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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한국교회여, 자학하지 마라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사회 각층에서 들린다. 대체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도 교인들의 삶과 신앙이 일치되지 않고,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때때로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중직자들 중에도 '한국교회가 타락했다'는 둥, '더 이상 목사에게 속지 말라'는 둥,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둥, 무책임하고 자학적인 발언을 일삼는 자들도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의식에서 나오는 자학(自虐)이다. 그러잖아도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의 교인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20년 지난 한 해 1년동안 대교단 중심으로 전년 대비 39만명이 줄었다는 매우 충격적 통계도 제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개혁'이란 이름 아래 자학적 발언이 지나치면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에 크나큰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솔직히 한국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에 비해 사회 윤리적 의식이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국내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단체'가 수십 개가 활발히 움직이는데, 이들 단체들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회원들의 상당수는 한국 기독교인들이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베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비기독교인들 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다는 뜻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이란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가 교회에 거는 기대가 있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우리사회가 그 기대를 너무 높게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일방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일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가운데 헌금 수준이 가장 높은 교회이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 중직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매달 십일조와 매주 헌금을 한다. 교회는 이 헌금을 교회 안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여, 자학하지 마라.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은 비교적 잘 조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의 교회를 향한 비판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한다'는 말과 같이, 사회를 향한 봉사와 사랑의 정신에 더 성숙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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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2-04
  • [사설] 한국교회 신학교 구조조정 시급하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샬롬나비)은 지난달 말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아 논평을 통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정신을 회복하여 이웃사랑의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물질만능주의에 근거한 번영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또한 교인 감소에 따른 신학교 구조조정을 통한 목회자 수급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샬롬나비는 "지난 10년 간 한국교회 교단들의 교인 수는 꾸준히 감소하여 왔다. 2020년 기준 전년보다 예장 합동측이 17만 명, 통합측이 11만 명, 고신이 1만 명, 감리교가 6만 명, 기성이 3만 명, 기장이 8천여 명 감소했다. 이처럼 교인 수가 감소했다면 목회자 수와 교회 수도 감소해야 하는데, 하지만 교인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수와 교회 수는 오히려 늘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시대적 공신력의 하락과 현대 한국인들의 세속적 행복주의가 있다. 이에 맞추어 신학교의 목회자 수급도 조정해야 하는데, 아직도 시대의 요구에 대한 교단들의 적응이 따라가지 못해 해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쏟아지고 있다. 종교개혁주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에 대한 신학교 구조조정과 목회자 수급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예장 합동과 통합, 두 교단에서만 해도 2020년 한 해 동안 줄어든 교인 수는 200명씩 모이는 교회로 치면 160개 교회가 줄어들었고, 100명 교인이라면 320개가 사라진 셈이다. 아주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샬롬나비의 이 지적은 한국교회 대교단들이 당장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급한 사안이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신학대학이 60개가 넘고, 각 군소교단에서 무인가로 운영하는 신학교까지 합하면 300여 개나 된다. 그리고 이들 신학교에서 연간 배출되는 예비 목회자 수는 줄잡아 7000여명에 이른다. 교인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목회자 수도 필요하지만, 교인 수가 줄어드는데 교회 수와 목회자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기성 교회가 그만큼 영세해 진다는 뜻이다. 이는 민족복음화와 선교정책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군소교단에서는 목회자 양육을 위한 하나의 교단직영 신학교가 필요하지만, 대교단에서는 여러 개의 지방신학교를 운영하여 필요 이상의 신학생을 배출하고 있다. 때가 늦기 전에 구조조정을 통해 신학교 운영현황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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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2-18
