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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의 달에 보는 가장의 소망
    요즘 인터넷에는 ‘앞으로 살 날이 1년 밖에 안남았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꿈과 돈 5억원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는 청소년들과 가장(家長)들의 의식조사 내용이 떠있다. 청소년들은 모두가 꿈을 택했다. 꿈을 이루고 5억은 벌면 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 훌륭한 대답이다. 청소년들이 꿈을 포기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그러나 죽기 전에 꼭 해고 싶은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 질문에, 아버지들은 대부분 꿈이 아니라 5억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그 5억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자신은 돈이 없어서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식들이라도 그 꿈을 이루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우리사회 부모님들의 정신세계는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주제이다. 많은 소시민적 부모들은 누구나 이제 내 때는 지나갔으니, 자식들이나 제 꿈을 이루며 살기를 바란다. 이것이 책임감 있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또 다른 우리사회의 한 모습도 접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일그러진 모습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문제가 결국은 사회적 짐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이제까지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그 자식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 왔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그러한 부모 자식간의 사랑의 정신이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번 의식조사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있다는 우리사회 아버지들의 한결같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천륜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변천에 따라 문화적 현상이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미풍양속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가정의 달이 핵가족화 해 가는 우리사회에서 가족간 유대와 친목을 도모하고, 부모님들의 정신과 가풍을 이어가며, 유산과 유지를 받드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을 비롯하여 지자체 등에서도 그런 방향의 문화적 행사를 많이 준비해 가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05-15
  • 한국인의 행복순위
    작금의 한국인은 어느 때보다 좋은 집에다, 집집마다 자동차를 한두 대씩 가지고 있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살지만 행복하지 않다.미국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지난달 유엔지정 ‘세계 행복의 날’(3월 20일)을 맞아 세계 143개국의 행복 순위를 공개했다. 한국인의 행복감은 59점으로, 이스라엘과의 긴장으로 매일 불안에 떠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115위였다. 오히려 매일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101위)보다 훨씬 낮았다.이번 갤럽이 조사한 개인의 행복감은 ① 어제 잘 쉬었는가. ② 존중받았는가. ③ 자주 웃었는가. ④ 재미있는 것을 배우거나 했는가. ⑤ 얼마나 즐거웠는가 등을 물어 이 답에 점수를 매겨 수치를 산출한 것이다. 이 물음은 지극히 소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이다.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적었을까. 이유는 경쟁심 때문이다. 경제발전으로 잘 먹고 잘 살면 국민행복지수(GNH)도 높아질줄 알았는데, 왜 2만5천불 시대에 이른 개인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사회 구성원의 경쟁심이 경제를 발전시키고 물질적 풍요는 가져왔지만, 개인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한 탓이다.개인의 행복감은 종교적 신념에서부터 온다. 그러나 한국인의 종교는 철저히 기복주의여서 종교가 오히려 개인의 욕망을 부추길 뿐, 소시민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구원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 역시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에 빠져있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인도하신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 국가인 부탄이 행복한 나라이고, 철저한 인종적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도인들이 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저들의 신앙의 힘이다.어느 사회나 가정이 행복하고 자식이 잘되고 무병장수하며, 재물과 부귀와 출세를 바라는 현세적인 기복행위는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이 현세적 삶의 조건을 떠나 구원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곧 주님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한 의미이다. 한국교회 6만 강단에서 기복주의를 몰아낼 때, 비로소 한국인의 행복순위가 높아질 수 있다.
