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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의 홀로코스트, 그 명과 암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쯤인 지난 2월 중에 독일 나치 주도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관련된 90대 노옹(老翁)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을 박해한 일로 2월 11일 법정에 출두하게 된 94세의 라인홀드 하닝이란 전직 나치 친위대원이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뒤 이스라엘로 건너가 살다가 2월 19일 향년 93세로 생을 마감한 사무엘 빌렌베르크란 이름의 유대인 조각가였다. 폴란드 출신의 빌렌베르크(S. Willenberg)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갓 스물의 나이로 두 명의 누이를 포함해 총 6천여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나치의 점령지, 곧 ‘죽음의 수용소’ 트레블링카(Treblinka)로 끌려와 수용되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당시 악명 높던, 같은 폴란드 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다음으로 악명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다른 수용소가 강제노역 후 병약해져 쓸모없게 돼버린 유대인들을 폐기처분했던 경우와는 달리, 이 수용소는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즉각 가스실로 보내 희생시켰다. 이 수용소에서 87만5천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110만여 명)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악랄한 곳으로 알려졌다.당시 스무 살의 청년이었던 빌렌베르크는 어떤 이웃 사람이, 벽돌공이라고 자신을 위장하면 생존할 수도 있다고 하여 경비병을 속여 운좋게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고 노역자로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943년 8월 무기를 탈취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봉기를 일으켜, 또 운 좋게 그곳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무장봉기에 가담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 중 겨우 67명만이 살아남았으니 그가 어떻든 행운아인 것만은 사실이었다.수용소에서 탈출한 후 그는 일단 바르샤바로 잠입했다가, 종전 뒤 이스라엘로 건너가서 측량사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다가, 후년에 자신의 수난의 체험을 표출하는 조각가로 변신하였다. 그의 조각 작품들 중 이름난 것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만행을 고발하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신발을 벗겨주는 아버지>란 제목의 청동 조각상이다. 이는 세계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준 생동감 넘치는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또 한 사람, 라인홀드 하닝(R. Hanning)은 21세 때인 1943년 초부터 1944년 중반기까지 나치 친위대(SS)의 감시요원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복무했다. 이 일로 그는 90대 노년기에 이르러 데트몰드 시에 차려진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최근 독일 사법 당국은 90대 노령에 접어든 나치 친위대원 네(4) 명에 대한 공판을 열기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날 하닝이 첫 번째로 심판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1940년대에 최소 17만여 명의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된 일에 대한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되었다.검찰은 하닝을 아우슈비츠의 살인 기계(murder machine)라고 부르며 그를 기소하였다. 2011년 나치 부역자 존 뎀잔추크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었는데, 당시 판사는 점령지 폴란드의 나치 수용소 근무자로서의 활동만으로도 학살 공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요지로 판결한 바 있었으며, 지난해(2015) 아우슈비츠의 전(前) 회계장부 관리인이었던 오스카 그뢰닝(94세)에게도 징역 4년형이 언도된 것에 비추어볼 때 하닝의 경우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 사건을 담당한 도르트문트 검찰은 당시 하닝이 수용소 내의 수용자들 중에서 강제노역이 가능한 인원과 가스실로 보내야 할 인원을 구별해 내는 일과,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 주기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총살 및 수용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아사(굶겨 죽이기) 작전을 그가 방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량 학살을 도왔다고 지적하였다.그 재판정에는 다국적 고소인단(38명)의 일원인 레온 슈바르츠바움(94세)이란 베를린 거주의 노인도 증인으로 참석했는데,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발가벗겨져 가스실로 향하던, 트럭에 탄 수용자들의 비명(悲鳴)을 떠올리며 당시를 ‘생지옥(living hell)'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시체를 태우는 곳에서는 굴뚝 연기가 그칠 날이 없었다.”고 증언하였다.2월 11일에 행해진 나치 부역자 라인홀드 하닝에 대한 공판진행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그 일주일쯤 뒤인 2월 19일 유대인 조각가 사무엘 빌렌베르크는 평안한 영면(永眠)에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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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1
  • “20대 국회는 20·30청년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라”-장 헌 일 목사
