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연지골
Home >  연지골  >  토요시평

실시간뉴스

실시간 토요시평 기사

  •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강 경 신 목사
    “큰 교회는 십자가, 누가 이 큰 십자가를 지겠나” 이 말은 최근에 세습 문제로 시끄러운 한 대형교회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기독교 안팎에서 세습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가 여전한데, 이 교회는 정면돌파로 세습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온갖 말들이 무성하고, 이 일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화제 거리가 되었다. 언론과 TV매체들이 연일 이 문제를 보도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지탄을 받았다. 어쩌면, 종교개혁 5백주년의 해에 그 교회는 가장 큰 일(?)을 행하였다. 이제 그 교회는 한국교회의 선두주자가 되어, 부흥의 견인차가 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대물림은 결코 사욕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부흥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교회들과 가슴을 졸이며 애를 태우는 목회자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자랑하며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세상의 시선이 차갑고,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데, 무슨 수로 다시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 내 교회만 더 크게 되고 잘되면 된다는 말인가? 최근에 발표된 ‘2017 소형교회 리포트’는 한국교회 목회자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설문조사에 응답한 목회자들의 거의 절반은 현 상태로 교회가 유지될 수 있을 지를 심각하게 우려하며 걱정하고 있다. 이들은 사례비를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교회가 성장하지 않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회가 ‘교회성장’(33.5%) 보다는 ‘건강한 교회’(66.5%)라는 것이다. 비록 교인 수가 늘지 않아 교회성장이 안되고 교회 재정이 열악하여 사례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도, “자신의 목회에 만족한다”(73.3%)고 한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일까? 그들은 교회가 작아서 작은 십자가를 져서 만족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더욱 크고 무거운 것이다. 과연 십자가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십자가는 참 십자가가 아니다. 나아가 십자가는 사명이다. 내가 좋아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싫어도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지는 것이다. 아무리 십자가가 고난과 희생을 요구할지라도 묵묵히 지고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너도 나도 지기를 원하는 대중적인 십자가로 바꾸었다. 십자가를 성공의 통로요, 번영의 도구요, 영광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성공적인 기업처럼 부러워하며,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성공한 CEO처럼 우러러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다. 이들이 큰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큰 십자가를 지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라고 명령하신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이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대로 십자가이다. 고난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가 될 수 없다. 다시 대림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가? 오늘의 교회는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우리에게 십자가의 신앙을 올곧게 가르쳐 주신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시를 쓰셨다. “주님을 따르다가 옥에 갇히어/ 온갖 고생 다하다가 죽을지라도/ 십자가의 큰 고난 생각을 하면/ 아직도 내 고생이 부족하구나/ 깨어라. 주께서 오신다/ 주님 위해 살다가 목숨 바치자.” 그렇다. 십자가의 큰 고난을 받는 사람이 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큰 교회가 큰 십자가가 아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말자.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로 세워졌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신앙은 십자가이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목숨까지 십자가의 제물로 기꺼이 바쳤던 것이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주기철 목사님은 외치셨다. “깨어라. 주께서 오신다. 주님 위해 살다가 목숨 바치자.”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2-08
  • 종교인과세 무엇이 문제인가?-장 헌 일 목사
    현행 종교인소득 과세 체계는 종교인들이 종교단체로부터 받는 소득을 기타소득 중 ‘종교인소득’으로 규정하되, 종교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근로소득’으로 신고·납부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매월 종교단체가 종교인소득을 지급할 때 근로소득과 같이 원천징수 납부할 수 있다. 그러나 작년 10월부터 소위 ‘탄핵정국’ 이후 관련 매뉴얼 등이 준비될 수 없었고, 이는 올해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과세당국이 종교인소득 과세를 위한 준비를 지난 6월에서야 뒤늦게 시작하면서 교계에서는 종교인 과세가 47년 만에 시행되기 때문에 종교의 고유한 역할과 사명을 간과한 채 만약 일방적으로 과세를 시행한다면 많은 문제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어 지난 6월 19일 여의도 CCMM에서 국민일보와 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원장 장헌일)이 공동주최한 제5차 ‘종교인과세대책을 위한 컨퍼런스’를 통해 종교인과세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례비로 제한하여 과세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바가 있었지만, 8월에 가서야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등 정부 측과 한국교회 TF팀이 처음으로 간담회를 가졌다.이러한 가운데 지난 9월 9일 정부는 돌연 주요 종교기관들을 향해 ‘세부과세 기준 자료(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종교인 과세가 아니라, ‘종교과세로 종교활동과세, 종교침해과세’ 성격을 띠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특히 심각한 종교편향성까지 보이고 있어 정부는 종교단체들과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향후 조세마찰 등으로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될 것이 명약관화 하다.실제 각 종단 별로 수입금액의 종류와 비용인정 범위가 상이함에도 국세청과 종단 간에 상호 협의된 상세한 과세기준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또한 지금까지 종교인소득이 과세되지 않은 상황에서 종교인소득을 계산하는 회계와 종교단체의 회계를 구분하지 않고 운영해 왔다. 