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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장통합 장신대, 동성애 강연 책임 물어야
    예장통합측의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최근 동성애 옹호 강연이 총회 결의를 역행하고 일부 재학생들에게 ‘비밀 강연’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져 또 한번 교계를 놀라게 만들고 있다. 강연자는 허호익 대전신학대학교 은퇴교수로 통합측 소속 목사이다. 허 교수는 지난 봄에 ‘동성애는 죄인가’라는 동성애 옹호 책자도 발간해 한국 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제는 통합측 총회가 제102회부터 104회까지 3회에 걸쳐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결의를 했고, 103회 총회는 동성애 신학으로 불리는 '퀴어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장신대가 2018년 5월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사건’에 이어서 이번에 또다시 동성애 강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03회 총회는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동성애자와 동성애를 지지·옹호하는 자는 교회의 직원 및 신학대학 교직원이 될 수 없다”고 결의하고 있다. 그리고 통합측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의 학칙에도 “성경에 위배되는 동성애자나 동성애 옹호자는 입학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반영토록 했다. 그런데 총회의 이 결의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교단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을 상대로 동성애 강연을 한 것이다. 성경은 동성애를 타락한 성문화로서 심각한 사회악임을 규정한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지니라”(레 20:13). 동성애는 인류의 성적 타락으로 생겨난 죄악이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잠재해 있다가 사회질서가 문란해지고, 사회악이 만연하게 되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된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에서 명백히 죄악이라고 선언한 동성애를 언필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수와 소명을 받았다는 신학생들이 그것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도전이다. 총회와 신학교 당국은 반드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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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2-06
  • 교계 연합단체들 너무 늙어가고 있다
    우리사회 고령화 현상이 교계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교회 연합단체 자체가 너무 많이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각종 연합단체 행사에 나가보면 젊은 목회자나 평신도 대표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거의 모두가 60대 이상의 노년층이거나 아예 은퇴한 인사들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여성들은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이대로 가면 수년 내 교계의 많은 연합단체들은 유명무실한 허명뿐인 기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런 현상은 초교파 평신도단체들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개교회에 청장년층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 장로나 안수집사들 중에 4,50대가 많이 있다. 선배들이 이들을 발굴하여 연합운동에 천거하고 참여시켜야 한다. 그들이 경험이 적고 좀 서툴더라도 왠만하면 그들에게 각부서나 임원자리를 주고 은퇴자들은 뒤에서 자문역을 감당함이 옳은 일이다. 그래야 다음세대가 이어져 지도력의 공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세대 문제는 개교회의 청소년 문제만이 결코 아니다. 연합단체들도 다음세데를 걱정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 교계에서 내노라하는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그들이 교계에 얼굴을 내민 때가 대체로 4, 50대였다. 그들의 활동기간이 바로 한국교회 연합운동이 왕성하던 시기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미 70이 훌쩍 넘어 대부분 교회를 은퇴하고 이제는 교계의 연합단체 행사에 간혹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 그런 단체가 창의적인 활동이 어럽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이런 현상은 교단이 장로나 안수집사를 40대로 연령을 올리면서 개교회가 늙은데도 원인이 있다. 이젠 개교회 장로는 40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5, 60대에 이르러 장로가 되는데 그러면 시무장로를 20년도 채우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교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너무 짧은 것이다.오늘날 세계는 3,40대가 총리도 되고 장관도 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오히려 젊은 세대를 교회에서 외면하는 꼴이 되어 교계의 연합단체들도 제대로 된 리더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교계의 연합단체를 운영하는 선배들이 과감히 문을 열고 각 교단에서 후배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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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2-06
  • 종교와 기복
    기복(祈福)은 문자 그대로 복을 비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종교가 있는 곳에는 기복행위가 있다. ‘비손’이나 ‘굿’이나 ‘예불’이나 ‘제사’ 등 모든 종교행위에 기복이 있다. 그것이 소시민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복’과 ‘종교’는 분명하게 서로 구분되는 현상이다. 더우기 ‘기복’과 ‘복음’은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심령이 부한 자, 애통함이 없는 자,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 세상에서 돈과 명예가 있어 내노라 하고 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보다 앞서 한국에 전래된 대표적 고전종교들 마저 모두 기복주의에 의해 그 생명력을 잃고 허명(虛名)만 남아 미신화 되어 가고 있다. 민족 구원의 방주를 자처하는 기독교 조차 그래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복음은 ‘꿩 잡는 것이 매’가 되어서는 안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아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한다. 성도는 육신의 욕망과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복음으로 거듭나 성도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 믿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빽을 빌려 잘 먹고 잘 살려는 세속적 욕심이 생긴다면 이런 신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한국기독교는 결국 민족복음화란 미명하에 새로운 기복집단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세속적 현세적 욕망을 위한 기복주의는 끝없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기복주의는 사람을 계속 좇기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분열과 경쟁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목회자들도 성공주의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인들의 욕망에 영합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의 현세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아래 생각없이 전하고 있지는 않는지… 기독교의 복음은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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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1-25
  • 도덕심
