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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토머스 모어와 이가환의 경우’
- 오래전 나는 영국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1477-1535)가 등장하는 영화 <천일의 앤>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는 당시 영국 왕 헨리8세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영국식 종교개혁을 강행하려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영화 가운데서 나에게 강하게 인상지어져 있는 몇몇 인물들 가운데 그(모어)가 들어 있었다. 그의 어떤 면 때문이었을까. 대법관 신분이었던 그가 개신교도라고 할 신자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는 일에 열광적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무려 여섯 명의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의 명저라고 알려진 <유토피아>(1516)에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그가 실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마도 시청자(필자)를 놀라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놀라게 된 것이 꼭 그 ‘저서’와 ‘실제’가 다른 이중적인 처신을 보여주었다는 데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이중적 처신이 권장할 일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나약한 인간인지라,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넘어가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가톨릭교와 다른 프로테스탄트 신자라고 해서, 그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야 그의 판단에 속한 문제라고 봐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죄과(?)로 그가 그들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 특권마저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 앞에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리스도교 신자였다고 한다면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던가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찌 그렇게 잔인한 화형 판결을 다수 신자들에게 내렸을 수 있을까 물어야 할 판이다. 여기서 막말(?)을 하나 덧붙이기로 한다면, 헨리8세가 영국식 종교개혁이란 미명 하에 새로운 이단 종교를 만드는 것까지 확인된 이상 그(모어)는 이제 국왕을 이단자로 재판에 회부하고 그에게 화형 판결을 내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에겐 그럴 힘까지야 없었기 때문에 결국 반역죄로 그 자신이 국왕에 의해 처단당하고 만 것이었다. 요즘 필자는 다른 일로 서기원 작가의 장편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1979)을 다시 읽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소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오래전에 읽어서 그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던 세부사항들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던 점이 하나의 큰 수확이었다. 특히 그 작품 속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 이가환에 대해서 재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또한 큰 소득이었다. 조선 정조 때 이가환(1742-1801)은 대단한 권력자였다. 형조판서 직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적들에 의해 쫓기다 보니 정조가 그를 보호하려고 중앙 정부 아닌 지방 외직으로 보냈다. 그는 광주(현 남양주) 목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공서파(攻西派) 정적들에게 몰리게 된 것은 그가 천주교신자라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광주에 부임하자마자 천주교신도들을 혹독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는 자체 모순이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해서 정적들의 공격을 둔화시켜 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권일신을 비롯한 다수 신도들을 너무도 잔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원망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선백자 마리아 상>에서는 이런 이가환의 가학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끝이 난다. 그 후의 이가환의 이야기는, 수난 형식의 것으로, 황인경 작가의 전5권 대하장편 <소설 ‘목민심서’>(1992)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광주 목사 때 천주교도들을 혹독하게 고문한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혹독하게 고문을 당하고 있다. 이젠 정적들에 의해 그 자신이 천주교신자로 몰려 고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끝내 목숨마저 잃고야 만다. 나는 동·서양의 두 권력자들이 처음엔 신자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다가 뒤에 가서는 자기 자신들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큰 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사례를 살펴보았다. 토머스 모어와 이가환의 이야기는, 먼저는 종교적인 이유로 세도를 부리다가 후에는 또 그 종교적인 이유로 더 큰 권력에 의해 자기 목숨마저 잃게 된 종교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상호 유사점이 보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토머스 모어나 이가환이 당대 약자들이었던 신도들을 다수 잔인하게 희생시키지만 않았더라면 그들(모어와 이가환)이 후에 헨리8세나 공서파 정적들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이었을까, 라고…. 그러나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영화 관람자들이나 소설 독자들에게 “결국은 심은 대로 거두고 말았구먼!” 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만 것이 아닌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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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토머스 모어와 이가환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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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예배, 비대면 예배 방향의 실패’
