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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는 ‘별종’ 기독교
    한국기독교가 세계 선교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단기간 성장을 이룩한 후에, 기독교 역사에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별종’(別種)으로 변질해 가고 있다. 개교회주의와 기복주의는 교회를 마치 무당절간처럼 변질시키고, 일부 대교회의 목회자들의 물욕에 대한 정신상태는 시장바닥의 장사치만도 못한 윤리적 타락을 드러내고 있다.그러다보니 목회자가 은퇴하는 교회마다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한 푼이라도 더 챙겨갈려는 퇴직목회자의 욕심과 그것이 과하다며 원칙만을 내세우는 당회원들 간에 패가 갈려 법정으로 까지 비화된다.목회현장에서 밤낮 수고하여 대형교회를 이루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군림하다가 은퇴하는 목회자들 가운데는 그 고생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아니면 교회 돈으로 공부하고, 시집 장가 보내 이미 독립한 자식들에게 태어날 때 물려주지 못한 금수저라도 물러줄 요량인지, 거액의 교회 돈을 빼내 간다.은퇴목회자의 퇴직금이 얼마 전까진 몇 십억 하더니, 최근엔 몇 백억이 회자되고 있다. 교회에 현금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달라는 것이다.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교계에서는 원로대접을 받는다. 그러고도 한다는 말이 ‘한국교회에 성도수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니 좀 깨어있다는 소위 지성인들이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기겠는가. 가나안 교인이니, 노미날리티니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심지어 “지금도 교회에 다니십니까?”라는 도전적 책자도 나돌 정도이다.한민족 구원의 소명과 복음화에 사명을 받은 한국교회에 누가 이런 풍조를 만들었는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루었다는 그들이 자기들은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교회에서 나오는 단물은 다빨고 더러운 손으로 생명의 샘을 휘젓고 간 탓이 아닌가.한국교회 절대 다수의 은퇴목회자들의 환경은 매우 어렵다. 모든 것을 교회를 위해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 퇴직금을 수십억, 수백억 챙겨가니, 한국교회 은퇴목회자들 가운데는 상대적 빈곤감을 갖게 되고, 또 어떤 이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흉내를 내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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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9-08
  • 교단신학 교수들의 한계
    지난 18일 예장합동측 교단 한기총 복귀위원회가 합동측의 한기총 가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판단한 다락방전도협회의 류광수 목사의 이단성 문제를 놓고 공청회를 가졌다. 공청회란 사회 일반에 큰 영향이 있는 중요 안건을 의결에 부치기 전에 이해 관계자나 그 방면에 학식이 있는 경험자의 의견을 듣는 공개 회의를 말한다.이날 합동측의 공청회에도 학식이 있다는 세 명의 교단 신학자가 페널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날의 모임이 공청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이해 당사자 중 류 목사측이나 한기총측은 완전 배제되었고, 세 명의 페널도 류 목사에 대한 이단성 여부에 대한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채, 다만 류광수는 이단이라는 우리 교단의 결의가 있다는 것과 신학적 용어만을 나열했을 뿐이다. 하도 답답하니까 사회자가 청중을 대표해서 류광수 목사의 기독론이 무엇이 문제인가고 물으니, 한 교수는 아예 “대답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합동측 교단은 이런 공청회를 왜 했는지 알 수 없다. 합동측 교단에서 류광수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인데, 구태여 교단의 소위 저명한 신학자들이 나서서 그것을 다시 환기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일인가?교단 신학교이든, 초교파 신학교이든 신학교수로서 신학자 행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그 학문적 양심에 따라 그 의견을 말해야 한다. 전문성이 결여되어 할 말이 없다면 아예 공청회에 패널로 나오지 말든지, 나았으면 당당하게 소신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그 날 세 명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은 아무 것도 내어놓지 않았다.이것이 교단 신학자들의 한계이다. 한국교회는 신학자들이 모두 교단에 예속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교단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교단 결정과 다른 말 한 마디가 교수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법원은 이단 논쟁의 학문적 자유를 극대히 인정하고 있다. 이단 비판을 “일부 신빙성이 없거나 부적절하다고 하더라도 학문적 자유 및 비판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의 자유는 신학자의 양심이 전제될 때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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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9-01
  • 새로 짓는 황룡사가 문화재인가?
