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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한국에만 에이즈 환자가 늘고 있는가? -심 만 섭 목사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만이 유일할 정도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이 질병관리본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에이즈 환자가 총 13,584명인데, 이는 10년 전인 2007년에 비해 2.6배 증가한 것이며, 특히 10대의 경우, 지난 2007년에는 99명이었는데, 지난해에는 417명으로 4.2배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또 20대가 1,243명에서 3,523명으로 2.8배 증가하였으며, 30대도 1,759명에서 3,699명으로 2.1배 증가하는 등,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격히 번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인재근 의원은 ‘10대 청소년의 높은 증가율은 국민 건강 차원은 물론, 국가재정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다른 의원인 자유한국당의 윤종필 의원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에이즈 환자 치료에 들어간 국가 재정은 연간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윤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에이즈 환자 치료비는 2014년에 714억 원, 2015년에 810억 원, 2016년에 921억 원으로 해마다 크게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이즈 환자는 제3군 감염병으로 치료비를 국가에서 전액 지원하고 있는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90%, 나머지 5%는 국가(질병관리본부)에서 지원하고, 그 나머지 5%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므로, 결국은 100% 국민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 된다. 거기에다 간병인비까지 지원하고 있어, 이제는 해마다 1,000억 원이 넘는 국가재정을 에이즈 환자 치료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5년부터 2016년까지 건강보험공단이 에이즈 치료를 위해 지출한 재정은 5,415억 원이나 된다. 여기에다 국가와 지자체와 간병인비 등을 포함하면, 그 재정은 훨씬 초과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대처가 없이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막대한 재정 지출이 늘어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물론, 국가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치료비가 들어가고, 장기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에이즈 환자에 대하여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들도 우리 국민이며, 국가가 보호하고 치료해 주어야 하니까.그러나 문제는 왜 한국에는 에이즈 환자가 줄지 않고 계속 늘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번 국감에서 자유한국당 성일종 의원이 밝힌 바에 의하면, 에이즈의 주 감염 원인이 남성 동성애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동안 에이즈의 치료와 예방의 주무 기관인 질병관리본부는 우리나라 에이즈 환자의 감염 경로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었다. 질병관리본부는 2011년까지는 에이즈의 발생 원인이 ‘이성·동성 간 성 접촉’으로 표시했다가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성 접촉’으로 표시하는 등, 애매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에이즈 환자의 92%는 남성이다. 또 최근 신규 감염자의 94.3%가 남성이다. 이를 감안하면, 에이즈의 감염 원인이 남성 간 성 접촉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 동안 시민 단체나 기독교계에서 질병관리본부에 정확한 실태파악을 위한 제언과 감염의 주 요인에 대하여 홈페이지에 표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서 성일종 의원이 보건복지부장관과 질병관리본부장에게 여러 자료를 보이면서, 에이즈의 주요 감염 원인이 남성 동성애에 의한 것임을 묻자, 이를 시인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에이즈 환자 증가와 그 실태는 분명, 이에 대한 행정의 문제와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 잘못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본, 호주 등은 에이즈 감염자가 줄고 있는 상황(특히 가장 많은 에이즈 환자를 보유했던 아프리카에서는 급격히 줄고 있음)에서 우리나라만 늘어나고 있어,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10대와 젊은 층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일이다(2016년 에이즈 신규 감염자 수는 1,062명으로, 이 중에 20대가 360명-33.9%, 30대 241명-22.7%, 40대 193명-18.2%로 20~40대가 전체의 74.8%를 차지함)그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는 무분별한 ‘쿼어축제’의 허용으로 본다. 현재 서울과 대구에서 허용하고 있고, 부산에서도 열렸고, 제주에서도 허용된 상태이다. 마치 동성애가 축제처럼 보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동성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가 확산되는 것이다. 둘째는 언론들의 ‘인권보도준칙’에 의한, 에이즈의 문제점에 대한 실태와 정확한 원인을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의 경각심이 무너진 것이다. 셋째는 정부의 안일한 행정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에이즈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본다. 넷째는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과 일선 교육청에서의 동성애 조항을 포함시킨,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것들이 무비판적으로 만들어져, 청소년과 젊은 층에게 동성애를 권장한 꼴이 되었다. 다섯째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지는 못할망정, 비호하고 두둔하는 행태를 보인 때문이다. 이번 국회 국감에서도 일부 지자체장들이 동성애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질의하면, 정치적 견해를 다르게 하는 의원들이 이를 차단하는 등,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보였다. 마지막으로는 일부 목회자들이 ‘쿼어 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성경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에이즈의 증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당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국민의 건강을 위한 일에 여·야가 따로 없고,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없으며, 민·관이 따로 없다. 이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지혜를 모아, 에이즈를 예방하는데 주력해야 하고, 확산되는 원인을 차단하는데, 뜻을 보태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1-06
