사(監査)는 제대로 이뤄졌는가를 묻고 싶다. 어찌 보면 불교계는 국내에서 오래된 종교라고 하여, ‘종교 우대’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타종교에 대해서 ‘성경은 바이블로, 성탄절은 기독탄신일이나 크리스마스로, 가톨릭은 카톨릭으로 해야 한다’는 논의를 했다고 하니, 어리둥절해진다. 사실 불교계는 전에도 기독교가 성탄절에 기독교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성탄 트리’를 세우면서 트리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시비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십자가는 안 되고 별을 달라는 것이다. 별은 되고 십자가는 안 된다는 이유는 뭘까?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 우리 기독교가 불교의 상징물에 대하여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불교계가 타종교에서 사용하는 고유한 용어까지 독점하고 있으니 바꿔야 한다고 거론하고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볼썽사납다. 이런 것들이 종교 간 다툼을 일으키는 발단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종교 간에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려면 그 종교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하여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무리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불교를 보면, ‘종교 차별’을 주장하면서, 여러 사안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점(先占)하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눈에 띤다. 그러나 종교 간에 간섭함이 도가 지나쳐, 타종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명칭과 활동까지 따지고 든다면 이를 우리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각 종교는 종교 화합을 통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이를 보여줌으로 국민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종교가 국민들에게 짐이 되고, 배척의 요인이 될 것이다. 종교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정치 집단도 아니다. 종교의 본분은 국민들의 영적, 정신적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하는데 치중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5-19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부활(復活)과 부활절(復活節)’
    지난 3년간 한국교회는 코로나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내(室內)에서도 마스크 벗기가 실행되는 가운데, 이번 부활의 예배에는 그동안 쉬고 있던 성도들도 함께 나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언제나 부활의 감사 예배는 기대와 설렘과 기쁨과 엄숙함의 은혜가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온갖 괴롭힘과 모욕과 야유, 조롱과 비난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감사하여 눈물이 난다. 세상에서 나의 슬픔을 위하여 울어주고, 기쁨을 위하여 함께 웃어주고, 내가 아플 때 대신 앓아 주고, 그리고 나의 잘못의 짐을 지고 죽어줄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할 사람들이야 다소 있겠지만, 나를 대신하여 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면서까지 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해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을 통한, 세상에 대하여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아무 욕심도 없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셨다. 당신의 몸은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죽음의 희생으로 내어놓으시고, 복음 전파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육신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고, 영혼은 하나님께 의탁하고, 심지어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십자가 밑에서 병사들이 제비뽑아 나눠 갖는 것도 두고 보셨다. 그야말로 빈손, 빈 몸이셨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세상에서 작은 욕심 때문에 때로는 마음이 상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부끄럽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명백하다.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代贖) 제물로 주시기 위한 것이다. 어떤 종교도, 어떤 종교의 교주도,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그런 사랑을 베푼 경우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만 자신을 ‘메시야’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100여 명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분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다가 끝내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극진하고도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희생과 사랑을 보여 주었는가? 부활(復活)은 영어로 Resurrection으로 되살아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활절(復活節)은 영어 표기가 다르다. Easter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과는 좀 다르다. ‘Easter’란 말은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봄’과 ‘다산의 여신’인 이스터(Eostre)에서 나온 것인데, 초창기 영국 교회에서는 지역 전통과 연계하기 위하여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로 명명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우리 신앙은 절기(節氣)인 부활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참 의미와 소망을 되새기는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감사와 믿음과 소망을 더하기 위하여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날마다 부활의 소망이 더욱 또렷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다. 뭘 이루셨는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셨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동시에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류의 영혼 구원 계획을 이루셨다. 또한 구약 성경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언된 메시야 오심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대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죽어주심도 이루셨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마귀를 멸하신다.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데, 절기가 아닌, 부활의 은혜, 부활의 능력, 부활의 기쁨, 부활의 삶, 부활의 증인, 부활의 소망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지금도 이단(異端)들은 구약 성경의 절기 지키기를 가지고 정통교회를 공격하고, 성경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4-12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한국교회, 진짜 위기는 무엇인가?’