-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한 혼란과 어려움은 우리 사회 각계를 계속 혼돈에 빠지게 한다. 정부는 지난해에 이어서 또 다시 지난 7월 12일부터 수도권에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명령하고, 그 조치로 처음부터 모든 교회 예배를 무조건 비대면으로 하라고 하달(?)하였다. 이에 불복하여 예자연을 중심으로 행정명령중지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였고, 법원에서는 16, 17일 두 가지 이유로 대면예배를 허용해야 함을 판결하였다. ‘형평성의 원칙 위배’(다른 다중 시설들은 모두 개방하는데, 교회만 폐쇄함), ‘국민 기본권의 침해’(헌법에 보장된 종교 자유)로 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배 인원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19명으로 제한하는 희한한 판결도 곁들였다. 이에 일부 교회에서는 대통령 등 방역 책임자들에 대한 고소를 하게 되고, 정부에서는 최대 99명까지 대면예배 인원을 인정한다고 번복하였다. 역시 이 조치도 희한하게 기준이 모호하다. 예배 인원에 대한 것은 여전히 한국교회 숙제로 남았으며, 정부 측과도 계속 협상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1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한교총 대표회장 소강석 목사 교회를 찾아가, 그 확대 가능성을 엿보였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도 벌써 1년 6개월이 넘어 간다. 지난해 2월 말부터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많은 교회들이 소위 말하는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지난해 5월만 해도 대면(현장)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60.6%였는데, 올 6월 조사에서는 36.2%로 줄었다고 한다.(예장통합총회, 목회데이터연구소, 한국기독교언론포럼에서 통합 측 담임목사 891명, 일반 교인 1,000명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 이하 통합 조사) 반면에 오프·온라인 예배를 동시에 드린다는 교회는 52%를 차지해 소위 말하는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배 만족도는 어떨까? 이 조사에서 비대면 예배 만족도가 83%였으나, 현장 예배 만족도 89.4%보다 낮았다. 다른 조사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지난 해 7월 한국성결신문 창간 30주년 기념으로 성결교단 소속 목회자·성도 2,55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온라인(비대면) 예배에 대한 만족도는 24.2%였고, 불만족은 41%로 나타났다.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경우,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이라는 응답이 73.7%를 차지했다. 또 지난해 10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조사한 것에서도 온라인(비대면) 예배 만족도는 ‘현장예배보다 못하다’는 것이 52.8%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런 예배에 참석할 의향이 없다고 답한 것도 55.5%로, 참석하고 싶다의 27.2%보다 월등히 높았다. 청년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올해 1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한국교회탐구센터, 목회데이터베이스가 공동으로, 비대면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기독청년 4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교회 현장예배가 훨씬 더 만족스럽다’가 40.8%, ‘조금 더 만족스럽다’가 26.9%로 무려 67.7%가 현장 예배를 선호하고 있다. 올 6월 위 통합 조사에서, 29.5%가 비대면으로 인하여 ‘신앙이 약해진 것 같다’고 답했다고 한다. 또 목회자와 일반 교인 모두 ‘예배의 본질에 대한 정립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예배의 본질은 뭔가? 총신대 총장을 지낸 정성구 박사는 ‘비대면 예배는 없다’고 단언하고, 예배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만남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집단 예배(Corperate Worship)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예배가 없으면 교회는 죽은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온라인 예배는 처음부터 예배가 아니었으며, 예배는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비대면으로 가능할까? 우리 목회자들은 예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필자는 지난 7월 16, 17일 법원의 판결로 대면예배가 공식화된 이후에, 주변의 목사들과 대화를 해 봤다 어떤 분은 그저 코로나가 빨리 지나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을 때 대면예배를 드리겠다고 한다. 또 어떤 분은 법원에서 이기면 뭐 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는데, 정부의 방역 정책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분은 지자체에 물어보고 허락하면 대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 분들은 혹시라도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걱정해서, 이웃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겠다는 생각은 아닐까? 그런데 기독교 역사 이래 핍박이 없던 때가 없었고, 아니면 유혹이 없던 때도 없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방역에는 철저히 한다고 대정부, 대사회 선언을 하면서, 대면예배를 강력하게 주장했어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비대면 예배 방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교계는 이제라도 한 방향, 한 목소리, 한 뜻을 모아서 바른 예배를 위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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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예배, 비대면 예배 방향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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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 언젠가 나는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고백록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읽을 그때는 매우 감동 깊게 읽은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회고해 보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다소 안타깝다. 아마도 읽은 지가 꽤 오래되어서 그러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다음 부분만은 너무도 뚜렷이 나의 기억에 남아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하면 우선적으로 그 장면부터 떠오르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다른 데가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 ‘히포의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 그러니까 그가 밀라노 시에서 수사학 교사로 일하던 시절 갑자기 강력한 회심의 체험(386년)을 하고 나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직후 그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잠시 고향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여행길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 도중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신병이 악화돼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글픈 일이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통해 아주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모니카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아들이 그녀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해 장사지내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은 어디나 다 같은 처소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니카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별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죽음을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심정으로 맞겠다는 식으로, 무서우리만큼 확고한 그녀의 신앙심을 드러냄으로써 또한 아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모니카의 이 확고부동한 신앙심은 당시의 그녀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필부필부들에게도 같은 비중의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죽음을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심정으로 맞겠다는 결연한 자세, 아니 확고부동한 신앙심이 필요한 그런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때 나는 다른 계기로 고(故) 김성한 작가의 단편 역사소설 <바비도>를 다시 읽게 되었다. <바비도>는 15세기 초엽의 영국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의 영국 왕이 헨리4세였다. 