  • 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 임 영 천 목사
    지난 11일 제59회 사법시험(제2차)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응시자 186명 중 55명이었다. 131명은 탈락의 고배를 마신 셈이다. 과거에는 불합격자라도 “내년에 재도전하면 되지” 하고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왜냐면 이번 시험을 끝으로 앞으로 사법시험은 실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른바 ‘고시 낭인들’을 숱하게 배출하는 역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사시(司試)는 많은 청년들의 꿈이었다. 젊어서 시인 되려고 하지 않은 자 없듯이, 청년 시절 고시(고등고시) 보려고 꿈꾸지 않은 자 없다고 할 만큼 사시는 젊은이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아무리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머리만 좋으면 이 고시(사시) 한번 쳐서 합격되고 그 팔자도 고쳐버렸다. 가난해서, 또는 다른 이유로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이 시험 한번 치르고 용 되는 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실로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상고만 나왔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실제 사례였다. 그는 그런 불운한 이들의 슬픔을 알았기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그 슬픈 이들의 마음을 날래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지금 개천의 물고기들이 용 되기를 꿈꿀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새 제도인 로스쿨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천의 평범한 물고기들이 로스쿨에 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을 어찌하랴. 로스쿨의 입학제도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돈 없는 청년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거액의 등록금인데다 면접이란 관문에서 모모 인사들의 자제들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해 버려 개천의 물고기들이 들어갈 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선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다. 애초에 그 개천의 미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것이라고 말이다. 개천의 미물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런 답들이 오가고 있다. 그들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들은 건전한 사회의 미꾸라지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하기야 그들 속에서 시위자들이 나오고 데모꾼들이 나오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가 혼탁하니까 그들이 시위를 하고 데모를 주도하는 점은 도외시하고 보이는 겉모습만 가지고 그렇게 평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사시에 응시하고 합격을 하게 된다면 그 동료 미물들에 대하여 온정적인 태도로 나올 것이 뻔하니, 그들을 아예 시험제도 자체를 바꿔 사회(법조계)에서 격리시켜 버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결과 로스쿨 제도를 도입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미물들이 아닌 귀족의 자제들로 채우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법조인 등용문 제도를 바꿨다고 보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음서제(蔭敍制)를 오늘에 다시 도입한 셈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채용하던 인재선발 제도 때문에 길(관직)이 막혔던 양반(귀족)의 자제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관직에 쉽게 나가게 했던 편법이 오늘날 되살아난 셈이다. 그래서 로스쿨제도를 ‘현대판 음서제’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합격자 발표가 있기 하루 전(10일)에 헌법재판소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귀족들이 싫어하는 한판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전국수험생유권자연대란 단체였다. 그들은 “고졸과 서민의 법조인 진출을 막는 로스쿨 제도는 위헌”이라고 하면서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그들은 “사법시험이나 변호사 예비시험... 등 국민 누구나 법조인이 될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로스쿨 제도는 국민 기본권인 평등권과 직업의 자유, 공무 담임권을 침해한다”고 하였다. 이날 그들이 내세운 피켓의 구호는 “누구나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세상!!”과 “청년의 꿈마저 빼앗지 말라!!”였다. 호소력이 매우 큰 구호였다. 요즘 소위 ‘고시 낭인들’이 상당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고시 탈락자들을 무조건 낭인들이라고만 보지 말고 ‘앞날의 꿈을 위해 끝없이 도전해온 불운한 이들’ 정도로 봐줄 수도 있을 줄 안다. 그들에도 빛들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들의 구호를 감안해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본다면, 새 제도인 로스쿨이 위헌이므로 폐지하라고 할 수 없다면, 지난 사시와 유사한 어떤 시험제도를 병행해 그들의 행복권을 보장해주는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법조인이 되는 것이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직업이 될 수도 있게 말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0-28
  • 종교개혁 500주년, 이후를 생각하다/ 이효상 목사
    “이대로는 안된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한국교회도 구호로 무성하다. 그런데 아쉽고 안타깝게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종교개혁에 교회개혁이 없다. 중세교회의 타락이었던 성지순례,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추모미사, 성물숭배, 종교적 고행 행위 등이 전염병처럼 이어지고 있다. 종교개혁을 빙자해 기념메달을 만들어 팔고, 기념 세미나를 여는 등 50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들을 연다. 그 어디에도 담론만 무성하지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의 실타래를 풀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아무런 감흥도 울림도 없음은 언론 홍보용 행사는 아니었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종교개혁에 열심을 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그 정신을 이어 갈 것인지 묻게 된다. 이렇게 종교개혁 500주년이 이렇게 단회적 이벤트로 끝낼 것인가? 모먼텀이 되고 있는가? 