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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말하고, 분노하자
-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에 항상 유념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또 다른 침묵을 익힌다는 말이 된다.그리고 좋은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 어이없는 불평과 비난을 쏟아내기 만하는 너무나 비열함을 고상하게 포장하면서 숭고한 언어로 덧칠하여 불편한 목소리를 발하는 것도 흔히들 볼 수 있는 일이다.그러나 우리사회에서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불편한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많다. 그것을 여론(輿論)이라고도 하고 민심(民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마이동풍(馬耳東風)식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특히 정치인은 남의 말에 귀 기우리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대통령과 정부는 여론과 민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고, 무리한 반발이나 분노를 사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말하고 외쳐댄다고 하여도 듣지 않고 외면하면서 신뢰와 공감이 전혀 없는 자기들의 주장만을 고집하며 밀고 나간다면 불행한 일이 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피타고라스는 “말은 정신의 호흡이다”라고 했지만, 한 마디의 말이야 말로 모든 행위의 그림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며, 이름이며, 사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마치 촉수 잃은 곤충처럼 정치와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문제에서 윤리와 원칙이 무너지고, 맘대로 고치고, 봐주면서 사법체계가 엉망이 되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시대를 역행하고 역사를 왜곡하면서도 평등, 공정, 정의를 앞세우며 고집하는 것은 그들만의 언어적 유희(遊戱)에 불과하다. 순수해야 하는 인간양심의 탑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는 침묵이 금(金)이고 은혜라는 비굴함을 보이는 자들이 허다하다.정권의 핵심부에 앉은 자들은 우리끼리는 잘못이 있고 부도덕할 지라도 한없이 관대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발상으로 집단 체면에 매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으로 일방적 독주를 하면서 국민적인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소위 철학적인 고민과 법적인 고민을 거듭한다 해도 공동체는 분열하고 있으며, 앞뒤가 꽉 막혀버린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권력 본색의 정치상황을 공정하고 품위 있고 관대함으로 풀어 나가는 지도력은 찾아볼 수 없다.정치인과 관료들은 깨끗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해야 하고,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 국민을 위한다는 이중 잣대로 신선한 마당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의혹과 모순으로 불합리를 안고 있는 이 국가적 난국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바로 진리와 정의를 위한 분노이다. 분노해야 할 때에 주저하고 단념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지켜 나가지 못하는 불의가 정당성을 위해 질주하고 있다면, 당연히 자신의 행복과 미래의 길을 열기 위해 분노해야 한다. 아무리 목 놓아 부르짖고 외쳐 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다면 정의와 도리(道理)가 살아나는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 분노는 새로운 미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변영로 시인의 시 ‘논개’에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는 구절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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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말하고, 분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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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진보·보수 한 자리에 모여라-강 춘 오 목사
- 최근 보수우파 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의 시국집회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사에 특이한 한 획을 긋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온 진보좌파 교회들은 오히려 현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듯한 입장에 서 있고, 그동안 일제의 신사참배와 북한의 공산정권에 대한 항거 이후, 한 번도 국가 권력을 비판해 본 일이 없는 보수우파 교회들이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문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도 일종의 진영논리에 빠져 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한국교회는 보수우파가 80%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우파가 현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문 정부가 한국교회 선교에 해악을 끼치는 좌파정책을 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 문제에 있어서 북에 대한 저자세로 국방 안보가 위협받고 있고, 경제 문제도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좌파 정부의 교육정책에도 심각한 불신을 보이고 있다.이는 진보좌파 교회들이 문 정부의 남북교류정책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달리, 보수우파 교회들은 문 정부가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 정책에 동조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국을 보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교회 간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보인다.