그는 1399년 사촌형인 상왕 리처드2세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악명 높은 자였다. 그는 왕좌에 오른 2년 뒤 ‘이단 분형령’(1401)을 통과시켰다. 이는 기독교의 이단자들을 골라내 불에 태워 죽이라는 법령이었다. 또 1407년 이후엔 개혁자 위클리프의 영역성서 비밀 독회(讀會)를 법으로 막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비도는 1410년 이런 조치에 의해 ‘이단 분형령’에 따른 화형을 당하게 된, 재봉직공 신분의 기독 청년이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이 상식 밖의 일들을 다 저지르면서도 평신도에게만은 각종의 규제들로 그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강압적 규제에 대하여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법이 만들어졌든 말든 오직 자기의 신앙 노선만을 굳게 지키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법 때문에 제 신앙노선을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 결과 그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사교가 심문을 시작했다. “밤이면 몰래 영역복음서를 읽었다지?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느냐?” 무슨 심문에도 바비도는 사교의 뜻과는 반하는 말만 해댔다.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사교는 그에게 분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그는 스미스필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헨리 태자가 나타나 그를 달래 보았다. “바비도, 누가 옳고 그른 것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하여간 네 목숨이 아깝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마음을 돌렸느냐?” 바비도가 대답했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내 스스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나는 길이니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바비도는 불길 속에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말았다. 죽음에 임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난다고 하는 표현을 한 데서 바비도의 초연(超然)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은 임종의 모니카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심정으로 죽음을 맞겠다고 한 것과 같은 결연(決然)함이라고 하겠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우리는 지금 바비도나 모니카에게서와 같은 초연함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초연함, 결연함이 아무렇게나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바비도나 모니카에게서와 같은 확고한 신앙 위에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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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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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자유의 가치, 종교의 자유’
-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막대한 희생 위에서 세워진 것이며, 그것을 인지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우리는 받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6.25전쟁에 관련된 가슴 아린 책이 나왔다. “후크고지의 영웅들”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특별한 교류관계도 없었던 영국이 1950년 소련, 중공, 북한의 공산군이 불법과 무력으로 남침해 왔을 때,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는데, 그때 영국군이 치룬 전투 가운데, 1953년 5월 28일 경기도 연천 일대에서 영국의 웰링턴 연대와 중공군 1개 사단이 50시간이 넘는 육박전을 벌이는 참혹한 혈투 속에서 후크 고지를 지켜내므로 연천군의 정남면,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 일대를 자유의 품에 들어오게 한 전투에 참여했던 노병들이 수기를 모아 책으로 지난달에 발간한 것이다. 6.25를 통하여 국군 62만명, 유엔군 16만명, 민간인 250만명, 이재민 370만명, 전쟁과부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등 남북한 인구 3,000만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그 당시 참전했던 한 영국군 병사의 아내가 쓴 편지를 이 책에서 소개하는데, 앞부분을 살펴보자. ‘남편은 1943년 버마와 인도에서 복무한 바 있었고, 1946년이 되어서야 예비군이 되어 귀가했다. 우리는 지역의 가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고용주가 빌려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집배원이 가지고 온) 편지를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가 야근에서 돌아와 막 자려던 남편을 깨워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1950년) 8월 10일까지 콜체스터 부대에 입영하라는 동원 영장이었다. 남편은 가스 공장 사장에게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알려야 했다. (나는) 우리가 남편이 입대한 후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마지막 봉급은 어떻게 되는가?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매일 울어야 했다. 큰 아이는 1년 8개월, 작은 아이는 8개월짜리였다...’ 영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한국의 전쟁터에 파병하여 연인원 56,000명, 전•사상자 5,000명으로 우리나라를 지켜 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6.25전쟁 당시 전투 부대 파병 국가가 16개국, 의료지원국이 5개국, 물자 및 재정지원국이 39개국, 지원의사 표명 3개국, 그래서 당시 유엔에 가입된 국가 가운데 공산국가를 뺀 대부분의 나라인 63개국이 우리를 지원했다. 그들의 피와 희생이 오늘의 우리 “자유”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최근 “예배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이하 예자연)의 활동에 보니, 전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민사소송과 공직감사를 청구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지난 해 7월 8일 당시 총리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모두 발언에서 ‘최근 감염 사례를 분석해 보면 교회의 소규모 모임과 행사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모든 대면 예배 중단과 활동 제한 문제가 논의된다. 