    현재 우리나라 청년 실업률은 12.5%, 56만 명이다. 이는 3분의 1이 비정규직이 될 역대 최고 수준이다. 청년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정치권에 고개를 돌린 결과 지난 17·18대 대선, 19대 총선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은 세대가 20·30세대였다. 50대, 60대 이상 유권자 투표율보다 20%포인트나 낮았다. 그러나 이제 정치의 무관심과 혐오로는 더 이상 정치가 변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번 제20대 총선에서 선거혁명이 일어났다. 국민의 승리, 청년의 승리였다.20대 투표율이 28.1%(18대 총선) 41.5%(19대 총선) 49.4%(20대 총선)로, 30대 투표율은 35.5%(18대 총선) 45.5%(19대 총선) 49.9%(20대 총선)로 2030세대 투표율이 이제 50%에 근접했다. 2030세대 청년이 정치의 주변인에서 정치의 주체자로 당당하게 일어선 것이다. 국민을 무시하고 오만한 정치권인 그들만의 리그전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한민국호의 희망인 청년세대가 선거혁명의 주체자로 일어선 것이다. 20대 총선을 뒤흔든 청년세대의 투표율 상승으로 국회 최고의 황금분할이 만들어졌다. 여야 할 것 없이 그 어느 당도 과반수가 되지 않아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며 정치해야 하는, 정치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자랑스러운 청년세대들이 16년 만의 여소야대를 만들었다. 이는 곧 청년세대의 높아진 투표율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는 국가의 미래와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의 국가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청년부동층이 차기대통령도 결정할 것이다. 20대 국회는 대한민국의 미래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으로 여야는 경쟁해야한다.이번 선거에서 이와 같은 청년세대 투표율 급등은 사전투표제의 도입이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정치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인식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답이 없는 나라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청년세대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힐링이나 위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스펙을 잘 쌓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그 분노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표로 표출된 것이다. 이번에 전국 10개 대학 총학생회가 총선에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대학생·청년 공동행동 네트워크’를 조직해 적극투표 참여운동을 전개했다. 특별히 교계에서도 필자와 함께 뜻있는 기독대학청년들이 모여 기독대학청년희망포럼을 조직하여 이번 총선에 적극 참여했다.이번 20대 국회가 가장 우선해야 할 태도는 “경청”이라는 키워드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해야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들이 선택한 여야에 대한 관심이 다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이미 지난 20대 총선에서 부쩍 높아진 투표율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젠 정치권과 우리 사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한국교회도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전 성도가 우리 사회 모든 우상들을 홍해에 묻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살아 있는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 하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 정치운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정치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생명과 복지, 환경과 인권 등 샬롬의 세상을 이루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국회는 포기 할 수 없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3장 11절에서 예언자 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돈정치하는 자들, 돈 받고 왜곡된 재판을 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정의와 사랑, 어렵고 소외된 우리 이웃을 향한 선한 복지 정치를 강조했다. 이제는 20대 국회가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로서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주는 국회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국정감사를 비롯한 상시 국회 운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국회NGO모니터단 활동에 한국교회가 적극참여 해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고 나갈 다음세대에게 살만한 나라, 열심히 노력하면 비전이 보이는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2030 청년세대들의 주체적 참여를 위해 (가칭)기독대학청년아카데미 설립을 서둘러 각 영역에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영적 전사를 양육하여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도록 우리 교회의 거룩성과 공공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말씀과 삶으로 청년세대와 함께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교회여 일어나라! 기독 청년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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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8
  • 새로운 정치권에 바란다-이 효 상 목사
    지난 4년간 국정을 이끌어 온 제19대 국회는 무능 그 자체였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국회가 국민은 뒷전이고, 정작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많은 국민들의 분노와 한숨을 자아냈다. 국민들의 삶에 직접 연관된 수많은 법안들이 본회의는 고사하고 상임위원회조차 넘지 못하고 폐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국회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며, 누굴 위해 일하는 곳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치러진 이번 4.13 총선은 기존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금번 총선에서 보여준 정치권의 행태도 이전과 별 다를바는 없었다. 국민 모두를 경악케 한 거대 여야당의 공천 논란은 물론이고, 난무하는 각종 반짝 공약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치에 대한 신뢰조차 무너뜨렸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기존 양당 정치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정당들의 출현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해 1번 혹은 2번만을 강요하며 양당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또다른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 이는 국민들에 있어 총선이 진정한 정치참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으며, 그만큼 국민들의 정치의식 또한 한층 높아졌다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새롭게 구성되는 20대 국회는 정말 잘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을 대변하겠다’는 마음가짐, 그 초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도 정치에 한번 발을 들이고, 재선, 3선을 하며, 그야말로 ‘정치꾼’이 되다보면, 대부분 국민보다는 자기 밥그릇에 먼저 눈독을 들이곤 한다. 