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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498주년을 맞으며-이윤재 목사
    종교개혁 498주년을 맞으며 우리는 130년 전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신하며 조선 500년의 유교와 1,500년의 한국 불교의 척박한 토양 위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며 결실하고 번성하여 현재의 한국 교회로 우뚝 선 것을 감사한다.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억압과 공산치하의 핍박으로 교회가 파괴되고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옥중 성도와 공산주의에 항거하던 피난 성도를 통하여 한국교의 교회들이 재건되고 세계 교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성장을 이루게 된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그러나 6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매 10년마다 양적 배가의 놀라운 성장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교단주의와 개교회주의에 제한되었음을 시인하며 회개한다.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아파하면서도 교회가 분열된 것을 아파하지 않은 것을 회개한다. 조국의 통일과 동서의 화합을 외치면서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음을 회개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높이 바라보면서도 곁에 있는 우리의 이웃을 외면하였음을 회개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설교하면서도 고난에 처해 있는 우리의 북녘동포를 좌우 진영논리에 빠져 적대시하고 고통 중에 있는 세계인의 소리를 외면하였음을 회개한다.498년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뷔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며 개혁의 글을 내걸었다. 이를 계기로 세계사를 바꾸는 거대한 개혁의 흐름이 일어났다. 루터와 칼빈이 주도한 교회개혁운동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의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고 문화의 지평을 바꾸고 민주 사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오늘날 개혁교회이며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개혁교회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그런데 종교개혁500주년을 앞두고 지난 세기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에도 불구하고 영적 미숙은 여전히 우리 교회의 개혁과제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해이보다 교회의 영적 해이는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영적 침체도 교회의 책임임을 통감한다. 교회의 영적부흥도, 사회의 도덕적 변화도 우리 손에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영성과 도덕성을 겸비하여 한국 사회와 교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대안을 제시세력으로, 영적 각성과 도덕적 재무장을 선도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한국사회에 기대감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로 거듭날 것이며 사회에 빛을 발할 수 있는 성직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개혁교회’는 개혁이 끝난 교회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끝없이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도 개혁이 계속 필요하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한다.먼저 그릇된 교리와 내부의 부패가 극심했던 중세교회의 개혁과제가 진리를 회복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우리교회도 세상에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 한국교회가 십자가정신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며,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을 확산해나가기를 소원한다. 개인의 안일을 위해 교권에 안주하고 개혁정신을 거부하는 흐름에 과감히 맞서야 한다. 종교개혁정신을 지닌 개혁신앙인, 개혁교회가 일어나 이 불씨를 함께 되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각성이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의 지름길이며 기초임을 믿는다. 교파와 교단의 경쟁주의를 극복하고 일치와 공동창조로 나아가는 것이 한국교회가 도약하는 방편임을 믿는다. 그러면서 이전 세대에서 불가피하게 빚어졌던 국토의 분단과 교회의 분열도 우리의 손으로 통일과 통합을 이루어야함을 믿는다. 특별히 교회연합운동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계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연합운동의 새 장을 열기위해 대타협을 이끌어 낼 것을 촉구하며, 현재의 연합기구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 새로운 연합기구를 출범시켜야 한다.종교개혁 498주년을 맞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이제 한국교회의 목회자, 성도들은 개혁정신을 가지고 두 눈을 부릅뜨고 시대를 읽는 바른 판단과 한몸 던져 부패를 막는 결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날마다 개혁신앙을 가지고 자신부터 개혁해 나감으로 영적 지도력, 즉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개혁자의 십자가정신을 회복하며 교회의 본질을 보여 주어야할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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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7
  • ‘종교교혁 기념행사’와 ‘죽은 개혁’
    중세 유럽의 종교개혁은 참된 교회 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 타락한 로마 가톨릭교회에 저항한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들을 바르게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비성경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말씀에 기초한 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저들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 시대에 들어와 행해지는 종교개혁 기념행사는 과거에 천착한 채 실천 없는 변질된 모습만 가득 차 있을 따름이다. 