    인간은 생물계의 분류상 동물계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이 같은 동물계에 속하는 여타 짐승과 다른 점은 ‘도덕심’이라는 것을 가졌다는 점이다. 인류사회의 규범은 이 도덕심에서 나온다. 도덕심은 양심에 바탕하고,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을 갖는다. 그래서 도덕심이 부족한 사람을 짐승같은 놈이라고 한다. 사자성어의 인면수심(人面獸心)도 그런 인간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그러면 양심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 장로교 정치 원리 제1조는 양심의 자유를 제1원리로 삼는다. “양심을 주재하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앙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그 양심대로 할 권리가 있으니 아무도 남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양심은 곧 천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신앙은 이 양심의 자유에 바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양심에 바탕한 도덕심을 일깨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최근 우리사회의 분열은 양심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소위 ‘조국사태’라고 불려온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로 나누이는 광화문 집회와 서초동 집회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검찰에 의해 소상히 드러난 조씨 집안의 불법성을 권력주변의 어용지식인들과 여당인사들이 양심을 외면하고 일방적 옹호가 만들어 낸 분열 현상이 지금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 곳곳에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종종 있다. 한 줌도 안되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외면하고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증언을 하여 이웃을 해친다. 양심을 거스리니 자연히 도덕심이 타락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심은 사람에 따라 수정처럼 맑은 양심이 있고, 발바닥처럼 무딘 양심도 있다. 수정처럼 맑은 양심은 세미한 먼지에도 반응하지만, 발바닥처럼 무딘 양심은 왠만한 모래 한 알쯤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우리사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자주 설교해야 한다. 사회적 도덕성이 곧 현대사회의 경쟁력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는 경제도, 정치도, 종교도 제 몫을 감당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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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1-25
  • 종교자유가 없는 사회는 인권도 없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인권의 보장도 없다. 북한은 매년 종교 박해 1위 국가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인권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인권운동단체나 인권운동가들 중에 유독 북한의 종교탄압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을 듣기 어렵다. 왜 그럴까. 그들의 인권운동이 순수한 인권개선에 있는 것이라기 보다 어떤 목적을 위한 정치적 운동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배경이다. 얼마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종교박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백악관에서 만나 북한의 종교탄압을 듣고 심각히 우려했다. 북한은 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만, 실상은 종교 박해가 가장 심각한 나라이다. 미 국무부는 매년 종교적 자유 침해가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국가를 종교 박해 ‘특별우려국’으로 지정하는데, 북한은 매년 빠짐없이 그 명단에 오르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종교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는 나라들, 특히 기독교 박해 국가 10위에는 북한,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카타르, 파키스탄, 에르트리아, 수단이 들어 있지만, 철저한 공산 독재국가인 북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슬람 국가들이다. 당연히 이들 나라에는 인권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 국가들은 샤리아법에 따라 끔직한 인권유린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마치 중세에 기독교 국가에서 벌어졌던 이단심문 또는 마녀재판과 유사하다. 두 말 할 필요없이 거기에도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있었다. 일단 한번 찍히면 인권은 고사하고 절대로 거기서 빠져 나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사회에서 인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최악의 인권유린이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을 비롯한 각국의 종교 박해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사회의 사소한 인권 문제라도 당연히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해야 하지만, 종교 박해라는 인권유린의 거악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히 대처를 해야 옳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가 중요하다. 이처럼 귀하고 중한 종교의 자유가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끊임없이 종교자유를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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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1-18
  • 민족교회로서의 한국기독교
    격변하는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도태(淘汰)되는 것은 기술이나 문명만이 아니다. 정신영역을 지배하는 종교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지난 100여년이 넘는 동안 잘 싸워왔으나 근래에 이르러 이 전쟁에서 번번히 실패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변화와 개혁없이는 어떤 종교든 끝내는 쇠퇴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요즘 세속언론이나 안티기독교가 한국교회를 침소봉대 해 헐뜯는 것은 교회가 우리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스스로 먼저 우리사회가 믿고 지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세속주의를 몰아내고,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 정의, 평등, 자유 등의 개념에 신앙생활의 목표를 고정시켜 가야 한다. 소명받은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종’(從)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종은 세상의 종도 되고 이웃의 종도 된다. 이를 베드로전서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우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2:9)고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기독교가 민족공동체의 구원을 이루는 ‘민족교회’로서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민족의 당면과제를 이루어가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옳다. 첫째는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헌신이다. 나누어진 민족의 통일은 우리시대 교회가 짊어진 사명이다. 기도와 설교와 봉사가 민족통일에 맞추어져야 한다. 둘째는 기독교의 문화적 토착화이다. 무속화 한 민족의 전통문화를 기독교적 문화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국기독교가 500년 혹은 1000년의 민족공동체의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미래 한국교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이다. 교회가 세속주의에 빠져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결코 차질을 빚게 해서는 안된다.