    최근에 한국교회 교계 연합 단체가 목회에 관한 데이터연구소를 통하여 한국교회 2,000명 성도들에게 ‘주일 예배 형태’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내용을 밝혔다. 이 자료에 의하면 코비드19가 번지기 시작하던 2020년 4월에는 교회에 출석하여 현장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의 비율이 13.6%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2023년 1월에는 67.5%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반면에 온라인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2020년 4월 52.2%에서 2023년 1월에는 16.0%로 대폭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온라인이나 가정 예배, 기독교계 방송 듣기, 다른 교회 예배 참석 등으로 자신이 속한 교회 예배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비율도 21.6%나 된다. 그리고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도 5.8%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 현장 예배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교회로 인도할 대책을 조속히 강구(講究)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응답한 것이 2012년에는 22.5%였다면, 2017년에는 20.3%였고, 올해 조사에서는 15%에 그쳤다고 한다. 즉 기독교인의 숫자도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코비드19는 이래저래 한국교회에 위기를 몰고 온 것이다. 현장 예배의 완전한 회복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성도들이 교회를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유명한(?) 일부 교회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그렇지 못한 교회는 성도들이 줄어들어, 일종의 모이는 교회와 모이지 않는 교회 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양적인 성장에 목표를 두었다면 이제는 질적 성장을 위한 일에 몰두해야 한다. 과거 한국교회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할 때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불과 2%도 안 되었지만, 엄청난 일을 감당한 적이 있다. 사회적 선한 영향력은 숫자와 비례하지 않을 수 있고, 구원받은 참 성도는 적은 숫자로도 얼마든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코비드19 상황에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어쩌면 교회의 허수(虛數)는 아니었을까? 성도들이 구원받는데 필수적인 것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와 예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시적인 팬데믹 상황이라고 교회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믿음의 분량(分量)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질적으로 더욱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지도자가 될 신학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현재 각 신학교에서는 미달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각 교단들은 같은 교단 안에도 여러 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이를 발전적 통•폐합을 통하여 실제적이며 건강한 영적 역량을 기르게 하여 제대로 훈련된 목회자를 배출하는데 힘써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비드19를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문제에서조차 사사기 시대와 같이,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대처하고 대면 예배를 비난하는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일삼는 일들이 있어,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또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가볍게 보도록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나, 앞으로 유사한 일들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때를 위해서 신학교육을 철저하게 하고 정예화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 세 번째는 미자립 및 예배처로 존립하기 어려운 곳들을 조사하여, 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각 교단들은 어려움을 당한 교회의 영적 자원을 최대한 흡수하여 각 교회에 분산하여 사역을 감당하게 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에 상당한 위기가 닥쳐왔는데, 이를 간파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고,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선한 영향력이 줄어들도록 궤계(詭計)를 부릴 것이다. 이번에 한국교회 ‘주일 예배 상황’에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일반인들이 댓글을 단 것을 보면, ‘요즘 보기 드문 반가운 소식이라’는 사람도 있고, ‘(교회)코로나 진원지 역할을 했다’고 왜곡하고, ‘꼭 교회를 나가야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교회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더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위기를 보는 시각과 그 대처함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본질적인 것(예배를 회복하고 참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에 일치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또 비본질적인 것(기득권, 명예, 분파적 행동)에는 포기하는 자유함을 얻고,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는(한국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일에 하나가 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3-22
  • [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수공전도 펼칠 만한 것이었는가’
    전투 중에는 화공(火攻)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수공(水攻)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사자성어 속에는 화공 관련 책임론이 내재되어 있다. 촉나라의 마속 장군이 제갈량의 분부를 무시하고 자행자지함으로써 적(위병)의 화공을 받아 패전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참수형을 받은 비극이 그 말 속에는 들어 있다. 불이 난 뒤엔 남는 것이라도 있지만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터도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마속(馬謖)의 비극에서 보듯이 화공도 무섭기는 하지만, 다른 사례에서 볼 때 수공은 더 무서운 데가 있다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초한지>에는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가 서로 싸우는 중에 전자를 대표하는 한신 장군과 후자의 항장(降將; 투항 장군) 장한 사이에 벌어진 폐구성 전투에서 한신이 펼친 수공전(水攻戰)으로 인해 장한의 폐구성 수비군이 전멸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괴된 잔도가 복구되지 않는 한 한나라 군대가 쉽게 자기의 폐구성을 공격해 올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장한 장군은, 그만큼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서도, 갑자기 들이닥친 한나라 병사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게 사면초가라고 판단되자 장한 장군은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삼국지>에는 수공전의 실상이 더러 나타난다. 