어째서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가 현 시국을 보는 여론을 이토록 달리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갖는 개인적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어도, 교회 안에서의 신앙적 견해는 같아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이 훼손되면 교회는 또 다른 분열을 맛볼 수 있다. 불행한 일이다.사실 최근 전광훈 목사를 필두로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의 보수우파 집회는 성경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고 한 말씀 그대로이다. 즉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간다는 한국교회의 진보측 교회지도자들이 좌파정부와 코드를 맞추느라 '벙어리 개'처럼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동안, 보수우파 교회를 배경으로 나타난 전광훈 목사가 사람들을 충동하고 있는 것이다.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에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도 그들이 매번 전 목사의 한기총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현 시국을 보는 우리사회의 우파 국민들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에서 나오는 행동이라 생각된다. 국민들은 그만큼 국가장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한기총의 사정으로 볼 때, 전광훈 목사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전 목사는 광화문의 개인적 인기를 이용해 자신이 추구해온 ‘기독당’에 올인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기총 이름으로 253개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구와 일치하는 것이다. 자칫 보편적 한국교회를 정치도구화 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부정적 평가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나 그 사회의 가치관은 주류종교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가 우리사회가 현 정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임에는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고, 교회는 진보든, 보수든 ‘하나’라는 원리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마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로 갈라져 있는 현 상황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문 정부가 끝난 후에도 한국교회는 진보 보수 간에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분열을 맛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교계가 대정부, 대사회에 대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지금' 한 자리에 모여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국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니다. 따라서 진보든, 보수든 권력 눈치를 보면서 정부에 끌려다녀서도 안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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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진보·보수 한 자리에 모여라-강 춘 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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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백마 탄 자
- 북한 김정은이 16일 백두산에 백마를 타고 나타나 “미국을 위수로 하는 반공화국 적대세력들이 강요해온 고통은 이제 우리 인민의 분노로 변했다”고 주장하며 자력갱생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이 백마를 타고 항일 독립투쟁을 벌여왔다며 김일성을 우상화 한 것을 재현하려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것은 김정일도 똑같이 흉내냈다.김일성이 백마를 타고 항일 투쟁을 벌였다는 김일성 우상화는 성경 요한계시록 6장의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2절)고 한 구절을 그에게 맞춘 것이다. 이 백마는 계시록 19장 11절과 14절에도 나온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했다. 한국교회에는 1970년대 이를 흉내내며 자신이 이 계시록의 ‘백마 탄 자’라며 흰 말을 타고 나타난 ‘목사’가 있었다. 양도천이란 사람이다. 그는 흰 말을 타고 다니며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계룡산에 들어가 기독교 목사에서 신흥종교 교주가 되어 사라졌다. 그는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를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5, 16)는 말씀을 이룬다며, 그런 문구를 써붙이고 돌아 다니기도 했다. 또한 중세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도 계시록의 ‘백마 탄 자’를 흉내내며 전선을 누볐다.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것은 북한 인민들에게 미국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쇼다. 그러나 김정은의 심판주 흉내는 그리 성공할 것 같지 않다.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미북 핵협상이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출구전략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랐어도 아무도 그를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목사 양도천도, 황제 루이 14세도 그들의 죽음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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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백마 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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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서초동집회 '태극' 유감