  • [사설] 창간 30주년에 붙이는 감사의 인사
    본보는 1991년 11월 16일,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편집 목표로 창간된 지 이 달로 30주년을 맞았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마 5:37)는 사시로, 어느 교파나, 어느 교단의 도움 없이 순수한 교계연합지로 30년을 쉬지 않고 발행해 왔다. 이는 첫째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독자와 광고주들의 지원 덕분에 있다. 심지어 30년을 한 해도 빠짐 없이 후원한 광고주도 있다. 이 모두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문서선교로서 언론의 사명을 중요시 했다. 1897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만들었고, 같은 해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기독신문'을 발행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1946년 '기독교공보'가 창간되었다. 이후 이 기독교공보는 '기독공보'가 되었다. 이것은 모두 교단의 회보적(會報的) 성격을 가졌다. 또 부산 피난지에서 '한국기독신보'라는 새로운 신문이 나왔다. 이어 민주당 정권의 출범과 함께 '보도의 중립과 교회의 일치'를 사시로 새로 창간된 신문이 '크리스챤신문'이었다. 그리고 이어 '교회연합신보'가 나왔다. 이 시기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과 NAE의 소위 복음주의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큰 분열 속에 휘말려 있을 때이다. 이들이 초교파 신문의 효시를 이루었다. 지금의 교계신문 전성시대는 제6공화국의 언론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교단마다 교단지의 발행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연합지가 발간되었다. 본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 연합지들은 언론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명멸했다. 더욱이 이 기간 IMF도 겪었고, 코로나19도 겪고 있다. 그래도 본보는 이제까지 살아남아 30주년을 맞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본보는 그동안 기사를 쓰 온 필자들과 광고로 후원해 온 광고주들을 초청해 조촐 하게나마 기념 감사예배라도 드리려 했으나, 아직 코로나가 가로 막고 있어 기념 행사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본보의 앞으로 또 한 번의 30년을 기대하면서 <교회연합신문>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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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2-18
  • [사설] 한국기독교의 우파와 좌파
    지금 우리사회는 정치적으로 크게 ‘극우파 세력’과 ‘보수 세력’, ‘종북좌파 세력’과 ‘진보 세력’이라는 네 가지 정치적 색깔을 가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우파와 보수를 한데 묶어 ‘우파’라 부르고, 종북좌파와 진보를 한데 묶어 ‘좌파’라 부른다. 그러나 극우와 보수, 또는 종북과 진보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파를 ‘보수 세력’이라 하고, 좌파를 ‘진보 세력’이라고 한다. 정당도 좌파는 오랜 집권을 해온 보수 세력을 '타락한 극우파'로 보고 척결대상으로 삼고, 또 우파는 현 집권 여당인 진보 세력을 '종북좌파'로 보고 척결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를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기독교는 해방 후 정치권의 좌우(左右) 논쟁과 북한지역의 공산화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한 좌파의 기독교에 대한 악랄한 적대감을 체험했다. 공산주의자들인 좌파는 기독교를 반혁명집단으로 보고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혁명인사로 몰아 처형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투옥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좌파 공산주의운동을 모두 반기독교운동으로 본다. 따라서 자연히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파 자본주의를 친기독교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사회는 우파는 극우파와 보수파로 나누이고, 좌파는 종북좌파와 진보파로 나누인다. 그런데 한국기독교 안에는 소수이지만, 극우파도 있고, 종북좌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건전한 보수파거나 건강한 진보파이다. 이 둘이 두 바퀴처럼 교회와 사회를 이끌고 있다. 우리사회는 종교적으로 ‘동불서기(東佛西基)’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동쪽은 대체로 보수적인 불교가, 서쪽은 대체로 진보적인 기독교가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동쪽 영남지역은 보수 세력이 강하고, 서쪽 호남지역은 진보 세력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극우파들의 선동적 주장처럼 한국사회가 오래지 않아 종북좌파에 휘둘릴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호남지역에 교회가 버티고 있는 한 그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기독교는 사회변화를 원하는 진보는 될지언정, 교회를 파괴하려는 종북좌파는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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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1-14