    • 연지골
    • 사설
    2015-05-08
  • 바른 신앙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역에 있어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이다. 이 비밀이 때가 차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류의 정신세계를 논하는 세속적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복음’이고 ‘생명’이다.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을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행(信行)의 일치라 한다. 여기에서 신(信)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고백, 즉 교리의 문제이고, 또 행(行)은 우리가 믿는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삶, 즉 가치관의 문제이다. 이 둘이 바르게 나타날 때 그 신앙은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교리는 바른데, 신도들의 생활이 바르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는 그가 믿는 신앙은 정통이라 하더라도 삶의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종교는 힘을 잃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반면에 성도들의 삶은 도덕적이나 그 교리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 역시 사이비 종교가 되어 오래지 않아 소멸해 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신행의 일치를 이룰 때 건강한 신앙이 된다.혹자는 신앙실천을 강조하면 ‘행위 구원’ 운운하며 비난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은 정통을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나라나 사회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머리와 입으로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론신앙만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신행이 바른 신앙인들을 비난한다. 이는 모순이다.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삶의 현장에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내가 믿는다 하면서도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허상일 가능성이 많다.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 연지골
    • 사설
    2015-05-08
  • 안식일교회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삼위일체 교리나 교회론 등이 다르지 않은 데도 이단으로 몰리는 교회들이 있다. 정통파 교회 제도나 운영 형태를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주우상주의나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달리 해석하는 집단이 아닌 한, 그 교회의 제도나 예배 형식 따위를 문제 삼아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성찬이 행해지며, 성도의 교제가 있으면 그것은 곧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교회 운영 형태가 다르다고 하여 이단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지난 주 안식일교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포럼이 있었다. 발제자들은 안식일교회가 성경과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며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오히려 안식일교회가 기독교의 가장 보수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교회는 역사적 보편적 기독교의 역사를 대체로 부정한다. 로마교회가 교황주의를 채택한 이후 교리를 왜곡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일교회)는 역사적 기독교의 ‘일요주일예배’를 부정하고 ‘토요안식일예배’를 채택하고 있다. 또 전통적 보편적 기독교가 믿어온 ‘영혼불멸설’을 부정하고 ‘영혼멸절설’을 따르고 있다. 이는 가톨릭의 비성경적 교리를 개혁한 개신교도 아니고, 초대교회로 돌아간 환원파도 아닌, ‘제3의 교회’임은 분명하다.그러나 예배일을 주일을 중심으로 하든, 안식일을 중심으로 하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안된다. 그리고 영혼불멸설이냐, 영혼멸절설이냐 하는 것도 ‘부활신앙’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의 대상일 뿐이다.그런데 안식일교회의 문제는 가톨릭교회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개신교회마저도 형제로 여기지 않는 듯한 위험한 발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론에서 볼 때, 이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피 아래 있는 자는 모두 ‘하나’의 형제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범죄이다. 성경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22).
    • 연지골
    • 사설
    2015-04-23
  • 기독교 기업윤리의 실종
    기업활동의 비리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경남기업의 성완종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회장은 교회의 장로이기도 하다. 성 전 회장은 거기까지 이르게 되기까지 정관계에 수많은 인사들에게 자신의 구명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도우려는 사람은 없었다.성 전 회장은 교회의 장로이면서도 기업경영윤리는 기독교인답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사람과 돈에 의존했다.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수천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돈을 뿌렸다. 물론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먼저 나서서 돈을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성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정관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권력에 붙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성 전 회장은 그들이 자신의 기업경영에 울타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같이 외면하자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성 전 회장은 기독교인 기업인으로서 착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적 기업윤리를 확립하지는 못한 것 같다. 기독교적 기업윤리를 확립하지 못한 기업인이 어찌 성 전 회장 한 사람뿐이겠는가?재계에는 장로기업인들이 많이 있다. 과연 이들에게 기독교적 기업윤리가 있는가? 어떤 이는 불법로비자금을 만들어 뇌물을 쓰고, 어떤 이는 탈세로 기업을 키우려다 검찰 조사를 받기도 한다.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청지기라고 부른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집의 곳간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개교회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도 하고, 봉사를 했을 수 있겠지만, 교계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기독교인 기업인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근검절약하면서도 사회와 교계를 위해서 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세계 에큐메니칼운동의 본산지인 스위스 보세이훈련원은 1945년 록펠로가 평신도 운동가인 빅터 호프스 박사에게 당시 100만불을 지원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세계 냉전시기에는 이 기관을 통해 세계교회가 만났다.한국의 기독교인 기업인들은 정치권에 로비를 하여 기업을 키울 줄은 알지만 교계를 위해 선뜻 기부할 줄은 모른다. 청지기적 기업윤리의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다.
