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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저지른 범죄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좇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했다는 보고를 듣고 “금하지 말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했다(막 9:38,39). 곡식밭에 원수가 덧뿌린 가라지를 뽑아버리자는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된다며 추수 때까지 가만두라”고 했다(마 13:24-30). 예수의 복음은 오로지 관용과 사랑의 정신이다.그런데 역사적 기독교는 예수의 이 복음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예수를 따르는 방식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서로가 죽였는지 알 수 없다.중세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통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수파를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혁파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고 하여 죽이고,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재세례’를 받는 것이 옳다고 한다고 하여 물에 빠드려 죽이고 불태워 죽였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사회는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도들을 죽이고,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을 죽이는 전쟁을 수십년 간 지속했다.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같은 끔직한 짓을 저질렀다.그런데 아직도 역사적 기독교가 저질러온 이같은 비인간적 비성경적 비복음적 행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군상들이 우리교회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 이단으로부터 복음을 지킨다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중세교회처럼 지금도 기독교가 사람을 죽일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 살인자로 변할 사악한 인간들이다. 그들에게는 에수님의 관용이나 사랑의 정신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정통성이 의심되거나, 좀 나약해 보이는 목회자들을 위협하고, 또 기득권을 지키려는 교회로부터 ‘이단대책비’라는 몇 푼의 돈을 걷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이단은 명확하다.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는 자(벧후 2:1)이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자이고, 자신이 새로운 재림주가 되려는 자이다.이외에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이 속한 교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성경해석에 있어서 자신의 해석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운운 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의 범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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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7-08
  • 교계의 ‘연합단체’와 ‘연합기관’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면 한국기독교는 교파주의 교회로 정착했고, 거기에 또 같은 교파 안에서 수 많은 교단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 1905년부터 장로교 4개 선교부와 감리교 2개 선교부가 협의체를 구성해 연합공의회를 구성했고, 1924년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창립했다. 이 공의회는 다시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1945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바뀌었다가,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되었다. 당시에는 한국기독교의 유일한 연합단체였다.이후 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지면서 정치적 이유와 함께 진보적 성격을 가진 NCCK를 견제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현재 한국기독교교단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을 창립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또 다른 성격의 교단연합단체들이 우후죽순 나타난 것이다.그리고 이들 연합단체에서 공익적 목적을 위한 연합기관들을 설립했는데, 선교사 공의회가 만든 대한성서공회와 대한기독교서회, NCCK가 설립한 기독교방송(CBS)과 대한기독교교육협회(2015년 소멸)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한국기독교의 공익기관이다.그외 교계의 수 많은 각종 ‘기관’들은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교계의 공익기관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이다.그런데 교회연합운동에서 연합단체와 연합기관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모두 ‘연합단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연합단체는 이익단체가 아닌 순수한 협의체를 이르는 말이고, 연합기관은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이익단체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기구의 성격은 구분되어야 한다.한국교회는 연합기관은 그래도 분열한 편이 아니지만, 연합단체는 분열이 매우 심하다. 메이저 단체인 한기총은 ‘한교연’으로 분열하고, 마이너 단체인 ‘예장연’ 등은 아예 몇 갈래로 나누어지는 등 심각한 분열현상을 보이고 있다. 교단연합운동과 함께 이들 연합단체들도 합동하는 기운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한국교회에 힘이 실리고 대정부나 대사회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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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7-01
  • 기독교 대변 ‘세속언론’ 육성 논의해 볼만