종교개혁 기념행사와 이론적인 학술대회 등은 오히려 우려할만한 형편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와 발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 이론만 난무하게 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금년(2015년)은 특별히 얀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화형을 당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2년 후인 1517년이 되면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 95개 항의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지 500주년이 된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다양한 종교개혁 기념행사들이 열리게 되지만 금년에는 더욱 유난을 떠는 것 같다, 나아가 여러 교단들과 기독교 단체들은 벌써부터 2년 후의 행사를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냉철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교회를 개혁하는 일은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이 관례화되면 참다운 실천을 방해할 우려가 따른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써 마치 종교개혁자들의 대열에 선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교회를 올바르게 개혁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지가 있다면 몇 년 후에 있을 행사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개혁을 실천해야만 한다. 그것은 나중으로 미루어서 될 일이 아니다. 성경을 벗어난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이 있다면, 말씀을 아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제거하여 정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심각한 질병에 걸렸는데 당장 치료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채 몇 년 후에 있을 칠순 잔치를 위한 다채로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환자는 더욱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태도는 환자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라 이기적인 탁상공론이 될 뿐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종교개혁 기념일이 끼어 있는 10월에만 떠들썩해 할 것이 아니라 매달 매일 개혁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2017년을 앞두고 많은 돈이 들어가는 성대한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준비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교회 내부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어야 한다. 교회를 위한 개혁은 특별한 때를 잡아 기념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제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 개혁은 상당한 어려움과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행사는 그와 전혀 다르다. 거기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매력 있고 달콤한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제공된다. 우리는 교회 회복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고 피를 흘리며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어떤 형태든 사사로운 이득을 챙기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선배들을 욕보이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2년 후에 있을 기념행사가 아니라 지금 당장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부패한 한국 교회에 대한 현실적 개혁을 외면한 채 몇 년 후의 화려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오히려 그와 같은 태도가 우선적인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될 과제이다. 설령 기념행사를 하더라도 그것은 실천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단순한 행사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중세 종교개혁 시대에 생명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 시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벌이는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보면 땅을 치고 한탄할 것이다. 그들은 나중의 후손들이 저들의 개혁운동을 기념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저들이 바란 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 교회가 건전하게 상속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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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7
  •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획일 체제
    근래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껏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어느 집필자 자신이 나서서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사회평론가라는 꼬리표를 단 어느 소설가가 나서서 국정화의 논란에 가세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여당의 대표란 사람이 작심하고 뛰어들어 이 논란의 불길을 자기 선에서 끝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목청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느 개신교 목사까지 그런 운동에 실무 책임자가 되어 동조자를 규합하겠다고 회원 가입을 권유하고 있음도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시민(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음이 사실이다. 왜냐면 지난해 교육 일선에서의 교과서 채택 결과가 교학사 판(版) 교과서 채택 ‘거의 전무(全無)’라는 쪽으로 드러남으로써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출판사나 집필자 쪽이 아닌, 그(역사 교육) 면에선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도 보이는 정부와 여당 쪽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아니 총력을 기울여) 이 문제를 자기들 주장대로 관철시켜 보려고 애 쓰는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극도로 피곤해져 있다.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국정화 변호)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전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경청할 만한 면이 없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논리의 면에서는 어느 한 편이 이기고 지고 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화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무엇인지는 아무래도 다음의 바탕 위에서 설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첫째는, 국정화 주장의 논리가 힘(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부의 힘과 여당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그 국정화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여당에서 이 논의를 주도해서 주장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집필자 같은 처지의 인사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의 배경을 믿고 그들은 일종의 나팔수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그런 이들을 일컬어 어용학자라고 칭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들에게 있어 결코 유쾌하지 못하다. 