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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언론의 기능
-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국정과제는 오로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다. 정치권의 위협이 되는 검찰은 '검수완박'으로 손발을 꽁꽁 묶고,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언론은 ‘가짜뉴스’로 몰아 징벌적 처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여당은 언론의 비판 기사가 오르면 자신들이 뭘 잘못한 것인가 돌이켜 볼 생각은 않고, 오로지 언론을 통제하고 규탄하려고만 한다. 그러는 동안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민주당도, 청와대도, 정부도 망가져 가는 줄은 모른다. 지금 국민의 여론은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30% 대로 내려앉고(최근 리얼미터 38.3%),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도 20% 대(29.7%)로 야당인 국민의힘(38.0%)에 뒤지고 있다. 한국기독교계에도 집권여당과 똑같은 짓을 하는 교단이 있다. 예장통합측의 경우이다. 한국기독교에서 그래도 진보진영을 대변한다는 에큐메니칼 교단을 자처해온 통합측은 자신들의 교세만 믿고 수없이 많은 타교단 인사들에 대해 ‘이단시비’를 해왔다. 자기네 교단과 신학이 달라도 이단, 신앙 형태가 달라도 이단,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아도 이단, 귀신을 쫓아내도 이단으로 몰아 교계를 분열시켜 왔다. 통합측의 이런 황포를 보다 못해 ‘이건 아니라고 봐’라고 몇 마디 지적하는 교계언론이 있으면 가차없이 ‘이단옹호언론’으로 매도하고, 총회 결의라며 아예 교단 행사에 그 언론의 기자의 출입을 막고 보도자료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통합측은 교계에서 왕따가 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언론은 그것이 사회적 기능이든, 교계적 기능이든 그 사회의 거울의 역할을 한다. 그 거울에 비친 피사체가 더럽게 보이면 거울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 피사체 자체가 더러운 것이고, 깨끗하게 보이면 그 피사체 자체가 깨끗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당도 교단도 자신의 얼굴이 더러워져 있는 줄은 모르고 거울 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꼴 보기 싫다’며 그 거울을 깨뜨려버리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에 묻은 더러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울에 비친 더러워진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고 깨끗이 닦고 다시 거울 앞에 서면 되는 것이다. 정부도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거울은 다만 거울일 뿐이다. 언론을 탓한다고 자신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홍보든, 비판이든 언론 기능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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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언론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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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매년 늘어나는 ‘예장 교단’
- 교회연합신문이 매년 발간하는 ‘교회연합주소록’ 2021년 판에는 271개의 교단이 등재되어 있다. 그 중에 220개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이다. 예장교단이 처음 하나의 총회를 결성한 것은 1912년이다. 예장은 1938년 일제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이 원죄가 되어 해방과 함께, 1952년 신사참배 반대파(고신측)의 분열로부터 시작해 1953년 기장측의 분열,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 그리고 1979년 합동측의 ‘주류측’과 ‘비주류측’의 분열이 가져온 결과가 오늘날 220개 예장교단간판이 내걸리는 참으로 부끄럽고 놀라운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외에도 주소지를 확인 못해 누락된 교단이 여럿 있다. 그런데 이 220개 교단은 개혁주의 칼빈주의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하는 그 신학과 신앙이 동일하다. 그럼에도 무지하고 어줍잖은 지도자들이 ‘ 저 쪽은 우리 하고 다르다’면서 교단을 따로 차리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신학이나 신앙이 달라서가 아니라, 교단 지도자들의 세속적 욕심으로 인한 타락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그것도 예장교단 220개 가운데 기껏 20여 개 교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단 설립자가 노망이 들거나 관 속에 들어가는 날까지 평생 총회장을 하는 군소 1인 독재교단이다. 그래도 그들이 교계연합단체에 가입하여 정통성 가진 대교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국교회를 논한다. 그러다보니 연합과 일치를 논하는 연합단체가 교단분열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있다. 코로나 정국인 금년에도 몇 개 교단이 더 늘어났는데, 교단 창립과 동시에 ‘교계연합단체’에 가입해 임원이 된다. 그 단체의 임원 명함 한 장 들고 다니기 위해서 자기네 끼리 교단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본은 전혀 다르다”는 뜻의 사이비(似而非)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이비’적 현상을 한국장로교회 지도자들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교회가 아무리 다양성을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이 달라 갈라지는 ‘교파’(敎派)가 아니라, 신학과 신앙이 똑같은 ‘교단’(敎團)을 갈갈이 찢어놓는 행위는 비윤리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비신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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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매년 늘어나는 ‘예장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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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어처구니 없는 교단 분열의 명분
- 한국기독교는 교파주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그들 교파에서 갈라진 교단까지 300여 개에 이른다. 교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가장 심각한 분열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이다. 어떤 공동체든 그것이 분열하면 그 집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대내외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해 있다는 약점이다. 그런데 이 장로교 교단분열의 명분이 참으로 희안하다. 신사참배 문제로 갈라진 고신측과 신신학적 문제로 갈라진 기장측을 제외하고, 예장의 분열에는 모두 WCC나 NCCK가 등장한다. WCC는 1948년 결성된 국제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를 이르는 말이고, NCCK는 1924년 한국기독교의 유일한 교단연합체로 결성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 이어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기반을 둔 순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1970년 개명)를 이르는 말이다. WCC는 세계 1,2차 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무고히 희생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세계교회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는 자괴감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뭔가를 해 보자고 모인 세계 교회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참여한 한국교회는 예장통합, 기장, 기감, 한국성공회로, 단 4개 교단 뿐이다. 