위나라의 조조가 하비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여포를 잡기 위해 수공전을 펼친 것이 주효해 마침내 여포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또 조조가 원소의 본거지 기주성을 포위해 수공 작전을 편 결과 끝내 그 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 조조에 대하여 다소 불안감을 지닌 <삼국지> 독자들에게 조조의 수공 성공 사례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다음(관우)의 수공전이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지 않을까 싶다. 관운장에게 밀린 번성의 조인(조조의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조조가 우금과 방덕 두 장수를 파견하였다. 노련한 우금을 대장으로 삼고 젊은 방덕을 선봉장으로 삼아 대대적인 군대를 동원해 번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런데 선봉장 방덕이 관운장과 맞붙어 싸울 때, 첫 날은 100여 합을 겨루고도 결판이 나지 않아 관운장을 놀라게 했는데, 둘째 날 50여 합을 겨루고도 결판이 나지 않은 채 돌연 방덕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라오는 관운장을 향해 방덕이 갑자기 화살을 쏘아 관우의 왼쪽 팔을 관통시켰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우금이 방덕을 불러들이고 나서, 관우와 방덕 간의 직접적인 병기 대결은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금·방덕의 군사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성의 뒤쪽으로 주둔지를 옮기고 나자 관운장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는 수하들에게 곧 우금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공전을 펼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 연일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주변 양강의 물이 불어나고 있었으며, 우금의 병사들은 좁은 증구천 골짜기로 몰려 있었기 때문에 관우는 자기 병사들로 하여금 상류의 물을 가두었다가 적시에 그 물을 터뜨릴 계획이었다. 며칠 뒤 실제로 큰물이 번성 주변으로 넘쳐흐르며 우금의 병사들을 덮쳤을 때, 관우와 우금 간의 싸움은 관우 쪽으로 결정적 승리가 찾아와버렸던 것이다. 우금은 사로잡혔고, 방덕 역시 물에 빠진 채로 사로잡혔다.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나버린 것이다. 이제는 유럽 쪽의 수공전 이야기로 가 보기로 하겠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속국(?)인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획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일명 ‘피의 법정’이라고 불렸던 그 무서운 재판소를 과도기로 하여, 종국엔 저네들 식의 종교재판소를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안에도 설치하겠다고 나오자 지금껏 지배국 스페인에게 순종적이기만 했던 네덜란드인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성상파괴운동을 시발로 하여 터진 무장투쟁의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확대되었으니, 곧 저항군 세력의 거점이었던 레이덴에서 맞붙은 양쪽의 전투(1574)는 그들의 생명줄이라고 할 제방을 허물어 물바다를 만들며 결사 항전한 네덜란드 군의 우세 쪽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어 갔던 것이다. 사실 스페인군이 레이덴을 포위했을 때의 레이덴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1년 가까운 포위 작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있었으며, 그 결과 아사(餓死)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시민군은 저항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패망해 죽을 바엔 지금껏 그들의 생명줄로 여겨왔던 둑(제방)을 무너뜨림으로써 스페인군을 몰아낼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고, 게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결국 스페인군은 거센 바다물결 앞에 맥없이 패퇴하고 말았다. 수공전도 정당방위의 목적에서라면 용인될 수 있는 일임이 입증된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2-24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분열을 치유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우리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어디를 보아도 분열이 없고 다툼이 없고 분파로 쪼개져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정치와 이념성은 가족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도 심각하다고 한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 권사님이 전해 준 이야기이다. 지난해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딸과 사위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 ‘어머님 이번에 00후보(진보성향 후보)를 찍지 않으면 어머님과 3년 동안 왕래를 끊을 것입니다’ 또 다른 권사님은 딸과 사위가 어른을 뵙기 위해 왔는데,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진보 후보와 보수 후보를 각각 지지하는 발언으로 다투더라는 것이다. 최근에 모 신문사가 지난해 말 여론조사를 했는데,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이 특정 법무법인 변호사 30여 명과 새벽까지 술자리를 했다는 것이 거짓으로 판명이 났는데도, 정당을 지지하는 것에 따라 의식 차이가 확연하게 달랐다고 한다. 즉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짓일 것’으로 믿는 사람이 77.9%이고, 아직도 ‘사실일 것’이라고 답한 것이 13.9%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사실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69.6%를 차지하고 거짓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11.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슈화된 사건이 진실이 밝혀져도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에서 철회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조사에 의하면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식사 자리(술 자리 포함)는 ‘불편하다’가 40.7%로 나타났고,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불편하다’가 43.6%로 더 높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당을 지지하는 층이나 야당을 지지하는 층이나 비슷한 양상이라고 한다. 또 현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을 여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87.6%를 차지하고 있으나, 야당을 지지하는 층에서는 32.2%만이 잘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전 정권이 방역을 잘한다고 지지했던 사람들이 84%나 된다. 그야말로 내가 지지하는 정권은 어떻게 해도 지지하고, 내가 싫어하는 정권에 대해서는 ‘묻지마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언론사에서 역시 지난해 말, 여•야 국회의원 170명을 대상으로 ‘현 정부가 진행 중인 수사가 과거 정치보복 논란과 비교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여당 쪽의 의원들은 정치보복 성격을 느낄 수 없다가 80.6%, 달라진 것이 없다가 7.5%, 정치보복 성격이 약해졌다가(오히려) 4.5%, 정치보복 성격이 강해졌다가 1.5%, 모르겠다가 6.0%를 차지했다. 반면에 야당쪽 의원들은 정치보복 성격이 매우 강해졌다가 91.8%, 정치보복 성격이 조금 강해졌다가 6.2%, 달라진 것이 없다가 1.0%, 정치보복 성격 느낄 수 없다가 1.0%였다. 정치에 대하여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 국회의원 사이에서도 자가당착(自家撞着)이 매우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 수사 후 분열된 국론을 어떻게 봉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여당 의원들의 40.3%는 ‘법적 시비는 법정에 맡기고 언론•정치권은 수사 확대 해석을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야당 쪽에서는 33.0%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수사 과정과 결과를 철저히 공개해 의혹을 불식해야한다’는 응답이 여•야 각각 29.9%, 18.6%로 나타났다. 