    • 연지골
    • 사설
    2015-04-23
  • 한 기독교인 기업인의 죽음
    해외 자원개발 비리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아오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대기업 회장은 교회의 장로였다. 대기업의 회장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겠는가 마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선택해서는 안되는 죽음이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 친분있는 한 목회자를 만나 자신이 정 관계 인사 약 100여명에게 150여억원의 돈을 뿌렸다는 증언을 했고, 또 구체적 액수를 적은 사람들의 실명을 밝힌 쪽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우리사회에서 기업을 유지하려면 정 관계 인사들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돈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들에게 보험을 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정부의 부패척결로 자신이 표적수사의 대상이 되자 이들에게 구명을 호소했으나 외면당했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들의 이름을 밝히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 기업인이 뇌물로 기업을 보호하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 모든 기독교인은 청지기이다. 비록 세속기업을 경영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청지기 정신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사람을 입은 기독교인의 신앙 실천이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면 이는 이중적 신앙인이다. 신앙은 곧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기독교인 기업인이 탈세나 이중장부로 정당한 세금을 탈루한다면 이것은 세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범죄이다. 만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 4항에는 "모든 성도들은 위정자들과 정부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세금과 기타 공과금을 납부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정부의 합법적인 명령에 대하여 양심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국민의 정직은 사회적 자본이다. 정직하지 못한 사회는 언제나 불안과 분쟁에 휩싸인다. 기업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설교자들은 정직한 기업인이 성공한 사례를 기회있을 때마다 역설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이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 2"21).
    • 연지골
    • 사설
    2015-04-16
  •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공하려면 통합측이 바로 서야
    에큐메니칼 정신만이 세계교회가 살 길이라고 믿는 예장통합측은 1959년 합동측과의 분열이라는 커다란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세계교회와 함께 에큐메니칼 노선을 견지해 왔다. 기독교는 2천년 역사에서 정통과 이단의 오랜 시비 끝에 20세기에 들어 에큐메니칼 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각 교파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교파 간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데 있다.통합측은 그러한 에큐메니칼 정신에서 로마 가톨릭도 용인한다. 로마 가톨릭은 십계명을 변조하여 사용할 뿐 아니라 화체설, 교황무오설, 연옥설, 마리아 승천설 등 성경과 전혀 관련없는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믿는다는 이유로 ‘교리는 다르지만, 다른 전통을 가진 교회’라며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넓은 신앙적 아량을 가진 에큐메니칼 교단인 통합측이 왜 같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표현만 조금 달라도 가차없이 이단 시비를 제기하는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통합측의 행태이다. 통합측은 80년대 이후 60여명이 넘는 인사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그것도 덩치가 큰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감히 건들지도 못하고, 만만한 군소교단 소속 목회자들만 이단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이는 대교단의 교권의 횡포 외에 다르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이단 논쟁을 ‘동물의 왕국’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포식자들이 높은 곳에서 짐승떼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리에서 이탈했거나, 나약해 보이는 놈을 골라 끝까지 공격해 쓰러뜨리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뜯어먹고 마는 동물의 왕국 말이다.지금 한국교회 주변에는 심각한 이단의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주우상주의와 교리적 이단 집단들이 자기네도 성경적인 정통이라며 설쳐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이단대책이 겉도는 것은 걸핏하면 엉뚱한 이단 시비를 해대는 통합측 같은 교단이 있기 때문이다. 통합측의 이단감별사들이 통합측 교단만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04-09
  • 독생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품 속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인카내이션(Incarnation), 즉 성육신(聖肉身)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장 근본교리에 해당되는 이 ‘독생자’에 대한 오해가 깊다. 흔히 ‘독생자’(獨生子)를 ‘외아들’로 오해하는 일이다. 사도신경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가 좋은 예이다. ‘독생(자)’는 헬라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ηV)이다. 여기에다 아들이라는 휘오스(υι´οV)를 붙이면 ‘외아들’ 혹은 ‘독자’로도 번역된다. 누가복음 9장 38절에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누가복음 7장 12절에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라고 한 것이 그 예다. 같은 모노게네스를 쓰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그 ‘독생’과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독특하게 나신 분이다. 이를 니케아 신조는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라고 했다.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외아들’로 오해해 이삭과 같은 ‘독자’로 보기도 하고, ‘맏아들’로 오해해 세상에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맨 먼저 나신 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서 8장 29절에 “이는 그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장 6절에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등을 인용한다.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은 “양자(養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자격을 얻은 것이지”, 독생하신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와 같은 동격은 아니다. 독생자를 맏아들로 보는 자들은 성도들을 신성을 가진 그리스도의 동생쯤으로 보는 위험한 이단설과 접하게 된다.