이틀 후인 10일 정부로부터 전국 교회에 시달된 내용에는 이와 같은 방역 금지 조항들과 위반 시 3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8월 19일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고, 이런 내용들은 강화되고, 8월 27일 청와대에서 가진 교계 지도자들과의 모임에서도 대통령도 ‘8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재확산의 절반이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예자연이 올해 3월 5일 국무총리실에 ‘감염 사례 절반이 교회에서 나왔다’는 진위여부를 질의하였고, 3월 12일 답신에서, 7월 5일부터 7일 사이, 교회발 확진자가 49.4%였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질병관리청 자료는 이와는 다른 퍼센테지를 차지하여, 다시 4월 1일 추가로 질의하니, 12일 답이 오기를, ‘2020년 1월부터 7월 7일까지 신천지를 포함한 종교 시설에서 발생한 확진자가 44%를 차지한다’는 동문서답의 황당한 답을 들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신천지가 기독교로 편입되었나? 총리의 정확하지도 않은 자료에 의하여 한국교회가 지난 1년 동안 ‘종교의 자유’ 즉 ‘예배의 자유’가 침해를 당했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인간에게 ‘자유’는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자기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타인의 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함이 있다면, 이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겠는가? 이 땅에서의 자유는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잠시의 방심을 틈타서, 그것을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부는 지난 2월 1일 중앙재난대책본부 방역총괄반장과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의 입을 통하여, ‘(예배 환경이) 밀집도가 상당히 낮고,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사전 방역조치 등이 이뤄지기 때문에 교회에서 대면예배를 통한 감염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럼 코로나의 진원지처럼, 온갖 비난과 저주와 욕설을 해댄, ‘교회발’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정말 자유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모든 자유의 근본이요, 시작임을 인식하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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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자유의 가치, 종교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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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미얀마의 민주화, 북한의 인권’
- 미얀마에서 지난 2월 1일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유혈사태가 벌어져 세계를 경악케 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난과 제재를 가하는 등,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입장들이 거세지고 있다. 미얀마(옛 이름은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48년 버마 연방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1962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2011년까지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는 미디어, 기업, 산업체를 국유화시켰으며,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1991년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1990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여전히 군부가 통치를 하였다. 그러다가 2015년 총선을 통해 NLD가 다시 압승을 하여, 2016년 비군부 출신이 최초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리고 2020년 다시 총선을 통하여 NLD가 대승을 거뒀지만, 군부가 이를 거부하고 2021년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로써 미얀마는 민주화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폭력과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묵인해서도 안 된다. 국제 사회는 무력과 폭력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미얀마 쿠데타 세력에 대하여 보다 강력하고 엄중한 경고를 보낼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도 지구상의 모든 폭력과 살인, 무력과 독재의 해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 나라들이 민주화와 평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도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하셨다. 그런데 미얀마에만 이런 폭력과 살인 군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하고, 헌법상에 우리 영토에 해당하는 북한 지역에서도 지속적인 인권 유린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오픈도어선교회가 매년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 순위를 보면, 지난 2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국가가 북한이다. 북한 당국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의 억압과 탄압으로 최악의 인권 유린국가로 악명을 떨친다. 현재 3만 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김일성 이후 3대 세습과 함께, 현재 김정은 1인 독재를 위하여 주민들이 희생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이런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바람을 불어 일으키는 것이 탈북민들에 의한 ‘대북 전단지’이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15일 국회에서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개정)이 통과 되었다. 이 법은 2021년 3월 30일부터 발효되며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게 된다. 북한 인권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대북전단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가? 북한 김정은 정권의 독재와 폭력, 자유와 인권 탄압의 심각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를 우리 정부와 국회가 막은 것이다. 또 문재인 정부에서는 유엔에서 북한의 인권결의안을 채택하는데, 공동 제안국에서 3년 연속 빠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국제 사회는 한국을 인권탄압의 동조국가로 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왜 2,500만명 북한 주민들의 인권 유린에 대하여는 외면하는 것인가? 미얀마의 민주화에 대하여 한국 사회에서도 그 군부를 비난하고 민주화에 동조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2월 2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기도와 연대를 요청하였다. 