    인류사에서 현시대만큼 언론의 역할이 증대된 때는 없었다. 인류사회가 지금 누구나 어디서든 실시간 정보를 시시각각 접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문에서 방송으로, 방송에서 인터넷으로 발전해 온 매체가 이루어놓은 언론의 쾌거이다. 세계가 한 마을처럼 언론을 통해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언론의 역할을 중시해야 한다.기독교계에는 케이블 TV와 위성방송, 라디오 방송, 인터넷방송 등이 있고, 또 기독교를 대변한다는 일간신문도 있다. 그리고 100여 종에 이르는 주간신문(격주간 등 포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1개의 라디오 방송과 1개의 일간신문 만이 ‘일반언론’이고, 나머지는 모두 ‘종교언론’으로 분류된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이나 신문 등의 기사에 있어서 그 편집, 보도 내용이 대체로 기독교 내부 문제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언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리 높지 못한 실정이다.이 시대 기독교언론의 역할과 사명은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보호하는 호교(護敎)와 선전(宣傳)에 있다. 호교는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고, 선전은 내부의 복음을 외부에 전파하는 창의 역활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일반인들에게도 거부감 없는 영향력 있고 제대로 된 기독교언론(세속언론)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사실 지금의 한국교회 정도면 조선, 동아, 중앙일보 수준의 신문이 한 개 정도는 있어야 하고, MBC나 SBS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방송매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가 언론을 지원해야 한다. 대형교회들이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언론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한국기독교는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건이나 또는 교회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목회자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 사람 예외 없이 언론의 중요성을 말한다. 사실 기독교언론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종교언론이 아니라, 기독교를 대변하는 영향력 있는 세속언론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는 논의된 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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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7-01
  • 재림예수는 어린 아이로 오지 않는다
    사도행전 1장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고 했고, 데살로니가서는 주의 재림에 대해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라고 말하고 있다.예수님의 재림은 어머니 뱃속을 통해 어린 아이로 온 초림의 성육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초림에는 태어날 지역과 어린 아이로 오심이 예언되어 있지만, 주의 강림은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 쫓아 만인이 볼 수 있게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어머니의 태를 통해 이 세상에 재림주로 왔다는 인간들은 모두 가짜이다. 한국에도 통일교의 문선명을 비롯, 여러 명의 재림에수가 나타났다. 그들이 한국교회 주변에서 더 많이 나타난 것은 한국사회의 도참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가짜인 것은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갈릴리 사람들이 본 그대로 하늘로 좇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만약에 재림예수가 어느 특정지역에서 초림 때와 같이 어느 특정한 가정에서 어린 아이로 태어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단이다. 처음에 기독교를 표방하고 나선 통일교가 이단인 이유는 재림예수가 동방 한국에서 태어난다는 것이고, 바로 문선명이 재림예수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집단이 혹여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사이비 집단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재림예수는 그런 모습으로 온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런 집단을 마치 정상적 종교집단으로 평가하거나, 기독교적 집단쯤으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수의 초림과 재림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휴거’나, ‘복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 ‘종말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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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6-16
  • 한국교회 왜 침체하나?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70-80년대의 폭발적 부흥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70~80년대의 폭발적 부흥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부흥이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이유로 한국교회 목회현장에서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이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을 상품화 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단감별사들로 인해 목회현장이 성령의 능력을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령운동은 민족복음화란 이름의 상업주의로 변하여 성령의 능력은 곧 돈이 되어 교회를 부요케 했다. 이때부터 교회는 ‘돈이 있어야 선교도 하고, 하나님 다음에 돈이 중요하다’며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땅을 사고, 예배당을 크게 늘리고, 선교지를 확대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돈이 넘쳐 망한 교회는 많아도, 돈이 없어 망한 교회는 없다. 돈이 판을 치니 성령이 활동할 공간이 없게 된 것이다.둘째는, 70~80년대 불같이 일어나던 조용기, 김기동 등으로 대변되던 성령의 능력목회는 모두 이단으로 몰렸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신앙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얼치기 작업적 이단감별사들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오늘날 성령에 의한 기적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즉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님의 기적은 없다는 기적종료론을 믿는 이성주의자들이다. 총회는 이들의 직업적 농간에 놀아나 무고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기를 꺾었다. 그로인해 약삭빠른 젊은 신학생들은 ‘우리 총회가 그런 신앙운동은 이단으로 본다’며 창의적이고 다이나믹한 성령목회를 외면했다.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재능에 의지해 목회를 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매말라 분쟁과 갈등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노회와 총회는 교권주의자들의 패거리 정치로 집단화 하고 있다. 여차하면 교인들이 담임목사를 고소하고, 노회나 총회에서 동료간의 사소한 분쟁도 사법당국으로 끌고 간다. 아무도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니 한국교회에서 성령이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부흥을 기대한다면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야 한다. 특히 이단감별사들의 무분별한 이단시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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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6-16