따라서 종교인 회계와 종교단체 회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수입금액의 종류와 비용범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이 종교인 소득이고 무엇이 종단 소득인지 등에 대해 국세청와 종교단체 간의 폭넓은 협의와 홍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탈세관련 제보로 인해 세무조사가 이뤄질 경우 제보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그 사실이 언론 등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해당 종교인 및 종교단체의 도덕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고, 국가권력과 종교 간의 마찰이 불가피한데 이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처음 시행되는 종교인소득 과세제도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종합적인 검토와 면밀한 준비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첫째, 과세당국은 종교인 소득회계와 종교단체 회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고, 각 종교, 종단 등과 긴밀히 협의하여 종교인 소득에 포함되는 종교단체별로 다양한 소득원천과 비용인정 범위, 징수방법에 대하여 상세한 과세기준을 협의·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종단별 소득구조 특성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세부 과세기준에 따른 과세 및 징수에 대한 예행연습을 통해 문제점을 보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둘째, 탈세관련 제보가 있을 경우에는 영리법인에 대한 세무조사와 마찬가지로 세무조사권이 신중하게 발동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일선 세무서에서 받은 탈세제보는 국세청으로 이첩하여 국세청이 수집 분석한 과세자료와 대조를 통해 명백한 탈세 혐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 종단에 넘겨 추가 자진신고 납부를 하도록 규정할 필요가 있다(실제 대부분의 선진국의 경우 과세당국과 종교단체 간에 사전에 협의된 구체적인 과세기준에 따라 자진신고하면 납세의무가 종료되는 ‘협의과세제도’를 운용하고 있음).셋째, 현재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에만 적용되는 근로장려세제를 모든 종교인소득에 대해서는 근로소득으로 신고·납부 선택 여부를 불문하고 적용될 수 있도록 금년 중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이 필요하다.지난 대선 때 각 당 대선후보들은 헌법에 명시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정교분리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조세저항과 사회와 국가적인 혼란과 국론분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종교의 역할과 중요성을 감안하여 종교인과세를 2년간 유예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정부는 종교인들이 조세저항 없이 자진납세 할 수 있는 기준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종교의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제20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불변의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천부적 가치이다. 종교의 특성과 목회자 사역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않은 정부의 종교정책은 갈등과 혼란을 야기할 뿐이기 때문에, 정부는 종교인과세를 졸속행정으로 종교간 갈등을 유발 시켜 국민화합을 저해하는 불행한 일이 없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협의할 것을 촉구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1-25
  •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기독언론-임 영 천 목사
    지금으로부터 만 일년 전인, 2016년 10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일단의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는 이른바 촛불집회의 시발이었다. 시민들의 이 자발적인 모임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거의 매주 토요일에 어김없이 모이되, 그 숫자도 점차로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거대한 집단의 위력은 대단하여 끝내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루어내더니, 다음 단계로는 헌재(憲裁)에서의 파면마저 끌어내어 그의 독재권좌로부터의 완전 실각을 성사시켰다. 그리고는 금년 5월 10일 문재인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 정치적 혁신을 이루겠다고 추진하고 있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국민 대다수가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음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끊임없는 인사정책의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음은 국민들을 매우 실망스럽게 하고 있다. 어느 후보자가 실정법적으로 문제가 없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관습법이나 도덕법에서도 별 하자가 없는 후보자가 내세워질 때 국민들은 소위 ‘개혁’지향적이라는 새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 위기 조성 국면을 빌미 삼아 심화되고 있는 트럼프 미 행정부의 군사 외교 면에서의 남한 정치에의 과도한 개입이 국내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상당한 위구(危懼)의 감(感)을 자아내게 하고 있음도 사실이어서, 이 혼란한 정국을 문재인 새 정부가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지 우려되는 바 없지 않다. 트럼프가 남북 상호간의 군사적 대결을 부추김으로써 미국의 대량 무기판매를 기도(企圖)하는 것까지야 지나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예기치 않게 남북 간에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거나 나아가 세계대전으로 확전(擴戰)되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볼 때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역할(대처능력)이 매우 중차대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는 빈부 간의 격차가 심하고, 보혁(保革) 간의 대립이 심하며, 거기에다 동서의 지역 간 골도 깊어서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의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게 아니라 근래, 또는 현재 터지고 있다고 보아서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라는 형식을 통해서 금년 내내 터지고 있어 왔다고 하겠다. 