둘째로, 그렇다면 그들은 왜 어용학자들까지 생산해 가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핵심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합리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역사와 전통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친일과 독재이다. 과거 조상들의 친일행위에 대하여 합리화시키고 또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합리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겠는데, 그러려면 젊은이 시절부터 그들의 머리에 그런 교육을 시켜 놓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머리에는 공고한 바벨탑의 건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견고한 바벨탑도 때가 되면 힘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갖가지로 흩어 놓음으로써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하고 결국 그로 인해 그 ‘견고한 축성’을 자랑하던 바벨탑도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창세기 11장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요즘 정부-여당 간의 각종 잡음과 소음(騷音)을 전해 듣게 된 우리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미리 보는 것 같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려하는 바는, 그들은 획일 체제를 수립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방향으로 가르치고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게 하는 획일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세대(世代)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강력히 시도되었던 그 획일 체제 수립 정책을 현 정부가 다시 계승하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이처럼 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는 단순한 역사 교육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들의 천국’은 아예 뒷전이고 ‘당신들의 천국’만을 위해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나약한 학자들까지 끌어들여 멍들게 하는 일을 이젠 그만두라고. 그 일은 30여 년 전까지의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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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5-10-10
  • ‘목회자 납세’ 결의의 의의
    목회자 납세의 문제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미 지난 수년간 이 문제로 인하여 많은 논쟁이 활발하게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는 정부나 국회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뜨거운 감자’처럼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 문제로 인하여 교단별로 혹은 교회별로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9월 16일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총회에서 근로소득세 수용을 결의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처음으로 목회자 납세를 교단차원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 여러 언론과 TV 매체들이 이 일을 보도하며 환영하였다. 그동안 목회자 과세는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일부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로 계속 미루어져 왔다. 정부나 입법기관에서는 교회의 완강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 눈치를 살피며 시행을 유보하여 왔다. 하지만, 목회자 납세의 문제에 대해 교회는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거부의사를 밝히거나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독교가 목회자 납세의 문제로 자칫 국민들의 눈에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 비춰져서는 안된다. 일반 국민은 기독교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정부가 종교인 과세를 추진했지만, 개신교의 강한 반발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천주교는 1994년부터 교구별로 근로자 납세를 하고 있고, 불교계는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이 이 문제를 성역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서 완강하게 거부하여 온 것이다. 언젠가부터 기독교는 일반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사회적인 신뢰도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게 되었다.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기독교가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교회내부에서 마구 자성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대로는 안된다. 교회가 변해야 산다.’는 등등 교회개혁에 대한 말들을 이구동성으로 하였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세상과 벽을 쌓고, 자기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형국이다. 입만 열면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기독교가 정작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시대는 급속도로 변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이 찬성하는 종교인 납세 문제를 교회가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칫 명분도 잃어버리고 실리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 납세 문제를 교회개혁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정부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국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무거운 세금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특히 영세 자영업자와 근로자의 세금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이 때에 교회가 납세 문제로 인하여 오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목회자 납세 문제가 일반 국민들에게 기독교의 납세 저항으로 비춰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교회가 이런 문제를 두고 마치 세를 과시하거나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넣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된다. 