- ‘조국’을 지키겠다며 검찰개혁을 부르짖은 서초동집회에는 ‘태극’과 ‘4괘’가 등장해 시민들을 의아하게 했다. 왜 그 시민집회에 태극과 4괘가 등장했을까. 그들이 모두 태극을 상징으로 쓰는 신흥종교의 신도들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들은 태극과 4괘를 들고 흔들어댔다. 이는 아마도 광화문의 태극기 부대와 차별화를 꾀하기 위한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태극과 4괘를 들고 흔든다고 해서 ‘태극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극과 괘는 중국의 ‘도교’(道敎)나 ‘무당’(巫堂)의 상징이기도 하다. 중국의 도교는 태극과 8괘를 상징으로 쓰고, 중국의 무당은 굿을 할 때 그 복장이 태극과 8괘를 그린 옷을 입는다.태극의 원리를 밝힌 유교 철학 ‘주역 계사’에 의하면 “태극(太極)으로부터 천지만물이 처음 났으니 태극이 음양(陰陽)을 낳고, 음양이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태극이 천지창조의 주역, 즉 창조주라는 뜻이다. 태극의 이같은 이론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태호복희(太昊伏羲)이다. 중국 사기에 의하면, 태호복희는 성(姓)은 바람이요, 머리(首)는 사람이며, 몸통은 뱀이요, 키는 36척이며, 해와 달과 같이 명철함으로 태호(太昊)라 하고, 천지의 처음 기운이 어미와 합하여 낳았다고 하여 복희(伏羲)라 한다 했다. 이것은 몸통은 뱀이고 머리는 사람인 사신인수(蛇身人首)이다. 이 사신인수가 만든 철학이 곧 태극음양사상의 원리이다. 또 주역 계사에 의하면, ‘태극은 도(道)요 음양도 일도(一道)’라 하였다. 즉 태극은 음양도(陰陽道)이다. 태극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상징이란 뜻이다. 우리사회는 태극의 음양사상을 받아들인 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미혹되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지금도 태극을 신(神)적 상징으로 섬기는 토착종교들이 여럿 있다. 심지어 ‘태극도’(太極道)라는 종단도 생겨났다. 또한 통일교의 원리강론은 철저히 이 음양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사주니, 관상이니 하는 것들도 이 태극음양 사상을 기반으로 풀이한다. 심오한 철학이 미신화된 것이다.중국의 창조신인 태극 원리가 무당이나 복술자들의 점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사회가 아직 그만큼 문명화 되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개혁을 요구하며 태극과 4괘를 흔드는 서초동집회를 보노라면 매우 어아한 점이 있다. 그들이 모두 태극도 신도가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들도 제대로 된 태극기를 들든지, 그것이 아니라면 아예 다른 깃발을 만들든지 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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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서초동집회 '태극'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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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주필 김형원 장로
- 우리에게 애국이란 무엇인가 애국이란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전적인 의미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과연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는 어떠한 애국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에게 애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면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펼쳐 본다.흔히들 애국심을 가진 사람은 ‘투사(鬪士)나 지사(志士)’가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는 대단한 인물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정의로운 일을 위해 거리로 나서서 시위를 하는 일도 있으며, 또는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서 호소하기도 하면서 국민적 희생정신으로 애국심을 보이기도 한다.우리는 지난날 3.1운동, 8.15 해방, 4.19, 5.16 등등 많은 국가적 격변기에 애국심을 발휘하여 온 국민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킨 저력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내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의 열정이었음은 틀림이 없으며,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은 정말 영웅적이고 위대한 일이다. 유관순은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슬픔이다”라고 했다.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근로의 의무를 다하며, 출산을 통해 국가 미래를 위한 바탕이 되는 것 등, 모두가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최근 우리사회는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욕구불만을 외치는 시위가 지겹게 계속되고 있다. 그들의 시위가 국가사회를 위한 정당한 시위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면에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식으로 나라가 망하든, 경제가 파탄나든, 회사가 문닫던, 그런 것은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 자신들의 목적달성만을 위해서 온갖 시위를 감행하고, 시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나아가서는 국가 기강을 흔들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애국심과 정의를 앞세운다.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내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고, 직장인은 맡은 일에 성실하게 임하면 자신을 위한 최선이고, 군인은 군생활의 임무에 충실하면 최고의 보람이 된다. 주부는 자녀를 잘 양육하면서 가정을 화평하고 아름답게 꾸려가는 노력이 가족을 위한 행복의 길이며, 농부는 농토를 잘 가꾸어 많은 소출을 올리고 소득을 얻는 것이 보람이다. 교육자는 제자들을 잘 가르쳐 그들의 성공을 바라보는 것이 기쁨이고, 기술자는 자신의 뛰어난 기술로서 열심히 일하여 좋은 결과로 회사를 발전시키는 일이 보람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로서, 지식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풍부한 식견을 제공함으로 보람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인가. 성경은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라는 교훈일 것이다.“삶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벤자민 플랭클린) 말처럼 배려하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질서를 지키고, 주어진 공동체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겠는가.