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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양심에 화인 맞은 한기총의 '꾼'들
-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한기총의 임시 체제가 오랜 기간 지속되며, 대표회장 선출을 위한 총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연합기관 통합 결의에 따른 임시총회의 조치로 쉽사리 새 총회를 열지 못하는 임원회의 속사정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2년 넘게 계속되어온 임시체제에 대한 불만 역시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 조만간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결단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다만 문제는 혼란 중에 본색을 드러낸 소위 '꾼'들의 난립이다. 겉으로는 한기총의 정상화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자신의 잇속을 먼저 탐내는 이들 '꾼'들이 오히려 한기총의 정상화를 가로 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 특히 현 임원진에 반발해 세워진 한 비상 조직은 그야말로 '꾼' 정치의 정점을 찍고 있다. 각각 나뉘어진 정치적 진영에 양다리, 세다리를 걸치며, 매일 자신의 살 곳을 옮겨 다니고 있는 이들이 이 조직에 모여 스스로를 한기총의 양심이라 자랑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인다. 어제 자신들이 속한 진영에서 함께 비난하고, 욕을 토해냈던 상대에게 오늘은 뒤로 몰래 손 내밀며 아부하는 모습은 자신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상황에 맞춰 배신 가능한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양심이 화인 맞아 불타 없어진 양, 스스로 행한 일조차 남의 탓으로만 몰아가는 후안무치적 행태는 왜 이들이 '꾼'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나타낸다. 최근 한기총의 가장 큰 이슈인 '경매 사태'를 비난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수가 임대료 체납이 시작됐던 당시부터 현재까지 주요 임원진으로서 한기총을 직접 운영해 온 당사자였다. 사무총장, 공동회장, 서기, 각 위원장까지 섭렵하며, 한기총의 주요 요직에 있는 동안 이들은 매월 쌓여가던 임대료 체납 문제를 모른 채 방치했었다. 한기총의 최고 조직인 임원진으로서 방치했었던 일들을 이제와 뒤늦게 몇몇에게만 책임을 몰아가는 것을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심지어 체납이 시작된 당시의 사무총장과 근 수 개월 전까지 임원을 맡았던 인물들이 이러한 비난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늘상 자신들이 한기총을 지키고, 수호했던 진정한 ‘주인’들이라 자처했던 이들이, 정작 한기총의 위기 앞에서는 남의 집 불타는 것 바라보며 그저 궁시렁대는 무지렁이 ‘객’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이들 중 그 누구도 이번 경매 위기에서 단돈 1만원도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기총이 처한 진짜 위기가 무엇인지를 반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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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양심에 화인 맞은 한기총의 '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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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건희 회장과 소강석 목사, 그들은 왜 변화를 말했나?
- "마누라 자식 빼곤 다 바꿔라" -고 이건희 회장- "변화해야 할 것에는 빨리 순응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소중하게 지켜라" -소강석 목사- 현대사회의 최대 재앙으로까지 꼽혔던 코로나 펜데믹이 지난 3년의 광포한 시간을 뒤로한 채 서서히 막을 내려 가고 있다. 서로의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가 점차 사라지고, 가다서다를 반복했던 학교와 직장의 일상은 이제 대부분 정상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혼란하기 그지없다. 마치 코로나의 후폭풍이 교회에만 매섭게 잔존하는 듯, 한국교회의 코로나는 여전히 'Ing'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교회 스스로를 향해 냉철한 비판을 요구하고 있다. 왜 한국교회의 코로나는 끝나지 않고 있는가? 무엇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나약하게 만든 것인가? 한국교회의 가장 큰 패착은 변화에 대한 실패다. 70~80년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겪은 한국교회는 그때의 감흥을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가장 부흥했던 그때의 모습을 교회의 모범으로 정형화 시킨 점이다. 한국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 밖에 없던 것은 '변화' 자체를 스스로 정한 '모범'에서 벗어난 반교회적 사고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결국 한국교회를 매우 약하게 만들었다. 자그마한 물결에도 흔들리는 조각배가 되어, 막막한 망망대해 위에서 불안한 항해를 계속해 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위기대응능력을 전혀 키우지 못한 한국교회에 있어 코로나 펜데믹이 집채만한 해일처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것이다. 1517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모습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변화해 왔다. 장로교회의 핵심인 개혁(Reformed)은 바로 온전한 변화에서 출발한다. 개혁을 거부하고 변화를 멈추는 교회는 결코 온전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새에덴교회의 모습은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코로나 초기 방역 대응부터 예배 대처, 지역사회와의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차별화된 선진성을 보여줬다. 여기에 최근에는 엔데믹 시대에 걸맞는 시스템, 엔데믹의 이후를 대비한 목회 전략 등을 선보이며,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고 있다. 새에덴교회의 돋보이는 위기대처 비결의 바탕에는 '변화'에 주저하지 않았던 개혁정신이 있었다. 끊임없이 갈고 닦은 변화를 통해 갖춘 '기본기'는 지난 3년 간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를 가능케 했고, 변화가 곧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고 이건희 회장과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 개혁에 대한 공통적 시각을 견지한다. 지킬 것은 철저히 지키되 바꿀 것은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적 비전이다. 이러한 그들의 추진력은 세계 최고의 기업 '삼성'을 만들었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된 '새에덴교회'를 있게 했다. 지난 코로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모범적 모습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당연한 정답들이 때로는 시대에 뒤처진 케케묵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 바로 그것이 변화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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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건희 회장과 소강석 목사, 그들은 왜 변화를 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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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그들은 왜 소강석 목사를 공격하는가?
