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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바다 희망을 열라-홍 성 표 목사
    말세론은 세상의 끝을 말하고 종말론(eschatology)은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지금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카이로스의 시기이다. 역사는 순환도 아니고 반복도 아니며 항상 새로운 역사이다. 온고지신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 아니라 본래의 나무에 새로운 가지를 접목 시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나무에 우리들은 가지일 뿐이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영양을 섭취하고 열매를 맺게 된다. 한국교회의 지금의 현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를 상실 한 듯 같고 그 나무의 가지도 아니어서 진리와 생명의 자양분을 먹을 수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나무가 많은 과실을 맺으려면 위로부터 받는 햇빛을 잘 받아야 하고 땅으로부터 영양을 충분히 빨아들이며 가시덤불이나 여러 가지 장애물들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부터 해방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첫째, 권력으로부터 자유이다. 권력은 인간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특히 근대로부터 현대의 막강한 국가 권력은 인간의 자율권을 강제로 통제하고 사상과 천부적 권리마저 제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힘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권력의 울타리와 손아귀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을 밝혀내고 선은 권장 하여 시대적인 지표가 되고 본이 되는 사명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에 행동과 실천을 하는 사표가 되어야 한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에 타협을 하거나 아부 아첨, 굴종을 하는 자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도 될 수 없다. 둘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물질을 축적하거나 더욱이 부정한 방법으로 물질의 소유와 탐욕을 부린다면 이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힘 있는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아부와 아첨을 하며, 힘없는 자는 짓밟고 멸시와 천대를 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본질도 아니며 예수의 제자는 더욱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과 하나님을 겸이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속의 맘몬주의나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할 만한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도덕적, 윤리적 가치도 없다. 그것은 교회 자신이 맘몬과 황금의 가치에 매몰 되어 살기에 그렇다. 교회는 자본주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계급과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사회를 분열 시키는데 중심에 서 있다. 이것은 교회가 사랑과 회해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incarnation)의 삶을 왜곡 시키는 반 그리스도인적 행태를 조장하는 것이다. 교단의 임원 선거에 돈을 뿌리는 경쟁을 하고, 물질적 가치를 유도 하는 것은 죄악이다. 모든 교회 행사에 물질이 중심에 있다. 모든 관계에 황금이 터전이 된다. 이것은 역사를 병들게 하고 망하는 지름길이다. 물질은 소유의 가치가 아니라 나눔이고 더불어 사는 생명의 자원이 되어야 한다. 물질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 된 교회이고 사이비 이단이다. 결코 성서가 말하는 교회는 아니다. 세째,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총무나 어떤 단체의 임원이 되고자 갖은 추악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 한다. 카톨릭은 교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영적 계급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개신교(Protestant), 특히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는 새끼 교황의 흉내를 내는 명예를 버려야 한다.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공동체의 임원이 되는 섬김과 봉사의 자리가 되어야지 그것을 무슨 목회나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벼슬인 것처럼 아귀다툼을 하고 그 자리에 가면 세속의 수장처럼 추악한 모습을 사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타락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가장 어려운 말은 예를 할 때와 아니오를 말 할 때 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진정한 사랑의 터를 만드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을 통해서 인간의 영적 근거는 무너지고 썩어진다. 권력과 물질의 힘을 빌어 인간들은 명예를 사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인가? 내가 소속 된 기장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교권을 통하여 교단 공동체와 한신의 학문의 장이 더럽고 추한 전장터가 되어 있다. 모두가 거짓되고 그들의 타락한 교권을 보고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눈치를 살피고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그 교권과 하찮은 명예욕을 떨쳐내지 못하고 모든 악한 수단들을 다 동원 하고 있다. 교단의 사령탑과 부서의 장들이 공금을 마음대로 쓰고도 모르쇠를 하고 자기 정당화, 합리화 하고 있다. 진실과 정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억울한 자의 인권을 변호 하고 불의한 역사를 바로 세우며, 분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증거 하려면 권력과(교권), 물질, 허무한 명예의 탐욕과 소유의 유혹으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101회 총회에서 방향이 확정 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08
  • 9월 총회와 한국교회-홍 성 표 목사