또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등도 호소문을 발표하였고, 교계 연합 단체들도 미얀마를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천주교 쪽에서도 3월 25일 서강대에서 미얀마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불교계도 3월 23일 조계종 중앙종회가 미얀마 민주화 지지와 군부의 폭력진압 반대를 촉구하는 성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한국기자협회, 한국PD협회 등이 미얀마 시민불복종 운동에 연대한다고 하였다. 대단한 일이다. 다른 나라 민주화에 이처럼 종교계, 언론계가 발 벗고 나선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 동포요, 통일시대 함께 살아야 할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서는 이처럼 성명서를 내고 연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의 인권과 북한의 민주화는 중요하지 않은가? 미얀마의 인권보다 북한의 인권은 그보다 못한 것인가? 미얀마의 민주화의 중대성을 깨달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하여 함께 힘쓸 때이다. 마침 부활절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인류, 거기에는 북한 주민의 생명과 영혼, 인권까지도 포함되며, 그들도 살리시기 위함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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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미얀마의 민주화, 북한의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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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法務部-法無部-無法部’
- 요즘 세상을 보면 국민들은 정치가들을 막 비판하고 욕을 해도, 그래도 그들을 통해서 국민들은 좋은 정치를 바란다. 그만큼 정치는 국민 생활과 연관이 있고, 국가의 미래와도 상관이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정치가나 정치를 보기 어려운 시대이다.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다양하고 원하는 것도 많기 때문인가? 옛날에는 어땠을까? 노자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다. ‘제일 좋은 군주(왕-대통령, 정치가)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군주이고, 두 번째는 백성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군주이다. 그 다음 군주는 백성들에게 공포를 주고 백성을 힘들게 하는 군주이다. 그리고 가장 나쁜 군주는 백성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군주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치가를 가졌는가? 대통령은 차치(且置)하고 가장 법을 잘 알고, 그 아는 만큼 지켜야 할 법무부장관을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 들어 최근 몇 명의 법무부장관을 지낸 인사와 차기 장관이 될 후보자를 우리는 보고 있다. 먼저 J 장관을 살펴보자. 그의 딸은 무시험으로 여러 대학에 들어갔고, 성적이 부진한대도 장학금을 받았다는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의학논문에 제1저자로 등재하는 일도 있었다. 또 아들의 온라인 시험에 맞춰 자료를 전송해 주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표창장 위조까지 하여 대학 진학에 이용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의 행태에서 ‘아빠 찬스’라는 말이 나왔다. J 장관 사태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그가 추구하는 정치와 그 집권 세력으로부터 많은 국민들이 돌아서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도 그는 분명한 사과도 없이 장관직을 지냈다. 그 뒤를 이어 C 장관이 ‘검찰개혁’을 필두로 보무도 당당하게 장관직에 나왔다. 그의 안하무인(眼下無人)적인 태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신물이 나게 하였다. 그는 검찰개혁을 한다며, 여러 번 헛발질을 하였다. 그의 어록을 보면 그의 일면이 나온다. ‘검찰총장이 제 명을 거역했다’ ‘장관 말을 겸허히 들었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지휘랍시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국회에서의 발언에서는 ‘소설을 쓰시네’라고 답했다. 아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국민들에게 사과는커녕 ‘검언유착이 심각하구나 또 한번 감탄하고 있다. 아이가 굉장히 화가 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행태는 국민들로부터 지탄과 좌절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엄마 찬스’라는 유행어를 돌게 만든 장본인이다. 도대체 법의 정의(定義)인,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은 아는가? 그가 거느린 법무부는 정부업무평가에서도 최하위인 C등급을 받았다. 게도 구럭도 모두 놓쳤다. 거기에다 법무부의 차관을 지내는 L 차관은 전에 자기를 태워다 준 택시기사에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았던 사람이다. 이것을 또 경찰은 봐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뿐인가? 다음번 장관후보자로 지명된 P 후보자는 과거 국회에서의 폭력사태, 재산신고 누락, 과태로 체납, 사법고시생 폭행 논란 등 마치 양파 까기처럼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법치 수호에 대한 인식과 정치 중립에 대한 태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그래서 P 후보자는 장관은 고사하고 공직자 자격도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인가? 법을 가장 잘 지키고, 이를 적용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법무부(法務部)를 법무부(法無部) 무법부(無法部) 심하게는 범죄부(犯罪部)로 부르는 일까지 생겼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공직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빗나간 소신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공직에 앉는 것은 금물이다. 사실 국민들은 장관의 이름을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이 그저 묵묵히 공직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관 한 사람을 뽑을라치면 온갖 추문과 잡다한 과거의 행적들이 쏟아져 나오니 국민들은 장관후보자만 나오면 그들의 모든 역사(?)를 좔좔 꿰고 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빌3: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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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法務部-法無部-無法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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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종교계의 정치적 시국선언을 보면서’