새로운 정치권에서는 ‘국회의원’이라는 특권의식과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국회의원이 놀고먹어도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게 어떻게 보면 국회의원의 특권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안하고, 세비만 받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를 망하게 하는 길이다. 국회의원은 머슴이 아닌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대표로 떳떳이 의정 활동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그리고 국회 회기 중 회의도 빠지고 지역구 행사나 해외로 나가는 건 문제다. 국정의 질이나 내용이 떨어지고 법안은 엉망이 된다. 이런 식의 운영되는 국회법은 개정해야 한다. 민심을 제대로 듣기 위해 내려간다지만 국회 규칙으로 회기중에는 공·사적인 일을 막론하고 지역구나 해외에 나가지 못 가게 해야 한다. 새 정치권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며 정치권도 변해야 산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국민속으로 들어가야 답이 있다. ‘국회를 없애고 그 자리에 공원이나 임대주택을 짓는 게 좋겠다’는 국민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정치권이 우선해야 할 일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어떻게 하면 꿈을 잃은 청년들, 아이들을 키우기 힘든 젊은 엄마들이 마음 놓고 아이들을 키워서 다음세대를 기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책들. 기본적으로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게 만들 수 있는 법안들, 그 다음에 그 땅에 사는 약한 사람들도 기회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대안들이 정책으로 제시하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활 밀착형 정당, 의원이 요청되는 때이다.국회는 입법기관으로 정책과정에 심도를 높여야 한다. 수많은 정책들 중에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처리에 혜안이 필요하다.특히 지난해 교과서 논쟁으로 불거진 역사적 논쟁이 소모적이 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역사 분야와 관련해 ‘역사정립특별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 역사 교과서 논란을 겪은 만큼 다양한 학자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새롭게 역사 편찬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또한 한국교회가 ‘동성애조장’과 IS가 이미 대한민국을 테러 대상국가로 지목한 상태에서 ‘이슬람국가의 일방적 입국비자면제’, ‘정부의 할랄 인증 비용 지원’ 등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심각한 우려를 정치권에 요청한 바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목소리에 응답해주었으면 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한편으로는 엄중한 국제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합하여 국민화합을 이루어야 하는 중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당선자로 개원국회에 임하는 정치권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기를 기대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4-16
  • 성이 매매의 대상인가?
    우리는 생활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팔므로 일상의 삶을 영위해 간다. 같은 물건이라도, 때로는 비싸기도 하고, 너무 싸질 때도 하다. 물건이 모자라면, 품귀현상이 일어나 값이 올라가기도 하고, 반대로 물건은 많은데, 살 사람이 적으면, 아무리 질 좋은 물건이라도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때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사회에 이슈가 된 것이 있다. 성을 팔고 사는 것이 온당한 것이냐? 그러한 행위를 제한한 현행법이 합당한 것이냐? 의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른 바 ‘성매매특별법’이 있다. 이것은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말하는 것으로, 2004년 9월부터 시행되어 왔다. 이 법이 만들어진 이면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2002년 1월 전북의 모 지역의 소위 집창촌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여, 이 곳에 있던 14명의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2000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5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성매매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국회를 통과하여 법이 만들어졌고, ‘성매매’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성매매를 하던 김 모 여인이 성매매를 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2013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그 여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매매를 하여 처벌을 받는 것이 헌법에 위배된 것인지 여부를 묻는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게 되었고, 이를 헌법재판소가 받아 들여, 지난 3년간 이 문제를 다루다가, 헌법재판소는 3월 31일 소위 ‘성매매특별법’에 대하여 ‘합헌’을 결정하였다. 일선 법원이 위헌 신청을 한 이유로는, ‘성매매를 형사 처벌하는 것은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대한 국가의 지나친 침해’로 본 것인데, 헌법재판소는 ‘성매매는 그 자체로 인격적 자율성에 대한 침해이며, 이를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본 것이다.이 법은 시행된 이후, 지난 12년 동안, 8차례나 위헌 심판대에 오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렇듯, 논란을 하는 입장에서는, 개인의 인격과 행복추구권에 의한 성적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하며, 직업으로 인정될 수 있는 성 노동을 규제하므로 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이 과연 팔고 사는 물건과 같은 것인가? 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아름다운 도구이다. 성을 왜곡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외면하는 것이고, 인간의 죄악을 더할 뿐이다. 