실은 이 두 가지의 대립적인 집회가 빈부의 격차와 보혁의 대립, 그리고 지역 간의 골 문제 등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정치인들도 이들 어느 한쪽 집회의 암시성에 잘못 이끌리면 자기처신의 불투명성까지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전에 거대 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바른정당이란 신당을 만들었던 의원들이 최근 자기들이 만든 그 정당이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던지 옛 정당으로 다시 복귀하고 만 사건도 알고 보면 그 어느 한 집회의 잘못된 암시성에 스스로가 최면당해 일어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로 인해 다른 정당들 상호간의 지각변동과 한국정계의 혼란상마저 부추기고 있음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세속사회의 실상이 이렇다면 그럼 기독교계는 어떤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 세속사회가 저러한데 기독교계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라고 자위하려는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 문제를 그렇게 보아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왜냐면 예수께서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속사회가 혼탁하니 우리 기독교계도 별 수 없이 부패해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니라, 그 부패해지려는 세상을 ‘소금’으로 바로잡아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게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회(곧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기독교계가 어떤가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말해 한숨부터 나온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특별히 올해가 종교개혁 5백주년의 해여서 이런 심정은 더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종교개혁가들이 도전했던 대상은 바로 로마교회의 왕권의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교회의 잘못된 제왕의식으로부터 모든 교계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흘러나왔었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것들을 우상파괴정신으로 분쇄하려고 했던 게 바로 종교개혁가들의 위업(偉業)이었다고 보겠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오늘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스스로 자기정화를 하기는 어렵다는 게 교회세습과도 같은, 기독교계의 악습(제왕의식의 분출)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한다면, 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교정하도록 끊임없이 지도 편달하는 소금의 역할은 기독언론밖에 없다고 볼 때, 창립27주년을 맞은 <교회연합신문>의 사명이 그만큼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1-17
  • 왜 한국에만 에이즈 환자가 늘고 있는가? -심 만 섭 목사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만이 유일할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이 질병관리본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에이즈 환자가 총 13,584명인데, 이는 10년 전인 2007년에 비해 2.6배 증가한 것이며, 특히 10대의 경우, 지난 2007년에는 99명이었는데, 지난해에는 417명으로 4.2배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또 20대가 1,243명에서 3,523명으로 2.8배 증가하였으며, 30대도 1,759명에서 3,699명으로 2.1배 증가하는 등,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격히 번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인재근 의원은 ‘10대 청소년의 높은 증가율은 국민 건강 차원은 물론, 국가재정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다른 의원인 자유한국당의 윤종필 의원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에이즈 환자 치료에 들어간 국가 재정은 연간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윤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에이즈 환자 치료비는 2014년에 714억 원, 2015년에 810억 원, 2016년에 921억 원으로 해마다 크게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이즈 환자는 제3군 감염병으로 치료비를 국가에서 전액 지원하고 있는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90%, 나머지 5%는 국가(질병관리본부)에서 지원하고, 그 나머지 5%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므로, 결국은 100% 국민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 된다. 거기에다 간병인비까지 지원하고 있어, 이제는 해마다 1,000억 원이 넘는 국가재정을 에이즈 환자 치료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5년부터 2016년까지 건강보험공단이 에이즈 치료를 위해 지출한 재정은 5,415억 원이나 된다. 여기에다 국가와 지자체와 간병인비 등을 포함하면, 그 재정은 훨씬 초과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대처가 없이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막대한 재정 지출이 늘어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물론, 국가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치료비가 들어가고, 장기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에이즈 환자에 대하여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들도 우리 국민이며, 국가가 보호하고 치료해 주어야 하니까.그러나 문제는 왜 한국에는 에이즈 환자가 줄지 않고 계속 늘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번 국감에서 자유한국당 성일종 의원이 밝힌 바에 의하면, 에이즈의 주 감염 원인이 남성 동성애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동안 에이즈의 치료와 예방의 주무 기관인 질병관리본부는 우리나라 에이즈 환자의 감염 경로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었다. 질병관리본부는 2011년까지는 에이즈의 발생 원인이 ‘이성·동성 간 성 접촉’으로 표시했다가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성 접촉’으로 표시하는 등, 애매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에이즈 환자의 92%는 남성이다. 또 최근 신규 감염자의 94.3%가 남성이다. 이를 감안하면, 에이즈의 감염 원인이 남성 간 성 접촉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 동안 시민 단체나 기독교계에서 질병관리본부에 정확한 실태파악을 위한 제언과 감염의 주 요인에 대하여 홈페이지에 표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서 성일종 의원이 보건복지부장관과 질병관리본부장에게 여러 자료를 보이면서, 에이즈의 주요 감염 원인이 남성 동성애에 의한 것임을 묻자, 이를 시인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에이즈 환자 증가와 그 실태는 분명, 이에 대한 행정의 문제와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본, 호주 등은 에이즈 감염자가 줄고 있는 상황(특히 가장 많은 에이즈 환자를 보유했던 아프리카에서는 급격히 줄고 있음)에서 우리나라만 늘어나고 있어,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10대와 젊은 층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일이다(2016년 에이즈 신규 감염자 수는 1,062명으로, 이 중에 20대가 360명-33.9%, 30대 241명-22.7%, 40대 193명-18.2%로 20~40대가 전체의 74.8%를 차지함)그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는 무분별한 ‘쿼어축제’의 허용으로 본다. 