다시 500년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 5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준비하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일부 교단장을 중심으로 빅텐트를 치겠다고 하는 것은 진정 한국교회를 위한 빅텐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이합집산을 도모하는 또 하나의 분열이 될 것인가? 교회는 덩치로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다. 덩치는 큰데도 지금의 개신교는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로서 그 방향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 대사회적 영향력은 사라지고 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영향력이 있다. 종교개혁에 있어 사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만큼 지름길은 없다. 종교개혁의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지만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복음을 복음답게 하는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메시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목회현장에서 지속적으로 그 정신을 적용하고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로 나가려는 의지는 더 없어 보인다. 여러 목회자들을 꾸준히 만나보면 목회현장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생각 외로 크다. 교회가 분열과 상처로 주저앉은 상황이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프로테스탄트’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이다. 이들은 영적인 갈증과 욕구를 지니고 있었기에 습관적인 가르침이나 형식적인 관계를 통하여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허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프로테스탄트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모험적인 삶의 행태가 거대한 전통을 거부하고 형식적이 되어가는 신앙과 신앙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몰락해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현실을 냉철히 통찰하여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회개와 더불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말씀 중심의 복음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회개의 목소리와 함께 말씀의 실천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 사실 다른 해답이 없다. 내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말씀 중심의 복음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자성과 회개의 소리가 그립다. 진리와 믿음을 향한 그 정신을 루터는 신학이 아니라 그것을 호흡하는 사람들의 심장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터는 바로 거기에서 참된 교회의 미래를 보았고 눈에 보이는 중세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말씀중심의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다섯가지 핵심 정신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현재진행형으로 적용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짜기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개혁자들, 프로테스탄트들이 출현해야 한다. 그러나 외적으로 추락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할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사회는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기대하는 바가 분명 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돌아 보아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에 속해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대로 살고, 세상 사람들을 잘 섬기기 위해서이다. 지금 타종교는 차세대 인물들을 정책적으로 키우고 사회와 소통하는 지도자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아직도 쉰세대 어르신들이 그 영향력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누리려는 허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교회세습과 대형교회의 천민 자본주의화는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사교회화 하는 행위는 건강한 교회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향후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의 20년, 30년을 이끌 40대지도자, 50대지도자가 준비되어 있는가? 지금 이대로 더 추락할 것인가?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인가?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에 달려있다. 그가 바로 당신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10-24
  • 힘의 균형-홍 성 표 목사
    ‘힘의 균형’ 논리는 1920-1960 사이의 라인홀드 니버에 의한 세력균형 논리이다. 소위 평화적 수단 전략의 한 이데올로기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미소 두 강대국에 의한 냉전으로 패권 경쟁을 가열차게 하게 되고 이러한 경쟁은 가공할만한 살상무기 그 중에서도 핵탄두 군비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겪은 민족세계전쟁(6.25)은 1-2차 세계 대전의 피해보다 더 크고 참혹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단의 고착화, 영구화를 가져오고 중국과 일본, 미국 등은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내지는 안정화 시키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한반도의 희생을 통한 주변국과 강대국들의 이익창출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막말수위가 도를 넘고 최근에는 B-1B ‘죽음의 백조’ 폭격기가 북한 항공까지 침투하였다. 소위 협상과 장사꾼의 ‘거래의 기술’를 통한’전략적 혼돈 전략’을 통한 협상전략의 압박 행동이다. 일단은 협박을 하면서 평화적 협상의 테이블로 이끌어 낸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무모한 전략이다. 만일 북한 상공의 침투에 대한 북한의 실수든 정당방어든 간에 어떠한 시비가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파멸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소의 무기, 군비경쟁은 핵탄두의 경쟁이 되어 우리가 사는 지구를 수십 번씩 태워버리는 가공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역사의 현장은 저출산, 양극화 고령화와 함께 자살율 제 1위( OECD 경제개발협력국)를 살고 있다. 분단과 동서와 소위 진보와 보수, 친일세력과 민족적 민주 통일세력들의 내적 갈등의 삶을 살고 있다. 남북의 대치와 북미의 위험한 말장난을 통한 전쟁 놀음의 모험이 현실화 될 수도 있는 지경을 걷고 있다. 