성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아름답게 사용할 것을 원하셔서 주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성을 사고파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부정이며, 인간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왔던 왜곡된 성문화는 늘 사회적 논란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그 확산을 막고 사회적 건전한 윤리를 지켜 내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가 오늘까지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성의 문제를 법으로 규제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법으로라도 ‘성매매’를 막아야 하는 현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망실한 전형이어서, 마음이 더욱 무겁다. 성매매는 두말할 필요 없이, 타자에 대한 인권유린이며, 자기기만이고, 윤리의 파괴이다. 성매매는 국민의 성적 방종과 타락을 부추기는 것이므로,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생계의 수단은 성매매가 아니더라도, 건전한 직업윤리 하에서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인간의 성을 매매하는 사회는 아무리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였다 하여도, 미개한 사회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이 아무리 자유롭다하여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한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이러한 왜곡된 생각에 대하여 보루(堡壘)역할을 한 것은 이번엔 법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법이 우리의 생각과 정신까지 지켜줄 것인가? 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도덕이며, 도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양심이다. 스스로의 양심을 거스르면서도, 성매매의 핑계와 변명거리를 찾기보다는,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이 가진 인격 존엄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도 성을 팔고 사는 사회가 온전한 시대가 있었는지 살펴 볼 일이다. 물론, 약자에 대한 구제책도 함께 강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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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6-04-06
  •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임 영 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사흘 전 돌아가신 그가 이미 무덤에 묻히셨는데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마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마28:4)”고 했지 않은가. 앞서 예수께서는 맞서 보아야 본전도 못 찾을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의 무리와 대결했었고, 끝내는 십자가의 형틀을 제 어깨에 메고 골고다언덕으로 향해야 했었으며, 그리고는 처형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무덤에 묻혀 있을 수가 없었다. 첫째는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지난 증언(눅 24:7)이 이루어진 사실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앞으로 그에게 너무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베드로의 무리, 곧 옛 제자단을 만나 그들을 품어 안는 일이었다. 즉 그들을 용서해 주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극단적인 포용(관용)의 자세를 보여주는 일이었다.사람들에게 가장 큰 마음의 상처는 측근 인사들의 ‘배신’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 무리의 배신, 아니 ‘배교’ 행위는 예수께는 가장 큰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생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18:22)”고 베드로의 질문에 응답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때의 자신의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셨던 셈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용단)이었다. 요즘 시중의 TV극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보복의 감정에 지배되고 있는지, 아니 복수의 칼날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말하자면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다. 이를 예수께서는 밑바닥에서부터 거부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 요원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옛 제자단을 용서하는 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인간으로서는 차마 맡길 수 없는 일들을 다시 맡기셨다. 평범한 인간도 때로 측근의 잘못을 용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중차대한 일을 다시 맡기는 일까지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배신당할까 은근히 두려워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단 용서했으니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보신 것 같다. 그게 바로 용서라는 교훈을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절반쯤 깔고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실은 절반은 여전히 용서하지 못한(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용서는 참으로 위대하다.예수께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역도 용서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그는 대제사장등 기득권층의 도시 예루살렘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못할 처지였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 갈릴리에 가(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생애 후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예루살렘 성전 지배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의 세력에 밀려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불상사까지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살아생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신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23:37).”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도시 예루살렘에 대해서까지 포용적이다.