    정부 문화재청이 참으로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다.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으로 전통사찰의 경내에 이미 오래전 허물어져 사라진 건물을 국가예산으로 복원하기도 하고, 아예 사지(寺址)만 남은 터에 새로 절간을 짓고 문화재를 복원했다며 문화재 등록을 하기도 한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1371년 전 신라 선덕 여왕 12년(643년)에 세워졌다가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경주 황룡사를 복원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문화재청은 처음에 경북도와 함께 1,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황룡사 9층 목탑과 금당 등 주요 건물도 복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황룡사는 주춧돌과 불상좌대 정도만 남아있을 뿐, 그 건축방식이나 설계방식은 전혀 알 수 없고, 목탑도 그 형태만 경주 부처바위 암각화에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흔적도 없이 800년 전에 사라진 사찰을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으로 국가가 나서서 새로 지으려는 것이다.이것이 비등한 비판이 일자, 이번에는 황룡사 담장과 회랑만 복원한다고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는 일단 담장과 회랑부터 복원해 놓고 여론을 유리하게 끌어내 후에 목탑과 금당 등 절간의 주요 건물을 복원하겠다는 꼼수가 들어있는 것이다.새로 짓는 황룡사는 21세기 건축물이지 결코 문화재가 아니다. 황룡사의 복원은 새로운 사찰을 하나 짓는 것이다. 그런데 왜 천문학적 문화재 예산으로 특정종교의 사찰을 지으려 하는가? 사찰은 불자들의 돈으로 지어져야 한다.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으로 절간을 지어 그것을 불교계가 운영하도록 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왜 이같은 일이 계속 저지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문화재법에 맹점이 있는 것 아닌가 여겨진다.역대 정부가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 아래 불교중흥에 힘쓰는 것은 전근대적 정책이다. 불교는 불자들의 힘으로 중흥되어야 한다. 그런데 2001년부터 2012년까지 12년간 중앙정부의 종교관련 문화재 보수 및 정비예산은 6,301억원인데, 이 가운데 불교문화재에 6,050억원(96.0%)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로부터 시작된 불교문화재 예산지원은 그 이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는 오히려 배로 증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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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9-01
  • 중국 공산당 하의 기독교
    지난 4월 중국의 ‘전국종교공작회의’에는 이례적으로 시진평 국가주석이 참석해 “공산당원은 종교를 과학적 유물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치리해야 하며, 공산당원이 종교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는 최근 8천만 중국 공산당원 가운데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있는데 대한 단속 차원에서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는 것이 중국교회 관계자들의 평이다.중국 공산당원은 원칙적으로 종교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도 공산당원들 중에 특정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있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 등록은 하지 않지만 기독교인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추세이다.공산주의 아래의 중국인들은 인간도 유물론적으로만 바라볼 뿐, 인간에 ‘영혼’이라는 영적 존재가 별개로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영혼을 말하는 종교를 저급한 정싱 속에서 나오는 비과학적 사고쯤으로 여긴다.그들은 종교란 인류사에서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적 철학적 사고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여기고, 자기들 간에는 자신들이 대단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이 공산주의의 유물론이 인간사에 모든 해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본인이나 가족에 때때로 닥치는 인간사의 절망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는 공산당원도 하나님을 찾는다. 공산주의 이론의 합리화를 위해 대단히 모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사람 속에 하나님이 창조한 영혼이 있음을 가르치니까, 짧은 기간에 중국의 공산당원보다 더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늘어난 것이다. 중국 기독교는 오래지 않아 전체 국민의 10%를 넘어 서게 된다. 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없다면 금세기 안에 2-3명억에 육박할 수도 있다.따라서 중국교회의 최대 급선무는 제대로 교육받은 지도자 양육에 있다. 중국교회는 지금 현재도 절대 다수의 교역자가 모자란다. 지금 충원되고 있는 교역자들 역시 정상적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경학교 수준의 교육을 이수한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가 이 점을 유의하여 중국교회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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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8-18
  • 통합총회, ‘이단 문제’ 결자해지가 옳다
    한국장로교의 대표적 교단인 예장통합측이 지난 해 제100회 총회에서 특별사면위원회를 구성하고, 그간 통합측이 무리하게 이단으로 규정해 온 개인과 집단에 대해 ‘화해’ 차원에서 사면을 추진해 왔다. 여기에는 다락방전도협회의 류광수 목사, 베뢰아운동의 김기동 목사, 평강제일교회의 박윤식 목사, 레마선교회의 이명범 목사, 인터콥의 최바울 목사, 세광중앙교회 김풍일 목사,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 및 안식일 재림교회와 지방교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특별사면위는 이들에 대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관계자를 면담하는 등 다각적인 연구를 해 왔다. 그런데 한국교회 주변에서 활동하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은 통합측의 이같은 사면위의 결단을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특히 총회이대위는 ‘이단은 우리가 만들었는데, 우리 동의 없이 누가 감히 이단을 푸느냐’는 것이다.또 한기총에서 이단 시비를 명분으로 떨어져 나가 딴살림을 차린 교단 밖의 한교연도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한기총이 이단을 재심한다니까 ‘묶은 교단이 풀어야지 연한단체는 이단을 풀 수 없다’고 하더니, 막상 이단을 묶은 통합측 교단이 이단을 사면한다니까 이번에는 ‘교계의 동의없이 개교단이 어떻게 이단을 사면하느냐’며 반대했다. 이현령비현령이다.물론 이들이 반대한다고 통합측이 총회에서 결정된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마디로 원칙도 뭣도 없는 한국교회의 수준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입맛은 매우 씁쓸하다.