    • 연지골
    • 사설
    2019-11-18
  • 여호와의증인
    요즘 서울을 비롯한 주요도시의 길거리에 보면 “하느님의 이름이 ‘예수’입니까?” “아니다 ‘여호와’입니다”라는 팻말을 세우고 전도하는 여호와의증인 파이오니아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증인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도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편적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증인은 기독교가 아니다.기독교는 초기 박해 시대를 지난 후, 세계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신관을 확정했다. 그것이 ‘삼위일체 교리’라고 불리우는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불리운 ‘성부 하나님’과 성육신 하셔서 예수라고 불리운 ‘성자 하나님’과 보혜사라고 불리운 ‘성령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가졌으면 기독교이고, 삼위일체 신관을 부정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신관과 하나님의 계시를 가졌을지라도 유대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고 여호와의증인은 성경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할지라도 ‘여호와’ 유일 단일신관을 가졌으므로 기독교가 아니다.그런데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 마치 여호와의증인이 성경을 보편적 교회와 약간 다르게 가르치는 ‘기독교의 일파’로 알고 동조하는 경우가 있다. 인천에 살던 장로교의 한 장로는 여호와의증인에 들어가 자녀들에게 여호와의증인 신앙을 전수하여 자녀들이 군에서 집총을 거부하여 감방살이를 했다. 의사로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그는 장로교의 장로일 때, 노회의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는 등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알고자 애쓴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여호외의증인을 만난 후에 그들의 성경(신천지역)을 배우고 장로교를 떠났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종교를 믿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출될 때는 그 사회적 규범과 충돌할 수 있다. 여호와의증인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증인의 세계통치체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병역과 집총을 거부할 뿐 아니라 병원에서 수혈을 거부하여 우리사회의 사회적 규범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는 잘못된 신앙이다.
    • 연지골
    • 사설
    2019-10-23
  • 종교개혁 502주년에 붙여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여러 기념행사들이 있었다. 이번 주는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간이다. 세계교회는 이번 27일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킨다. 그러나 지난해 500주년을 기념하느라 힘을 많이 빼서 그런지 금년엔 이렇다할 특별한 행사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신교도(新敎徒)들은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다면 종교개혁을 지난간 하나의 역사 정도로 흘러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1517년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독일의 루터파는 그래도 운좋게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비교적 빠른 기간에 그 신앙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개혁파와 장로파 교회들은 단순히 성경적 신앙을 회복해 잘 믿어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이단으로 몰려 끔직한 고문 끝에 죽어갔다. 따라서 우리의 신교(新敎) 신앙은 수백 만명의 생명을 희생하고 쟁취한 신앙이다. 더욱이 한원주의 교회들은 그 보다 더 오랜기간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이단으로 지목된 신교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가톨릭 교회에서 ‘영성체’만 받아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로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후,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받은 기독교신앙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우리의 이 신앙을 앝잡아보고 ‘너희가 믿는 종교는 개독교이다’라는 희롱과 조롱도 내뱉는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 교회가 어쩌다 이런 터무니 없는 비난을 받는가 하는 자괴감을 갖게 한다. 이는 아마도 우리 교회가 종교개혁 정신에 충실하지 못하고, 세상에 우리의 성결된 삶을 보여주지 못한데서 오는 비판이라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는 저들이 함부로 폄하하고, 조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이미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 개혁신앙을 종교개혁 502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세상과 싸워 이기는 신앙이 되어야겠다.