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예수께서, 선지자들을 돌로 쳐 온 예루살렘에 대해서 용서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베드로가 다시 힘을 얻어 예루살렘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여기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유대인 중심의 히브리파 신도들 외에도 로마지역 문화에 익숙해 있던 헬라파 신도들도 들어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었던 일이 후에 베드로 중심의 히브리파 신도들도 이방 로마지역의 선교사로 나가 활동하게 되는 데 하나의 문화적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판단된다. 예수께서는 결국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신 자신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게 만들었던 것이다.예수 부활 사건에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한 과정의 성격이 숨겨져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용서의 의미를 인간들에게 철저히 가르쳐주시되 그것의 원천이 인류 구원을 위한 원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그 점이라고 하겠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3-25
  • 에이즈환자는 국공립요양병원이 전담하라-유 만 석 목사
    지난 해 12월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일반요양병원에서도 에이즈 환자를 입원시키도록 사실상의 규정을 바꾸었다.이 법은 의료법 시행규칙 제36조 제2항(2015년 12월 23일 개정)인데,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전염병 질환자는 요양병원의 입원 대상으로 하지 아니 한다’를, 개정에서는 ‘제42조 제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감염병 환자 등은 요양병원의 입원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여기에서 보건복지부가 감염병으로 규정한 것은, 제1군 감염병(콜레라,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장출혈성 대장균감염증, A형 간염), 제2군 감염병(디프테리아, 홍역, 폴리오), 제3군 감염병(결핵, 성홍열, 수막구균성 수막염, 탄저), 제4군 감염병(페스트, 바이러스성 출혈열, 두창, 보틀리눔 독소증,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인플루엔자 인체감염증, 신종 인플렌자, 신종전염병증후군)으로, 여기에서 에이즈는 빠져 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 2011년 5월 보건복지부가 ‘후천성면역결핍증은 성관계나 수혈 등을 통해 전파되는 것으로, 다른 감염병과 같이, 호흡기나 식생활 등 일상적인 공동생활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될 위험이 없으므로, HIV 감염인을 전염성 질환자로 포함하여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한 바 있다.그러나 보건복지부는 추가적인 제도정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 해 11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주최로 “HIV/AIDS 감염인 장기요양병원/시설 정상화를 위한 토론회”가 열린 그 다음 달에, 의료법 시행규칙 제36조 제2항을 개정하여 에이즈 환자의 일반요양병원 입원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였다.인권위 주최로 열린 자리에서는, ‘HIV/AIDS 감염인의 인권상황과 복지지원 실태를 알아보고, HIV/AIDS 감염인이 차별받지 않고 치료받고, 요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보고자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볼 때, 보건복지부의 의료법 규정 개정에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만약 병원이 이를 어길 경우, 의료법 제15조 제1항의 ‘의료인은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 한다’와 의료법 제89조에서, ‘제15조 1항을 위반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원이하의 벌금에 처 한다’는 규정에 저촉될 수밖에 없다.이에 대하여 의료계에서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현재 1,300여개에 이르는 요양병원 중 97% 이상은 노인요양병원으로 대부분 요양병원이 에이즈 관련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또 대부분 에이즈 환자들이 결핵 등의 합병증을 동반하고 있어, 이런 남성동성애 에이즈 환자들의 입원을 허용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있는 노인환자들에게 치명적인 2차 감염 위험성이 높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요양병원 일반 입원환자들과 보호자, 병원 종사자들이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대한요양병원협회가 지난 2월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일반인(3천957명), 환자·보호자(674명), 요양병원 종사자(996명) 등 총 5천62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일반인 96%가 에이즈환자의 요양병원 입원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양병원 환자나 보호자, 병원 종사자들의 반대는 말할 것도 없다. 보건복지부는 여론조사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바란다.남성 에이즈 환자의 상당수는 동성애에 의한 것이다. 에이즈 환자는 전문병원이나, 지정된 병원에서 치료하여, 일반 환자들과는 격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에이즈 환자의 인권만을 고려한 처사는 매우 부당하며, 온당치 못하다. 그렇다면 절대다수의 노인환자들의 인권과 건강문제는 무시되어도 되는 것인가?사정이 이런대도 에이즈 환자들 입원을 법으로 강제하고, 이를 거부할 시는 형사 처분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에이즈를 치료하고, 예방해야 할 정부가 책임을 미루고, 오히려 에이즈를 확산시키거나, 그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를 속출시킬 수 있음을 우려한다.에이즈 환자의 치료비를 정부에서 전액 지원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정부는 자칫 일반 환자들과 특히 노인들의 건강에 치명타를 입힐 개연성이 높은 에이즈환자와의 격리를 속히 서둘러 국공립요양병원 이를 전담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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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7
  • 기독교 가치를 붙잡고 다시 일어서라-이 억 주 목사