현재 서울과 대구에서 허용하고 있고, 부산에서도 열렸고, 제주에서도 허용된 상태이다. 마치 동성애가 축제처럼 보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동성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가 확산되는 것이다. 둘째는 언론들의 ‘인권보도준칙’에 의한, 에이즈의 문제점에 대한 실태와 정확한 원인을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의 경각심이 무너진 것이다. 셋째는 정부의 안일한 행정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에이즈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본다. 넷째는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과 일선 교육청에서의 동성애 조항을 포함시킨,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것들이 무비판적으로 만들어져, 청소년과 젊은 층에게 동성애를 권장한 꼴이 되었다. 다섯째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지는 못할망정, 비호하고 두둔하는 행태를 보인 때문이다. 이번 국회 국감에서도 일부 지자체장들이 동성애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질의하면, 정치적 견해를 다르게 하는 의원들이 이를 차단하는 등,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보였다. 마지막으로는 일부 목회자들이 ‘쿼어 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성경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에이즈의 증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당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일에 여·야가 따로 없고,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없으며, 민·관이 따로 없다. 이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지혜를 모아, 에이즈를 예방하는데 주력해야 하고, 확산되는 원인을 차단하는데, 뜻을 보태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1-06
  • 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 임 영 천 목사
    지난 11일 제59회 사법시험(제2차)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응시자 186명 중 55명이었다. 131명은 탈락의 고배를 마신 셈이다. 과거에는 불합격자라도 “내년에 재도전하면 되지” 하고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왜냐면 이번 시험을 끝으로 앞으로 사법시험은 실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른바 ‘고시 낭인들’을 숱하게 배출하는 역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사시(司試)는 많은 청년들의 꿈이었다. 젊어서 시인 되려고 하지 않은 자 없듯이, 청년 시절 고시(고등고시) 보려고 꿈꾸지 않은 자 없다고 할 만큼 사시는 젊은이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아무리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머리만 좋으면 이 고시(사시) 한번 쳐서 합격되고 그 팔자도 고쳐버렸다. 가난해서, 또는 다른 이유로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이 시험 한번 치르고 용 되는 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실로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상고만 나왔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실제 사례였다. 그는 그런 불운한 이들의 슬픔을 알았기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그 슬픈 이들의 마음을 날래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지금 개천의 물고기들이 용 되기를 꿈꿀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새 제도인 로스쿨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천의 평범한 물고기들이 로스쿨에 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을 어찌하랴. 로스쿨의 입학제도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돈 없는 청년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거액의 등록금인데다 면접이란 관문에서 모모 인사들의 자제들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해 버려 개천의 물고기들이 들어갈 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선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다. 애초에 그 개천의 미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것이라고 말이다. 개천의 미물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런 답들이 오가고 있다. 그들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들은 건전한 사회의 미꾸라지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그들 속에서 시위자들이 나오고 데모꾼들이 나오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가 혼탁하니까 그들이 시위를 하고 데모를 주도하는 점은 도외시하고 보이는 겉모습만 가지고 그렇게 평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사시에 응시하고 합격을 하게 된다면 그 동료 미물들에 대하여 온정적인 태도로 나올 것이 뻔하니, 그들을 아예 시험제도 자체를 바꿔 사회(법조계)에서 격리시켜 버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결과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미물들이 아닌 귀족의 자제들로 채우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법조인 등용문 제도를 바꿨다고 보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음서제(蔭敍制)를 오늘에 다시 도입한 셈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채용하던 인재선발 제도 때문에 길(관직)이 막혔던 양반(귀족)의 자제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관직에 쉽게 나가게 했던 편법이 오늘날 되살아난 셈이다. 그래서 로스쿨제도를 ‘현대판 음서제’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합격자 발표가 있기 하루 전(10일)에 헌법재판소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귀족들이 싫어하는 한판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전국수험생유권자연대란 단체였다. 그들은 “고졸과 서민의 법조인 진출을 막는 로스쿨 제도는 위헌”이라고 하면서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그들은 “사법시험이나 변호사 예비시험... 등 국민 누구나 법조인이 될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로스쿨 제도는 국민 기본권인 평등권과 직업의 자유, 공무 담임권을 침해한다”고 하였다. 이날 그들이 내세운 피켓의 구호는 “누구나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세상!!”과 “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였다. 호소력이 매우 큰 구호였다. 요즘 소위 ‘고시 낭인들’이 상당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고시 탈락자들을 무조건 낭인들이라고만 보지 말고 ‘앞날의 꿈을 위해 끝없이 도전해온 불운한 이들’ 정도로 봐줄 수도 있을 줄 안다. 그들에도 빛들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들의 구호를 감안해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본다면, 새 제도인 로스쿨이 위헌이므로 폐지하라고 할 수 없다면, 지난 사시와 유사한 어떤 시험제도를 병행해 그들의 행복권을 보장해주는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법조인이 되는 것이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직업이 될 수도 있게 말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0-28