    무더운 찜통더위가 어느 해 보다 지루하게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한 순간에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간다. 홍만표와 진경준 그리고 우병우의 비리와 부럽 사실들은 국민과 서민 대중 그리고 하루벌이에 온 몸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민중들에게는 분노와 울분을 넘어 서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게 하는 좌절과 절망을 절감하기에 넘친다. 성완종의 의문의 자살과 이인원 롯데 그룹 2인자의 사회와 기업들 고위층들의 비밀 은폐와 총수 살리기 등의 자살은 이 사회의 많은 비극이 도사려 있다. 특별 감찰관 이석수의 어이없는 사표와 빈집 압수 수색, 우병우의 종합 비리 민정수석을 끝까지 감싸고 지키려는 알 수 없는 의문과 그렇게 하난가 되어 정권 유지를 위한 갖은 야합을 해 오던 조선일보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 죽이기와 조선일보와 청와대의 싸움, 권력과 언론의 야합과, 권력과 언론의 죽이기 등을 보며 한국 사회의 현 주소를 본다. 조선해운 특히 한진해운을 둘러 싼 해고의 열풍이 예산 된다. 이 사회의 비리와 갈등,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법은 날이 갈수록 깊은 늪 속에 빠져 간다. 부자와 빈자의 골 깊은 양극화, 금 수저와 흙수저의 평행선 남북의 분단과 동서의 분열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분열 현상 등 우리의 모순은 산 같고 바다 같다. 이러한 사회 현실 앞에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만 되는가? 교회는 이러한 모순과 부정의 앞에서 정의와 평화 사랑과 희망을 선포할 수 있는가? 교회 안의 비리와 성적 문란과 교회 안의 분열과 가정의 해체가 증가 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래도 쉬지 않고 복음을 외쳐야 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수와 진면목이 있어야 하고 복음의 능력이 발휘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 안에 복음에 대한 능력은 있으며, 어떤 복음을 외쳐야 하는가? 오곡이 무르익어 농부들의 땀과 하늘이 주는 자연의 은총으로 먹을거리는 넘쳐 난다. 자연도 사람들의 노력도 위대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위대하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 현실은 기본적 삶의 가치와 윤리와 도덕의 기초마저 허물어 지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과 회개는 고사하고 거짓과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 하고 있다. 총회의 공금을 횡령 하고도 그것에 대한 뼈저린 참회는 고사하고 교권의 힘과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으며, 교권의 구조악을 청산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그 교권의 세습을 위하여 갖은 권모술수와 추악한 방법들을 동원 한다. 교단의 총회는 거룩한 성회인가? 덩치가 커지고 물질과 조직이 커진 교단들이 세속 정치판을 그 대로 답습하는 흉내를 내거나 한 술 더 떠서 축적 된 돈을 소비하기 위하여 안달이 난 듯 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출을 위한 후보들의 난립은 가히 춘추전국 시대와 같다. 더민주의 대표를 뽑는 전당 대회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공청회와 선거전 양상이다. 한국 교회의 상실된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내일을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면 내일에 대한 예측은 충분하다. 규모에 상관없이 시간과 물질을 허비 하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통한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임원 후보들 간의 인신 공격적 네거티브가 서로의 존재와 본질을 왜곡시킨다. 권력의 속성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거나 없애는 잔인함이 있다. 교회의 교권도 그와 못지않다. 과거 중세의 가톨릭의 종교 재판소를 통한 교권의 잔혹성과 오늘 날의 교권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잔인하고 추악한 모습들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성과 속의 차이를 무엇으로 가릴 수 있는가? 임원에 입후보를 하고자 하면 우선 막대한 후보 등록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돈이 없는 목사나 장로는 후보 자체를 단념해야 한다. 거기에 선거 운동비가 막대 한다. 적어도 1억에서 수억원이 들며 큰 교단들은 수십억이 소요 되고도 당선 되지 못한 사례들이 있다. 가끔 교단과 노회들의 송사가 있다. 그 때 나오는 논쟁들이 교회 안에서 아니면 교단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야지 세상법이나 법정에서 다투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거나 성서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잘못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문제를 정의롭고 공평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 혹은 교회법을 잘 적용하느냐의 문제는 그렇지않다라는 결론이다. 지금은 성과 속을 가릴 수 없는 혼돈의 세계에 산다.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의 거룩을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운 자업자득의 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구를 통치 하거나 다스리는 권력이나 벼슬이 아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역사와 교회 공동체 앞에서 정직해야만 한다. 이 시대 한국 현실에서 진정한 복음의 역사가 희망적 창조를 이루려면 한국교회가 먼저 정의가 바로 서는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9-01
  • 우리가 가야할 길의 어느 인도자-임 영 천 목사
    우연이랄까, 8월의 인물을 살펴보다가 필자의 눈이 갑자기 멈춘 데가 있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극(劇)에 맞서서 슬기롭게,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한 스웨덴의 외교관, 이른바 ‘스웨덴판 쉰들러’라고도 불리우는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란 인물이었다.독일인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는 ‘쉰들러 리스트’란 이름의 전기소설(傳記小說)과, 동명의 영화(映畵) 때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스웨덴판 쉰들러’ 라울 발렌베리는 그 쉰들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낸 영웅적이고도 전설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울 발렌베리(1912~1947)는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 전인 1912년 8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웨덴 1급의 사업체인 발렌베리 금융그룹의 후손으로 태어나 청년 시절 건축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당시 나치 독일 치하의 복잡한 국제 관계 때문에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몸을 담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그곳의 유대인 구출 작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자 그대로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여권 작성에 필요한 서류 위조행위는 물론, 지휘자 급 독일 고관에게 때로는 무서운 협박과 회유, 매수 등 그의 젊음을 바쳐 한 사람의 유대인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였다. 아마도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존귀하고, 그 때문에 유사이래 ‘최악’의 인간 학살극이 자행되고 있는 그때, 그곳에서 ‘최선’의 인명구출 방법이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였던 것 같다.이 상황을 일대위기로 파악한 나치 최대의 살인마(일명 ‘사냥개’)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 그(라울)의 처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그때 히틀러는 아이히만에게 이렇게 답했다 한다. “그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 히틀러조차도 이제 갓 30대에 진입한 스웨덴 청년 외교관 발렌베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어떤 단안을 내리기를 원치 않았던 때문이었다.