    지난 1990년대 중반 기독교 안티들이 온라인에 등장하면서 기독교적 가치에 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일었다. 기독교적 가치 논쟁의 본질을 살펴보면 복음진리 소유권 문제이다. 안티 기독교들은 지금도 기독교의 절대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구원진리 소유권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인사들에게 대한 공격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진리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부 인사들이 저들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진리를 붙들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그런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것도 자주 말이다. 특히 최근들어 교회인사들의 부정과 부패는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드러나다 보니 이제는 웬만한 크기의 사고 정도로는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문제는 웬만한 사건사고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우리를 경악시키는 메가톤급 사건이다. 일반인들도 상상 할 수 없었던 신학교수 신분의 어느 목사가 자신의 자녀를 학살 한 사건은 기독교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게 했다. 복음 전도자들을 망연자실하게 했다. 전도 현장에서 절망의 소리가 들려온다.이 사건을 알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무슨 언어로 다가갈 수 있는가? 어떻게 기독교 가치를 설명해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사건 후에 터져 나온 북한 김정은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차라리 반갑기까지 했다. 사회 전체로 확산되던 기독교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잠시나마 김정은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를 차라리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믿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다.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인생이 과연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독교적 가치를 무효화 할 수 있는가? 또한 몇몇 말썽꾸러기 기독교 인사들에게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질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진리도 그와 같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사람들의 일들은 부정해도 하나님의 일은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의 진리, 기독교 가치를 세상적 가치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지 않은가? 상대적 가치가 절대적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면 절대적 가치를 굳건히 붙잡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범죄행위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슬퍼해야 한다. 울어야 한다. 가슴을 찢어야 한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야 한다. 사람들의 눈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가처럼, ‘슬프다 이 성이여,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려내림이여,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라고 울고 또 울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렸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가 아니라,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줄 터인데’ 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인생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무효화 시킬 수 없다는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4세기 초에 어거스틴(Augustinus)과 도마투스(Aelius Donatus)의 세기적 논쟁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말씀해 준다. 배교자 문제와 교회론에 관한 논쟁이지만 인생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교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주님의 몸인데 부패할 수 있는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생들이 부패할 수 있으나 부패한 인생들을 정리하는 것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기독교적 절대 가치, 복음의 절대 진리를 아직도 교회에게 일임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 이제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붙잡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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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3·1정신 계승하고 빛과 소금 되자-이 상 대 목사
    한민족이 일본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제97주년 3.1절을 맞아,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소리높이 만세를 외쳤던 민초들과 시대정신에 앞장섰던 한국교회를 되돌아 본다.3·1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운동을 태동시키고 불을 붙이며, 확대한 주도세력이 바로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이었다. 물론 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성향에서 보듯이 이 운동은 기독교계 이외에도 당시 천도교와 불교계 등과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초종파적인 민족연합운동이었지만, 기독교가 중심이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 교세는 전인구 1700만명 중 2%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교세를 가지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측 인사가 16인이나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교회가 얼마나 신실한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품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된다.3·1운동의 기본은 독립청원이었다. 당시 ‘동양평화’를 내세우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일제당국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논리적 반박은 분명 돋보이는 활동이었다. 자신들을 과거의 조선인이 아니고, 세계의 대세를 알고 문명의 정도를 깨달은 ‘신조선인’으로 규정하면서, “조선 독립은 민족요구의 정의인도(正義人道)이며, 필연의 공리천칙(公理天則)으로 확신한다”라고 선언하며, 당당히 옥고를 치루었다.3·1운동으로 핍박을 받은 수원 제암리교회에서는 일본 경찰들이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채 사방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집단학살 하였다. 