어느 조직이나 헤게모니의 싸움과 주도권 싸움은 지속된다. 정의의 개념마저도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메이컵되고, 페인트모션 된다. 종교집단이나 세속적 정치집단,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민중을 착취의 수단으로 살고 있는 기업들 모두가 실은 자기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야누스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우리의 삶의 푯대가 되는 예수의 이해나 성서적 해석도 천차만별 사실은 자기입장의 실존이나 이익집단들에 의해서 오도 되는 자기경험이라는 한계의 틀 안에 갇혀 있을 때가 허다하다. 민중의 해방을 말하는 가운데서도 실은 민중들을 앞 세운 전도된 가치를 고집하는 예가 허다하다. ‘죽음의 백조’가 한반도의 상공을 마음 대로 떠 다니고 핵잠수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동해를 휩쓸고 다닌다. 우리가 의지하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로 위로와 희망을 창조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누가 더 선하고 악한 것인가의 평가는 역사가 증명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가 역시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역사적 평가는 상식이고 진리이다. 어떤 부류가 평가하는 것인가도 중요하다. 어느 때이건 힘 없고 가진것 없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며, 멸시받는 부류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 춥고 배고프며, 어떤 일을 하고도 그 대접으로부터 주변부나 변두리에 있는 자의 평가가 정의인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불쌍한 자이다. 우리 모두는 티끌과 먼지로 돌아갈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상처받고 그 상처들을 치유해야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죽음의 백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 하늘이나 바다나 땅 위에 죽음의 존재들과 가치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애초부터 인간들에게 큰 희망을 두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겸손한 자도 없고 신의를 지키는 자도 없으며, 정의로운 자도 없다. 진실로 기도의 제목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고, 세계 어는 곳에서나 전쟁이 없으며, 죄 없는 민중들의 삶이 파괴되는 일들이 없기를 기도한다. 한반도를 둘러 싼 우리의 삶의 현장은 전쟁 놀음을 경쟁하고 있다. 이 와중에 트럼프의 무기장사는 호재를 부르고 약자라고 생각하는 무능한 사람들은 무기를 사들이기에 바쁘다. 우리가 믿는 것은 창조주와 예수그리스도 성령이시다. 우리가 믿는 것은 거짓 없는 정의와 용서와 사랑 뿐이다. 인간들의 적대적 행위와 중상모략은 계속된다.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힘의 균형은 하나의 위험한 경쟁을 불러 일으킨다. 백조가 춤을 춘다. 그것은 평화의 백조가 아니라 죽음의 백조이다. 청일과 러일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였듯이, 북미의 말 경쟁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중일과 러시아가 함께 유익만을 계산할 때는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 전쟁 때와는 그 위력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인간으로부터 올 수가 없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9-29
  • 북한의 핵 도발은 국민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심 만 섭 목사
    북한이 지난 3일, 제6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핵실험 직후에 성명을 발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하기 위한 핵탄두 개발용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실제적으로 북한 지역에서는 우리 기상청이 계측한 바에 의하며, 진도 5.7의 인공지진이 감지되었고(미국이나 중국에서는 6.1~6.3까지 나옴) 그것만으로도 폭탄은 50~70kt의 위력을 보인다고 한다. 북한은 이미 2006년부터 핵실험을 해 왔다. 그리고 지난 2009년과 2013년, 그리고 2016년에는 2차례, 그리고 이번에 제6차 핵실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진의 규모로 볼 때, 북한 핵의 강도는 날로 증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6년 처음 실험 때는 그 위력이 1kt 정도였으나, 이번 실험에서는 그 강도가 엄청나게 증가된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우리 기상청이 계측한 것보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발표한 지진 강도가 맞는다면, 이는 그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갖는다고 하니, 소름이 돋는다. 이는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핵폭탄보다, 몇 배 큰 것이며, 이런 폭탄 하나만 서울에 투하여도, 서울전역은 물론, 경기 일부 지역까지 초토화된다고 하니, 이는 가공(可恐)할 위력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9/9절을 전후하여, ICBM(장거리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비사일), EMP(전자기펄스) 등을 통하여 도발을 추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 제재방안을 발표하고, 실제적으로 제재 행동에 옮겼으나,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중국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결정적인 결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다 불필요하게 ‘사드배치’를 두고, 한국과 미국이 엇박자를 내는 모습은 국민들로 하여금, 불안케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소위 ‘햇볕정책’을 기조로 북한에 많은 물자를 지원했으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입장을 보여 왔다. 문제는, 북한 정권은 우리 정부가 ‘유화 정책’을 쓰던, ‘강경 정책’을 쓰던, 그들이 목표로 하는바,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조금도 늦추거나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정권을 도운 것이, 오히려 그들 정권 연장과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을 도운 것이 되어, 핵 위협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는 탄식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바뀐 정권의 태도이다. 문재인 정권은 수차례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오히려, 이를 비웃듯 하였고, 대화제의를 받고서는 거의 예외 없이 도발을 감행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의 의도와 생각은 이미 정확히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살인강도를 제압하는 것은 방법이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화와 설득도 시도해야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상대편을 제압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살인자를 방치하면,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당국은 교활하게도 미국을 겨냥하는 듯하다. 