한국교회의 300여 개 교단 중에 단 4개 교단만 가입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WCC가 생기기 전부터 한국교회를 대표해온 NCCK에는 예장통합, 기장, 기감, 성공회, 복음교회, 루터교, 기하성, 한국정교회 등 단 7개 교단만 가입해 있다.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예장쪽 인사들은은 교단을 새로 만들 때마다 'WCC와 NCC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는지 알 수 없다. 솔직히 한국교회에서 교단 따로 차례 나가는 그들에 대해 WCC나 NCC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예장 소속 목회자들 중에 막상 WCC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다. 대부분이 '용공주의'니, '종교혼합주의'니, '동성애 지지'니 하는 남들의 비난에 그냥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WCC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용공주의도, 종교혼합주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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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어처구니 없는 교단 분열의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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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북한의 지금 외교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 북한의 지난해(1920년) 국민소득(GNI)은 우리 돈으로 1인당 141만원이었다. 전년 대비(141만8000원) 약 2만원 정도가 줄었다. 이는 남한의 27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북한의 이 같은 경제 실패는 미국이나 유엔의 제재 때문만은 아니다. 제재 이전에 이미 고난의 행군이니 뭐니 하며 대량 아사 사태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북한 인민들의 목숨을 건 탈북사태가 이어졌음을 세계가 잘 알고 있다. 원인은 북한의 외교 정책의 실패에서 온 것이다. 1945년 해방 후 남북한이 갈라질 때 북한의 경제는 남한 지역보다 월등이 앞서 있었다.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키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대결한 결과가 오늘의 현실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립을 자초하며 인민의 삶을 왜 이토록 피폐하게 방치하는가. 이유는 권력 세습에 있다. 봉건사회의 왕조가 아니면서도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세습 국가는 북한 외에 사회주의 국가 어디에도 없다 북한이 과연 핵과 미사일로 무장했다고 해서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개혁개방 노선으로 외교 경제 정책을 바꾸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대로는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구실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유엔의 회원국이면서도 이미 외교 무대에서 정상적인 국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더 어리석은 정책은 아직도 남한에 대해 적화통일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소득 1인당 141만원으로 그 몇 십배가 넘는 경제대국인 남한을 먹겠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한 남북한의 경제 규모는 갈수록 더 벌어지게 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국가의 국방 안보 어떤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이 사느냐 죽느냐는 핵이나 미사일 개발이 아니라 외교 정책에 달렸다. 북한은 미국의 트럼프 정부 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이제 바이든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어놓느냐에 따라 북한의 미래가 달렸다. 지금의 반미정책과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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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북한의 지금 외교정책으로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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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팬데믹으로 잃은 교인 성경공부로 다시 찾자
- 한국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그 어느 기관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방역당국의 대면예배 금지조치가 교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너무 깊다. 백신 접종으로 금년 하반기가 지나면서 팬데믹 상황이 풀린다 하더라도 교회의 회복은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사실 방역당국이 걸핏하면 교회를 표적으로 옥죄는 동안 세속 언론들의 무분별한 보도는 마치 교회가 코로나19의 진원지 마냥 떠벌여 교회가 너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의 지난 1년간 코로나19 확진자 감염원 발표는 교회발 확진자가 11%로 나타났다. 이조차 모두 교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고 밖에서 전염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여론은 교회발 확진자가 44%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목회데이터연구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방역당국이 만만한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급락했다는 조사도 있다. 그렇다고 팬데믹 이후 그들을 탓하고만 있을 수 없다. 교회의 부흥을 꿰해야 한다. 역사적 교회는 시대마다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이끌려왔다. 하나는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사도들을 부흥현장으로 내몰았고, 중세교회는 성경이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20세기에 시작된 현대오순절 성령운동으로 급성장한 한국교회도 이젠 성경으로 그 내실을 다져야 한다. 특히 팬데믹으로 위축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치는 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다. 