  • ‘화해와 용서’가 배아픈 사람들
    '기독교이단대책협회'라는 교계에 생소한 단체가 중심이 되어 예장통합측의 제100회 총회의 역사적 사업을 비판하고 나섰다. 남 잘하는 일에 배아픈 사람들의 못난 짓이다. 통합측 총회는 ‘화해와 용서’라는 제100회 총회의 주제에 따라 총회 결의로 총회특별사면위원회를 설치하고, 교단 내의 권징으로 책벌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면과, 이단 시비로 통합측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면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합당한 절차가 있다.그런데 통합측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단체들이 모여 통합측의 이 역사적 사건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주제 넘게 예장통합 총회를 향해 ‘즉시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또 통합측 제100회 총회 1500명의 총대들이 한 사람의 이의없이 통과시킨 특별사면위를 ‘조사하여 엄단조치’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통합측 총회를 어떻게 보고 이런 요구를 하고 나섰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교회를 향한 통합측의 ‘화해와 용서’라는 제100회 총회의 큰 역사적 사역을 훼손하는 일임에는 틀림 없다. 그것도 통합측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이단시 하는 합동측 총회장을 지낸 목사와 합신측 소속 목사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외에는 모두 미주에서 활동하는 목사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작금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는 실종되고 분열과 갈등이 첨예화 하고 있다. 여기에는 직업적 이단감별사들의 무분별한 이단시비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장통합측 총회는 이런 모순을 극복해 보고자 특별사면위를 설치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를 높이 평가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이를 훼방하고 나서는 것은 무슨 심보에서 나오는 것인가?솔직히 통합측의 특별사면위는 ‘진짜이단’을 사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단감별사들이 사소한 문제를 트집잡아 이단으로 정죄한 사람들 가운데 통합측의 지도를 받아 한국교회와 함께 가고자 하는 자들을 사면이란 절차를 거쳐 한국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를 비난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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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6-10
  • 돈에 미친 사회
    사회학자 토마스 홉스는 돈이 자본주의의 신 ‘레비아단(리워야단)’의 피라고 불렀다. 돈이 숭배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돈은 '경제의 피'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돈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윤리와 도덕이 있어 시장의 가치나 규칙이 미덕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돈에 미친 사회는 이 윤리와 도덕이 결여돼, 결국 돈이 ‘죄’가 된다. 근래에 한국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부정부패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숭배 대상(돈)에 대한 윤리와 도덕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재벌은 재벌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공직사회는 공직사회대로, 심지어 나라를 지키는 군(軍)까지 돈에 미친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사건도, 최첨단 방탄복을 개발해 놓고도 불량 방탄복을 납품받은 군납 비리도, 돈을 노린 정피아니 관피아니 하는 부패세력의 로비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다. 탐욕의 우상에 빠지면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돈을 쟁취하려는 ‘돈의 종’이 된다. 돈이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되는 것이다. 돈 몇 푼에 사람을 죽이고, 돈이 형제와 가족간의 신뢰도 파괴한다. 그러므로 돈이 우상이 된 사회에 사는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다. 우리사회가 GDP 3만불 시대에 이르고도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살율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심지어 우리사회의 종교마저도 기복주의에 빠져 돈에 미쳐 있다. 옛 사람들이 맘몬(Mammon)이라고 부른 유사신(類似神) 돈이 어느덧 최고신(最高神)의 자리에 앉아 돈을 위해 생명도 걸고 순교도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타락이다. 이런 사회를 누가 치유할 수 있는가? 그래도 그 해답은 종교에서 찾아야 한다.이제 교회만이라도 정신을 차려 교회 강단에서 돈에 대한 윤리와 도덕을 설교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을 책망해야 한다. 그들의 십일조에 눈이 멀고, 교인 한 사람 떠날까봐 그들의 눈치를 보는 목회는 실패한 것이다. 그런 종교는 진짜로 우리사회에 ‘아편’에 지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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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6-10