마치 자신들의 대결 상대가 한국이 아닌, 미국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얕보일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 피해를 볼 경우에는 북한을 힘으로 제압할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 정작 북한의 핵개발로 피해를 입을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북한은 앞으로 남북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면, 곧바로 한국에 압력을 가해 올 것이다. 가장 큰 고민은 우리를 ‘핵 인질’로 삼아, 온갖 것들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나 강구책은 있는가? ‘대화하자’느니 ‘실망스럽다’는 표현으로는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본다. 북한의 도발에 강한 응징 의지와 행동의 발로가 있어야 한다. 국가 안보와 국방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국민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우리의 안보와 국방이 튼튼하지 못한데,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은 보장되겠는가? 이 정권은 국민의 힘으로 탄생되었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이 정권이 잘하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잘못하거나 미온적인 것은 분명하고 따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도와주겠다는데, 어설프게 우리의 주권이나,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 국민은 지혜롭고, 국가의 어려움 앞에서는 일치된 단결의 모습을 보여 왔다. 지금은 대단히 큰 위기 가운데 있다. 따라서 북핵 문제에 대하여 정치권에만 맡겨, ‘잘 할 것이라’고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북한은 이미 레드라인(한계선)을 넘었다고 본다. 이 레드라인을 넘어 일어날 문제에 대하여, 국민의 결집으로 대처하고 막아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에 평화의 기회도 오고, 통일의 길도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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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9-08
  • 자주와 주체로 이룰 한반도 통일-홍 성 표 목사
    8.15 72주년과 분단을 지났다. 패권의 강국 미국과 그 패권을 동등하게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중국 간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개편과정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의 긴장 조성을 통한 혼란의 중심에 있다. 미국과의 수교는 1882년 처음 이루어졌다. 이후로 한미의 외교역사는 여러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그들 중 다시 새겨볼 1905년 7월 29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임시 외무대신 이었던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후에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 사이에 맺어진 비밀협약이 그것이다.러일전쟁(1905년 7월) 중 태프트는 필리핀 방문 도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1905년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기밀회의를 열고 동아시아의 주요 의제를 논의하며 7월 29일에는 둘 사이에 주요 내용에 대한 합의 각서를 작성하였다. 태프트는 이 합의서를 당시 국무장관 이었던 엘리후 루트에게 전달하였고, 시어도어 루수벨트 대통령은 7월 31일 승인하였다. 필리핀에 머문 태프트는 8월 7일 이 사실을 가쓰라 총리에게 알렸고 가쓰라는 외상인 고무라 주타로에게 알렸고 이로써 미일의 합의서는 완료되었다. 이 비밀 각서의 내용이 1924년 미국의 외교사가인 다일러 데닛이 발견 실체를 알렸다. 주요 사항은 첫째,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는다. 둘째,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하여 미국 영국 일본은 동맹관계를 확보해야한다. 셋째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 등이다. 그리고 이후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과 일본의 병합을 강제적 폭압으로 이루었다. 당시 2천만 조선은 일본의 강제늑약과 병합을 인정치 아니했으나 군사력을 통한 강제병합으로 한민족의 통곡하고 참담한 일제의 탐욕적 잔혹사는 거의 40여년을 삼천리강산을 짓밟고 또 짓밟았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강하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동양에서 태어난 예수가 유럽을 거쳐 조선 땅 한국에 상륙하였다. 미국은 소위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의 핍박받던 무리들이 평화의 땅 아메리카의 원주민 2억 이상을 멸절시키면서 총으로 만든 국가이다. 미국의 총은 지금은 세계의 패권국답게 핵무기와 무서운 살상무기를 만들어 제국을 유지하고 그 대량 전쟁의 살상무기를 수출하여 경제와 군사대국을 유지 시키고 있다. 가쓰라- 태프트의 밀약 합의로 한민족의 운명을 군국주의 일본에 넘겨 준 미국은 2차 대전 후의 대영제국의 후예로 세계제국이 되면서 한반도의 남쪽을 지금까지 점령, 주둔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조선의 광복이 왔다하는 순간 다시 미소에 의한 냉전의 벽이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이다. 진정한 통일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여운형과 조봉암 그리고 김구와 김규식 등을 암살하고 이승만과 미군정의 합작품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의 밀약처럼 승인해 주었다. 당시의 소위 사회주의 쪽의 독립 인사들을 좌익과 용공, 빨갱이로 몰아 싹쓸이 청산하며 민족의 원수인 일제 친일파들을 정권의 중심에 놓아 하수인으로 끌어들인 다음, 역사적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민족세계전쟁(소위 6.25)의 씻을 수 없는 비극적 상처를 남기고 분단의 영구화 고착화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비리, 불법의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무능한 평가를 받던 민주당 당시 정권을 무자비한 군부 쿠테타로 짓밟고 박정희의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박정희의 철권 독재는 결국 그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장군에 의해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다시 더 악한 전두환이 등장한다. 12.12 군부 쿠테타로 등장한 전두환은 80 년 5.18 광주민주민중들을 백두에 학살하는 살인극을 버린다. 필자가 강하게 질문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역사적 불의에 대하여 우리의 우방, 혹은 혈맹이라는 미국이 어떤 입장을 역사적으로 견지해 왔는가를 물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은 어떻게든 막을 것이고 한국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평화협정을 통한 평화체제를 견지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주와 주체적인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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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25