먼저 소수 정예에게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 날 교회 안에 한국교회를 살리는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농민운동가 그룬트비 목사가 19세기 후반 덴마크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온 국민이 좌절과 실의에 빠졌을 때,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다사 찾자"며 삼애운동(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땅 사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듯이, 한국교회도 이제 팬데믹으로 잃은 교인들을 성경공부로 다시 찾는 운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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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팬데믹으로 잃은 교인 성경공부로 다시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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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그래도 분열을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 코로나 팬데믹이 남긴 구호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만고의 진리가 무색케 된 것이다. 그러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교회건, 사회건 똑같이 영원히 적용된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둘 다 같은 당에서, 같은 지지자들에 의해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란히 감방에 가서 앉았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은 그 원인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소위 그 잘난 '친이계'와 '친박계' 간의 분쟁의 결과이다. 2017년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고 광화문에서 촛불이 난무했다 하더라도 국회에서 박 대통령 탄핵에 동조한 친이계의 반란이 없었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재판이 있을 수 없고, 박 대통령이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면, 이명박도 감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단 정치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져 있는 한국교회는 오로지 연합과 일치만이 그 답이다. 그러나 교계는 교회협을 비롯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으로 나누어져 대표성을 잃고 연합과 일치는 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해 모임도 가질 수 없으니 교계연합은 그 존재조차도 희미해져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코로나는 이달부터 시작된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면 후반기에는 우리사회가 어느 정도 일상적 활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계 역시 이에 적극적 대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보수교계 연합단체들의 통합이다. 그래야만 팬데믹으로 침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이루어져야 한다.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언필칭 1천만 기독교인을 자랑하는 한국교회 역시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를 향한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 교계를 대표해야 할 연합단체들이 분열한 사이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속 상업언론과 좌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학적 목소리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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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그래도 분열을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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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 6·25 전쟁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이 공산주의자 김일성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략한 침략 전쟁이다. 그런데 중국의 시진평은 지난달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역설하면서 또 다시 역사를 왜곡해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한다. 6·25는 공산주의자들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침략 전쟁임이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중국은 항미원조 운운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싸웠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미국에 대항해 싸웠나? 미국이 언제 중국 땅을 침략했나. 아니면 미국의 트루먼이 모택동을 모욕했나. 대관절 중국은 무엇 때문에 항미(抗美)했다는 것인가? 중국은 민족의 반역자 김일성의 침략 야욕을 뒤에서 부추기고 대한민국의 국민을 160만 명이나 죽음으로 내몬 전쟁을 사과키는커녕 항미원조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백보 양보하여 중국 공산당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에 원조(援朝)를 할 이유가 있었다면 3.8선 이남은 넘어오지 말았어야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목표로 김일성의 인민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신생 대한민국을 쳐들어 온 자들이 중국 공산군이 아니고 누구인가. 그래놓고 항미원조라는 요상한 조어(造語)로 역사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중국 고안당 이런 비툴어진 역사인식에 대해 항의하고 바른 인식을 갖도록 요구해야 한다. 솔직히 전쟁 후에 중국의 원조 아래 있던 북한은 어떻게 되었나? 대한민국이 70년 만에 3만 불 시대를 여는 동안, 북한은 3대 세습을 거치면서 한꺼번에 3백만 명이 굶어 죽는 일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아직도 겨우 1인당 1천 불 시대에 사는 지구상 최빈국으로 전락해 인민은 굶주리고 있지 않는가. 그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탈북민이 3만5천여 명에 이른다. 전쟁 직후인 1964년 1인당 GNP가 북한은 194불인데 비해, 남한은 겨우 107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60년 만에 전혀 다른 경제적 구조로 바뀐 것이다. 이것 하나만 봐도 중국이 북조선을 도왔다는 원조(援朝)란 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중국은 북한의 자원을 수탈만 했지 결코 원조(援朝)한 것이 아니다. 북한 인민들은 소위 백두혈통 김일성 일가에만 속고 있는 것이 아니고, 피로 맺은 혈맹이라는 중국에도 속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을 항미원조로 미화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 공산당을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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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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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예배회복의 긴급성