  • [사설] 닮은 꼴: 100년전 중국의 ‘비기독교운동’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2년, 중국에서는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비기독교운동’(非基督敎運動)이란 것이다. 그 뜻은 기독교가 하는 짓은 다 틀렸고, 기독교는 못된 짓을 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먼저 베이징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이 시작했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치적 힘을 실은 것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좌파들이었다. 가장 열심을 낸 조직은 ‘공청단’ (共靑團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인 한 명 늘어나면, 중국인이 한 명 줄어든다”며, 중국에서 기독교가 계속 전파되면 국가도 망하고 민족도 망한다고 선동했다. 그래서 국민당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학교에서 기독교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922년부터 소위 ‘교육권의 환수’라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가 설립한 모든 미션스쿨에서 교회를 추방하고 교육부가 직접 관할토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에 관한 필수 수업을 개설할 수 없고, 선생과 학생들에게 예배 참석 의무를 폐지했다. 그리고 이어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추방하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종교교육으로서 선택과목이나 과외활동으로서만 기독교를 인정했다. 학교에서 교회를 축출하는 이 교육권 환수운동은 1927년 5년만에 완수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비기독교운동’과 ‘교육권 환수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반기독교세력이 모두 기독교 학교 출신들이었다. 당시 유명한 기독교 학교들이 앞장서 정부가 학교를 환수하고 서양선교사들을 축출하라고 촉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는 아직 중국이 공산화 되기 전이었다. ◇딱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미션스쿨이 바로 이 같은 위기에 처했다. 좌파들은 기독교가 학교교육에 개입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학생들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미션스쿨의 본 설립 목적인 구성원의 예배의 참석과 성경공부를 거부한다. 그로 인해 예배와 성경공부가 사라진 미션스쿨은 전교조가 장악한 지 오래이다. 좌파정부는 이 마저도 숨통을 끊으려는 ‘사립학교법’을 순차적으로 개정해 가고 있다.
    • 연지골
    • 사설
    2021-11-14
  • [사설] 종교성의 회복- 복음선교의 긴급성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라고 한다.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의 마음이 곧 종교성의 본질이다. 인류는 에덴에서 범죄로 인해 생명의 창조주와의 관계가 단절됐다. 이에 죄를 범한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에덴 동편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 3:22-24)라고 한다. 이로 인해 에덴을 잃은 인간의 정신 세계에는 '생명의 주님'이 아니면 메꿀 수 없는 동공(洞空)이 생긴 것이다. 인류는 어떻게든 이 동공을 메꿔보려고 끊임없는 그 생명의 주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 신의 용서와 사랑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또 끝내 희생제사까지 드렸으나 창조주 하나님과의 대화의 길은 죄로 인해 막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사회가 추구해온 그 종교성은 타락하여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먼저 인류에게 계시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대화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과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다시 만난 사건이 예수의 인카네이션(聖肉身)이다. 성경은 이를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1,2)라고 했다.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 있던 독생자 그리스도의 탄생,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이 곧 인류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고 생명의 주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여신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의 종교성이 회복되고 참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제 인류는 그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예배이다. 이 얼마나 인류가 오랜동안 찾고 갈망하던 아버지이신가. 그런데도 인류사회는 아직도 그 타락한 종교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이 미몽(迷夢)에 빠져 '종교'의 이름으로 미신과 우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고 있다(롬 1:18-25). 바로 여기에 긴급한 복음선교의 핑요성이 제기된다. 복음이 곧 생명이요, 복음의 조명을 받지 못한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우상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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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0-17