- 최근 우리는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희한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통령이 똑같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이 공동목표인 ‘검찰개혁’을 한다면서, 연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눈만 뜨면 그 얘기가 그 얘기인데, 결론은 없고 듣기 민망한 모습들만 난무한다. 국민들은 식상하고 짜증난다. 이를 좋게 포장하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진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과연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밖에는 안 되는 것인가? 주제는 ‘검찰개혁’인데, 정작 검찰개혁의 핵심은 어디 가고, 자존심과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다는 생각은 나만의 판단일까? ‘검찰 개혁’이 필요한 것은, 검찰의 지나친 권력에 대한 힘 빼기와 또 검찰이 비록 살아 있는 권력이라도 그 잘못이 있다면 이를 견제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검찰개혁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바이러스로 매일의 삶이 불안하고, 먹고 살기가 팍팍한 서민들에게 불안한 부담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신문에서는 이런 살벌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싸움에서 검찰총장이 5전 5승을 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는 평검사들의 의견, 법무부 감찰위의 결정, 서울행정법원의 판결, 법학교수들의 의견, 판사 회의의 결과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를 평가하면서 ‘우격다짐의 무리수...추 장관 판정패’라는 주제도 달려 있다. 즉 정치 대 법치의 싸움에서 법치가 이기고 있다는 평가일 것이다. 국민들의 생각도 검찰 개혁에 대하여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지난 8월 모 지상파 방송사의 여론조사에서 보면, 검찰개혁의 방향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52%로, ‘잘하고 있다’는 41%보다 높았다. 또 비슷한 시기 4개의 여론조사기관이 공동으로 조사한 것에서도, 52%가 ‘검찰 길들이기로 변질되는 등 당초 취지와 달라진 것 같다’는 응답이 높았다. 지난 12월 10일 검찰개혁과 괘를 같이하는 ‘공수처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잘못한 것’이라는 응답이 54.2%로 ‘잘한 것’이라는 39.6%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뭔가 국민들의 생각과 여론과는 다른 방향으로 ‘검찰개혁’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종교, 학계, 시민단체들은 앞 다투어 검찰개혁에 대한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일부의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이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있는데, 대부분 정부(법무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불교 단체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검찰은 스스로 개혁을 완수할 힘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이 윤석열 총장과 최근 검찰 조직의 행태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됐다. 이 싸움에서 검찰이 이기면 대다수 국민은 그들에 의해 언제고 누구라도 간첩이나 범죄자로 내몰릴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 원불교의 교무들도 ‘촛불정부라면 마땅히 개혁을 완수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반대하는 야당을 비난하고 있다. 천도교인들도 ‘대표적인 적폐 기득권, 검찰을 개혁해야 합니다’라며, 검찰은 공수처가 답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NCCK도 ‘검찰 개혁이 적폐기득권 구조를 청산하는 분수령이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역에 걸친 검찰의 기형적 과잉권력 행사를 중단시키는 시민사회의 명령임과 동시에 정의, 평화, 생명을 펼쳐나가라는 하나님의 선교 과제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며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종교계도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에 관한 시국선언을 할 경우에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한결 같이 법무부와 큰 권력을 가진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국민들의 다수는 그것이 지나치고 잘못되었다는데, 종교계는 한쪽의 입장만을 지지하니, 국민들이 종교계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개혁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있는 것을 뜯어고친다고 모두 개혁은 아니다. 또 개혁의 방향과 목표가 정당하다하여도, 그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하고,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시대는 아니다. 절차와 방법이 제대로 되어도 이를 준용하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본래의 목적에서 빗나가는데, 그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도외시한 종교계의 시국선언은 정의와 공정 입장에서 위태롭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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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종교계의 정치적 시국선언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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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것이···'
- 요즘 나는 조금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다소 놀라게 되었다. 어떤 한 승려가 다른 한 승려를 조금은 심하다싶게 나무랐는데, 그 꾸지람을 당한 승려가 너무도 쉽게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를 해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이 사태를 지켜보고서 상당히 놀랐다. 물론 그 사과를 한 승려가 꾸지람을 당할 만한 일을 했었기에 잘못했다고 사과를 한 것이라고 본다면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비록 누가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적당하면 그냥 당하지만은 않는다. 반드시 나무란 상대를 되받아쳐 상대를 그로기 상태로 몰거나, 아니 걸핏하면 명예훼손이니 무어니 하며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덤벼든다. 우리 현실 가운데서 익히 보아온 바이다. 그런데 이런 볼썽사나운 현실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지금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현각 선사(禪師)와 혜민 선사이다. 푸른 눈의 수행자로 불려온 미국인 현각 선사가 요즘 한창 구설수에 오른, 베스트셀러 명상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선사를 가리켜 “속지 마 연예인일 뿐이다. 일체 석가모니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도둑놈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혜민 선사에게 우리가 보기에도 승려 같지 않은 구석이 다소 엿보이기는 했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같은 불교계 인사가 상대를 ‘속지 마 연예인’이라고 평한 것이야 접어둔다고 치더라도 ‘도둑놈’이라는 지극히 모욕적인 언사를 써서 비난한 것까지 참아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혜민 선사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나온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혜민 선사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인물만은 아니다, 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본다. 동시에 불교계도 일단 한숨 돌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문화계의 기린아들이라고 할 두 인물이 맞붙어 티격태격한 일이 있었다. 조정래 작가와 진중권 평론가였다. 이들의 언쟁을 옆에서 지켜본 우리로서는 뒷맛이 매우 떨떠름했다. 