정부 고관이나 지위가 높은 정치인과 재벌이라고 애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또한 국가사회에 유익을 위해서 온 몸을 바치는 희생과 헌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기업인 이종환 선생은 교육재단 설립을 위해 8000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해외 출장 시에는 이코노미석을 이용하고, 자장면을 즐겨먹으면서 “거친 세상에서 똥 돼지 같이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기업인의 애국심일 것이다.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사리사욕에 얽매여 부정부패에 연루된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다. 우리는 시민의식을 함양하여 평범한 일상에서나 또는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공중도덕을 잘 지켜 부적절한 행동으로 나라를 망신시키는 일이 없어야겠다.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하면서 순수하게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서 불만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 나의 하루를 성실하게 일하며 세끼 밥 잘 먹고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짜 애국일 것이다. 그러므로 허무맹랑한 명분을 앞세워 대단한 투쟁론이나 저급한 논리에 사로잡히지 말고, 실력양성이 진정한 애국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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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주필 김형원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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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기총과 변승우 목사
- “이런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단으로 살다 죽겠다” 지난 2016년 10월 한국교회의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예장통합의 사면 취소 사태에 변승우 목사(사랑하는교회)가 내뱉은 일갈이다. 당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총회장의 사면 선포를 가볍게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통합측의 경악스런 행태에 변승우 목사는 “무고한 형제의 피를 취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화합이라면, 그런 화합은 개나 줘버려라”고 맹비난 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현재 한기총은 변승우 목사에 대해 이단성을 검증하고, 변 목사와 그가 속한 부흥총회를 한기총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도 매끄럽지 못하다. 검증 과정에서 이대위원장을 비롯한 서기와 전문위원이 동시에 사퇴하고, 한국교회에 사과문까지 내는 등 심각한 논란을 야기했다. 아니 애초에 한기총에서 사이비로 규정한 인물을 다른 직책도 아닌 이대위의 전문위원으로 세운 것 자체가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는 검증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점이다. 한기총이 변 목사의 회원가입을 처음으로 결의한 것은 지난 3월 4일 임시임원회에서다. 그리고 이단이 아니라는 이대위의 검증 결과가 나온 것은 3월 6일, 단 이틀만이다. 하지만 번개불에 콩 볶아 먹는 이뤄진 이단 검증에 이대위원장 유동근 목사 이하 위원들이 동시에 사퇴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변 목사의 이단 검증, 하지만 이 역시도 또다시 급조한 이대위를 통해 이틀 만에 이단검증을 완료했다. 단 일주일도 안되는 기간에 무려 두 번에 걸친 이단검증을 한 셈이다. 물론 이대위가 이단검증을 처음부터 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10년 길자연 대표회장 시절의 연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찝찝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교계는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이 대표회장이 되면, 변 목사를 회원으로 가입시킬 것이라는 추측을 해왔다. 그리고 그 추측대로 전 목사는 당선 2개월 만에 변 목사를 한기총에 등장시켰다. 사실 이단검증이라는 과정도 생략하려는 듯 보였다. 위원회 설립과 위원장 임명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전 목사가 성령부흥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변 목사를 덜컥 위원장에 임명부터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외부부적인 논란을 의식한 듯 이를 보류하기는 했지만, 변승우 목사를 회복시키는 과정이 너무도 박자가 빠른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여기에 전 목사는 임시임원회에서 이대위에 변 목사에 대한 철저한 이단성 조사를 실시하라고 말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조사에서 발표까지 걸린 시간은 단 이틀 뿐이었다. 더구나 전 목사 스스로 이대위 회의에 개입해 “‘알미니안적 구원관’이 이단이냐 아니냐만 판단하면 된다”고 검증을 독촉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변승우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한국교회를 이끌 차세대 목회자로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일부 교단에서 가한 ‘이단 규정’으로 큰 어려움을 당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지난 2016년 9월 발생했던 예장통합측의 이단 사면 취소 사태는 가뜩이나 상처 가득한 변 목사에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남겼다. 당시 “이런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단으로 살다 죽겠다”는 변 목사의 일갈은 현 한국교회 이단 연구의 허구성과 문제점에 대한 피해자의 호소로,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정치와 이권, 권력와 이기주의가 결합한 한국교회 이단 연구의 실체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그런 변 목사가 지금 다시 교계의 가운데 섰다. 그렇다면 변 목사가 비판한 ‘이런 시대’는 과연 바뀐 것인가? 불의 앞에 차라리 이단으로 살다 죽겠다고 했던 변 목사에 새로운 도전을 준 것은 무엇이었던 것인가? 지금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은 변 목사가 비난한 한국교회 이단 연구의 그릇된 행태가 마치 한기총에서 재현된 듯 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런 식의 검증을 결코 한국교회가 인정할리 만무해 보인다. 