  • [사설]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섹트들
    종교는 보편성을 잃을 때 섹트(sect)에 빠지게 된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교리를 말하면서도 섹트는 전혀 다른 종교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정통성을 벗어난 '이단'(異端)이 되는 것이다. 섹트란 말은 조직체 내부에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진리로 내세우며 남을 배척하는 독선적인 분파를 이르는 말이다. 지금 한국기독교에도 이런 섹트는 여럿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신천지'나, 요즘 일간지 광고란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며 자신들의 목사를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라며 신성모독을 일삼는 '은혜로교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계 섹트 가운데는 이처럼 노골적으로 이단성을 드러내지 않는 집단들도 있다. 그들은 성경 66권 가운데 특정한 계시만을 강조하며 그 계시가 자신들의 조직을 통해 완성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이들은 절대 다수의 보편적 교회를 오히려 성경을 잘못 알고 있다고 비난한다. 사실은 정통을 강조하는 극보수나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세대주의도 섹트에 가깝다. 이런 집단은 딱히 이단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단성이 있다'고는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독생자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부활 등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주 초기부터 이단설(異端說)이 많았다. 그래서 이단에 대한 정의(定義)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325년부터 787년까지 오랜 기간 벌어진 초대교회의 교리논쟁도 이들 이단설에 대한 정통주의의 확립을 위해서 도입된 것이었다. 거기에서 확립된 신앙을 '보편적' 혹은 '보편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 지도자 가운데 예언자적인 면모를 지닌 열광주의자가 있어 자신을 기독교 복음의 정통주의자로 자처한다. 한국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갔다. 예수 믿고 영육간 평안과 구원을 받겠다고 찾아간 집단이 섹트일 때, 구원은 고사하고 재산괴 인생조차 몽땅 그 집단에 바치고 만다. 이것이 비정통주의의 함정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주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하고 교인과 국민들이 섹트에 빠지지 않도록 교육해야 할 책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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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10-17
  • [사설] 목사세계에 '색계'라니?
    최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225국)에 포섭된 충북지역 사회활동가들의 간첩단 사건이 드러나자, 탈북자들이 중심이 된 유튜브와 일부언론에서 통일전선부 산하의 225국에 포섭된 한국목사들이 있다고 보도하고 나섰다. 이들 목사들은 김대중 시대와 노무현 시대에 북한을 방문한 자들로서 소위 북한의 '색계 작전'에 포섭돼 친북활동이나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색계 작전에 포섭된 170여명의 한국목사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며, 이들 목사들 가운데는 공작금을 받고 친북활동을 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이 명단이 지난 정권 때에 청와대에 보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기독교 목사들은 성적으로 타락했음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국가안보 저해집단으로 비난 받을 수 있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목사들이 '색계'에 걸려 친북활동과 간첩활동을 한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방북 목사들 중에 일부라도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행동이나 오해를 살만한 일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교계와 사회 앞에 이실직고 하고, 그 직에서 은퇴함이 옳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공안당국이 나서서 이들 혐의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낱낱이 밝힐 것을 요구한다. 만약 유튜브나 일부언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같은 주장은 이미 드러난 간첩사건에 대한 물타기거나, 한국교회에 분열과 불신을 조장하려는 악의가 있음이 분명함으로 교계가 나서서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줄잡아 약 15만 여명에 이르는 목사가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하에 북한을 이해하려는 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이상한 시각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 목사 중에 이들의 주장처럼 북한의 색계에 걸려 양심과 신앙에 반한 친북활동 내지는 간첩활동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이다. 이 문제는 다시 강조하거니와 국가안보가 걸린 문제임으로 공안당국에서 철저히 조사해 밝혀야 한다. 왜 이런 의혹을 방치해서 윤리와 도덕을 생명으로 여기는 교회를 욕보이려 하는가?