목회자의 사역을 노동의 개념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옳은 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받지만 근로수당으로 받지 않는다는 것도 다들 공감한다. 하지만, 목회자도 일반 국민과 같이 똑같이 납세의 의무를 갖는다는 것은 국민의 정서요, 일반의 논리이다. 그동안 기독교는 계속하여 국민에게 신뢰를 잃어버렸다. 특히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금전문제로 인한 도덕적 해이와 교회의 분쟁이 얼마나 사회적 신뢰도를 추락시켰는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총회에서 목회자 납세를 결의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아주 잘한 일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인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목회자 납세를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교단이 앞장서서 결정하고 각 교회와 목회자가 이 일을 자진해서 풀어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번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결정은 그 영향이 미미하다. 기장은 원래 진보적인 성향의 교단이며 교세도 크지 않다. 그러니 개신교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다. 이번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결정은 시대적 요구에 대한 바른 응답이며, 대다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린 지혜로운 결정이다. 정치권에 휘둘리거나 등 떠밀려 하지 않은 자주적인 결정이다. 아무쪼록 기장의 목회자 납세 결정이 일대 전환점이 되고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10-02
  • 교단통합의 원칙과 분리주의의 위험-이 광 호 목사
    이번 가을 총회를 앞두고 몇몇 교단의 통합 소식이 들린다. 원래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의 교회이다. 여러 지역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지 교회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보편교회에 속해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지체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서 함부로 잘라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에 누가 감히 근거 없이 함부로 칼질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참된 교회들은 항상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며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조직과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과 연관된다. 세상에 흩어진 모든 참된 교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가을(2015년), 일부 교단들 사이에 통합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우선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 교단들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예장 고신측과 고려측의 통합이다. 고려측은 1976년 제26회 고신 총회 때, “교회의 세상법정에서의 소송 문제”로 인해 분열된 교단이다. 즉 신학적인 문제가 양 교단이 분리된 핵심 이유이다. 양 교단의 통합문제가 필자의 각별한 관심을 끌게 되는 까닭은 필자가 속한 실로암 교회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실제적 교단 통합을 논의할 때 보편교회를 염두에 두고 그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물론 특정 교단들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을 논의하는 모든 교회들이 주지해야할 사항들이다. 교단간의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은 분명한 원리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사안을 진척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분열을 도모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한 교단 통합을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첫째, 교단간의 통합은 정치적인 수완으로 성사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간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종의 타협이 될 수 있다. 둘째, 몸 불리기 혹은 교단을 키우려는 불순한 동기가 없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인 욕망이 반영된 것 이상 아니다. 셋째, 신학적인 성실한 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학적 해석 책임이 있는 기관을 통한 교리와 신앙고백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모든 기득권은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 통합이 이루어진 후에는 출신 신학교나 과거의 교단적 배경이 어떤 영향을 끼쳐서도 안 된다. 다섯째, 통합하려는 교단에서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살핌이 있어야 한다. 만일 지난 날 부당한 분리행위가 있었다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자칫 안으로는 부당한 교권을 휘둘러 참된 교회를 잘라내고, 밖으로는 정치적인 통합을 외치는 위선에 빠질 수 있다. 개체 교회의 규모가 크고 작은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없듯이 교단의 외적인 규모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흡수 통합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큰 교단이라 해서 성숙하거나 온전한 것이 아니며 작은 교단이라 해서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일 외형적인 조건으로 인해 자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교회론 부재로 인한 착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살피지 않은 채 작은 교회라 해서 멸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가장 무서운 악행이다. 힘없고 나약한 성도들을 신학적인 충분한 검증 없이 교단에서 축출하거나 분리하는 것은 참된 교회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분리주의적 행태로서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악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다수 교단들은 그에 대한 인식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덩치 큰 교단들은 더 큰 덩치를 만들기 위해 주변을 살피며 타 교단에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작은 교단과 교회에 대해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나아가 자신의 분리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반성조차 없다. 본질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통합이 아니라면, 외형만 취할 뿐 심각한 분리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통합을 시도하는 교단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한 자세를 가지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종교적인 야망이나 욕망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차라리 통합하지 않는 것이 낫다.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배경으로 한 참된 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보편교회의 실질적 하나 됨이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9-18