  • 종교개혁 500주년, 이후를 생각하다/ 이효상 목사
    “이대로는 안된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한국교회도 구호로 무성하다. 그런데 아쉽고 안타깝게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종교개혁에 교회개혁이 없다. 중세교회의 타락이었던 성지순례,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추모미사, 성물숭배, 종교적 고행 행위 등이 전염병처럼 이어지고 있다. 종교개혁을 빙자해 기념메달을 만들어 팔고, 기념 세미나를 여는 등 50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들을 연다. 그 어디에도 담론만 무성하지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의 실타래를 풀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아무런 감흥도 울림도 없음은 언론 홍보용 행사는 아니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종교개혁에 열심을 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그 정신을 이어 갈 것인지 묻게 된다. 이렇게 종교개혁 500주년이 이렇게 단회적 이벤트로 끝낼 것인가? 모먼텀이 되고 있는가? 다시 500년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 5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준비하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일부 교단장을 중심으로 빅텐트를 치겠다고 하는 것은 진정 한국교회를 위한 빅텐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이합집산을 도모하는 또 하나의 분열이 될 것인가? 교회는 덩치로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다. 덩치는 큰데도 지금의 개신교는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로서 그 방향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 대사회적 영향력은 사라지고 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영향력이 있다. 종교개혁에 있어 사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만큼 지름길은 없다. 종교개혁의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지만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복음을 복음답게 하는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메시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목회현장에서 지속적으로 그 정신을 적용하고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로 나가려는 의지는 더 없어 보인다. 여러 목회자들을 꾸준히 만나보면 목회현장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생각 외로 크다. 교회가 분열과 상처로 주저앉은 상황이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프로테스탄트’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이다. 이들은 영적인 갈증과 욕구를 지니고 있었기에 습관적인 가르침이나 형식적인 관계를 통하여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허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프로테스탄트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모험적인 삶의 행태가 거대한 전통을 거부하고 형식적이 되어가는 신앙과 신앙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몰락해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현실을 냉철히 통찰하여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회개와 더불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말씀 중심의 복음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회개의 목소리와 함께 말씀의 실천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 사실 다른 해답이 없다. 내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말씀 중심의 복음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자성과 회개의 소리가 그립다. 진리와 믿음을 향한 그 정신을 루터는 신학이 아니라 그것을 호흡하는 사람들의 심장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터는 바로 거기에서 참된 교회의 미래를 보았고 눈에 보이는 중세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말씀중심의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다섯가지 핵심 정신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현재진행형으로 적용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짜기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개혁자들, 프로테스탄트들이 출현해야 한다. 그러나 외적으로 추락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할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사회는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기대하는 바가 분명 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돌아 보아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에 속해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대로 살고, 세상 사람들을 잘 섬기기 위해서이다. 지금 타종교는 차세대 인물들을 정책적으로 키우고 사회와 소통하는 지도자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아직도 쉰세대 어르신들이 그 영향력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누리려는 허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교회세습과 대형교회의 천민 자본주의화는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사교회화 하는 행위는 건강한 교회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향후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의 20년, 30년을 이끌 40대지도자, 50대지도자가 준비되어 있는가? 지금 이대로 더 추락할 것인가?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인가?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에 달려있다. 그가 바로 당신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0-24
  • 힘의 균형-홍 성 표 목사