문단의 대선배를 무시하기냐 하는 식으로 나온 조정래 씨나, 어디 고소할 테면 해 봐라 멋들어지게 붙어줄 테니까, 식으로 나온 진중권 씨나 옆에서 보기엔 고집불통들 간의 진흙탕 싸움 같이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현각과 혜민 두 승려들의 멋들어진 결말과 같이 시원하게 끝난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결말도 무엇도 없이 흐지부지 돼버린 꼴이어서 뒤끝이 개운하지 못한 결과만을 낳았다고 보겠다. 어떤 계기만 만나면 둘이 또다시 폭발할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만 남겨 놓은 모양새라고나 할까. 미국의 2020년 대선의 결과는 이미 발표된 232 대 306이란 선거인단의 확보수가 말해 주듯이 바이든의 압도적인 승리로 장식됐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결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옆에서 보기에,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인 미국인 투표권자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속된 말로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겠다. 마치 백(白)을 백이라 인정하지 않고, 흑(黑)을 흑이라 인정하지 않는 꼴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트럼프는 그러면 어쩌자는 말인가. 이번의 선거를 그는 마치 한판의 트럼프 놀이쯤으로 치부하자는 말인가. 이게 어떻게 한판의 마작놀이나 화투놀이나 트럼프 놀이로 돌려놓은 수 있는 판이란 말인가. 지금 그는 이 선거판에서 마치 “한 수 물려줘”라고 떼쓰는 장기나 바둑판 놀이의 선수들처럼 극도로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속된 표현처럼 아더메치의 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바이든이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그가 꼭 잘나서(잘해서) 그랬다, 라고는 보지 않는다. 트럼프가 형편없어서 그 반대급부로 이득을 본 결과 바이든이 이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나의 판단은 결코 나만의 판단만은 아니고 거의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형편이 없었다. 더구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더욱 형편없었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리드해 오던 관행을 그는 거의 걷어차 버렸다. 대신 강자(강대국)의 자리를 이용해 약자(약소국)의 돈이나 탈취해 보려고 애쓰는 장사치의 수준으로 제 나라를 격하시켜 버렸다. 그가 수준 미달로 보이게 만든 큰 증거는 바로 코로나19에 대처한 그의 무(無)대처, 무능력의 실상이었다. 지금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는데도 그는 노(no)마스크만을 자랑하듯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더 일러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짐짓 선거부정을 날조해 미국(인)을 여와 야, 또는 좌와 우의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이전투구들로 만들려 하고 있으니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결국 그는 혜민 선사처럼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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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잘못했습니다” 하고 떠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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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도를 넘은 사제(司祭)의 기독교 비난
- 며칠 전 모 중앙일간지에 가톨릭의 어느 사제가 ‘우상 숭배와 이단’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언젠가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이 ‘우상숭배’라며 가톨릭의 성모상에 흙칠을 했다는 것과, 모 신학대학의 교수가 성도 가운데 불교의 사찰에 ‘우상숭배’라며 피해를 준 것을 보고, 그 것을 보상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했는데, 그를 그 신학대학에서 표창하기는커녕 이단으로 몰아 교수직을 박탈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선행과 교리적인 문제는 별개인데) 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부처상이나 가톨릭의 예수상이나 성모상, 성인상을 이단이며, 우상숭배라고 하는 기독교인의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님을 들면서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불자(佛者) 가운데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그들을 가톨릭에서는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익명의 크리스천이라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제는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며 우호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난일변도이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의 목회자들을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제는 어떤 목사를 이단으로 보고 있는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도시간보다 헌금 내는 시간에 기뻐하는 목회자들, 십일조 안 내면 암에 걸린다고 종교적 협박을 하는 목회자들, 신도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머리 당 얼마’라며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현대판)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이고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안티기독교 언론이 보도하는 수준의 것들을 귀 담아 듣고서, 이를 편집한 듯하다. 가톨릭의 영성심리의 중요 직함을 가진 사제가 중앙일간지를 통하여 이렇듯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은, 그 사제 나름에는 기독교에 대한 상당한 반발심과 불편함이 있는 듯하다. 아니면 가톨릭을 대신하여 기독교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제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타종교의 극히 일부 문제를, 영향력 있는 언론에 공개적이며 거칠게 그리고 지독히 부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양식(良識) 있는 종교인으로써는, 그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사회적 책임감이 있는 언론도 종교간 비난을 하는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신문 지상에 게재한 것도 이상하다. 혹시 반기독교적인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든다. 종교간 비판이나 비난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자기 종교의 ‘다원주의 기준’으로 남의 종교를 이단이나 우상숭배로 비난하거나 남의 종교의 내부 문제를 일방적이며,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자세이며, 종교인의 품위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 아는 바처럼, 16세기 가톨릭의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유가 뭔가? 