-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자칭 기독교인들 "새에덴교회 소강석이가 목사들 집합하여 성경 세미나한다는 명목하에 목회자 천명 모여 1인당 100만원씩 나눠주는 댓가로 광화문 윤석열대통령퇴진 외치는 촛불집회 모이도록 하였다고 하니 큰일입니다" 새에덴교회를 향한 도를 넘는 악의적 비방이 최근 SNS를 통해 무분별하게 유포되며, 교계 전체를 경악케 하고 있다. 새에덴교회가 광화문 촛불집회의 배후에 있다는 뜬금없는 억측인데, 'X눈에는 X만 보인다더니···' 몰지각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저급한 정치질에 한국교회의 애먼 이미지만 또다시 추락하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지난 20일 미자립교회 목회자 1,200여명을 초청해 엔데믹 시대의 교회 회복 노하우를 공유하는 ‘2023 목회, Restart 컨퍼런스’를 개최한 바 있다. 특히 이 자리에서 미자립교회 500곳에 각 100만원의 회복 지원금이 전달됐는데, 일부 극성 정치 추종자들이 이를두고 허위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있다. 이날 행사의 주제는 '엔데믹 시대의 교회 회복',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는 이를 위한 철저한 섬김의 역할일 뿐, 그 이상의 어떠한 목적도 이유도 없었다. 당연히 정치적 의도나 그 이상의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이날 행사를 온종일 직접 취재하며 목도한 증인으로서, 결백(?)을 굳이 증언치 않는 것은 의도된 거짓에 해명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루머', 사실상 범죄에 가까운 ‘허위사실 유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코로나로 피해입은 미자립교회를 돕고자하는 순수한 섬김까지도 왜곡해 이들이 얻고자 하는 노림수는 무엇인가? 사실 새에덴교회의 미자립교회 지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새에덴교회는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회복을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번 세미나는 미자립교회를 상대로 한 세번째 섬김 시간이었다. 지난해 11월에는 100만원씩 600곳을 지원키도 했었다. 소강석 목사는 예장합동측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을 거쳐, 한국교회의 대표 지도자로 올라선 뒤, 줄곧 극단적 정치권의 타겟이 되어왔다. 온갖 추문과 허위사실, 왜곡과 편집은 이름만 같은 그들만의 ‘소강석’을 만들어냈다. 현장예배 수호와 포괄적차별금지법 저지를 위해 한국교회 최일선에서 정부와 진보 정치권의 횡포를 모두 막아낸 그를 ‘좌파’로 못박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설명 못할 아이러니일 것이다. 결국 극단적인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이란 이름의 유명세였던 듯 보인다. 자타공인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소강석’이란 이름을 언급함으로서 받게 되는 관심과 신뢰는 그들 스스로는 결코 얻지 못할 결과물이며, 소 목사에 맞서는 듯한 그들만의 퍼포먼스는 자신들 역시 그와 동급의 인물로 인식케 하는 효과가 있다. ‘관종’(관심종자)이 판치는 정치에 더 이상 계파간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구나 그러한 저급한 정치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관종’보다도 못한 비열함을 전제한다. 지난 3월 대선 이후,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정치판은 더욱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굳이 논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의 정치적 성향을 딱히 규정짓지 않아도, 최소한 교회가 이 더러운 정치판의 하수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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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그들은 왜 소강석 목사를 공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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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교계 대통합 꿈 “아직 끝나지 않았다”
- 2년 전 소강석 목사의 외침에 모두 아니라 했지만··· 9부능선 넘어 각 단체 자존심 내려놓고, 오직 ‘한국교회’에 집중해야 주변의 많은 관심과 기대가 집중됐던 각 교단 9월 총회가 지나고, 이제 다시 교계의 시선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향하고 있다. 