일제가 만든 통계로도 3월 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사람이 7979명, 부상자만 1만 5961명, 검거된 사람이 4만 6948명에 이른다.3·1운동은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여러 약소민족에게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어주었다.3·1운동으로 인하여 그 해 4월에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세계에 천명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3·1운동은 개항이후 이 나라의 새로운 지도 이념과 시대정신으로서의 그 위상을 지켜오며 축척해온 자주독립의식을 분출하므로 교회는 많은 피해와 상처를 입었으나, 이 운동을 통해 교회는 민족의 수난과 호흡을 함께한 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정립했다. 3·1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므로 3·1운동을 점화하고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통해 근대사의 흐름을 이끄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역할과 자리매김을 가져언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물 같은 전 민족의 재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3·1운동정신이다. 3·1운동 정신은 빈부의 차이, 남녀의 차이, 양반과 상인의 차이, 지역과 종교의 차이 등 그 시대의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벽을 뛰어넘어 온 겨레가 한 마음이 되었던 민족통합정신이다. 지금처럼 국론 통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시대에 3·1운동정신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다. 2019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근대사에 끼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역할과 공헌을 재평가하는 작업과 더불어 3·1운동을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으로 재점화하고 확산시키므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여는데 기여해야 한다.한국교회가 제2의 3·1운동을 재현해야 한다. 탑골공원을 뒤덮으며 독립의지를 불태우던 함성소리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3·1정신을 계승하는 제2의 주기철, 신석구, 유관순, 김마리아 같은 인물들이 나와야 한국교회는 미래가 있다.제97주년 3·1절을 맞아 교회는 다시 3·1정신을 계승하고 기독교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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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회…임 영 천 목사
    누가 나에게 신간 서적 한 권을 전해 주었다. 어느 서점에서 사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서 한 권 얻어온 것도 아닌, 그 책의 저자가 내 앞으로 증정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기록해 놓은 기증본 저서였다. 출판기념식엘 갔는데 저자가 대신 전해 달라며 내 앞으로 사인을 해서 주더라는 것이었다. 표지 장정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해 보였으나, 쪽수는 정확히 320쪽에 이르는, 제법 볼륨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책이었다. 작년 말(2015. 12) 기독교 신앙서적 전문 출판사(홍성사)에서 펴낸 목회체험 수기, 달리 표현해 기독교적인 자서전의 성격을 지닌 책이었다. 그 책의 이름은 <황하의 물결>(2015)이었고, 저자는 최황규로 되어 있었다. 나는 저자의 이름을 두어 번 되뇌어 봤으나 누구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책을 대신 전해 준 사람의 말이, 저자가 나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고 하더라 했다. 그래서 저자의 경력을 대강 훑어보았다. 저자가 20대 초반의 나이(1982년)에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한 사실이 보였다. 이로써 저자와 나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나는 어느 지방대학(사대 국교과)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5?18 직후 그 직장에서 떨려난 뒤 다음해(1981) 봄 40대 초반에 장로회신학대학의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공부하고, 1984년 봄에 그 대학의 일반대학원에 입학하여 더 공부해서 연속적으로 5년간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학교 당국의 배려로 그 대학에 출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오륙년 동안 장신대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만나는 기회를 얻기도 했었다. 혹시 이때 <황하의 물결>의 저자가 혹시 나와 강의실에서 만났던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부야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장신대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40대 초반의 인사와 20대 초반의 인사가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 기회가 우연적이지 않게 주어졌었다는 점이다. 그때로부터 한 세대(世代: 30여년)의 세월이 이미 흘러갔고, 우리는 각기 70대와 50대의 연배들이 되어 서로를 회고할 위치에 서게 된 것 같다. 나는 장신대가 그렇게 진보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대라고는 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런 신학대학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아주 보수적인 신학에만 안주했다고는 스스로 생각지 않는다. 거의 같은 경우가 <황하의 물결>의 저자 최황규 목사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 역시 장신대라는 다소 보수적인 신학대에서 공부한 신학도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결과는, 단순히 보수적이기만 해서는 감당할 수 없을 기독교 사역을 현재 담당하고 있다고 볼 때, 그가 지금은 진보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어느 면 수용하고 있는 교역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 목사는 한때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부목(副牧) 일을 보다가 지금은 서울중국인교회를 설립해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조선족교회든 중국인교회든 어느 쪽이든 쉬운 목회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탈북자, 조선족,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의 난관이 어떠했는지 이 책 속에는 매우 리얼하게, 아니 드라마틱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그는 이미 투사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그런 어려운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어느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할까 망설이는 신참 목회자 앞에는 자신이 목회를 맡게 될 목회처가 여럿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 할 수만 있다면, 대형교회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 보면, 그런 교회에는 누구든 갈 수가 있다. ‘이’ 목사가 못 가면 ‘저’ 목사가 가겠다고 자청할 것이고, 또 그것도 아닐 때에는 ‘그’ 목사가 가게 될 수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소외된 지역의 교회에는 누구든 선뜻 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런 곳엔 ‘그가 아니면 안 될’ 그런 목회자라야만 가게 될 수 있다. 