  • 동성애·동성혼을 위한 헌법 개정은 안된다-심 만 섭 목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정치권에서부터 구체화되고 있다. 30여 년 전의 헌법이기 때문에 이를 시대적 상황에 맞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민들도 상당히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헌법은 한 번 바꾸면, 국민투표를 통해야 할 정도로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개정의 논란 가운데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동성혼을 위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헌법개정안이다. 인권위는 현행 헌법 제32조 제1항의 ‘혼인과 가족생활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로 성립 유지되어야 한다’는 내용에서, ‘양성(兩性)’의 개념을 삭제하므로, 어떤 성적 결합에서도 결혼이 가능케 하는 결혼을 제안하고 있다. 즉, 동성애, 동성혼, 다자간 혼인 등에 문을 열어놓겠다는 심산이다. 그렇게 되면, 혼인이 남녀 간에 이뤄지고, 그 속에서 자녀를 낳고, 가족제도의 핵심적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 무너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국민의 행복과 건강성을 지켜 줄 헌법의 가치와 목적이 상당 부분 훼손되는, 심각한 도전이 된다. 결혼에 대하여,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서는 분명한 헌법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우리 헌법은 제정 당시부터 특별히 혼인의 남녀 동권을 헌법적 혼인 질서의 기초로 선언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래의 가부장적인 봉건적 혼인 질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결단을 표현하였으며, 현행 헌법에 이르러 양성 평등과 개인의 존엄은 혼인과 가족제도에 관한 최고의 가치 규범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하였다. 또 “혼인이 1남 1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일관되고 분명한 결정이다. 그러함에도 인권위가 이런 의견을 내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뒤집고, 동성애/동성혼을 위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권위가 동성애를 위한 활동을 한 것을 살펴보면, 2003년에는 동성애 표현물을 ‘청소년유해매체물’에서 삭제하도록 권고하였고, 2005년에는 동성애에 대한 인권보고서를 작성하였고, 2006년에는 동성애가 포함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를 하였으며, 2007년에는 어린이용, 동성애를 권고하는 에니메이션을 제작하여 전국의 초/중/고교에서 상영하도록 권고하였고, 2010년에는 군대 내 동성애를 금지하는 군형법 폐지를 지지하는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였고, 2011년에는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언론보도준칙’을 만들어 동성애와 에이즈의 관련된 내용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였으며, 2013년에는 마포구청에서, 동성애 지지자들이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10명 중 한 사람은 성소수자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게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게시해야 한다고 권고하였고, 2014년에는 초/중/고교, 공무원, 공공기관 등에서 동성애를 옹호하는 의무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을 제정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헌법을 바꿔, 그러한 모든 동성애, 동성혼을 가능케 하는 것을, 헌법적으로 뒷받침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하고도 끔찍한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동성애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양성화시키고, 동성애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법제화시키는 것은 별개이다. 더군다나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것은,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이미 동성애와 동성혼을 받아들인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1년 동성결혼을 허용한 네덜란드에서는 남성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 감염자가 늘어나고 있다. 또 필연적으로, 이성 혼을 신념으로 살아오는 대부분의 국민들에 대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하는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성 커플에 대한 역차별과 동성 커플이 자녀를 입양하게 될 때, 그 자녀들이 겪게 될 성 정체성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동성애/동성혼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 이에 대한 제재가 따르게 되는데, 그럼 헌법에 보장된 절대 다수의 국민들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 침해 등의 다양한 충격과 피해는 어떻게 감수 할 것인가? 따라서 앞으로 정치권과 정부를 중심으로 헌법 개정의 문제가 나올때, 우리는 동성애/동성혼을 염두에 둔 헌법 개정에 대하여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하며,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는 국민의 힘으로 강력하게 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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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28
  • 어둠에 묻혀선 안될 이들을 위해-임 영 천 목사