연합기관 대통합이라는 한국교회의 크나큰 숙원이 올해 안에 반드시 이뤄지길 바라는 기대가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인데, 9부 능선 언저리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모습이 다소 답답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 자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2년 전 소강석 목사가 연합기관 대통합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교계의 시선은 대부분 회의적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보수 연합운동이 분열한 지난 십수년 동안 일일이 세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통합 시도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순간 ‘통합’이라는 주제를 자기 단체의 존립 정당성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며, ‘통합’이란 단어의 신뢰는 추락했고, 그 무게는 심히 가벼워지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 등장한 소강석 목사의 대통합 프로젝트가 그리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대부분 그럴듯한 구호만 외치다, 몇 개월 내 사그러들 것이라며, 그저 스쳐가는 바람인양 이를 지켜봤던게 사실이다. 통합의 당사자 및 지도자들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매 한가지다. 어차피 되지 않은 ‘통합’, 굳이 에너지를 낭비해 가며,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해(害)통합’의 화살만 피하겠다는 구색맞추기에 열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대통합 프로젝트는 엄청난 진전을 이뤘다. 한교총은 소 목사가 대표회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통합추진위원회를 발족해 ‘기본합의 –> 상세합의-> 임시총회 –> 통합총회 –> 정기총회’로 이어지는 통합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했고, 실제 한기총과 기본합의에 이어 상세합의까지 이뤄냈다. 결정적으로 한기총이 지난 6월 임시총회를 통해 ‘상세합의서’를 최종 추인한 것은 연합기관 관계자들조차 놀란 결과였다. 이제 한교총의 ‘임시총회’만 거친다면, 말 그대로 통합총회를 목전에 둔 상황,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 답보상태처럼 보이는 연합기관의 통합 논의를 보면서, 일부 교계는 다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오히려 ‘통합’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며 발생하는 단체 내부의 혼란을 마치 통합의 부작용인 듯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냉정히 볼 때, 지금 교계 연합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뜨거운 순간이다.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여전히 살아있고, 실제 그에 부합할 결과가 우리 눈 앞에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실망하거나 비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애초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통합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대부분이 외면했고, 방해키도 했다. 오히려 그 모두를 이겨내고 이룬 이만큼의 성과는 차라리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는 편이 옳을 지경이다. 허나 그렇기에 아직 넘지 못한 마지막 능선이 너무도 간절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밟고 있는 9부능선의 고지조차 단 한 번도 경험치 못한 곳, 어쩌면 이대로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분명한 확신을 주고 있다. 연합기관 내부의 혼란에 굳이 심각해질 필요도 없다. 분열 이후 연합기관들이 달리 평온한 적도 없었지만, ‘통합’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겪는 시련이라면 그 가치는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 번데기의 모습이 아무리 흉하다 하여도 이를 거치지 않고 하늘로 날 수 있는 나비는 없기 때문이다. 가수 고 신해철 씨의 ‘민물장어의 꿈’이란 곡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지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대통합’이라는 문은 각각 덩치만 커진 연합기관들이 한 번에 통과하기에 결코 크지 않다. 각자가 스스로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질 때, 함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고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확실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된 한국교회에 갖고 들어갈 자존심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를 버리고, 스스로를 내려 놓을 때, 한국교회는 산다. 그것이 이번 연합기관 대통합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한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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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교계 대통합 꿈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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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합동측 부총회장 선거 유감··· 그렇게 이기고 싶은가?