    ‘힘의 균형’ 논리는 1920-1960 사이의 라인홀드 니버에 의한 세력균형 논리이다. 소위 평화적 수단 전략의 한 이데올로기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미소 두 강대국에 의한 냉전으로 패권 경쟁을 가열차게 하게 되고 이러한 경쟁은 가공할만한 살상무기 그 중에서도 핵탄두 군비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겪은 민족세계전쟁(6.25)은 1-2차 세계 대전의 피해보다 더 크고 참혹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단의 고착화, 영구화를 가져오고 중국과 일본, 미국 등은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내지는 안정화 시키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한반도의 희생을 통한 주변국과 강대국들의 이익창출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막말수위가 도를 넘고 최근에는 B-1B ‘죽음의 백조’ 폭격기가 북한 항공까지 침투하였다. 소위 협상과 장사꾼의 ‘거래의 기술’를 통한’전략적 혼돈 전략’을 통한 협상전략의 압박 행동이다. 일단은 협박을 하면서 평화적 협상의 테이블로 이끌어 낸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무모한 전략이다. 만일 북한 상공의 침투에 대한 북한의 실수든 정당방어든 간에 어떠한 시비가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파멸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소의 무기, 군비경쟁은 핵탄두의 경쟁이 되어 우리가 사는 지구를 수십 번씩 태워버리는 가공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역사의 현장은 저출산, 양극화 고령화와 함께 자살율 제 1위( OECD 경제개발협력국)를 살고 있다. 분단과 동서와 소위 진보와 보수, 친일세력과 민족적 민주 통일세력들의 내적 갈등의 삶을 살고 있다. 남북의 대치와 북미의 위험한 말장난을 통한 전쟁 놀음의 모험이 현실화 될 수도 있는 지경을 걷고 있다. 어느 조직이나 헤게모니의 싸움과 주도권 싸움은 지속된다. 정의의 개념마저도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메이컵되고, 페인트모션 된다. 종교집단이나 세속적 정치집단,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민중을 착취의 수단으로 살고 있는 기업들 모두가 실은 자기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야누스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우리의 삶의 푯대가 되는 예수의 이해나 성서적 해석도 천차만별 사실은 자기입장의 실존이나 이익집단들에 의해서 오도 되는 자기경험이라는 한계의 틀 안에 갇혀 있을 때가 허다하다. 민중의 해방을 말하는 가운데서도 실은 민중들을 앞 세운 전도된 가치를 고집하는 예가 허다하다. ‘죽음의 백조’가 한반도의 상공을 마음 대로 떠 다니고 핵잠수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동해를 휩쓸고 다닌다. 우리가 의지하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로 위로와 희망을 창조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누가 더 선하고 악한 것인가의 평가는 역사가 증명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가 역시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역사적 평가는 상식이고 진리이다. 어떤 부류가 평가하는 것인가도 중요하다. 어느 때이건 힘 없고 가진것 없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며, 멸시받는 부류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 춥고 배고프며, 어떤 일을 하고도 그 대접으로부터 주변부나 변두리에 있는 자의 평가가 정의인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불쌍한 자이다. 우리 모두는 티끌과 먼지로 돌아갈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상처받고 그 상처들을 치유해야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죽음의 백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 하늘이나 바다나 땅 위에 죽음의 존재들과 가치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애초부터 인간들에게 큰 희망을 두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겸손한 자도 없고 신의를 지키는 자도 없으며, 정의로운 자도 없다. 진실로 기도의 제목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고, 세계 어는 곳에서나 전쟁이 없으며, 죄 없는 민중들의 삶이 파괴되는 일들이 없기를 기도한다. 한반도를 둘러 싼 우리의 삶의 현장은 전쟁 놀음을 경쟁하고 있다. 이 와중에 트럼프의 무기장사는 호재를 부르고 약자라고 생각하는 무능한 사람들은 무기를 사들이기에 바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창조주와 예수그리스도 성령이시다. 우리가 믿는 것은 거짓 없는 정의와 용서와 사랑 뿐이다. 인간들의 적대적 행위와 중상모략은 계속된다.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힘의 균형은 하나의 위험한 경쟁을 불러 일으킨다. 백조가 춤을 춘다. 그것은 평화의 백조가 아니라 죽음의 백조이다. 청일과 러일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였듯이, 북미의 말 경쟁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중일과 러시아가 함께 유익만을 계산할 때는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 전쟁 때와는 그 위력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인간으로부터 올 수가 없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9-29
  • 북한의 핵 도발은 국민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심 만 섭 목사
    북한이 지난 3일, 제6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핵실험 직후에 성명을 발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하기 위한 핵탄두 개발용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실제적으로 북한 지역에서는 우리 기상청이 계측한 바에 의하며, 진도 5.7의 인공지진이 감지되었고(미국이나 중국에서는 6.1~6.3까지 나옴) 그것만으로도 폭탄은 50~70kt의 위력을 보인다고 한다. 북한은 이미 2006년부터 핵실험을 해 왔다. 그리고 지난 2009년과 2013년, 그리고 2016년에는 2차례, 그리고 이번에 제6차 핵실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진의 규모로 볼 때, 북한 핵의 강도는 날로 증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6년 처음 실험 때는 그 위력이 1kt 정도였으나, 이번 실험에서는 그 강도가 엄청나게 증가된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우리 기상청이 계측한 것보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발표한 지진 강도가 맞는다면, 이는 그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갖는다고 하니, 소름이 돋는다. 이는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핵폭탄보다, 몇 배 큰 것이며, 이런 폭탄 하나만 서울에 투하여도, 서울전역은 물론, 경기 일부 지역까지 초토화된다고 하니, 이는 가공(可恐)할 위력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9/9절을 전후하여, ICBM(장거리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비사일), EMP(전자기펄스) 등을 통하여 도발을 추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 제재방안을 발표하고, 실제적으로 제재 행동에 옮겼으나,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중국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결정적인 결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다 불필요하게 ‘사드배치’를 두고, 한국과 미국이 엇박자를 내는 모습은 국민들로 하여금, 불안케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소위 ‘햇볕정책’을 기조로 북한에 많은 물자를 지원했으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입장을 보여 왔다. 