로마 교황청이 비성경적인 면죄부(Indulgence) 판매를 허용하므로 이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를 위한 사제들의 설교는 ‘연보궤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주장한 것은, 로마 교회와 교황의 부패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도 가톨릭과 기독교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구원론의 차이, 기독론의 차이, 성경관의 차이, 교회관의 차이, 예배 내용의 차이 등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이 지면에서 자세하게 나타낼 수는 없으나, 보다 성경적이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종교개혁을 하고, 그 후예(後裔)들이 기독교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관을 따르는 기독교에 대하여, 아주 일부의 목회자의 목회 윤리와 건덕의 문제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는 누가 보더라도 거친 표현이며, 충분히 오해와 종교간 갈등으로 비춰져,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매우 긴장하고 고통과 불안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 이런 힘든 때에 종교 간의 협력과 화합을 주장하지는 못할망정, 난데없는 우상숭배와 이단 문제를 들먹거리며 이웃 종교를 비난하고 그 성직자들을 모욕하는 태도는 아주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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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도를 넘은 사제(司祭)의 기독교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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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천 목사의 토요시평] 항우와 유방, 그리고 후흑학의 문제
- 요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의 여파로 방콕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의 적적함을 벗어나고자 필자는 부득불 문학작품 읽는 일에 빠지게 되었다. 지난날 읽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자꾸 미루기만 했던 작품들을 이번 기회에 읽어내는 것도 괜찮은 수확이겠다 싶어서 그 미뤄두었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럴 때 손에 잡히는 책들은 단권(單券)짜리 단행본보다는 아무래도 여러 권(券) 형식의 대하소설 같은 게 취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 지금껏 읽기에서 미뤄져 왔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딘 속도로 다섯 권짜리, 또는 세 권짜리 장편 역사소설류들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 네댓 가지 국내외의 것들 가운데서 필자가 특히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작품이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항우와 유방>이란 것이었는데, 이는 원래 <초한지>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여러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느끼게 되는 첫 번째 감정이 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뛰어난 용장인 항우(項羽)가 별 볼일 없는 용렬한 장수 유방(劉邦)에게 최후 참패를 당하게 되었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이 의문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서자 거개가 일으키는 반응이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항우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하고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오강포(烏江浦)에까지 도달해 그가 최후로 탄식하는 말을 발한 뒤 자결을 하는 장면에 이르러 가슴이 쓰렸다고 해야 할까, 공허감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정상적이지 않은 미묘한 감정에 스스로 빠져버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항우에 대한 독자로서의 미련이 계속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의미이다. 나는 항우가 마지막으로 자결을 감행할 때, 적장인 유방 앞에서가 아닌, 단지 현상금을 욕심내어 뒤쫓아 온 이름도 없는 졸개들 앞에서 그가 자결을 감행해야만 했던 처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적장 유방 앞에서라도 떳떳하게 마지막까지 자웅을 결하다가 역불급(力不及)으로 전사하기라도 했었다고 한다면 차라리 독자로서도 덜 분하다는 감정이 일어날 법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사체(死體)가 욕심(재물욕과 출세욕)으로 가득 찬 적진의 졸개들에게 찢겨져 하나의 현상(懸賞) 전리품으로 다섯 동강으로 나눠진 식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독자로서의 마음이 절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점과 관련해 그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들 가운데 아래와 같은 뜻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음을 보면 그 안타까운 심정을 알만도 하다. 항우는 오강포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반대편 강안(江岸), 곧 고향 가까운 강남땅으로 달아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때는 배가 그 단 한 척밖에 없었으므로 뒤쫓아 온 적병들이 항우를 따라잡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가 강을 건너간 뒤 충분히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중국의 천하통일이 유방에 의해서가 아닌 항우에 의해서 이루어졌을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다. 배의 주인인 오강(烏江)의 정장(亭長)도 항우에게 빨리 이 배를 타고 도강하면 추적자들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며, 건너편 추종자들은 당연히 많아질 것이라고 재촉했지만 항우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이렇게 응수하였다. “설령 강남의 어른들이 나를 가엾게 여겨 다시 왕으로 추대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겠소? 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일이겠소?” 곧 면목 없는 일, 부끄러운 일,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항우는 나이 비록 어렸지만 지금껏 그런 기백으로 살아온 청년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목숨 부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항우는 대하역사소설의 인물군(人物群) 가운데서 장렬한 비극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뛰어난 인물로 보인다. 요즘 출세주의가 판을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쳐서 이기고 보자, 또는 어떤 식으로든 최후 승자가 되고 보자는 식의 처세술이 횡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말기의 리쭝우(李宗吾)가 제창한 마키아벨리식 후흑학(厚黑學)의 영향도 적잖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후안(厚顔)과 흑심(黑心)을 숨긴 채 어떻게든 상대를 꺾어야 한다는 배포다. 항우를 무너뜨린 유방의 처세술이다. 뻔뻔함[厚顔]과 음흉함[黑心]을 무기로 내세우는 이 처세술이 정계, 재계, 문화계, 종교계… 어느 분야에서든 만연할 때, 이 나라의 질서는 혼란해질 것이며 나라의 앞날도 총체적으로 위태로워질 게 아닐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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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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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천 목사의 토요시평] 항우와 유방, 그리고 후흑학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