어떻든 발렌베리는 당시의 이런 여건을 최대한 이용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을 거의 10만명가량이나 구출해 내었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숫자는 쉰들러가 유대인을 구출해 낸 숫자(최대 1,200여명)에 비해 상호 비교가 안 되는 숫자이며, 또 당시 ‘영국판 쉰들러’라고 불리어진 니콜라스 윈턴(1909~2015)이 체코 내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구출해 낸 숫자 수백명(669명?)에 비해서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숫자였던 것이다.그러나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1945년 1월 부다페스트 외곽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그를 만나자고 하여 그가 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은 그를 소련으로 압송했다. 이때쯤 해서 그에게는 독일의 스파이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그의 약점을 이런 식으로 잡아놓고 소련 정부는 그에게 무례하게도 모국(某國)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를테면 그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 정보원으로 활동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그럼에도 소련 정부는 끝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문은 지속되었고 그의 건강은 30대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망가져 갔다. 후에 그들은 그를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도 계속된 심문과 고문 때문에 실제로는 젊었던 그였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늙은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스웨덴 쪽에서 혐의를 보이자 수용소 측은 그가 건강하게 잘 있다고 둘러대었다.소련 정부는 발렌베리를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를 그대로 방면할 수도 없었다. 이판사판의 처지로 몰린 소련 정부는 결국 1947년 7월 그를 처치해버리고 말았다. 약을 타러 간다고 그를 딴 곳으로 유인해 내어서는 결국 치명적인 약물을 투여해 그의 목숨을 끊어놓고 만 것이다. 꽃다운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라울 발렌베리는 오스카 쉰들러처럼, 또는 니콜라스 윈턴처럼 인도주의적인 ‘선행’으로 그의 젊음을 불태우다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우리나라 윤동주 시인처럼, 또는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사처럼 타국 관리의 ‘악행’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였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껏 발휘해온 강렬한 빛은 온 누리에 퍼져 우리의 갈 길을 밝게 인도해주고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8-18
  • 뜨거운 피 ‘8·15’ 식어버린 민족혼과 얼-홍 성 표 목사
    독립운동은 제국주위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 구성원들의 민족적 운동을 말한다. 구국운동은 반식민지 상태를 극복하려는 구국운동이지만, 독립운동이란 식민지의 나락에서 일종의 식민지로부터의 진정한 민족과 국가적, 민중적 해방 운동인 것이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거절당한 상태일 것이다. 그것은 첫째, 신체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공간과 시간의 제한적 삶이고, 두 번째로 인간의 양심과 얼과 혼이 갇힌 상태이며, 이간의 가치와 의미의 추구가 상실 되도록 되어진 여러 가지 환경 속에 사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1905 년 강제 을사늑약을 통하여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여기에 의분을 떨치지 못한 선조들이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결행하였다. 5년 후인 1910년에는 마침내 이 강산은 구한 말 강대국들의 야수들에 갇혀 있더니만 일제의 침략 야욕에 국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나라를 잃고 민족은 새로운 독립을 위해 싸워야만 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와 권리, 존엄성과 자존감이 파괴 되고 침해당하는 모든 갇힌 삶은 지옥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도 교회는 소위 복음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백만이 구령 운동을 시작하였다. 현실에서의 절망과 희망 없음을 복음을 통한 내세, 차안이 아닌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며 이 난국과 지옥의 문을 열고자 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말세신학”은 세상의 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목말라 하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는 것이었는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권리와 자유, 평화와 정의가 바로 서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성은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진정한 복음은 일제의 식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잃어버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며 상실된 민족혼과 얼을 되찾는 길이 곧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회복이란 말이다. “얼 빠졌다. 넋(혼) 이 나갔다” 얼이 빠지고 혼이 나간 자는 살아 있어도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이며 악의 세력에 아부 아첨하며, 민족과 동족을 팔아 호의호식 하는 매국노들은 인간의 탈은 썼으나 사람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기미년 3.1운동과 숱한 애국지사들과 민중들이 피 흘리며 투쟁해 온 광복 71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미국에 종속된 식민지배 아래 살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광복의 시간은 동시에 분단의 시간이고 새로운 종속의 시작의 시간이었음을 똑똑히 이해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의 현실을 분명히 이해하였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하고, 이러한 종속과 식민 지배에서 해방운동을 해야만 한다. 광복은 분단 역사의 시작이다. 일제하에서 민족의 앞날은 전쟁을 잉태하고 지금까지의 두 국가를 낳았다. 일제의 잔혹한 역사와 그들에게 민족을 팔고 살아 온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고 분단 속에서 그나마 남한의 반쪽 국가에서의 새로운 식민지적 삶을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아직도 독립 되지 못한 해방 전선에 서 있다. 우리 스스로의 군에 대한 작전권이 없고,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결정권이 없으며, 우리 민족의 문제를 우리가 풀 수 없도록 옥죄는 내외의 세력에 짓눌려 있다. 일제 치하에서의 신사참배의 굴욕적인 배교 행위뿐 아니라 미군정의 구호물자에 예수의 혼과 얼을 다 빼앗기고 사는 한국 교회의 현실은 역사에서의 퇴출 위기에 서 있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우리 선조들과 이 땅을 몸으로 지켜 온 민중들의 피는 뜨겁고 용기 백배였다. 그러한 민족 해방의 힘은 미군 정하에서, 이승만의 독재와 독점, 독선에 대한 자유와 저항의 붉은 피를 흘렸으며, 5.16 군사 쿠테타의 박정희의 개발 독재와 일제와의 굴욕적 외교의 매국적 행위에 온 몸을 던졌으며. 