  • 저출산시대 극복 위한 한국교회의 사명-장헌일 원장
    우리나라 출산율은 올해 추정치 기준 1.19명으로 세계 최하위권으로 나타났다. 미국 중앙정보국 월드팩트북이 합계출산율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는 224개국 중 219위를 기록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에 저출산·고령사회의 프레임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사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경고음이 울린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1997년부터 출산율이 1.45명으로 떨어져 초저출산국에 진입했고, 결국 2001년에 1.3명 밑으로 내려간 이후 13년째 1.3명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에 이어 내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세대’란 말이 등장하더니 ‘꿈’과 ‘희망’까지 놓아버린 ‘7포세대’까지 이른 현 세대를 반영하는 슬픈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중 가장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저출산, 출산기피 현상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결혼 시기가 점차 늦어지고 있고, 심지어 결혼 이후에도 육아비용 부담과 자녀의 교육문제 등의 이유로 저출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저출산 문제 극복을 위한 ‘한국교회와 함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출산장려’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방안을 제언한다.먼저 종교시설을 활용한 어린이집 활성화 대책이다. 2014년부터 새로 시행되는 출산장려지원제도에서 국·공립어린이집 105곳을 신설하기로 결정 되었다. 또한 연 평균 150개씩 늘려 2017년까지 600곳을 확충한다고 한다. 전체 보육 아동 중 직장, 국공립, 공공형 어린이집 이용 아동 비율을 작년 26%에서 2017년에 30% 이상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종교시설 활용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다음은 종교적 사회봉사 차원의 접근 방법을 통한 비영리적 운영모델이 필요하다. 최근 잦아지고 있는 보육사고 발생으로 낮은 위탁 신뢰도를 극복하여, 양질의 보육을 위해 책임과 헌신, 그리고 종교적 사명감으로 높은 위탁신뢰도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또한 비영리적 운영 접근으로 육아에 대한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 시켜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교회가 위탁 관리하는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려면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교회 내부의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단기간 내 양질의 어린이집 개설 증대가 가능하고 우수한 보육환경과 낮은 보육료로 양질의 어린이집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부모의 선택권 확대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직장 어린이집 개설 지원과 같은 정부차원의 제도적 개설지원이 요구된다. 1층 시설만 인허가 가능한 현행 제도에 대해 안전을 갖춘 다면 2층도 가능하도록 규제 개선이 필요하. 또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중 하나로 국내 입양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 2012년 8월, 입양가족 허가제로 변경되며 입양신청수는 23% 감소했다. 입양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혼혈·연장아동은 국내입양이 어려운 상황이. 입양에 대한 편견(입양가정, 장애·혼혈·연장아동입양, 절차의 복잡함 등)을 개선하는 활동을 통해 다문화, 장애인 등이 연계된 사회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해 나가야 한다.먼저 지역별 입양 네트워크 구성입니다. 입양 가족들간의 정보교류 및 멘토 역할과 교회 유휴시설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여 입양공동체를 형성한다. 특히 TV와 뉴미디어를 통한 공익 광고와 함께 TV 스팟 광고, APP, SNS, 홈페이지 배너광고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입양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정책시행과 함께 한국교회가 범교단적으로 연합하여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상설기구로 생명존중운동본부를 설치하여야 한다.특히 청소년생명존중 기독NGO 연대의 조직화(네트워크)를 통해 청소년 자살 방지를 위한 각 교단 내 기독 NGO를 연대하여 공동정책수립과 대정부, 대국회와 정책 사업을 공유하여 전국화 시키고 확산해 나가야 한다.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공공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여, 생명존중운동과 함께 저출산·고령사회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도록 모든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가는 일이다. -장헌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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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03
  • 동성애 어디까지 가나? -유 만 석 목사