    • 연지골
    • 사설
    2021-08-17
  • [사설] 언론의 기능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국정과제는 오로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다. 정치권의 위협이 되는 검찰은 '검수완박'으로 손발을 꽁꽁 묶고,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언론은 ‘가짜뉴스’로 몰아 징벌적 처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여당은 언론의 비판 기사가 오르면 자신들이 뭘 잘못한 것인가 돌이켜 볼 생각은 않고, 오로지 언론을 통제하고 규탄하려고만 한다. 그러는 동안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민주당도, 청와대도, 정부도 망가져 가는 줄은 모른다. 지금 국민의 여론은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30% 대로 내려앉고(최근 리얼미터 38.3%),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도 20% 대(29.7%)로 야당인 국민의힘(38.0%)에 뒤지고 있다. 한국기독교계에도 집권여당과 똑같은 짓을 하는 교단이 있다. 예장통합측의 경우이다. 한국기독교에서 그래도 진보진영을 대변한다는 에큐메니칼 교단을 자처해온 통합측은 자신들의 교세만 믿고 수없이 많은 타교단 인사들에 대해 ‘이단시비’를 해왔다. 자기네 교단과 신학이 달라도 이단, 신앙 형태가 달라도 이단,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아도 이단, 귀신을 쫓아내도 이단으로 몰아 교계를 분열시켜 왔다. 통합측의 이런 황포를 보다 못해 ‘이건 아니라고 봐’라고 몇 마디 지적하는 교계언론이 있으면 가차없이 ‘이단옹호언론’으로 매도하고, 총회 결의라며 아예 교단 행사에 그 언론의 기자의 출입을 막고 보도자료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통합측은 교계에서 왕따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언론은 그것이 사회적 기능이든, 교계적 기능이든 그 사회의 거울의 역할을 한다. 그 거울에 비친 피사체가 더럽게 보이면 거울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 피사체 자체가 더러운 것이고, 깨끗하게 보이면 그 피사체 자체가 깨끗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당도 교단도 자신의 얼굴이 더러워져 있는 줄은 모르고 거울 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꼴 보기 싫다’며 그 거울을 깨뜨려버리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에 묻은 더러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울에 비친 더러워진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고 깨끗이 닦고 다시 거울 앞에 서면 되는 것이다. 정부도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거울은 다만 거울일 뿐이다. 언론을 탓한다고 자신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홍보든, 비판이든 언론 기능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1-07-12
  • [사설] 매년 늘어나는 ‘예장 교단’
    교회연합신문이 매년 발간하는 ‘교회연합주소록’ 2021년 판에는 271개의 교단이 등재되어 있다. 그 중에 220개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이다. 예장교단이 처음 하나의 총회를 결성한 것은 1912년이다. 예장은 1938년 일제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이 원죄가 되어 해방과 함께, 1952년 신사참배 반대파(고신측)의 분열로부터 시작해 1953년 기장측의 분열,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 그리고 1979년 합동측의 ‘주류측’과 ‘비주류측’의 분열이 가져온 결과가 오늘날 220개 예장교단간판이 내걸리는 참으로 부끄럽고 놀라운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외에도 주소지를 확인 못해 누락된 교단이 여럿 있다. 그런데 이 220개 교단은 개혁주의 칼빈주의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하는 그 신학과 신앙이 동일하다. 그럼에도 무지하고 어줍잖은 지도자들이 ‘ 저 쪽은 우리 하고 다르다’면서 교단을 따로 차리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신학이나 신앙이 달라서가 아니라, 교단 지도자들의 세속적 욕심으로 인한 타락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그것도 예장교단 220개 가운데 기껏 20여 개 교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단 설립자가 노망이 들거나 관 속에 들어가는 날까지 평생 총회장을 하는 군소 1인 독재교단이다. 그래도 그들이 교계연합단체에 가입하여 정통성 가진 대교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국교회를 논한다. 그러다보니 연합과 일치를 논하는 연합단체가 교단분열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있다. 코로나 정국인 금년에도 몇 개 교단이 더 늘어났는데, 교단 창립과 동시에 ‘교계연합단체’에 가입해 임원이 된다. 그 단체의 임원 명함 한 장 들고 다니기 위해서 자기네 끼리 교단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본은 전혀 다르다”는 뜻의 사이비(似而非)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이비’적 현상을 한국장로교회 지도자들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교회가 아무리 다양성을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이 달라 갈라지는 ‘교파’(敎派)가 아니라, 신학과 신앙이 똑같은 ‘교단’(敎團)을 갈갈이 찢어놓는 행위는 비윤리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비신앙적이다.
    • 연지골
    • 사설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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