- 모 후보의 선거법 위반 논란으로 한동안 들끓었던 예장합동측 부총회장 선거판이 결전을 코앞에 두고 점차 막장으로 치닫으며, 교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치열하다 못해 이제는 치졸해진 모습인데, 한국교회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합동측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회의가 일 정도다. 최근 합동측은 부총회장 선거와 관련해 선거법 위반 논란 외에도, 합동측 내 언론들 간의 접전도 나름의 관심을 모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선거판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비평을 통해 총대들의 관심을 모은 것인데, 어느순간 그 도를 심각히 넘어서며, 교단 내부의 커다란 반발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논란의 시작은 특정후보를 겨냥한 몇몇 언론들의 '묻지마식 비난'에서 출발한다. 그저 비판을 넘어선 비난, 그저 비난 자체가 목적인 비난을 가하는 것인데, 애초 언론의 '중립'까지는 기대치 않더라도, 이를 흉내조차 내지않으려는 이들의 태도는 심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대부분의 기사가 글쓴이 개인의 감정과 해석에 완전히 편중되어, 기사 자체의 요건은 내다 버린지 오래다. 마치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심각히 난무했던 무분별한 SNS 비방이 언론의 이름으로 포장된 듯한 모양새다. 여기에 이제는 하다하다 못해 특정 후보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과거 논란까지 억지로 끄집어 내어 비난하는 모습은 교회의 지도자를 뽑겠다는 선거 본연의 목적을 무색케 하고 있다. 마치 장관 후보자를 대상으로 한 국회 청문회처럼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싹 다 훑어 단 하나의 티끌이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물어뜯겠다는 태도인데, 과연 이 치욕스런 이전투구에서 얻게되는 승리는 누구를 위한 영광이 될지 심히 궁금해지기 까지 한다. 물론 언론의 비판 기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론의 비판 기능이 더욱 존중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존중은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때에 가능한 얘기다. 적어도 선거판에서는 선거만을 해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결코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때부터는 비판이 아닌 비난이 되기 때문이다. 합동측은 최근 몇년 간 지도자들의 분발로, 한국교회의 자타공인 장자교단의 위치에 올랐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을 이끌며, 정부와 국민들을 상대로 교회를 대변할 위치에 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부총회장 선거판은 이러한 금자탑을 허물다 못해, 밟아 짓이기고 있다. 진정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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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합동측 부총회장 선거 유감··· 그렇게 이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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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오정호 목사의 '사과문' 유감
- 진정성 없는 의도적 역홍보 의심 그가 밝힌 사과 이유 ‘선거 일정에 차질을 빚게 해서···’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났다. 지난 9월 6일 예장합동측 교단지(기독신문)에 게재된 오정호 목사의 '사과문'은 결코 '사과'가 아니었다. 짧디 짧은 글 속에는 어떠한 진정성도 담기지 않았고, 무엇을 사과하는지에 내용도 명확치 않았다. 단 다섯 문장, 합동측 선거판이 뒤집힐 만큼 큰 논란을 일으킨 수많은 위법혐의에 대한 오 목사의 대답은 단 다섯 문장 뿐이었다. 먼저 오정호 목사의 사과문 전문을 살펴보자. 성삼위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금번 제107회 총회 부총회장 직에 입후보하여 더 나은 총회를 꿈꾸며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늘 해오던 대로 총신을 돕는 일환으로 도너월 제막식에 참여하는 등 본의 아니게 미흡한 점이 있어 선거관리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지도에 깊이 감사드리며, 이로인해 선거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된 점을 선거관리위원장님과 위원님들, 그리고 총대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남은 선거기간 동안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오정호 목사의 금번 논란의 핵심은 위법이다. 허나 정작 이 사과문 속에 자신의 위법혐의에 대한 언급은 거의없다. 그가 유일하게 언급한 것은 '도너월 제막식', 사전선거운동을 방지키 위해 선거법에서 금지한 행사에 참석해, 기부 사진까지 찍은 행위다. 하지만 이에 대해 "늘 해오던 대로 총신을 돕는 일환으로 도너월 제막식에 참여하는 등 본의 아니게 미흡한 점이 있어 선거관리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과연 선거법 위법이 '미흡'이란 단어로 무마될 일인가? 달리 말하면 자신이 사과문을 쓰는 이유가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이 와중에 사전홍보물 배포, 언론 기고 등 또다른 위법 혐의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포장과 변명이 불가능한 사안은 아예 언급치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반면 '도너월 제막식'에 대한 위법행위는 오히려 역홍보가 가능한 주제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총회의 정체성과도 같은 '총신'을 도우려다 당한 고난이라는 스토리 창출을 가능케 하기에, 반전의 충분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여기에 그가 사과란 단어를 유일하게 언급한 세번째 단락은 이 사과문이 '떠밀리기식'이라는 것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선거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된 점을 선거관리위원장님과 위원님들, 그리고 총대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이 사과문이 결코 '사과'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과의 이유와 그 상대가 완전히 잘못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과 이유에 대해 "선거 일정에 차질을 빚게 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할 뿐, 정작 선거 일정에 차질을 빚게 한 자신의 위법 논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치 않았다. 