결국 논란만 일으키고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이단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변 목사 답지 못하다. 변 목사는 누구보다 한국교회 이단 연구의 병폐를 비난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떠한 논란도 없도록 절차와 과정에 더욱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 누구도 시비 걸지 못할 온전하고 구체적인 과정을 거쳐 보란 듯이 한국교회 이단 연구가들 앞에 당당히 섰어야 했다. 그가 그토록 주장했던 이단 연구가들의 허구와 거짓은 바로 그 순간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말한 억울함을 완전히 증명코자 하기에, 단 이틀의 검증은 한국교회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변 목사에 묻고 싶다. 자신을 검증한 한기총 이대위의 신학적 역량과 그 과정을 신뢰할 수 있는지? 3년 전 내 뱉은 ‘이런 시대’가 지금 한기총의 모습과는 다른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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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기총과 변승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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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신 교단 ‘정상화’를 위한 당연한 전제
- 지난 2015년 9월 대신-백석 통합에 참여했던 구 대신측 목회자들이 대신의 정상화를 부르짖고 있다. 무효가 된 제50회 총회를 다시 개최해 대신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최근에는 ‘대신 교단 정상화를 위한 대신인 모임’을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교단을 정상화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정상’ 혹은 ‘정상화’라는 이들의 목표에 대해서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는 ‘정상’이라는 말 뒤에 가려졌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지금의 현실, 대신 분열 사태에서 의도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바로 ‘비정상’에 대한 문제다. 이날 모임의 목적은 명칭에 드러나 듯 어디까지나 ‘정상화’다. ‘정상’이 목표가 된다는 것은 반대로 현재의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비정상적인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이들이 내건 대안은 제50회 총회의 재개최다. 총회가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제49회기 당시로 돌아가 제50회 총회를 열고, 교단의 정상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논리를 면밀히 살펴보면, 정상인 제49회기와 비정상인 현재 사이에 단 하나의 사건이 존재한다. 바로 2015년 9월 제50회 총회다.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대신 교단이 제50회 총회를 기점으로 ‘비정상’이 됐다는 판단이다. 대신 세력이 하나로 있던 제49회기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정상화라는 이들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문제는 교단을 ‘비정상’으로 만든 것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책임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논리 속에 교단을 ‘비정상적’으로 전락시킨 사건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번 항소심 판결을 통해 증명된 제50회기의 불법 통합이다. 불법과 거짓말이 난무했던 당시의 일방적이고도 무리한 통합이 교단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지금에 와서 교단의 정상화를 외치고 있다. ‘비정상’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날 한 증경총회장은 “수호측과 함께 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대신의 복원이다. 대신을 복원해야 하는 것이 한국교회 앞의 사명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대신-백석 통합에 앞장섰던 인사가 대신(수호)측과의 통합을 대신교단의 복원이자 사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도 3년 전 교단이 분열됐던 바로 그 곳에서 말이다. 만약 2015년 9월 이전으로의 복원이 교단의 사명이라면, 그는 2015년 9월 교단 분열을 야기한 대신-백석 통합 사건에 대한 냉정한 반성을 먼저 했어야 했다. 과거 2000여 교회에 육박했던 대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 지금의 대신은 분명한 비정상이다. 과거를 기억하기에 정상화는 당연히 도모해야 하겠지만, ‘정상’을 깨뜨리고 ‘비정상’ 불러온 그때의 그 사건에 대한 반성과 책임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온전한 정상화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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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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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신 교단 ‘정상화’를 위한 당연한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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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주필 김형원 장로