사실 지난 20-30여년 간 한국교회에는 원칙 없는 이단 시비로 수많은 이단이 양산되어 왔다. 여기에는 일방적으로 억울하게 정죄된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된데는 대교단 통합측의 책임이 크다. 따라서 통합측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단을 묶은 통합측이 면밀한 조사를 통해 사면한다는데, 무엇 때문에 교단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는가? 만에 하나 통합측에서 사면한 사람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이 새로운 이단성을 발견했다면 그 교단이나 단체에서 다시 이단 시비를 하면 될 것이다. 정통성 있는 교단으로부터 비른 신앙과 신학의 지도를 받아 한국교회와 함께 가겠다는 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하고, 끝까지 “너희는 우리 속에 오면 안된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과연 기독교인인가! 이는 분열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16-08-18
  • 주기철 목사에 대한 ‘복권’
    예장합동측 평양노회 관련자들이 지난 달 31일 서울 서초구 명달로 산정현교회에서, 77년 전에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몰아 목사직을 면직한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직을 복권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생 명부에 복적하는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대관절 이들이 무얼 감사한다는 것인지, 병주고 약주는 격이다. 무조건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이 마치 시혜를 베푸는 듯이 하고 있다.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일제의 태양신 천조대신을 숭배하는 신사참배가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교회가 앞장서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에 신사참배는 태양신 우산숭배라며 총회의 결의를 반대한 반대파 목사 장로들은 총회의 결의에 따라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를 맡고 있던 주기철 목사였다.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신사참배가 한국기독교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이고, 그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킨 사람들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신사참배의 범죄를 주도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벌은 어디에도 없었고, 심지어 태양신 신궁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목사들도 해방 이후 교회를 맡아 죽을 때까지 목회를 했다. 평양노회도 주 목사에 대한 ‘해벌’을 외면했다.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그동안 주 목사를 면직한 평양노회는 통합측과 합동측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런데 주 목사를 ‘시벌’한 주모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죄책 고백 없이, 그들이 이제와서 주 목사의 목사직을 ‘복권’시킨다는 뜻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고인이 된 주 목사가 그 목사직을 무엇에 써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평양노회가 주 목사를 복권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한국교회에서 주기철을 목사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한국교회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복권으로 어물쩍 신사참배 문제가 역사의 한 면으로 넘어간 것쯤으로 여긴다면 이 또한 한국교회의 신앙적 순수성을 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16-08-12
  • 음심이 가득한 저주의 자식들
    교계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청소년 사역자가 오랜기간 자신이 지도해온 여학생과 성관계를 해온 사실이 밝혀져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이미 결혼하여 가정이 있는 기혼자이고, 교회도 꽤 큰 대교회를 이룬 촉망받는 엘리트 목사이다. 그런 대표성 있는 인물의 일탈은 한국교회에 상당히 오랜기간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남녀간의 불륜의 문제는 인류사의 시작과 함께 있어 왔다. 그러나 이 불륜은 가정과 사회와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인류사의 건강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모든 클래식종교들이 계율로 이를 막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기독교는 10계명을 통해 이를 금지하고, 불륜을 저지른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벌로 다스린다. 공동체의 윤리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그럼에도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할 목회자들이 자주 성문제로 스캔달을 일으키는 것은, 최근 우리사회에 강화되고 있는 법률적 문제와는 달리, 우리사회가 남녀의 성문제를 마치 건강을 위한 헬스쯤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데다가, 심지어 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목회자나 사모 세미나 등에서도 ‘가정사역’이란 이름으로 노골적인 성행위 자세 등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을 정도여서 성문제를 예사로 여기는 데 그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우리교회가 70년대까지만 해도 목회자의 교인들에 대한 성상담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기피해 왔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소위 가정사역이란 이름아래 목회자와 이성 성도간에 성상담이 예사로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일탈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것이 비록 건강한 부부간의 성생활을 위한 것일지라도 목회자들의 노골적인 성상담은 또 다른 일탈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관절 한국 기독교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다. 교계가 경성해야 할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추하게 변해간다해도 그 세상을 구원할 책임이 있는 교회마저 거기에 물든다면 우리사회는 어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성경은 그런 자들을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들이라”(벧후 2:14)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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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8-12
  • ‘두루다니며 한담 하는 자를 경계하라