이 사과문에 진정성을 담고자 했다면 적어도 "의도치 않게 위법 논란을 일으킨 점을 사과 드립니다" 정도의 문장은 나왔어야 했다. 사과의 대상에 상대후보인 한기승 목사를 전혀 언급치 않은 것도 매우 불편한 부분이다. 한 목사는 누가 뭐래도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선관위가 낸 '한기승 목사에 대한 감사의 글'이 사과문에 훨씬 가까워 보일 정도다. 마지막으로 "남은 선거기간동안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앞장서겠다"는 다짐은 적어도 위법 혐의를 받았던 자의 입장에서 낼 메시지가 아니다. 현 상황에서 오 목사는 선거문화 개선을 위해 앞장설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선거법을 철저히 지켜야 할 사람이다. 그렇기에 "남은 선거기간동안 선거법을 철저히 지키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이 사과문의 취지에 훨씬 더 부합할 것이다. 사실 이같은 사태가 예측이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애초에 선관위가 글의 수위를 전혀 공개치 않았고, 사과문 작성을 오 목사에 모두 일임했을 때, 당연히 제기된 우려였다. 결국 오 목사의 인격과 의식을 믿었을 선관위만 매우 곤란케 됐다.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이 집중된 초미의 사건을 선관위 스스로 비난을 감수하며, 나름의 묘수를 낸 결정이었음에도, 오 목사의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문이 모두의 노력과 희생을 헛되게 하고 있다. 오 목사는 차라리 후보가 확정된 상황에 꼼수 가득한 이런 떠밀리기식 사과가 아닌 이번 사태에 대한 철저한 인정과 진정성이 가득 담긴 사과문을 발표했어야 했다. 그것이 결국은 총회를 지키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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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오정호 목사의 '사과문'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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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찬수 목사는 ‘동행’이 아닌 ‘독주’를 바랬나?
- 설교 내내 이어진 비판과 지적에 불편함 가중 새에덴교회 향한 도를 넘는 우려에 성도들 경악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10일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에서 한 설교를 두고 교계의 논란이 뜨겁다. 시종일관 이어진 기도회와 목회자에 질타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도회가 열린 새에덴교회를 빗댄 극단적 비유에 일각에서는 이를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이라 비판하고 있다.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은 일개 교단의 프로젝트를 넘어 지난 6개월 간, 총 14개 지역, 163개 노회를 돌며, 그야말로 전국교회를 눈물과 회개의 장으로 이끌었던 만큼, 당연히 이날 새에덴교회에는 교계와 언론의 관심은 집중됐다. 문제는 2부 말씀을 전한 이찬수 목사의 설교자로서의 ‘시선’이었다. 앞서 1부 설교를 맡은 소강석 목사나 3부 오정현 목사는 ‘동행’이라는 취지에 맞게 자신의 스탠스를 참석한 모든 목회자와 동일한 위치에 고정했다. 하지만 이 목사의 시선은 묘하게 청중과 자신을 분리했다. ‘비판’과 ‘회개’, ‘각성’의 대상에 자신은 없었다. 그 예로 “기도회가 너무 화려하다” “진짜 이렇게 목회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 등 설교 곳곳에서 등장한 비판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목회자들의 무지에 대한 지적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이 이찬수 목사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갈수록 더해가는 한국교회의 위기 속에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겹쳐 나온 한탄인 듯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를 듣는 목회자들의 불편함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정적으로 과연 그것들이 그렇게 불편하고, 비판할 일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이 목사는 기도회의 규모와 순서, 찬양의 웅장함을 오직 화려함으로 해석하며 이를 비판의 대상으로 봤지만, 흔한 일반적 시선에서는 그저 최고의 예배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 가장 최고의 것을 드리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지극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과시욕’으로 치부하는 것은, 몇날며칠을 기도하며 준비한 이들의 노력에 대한 폄훼일 뿐이다. 여기에 새에덴교회의 예배당이 50년 후에 텅텅 비어, 술집으로 쓰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우려를 내놓으며 정점을 찍었다. 당시 예배당 안에는 다수의 새에덴교회 성도가 함께 했던 상황, 아무리 그 의도가 좋다 하여도 상황과 자리에 맞지 않는 도를 넘는 발언은 결코 존중받을 수 없는 법. 이를 두고 한 언론은 참석했던 목회자의 말을 빌려 “새에덴교회에 대한 모욕이자,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키도 했다. 한 사람의 설교에 눈물과 무릎으로 함께 달려 온 지난 6개월의 대장정이 한순간에 그 빛을 잃었다. 스스로 깨어있음을 증명하고자 남을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건만, ‘동행’이 아닌 ‘독주’를 택한 듯 보인 그의 설교에 어떠한 배려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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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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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찬수 목사는 ‘동행’이 아닌 ‘독주’를 바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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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연합’에 목숨걸던 한기총 어디갔나?