전두환의 12.12에 대한 부당성에 대하여 광주 민중항쟁의 5.18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식민과 종속을 살고 있으며 구한말 보다 더 큰 민족적 위기를 살고 있다. 미·중의 새로운 패권 다툼 속에 끼어 진정한 평화 통일이 요원하고 긴장과 대립 속에서 강대국들의 놀음에 새로운 희생양이 될 처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얼이 빠져 있고 혼과 넋이 나가 있다. 사드 문제와 중국의 무역 보복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주, 민주 평화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광복을 이루어야할 절대 절명의 시간의 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국의 차원이 아니라 해방의 운동을 전개 시키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미·중의 패권 속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부활하게 하고 있다. 동북아의 정세는 세계 패권 다툼과 함께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교회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 얼빠지고 혼이 없는 기독교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얼과 혼을 회복하고 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을 시작하며 기도해야 한다. 단순히 정치인들과 도덕과 윤리도 없는 검찰이나 법 기관, 그리고 먹물 같은 지식인에게만 우리 민족의 앞날을 맡겨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온 몸으로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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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6-08-12
  • 연합과 일치에 대한 단상-강 경 신 목사
    지난 7월 10일 ‘제8회 장로교의 날’ 행사가 한장총 23개 회원교단의 교회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분열에 대한 회개를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연합과 일치를 한결 같이 기원하였다. 한국교회, 그 중에서 특히 장로교회는 그동안 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을 나름대로 꾸준히 노력해 왔다. 특히, 칼뱅 탄생 500주년인 지난 2009년에는 ‘장로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칼뱅의 출생일인 7월 10일에 장로교의 날 행사를 개최해왔다. 매년 행사 때마다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를 제창하며, 장로교의 분열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특별히 내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이기에, 올해는 여러 면에서 더욱 신경을 써서 준비하였다. 그 결과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인식과 교회의 선교방향 등을 잘 제시하였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동안 한국의 장로교는 불과 60여년만에 한 교단에서 3백여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한때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세계교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한국장로교의 급속한 분열은 세계교회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장로교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교회연합과 일치를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며, 지금까지 이 일을 힘써 왔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규모 연합행사와 연합예배, 강단교류, 신학심포지움과 세미나 등 나름대로 뜻 깊은 일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일치와 연합을 위한 ‘의미 있는 전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장로교는 그 구호에 맞게,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감하고도 개혁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가? 입만 열면 연합과 일치를 말하고, 그 필요성과 당위성은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여전히 구호는 구호로만, 행사는 행사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다. 표면적으로 교회지도자들은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앞장선다고 하면서도, 정작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개혁들을 하는 일에는 주저하거나 외면해 버린다. 한국장로교가 정말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고자 한다면, 각 교단들이 가지는 신앙과 신학, 교리와 전통에 대한 넓은 이해와 포용이 있어야 한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다’라는 말이 먼저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수용되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신앙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고, 신학을 정통과 자유주의로 구분하면서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남을 비판하는 일에 너무 익숙했었다. 특히, 일부 한국교회지도자들이 마치 ‘보수신앙이 대세이다“라는 식의 굳은 신앙관을 갖고 분열에 앞장선 것도 사실이다. 이는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이 갖는 지극히 독선적이고 주관적인 사고이다. 세계의 변화와 역사의 흐름에 민감하기보다도 자기 교회의 부흥에만 천착하는 지극히 좁고 편협한 신앙관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교단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타 교단에 대해 신학적인 편견이나 그릇된 선입견을 고수하는 것은 결코 연합과 일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진보신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경계심과 거부감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앞장서는 것은 표리부동하다. 이래서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는 없다. 여전히 한국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독선과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과감하게 깨뜨리고자 하는 변화와 개혁의 의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교회부흥에만 매달려 개교회주의와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은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 변화와 개혁을 항상 교회부흥과 축복에 귀결한다. 그러다보니 기복신앙이 여전히 교회들마다 활개를 친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가 있을까?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교회의 성장과 부흥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고난의 연대를 할 때 진정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 되고, 세상을 향하여 고난의 연대를 할 때에 진정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다. 이번 ‘장로교의 날’에서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국민출애굽하자’고 선언을 하였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출애굽은 광야로 가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광야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한다.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영화 ‘곡성’에서 주인공 경찰의 딸이 악을 쓰면서 아버지에게 소리쳤던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다. “중한거? 그것이 뭐가 중한디. 뭐가 중한지도 모름서” 부디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무엇이 중한지를 알며, 본질적으로 무엇을 개혁해야 할지를 깨달아,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29