문제는, 북한 정권은 우리 정부가 ‘유화 정책’을 쓰던, ‘강경 정책’을 쓰던, 그들이 목표로 하는바,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조금도 늦추거나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정권을 도운 것이, 오히려 그들 정권 연장과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을 도운 것이 되어, 핵 위협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는 탄식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바뀐 정권의 태도이다. 문재인 정권은 수차례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오히려, 이를 비웃듯 하였고, 대화제의를 받고서는 거의 예외 없이 도발을 감행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의 의도와 생각은 이미 정확히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살인강도를 제압하는 것은 방법이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화와 설득도 시도해야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상대편을 제압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살인자를 방치하면,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당국은 교활하게도 미국을 겨냥하는 듯하다. 마치 자신들의 대결 상대가 한국이 아닌, 미국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얕보일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 피해를 볼 경우에는 북한을 힘으로 제압할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 정작 북한의 핵개발로 피해를 입을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북한은 앞으로 남북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면, 곧바로 한국에 압력을 가해 올 것이다. 가장 큰 고민은 우리를 ‘핵 인질’로 삼아, 온갖 것들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나 강구책은 있는가? ‘대화하자’느니 ‘실망스럽다’는 표현으로는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본다. 북한의 도발에 강한 응징 의지와 행동의 발로가 있어야 한다. 국가 안보와 국방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국민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우리의 안보와 국방이 튼튼하지 못한데,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은 보장되겠는가? 이 정권은 국민의 힘으로 탄생되었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이 정권이 잘하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잘못하거나 미온적인 것은 분명하고 따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도와주겠다는데, 어설프게 우리의 주권이나,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 국민은 지혜롭고, 국가의 어려움 앞에서는 일치된 단결의 모습을 보여 왔다. 지금은 대단히 큰 위기 가운데 있다. 따라서 북핵 문제에 대하여 정치권에만 맡겨, ‘잘 할 것이라’고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북한은 이미 레드라인(한계선)을 넘었다고 본다. 이 레드라인을 넘어 일어날 문제에 대하여, 국민의 결집으로 대처하고 막아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에 평화의 기회도 오고, 통일의 길도 열리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9-08
  • 자주와 주체로 이룰 한반도 통일-홍 성 표 목사
    8.15 72주년과 분단을 지났다. 패권의 강국 미국과 그 패권을 동등하게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중국 간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개편과정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의 긴장 조성을 통한 혼란의 중심에 있다. 미국과의 수교는 1882년 처음 이루어졌다. 이후로 한미의 외교역사는 여러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그들 중 다시 새겨볼 1905년 7월 29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임시 외무대신 이었던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후에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 사이에 맺어진 비밀협약이 그것이다.러일전쟁(1905년 7월) 중 태프트는 필리핀 방문 도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1905년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기밀회의를 열고 동아시아의 주요 의제를 논의하며 7월 29일에는 둘 사이에 주요 내용에 대한 합의 각서를 작성하였다. 태프트는 이 합의서를 당시 국무장관 이었던 엘리후 루트에게 전달하였고, 시어도어 루수벨트 대통령은 7월 31일 승인하였다. 필리핀에 머문 태프트는 8월 7일 이 사실을 가쓰라 총리에게 알렸고 가쓰라는 외상인 고무라 주타로에게 알렸고 이로써 미일의 합의서는 완료되었다. 이 비밀 각서의 내용이 1924년 미국의 외교사가인 다일러 데닛이 발견 실체를 알렸다. 주요 사항은 첫째,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는다. 둘째,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하여 미국 영국 일본은 동맹관계를 확보해야한다. 셋째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 등이다. 그리고 이후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과 일본의 병합을 강제적 폭압으로 이루었다. 당시 2천만 조선은 일본의 강제늑약과 병합을 인정치 아니했으나 군사력을 통한 강제병합으로 한민족의 통곡하고 참담한 일제의 탐욕적 잔혹사는 거의 40여년을 삼천리강산을 짓밟고 또 짓밟았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강하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동양에서 태어난 예수가 유럽을 거쳐 조선 땅 한국에 상륙하였다. 미국은 소위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의 핍박받던 무리들이 평화의 땅 아메리카의 원주민 2억 이상을 멸절시키면서 총으로 만든 국가이다. 미국의 총은 지금은 세계의 패권국답게 핵무기와 무서운 살상무기를 만들어 제국을 유지하고 그 대량 전쟁의 살상무기를 수출하여 경제와 군사대국을 유지 시키고 있다. 가쓰라- 태프트의 밀약 합의로 한민족의 운명을 군국주의 일본에 넘겨 준 미국은 2차 대전 후의 대영제국의 후예로 세계제국이 되면서 한반도의 남쪽을 지금까지 점령, 주둔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조선의 광복이 왔다하는 순간 다시 미소에 의한 냉전의 벽이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이다. 진정한 통일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여운형과 조봉암 그리고 김구와 김규식 등을 암살하고 이승만과 미군정의 합작품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의 밀약처럼 승인해 주었다. 