왜냐면 그런 곳은 모두(아니, 거의)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목회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데 그 특수성이 있다고 볼 때,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예수께서는 적어도 휘황찬란한 채색의 길은 걸어가지 않으셨을 것 같다. 그래서 소외된 갈릴리 지역 농어민들에게 찾아가셨고, 후에는 맞서 보아야 본전도 못 찾을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과 대결해서 미움을 크게 샀으며, 끝내는 십자가의 형틀을 자기 어깨에 메고 골고다언덕으로 향해야 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어려운 길을 최소한으로나마 걸어가고 있다는 면에서 그(최 목사)의 목회의 길은 매우 독보적이라고 하겠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2-19
  • 굿판으로 망한 구한말의 역사를 보라!-유 만 석 목사
    보도에 의하면 새누리당 종교위원회 위원장 이이재 의원은 (사)한국역술인협회의 제의를 받고 지난 29일 오후1시부터 국회의원회관 2층 소회의실에서 공동으로 ‘혜안의 선각들과 함께 하는 2016 병신년(丙申年) 합동국운 발표회’를 가졌다.새누리당 종교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주호 박사의 사회로 열린 이날 발표회의 핵심은 식전행사로 오후1시부터 한 시간 동안 4마당으로 펼쳐진 오민경 무속인의 ‘국운융성기원 및 2016년 병신년 운맞이 재수굿’ 이었다.한국민속신앙사전에 의하면 ‘재수굿’은 가정의 안녕과 재복(財福), 자손의 창성(昌盛), 가족의 수복(壽福) 등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빌기 위해 계절의 새로운 과일을 신령(神靈)에게 바치며 지내는 넓은 의미에서의 무속제의(巫俗祭儀)이다.재수굿을 벌인 무속인 오경민 씨는 한 언론사와 사전 인터뷰에서 “하늘 문을 열어서 천신에서 재수(財數)를 받고, 부근도장 신령님, 팔도명산의 신령님 등을 위한 굿을 할 예정”이라며, “특히 세 번째 마당은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굿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오 씨의 말대로라면 사실상 29일 국회에서 벌인 굿마당의 핵심은 국태민안을 명분으로 한 ‘부근도장 산신령, 팔도명산 산신령을 위한 산신제’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팔도강산 산신령을 위한 제의(祭儀)를 통해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안정’ 이라는 재수(財數)를 받겠다는 것이다.구한말 명성황후는 무속인들의 굿에 빠져 굿판 경비로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굿판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매관매직으로 국법질서를 문란케 하여 결국 국가를 일본에 내주지 않았는가!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것도 모자라 그 시신마저 불에 태워져 한줌의 재로 돌아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국모가 굿판에 빠지니 사대부 양반집 아녀자들도 앞 다퉈 굿에 빠지고, 서민들도 굿에 미쳐, 온통 나라가 굿판이 되어 몰락한 것 아닌가?명성황후의 국태민안을 명분으로 한 굿판은 결국 자신도 처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국가도 파멸시키는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였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이 오죽했으면 순사들을 동원하여 도처에서 성행하는 굿판을 단속하게 하고, 조선의 굿판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를 하게 했겠는가?무속인들이 사가(私家)나 자기들의 경내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을 누가 말하겠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인 새누리당의 종교위원회가 역술인들과 공동으로 민의의 전당인 국회 내에서 굿판을 벌였다는 것은 불과 130여 년 전 국가를 재앙의 빠뜨린 그 위험에 전철을 밟는 것으로 무책임하고 위험한 처사이다.굿판에 이어서 국내 저명한 역술인, 무교인(巫敎人), 도인(道人)들이 나서서 2016년의 국운에 대한 예언 발표들은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각 방송에 나오는 전문해설가들의 2016년 국가전망이 훨씬 신통방통(神通旁通)하다.빅 데이터 시대에 수많은 국내외 여건들이 맞물려 펼쳐지는 치열하고 복잡한 2016년의 역사와 국운을 역술인들이나 무속인들의 산신령 계시로 듣겠다는 발상 자체가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이 앞장서서 할 짓은 아니라고 본다.세계 IT 1위 국가인 최첨단의 대한민국 국회 내에서 여당이 주도하여 산신령으로부터 국운의 재수를 받기 위해 굿판을 벌이고, 역술인들의 예언들을 발표한다는 것은 아무리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의 차원이라고 갖다 붙여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이는 고등종교의 전파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한 차원 높였다고 인정하는 2000년 전으로 돌리려는 퇴행적 발상으로 국민들의 정신을 무속신앙으로 몽매(蒙昧)하게 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대한민국을 세운 제헌국회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시작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오후2시 제헌국회 제1차 회의 개회에서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의 개회사를 보라.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동의와 제청함)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터 인데, 이운영(감리교목사) 의원 나오셔서 간단히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이렇게 기도로 세워진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당이 공동으로 굿판을 벌인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요, 통탄할 일이다. 새누리당 종교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민들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기 바라며, 재발 방지를 국민 앞에 천명해 주기 바란다.정치인, 공직자들을 막론하고 과학의 첨단시대에 국가의 공공기관 내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요, 재앙이다. 우리는 이를 좌시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개한 무속신앙이 아니라 고등종교 시대에 살고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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