    지난 6월 서울시청 앞에서는 동성애 퀴어축제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문제점을 제기해도 서울시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수락한 것이다. 지난해 신촌에서의 경우를 보면, 반나체에 가까운 동성애자들의 거리 행진이, 뜻 있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음란공연’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를 서울시에서는 ‘문화축제’로 규정하여 방임한 것이다. 이런 짓을 일반인들이 거리에서 행했다면, 반드시 법의 규제를 받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성애자들은 한국의 유력한 지자체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동성애를 지지하는 미국 및 서구의 외국대사 17명이 동성애 퀴어축제 퍼레이드 현장에 나와서 동성애자들을 지지했다고 한다. 과거 이런 나라들은 동성애를 철저히 죄악시 했었고, 심지어 ‘정신병목록’에 넣었던 나라들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남의 나라에까지 동성애를 허용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기존의 윤리와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문화 침탈’이자, 우리나라의 윤리규범에 대한 ‘내정간섭’이다. 그러고 보면, 동성애는 단순히 소수자가 아닌 국제적으로 네트-웍을 구성한, 막강한 권력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애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시작되었다. 지지난 해(2013) 동성 결혼식 행위를 한, 김 모 씨와 또 다른 김 모 씨는 서대문 구청에 ‘혼인신고’를 했지만, 구청이 이를 법적 근거가 없다고 거절하자, 이를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불복신청서>를 내어 법원은 비송사건(내용을 비공개)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서대문구청이 관련법 헌법 제36조 제1항의 양성평등원칙과 민법 제800조에서부터 제843조까지의 ‘혼인관련 법조항’에 의해, 거부한 것을 법원이 심리하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분명 헌법 제36조 제1항에서는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兩性)의 평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그런가하면 지난 6월에는 미국의 대법원이 지난 40년간 미국 내에서 동성결혼 문제의 논쟁을 끝내는, ‘동성결혼 합법’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던, 대법관 한 사람의 결정이 결국 미국 전체 국민들의 양심의 소리까지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동성애를 합법화시켜, 신앙과 진리에 조종(弔鐘)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법관 한 사람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지난 달 1일부터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기준법’을 시행하여 남녀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각 지자체에게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라는 것을 기화로, 일부 지자체에서는 ‘동성애 항목’도 슬쩍 끼워 넣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공무원들까지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시대가 된 것인가? 기막힐 일은 또 있었다. 지난 4일, 82세의 나이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우리나라의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만나면서, 한국의 소수자(동성애)보호를 강조했다고 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한국이 변화될 것이란 전망으로 한국을 압박하였다. 일련의 이런 사건들은 왜 일어나는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다. 지난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동성애 단체가 청소년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진정 사건에 대해서, ‘동성애 사이트는 청소년유해매체 아니다’라는 권고를 하게 된다. 사실상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않는 성관계의 보루(堡壘)를 국가 기관이 깬 것이다. 그 이후 동성애 사이트와 카페는 청소년들의 ‘성적 일탈 창구’가 되었고, 호기심 많은 수많은 청소년들을 동성애에 빠지게 하였다. 지금은 동성애자 온라인 커뮤니티가 동성 성매매를 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여, 우리 사회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동성애 사이트와 카페를 속히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해야 한다. 또 국가인권위는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2011년 ‘언론보도준칙’을 발표해, 사실상 언론들이 동성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언론 통제’ 역할을 한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결코, ‘성소수자’나 ‘성정체성’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성의 자유와 방종은 결국은 인류의 파국으로 몰아 갈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의 경계가 더욱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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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8
  • 광복 70년과 분단 70년에 부쳐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일제로부터의 광복이 이루어진지 분단 70년을 맞고 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냉전에 의한 이념 분쟁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은 수 천 갈래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분열의 전쟁터가 되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거주하며 신탁과 반탁이 민족의 새로운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신탁 통치안을, 스탈린은 즉시 독립안을 제시하였다. 투루먼 등장 이후 미소 강대국은 상호 각축을 통하여 마침내 포츠담 선언에서는 38선 획정을 하고 소련의 참전과 함께 38선이 확정되었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그렇게도 원하던 통일 조국은 허리가 잘리는 분단으로 고착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에서의 하지 통치의 미군정 3년사는 일제 36년사의 식민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속과 식민의 통치가 시작 되는 기간이었다. 미국의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적국에 진주한 점령군으로서의 행태를 보였고 “남한 민중각위에게 고함” 이라는 하지의 포고문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40여 년의 굴욕과 치욕, 억압과 수탈로부터의 평화 유지보다는 한반도를 무참히 짓밟고 지배했던 일본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여기에는 친일과 매국으로 나라를 팔고 민족과 민중을 착취한 친일 족속과 민족 탈취의 세력들을 심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체제 유지를 위한 주춧돌로 세우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은 일제의 업적 통치의 40여년과 함께 분단국가의 성립과 민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를 세움으로 분단의 영구화는 물론 미국의 종속과 식민의 세상이 다시 시작 되게 된 것이다. 