당시의 소위 사회주의 쪽의 독립 인사들을 좌익과 용공, 빨갱이로 몰아 싹쓸이 청산하며 민족의 원수인 일제 친일파들을 정권의 중심에 놓아 하수인으로 끌어들인 다음, 역사적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민족세계전쟁(소위 6.25)의 씻을 수 없는 비극적 상처를 남기고 분단의 영구화 고착화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비리, 불법의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무능한 평가를 받던 민주당 당시 정권을 무자비한 군부 쿠테타로 짓밟고 박정희의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박정희의 철권 독재는 결국 그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장군에 의해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다시 더 악한 전두환이 등장한다. 12.12 군부 쿠테타로 등장한 전두환은 80 년 5.18 광주민주민중들을 백두에 학살하는 살인극을 버린다. 필자가 강하게 질문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역사적 불의에 대하여 우리의 우방, 혹은 혈맹이라는 미국이 어떤 입장을 역사적으로 견지해 왔는가를 물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은 어떻게든 막을 것이고 한국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평화협정을 통한 평화체제를 견지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주와 주체적인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8-25
  • 동성애·동성혼을 위한 헌법 개정은 안된다-심 만 섭 목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정치권에서부터 구체화되고 있다. 30여 년 전의 헌법이기 때문에 이를 시대적 상황에 맞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민들도 상당히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헌법은 한 번 바꾸면, 국민투표를 통해야 할 정도로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개정의 논란 가운데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동성혼을 위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헌법개정안이다. 인권위는 현행 헌법 제32조 제1항의 ‘혼인과 가족생활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로 성립 유지되어야 한다’는 내용에서, ‘양성(兩性)’의 개념을 삭제하므로, 어떤 성적 결합에서도 결혼이 가능케 하는 결혼을 제안하고 있다. 즉, 동성애, 동성혼, 다자간 혼인 등에 문을 열어놓겠다는 심산이다. 그렇게 되면, 혼인이 남녀 간에 이뤄지고, 그 속에서 자녀를 낳고, 가족제도의 핵심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 무너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국민의 행복과 건강성을 지켜 줄 헌법의 가치와 목적이 상당 부분 훼손되는, 심각한 도전이 된다. 결혼에 대하여,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서는 분명한 헌법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우리 헌법은 제정 당시부터 특별히 혼인의 남녀 동권을 헌법적 혼인 질서의 기초로 선언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래의 가부장적인 봉건적 혼인 질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결단을 표현하였으며, 현행 헌법에 이르러 양성 평등과 개인의 존엄은 혼인과 가족제도에 관한 최고의 가치 규범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하였다. 또 “혼인이 1남 1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일관되고 분명한 결정이다. 그러함에도 인권위가 이런 의견을 내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뒤집고, 동성애/동성혼을 위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권위가 동성애를 위한 활동을 한 것을 살펴보면, 2003년에는 동성애 표현물을 ‘청소년유해매체물’에서 삭제하도록 권고하였고, 2005년에는 동성애에 대한 인권보고서를 작성하였고, 2006년에는 동성애가 포함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를 하였으며, 2007년에는 어린이용, 동성애를 권고하는 에니메이션을 제작하여 전국의 초/중/고교에서 상영하도록 권고하였고, 2010년에는 군대 내 동성애를 금지하는 군형법 폐지를 지지하는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였고, 2011년에는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언론보도준칙’을 만들어 동성애와 에이즈의 관련된 내용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였으며, 2013년에는 마포구청에서, 동성애 지지자들이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10명 중 한 사람은 성소수자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게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게시해야 한다고 권고하였고, 2014년에는 초/중/고교, 공무원, 공공기관 등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의무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을 제정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헌법을 바꿔, 그러한 모든 동성애, 동성혼을 가능케 하는 것을, 헌법적으로 뒷받침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하고도 끔찍한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동성애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양성화시키고, 동성애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법제화시키는 것은 별개이다. 더군다나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것은,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이미 동성애와 동성혼을 받아들인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1년 동성결혼을 허용한 네덜란드에서는 남성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 감염자가 늘어나고 있다. 또 필연적으로, 이성 혼을 신념으로 살아오는 대부분의 국민들에 대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하는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성 커플에 대한 역차별과 동성 커플이 자녀를 입양하게 될 때, 그 자녀들이 겪게 될 성 정체성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동성애/동성혼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 이에 대한 제재가 따르게 되는데, 그럼 헌법에 보장된 절대 다수의 국민들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 침해 등의 다양한 충격과 피해는 어떻게 감수 할 것인가? 따라서 앞으로 정치권과 정부를 중심으로 헌법 개정의 문제가 나올때, 우리는 동성애/동성혼을 염두에 둔 헌법 개정에 대하여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하며,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는 국민의 힘으로 강력하게 저지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7-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