-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매 주일 드리는 예배까지도 ‘온라인예배’라는 생소한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그로인해 주일날 교회당에 가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의무인 것으로 여기던 ‘주일성수’의 개념도 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주일을 성수하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적 기독교인처럼 여겨지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러다가 습관적으로 온라인예배가 고착화 되는 사례들이 생겨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한국교회도 최근 수년간 교파나 교단 상관없이 교회당에 모이는 교인수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여 왔는데, 이번 코로나19 이후 대면예배가 회복되더라도 그 이전보다 개교회 모임이 상당히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명목상의 교인인 노미날리티가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미날리티는 자신은 기독교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교회의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흔히 기독교인은 맞지만 교회에는 ‘안나간다’는 뜻의 ‘가나안’ 교인을 말한다.최근 발표된 독일교회의 경우는 지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 동안에 약400만 명이 줄었다고 한다. 이는 전체 독일 개신교인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물론 이것은 코로나 사태와는 무관한 코로나 이전 통계이다. 유럽교회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우려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교회의 미래가 달린 문제로 읽힌다. 막연히 시간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혜를 모아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한국기독언론협회」와 「한국기독언론법인」이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긴급성을 논의하기 위해 “코로나19 사태와 한국교회의 대응”을 주제로 포럼을 갖는데 큰 의미가 있다. 많은 참여가 요청된다. 이런 움직임이 모여 예배가 회복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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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예배회복의 긴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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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목사는 과연 이단인가
- 한 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한때 보수적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연합단체였다. 이 한기총이 분열하여 이제는 유명무실 하지만 그래도 한기총은 우리사회에서 NCCK 다음으로 기독교 대표기관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지난 9월 장로교 총회에는 이 단체의 수장을 지낸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가 있었다. 예장고신, 예장합신, 예장합동 교단 등에서 전광훈 목사의 이단성 조사가 진행되었다. 청 교도영성훈련원이란 교계 단체를 만들어 일부 목회자들을 움직여온 전광훈 목사는 소위 '광화문 태극기 부대'라는 반정부 투쟁 단체를 대표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방역 지침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부대가 대규모 집회를 계속하자 정부는 전광훈 목사를 공적 1호로 삼고 온갖 억압을 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계도 덩달아 전광훈 때문에 교회 대면 예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비난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 러면 과연 전광훈 목사가 이단인가. 한 마디로 전광훈 목사는 '이단'은 아니다. 한국교회 주변에는 여러 형태의 이단 및 사이비적 집단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요약하면 다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교주우상주의 이단집단이다. 교주우상주의는 그 집단의 지도자를 특별한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경우이다. 둘째는 교리적 이단집단이다. 교리적 이단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이다. 셋째는 신학적 이단집단이다. 신학적 이단은 신학연구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거나 보편적 기독교의 교리와 전통적 성경해석을 왜곡하는 경우이다. 그 러면 전광훈은 이 셋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가. 그는 교주도 아니고, 교리적 이단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단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그의 행태에는 다분히 '사이비적' 요소가 있다. 그의 발언과 행동에는 어떤 형태의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당 창당, 이승만 영화, 선교은행 등등, 심지어 한기총 대표회장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공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사랑제일교회와 자신이 중심에 있었을 뿐이다. 즉 전광훈 목사는 보편적 한국교회라는 공교회적 개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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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목사는 과연 이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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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영어에서 '크리스챤'(Christian)이라고 한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에 'ian'이라는 어미가 붙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크리스챤의 삶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으로 죄로 인해 영적으로 해방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이 존중되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즉 크리스챤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전하는 것이 그 사명이다. 그것이 종교적이든, 문화적이든 인간을 억누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안식일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안식일에도 선한 일을 행하고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 해방시킬 것을 역설하고 있다.예 수님의 사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포로된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또 제자들에게도 온 동네를 다니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였다(마 10:8). 오늘날 목사의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도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정신을 전파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있는 크리스챤은 이 가르침을 따라 세상에서 모든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유를 얻도록 도우는 사명을 받았다. 곧 세상을 바꾸는 사명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복음증거이다. 복음이 증거되면 세상은 반드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세상을 바꾸는 것은 말씀이다. 그 말씀을 가진 크리스챤은 세상에 복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서나 사람들이 복을 받고 살도록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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