  • 한국 장로교의 일치운동-홍 성 표 목사
    한국 기독교의 원년을 카톨릭의 경우 1774년으로 보고 개신교는 100년 이후인 1884 년으로 친다. 이때의 한국 역사로는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비롯한 홍영식과 박영호 등의 삼일천하의 갑신정변이 있었고, 이들의 개화당은 독립당이라고 한다. 기울어 가는 유교의 나라 조선은 풍전등화 였고, 이러프영러일미의 강대국의 맛있는 한 손의 요리 감으로 민족과 나라의 운명은 슬프고 애절한 운명을 맞고 있었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사 속에 구원사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보편사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모든 세상(코스모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역사 한 복판에 성육신 한 사건 역시 그러하다. 개인과 역사 전체의 구원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전 우주의 구원과 구원사를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E.H. Carr의 말을 빌린다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가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을 더듬어 찾아 가는 일”(행 17:27)이라는 것이다. 그 1884년에 또 하나의 사건은 임오군란이다. 군인들의 배급 쌀에 돌을 썩어 줌으로써 군인들의 분노가 나라를 흔든 사건이다. 그 다음 해인 1894 년에는 “후천개벽 사상”과 민심은 천심이요. 인내천 사상을 설파 하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최재우 동학사상을 근거로 한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난다. 전북 고부의 몰락양반인 김제의 전봉준과 김개남 장군을 필두로 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저항 혁명이 불길처럼 요원하게 불타 오른 한민족 역사의 기상이 땅과 하늘에 진동한 잊지 못할 찬란한 민중들의 살아 있는 시대적 깃발을 펄럭인 시기 였다. 타락한 권력과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비리 속에 민중의 자각이 꿈틀거릴 때, 강대국들은 호시탐탐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어두운 역사가 깊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한민족을 살리는 강한 빛으로 비추이기 시작한 때 이기도하다. 1885년에 감리교의 아페젤러와 언더우드가 이 땅에 첫 발을 딛는다. 언더우드는 제물포에 4월 5일에 아펜젤러는 4월 2일에 부산에 닿는다. 물론 장로교의 알렌은 이미 갑신정변을 겪는 1884년에 들어와 부상당한 민영환 등을 치료하여 궁중 선교를 시작한다. 강대국 속의 한 입의 먹이 감의 신세 속에서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에 오적을 앞세운 강제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하고 5년 후에는 강제 한일 합방이라는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실시된다. 나라를 잃어버린 비탄과 통곡의 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들고 민중들은 삶의 희망을 상실 한다.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의 혼과 얼은 살아 있었다. “아와 비와의 투쟁”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국내외의 민족 해방 군사들은 물밀 듯이 일어났다. 추위와 배고픔과 굶주림, 멸시와 천대와 자기부인을 통한 민족의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은 만주와 미주와 그리고 시베리아의 동토의 지역에서도 끊임 없이 불타올랐다. 조국을 다시 찾고 진정한 독립을 위한 싸움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아니했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과 친일 족속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우리의 얼과 혼으로 충만한 하늘에 순천하는 대한민국 남녀노소 아들딸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 독립을 위한 제물이 되는데 추호도 주저함이 없었다. 동학혁명의 정신과 함께 1919 년 3.1 운동의 횃불은 민족의 어둠을 샅샅이 밝힐 생명의 빛이었고 이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민족과 민중의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여기에 종교나 어떤 다름이 나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 하늘 아래에서 일어 난 땅과 하늘의 일치된 움직임이며 새로운 역사의 잉태와 해산의 움직임 이었다. 이 속에 감리교와 장로교가 나누일 수 없고, 장로교의 예장과 기장 등이 나누일 수가 없다. 단지 하나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참여만이 있었다. 그러나 36년과 40년의 민족 독립과 해방사는 민족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영구화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의 일치운동은 하나의 낮 내기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분단과 독재, 자본의 독점과 사상의 독단의 악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해방을 방해 하고 있는 이때에도 교회는 세속의 탐욕에 젖어 있고 권력과 자본에 공생, 혹은 기생하고 있다. 세월호를 통한 생명의 가치를 경시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살림의 역사에 반하고 있다. 청일과 중일 이후의 한민족의 역사는 침탈당하였다. 지금 교회의 일치 운동, 장로교의 일치 운동은 썩은 교권들의 허위의식의 일환일 뿐이다. 한국 교회의 일치 운동은 먼저 하나님과 역사, 사람과 자연 앞에서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정직과 진실로 바로 서야한다. 다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옷깃을 여미고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던져야 한다. 지금의 세계 역사와 문명의 흐름을 통찰 하고 민족의 역사를 직시하여 생명의 역사를 재창조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21
  • 동성애 반대, 시민운동으로 전환해야-이 병 대 목사