    여담으로부터 이야기 실마리를 풀어가야겠다. <부초>란 장편소설로 이름을 얻은 한수산 작가가 2003년 <까마귀>란 이름의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이를 다룬 언론매체에 그가 80년대 초에 모처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이 다루어져 있었다. 나는 한수산 작가를 그저 <부초>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고, 그 작품을 통해서 알고 있던 한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수난을 겪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었다. 그 서정적인 내용의 <부초>란 작품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아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그의 수난 사건이 “한수산 필화 사건” 또는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뒤에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욕망의 거리’란 말은 당시 그의 필화 사건을 일으켰던, 한 작가 자신의 모 신문 연재소설의 이름이었다. <욕망의 거리>는,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단순한 통속적 내용의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설의 지엽적인 구절들이 당시 정권 실세들의 비위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그 결과 그가 보안사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실화가 아닌가. 그와 비슷한 다른 이야기를 이번(7월 4일)에 한 방송매체를 통해 듣게 되었다. 손석희가 jtbc의 앵커브리핑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이다. 고(故) 이문구 작가가 <우리 동네>란 이름의 농촌 연작소설을 발표할 때 일어났던 일이다. 이(李) 작가가 언젠가 모 기관에 불리어 갔었는데, 기관원이 자신(작가)의 작품들 중 ‘박’이란 글자에 동그라미들이 쳐져 있는 것을 보여주며, “왜 박씨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느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냐?” 등 힐난을 해 왔었다고 한다. 다행히 거기서 풀려난 뒤 이(李) 작가는 “아예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들에 박씨 성만은 붙이지 않기로 작심했단다. 박씨 성을 지닌 인물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우리 동네> 연작소설들은 그렇게 해서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문구가 다른 어느 수필 작품 속에서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이문구의 소설 작품들은 더러 읽어본 편이지만, 그의 수필집까지 구해서 읽어보지는 못했던 나는 이렇게 타인의 독서 결과 얻어낸 지식을(아니 정보를) 이제야 알게 된 편이어서 다소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정보를(아니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라, 손 앵커가 이 사실을 근래의 블랙리스트 문제와 연관시켜 보여준 그 특이한 해석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블랙리스트 작성이나 지시의 책임자라고 할 자들에 대한 특검의 조사 또는 공판 중에 나온 말, 곧 피의자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으려 했다”는 특검 측의 발표에 대해 이는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을 모두 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면서, 이어 또 이렇게 연장 해석했던 것이다. “이문구 소설 속에 박씨가 등장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던 아버지 정부의 문화정책은 대를 이어서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었다.”고…. 즉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폐쇄적(위협적)인 문화정책이 그의 후대인 박근혜 직전 대통령의 어두운(암흑의) 문화정책으로 간단없이 이어졌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손 앵커는 이런 닫힌 문화정책의 입안자들을 겨냥하여 이렇게 부연해 평(評)하기도 했다. “예전 그 시대처럼 때리고, 잡아 가두고, 판매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더 교묘하고 음습한 방법으로 이름들을 지우려고 했던, 탄핵된 정부의 실세들”이라고…. 과거 블랙(암흑) 정치의 실세들이 이제도 그 맥을 이어서 교묘하고 집요하게 블랙(암흑) 문화의 시대를 또 열어가려 하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그러므로 이런 속에서 결국 블랙리스트의 등장은 그 자연스런 산물이라고 보겠다. 요즘 나는 독재자의 생리를 꼭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그 흥미로움 때문에 시간의 여백을 이용해 자크 들라류의 <독재자와 비밀경찰>이란 책을 느린 속도로 며칠째 읽어가고 있다. 절반 분량쯤 읽은 바에 의하면, 독일 사회에 혜성같이 등장한 히틀러가 1930년대 중반에 충복(忠僕)들인 괴링과 히믈러의 지원을 받아가며, 거추장스런 적수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단계적으로(교묘하고도 집요하게) 제거해 나가는가 하는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개하고 있음이 보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소위 ‘블랙리스트’ 작성이란 것이 권력을 강화하려는 독재자에게 얼마나 필요불가결한 작업인가 하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7-14
  • 6.25 전쟁과 한국교회-홍 성 표 목사
    2차대전 이후의 세계 지배와 권력지형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와 기획경제의 공산주의 진영의 소련중심이었다. 이러한 미소의 세계 강대국의 남북한의 군사점령은 신탁통치라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중심의 자기들의 국가 이익을 꾀하는 형식으로 분할 통치되었다. 북은 소련의 감시 하에 조선인민주의 공화국이 남은 해방 3년과 미군정통치의 간섭과 계획 하에 맥아더 사령부의 지지와 후원을 얻어 같은 해방운동과 광복을 지향하던 좌익은 철저히 탄압되고 소위 이승만의 독점을 통한 대한민국의 반쪽 국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김구를 필두로 한 김규식 등의 필사적인 통일국가는 끝내 무산되고 여운형을 남북, 좌우를 아우르는 남 중도 통일정부 지향의 세력들마저 좌익으로 철저하게 탄압되어 결국은 좌익세력들은 북으로 통합되거나 철저히 괴멸되어 갔다. 식민지의 결과는 다시금 민족분열이 되어 민족을 수천 수만 갈래로 찢어놓고 갈라놓았다. 통일된 조국을 그리워하며 만주로 중앙아시아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간 한 많은 기다림은 다시금 더 깊은 한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일제의 통치가 좌우 이념을 낳았고 결국은 분열의 깊은 고랑을 만들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실질적 참전 16개국, 후방지원 37개국, 합하여 53개국이 참전한 한국세계전쟁은 발발하고야 말았다. 전쟁의 시작 이유를 남침이다 북침이다, 혹은 미국 에치슨라인의 유도설이다. 혹은 국제적 요인이다. 남북한 내부 요인이다 등 수많은 가설들과 유추설이 있지만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분명한 것은 미소의 개입은 분명하고, 후반에 중국의 참전이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것은 확실하다. 광복 이후의 해방공간에서의 분열상과 지도력의 부재, 지도력의 파괴공작 등이 불행의 영구화를 만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일제치하에서의 개신교 교회세력들은 일제의 국가적, 공적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소위 순수복음과 개인구원의 성령운동에 치중했다. 물론 3.1운동처럼 교회가 중심이 되어 민족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역사에 길이 기억될 일이다. 그 외에도 북간도와 명동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항일독립운동세력의 활동들은 재조명 되어야할 일이다. 