하나의 통일 국가를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갖은 고초를 모두 겪은 진정한 민족 지도자는 모두 죽거나 이념 전재의 희생물이 되고 친일파들과 자기 출세와 부귀영화, 아부 아첨꾼들에 의하여 반쪽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북의 해방군으로 온 소련군은 철수하고 반쪽 국가인 공산체제가 세워지고, 민주의 이름으로 미군정의 종속 하에 세워진 남한의 반쪽국가는 민족과 민중을 팔아먹은 친일파와 그 친일파를 앞세워 동북아의 이권과 세계 패권을 지속시키기 위한 미군정 통치자인 미국의 권력과 하지에 의하여 진정한 민주와 자주를 이룰 수 없는 통한의 오늘을 맞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남북이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각의 분단 70년의 길고도 지루한 갈등과 충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살아 온 과정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수많은 민중의 피를 뿌려서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민주와 자주의 거친 역사의 광야 한복판에서 통일의 길은 요원한 것만 같다. 남은 “북진통일” 북은 “적화 통일” 이라는 악한 통일교육의 틀을 벗고 서로가 함께 사는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1953 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4조 60 항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보장을 위하여 3개월 내에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100만이 넘는 병력과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남은 미국의 핵우산과 생화학 무기를 품은 채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전쟁 상태로 살고 있다. 분단 55 년 만에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고 6.15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평화협정의 단초가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남북은 평화의 길 보다는 죽음이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이 왕성하다. 우리의 해방과 광복은 여전히 더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든 억압과 신식민지에 살고 있다. 자주와 민주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미래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과 암흑의 길로 파멸될 수 있다. 남북한 모두가 함께 사는 평화협정을 이루고 지속적인 남과 교류를 통하여 자유롭게 왕래하며 사는 남북의 통로가 활짝 열려야 한다. 친일과 매국의 길을 버리고, 어떤 친 외세들로부터 벗어나서 남북의 자주 민족 주체적 평화 통일로 나아 갈 때만 우리의 진정한 광복은 성취될 것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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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4
  • 표절 문제로 시끄러운 한국 문단-임영천목사
    최근 한국 문단이 소위 표절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란 장편소설로 국내는 물론, 36개국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널리 그 이름을 날린 신경숙 작가가 요즘 작품 표절 논란의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맨 처음에 이응준 작가가 신 작가의 단편소설 <전설>(1994)에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단편소설 <우국> 표절 혐의가 있다고 지적하고 난 뒤, 이 표절 논란은 일파만파로 크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신경숙뿐만 아니라 이인화 편혜영 이승우 황석영… 등 한국의 모모한 작가들의 이름까지 이 표절 혐의와 연관된 최근의 논의에서 공공연히 노출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응준이 신 작가의 표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 글이 발표된 지면이 어지간한 사람은 그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듯한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였다는 데 우리는 다소 놀랐다. 좀 우스갯말로 표현해 보자면, 워싱턴포스트라면 몰라도 허핑턴포스트를 어찌 알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아니었지만 허핑턴포스트에 실렸다고 하더라도 그 파급효과가 너무 커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응준은 이를 위해 무려 8년 전부터 문단에 발을 끊었다고 술회하였다. 일종의 문단생활 포기선언을 했다는 것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자기는 “표절 문제 제기 글을 문예지에 실어보려고 했지만 그 가능성이 제로라는 사실 앞에서 새삼 절망했다.”고 하였다. 그 결과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은 한 온라인 매체에 그 글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그 글을 수정하는 데도 한 달 반의 시간이 걸렸고, 법률적 검토도 거쳤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변호사 선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이런 그의 굳건한 의지와 자세를 보면, 그 글의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자신은 예상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글에 대한 법률적 검토는 물론 변호사 선임까지 마쳤노라고 했는데, 정작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이 신 작가를 사직당국에 고발하자 그는 그 자신의 자세를 이제와는 달리 180도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는 문단의 일은 문인들끼리 해결하도록 해야지 사법 당국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기는 약자라서 누군가 자기를 법적으로 압박해 올 것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서도, 그러나 그 자신은 궁지에 몰린 작가를 법에 의해 재단하는 일에는 극구 반대했던 것이다. 혹 그의 이런 자세를 이중적 처신이 아니냐고 비판할는지 몰라도, 이 일은 전혀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겠다. 사회?정치적 약자가 평소에 타인을 옹호하는 삶의 자세를 지녀왔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않으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보호책을 강구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의 법률적 검토와 변호사 선임까지 해 두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런데 신 작가는 이번뿐만이 아니고 과거에도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지 않았다. 단편소설 <딸기밭>, 단편소설 <작별인사>,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에서 표절 의혹들을 받아왔다. 금번 이응준의 문제제기 이후 자신의 처신이 매우 난처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우유부단한 자세를 취한 것이 불행의 불씨를 더욱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이번의 표절 논의에서 박철화, 정문순, 이명원, 고명철 등의 평론가들이 매파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셈이고, 논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아리랑>의 조정래 작가가 그 매파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 되었다. 