    지난 퀴어집회 대응에서도 언론들은 극히 일부의 돌출행동만 크게 부각시켜 한국교회를 비인권적인 동성애 혐오세력으로 몰아가는데 성공했다. 한국교회가 국가와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아무리 선한 집회를 해도 언론들은 이를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이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히려 혐오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현주소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강력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가져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언론의 역풍을 맞아 사회여론만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이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및 확산 저지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 된다. 지금처럼 해마다 6월이면, 서울광장과 대구동성로 퀴어집회에 대하여 맞대응하는 식의 교계연합의 ‘반대집회’는 오히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젊은 층과 좌파세력들에게는 물론, 일반 시민들과 언론들에게도 한국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한다’는 오해를 심어준다. 한국교회가 매년마다 반복되는 퀴어집회 맞대응을 언제 까지 할 것인가? 또 어떤 효과를 얻었는가? 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의견들은 분분하지만, 오히려 한국교회의 이름을 내건 대규모 반대집회 장면들은 국제인권단체와 국내·외 언론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를 증명하는 자료로 역이용 되고 있어 안타깝다. 한국교회 집회의 진정성은 허공에 사라지고, 각 언론들과 국제인권단체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 보도만 쏟아놓는다. 언론과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집회가 어떤 유익을 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제 우리끼리의 성토보다는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터야 할 것이다.첫째, 이제 동성애 조장 및 확산 저지를 위한 맞대응 외부집회는 교계연합단체가 아니라,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시민문화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한국교회와 함께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적극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학부형이 중심이 된 어머니 단체들과 뜻있는 교사들 단체, 건전한 가정과 생명윤리 운동을 전개해 나갈 단체들, 전문가 단체들 의 집중 육성이 절실하다. 셋째는, 국민들과 언론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동성애의 사회적 폐해와 에이즈 확산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시민운동을 주도하여 시민과 언론들에게 적극적인 동성애 문제와 에이즈의 실체를 알려, 여론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넷째,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진실보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차단시키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기자협회 간에 체결된 <인권보도 준칙 8조>의 철폐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겠다. 다섯째, 교육부, 교육청 공직자들과 초·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교 교수들을 깨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단체를 비롯한 학부모시민단체들을 통해 교육자들에게 청소년들의 동성애와 에이즈 확산의 심각성과 폐해를 알릴 수 있는 정보제공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여섯째,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 정당 정치인들과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 공직자들에게 동성애 조장과 에이즈의 확산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일곱째, 대학생들과 군 장병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헌법재판관들에게 지속적인 정보 제공으로 단순한 법리적 판단이 아니라, 청소년들과 청년들, 국가안보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여덟째, 영화계를 비롯한 예술계를 깨워야 한다. 예술계에 만연된 동성애에 대한 잘 못된 인식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깨우쳐야 한다.아홉째, 한국교회의 슬로건은 <동성애 반대운동>이 아니라 <동성애 조장 및 에이즈 확산 저지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행한 것은 국민들의 대다수는 ‘동성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동성애 조장과 확산운동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반대 여론을 적극 반영할 필요가 있다.열째, 진보세력에 점령당한 좌경화 된 인권운동을 건전한 인권운동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전한 인권운동단체들을 적극 육성하여 인권운동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좌경화된 인권운동을 이대로 방치하게 되면 서구사회처럼 탈 기독교운동의 확산으로 한국교회는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막강한 인재들을 인권운동가들로 키워야 한다. 사회인권운동은 물론 학생과 군대 인권운동가들을 육성하여 왜곡된 인권운동이 정의인양 사람들을 속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 인권단체들에 기독인들이 대거 진출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08
  • 고난과 시련의 두 미국 작가-임 영 천 목사
    지난 6월 16일 필자는 오랜만에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한국문인협회와 미국의 워싱턴문인회가 공동으로 한인문학 심포지엄을 열기로 협약 중이었는데, 필자는 그곳에서 “미국 동부 한인소설가들의 작품세계"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현장에서 나는 그곳의 대표적인 동포 작가로 <네이티브 스피커>, <제스처 라이프>, <생존자>… 등의 작품으로 이름난 한국계 미국 소설가, 그곳의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추천되곤 하는 이창래의 작품세계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게 되었음이 기뻤다. 특히 그의 <제스처 라이프>, 달리 <척하는 삶>이란 이름으로도 번역된 그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었던 것도 의의가 큰 일로 생각하였다. 그 소설은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방면의 매우 비중 있는 작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행사가 끝나고 난 뒤 여행사 가이드의 인도 하에 관람했던 두 작고 미국 문인들의 문학 기념관과 그 해당 작가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붓을 들게 된 본뜻이다. 그 두 미국 작가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와 마크 트웨인(1835~1910)이다. 전자는 <어셔가의 몰락>과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등으로 이름난 작가이며, 후자는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으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우리 일행은 앨런 포의 생존(거주) 기념 가택과, 마크 트웨인을 기념해 건립한 ‘마크 트웨인 박물관’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최대도시 볼티모어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거주 가택은 사영(私營) 기념관 형식으로 남아 있는 처지였지만, 코네티컷 주의 주도(州都) 하트퍼드 시에 위치한 마크 트웨인 박물관은 공영(公營) 건물로서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며 거주했던 고전적인 저택 바로 옆에 별도로 건립돼 있어서 그 웅장한 모습이 매우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리는 에드거 앨런 포와 마크 트웨인 두 작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차례이다. 