이 곳 명동촌은 지금의 한신과 기장의 뿌리가 싹 튼 곳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세계 전쟁의 와중에서 교회는 나누어지기도 하고( 1953년 기장과 예장의 분열) 성서의 해석과 이해보다는 무지와 교권의 싸움이 중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의 진면목을 주장하기 보다는 서로의 자리다툼과 이해관계가 그 중심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주의와 탐욕이 그 어디에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존재보다는 소유’에 기울어지기 십상이다. 동족끼리의 전쟁은 처참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전쟁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전쟁은 인간들의 탐욕과 욕망이 나은 최고의 악이다.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전쟁이 씨앗이다. 거기에 강대국들의 패권과 야욕이 전쟁을 부추기기도 하고 확대 심화시키기도 한다. 400만에 가까운 살육과 수백만의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 천만의 이산가족을 낳았을 뿐 아니라 가정의 해체와 기아, 굶주림,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 한스러운 이별과 마르지 않는 눈물과 그리움,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이 없는 기다림 등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참담함과 비통함, 비참이 지금도 역사와 민족을 휘감고 있다. 동족끼리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총을 쏘아대고 목숨을 앗아간다. 이념 등의 문제로 한 형제자매가 가족이 갈라서서 목숨을 빼앗아 간다. 이와중에서도 전쟁구호물자를 독점한 교회 세력들은 그 독점물들을 통하여 교세를 확장하는데 여념이 없고 5.16 이후에는 반공주의 중심세력의 종주가 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직도 자기 성장을 위한 세력 싸움의 수렁에서 진흙탕 싸움을 해야 하는가? 진정한 평화를 위한 실천적 기도를 해야 하는가? 문재인 정부의 한미정상회담은 자주적 통일외교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한 맘, 한 뜻으로 전심전력 기도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7-07
  • 부활 통일-홍 성 표 목사
    필자의 사무실에는 ‘부활 통일’이란 네 글자의 붓글씨가 있다. 내가 전도사 시절에 한글서예의 대가이신 강희남 목사님이 글을 써 주신다 하기에 ‘부활’과 ‘통일’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시라 하였다. 아마도 필자에게 강 목사님께서 다른 글을 선물해 주시려 하였는데 나는 이 네 글자를 써 달라고 주문했던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신학을 시작하면서 목회와 삶의 목표로 그러했던 것이다. 지금도 30여년이 훨씬 지나간 시간이지만 이 네 글자는 내 사무실 중앙에 걸려 있다. 필자가 잠시 미국장로교회 목회를 하는 동안에 이 글씨를 미국의 교회 사무실에도 걸어 놓았다가 귀국할 때 다시 가져 온 것이다.그 글씨의 내 속마음은 이것이다. 나는 죽음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병이 치유되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청년시절 열악한 산업현장에서 병들어 죽게 되었고 어느 집사님의 전도로 기도원에서 3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으며, 거기서 숱한 체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 하였고 질병도 치유되었고 절망스럽던 수많은 시간들을 이만큼 극복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인데 그것을 부활의 복음으로 정한 것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형에서 온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서 믿음이란 헛것이며 거짓말이다. 물론 부활이 어떤 부활인가의 문제는 우리에게 남는다. 온전히 죽고 온전히 변화된 신령한 몸, 소망의 부활이다. 그 소망의 부활만이 아니라, 개인만의 부활만이 아니라 창조주의 피조물 전체의 부활과 역사의 부조리한 모순들이 해결 되는 생명이 살아있는 부활, 사람만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가 공존해야 할 자연과 생태계 전체의 부활, 사람들의 탐욕으로 깨어진 나와 너의 관계의 부활 그래서 생명 세계의 온전한 부활이 있어야 한다. 부활은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절망을 극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 희망의 복음을 전하고 사는 것이 필자의 삶과 목회의 목표이며 목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왜? 통일인가? 그것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단의 벽을 헐고 진정한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한반도의 모든 분열과 씻기 어려운 상처는 분단에 귀속되어 있다. 남북의 체제 지도자들은 분단을 자신들의 정권연장과 유지 보존으로 악용한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등, 주변의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분단을 그들의 세계 패권세력의 기본 자료로 악용하고 있다. 한반도를 그들의 대리전쟁 터로 생각해 온다. 남북의 긴장을 조성하여 상상할 수 없는 살상무기들의 판매를 강요하고 국민들과 민중들을 불안에 떨게 하며 서로를 의심케 하고 이간질과 분열정책을 획책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교회들은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자주와 민주, 민족주체, 역사의 주체인 민중들을 통한 통일기도를 해야 한다. 민중은 역사와 사회적 가장 낮은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다. 역사를 떠받들고 사는 시대마다의 주체인 것이다. 목회의 기도 제목들은 많다, 개인의 영혼구원일 수도 있고 현실적 모순들을 극복하는 자기모순으로부터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기도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구원을 넘어서 사회적 구조악과 국가나 정권, 불의한 자본의 착취구조 적폐를 청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한반도에서의 목회의 궁극적 목적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함께 민족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의 평화통일을 반대하고 흡수통일을 운운하며 전쟁이라도 불사해야 하는 것처럼 역사의 무지에 빠져있는 교회와 목회의 설정은 그야말로 반성서적이고 반 역사, 반인간적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른 역사인식이 결여 되었다면 절대로 바른 목회를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무엇이 이단인가? 역사에 대한 무지가 이단이다. 개인의 아픔과 상처들의 치유 뿐 아니라 민족의 분단을 치유하는 목회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구원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적 폭력이나 구조악을 통해서, 민족의 분단구조를 통해서 신음하는 치유를 외면하는 것은 구원의 일부분을 터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학교에서나 교회 강단에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무용지물이다. 종교개혁을 외치면서 우리가 처한 분단의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역사와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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