    성경은 “두루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누구보다 교계 지도자들이 귀담아 듣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말이다. 교계에는 자기의 본업은 제쳐놓고 특별히 할 일 없이 돌아다니며 남의 말을 이곳저곳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좋은 일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좋지 않은 소문만을 퍼뜨리기 일수이다. 그것이 근거없는 허위사실이 그럴듯 하게 포장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런 말을 전하는 사람의 지위가 있으므로 듣는 사람들은 그 말을 쉽게 믿는다. 교계에는 이런 일로 인해 고소고발 사태가 다반사다.이런 현상은 우리교계 지도자들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계 지도자들의 수준이 곧 한국교회의 수준이다. 기독교의 목회자는 기도와 명상과 독서로 무장된 깊은 영성의 사람이어야 한다.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80~90년대까지는 대체로 그랬다. 목회자들의 말 한 마디가 사회전반에 보증이 되었다. 어쩌다가 목사가 경제 문제나 파렴치 사건으로 사법당국에 출석이라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크게 부끄럽게 생각했다. 더우기 동료간에 시비가 생겨 경찰서라도 들락거릴라 치면 어느 쪽의 잘잘못을 떠나 두말할 필요없이 비난받는 일이었다.그런데 요즘은 목회자들과 관련된 사건이 경찰서와 검찰청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계류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에 많은 수가 남의 말을 함부로 하여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으로 고소고발된 사건들이다. 한국교회가 그만큼 가벼워지고 있다는 뜻이다.사람에게 명예는 대단히 중요하다. 살아 있는 사람만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명예는 중요하다. 그래서 법률에도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죄가 있고, 우리 조상들은 심지어 영결종천(永訣終天)한 죽은 혼령도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면 다시 찾아와 신벌(神罰)을 내린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든 사람은 그 명예가 지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폄훼하며 두루다니는 한담하는 자들을 유의해야 한다.성경은 또 말한다. “두루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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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7-29
  • 또 하나의 교계연합단체 만들려 하나?
    지난 26일 한국기독교 7개 주요 교단장들이 모여 한기총과 한교연을 통합하여 ‘한통연’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교계를 분열시켜 연합단체를 하나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도, 분열한 연합단체를 하나로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사실 한기총에서 한교연이 갈라진 것은 어리석은 교권주의자들이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선동에 놀아난 결과이다. 한교연이 창립될 당시 한기총에 연합단체를 가를 만한 이단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이 ‘거룩한 기구’를 만들어 거기에 걸터 앉아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 특정인에 대한 이단 시비를 이용한 것이다. 이번에 소위 7개 주요 교단이 한기총과 한교연을 통합하기 위한 ‘한통협’을 만들었으나, 이 두 단체가 통합한다는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결국은 한통협의 조직은 또 하나의 연합단체가 태동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분열 책동으로 읽힐 수 밖에 없다.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먼저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에 있다. 한기총과 한교연이 먼저 하나로 통합하고, 그 다음에 그 통합체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제3의 연합단체를 만든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기총이나 한교연 밖에 사람들이 자기네의 덩치만 내세워 두 단체를 멋대로 통합하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겠다는 선언 자체는 어리석고 모순된 일이다. 따라서 한기총과 한교연 및 제3세력과의 통합과 연합은 시대적 요청임에는 틀림 없으나, ‘한통협’ 논의는 성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된다.특히 이번에도 통합측이 그 중심에 서 있는데, 이렇게 되면 통합측은 교회협, 한기총, 한교연에 이어 4번째 연합단체를 만드는 꼴이 된다. 한국기독교의 에큐메니칼 교단을 자임해온 통합측이 에큐메니칼 정신인 연합과 일치와는 반대로 분열주의적 행태를 보여온 꼴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통합측의 지도력에 회의를 품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통합측이 중심을 잡아야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
    • 연지골
    • 사설
    2016-07-29
  •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실 때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고 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났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한밤에 고요한 들판으로 불러내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뭇별들을 가리키며 “하늘을 우르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 15:6-7)고 했다.이처럼 거창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이에 처음엔 양자를 들이려 하다가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여종 하갈에게서 서자를 얻었다. 그러나 이 또한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99세 때에 다시 언약을 세웠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창 17:4-6)고 했다. 사실 아브라함은 그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심중에 말하기를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100세 때에 약속대로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낳았다.그러면 네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지켜졌는가?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과 야곱과 12지파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이어가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 갈 3장 6-9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다.지금 전세계 인류의 절반이 넘는 약 35억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두고라도 기독교가 22억, 이슬람이 13억 정도이다. 가히 바다의 모래 같고 하늘의 뭇별처럼 많다.
    • 연지골
    • 사설
    201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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