포는 한마디로 고난의 작가였다. 그는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부모로부터 태어나, 그나마 그 부모 모두 일찍 사망해 그는 그 후 고아 신세로 살아가야만 했다. 어느 부유한 집에 양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고집스런 그의 성격 때문에 양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후에 웨스트포인트 육사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는 별수 없이 그의 재능인 글쓰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잡지사의 기자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인, 소설가, 평론가였던 다재다능했던 그의 필치가 너무도 날카로워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의 권고사직 형식으로 거기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설상가상이란 말처럼 그는 그의 사망 2년 전에 불행하게도 상처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 뒤 그가 새 여인과의 결혼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숙모 집에 가던 중 볼티모어의 한 노상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의식불명 환자로 발견되었고 아깝게도 그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그의 불행한 삶을 업튼 싱클레어는 이렇게 간단히 표현했다.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방황하였고, 적이거나 벗이거나 간에 서로 다투었으며, 알코올과 아편에 중독되어 온갖 형태의 핑계와 부정직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런 불행한 삶과는 별도로 그의 작품들만은 오늘도 살아서 반짝이고 있음이 대조된다. 마크 트웨인은 무한운동기계를 발명해 보려고 애쓴 몽상가 풍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인쇄공이 되었고, 그 후에는 미시시피 강의 물길 안내원이 되었다가, 남북전쟁 이후에는 네바다로 가서 금광의 갱부 생활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앨런 포가 그러했듯이 트웨인도 언론 기자로 생활하면서 글을 쓰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쓴 작품으로 제법 돈도 벌게 되었고 명성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도 뒤따랐다. 그러나 그의 생활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속물근성을 지닌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기득권 옹호의 세력들과 싸우는 일이 그가 문학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가를 결정할 판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성공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상당 기간 제왕처럼 살았다. 그러나 후년에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선친의 그 발명에 대한 몽상과 그의 청소년기의 인쇄공 경험 등이 합쳐져 발명에의 꿈이 발동되었던 것일까. 그는 식자 기계, 곧 인쇄기 발명 작업에 몰두하면서 결국 많은 빚을 지게 되어 파산에 이르고야 말았다. 아내도 딸도 다 죽거나 떠나고 그 역시 몰락한 상태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만은 그런 그의 불행과 무관하게 오늘도 그대로 살아서 빛나고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01
  • 한국교회 동성애 조장 저지운동 방향 전환해야-유 만 석 목사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 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 된다. 지금처럼 해마다 6월이면, 서울광장 퀴어집회에 대하여 맞대응하는 식의 교계연합의 ‘반대 집회’는 오히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과 언론들에게도 한국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한다’는 오해를 심어준다. 매년마다 맞대응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오히려 대규모 반대집회 장면들은 국제인권단체와 국내외 언론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를 증명하는 자료로 역이용 되고 있다. 한국교회 집회의 진정성은 허공에 사라지고, 각 언론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 보도만 쏟아놓는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실외집회가 한국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이제 동성애 조장과 동성애 등 독소조항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저지운동과 대응방향을 과감하게 바꿀 것을 제안한다.첫째, 이제 외부집회는 시민단체인 NGO가 중심이 되어 NGO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함께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NGO를 적극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학부형이 중심이 된 어머니 단체들의 집중 육성이 절실하다. 이제 한국교회의 이름으로는 교회당에서 기도회로 모여야 한다. 교계지도자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계지도자들은 NGO시민운동의 방향성만 제시하고 시민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장려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둘째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언론들에게 적극적인 동성애와 에이즈의 실체를 알려야 하며, 이것이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알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민세금 부담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 언론들을 깨우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이미 이를 위해 모 단체에서 각 언론사 기자와 피디들을 대상으로 동성애와 에이즈의 실상을 알리는 책자를 배포하여 그 효과를 얻고 있다. 언론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언론들에게 적극 다가야 할 것이다. 외부집회에 쏟아 붓는 재정이면 언론들을 깨우는데 상당한 효과를 얻을 것이다.셋째, 한국교회의 슬로건은 ‘동성애 반대운동’이 아니라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행한 것은 국민들의 대다수는 ‘동성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동성애에 대해선 무관심하지만, 동성애 조장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반대 여론을 적극 반영할 필요가 있다.넷째, 교육부, 교육청 공직자들과 초·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교 교수들을 깨워야 한다. 학생들을 바로 가르쳐야 할 교육자들이 동성애와 에이즈의 진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시만 따라 인권문제로만 다가가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교육자들도 진실을 알게 되면 학생들의 장래를 망치는 교육을 하지 않을 것이다.