    • 연지골
    • 사설
    2019-10-23
  • 고소 고발사태 불신사회 조장한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고소 고발 왕국이 되었나! 개인간, 집단간 고소 고발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목사도 고소하고, 스님도 고소한다. 국회도 고발하고 국회의원도 고발한다. 정부도 고발하고 장관도 고발한다. 심지어 정당과 청와대도 고발한다. 사회적 공익을 대변하는 기관들이 고소 고발을 남발한다. 그것도 명예훼손이라며 고소 고발한다. 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 고발은 자제하라고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가볍게 고소 고발장을 내민다. 우리사회의 고소 고발은 문재인 정부 들어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차하면 ‘고소한다, 고발한다’고 어름장을 놓기 일쑤이다. 우리사회에 불신사회가 조성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불신을 해소하려면 많은 시간과 사회적 비용이 들게 될 것이다. ‘가짜뉴스’는 바로 이 불신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어쩌면 우리사회 전체가 이 불신으로 인해 심각한 분열에 빠져들고 있는 듯 하다. 서로간 갈등이 있다해도 정치인은 정치로 해결하고, 종교인은 신앙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신뢰받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더욱이 교회는 교인간에, 또는 교회운영상의 문제로 생긴 사건을 가지고 고소 고발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지금 전국 법원과 검찰과 경찰에 기독교인들 간의 고소 고발건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쌓여 있다. 재산상의 문제가 생겼다면 그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소송할 수 있다. 그러나 명예훼손 운운하며 고소장 들고 가는 교인들은 그리 옳아보이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그보다 더한 명예훼손을 당하고도 '저들이 몰라서 그런다'며 참았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는 명예가 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명예는 지켜져야 한다. 심지어 죽은 자에게도 명예가 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악의적으로 음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솔직히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끝나야지, 그를 처벌해 달라고 고소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물론 악의적 음해를 당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고소 고발하여 법적 다툼을 하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이다. 특히 공익적 목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 연지골
    • 사설
    2019-10-17
  • 개천절 광화문 집회가 보여주는 것
    지난 3일 개천절에 서울 광화문에서 모인 대규모 집회는 역사상 최대집회라고 할 수 있다. 자유한국당(세종문화회관앞), 한기총을 비롯한 시민단체(대교빌딩앞), 한국교회기도연합(대한문앞),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 등 시민단체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동시다발로 ‘문재인 하야’ ‘조국 퇴진’을 외치는 개별집회를 가진 후, 오후 2시경 하나로 합류했다. 인파는 세종대로 경복궁 앞 광화문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남대문을 넘어 서울역까지와 종각에서 서쪽으로 서울역사박물관 앞까지 동서남북 모든 거리를 꽉 메웠다. 이는 200만이 모였다는 1987년 김대중의 보라매공원 집회와, 같은 해 130만이 모였다는 김영삼의 여의도광장 집회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이번 개천절 집회를 두고 여권은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동원집회’라며 폄훼하지만, 사실은 자유한국당의 동원 인원보다 몇 백배 많은 인원이 자발적으로 모여 문재인 정권의 반민주적 행동을 규탄하고, 정권타도를 외쳤다. 이번 집회의 특징은 보수 기독교 세력이 중심이 된 범보수단체들이 앞장서고 보통시민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동안 대정부 정치집회에는 한번도 나선 경험이 없는 보수 기독교 세력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친북좌파들의 반기독교 폄하, 동성애 옹호, 공영방송의 대형교회 비판 등 기독교가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 기독교 세력이 중심이 된 이런 대규모 집회가 언제든지 또다시 열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결국 국민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은 보수 기독교 세력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 솔직히 문재인 정부는 오만한 면이 있다. 역대 정부들은 국민이 반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세력을 최대한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문 정부는 국민이 반대해도 그 여론을 무시하고 자기 지지패만 앞세워 밀어붙이고 있다. 조국 사태는 그 대표적 예에 불과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다. 결국 그 끝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 연지골
    • 사설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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