- 임원회 ‘절차상 하자’로 재개최 불가피 WCC 소속 교단 이유로 통합 거부하는 것은 ‘억지’ 한기총 설립 예장통합측 한경직 목사 주도 한기총 설립 정체성은 오직 연합, WCC 논쟁 없었다 한기총-한교총 간 ‘통합 기본 합의서’를 부결시킨 한기총 임원회에 제기된 ‘절차상 하자’ 이의가 사실로 확인되며, 임원회 재개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회의에 보고되지 않은 인원들이 대거 의결에 참여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만큼, 더 큰 혼란과 법적 다툼을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 임원회를 재개최하는 것만이 유일한 최선이다. 그런 상황에 다시금 관심을 모으는 것은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다. 앞선 임원회에서 한기총-한교총 간 ‘통합 기본 합의서’가 부결되며, 사실상 ‘통합 무산’이라는 씁쓸한 결말을 맺는 듯 했으나, 해당 임원회의 명백한 하자가 드러나며,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는 극적인 부활을 이뤘다. 관건은 ‘WCC’다. 한기총 내 일부 회원들은 한교총 회원 중 WCC에 소속한 교단이 있다며, 한교총과의 통합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WCC는 한국교회 분열의 시작이자, 보수-진보 대립의 상징과도 같은 주제, 그런 만큼 이번 통합 프로젝트의 논란이 될 것을 예측 못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마냥 받아들이기에는 눈에 보이는 의도 가득한 억지가 이를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다. 물론 WCC는 보수교회에서 있어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영역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WCC로 인해 합동-통합(장로교), 예감-기감(감리교)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고, 기성-예성(성결교)은 WCC와 신앙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NCCK 가입을 놓고, 분열하고 말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WCC가 몰고 온 한국교회의 상처이자, 불행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상처와 불행을 치유코자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NCCK가 있긴 했지만, 너무도 진보 일색인 탓에 한국교회 전체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이에 교계 주요 지도자들이 정치와 이념을 초월한 연합기관 설립에 손을 모았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즉 한기총이었다. 한기총이 보수색채를 띄기는 했지만, 그것은 NCCK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유독 부각된 것이었고, 실제는 매우 중립적이었고 이성적이었다. 애초에 보수교회를 대변한다는 것보다는 한국교회를 대변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기에 결코 어느 한쪽에 일부러 치우쳐질 필요도 없었고, 특정 세력 혹은 교단을 배제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 한기총의 일부 임원들이 예장통합측과 함께 할 수 없다며, 한교총을 거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기총을 설립한 이는 다름 아닌 예장통합측의 한경직 목사였다. 그 이후로도, 김기수 목사, 박종순 목사, 이광선 목사 등 통합측의 지도자들 다수가 한기총의 대표회장을 맡아 한국교회를 이끌었었다. WCC로 인한 한국교회 분열의 상처를 치유코자 만든 한기총에서 당연히 WCC는 논란의 이유도, 주제로 거론될 필요도 없었다. 한기총이 ‘반WCC’ 기조를 갖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한기총-한교연의 분열과 그 즈음 대표회장에 오른 홍재철 목사의 탓이 크다. 홍재철 목사는 예장통합, 기성, 백석 등이 한교연으로 빠져 나간 한기총을 자기 신앙적 정체성에 맞춰 완전한 보수단체로 새로이 구축했다. 여기에 당시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2013 WCC 부산총회’에 맞춰 한기총을 ‘반WCC’의 대표 단체로 만들었다. 중대형교단이 대거 빠져나가며, 대표성을 잃은 한기총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며,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홍재철 목사는 반WCC에 대한 부분을 한기총 정관에까지 삽입한다. 설립 당시의 한기총 정관과 완전히 달라진 당시의 정관을 일부 관계자들이 ‘홍재철 정관’, 혹은 ‘홍정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임원회에서 홍재철 목사는 자신이 만든 ‘홍정관’을 앞세워, WCC 회원교단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통합 거부 여론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 여론에 경도된 상당수 임원들이 ‘반대’에 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런 선택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 엄밀히 이들은 WCC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WCC에 속한 회원교단이 가입되어 있는 한교총을 거부했다. 이를 WCC 거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억지스럽다는 것은, 사실상 한국교회에서 WCC에 속한 예장통합, 기감 등과 섞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이를 어느 곳에서도 문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단체, 지역연합회, 복지, 교육 등 한국교회 어느 단체를 가든 통합, 기감의 교회는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당연히 한기총의 임원들 역시 또 다른 단체와 영역에서 통합, 기감과 함께하고 있고, 이에 대해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있다. 유독 한기총에서만 통합과 기감 자체를 이단시 하며,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집단인 듯 말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과 함께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절대 이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억지를 범하는 것이다. “한기총은 다르다” “한기총만은 반WCC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가? 