다섯째,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 공직자들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 정당 정치인들이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정부와 국회를 깨우는 일에 손을 놓고 있었다. 1,0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에 정부와 국회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와 국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전략적 실수다.여섯째, 대학생들과 군 장병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군부대 내의 동성 간 성추행, 성폭력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와 있다. 드러난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수면하의 심각성은 덮어진 상태라고 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국가인권위와 진보인권단체들은 군형법 92조6을 폐지시키기 위하여 줄기차게 위헌소송 제기를 해오고 있다. 군 당국에 동성애와 에이즈는 인권문제가 아닌 것을 깨우쳐야 한다. 국군의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국가안보의 문제요, 우리 장병들의 건강과 장래에 관한 심각한 문제임을 깨워야 한다. 대학교마다 동성애 동아리가 갑질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모 단체에서 이를 깨우기 위해 엄청난 전단지와 배포와 현수막 걸기, 대학교 기도회를 갖고 있다.일곱째, 영화계를 비롯한 예술계를 깨워야 한다. 지금 극장가에서는 ‘아가씨’라는 노골적인 여성동성애 영화가 히트를 치고 있다. 예술계에 만연된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깨우쳐야 한다. 드라마나 일본만화를 통한 동성애에 대한 환상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따라서 전략적 대처가 요구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6-16
  • 6·15와 민족의 희망-홍 성 표 목사
    오늘 우리가 사는 지구촌의 문제 중 하나는 생태계의 문제이다. 지금의 자연과 인간, 인간과 환경의 문제는 서로의 미래를 담보해 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름은 뜨겁고 겨울은 추우며 이러한 현상들은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기후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의 문제가 단순히 기후 문제만은 아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의 사고 이후 의 바다와 삶의 터전의 오염, 핵연료처리의 문제는 우리의 존재의 기반을 의심케하는 문제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주지하는 바대로 오늘을 지배하는 맘몬의 신은 인간의 브레이크 없는 탐욕의 결과로 사람들의 영혼과 생기를 흐리게 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의 거의 모든 영역이 물질과 자본의 악마에 붙잡혀 창조의 본질을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져 들고 있다. 자본과 권력의 결탁, 초국적 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와 착취의 구조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조직과 조직, 국가와 국가의 진정한 화해의 길에 종지부를 찍고 영원한 싸움과 갈등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땅 빼앗기의 역사이다. 땅은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며 인간은 그 땅 위에 살 수 있는 ‘창조의 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 보다 귀하다 하였다. 그런데 이 땅에서 횡행하는 것은 불의와 거짓이 홍수를 이룬다. 자본과 권력의 추악한 결탁은 인간뿐 아니라 창조주의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입술로는 구원의 주인을 말하지만, 실제 마음은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조롱하며,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거듭 강조하여 말한다. 그 사랑의 자비는 조건도 없고 다함도 없다. 그러나 그 자비와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는 근거 위에서 열매 맺는다. 이 세상은 사랑이 없어 정신적인 분열을 이루고 관계가 깨어지며 사랑의 열매를 보지 못하는 무성한 가지와 잎만으로 인하여 저주를 불러 오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용서는 인간들의 수없는 죄악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으로 이뤄진다. 도덕과 윤리, 양심과 삶의 도리가 보이지 않는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우리의 현실은 갈등과 충돌, 전쟁과 싸움의 연속이다. 묻지마의 폭력과 이유 없는 살인이 난무하고 있다. 약하고 힘 없는 자들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착취 현상은 끝이 없다. 그것이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 든 간에 약자와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진정한 평화가 없는 양극화의 지속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사회가 평화롭다고 말할 어떤 기반도 없다. 오늘날 타종교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리가 속한 교회와 기독교의 바탕은 어떠한가? 이러한 갈등과 양극화의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그 간격의 골을 메워갈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공동체들은 과연 정직하고 정의로운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교회와 기독교는 약자의 편에 서서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불의들에 침묵하고 방관하며, 공범자가 되어서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주님의 저주의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00년 6월 15일 남북 두 정상 간에 이루어진 민족통일 협력선언은 우리민족의 새 역사와 새 희망을 창조하는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남북은 서로가 합의한 자주적, 민족주체의 평화통일 협력합의가 무색한 지경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 끼리, 자주, 주체 상호인정의 평화 통일의 민족숙원인 6.15의 역사적 혈통이 끊어진 듯 슬픈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한 러시아 등의 주변 강대국들의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이익 추구의 정책은 공고화 되고 통일의 현실 공동체인 개성공단마저 전격적으로 강제 폐쇄되었다. 분단의 벽을 허물지 않고는 우리 민족공동체의 희망은 없다. 좌우의 이념의 찌꺼기들을 불태우지 않고는 우리들의 후손은 여전히 더 큰 절망과 어둠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교회와 기독교의 공동체가 새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새 지평의 문을 열려면 진정성 있는 통일의 길을 여는 기도를 심도 있게 구체적으로 확장해 가야만 한다. 소위 아직도 보수와 진보의 낡은 옷을 입고 반공과 레드 콤플렉스의 프레임을 고집한다면 남북한 민중들의 한은 풀기 힘들 것이다. 강자와 외세들의 힘을 의존하고 흡수 통일을 지향하고 고집하는 한 우리의 고통은 지속 되고 억울하고 슬픈 죽음은 쌓여만 갈 것이다. 이념과 도그마의 굴레를 넘어서 6·15의 정신을 살리고 진정한 회해와 하나 됨을 사는 새 창조의 역사를 열어가자.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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