그리고 여당 의원들은 ‘법치국가에서 법대로 수사하는데 국론분열 발생 시각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이 28.4%,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야당 지도부와 대화 등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44.3%를 차지하였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있다.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빈부갈등, 도농(都農)갈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최대 246조원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었는데,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갈등지수가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갈등을 유발시키는 세력은 무엇보다 정치권이다. 그들의 목적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고 국가의 발전과 근간을 세우는 일보다,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능한 집단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교회부터 앞장서서 우리 사회 분열을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지역색을 띤 모임부터 모두 해체해야 한다. 선교든 친교든 이런 모임 자체가 망국적 지역색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힘을 합해 총회 임원을 선출하는 행위들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특정 정파를 지지하여 표를 ‘몰빵’하는 독재적, 독단적 행위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분열과 갈등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패를 쪼개고 편을 갈라서 으르렁거리는 반신앙적 반성경적 세속 행위를 묵인하고 따르겠는가? 한국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나가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3-01-21
  • [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총성(銃聲)을 멈춘 성탄절’
    성탄절이다.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다.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아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다기보다는 자신을 더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주장이 앞서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혹은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의 허다한 것들을 앞세우는 모습들도 본다. 복음보다 사상과 이념, 정치적 견해, 지역색, 세속적 가치를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허물어트리는 악한 일들에 동조하는 지도자들도 있다. 그가 영(靈)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육에 속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또 우리에게 평화의 모습은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평화)케 하는 ‘하나님 자녀’의 성품은 있는가? 어떤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사납고, 거칠고, 막 나가고, 일방적이고, 자기 우월적이고, 상대를 무시하며, 하나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는듯한, 매우 모독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잘못했다는 마음이나 사과하는 것에 인색한 것을 본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그들 가운데 한때는 하나님께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았지만, 나중에 사단의 조종을 받고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져, 하나님께 버림받은 교만한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2022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성도(聖徒)된 우리의 모습을 겸손하게 하고 그 행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지켜 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툼이 없는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역사를 살펴보면, 성탄의 주님은 전쟁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멈추게 한 적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4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인데, 이날은 이상하게 총을 쏘고 대포를 발사하는 일이 없이 잠시 조용해졌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일군 부대에서 먼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프랑스군 병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밤 10시경 독일군이 찬송을 부르니, 우리들은 프랑스 국가(國歌)를 부르고, 독일군은 다시 자신들의 국가를 부르고, 우리는 출정가를 불러 서로 응답하면서, 남자 수천 명이 노래를 부르니 마치 동화(童話)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죽음의 한복판 전장(戰場)에서 연속적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전투를 쉬고, 적군을 향하여 총을 쏘는 대신 노래를 부르고, 서로 휴식시간을 갖고, 상대편을 찾아와서 고향을 묻고, 담배를 권하고 초콜릿을 나눠주고 기념품을 교환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받은 훈장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이런 성탄절 휴전을 경험한 병사들이 1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주님께서 주신 성탄의 평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사납고 날카로와진 우리의 모습을 평화로 바꾸면 어떨까? 먼저 상대편의 입장을 바꿔 놓고 배려해 보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비판하고 판단할 일이 있을 때, 상대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억울하지 않을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상대편의 명예와 인권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그가 속한 공동체를 허무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되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성숙한 생각들이 평화를 만들어 간다고 본다. 그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우리가 겪는바 평화(화평)를 깨는 요인은 남을 무시하는데 있다. 남은 변두리에 두고 자기가 중심에 서려는데 있다. 성탄의 주로 오신 예수님은 본체(本體)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종(從)의 형체로 오셔서 사람의 모습으로 낮추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런 주님을 닮지 않고는 성탄의 참 평화를 맞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총구(銃口)를 겨누고 있는가? 그 총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움과 시기와 분쟁과 다툼을 멈추고, 남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바꾸는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낮아진 마음으로, ‘고요하고 거룩한 밤’을 진심으로 맞아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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