    • 연지골
    • 사설
    2015-04-09
  • 부활, 설교의 중심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게 달린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 기독교는 이 역사적 순간을 통해 부활의 복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로부터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겁없이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의 제자그룹은 모두가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이었다. 어부와 세리와 장사꾼들, 그리고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힘 없고 빽 없는 그 시대의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 그들은 세상이 겁나지 않은 특별한 존재들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지극히 소시민에 불과했던 촌무지랭이들이 세상을 바꾼 주역이 된 것이다. 대관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세상에서 한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사건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이 인류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잘 몰랐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실감한 것은 오순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이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모두가 예수 부활의 증언자들이었다. 역사적 교회는 예수 부활을 증거하고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해온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국가 권력과 맞물려 권력집단으로, 종교화 된 교권집단으로, 지극히 샤마니즘적인 기복집단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설교자의 그 많은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부활절 한 주에만 겨우 선포될뿐, 예수님은 부활의 주(0)가 아니라 만사형통의 주(0)로 둔갑되고 있는 것이다.예수의 부활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우리 시대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증언되거 체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설교가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예수 부활의 증언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을 설교하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의 임재도 함께 하신다.
    • 연지골
    • 사설
    2015-04-02
  • 북한선교사역 선교사 관리 허점 많다
    최근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또는 한국계 외국인들 가운데 북한선교와 관련된 선교사들이 많다. 임현수목사는 캐나다에서 북한선교를 위해 수년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온 사람이고, 이번에 북한에서 간첩으로 몰린 김국기목사도 합동중앙총회에서 파송된 단동주재 선교사이다. 그 이전에도 북한에 복음을 전한다며 들어갔다가 억류되어 개인뿐 아니라, 관계 정부까지 어렵게 만든 사례들이 여러번 있었다. 이들 중에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북한의 정보원으로부터 속아서 북한으로 갔을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개인적 영웅심이나 사명감에서 북한에 들어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왜 그들을 억류하고 심지어 간첩으로까지 몰고 가는가?임현수목사는 수년간 북한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미 교포사회에서는 친북주의자로 오해받을 만큼 북한을 수차례 방문하고 필요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해왔다. 임목사는 순전히 목사의 사명감으로 동족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김국기목사는 단동에 주재하며, 성경 보내기와 북한의 지하교회를 지원하고, 단동에 탈북자 쉼터를 운영하는 등 이 역시 어려운 북한 인민을 도우기 위해 애써온 사람인데, 2년전부터 소식이 끊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마도 김목사는 이미 그때부터 북한으로 넘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북중 국경지역에서 북한 사역을 하다가 어떤 모양으로든 북한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죽임을 당한 선교사들이 여럿이다. 한국교회가 북한사역 선교사들의 활동을 이대로 방치하다간 더 많은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 북중 국경지대에서 북한 선교를 하는 선교사들은 대체로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할 것을 당부한다. 개인의 사명감만 앞세워 천방지축 나서면 누군가 그 뒷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선교사가 지혜롭지 못해 일을 벌여놓고 또다른 사람이 고생하는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철저한 북중 지역 선교사 관리가 요구된다. 특히 교단이나 선교단체에 적을 두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유의해야 한다.
    • 연지골
    • 사설
    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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