헌데 위에서 말했듯 한기총의 본래 정체성에 ‘반WCC’는 없다. 한기총은 WCC를 포함한 각종 분열로 상처입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엮기 위해 나온 연합단체다. 그리고 지금 본래의 취지를 잃고 다시 분열된 연합단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기총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은 분열의 지속인가? 아니면 연합의 회복인가? 한국교회 대통합이라는 역사적 사명 앞에 한기총 임원회의 전향적 고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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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연합’에 목숨걸던 한기총 어디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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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선 #한국교회 #대통합, 그리고 ‘푸른 우물’
-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치열한 대선이다.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무한의 위기가 반복되는 상황은 국민들에 있어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최고조에 끌어 올렸다. 대선은 국민들에 있어 어떠한 선택을 하던 결국 실패로 귀결되는 예정된 결말이지만, 이를 알면서도 매주 사게 되는 복권처럼 혹시나 하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도 사전 투표율이 역대 최고치인 35%에 육박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그토록 배신만 당해왔던 선거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고 있다는 씁쓸한 반증일 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 아무도 희망을 책임지지 않은 시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통령 선거조차 한 판의 도박처럼 모험을 걸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은 교회의 존재 가치에 대한 본질적 회고를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 하나님 품에 안긴 시대의 지성 고 이어령 교수는 소강석 목사의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의 발문에서 교회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의 위기는 시대의 위기요. 역사의 위기로 종결된 경우가 많다. 시대와 역사를 위해서라도 교회는 끊임없이 정화되고 정신적, 사상적 샘물을 흐르게 하는 깊고 푸른 우물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언제나 시대의 최후의 양심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본질적으로 부여한 사명이자 역할이었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가 온전한 적이 없었고, 반대로 교회의 부흥은 곧 그 사회와 국가의 번성으로 이어졌다. 한국교회가 70~80년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이룰 때, 국민들은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했다. 반복된 전쟁이 가져온 배고픔과 가난, 성숙치 못한 민주주의에 따른 시대의 혼란과 억압 속에 갈 길을 잃은 국민들은 교회의 십자가를 보며, 앞으로 전진했고, 미래를 일궈냈다. 교회 자체가 복음이었고,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희망이었다. 대선 정국이 뜨거워지며, 한국교회 역시 줄 서기에 한창이다. 1번과 2번이란 별반 다를 바 없는 숫자를 오가며, 치열한 눈치전을 반복하고 있다. 서로의 선택을 두고 정치권의 당사자들 못지않은 이전투구를 펼치며, 스스로 이번 대선의 최고 수훈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사이 고 이어령 교수가 말했던 ‘푸른 우물’은 점점 오염되어 버렸다. 바닥 끝까지 보일 듯 투명했던 푸르름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탁수(濁水)가 되어 그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교회의 위기를 시대의 위기라고 했던가? 스스로의 과오로 시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교회가 이제는 더 큰 욕심으로 마지막 양심마저 저 버리려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아무도 교회를 보며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요 근래 “한국교회는 누구를 택해야 하나?” 란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누구를 택할 때 한국교회에 좀 더 유리하며, 한국교회에 혜택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득한 물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며, 이 질문의 본질적 오류를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를 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누가 되든 상관없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을 먼저해야 한다. 어떠한 공격도 견뎌낼 굳건한 교회,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불의한 탄압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정의로운 교회, 스스로 예배를 지키며 성도들을 보호하며 국민들에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는 희망의 교회를 구축할 수 있다면, 굳이 이번 대선에 교회 스스로의 운명을 내던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물음의 해답은 결국 ‘한국교회 대통합’이란 주제로 귀결된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진정한 ‘원 리더십’으로 시대를 이끌 수 있다면, 그 어떤 불의한 상황이 닥쳐도 국민들을 보호하며, 시대에 여전히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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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선 #한국교회 #대통합, 그리고 ‘푸른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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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NCCK의 ‘무속’ 비판이 씁쓸한 이유