  • 동성커플의 혼인신고 각하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지난 25일, 동성결혼을 한 후 자신들의 혼인신고를 거부한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을 낸 영화감독 김조광수씨 커플의 소송을 각하했다. 법원은 “시대적 사회적 국제적으로 혼인 제도를 둘러싼 여러 사정이 변화해 왔지만 혼인이 기본적으로 남녀의 결합 관계라는 본질에는 변화가 없었고, 일반 국민들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며 각하 이유를 밝혔다. 올바른 판단이다.성경은 동성애를 타락한 성문화로서 심각한 사회악임을 규정한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지니라”(레 20:13).동성애는 인류의 타락으로 생겨난 죄악이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잠재해 있다가 사회 도덕질서가 문란해지고, 사회악이 만연하게 되면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된다. 현 시대에 동성애의 결정체로 나타나고 있는 동성결혼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동성결혼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다. 결혼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면 인류사회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 보다 더 먼저 나라를 지킬 사람도 없게 되고, 생산을 해 사회를 지탱할 후손도 없는 것이다. 자기들만 좋으면 그것으로 되었지 인류사회의 존속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는 자들이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명백히 죄악이라고 선언한 동성애를 언필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기독교계에서조차 두둔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얼마전에는 NCCK에서 김조광수를 초청해 동성애 선전장을 만들려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항의로 무산되기도 했고, 소명을 받았다는 신학생들이 동성애를 옹호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도전행위이다. 성경은 말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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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6-01
  • 이단 문제 교회사의 교훈 얻어야
    기독교는 캐논인 성경과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더라도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면 정통 기독교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성경과 삼위일체 교리를 가감 없이 믿는 데도 ‘이단’으로 공격받는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교주우상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결코 이단일 수는 없다. 성경과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또 교주우상주의가 없는 데도 ‘이단 운운’ 하는 것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런 상식밖의 이단 시비를 예사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단감별사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들 중에는 소위 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도 있고, 교회사가로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교회사에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단으로 몰려 죽은 사건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도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최근 한 신학자가 쓴 ‘위대한 이단자들’에는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으로 몰려 죽거나 박해를 받은 사람 가운데 역사적 기독교를 바로 세운 수 많은 인물들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도 바울, 플라비우스 저스틴, 피터 왈도, 존 위클리프, 롤라드 신앙운동자들, 얀 후스,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마르틴 루터, 울리히 쯔빙글리, 존 칼빈, 존 낙스,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정통을 자부하던 당대의 교회로부터 사악한 이단으로 지목된 이단자들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는 이들에 의해서 그 정통성을 확립하고 오늘날까지 바른 신앙을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사욕을 앞세운 이단들의 공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 주로 교주우상주의를 가진 집단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이단대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가짜 이단’을 많이 양산하고 있는 때문이다. 교주우상주의도 없고, 교리적 이단성도 없는 집단을 향해 무차별 이단 시비를 하는 이단감별사들 때문에 이단 문제가 희석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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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6-06-01
  • 기독교는 다양성의 종교
    기독교는 우주적 종교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지배하시며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중보자로 성령을 보내사 다양한 모양으로 인간의 삶을 인도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다양성의 종교이다.그런데 중세 기독교는 가톨릭이라는 교권체제를 갖추고 통일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기독교의 다양성은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고 벌어져 수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종교로 바뀌버린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가르침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단이 정통을 탄압한 것이다.기독교의 다양성은 종교개혁 시대에도 인정받지 못했다. 다양성을 주장한 개혁자들 또한 탄압을 받았다. 체포되어 불에 타 죽거나 교수형 당했다. 개혁세력을 따르던 교도들도 수만명, 수십만명씩 한꺼번에 학살당했다. 오로지 죄목은 하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러면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가르침만이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한 진리인가. 아니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개혁파가 볼 때는 로마 가톨릭이야 말로 이단적 요소를 많이 안고 있는 교권집단이었다. 그런데 왜 개혁파가 이단으로 몰려 죽어야 했는가. 그것은 정치권력과 손을 잡은 가톨릭의 교권이 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 시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통합측을 비롯한 대교단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정체(政體)를 절대시 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다른 교리체계를 갖거나 다른 정체를 가진 집단을 향해 끊없이 이단 시비를 해댄다. “어떤 교파 또는 어떤 교회든지 교회의 정치조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다”는 장로교 정치 원리를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현대교회가 에큐메니칼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연합과 일치의 정신으로 기독교의 ‘하나’됨을 추구하자는 데 있다. 한국교회도 에큐메니칼 정신이 약화되면 다양성도 무시된다.
    • 연지골
    • 사설
    201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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