- 차갑고 황량한 대지 위에 새싹들이 돋아나고 생명의 용솟음치는 소리가 들리는 부활의 계절이 왔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의 현실은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분쟁과 절제되지 못한 의식운동들이 국민을 불안하게 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나라의 미래는 희망보다 절망적인 좌절을 불러오고 있다. 그래도 교회만은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어 성도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야 하겠는데, 교회마저도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세속주의적 명예와 권위주의, 물량주의에 찌들어 가고 있다.지난날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과 가난 속에서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며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먼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부활절을 맞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국가적인, 사회적인, 교회적인 모든 문제들을 깨끗이 정리하시고 연약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안식을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영광의 소망이 아니겠는가?예수님은 역사세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서 고난당하시고 인류의 죄를 지고 죽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생애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강렬한 소망을 주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 삶의 굴레 속에서 명예와 욕심과 온갖 분쟁과 갈등으로 놀라운 부활신앙의 기적을 망각하고 살아온 불신앙이 너무 크다. 이는 부활신앙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우리의 확고한 부활신앙은 죽은 자가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이원론적 철학이나 끝없는 윤회로 환생한다는 불교나 힌두교의 그것과도 다르며, 철학자들의 불가지론이나 어떤 회의론도 아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여 살아 나셨다는 분명한 진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역사성과 중요성을 사도 바울은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실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삶이 아니라 새 생명의 삶이 되는 것이다. 부활이 진짜이고 확실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 그 모든 일체의 길에는 목적이 있고 소망이 있는 생활로 충만해야 한다.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의 생명을 살리시는 능력도 행하시기 때문에 그 부활의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처럼 죽으면 끝이 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달려갈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부활신앙은 인생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나라와 역사를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로놓인 문제들 앞에 괴로워하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국가사회, 교회와 개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지도 말고, 과감하고 힘 있게 뛰어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죽음을 정복한 부활신앙의 원동력으로 만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죽어야 산다.” “죽어도 산다.” 살든지 죽든지 부활의 소망을 믿고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감당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대자연의 섭리처럼 새 생명들이 약동하는 이 부활의 계절에 자신과 교회가 부활신앙의 원동력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 부활의 계절에 현실세계에 놓인 모든 문제들이 정화되고, 해결되고, 목적이 성취되는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부활신앙으로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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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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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주필 김형원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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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주필 김형원 장로
- 지난 달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통령을 비롯하여 장·차관 워크숍에서 평창올림픽 현안보고 및 토론회가 6시간동안 열렸다. 이날 열린 워크숍에서는 만찬으로 98,600원짜리 도시락을 유명호텔에서 주문하여 먹었다는 소식에 많은 국민들은 ‘황제도시락’이라고 놀라워하면서 “모범을 보여야 할 청와대가 이런 비싼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이에 청와대측에서는 “대통령이 먹는 음식은 품질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출장비가 포함 된 것”이라고 하면서 50~60% 할인을 받았다고 궁색한 해명을 했다. 그렇다면 소규모 업체의 도시락은 품질관리가 제대로 안된다는 뜻인가? 라는 이의도 제기되었다.소규모 업체들은 최근 정부가 시행한 최저임금 해소 정책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못 쓰고 속속 폐업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고위층은 이러한 업체의 고통은 외면하고 유명호텔의 ‘황제도시락’이라니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다.청와대 측에서는 50~60%를 할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건 공정거래법 위반이 아닌가? 라는 논란도 있으며, 10만원에 이르는 도시락이면 ‘김영란법’ 위반은 아닌지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정부 고위층이 외빈을 접대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만의 공식회의에서의 만찬인데 소위 ‘황제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는 것은 비난을 받을 만하다.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한 끼 식사와는 거리가 있고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네티즌들은 청와대 황제도시락과 평창올림픽 자원봉사자 도시락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리고 “시민들은 5천원짜리 도시락 먹는데 청와대의 호화만찬은 호텔 뷔페보다 비싸다”고도 했다. 또 그들은 푸대접 받고 있는 평창 자원봉사자들이 2천여 명이나 기권했다면서 평창올림픽 자원봉사자 도시락과 청와대 황제도시락과는 비교가 안 되며, 전혀 국민정서와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것도 평창올림픽을 위한 현안 보고와 토론회에서 이렇게 값비싼 도시락을 먹어야 했는지?일본은 ‘벤또’라고 불리는 도시락 문화가 많이 발달했다. 