그는, 신 작가 잘못의 첫째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표절을 했다는 점, 둘째는 발각되었을 때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하는데 즉시 사과하지 않은 점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그의 표절이 대여섯 번일 정도로 상습적이 돼버렸다는 것이라 했고, 넷째는 하필이면 왜 일본 작가의 작품을 그리 했느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표절 작품 <우국>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일제의 군국주의를 옹호한 극우 작가였다는 사실을 시사(示唆)했던 것이다. 구약 성서 가운데 모세의 십계명 중 제8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되어있고, 제10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돼 있다. 이를 문인들에게 돌려 표현한다면 “글 도적질(표절)하지 말며, 아예, 남(네 이웃)의 글을 탐내지도 말라”고 바꿔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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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4
  • ‘동성결혼’과 종말을 향한 치달음-이 광 호 목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가 처한 시대를 정확하게 읽고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리석은 자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기를 좋아하며, 그것이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인 양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와 같은 태도가 제 무덤을 파는 위태로운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에 있지 않았던 이상한 분위기에 빠져 예사롭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죄에 빠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도덕을 소유하고 있었다. 즉 누가 봐도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객관성 있는 윤리적인 척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지 불과 십 수 년이 지나지 않아 도덕적인 척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지난 세기 말인 1960년대 경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인해 그와 같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현재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영역이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이다. 동성애가 고대로부터 있어온 죄악이었다면 동성결혼이란 우리 시대에 생겨난 신개념으로써 원리상 그 용어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는 그에 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동성결혼은 이미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 합법화된 상태이지만, 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세 유럽에서 신앙의 박해가 일어날 때 참된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삭막한 땅인 신대륙으로 이주해갔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을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며, 화폐에는 ‘IN GOD WE TRUST’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불과 며칠 전인 지난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선언했고, 대통령 오바마는 그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거기다가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도 그에 적극 합세했다. 그들은 시대적 형편과 인권을 명분으로 앞세워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게 되자 처세술에 능한 자들은 앞 다투어 그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지금도 전체 인류를 외면한 채 세상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어가는 무책임한 행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들의 판단과 행동은 결코 세계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온 세계와 순박한 사람들을 악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시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혼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은 결국 가정을 파괴하는 양상을 몰고 오게 된다. 앞으로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혹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부부관계를 맺는 복수 관계의 결혼마저도 허용될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장차 상상을 초월한 형태의 결혼이 허용될 것이며 인간들의 가정은 치명적인 위기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인권을 앞세워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세계 지도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만일 저들이 진심으로 동성결혼을 수용한다면 저들의 자식이나 손자, 손녀가 동성결혼을 하려고 할 때 기쁜 마음으로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동성결혼은 지지하면서 자기 자식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세술에 의한 위선적인 반응 이상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는 어떤 전염병보다도 무서운 기능을 하고 있다. 이미 터진 물줄기를 다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는 안타까운 교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동성애, 동성결혼 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그에 맞서 대항하며 세상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그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지상 교회는 급속히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복음을 상속받게 될 다음 세대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세계 지도자 행세를 하는 자들에 의해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으로 인정받고 희생적인 평화 운동을 펼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어긋난 주장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정신 차려 저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자! -이 광 호 목사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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