- 전 세계 기독교 경악한 ‘초혼제’ 잊었나? “특정후보 간접적 지지 아니다" 제 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 코 앞으로 다가온 대선 정국에 기독교 역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 정권 들어서 총체적 위기를 보이는 국가적 혼란 앞에 이번 대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선택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중요 시국속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 한국교회다. 대선이 한달 밖에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의 내부는 정치적 계파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특정 후보를 겨냥해 ‘무속 비선 정치’ 시비를 걸고 있는 진보계의 행태는 이미 도를 심히 넘어선 모습이다. 근래 한 공중파에서 특정 후보 부인의 녹취록을 공개한 이후, 기독교 진보계는 일제히 비난성명을 발표하고 ‘무속 정치’ 타파를 외치고 있다. 지난 달 말 ‘비선정치·무속정치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 선언’을 시작으로, 교계 진보 신학자 28인이 ‘사이비 주술 정치 노름에 나라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냈고, 2월 3일에는 NCCK와 YMCA가 ‘무속 비선 정치가 주권재민의 공론장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주술에 국민과 국가의 내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는 제목의 기독교대한감리회 목회자 486인 선언이 발표됐다. 특히 한국교회 대표 연합기관을 자처하는 NCCK가 이러한 입장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단순한 종교적 비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노골적이고, 정치적이며, 충분히 의도적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판과 의심의 바탕에는 교계 진보계가 그동안 ‘무속’에 대해 어떠한 거부감도 드러낸 적도 없으며, 오히려 매우 친밀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WCC의 ‘초혼제’다. 정현경 교수는 지난 1991년 호주 캔버라 제7회 WCC 총회에서 ‘초혼 의식’을 거행하며, 전 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WCC는 국내에서 예장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 이들 교단은 동시에 NCCK에서도 함께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WCC와 NCCK는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다. 무속 행위에 가까운 초혼제 사건이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음에도 NCCK를 비롯한 이들 교단들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한국교회에 반WCC 정서가 완전히 뿌리내린 근저에는 바로 ‘초혼제’가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이어지는 NCCK의 ‘나무아미타불 아멘’ 사건은 종교혼합의 극치였다. 어쩌면 무속보다도 못한 행위조차 스스로 용납해 왔다. 또한 NCCK의 총무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7대종단협의회에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동안 NCCK와 서로 종교 간의 예우를 다해 왔다. 그런 상황에 NCCK를 비롯한 진보계가 대선을 코 앞에 두고 특정 후보의 ‘무속’을 문제 삼고 나오는 것이 결코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로남불’, 사실 특정후보를 지지하건, 비판하건 그들의 자유지만, 자신들의 신념이나 과거마저 뒤집어 엎어가며, 이를 비판하는 행위에 교계가 그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애초 무리한 비판이나 성명이기에 그 내용에 모순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NCCK와 YMCA는 공동 성명에서 “무속의 운명론적 세계관이 형성하는 심리적 강제력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해치고 공론의 장을 해체하거나 사유화한다. 미신과 무속에 기반한 사교의 정치적 본성은, 세속 권력자들을 숙주로 삼아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무속’을 노골적이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결코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시비도 아니며, 특정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도 아니며, 건전한 민족종교의 전통 문화에 대해 존중한다”고 한발 빼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성명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무속이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온갖 비난과 비판을 해놓고, 나중에는 존중한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그렇기에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언급한 “특정 후보에 대한 간접적 지지가 아니다”는 입장은 오히려 제발 저린 도둑의 커밍아웃에 가까워 보인다. 건전한 민족종교라고 했는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건전한 무속은 무엇이며, 불량한 무속은 무엇인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제기는 그저 시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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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NCCK의 ‘무속’ 비판이 씁쓸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