직장인들이 대부분 집에서 싸오거나 도시락 전문점, 편의점 등에서 구매한 도시락을 먹는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식당의 음식 값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도시락은 간편식으로 한 끼 먹을 수 있는 식사, 다시 말하면 ‘소박한 한 끼 식사’라는 이미지를 넘어 설 수 없다.그렇게 보면 회의나 행사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식사의 방편인데 굳이 정부 고위 인사들이 회의 중 호텔의 값 비싼 도시락을 주문해 먹어야 했는가.사무실 밖을 나서면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한 끼에 2~3만 원만 되어도 너무 큰 지출이지만, 그 정도면 매우 고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보다 더 친다고 해도 청와대가 먹은 도시락 값에 못 미치는 비용으로도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 또는 수많은 직장인들은 오늘도 1만 원 이하 몇 천원의 식사를 하면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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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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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주필 김형원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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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 동료의식
- 동료라고 함은 같은 직장이나 같은 부서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의식이라 함은 자신의 언동이나 상태를 분명히 깨닫는 일체의 작용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료 의식이라 함은 만나고 일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의식, 즉 같은 일을 도모하는 관계에서 협력하고 도와주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료의식을 바로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절친한 친구가 되어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 하다가도 의견충돌로 원수가 되어 돌아서고 때로는 법정에까지 가는 예가 허다하다. 성경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한 절실한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우리는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동료관계를 깨뜨리고 돌아서는 일을 접하게 된다. 동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인격모독적인 폭언을 하는 일도 있고, 동료를 향하여 냉소적인 비판을 일삼거나 질투와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멀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신자들 간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특별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과 은혜로 감싸는 깊은 관용과 포용이 필요하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갈등하면서 죽기살기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동료이며 친구인 관계를 부인할 수가 없다.교계연합모임에서도 함께 일하기로 하여 회원으로 받아주었으나 의견대립이나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아 배척하는 예도 허다하다. 이러한 싸움으로 인하여 법정에 고소고발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혀 동료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형제요 동료라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넓게 보면 이러한 동료의식은 사회폭력을 예방하고, 안정시키는데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동료의식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너와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서로가 공급해 줄 수 있다.어느 노회에서 중심이 되는 교회가 총회법과 노회 규칙을 따르지 않고 같은 노회원인 목사를 고소하고 독불장군식으로 총회가 규정한 일에 반기를 든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노회원이 교회 행정에 있어 원론적인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거슬리는 발언이라 해서 총회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이다. 교회규모가 좀 크다고 노회에서 영향력 행사를 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성스러운 공동체의 규범과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의식이다. 노회도 총회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이며 동료로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대인 관계에서도 교회 장로로 함께 일하면서 동료장로에게 인격모독적인 폭언을 하고 사사건건 비판을 하는 것은 그의 장로자질을 의심해야 한다. 교회 당회원들이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것은 동료로서의 범주를 벗어난 일탈이며 이해와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아무리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다고 하지만 함께 같은 길을 가고, 같은 뜻을 가지고 일하는 신앙으로 맺어진 영적관계라면 사랑과 은혜로 관용하면서 인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걸핏하면 고소하고 비판한다면 신앙공동체에서 가질 수 있는 동료의식은 실종되고 말 것이다.어느 목사님은 설교에서 “우리 교인들은 한번 싸우면 순교적인 각오로 싸운다”라고 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영원히 함께’ 라는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중심으로 맺어진 성도와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친교하는 아름다운 동료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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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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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 동료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